수다원과 사다함
구나라타나 스님
대념처경 법문
5.3.4 감각적 욕망
<20040804>
열 가지 족쇄(十結) 중의 네 번째는 ‘까마라가’인데 이는 ‘감각적 욕망에의 집착’이란 뜻입니다. 사실은 우리가 다섯 가지 장애(五蓋)를 공부할 때 감각적 욕망이 나왔습니다. 장애로서의 감각적 욕망과 여기에 나오는 족쇄로서의 감각적 욕망의 차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장애의 감각적 욕망은 ‘까맛찬다(kāmacchada)’라고 하는데 이는 ‘감각적으로 뭔가 즐거움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감각적 즐거움은 여러분들이 수행을 하면 이렇게 올라옵니다. 좋아하는 것을 갖고 싶어 하는 어떤 즐거움에 대한 감각적 욕망이 올라오는데, 수행을 하면 그것이 사라지는 것도 또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장애인 감각적 욕망은 일어났다 다시 사라질 수 있는 것이지만, 사라졌다가 또 일어납니다. 또 사라지고 또 일어나고 그 말은 일시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장애가 까맛찬다, 오개에 나오는 감각적 욕망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계속해서 일어난다는 말은 그 뿌리로서 감각적 욕망이 저 깊은 곳에 있기 때문에 없어졌다가도 다시 일어납니다. 그 뿌리가 바로 지금 여기서 말하는 십결 중의 하나인 감각적 욕망인데, 이것의 빨리어는 조금 다른 ‘까마라가(kāmarāga)’입니다. 라가는 풀처럼 착 달라붙는다는 뜻입니다. 즉 ‘착(着)’이라는 말입니다. 감각적 욕망에 계속 달라붙는다는 것이 바로 ‘라가’입니다. 그러므로 저 깊은 곳에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족쇄)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일시적으로 일어나 있는 감각적 욕망(장애)을 없애도 계속 일어나는 것입니다. 뿌리를 없앨 때까지는 일어납니다.
살아있는 동안 우리의 모든 세포 하나하나가 전부 까마라가(집착)와 떨어져서 살 수가 없습니다. 세포 하나하나가 모두 살아있는 동안에는 모두 집착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여러분들이 콘크리트가 좀 깨진 곳에 풀이 악착 같이 싹을 틔워서 살려고 하는 욕망과 마찬가지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살기 위해서 틈을 비집고 살아나오는 욕망. 그래서 우리가 인간으로 모태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우리는 이 집착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이런 욕망 즉 집착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양파 비유를 할 때 가운데 앞의 어머니의 욕망(on), 뒤의 무명의 아버지(on) 사이에 ‘나(I)’가 끼어 있어서 항상 거기서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모든 안이비설신의 그리고 오온에 집착하면서 욕망을 계속하면서 인간이기 때문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욕망은 아무리 그만 두려고 해도 또 일어나고 또 일어나고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아주 멋있는 말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리비커밍(rebecoming), 다시 태어나게 하는 힘, 이로 인해서 우리가 다시 태어난다는 것, 그리고 딴하(taṇhā) 즉 갈애를 바로 까마라가를 대표해서 부처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를 자세히 설명하는 이유는 오개의 장애와 십결에 나오는 족쇄의 차이, 즉 오개는 겉으로 표현된 장애이고, 십결은 저 밑에 깊이 뿌리박은 족쇄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앞의 오개로 돌아가서 보면, 여기는 아주 간단하게 감각적 욕망, 악의, 나태와 혼침, 들뜸, 의심 다섯 가지가 단순하게 나열되어 있습니다. 또한 그것을 주시하는 방법도 보다 단순하게 나와 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수행 도중에 감각적 욕망이 일어나면 “아, 일어났구나.”라고 알고, 사라지면 “아, 사라졌구나.”라고 알고, 그리고 다시 일어나면 “아, 없던 것이 다시 일어났구나.” 그리고 극복했으면 “아, 나는 극복했다.” 이 정도로 여러분이 좌선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하나의 수행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이 됩니다.
