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애경 해설
제1부 자애경 본문
(파트 1: 자애경의 이익)
① 선한 이들이여, 이 자애경의 힘으로, 천신들은 무서운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이 경을 밤낮으로 열심히 독송하고, 자애 명상을 하는 수행자는
편안하게 잠들고, 악몽도 꾸지 않습니다. 이러한 이익이 있는 자애경을 독송합시다.
(파트 2: 자애 명상 전에 갖추어야 할 소양)
② 완전한 평온인 열반에 이르고자 하는, 자신의 이익에 능숙한 이는,
계정혜를 닦아야 합니다. 유능하고 정직하고 고결하며,
가르침을 쉽게 받아들이고, 부드럽고 교만하지 않아야 합니다.
③ 만족할 줄 알아서 남들이 공양하기 쉬워야 하며, 분주하지 않고 생활이 간소하며
감각기관이 고요하고, 성숙한 지혜가 있으며, 불손해서는 안 되고, 사람들에게 집착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지혜로운 이에게 비난받을 작은 허물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파트 3: 자애 명상)
④ 모든 중생들 행복하고 위험이 없기를, 몸과 마음이 행복하고 평화롭기를.
⑤ 살아있는 생명이면 아라한이거나 아라한이 아니거나
길거나 크거나 중간이거나, 짧거나 작거나 비대하거나
⑥ 눈에 보이는 중생이건, 보이지 않는 중생이건,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태어날 일이 끝난 아라한이든, 태어날 일이 남은 유학이나 범부이든,
이 세상 모든 중생들이 행복하기를!
⑦ 어느 누구도 서로 속이지 말고, 어디서나 다른 이를 조금도 무시하지 않으며
몸과 입으로 다른 이를 괴롭히지 않고, 서로서로 다른 이의 고통을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⑧ 어머니가 하나뿐인 자식을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듯,
이 세상의 모든 중생들을 향하여, 한없는 자애의 마음을 닦아야 합니다.
⑨ 온 세상의 위로 아래로 옆으로, 원한도 적의도 넘어선
한없는 자애의 마음을 널리 펼쳐야 합니다.
⑩ 서거나 걷거나 앉거나 눕거나, 깨어 있는 동안 언제 어디서나
자애의 마음을 닦는 삶을 ‘청정한 삶’이라 부처님께서 설하셨습니다.
(파트 4: 위빳사나 수행)
⑪ 삿된 견해에 빠지지 않고, 계행과 지견을 갖추어
감각욕망집착을 제거한다면, 다시는 입태하지 않을 것입니다.
참고자료:
① 위뿔라냐니 스님 옮김, 『난다말라비왐사 큰스님 가르침』, 我無말들 출판사, 2022, 93-146쪽. https://cafe.daum.net/satisamadhi/4vdS/2055
② 비구 일창 담마간다 편역, 『법회의식집』, 한국마하시선원, 2018, 118-123쪽.
③ 망갈라상가, 『빨리어 예불독송집』, 망갈라상가, 2017, 66-69쪽.
④ 식카와디 마나삐까 옮김, 『예경독송문』, 빤디따라마 서울 위빳싸나 명상센터, 2008, 100-109쪽.
⑤ 전재성 역주, 『숫타니파타』, 한국빠알리성전협회, 2004, 134-137쪽.
제2부 자애경 해설
1. 서론
자애경은 11가지 보호경 중의 하나인데 대부분의 미얀마 불자들이 매일 독송하는 경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매일 독송하는 불자들이 모두 자애경의 뜻을 정확히 알고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자애경에 대해 간략히 설하겠습니다.
대부분의 미얀마 불자들은 자애경을 독송하고, 경청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고들 있는데, 자애경의 내용을 공부해 보면 독송하라는 말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독송하지 말아야 하느냐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독송해야 합니다. 듣지 말아야 하느냐 하면, 아닙니다. 들어야 합니다. 어떤 경이건 독송하고, 경청한 이익은 분명히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보호경들이 힘을 발휘하는 원동력은 ‘자애’이거나 ‘진실’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핵심입니다. 위험을 막아낼 때, 자애를 이용하여 막아내는 방법 그리고 진실을 이용하여 막아내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방법을 이용하여, 중생들이 보호받고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보호경을 설하셨습니다.