그런데 십결에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고 눈이 있고 눈의 대상이 있는데 “그로 인해서 족쇄가 일어나는구나.”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전에는 분명히 없었던 족쇄가 왜 일어났는가? 그것은 바로 눈이 있고 대상이 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방석에 앉아 있을 때 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어딘가 갔을 때, 어떤 물건을 보고 갑자기 어떤 욕망이 생겼습니다. 그 전에는 없었던 욕망인데, 눈이 있고 대상이 있다 보니까 거기서 욕망이라는 족쇄가 그냥 일어났습니다. 그것을 여러분이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라지는 것도 또한 알아차립니다. 그런데 없었던 것이 지금 일어났지요? 그럼 이걸 없애야 되겠는데 어떻게 없앨 것인가? 지금부터 그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열 가지 족쇄, 예를 들어 감각적 욕망이 일어났을 때 없애려면 무엇을 해야 되는가? 부처님께서는 없애는 완전한 방법을 여러분에게 제시해 놓으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여러분의 수행하는 겉모습만 보려고 수행지도 방법을 제시하신 것이 아닙니다. 수행을 통해서 족쇄를 완전히 없애도록 철저한 수행 지도 계획을 짜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배운 다음에는 그 길을 따라서 여러분들이 스스로 수행을 반드시 해야 됩니다. 이처럼 부처님의 수행법은 확고하고 완전합니다.
우선 다섯 가지 장애에서는 일어났다 사라지면 그 자리에서 일시적으로 극복한 것이 되는데, 여기서 열 가지 족쇄 중에 하나가 일어났을 때에는 어떻게 사라졌는가를 봐야 합니다. 어떻게 사라졌는가를 본다는 것은 그 뿌리를 파헤쳐 보는 것입니다. 대나무에 비유한다면 장애는 땅위에 나와 있는 대나무를 자르는 것이 장애를 극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족쇄를 없애는 것은 대나무를 뿌리 채 뽑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완전한 지침, 완전한 길이라는 것은 바로 팔정도의 길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팔정도의 길을 한 단계 한 단계를 모두 이해하고 따라가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우선 제일 앞에 바른 견해, 정견이 나옵니다. 정견이라는 것은 열 가지 족쇄라는 것이 바로 고의 원인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열 가지 족쇄가 있으니까 나에게 고가 생기는구나.”라는 것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것을 이해한 다음,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서 어느 날 여러분들 마음속에 족쇄가 조금 없어졌을 때, 그때 기쁨이 올 것입니다. 조금 없어졌을 때 그 기쁨을 맛볼 때 여러분들은 바로 열반의 작은 일부를 맛보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해서 나중에 팔정도 설명할 때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정견에서 시작하여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직업, 바른 노력, 바른 사띠, 바른 집중, 이 모든 하나하나를 닦아가는 것은 바로 다른 것이 아니라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여러분이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팔정도를 닦아 나갈 때 열 가지 족쇄를 뿌리 채 뽑을 수가 있습니다.
다시 악의를 예로 들어서, 미래에 다시 나타나지 않도록 뿌리 채 뽑는 것이 왜 위빠사나 수행에 중요한 것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악의는 탐심과 치심과 함께 삼독(三毒)이라고 하는 번뇌의 뿌리가 됩니다. 이 세 가지는 장애에도 속하지만 모두 뿌리에 있는 탐진치 이것이 족쇄에 해당하는 탐심과 악의와 무명에 해당합니다. 이 악의 역시 다섯 가지 과정을 거쳐 없애야 합니다.
악의가 뿌리에서 일어날 때에는 세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첫 단계는 아누사야(anusaya) 단계인데 아직 겉으로 나오지 않고 뿌리에 있는 단계입니다. 뿌리에 있을 때 바로 뽑아버리면 표면으로 떠올라서 겉으로 나타나지 않고 없어집니다.
그러나 만약이 이미 표면에 나타나면 빠리윳타나(pariyuṭṭhāna, 顯示) 상태, 일어난 상태인데 그럴 때 일어난 것을 여러분이 잘라야 합니다.
만약에 일어났는데도 자르지 않고 그냥 놓아두면 막 자라는 세 번째 단계, 번져 나가서 그냥 자라는 정도가 아니라 가지를 치고 막 나가는 단계가 됩니다. 이 가지를 치는 단계는 아주 힘듭니다. 그 단계가 되면 바로 업을 짓게 됩니다.
그러므로 제일 처음 아누사야 단계에 있거나 아니면 처음 표면에 올라왔을 때 빨리 손을 써서 그것을 없앰으로써 업으로 번져나가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먼저 뿌리에 있는 것은 사띠를 아주 잘해서 깊숙이 들어가서 그것을 보는 순간에 그것을 없애고, 올라왔을 때도 사띠를 아주 잘 하여 그 자리에서 잘라 버려야 하는데, 그러면 이미 일어난 것은 어떻게 잘라야 할까요? 정정진, 노력의 네 단계 이미 말했지요? 일어나기 전에 미리 그것을 일어나지 못하도록 항상 주의하는 것, 그리고 일어나면 그것을 극복하고, 일어난 좋은 상태는 항상 지켜나가는 그러한 단계적인 노력으로 극복해야 합니다.
팔정도를 매일 한 단계 한 단계 계속 닦고 또 닦고, 항상 깨어 있는 마음으로 괴로움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 원인, 소멸 그리고 적어도 경험은 아니더라도 열반이 어떤 것인가 완전히 이해할 때, 세 번째 의례에 대한 집착을 완전히 없앨 수 있습니다. 의례에 대한 집착을 소멸시킨다는 말은 사회공동체에서 행하고 있는 의례는 고를 소멸시켜서 깨달음으로 나를 이끌어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아는 것입니다. 문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의례에 참가는 하지만 그것에 집착하여 그것이 나를 고로부터 해방시켜준다는 생각으로부터 완전히 떠날 때, 즉 의례에 대한 집착에서 완전히 벗어날 때, 여러분은 수다원의 길에 들어가게 됩니다.
한 가지 여러분이 혼동하지 않도록 다시 한 번 강조하는데, 의례에 집착하는 것과 부처님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예불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부처님께 예불하고 공경하고, 삼보에 귀의하고 삼보를 공경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고 여러분의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고, 여러분이 닦아야 할 길로 나아가게 하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것과 의례에 집착하는 것을 혼동하셔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여러분은 예불할 때 단순히 기복적인 마음을 떠나서, 부처님의 훌륭한 성품들,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가르침을 기억하는 지성을 가지고 아주 깊은 믿음으로 공경하는 예불을 꼭 해야 합니다.
부처님을 공경한다는 것은 여러분이 가르침을 이해하고 실제로 알 때 진정으로 부처님을 공경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부처님을 공경하라는 것, 이것은 언제 어디서나 여러분에게 강조하고 싶은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본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법을 본다는 것은 결국 여러분들이 수행하고 항상 사띠하고 항상 집중하는 것이 바로 부처님의 법을 보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최상승의 지혜를 가지셨고, 최상승의 깨어있는 마음을 가지셨고, 최상승의 자비심을 가진 분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께서는 그것을 항상 잊지 말고 부처님의 법을 따르십시오.
여러분이 여기 있는 열 가지 족쇄 중에 어느 한 가지를 뿌리 채 뽑을 때 여러분은 다른 차원으로 승화된 상태로 들어갑니다. 예를 들면 의례에 대한 집착을 완전히 뿌리 뽑았을 때 수다원(소따빤나, sotāpanna, 예류자)이라는 다른 차원으로 자신이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사리뿟따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리뿟따여, 소따빤나, 소따빤나 하는데, 소따가 무슨 말인지 아느냐?” 그러자 사리뿟따는 “네, 그것은 팔정도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팔정도를 닦는 것이 바로 수다원의 길이라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다시 물으셨습니다. “그러면 수다원은 어떻게 얻는 것인가?” 사리뿟따는 대답했습니다. “열 가지 족쇄 중에 적어도 한 가지를 완전히 뿌리 뽑았을 때 수다원의 과를 얻습니다.” 족쇄를 완전히 제거했을 때 그 사람은 성인이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계속해서 팔정도를 닦으면서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고 계속 위빠사나를 닦음으로써 지혜가 깊어지고 성찰이 깊어질 때, 그때 불법승에 대한 의심이 완전히 타파될 것입니다. 이렇게 의심이 타파되어도 여러분은 수다원의 상태에 들어간 것입니다.