자애라는 법은 독송해야 하는 법이 아닙니다. 증장시키고 실천해야 하는 법입니다. 자애는 명상(수행)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위빳사나 수행하는 것만을 명상이라고 여기는데, 자애 명상을 하는 것도 수행입니다. 사마타 수행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자애경은 독송만 하거나, 경청만 하는 경이 아닙니다. ‘매일 독송하고, 경청하면 위험에서 멀어진다.’ 이런 말은 자애경 안에는 단 한 줄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이렇게 믿고 있습니다. 모곡 사야도의 말씀을 빌리자면 우리들은 먹어야 하는 약을 바르는 약으로 알고 바르기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먹어야 효과가 나타나는 약을 바르기만 하고 있으면 이 약효가 미약할 것은 당연합니다. 복용약은 복용해야 약효가 드러나는 것이 당연합니다. 자애란 수행으로 증장되어야 하는 법이라고 분명히 알고 수행해야 합니다.
자애란 몸으로 하는 자애, 말로 하는 자애, 마음으로 하는 자애 세 가지가 있습니다.
길 가면서 길가의 쓰레기, 가시덤불이 눈에 보이면 지나는 행인의 발에 차일까 봐, 가시덤불에 찔릴까 봐 치워 주는 것도 자애입니다. 대중이 편안하고 행복하길 바라며 길을 비질하는 것도 자애입니다. 절에 지네가 들어온 게 보이면 빗자루로 쓸어버리는 것 역시 자애입니다. 이는 몸으로 하는 자애입니다.
자애를 말로 나타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말로 표현할 때 ‘중생들이 행복하기를, 중생들이 건강하기를’ 이렇게 말로써 자애를 보낼 수 있습니다. 이런 자애를 말로 하는 자애라고 합니다. 이보다 더 효과적인 말로 하는 자애는 서로서로 대화할 때, 정말 자애의 마음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나쁜 마음으로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험담하지 않습니다. 상대가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좋은 아이디어, 좋은 지혜를 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말로 하는 자애라고 합니다.
마음으로 짓는 자애란 수행해서 자애의 마음을 증장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2. 자애경 상설
2-1 자애경의 이익(게송 ①) 2-2 자애 명상 전에 갖추어야 할 소양(게송 ②&③) 2-3 자애 명상(게송 ④~⑩) 2-4 위빳사나 수행(게송 ⑪) |
2-1 자애경의 이익(게송 ①)
① 선한 이들이여, 이 자애경의 힘으로, 천신들은 무서운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이 경을 밤낮으로 열심히 독송하고, 자애 명상을 하는 수행자는 편안하게 잠들고, 악몽도 꾸지 않습니다. 이러한 이익이 있는 자애경을 독송합시다.
여기까지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자애경을 독송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도록 후대의 사야도들께서 덧붙인 내용입니다. 자애경의 이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1) 행복하게 잠든다.
2) 행복하게 깨어난다.
3) 악몽을 꾸지 않는다.
4) 천신들이 보호한다.
5) 선한 이들의 사랑을 받는다.
6) 무기와 독의 해를 입지 않는다.
7) 하는 일이 잘 마무리된다.
8) 얼굴이 맑고 깨끗하다.
9) 평화로운 마음으로 지낸다.
10) 죽을 때 청명한 정신으로 죽는다.
11) 죽은 뒤에는 범천계에 태어난다.
이렇게 자애 명상의 이익 11가지를 설명하십니다.
자애경의 힘으로 천신들도, 도깨비들도, 어떤 중생들도 두렵고 끔찍한 것을 보여 주지 않는다. 위협을 줄 수 없다.
이 자애 명상을 끊임없이 열심히 한다면
행복하게 잠든다.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나쁜 꿈을 꾸지 않는다.
이러한 이익이 있는 자애 명상을 하는 방법을 자애경에서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2-2 자애 명상 전에 갖추어야 할 소양(게송 ②&③)
자애경을 독송할 때, 뜻을 이해하고 독송하여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단지 암기하고 있기 때문에 독송합니다. 그 사람의 마음에 자애의 마음 없이 소리만 내고 있기도 합니다. 자애의 마음을 갖추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자애 명상을 열심히 하기 위해 필요한 소양들을 부처님께서 먼저 설하십니다.
②-1 완전한 평온인 열반에 이르고자 하는, 자신의 이익에 능숙한 이는, 계정혜를 닦아야 합니다.