의심이 사라지면 자연히 믿음이 깊어집니다. 믿음이 깊어지면 깊어진 믿음으로 계속해서 되풀이하여 팔정도를 닦고 닦고 또 닦아나가면 어느 한 순간 ‘나(atta)’가 한 순간에 없어져 버립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생각을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팔정도를 계속 닦을 때 한 순간에 ‘나’가 사라집니다. ‘나’가 사라지면 그것은 수다원의 과를 얻었다고 합니다. 네 가지 성인의 단계가 있는데, 들어가는 도(道)가 네 가지, 나오는 과(果)가 네 가지, 그래서 사쌍팔배라고 합니다.
사쌍팔배라는 것은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네 가지 성자가 있는데 처음에 도로 들어가는 것을 하나로 하고, 도를 이룬 사람을 과로 하여 모두 여덟 가지입니다. 부처님께서도 경전에서 도에 들어간 사람과 과를 얻은 사람을 구별하셨습니다. 불자들이 보시를 할 때 도에 들어간 수행자와 과에 들어간 수행자에게 드리는 공양이 다르고 복덕이 다르다고 되어 있습니다. 과에 들어간 분에게 보시하는 것이 더 복덕이 많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도에 들어간 것과 과를 이룬 것은 차이가 있다는 말입니다. 수다원이란 말은 예류자인데, 물이란 것은 흘러가기만 하지 거꾸로 흐르는 법이 없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일단 수다원에 들어가면 언젠가는 분명히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수다원에 들어가기 위해서 열심히 수행하셔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유신견 제거, 의심 극복, 의례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 바로 수다원의 과를 얻는 것인데, 이 세 가지를 완전히 소멸하는 것이 가장 최고의 성취이고 가장 어려운 과정이다. 그리고 수다원에 들어가는 것은 천국에 가는 것보다 더 훌륭하고 이 세상 전체의 왕이 되는 것보다 더 나은 일이다. 왜냐하면 수다원이 된 수행자는 언젠가는 열반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수다원의 비유로 경전에 나오는 말씀이 있는데, 어느 날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내 손톱에 묻어 있는 때와 이 세상의 모든 때와는 어느 것이 더 많으냐?”
“그야 물론 이 세상의 모든 때가 더 많지요.”
“그렇다. 수다원에 들어가는 것은 세상에 있는 모든 때를 없앤 것이다. 이제는 손톱에 있는 때만 없애면 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정도로 아주 어렵고 가장 훌륭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유신견이나 의심이나 혹은 의례에 대한 집착 중에 우선 하나, 한꺼번에 여러 개를 소멸하려고 할 것 없이, 우선 한 가지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것에 여러분들이 집중하고 노력해서 하나를 완전히 소멸시켜서 수다원에 들어가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은 제일 앞에 있는 ‘나’라는 것, 이것은 탐심과 치심 사이에 ‘나(I)’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유신견을 소멸시키고 유신견을 무너뜨리는 순간에 탐심과 치심이 그대로 무너지는 단계입니다. 그것은 굉장히 대단한 순간입니다. 이를 없앰으로 해서 많은 것들이 무너지는 중요한 단계이므로 이를 이해하셔야 합니다.
<040804>
열 가지 장애 중에서 처음의 세 가지인 유신견, 의심, 의례에 대한 집착을 소멸시키면 수다원을 얻는다는 것을 설명 드렸습니다. 여러분들은 항상 깨어 있는 마음으로 수행을 하셔서 우선 한 가지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노력을 하십시오. 그렇게 하시면 출세간의 팔정도를 닦는 것으로 들어갑니다. 팔정도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세간의 팔정도, 다른 하나는 출세간의 팔정도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팔정도를 공부할 때 자세히 설명 드리겠으니, 지금은 두 가지 팔정도가 있는 것만 알아 두십시오.