평화로운 열반의 공덕을 떠올리며 지내고 싶다면, 지계에 흠이 없도록, 삼매가 충분하도록, 그리고 지혜가 가득 차도록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 하는데 보통사람들은 잘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이익에 능숙한 이’들만이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 자신의 이로움과 번영을 꾀할 줄 모릅니다. 이런 이들은 손해 볼 일만 하고 삽니다. 예를 들자면 알코올중독자들은 술 마시는 일이 자기 자신에게 이롭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손해 볼 일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추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일이 번영과 행복을 가져오는 것이 아닙니다.
경전에 ‘우물을 파는 이는 파면 팔수록 아래로 내려간다. 담을 쌓는 이는 일을 하면 할수록 점점 올라간다.” 고 예를 들었습니다. 우물 파는 이는 우물이 깊어질수록 점점 더 낮아져 갑니다. 어떤 일은 우물 파는 일과 같습니다. 이처럼 점점 퇴보하는 일을 하는 이는 ‘자신의 이익에 능숙한 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하는 일이 자신에게 도리어 고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아래로 내려가게 합니다. 이런 이들이 세상에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담을 쌓는 일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위로 올라갑니다. 담이 높아질수록 자신도 올라갑니다. 이런 예처럼 스스로를 내려가지 않고 고귀해지도록 할 때 비로소 ‘자신의 이익에 능숙한 이’가 됩니다.
그래서 생에서 유익하고 평화롭게 살고 싶다면 해야 할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어떤 소양이 필요할까요? 자애 명상과 관련하여 요구되는 소양을 부처님께서 계속해서 설하십니다.
②-2 유능하고 정직하고 고결하며, 가르침을 쉽게 받아들이고, 부드럽고 교만하지 않아야 합니다.
능력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성공하는 이의 조건 5가지’ 중에서 처음 4가지가 능력 있는 자를 설명합니다. 첫째,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확신을 갖는다. 둘째, 건강하다. 셋째, 열심히 노력한다. 넷째, 자기가 하는 일을 숙고하며, 개선하기 위한 궁리를 쉼 없이 한다. 이런 조건들을 갖춘 이를 능력 있는 자라 부를 수 있습니다.
이런 소양들이 자기 자신 안에 있는가? 아직 없다면 생기도록 연습해야 합니다.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몸으로 하는 운동도 연습할수록 능숙해집니다. 걷는 것도 반복 연습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축구도 연습하면 됩니다. 다른 스포츠도 반복 연습에 의해 노련해집니다. 연습을 반복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음도 대상과 연결 지어서 반복 연습해야 합니다. 처음엔 어렵지만 연습하다 보면 나중엔 쉬워집니다. 그렇게 해서 능력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곧은 이(우주우. 정직한 이)가 되어야 합니다. 곧은 이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가? 미얀마에서는 정직한 사람을 ‘바보’라는 뜻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곧은 이란 앞과 뒤가 다르지 않은 사람, 속이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성공하는 이의 조건 5가지’ 중 마지막 항목이 정직한 사람에 대한 설명입니다.
정직한 사람은 첫째, ‘자신에게 없는 공덕을 있는 것처럼 하지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과장하고 부풀려서 자랑하는 것, 타인이 과대평가하도록 없으면서 있는 척하는 것, 내게 돈이 없는데 돈이 있는 척하는 것, 지혜가 없으면서 지혜 있는 척하는 것, 계를 안 지키면서 게를 지키는 척하는 것, 이런 것들을 삼가야 합니다.
둘째, ‘자신이 지은 허물(불선업)을 없는 것처럼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게 없는 것은 없는 것일 뿐입니다.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하면 됩니다. 이 두 가지를 유념해 곧고 정직한 이가 되어야 합니다. 수행하는 이가 정직하지 않으면 삼매가 없는데도, 삼매가 있다고 보고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면 스승이 무슨 수로 그 수행자의 현재 상태를 알겠습니까? 인터뷰를 할 때, 정직해야 합니다.
매우 곧아야 합니다(수우주우). ‘우주우’는 행위와 말이 정직하다는 의미입니다. ‘수후주우’는 마음까지 곧다는 뜻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매우 곧아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몸, 말, 마음까지 정직하고 곧은 이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곧고 바름이 없다는 것 자체가 자애의 파괴를 의미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곧음과 정직함이 없다면 그 마음 안에 자애를 지니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타인에게 자애를 보내기도 아주 어려워집니다. 다른 이들도 그 사람에게 자애를 보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우주우 : 정직해라’, ‘수후주우 : 매우 정직해라’라고 말하시는 것입니다.
‘가르치기 쉬운 사람(수와쪼)’
충고해 줄 때, 아이디어를 제시할 때, 가르치기 쉬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고집 세지 않아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황소처럼 아주 고집이 셉니다. 누가 말해도 듣지 않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자애를 베풀기 어렵습니다. ‘이 사람은 고집이 세군.’ 하고는 한두 번 말해보고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습니다. 그냥 내버려 둡니다. 버려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이를 때, 충고할 때, 가르치기 쉬운 사람(수와쪼)이 되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르치기 쉬운 사람을 더 좋아합니다. 선우들도 이 사람은 말하면 잘 듣는다고 더 아낍니다. 그렇지 않고 ‘저 사람은 말해도 안 돼’라고 하면 자애가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자애를 받고, 자애를 주기 위해서는 가르치고, 타이르기 쉬운 사람(수와쪼)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아이디어를 주면 그 생각이 맞는지, 아닌지 스스로 사고해볼 줄 알아야 합니다. 생각해보고 받아들일 만한 것은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으면 버리면 됩니다. 이러한 ‘수와쪼’ 공덕으로 가득 차야 한다고 합니다. 이러지 않고, 충고를 해주는데, 시비를 따지며 달려들면 서로 간에 자애가 파괴됩니다. 자애가 말라 버립니다.
부드럽고 섬세해야 합니다. 서로 대화할 때 예의를 지켜야 합니다. 무례하면 다른 사람들의 미움을 받습니다. 내가 무례하면 주변 사람들이 미워합니다. 이런 경우 어떻게 자애의 마음을 키울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섬세함, 예의 바름도 중요한 조건입니다.
지나친 교만이 없어야 합니다. 여기서 부처님께선 ‘교만하지 않아야 한다.’고 설하지 않으시고, ‘지나친 교만이 없어야 한다.’는 의미로 설하십니다. 교만이란 있으면 좋은 교만과, 있어선 안 되는 교만 두 종류가 있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과장하는 것은 있어선 안 되는 교만이라고 합니다. 배움에 있어서 ‘그런 사람조차도 하는데, 나도 잘 하도록 해야지’, 이런 생각은 있으면 이로운 교만입니다. 이런 교만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사업에 관련해서도 ‘그런 사람도 성공했는데, 나도 성공하도록 해야지.’ 수행하는 일에 있어서도 ‘그 사람도 해냈는데, 나도 할 수 있어. 그런 분도 아라한이 되었는데, 나도 되어야지.’ 이런 종류의 교만이 바람직한 교만입니다.
보디삿따이신 ‘수메다 존자’는 교만이 있어서 부처님이 되신 것입니다. 만약 그때 교만이 없었다면 부처님이 될 수 없었습니다. 왜 이 말을 하는가 하면 ‘디빵까라 부처님’을 친견하실 때 보디삿따의 능력은 이미 완성되어 있었습니다. 선정과 신통이 모두 갖추어져 있었습니다.그때 ‘디빵까라 부처님’으로부터 주제를 받아서 수행을 하셨다면 아라한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처럼 출중한 인간이 나 혼자만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나 스스로 부처님이 되어 중생을 구제해 줄 것이다. 바른 법을 내가 직접 설하리라. 다른 이가 설한 법을 듣고 아라한이 되어, 나 혼자만 탈출하는 자는 되지 않으리라.”라고 맹세하십니다. 이것은 바람직한 교만입니다. 이 바람직한 교만으로 인하여 부처님이 됩니다.
하지만 경전에는 자비를 원인으로 성불한다고 합니다. 자비가 분명 필요합니다. 하지만 ‘디빵까라 부처님’을 친견한 그 순간 생겨난 “나도 부처님이 되도록 하겠다.” 하는 서원은 교만이 아주 크게 원인으로 작용한 것입니다.
이로움이 없는 아주 큰 자만을 가진 이는 어르신들조차도 업신여깁니다. ‘내가 가장 똑똑하다, 내 위에 없다’라고 생각합니다. 학식이든, 재산이든, 용모이든 명예이든 이런 것들에 대하여 거만해선 안 됩니다. 거만하면 주변 사람들이 그를 기피합니다. 미운 마음이 있으니 자애가 생겨나기는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교만이 지나치면 안 됩니다.