그러면 수다원을 얻고 나면 어떤 경지가 되는가? 우선 계행이 청정해집니다. 즉 도덕적인 삶이 완전해집니다. 두 번째는 믿음이 청정해집니다. 즉 불법승에 대한 믿음이 그 누가 와서 뭐라고 하더라도 변하지 않고 확고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다섯 가지 최악의 나쁜 행위를 결코 하지 않습니다. 그 다섯 가지는 어머니를 살해하는 것, 아버지를 살해하는 것, 아라한을 살해하는 것, 그리고 부처님을 상해하는 것, 승가에 분란을 일으키는 것, 이 다섯 가지는 중죄에 속합니다. 수다원에 들어간 사람은 결코 이 중에 하나의 죄를 짓지 않습니다. 또한 수다원에 들어간 사람은 다시는 인간 이하의 존재로 태어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짐승으로는 태어나지 않습니다. 야차로는 태어납니다. 이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설명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청정은, 결코 누가 칼이나 총을 가지고 와서 “부처님이 그르다, 불법이 그르다.”라고 해도 “쏠 테면 쏴라.”고 할 정도로 확고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 누가 하라고 해서 온 것이 아니라 수행을 통해서, 확고한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 졌기 때문에 그러한 경지가 됩니다. 불교에서 다른 종교로 옮기는 사람은 아직 이 단계에 오르지 못하여 믿음이 확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금 전에 수다원에서 야차로서는 태어날 수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그 하나의 예는 장부 경에 나오는 빔비사라 왕의 예입니다. 빔비사라 왕은 수다원을 얻었는데 아들이 굶겨 죽었습니다. 그렇게 죽었기 때문에 그는 죽은 다음에 야차로 태어났습니다. 부처님께서 그 야차를 만나서 “누구냐?”고 물으니, 그가 “저를 못 알아보시겠습니까? 저는 빔비사라 왕이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5.3.5 악의
또한 팔정도를 계속 닦으면, 감각적 욕망과 악의가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고 일단 거칠게 나타나는 부분을 줄일 수 있습니다. 그때가 여러분이 사다함의 단계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사다함은 이 세상에 단 한 번만 더 오는 경지입니다. 그리고 더욱더 계속 팔정도를 닦고 닦고 또 닦아서 감각적 욕망과 악의의 거친 부분이 소멸됐을 때가 사다함의 과를 얻는 단계가 됩니다.
사다함의 단계에 들어가면 탐심과 진심의 거친 부분이 소멸된다고 했는데, 거친 부분이란 무엇인가? 예를 들면 재가불자로서 수다원을 얻은 사람은 가정생활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수다원을 얻은 사람은 계를 지켜서 도덕적으로 깨끗한 삶을 삽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계를 지킬 때 성생활의 예를 든다면 계는 지키지만 옳지 않은 성생활은 하지 않으나 가정생활의 욕구는 상당히 커서 그런 것들이 다른 면으로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것이 바로 거친 것이며, 그러한 것이 사라지는 것이 거친 것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악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다원이기 때문에 살생은 하지 않지만 나쁜 의도 그 자체가 완전히 뿌리 뽑히지 않고 그 자리에 있는 경우, 이것이 뽑혀 나갈 때, 그때가 바로 거친 부분이 사라진 것입니다.
감각적 욕망의 또 하나의 예는 먹는 것에 대한 욕심, 식탐입니다. 수다원이 돼도 식탐이 아직 완전히 없어지지 않고 있는 상태입니다. 음식에 계속 집착하는 것은 계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거친 욕망에 해당하기 때문에 사다함에 들어가면 그것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악의의 예를 들면, 화가 많은 사람이 수다원이 됐을 때, 자비심이 부족하여 갑자기 화가 나는 말을 뱉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그런데 이 화라는 것도 계를 안 지킨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계는 지키지만 아직 화는 많이 있습니다. 사다함에 가면 이런 화도 없어지게 됩니다.
내가 탐심과 진심에 관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여러분이 수행을 하실 때 자신의 수행이 진전되는지 아닌지 여기에 비추어 보라는 것입니다. 사다함의 과를 얻은 사람은 죽으면 다음 생에 한 번만 더 태어납니다. 수다원은 일곱 번 더 돌아오지만 사다함은 한 번만 더 돌아온 다음에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팔정도를 닦고 닦고 또 닦은 후에 마침내 미세한 감각적 욕망을 없애게 되면, 그분은 아나함의 도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 진심(악의)의 미세한 부분까지 없어졌을 때 아나함의 과를 얻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