③-1 만족할 줄 알아서 남들이 공양하기 쉬워야 하며, 분주하지 않고 생활이 간소하며
감각기관이 고요하고, 성숙한 지혜가 있으며, 불손해서는 안 되고, 사람들에게 집착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다음은 ‘있는 것에 만족함(산뚯사꼬)’입니다. 있는 것에 만족한다는 것은 까다롭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이들은 입맛이 까다롭습니다. 좋아할 것을 요리해 줘도 싫어합니다. 신맛을 요리해 줘도 아니라고 합니다. 자기에게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자기 것에 만족하지 못하다 보면 타인의 것을 원하게 됩니다. 이것도 위험합니다.
자신에게 있는 것에 만족해야 합니다. 자신의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남의 것을 탐낸다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쉽게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산뚯사꼬). 그렇다고 발전을 위해 노력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발전하도록 하는 것과, 까다로운 것은 다릅니다. 까다로우면 요리해 주는 사람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 반찬 해라, 저 반찬 해라 하면 부엌에서 싸움 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는 자애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있는 것에 만족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산뚯사꼬 : 있는 것에 만족하는 것, 자기 것에 만족하는 것’ 이 소양은 매우 중요합니다.
‘남들이 공양하기 쉬워야 하며(수바로오)’
먹여 살리기 쉬워야 합니다.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먹여 살리기 수월해야 합니다. 남이 나를 돕고 보호해 줄 때도, 쉽게 만족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스스로를 먹여 살리기 쉽다는 뜻은 ‘무엇을 해서 먹든지 만족해야 한다. 있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이는 먹여 살리기 어렵습니다. 자기 혼자서도 싸우고 있는 이가 있습니다. 아마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만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도 뜻대로 되질 않습니다. 남이 해주는 것도 마음에 안 듭니다. 이렇게 되면 자애가 생겨날 리 만무합니다. 그러므로 ‘수바로오 : 남들이 공양하기 쉬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분주하지 않고(압빠낏쪼)’
자애를 증장시키려면 안 해도 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일이 적어야 합니다. 자애를 증장시키기 위한 시간을 많이 가지기 위해서는 일이 적어야 합니다. 인간 사회에서는 해야 할 일이 아주 많습니다. 하지만 이 바쁜 와중에 시간을 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안 해도 되는 일을 많이 하며 살기도 합니다. 그런 일을 하지 마십시오. 꼭 해야 하는 일만 하고, 남은 시간에는 자애 명상을 하고 자애를 실천하는데 시간을 써야 합니다. 해야 하는 일을 하지 말라는 건 아닙니다.
‘생활이 간소하며(살라후까웃띠)’
단순하게 살아야 합니다. 근사하게, 화려하게 사는 이들은 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먹을 때도 근사하게, 화려하게 먹는 이들은 해야 할 일들이 더 많아집니다. 단순하게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단순한 삶이여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부자이면서도 한평생 검소하게 삽니다.
③-2. 감각기관이 고요하고, 성숙한 지혜가 있으며, 불손해서는 안 되고, 사람들에게 집착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감각기관이 고요해야(산띤드리요)’합니다. ‘산띤드리요’는 ‘산따(고요)’ + ‘인드리요(감각기관)’라는 의미 즉 감각기관이 고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감각기관은 눈, 귀, 코, 혀, 몸, 마음입니다. 사람들의 의식 안에서 눈으로 보고 탐욕이나 성냄이 생기면 고요하지 못합니다. 여기저기 두리번거리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마음에서 탐진치가 생기지 않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눈으로 볼 때 탐욕이나 성냄이 생기면 감각기관이 고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 볼 때 탐욕이나 성냄이 생기면 감각기관이 고요하지 못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고 화를 냅니다. 원합니다. 귀로 듣고 짜증냅니다. 갈구합니다. 코로 냄새 맡고, 화내고 욕심을 부립니다. 혀로 맛보고 화를 냅니다. 원합니다. 몸으로 접촉하고 화를 냅니다. 더 원합니다. 상상하고 기억하는 것만으로 화가 납니다. 이런 식으로 성냄이 생긴다면 이건 감각기관이 고요하기 때문입니다. 가능한 한 감각기관이 고요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감각기관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성숙한 지혜가 있으며(니빠꼬)’
지혜가 무르익도록 정진해야 합니다. 법과 관련된 지혜가 무르익도록 노력할 것이 요구됩니다. 그렇다면 지혜란 어떤 방법으로 얻을 수 있는가? 법문을 듣고도 얻어집니다. 들은 법문을 숙고해 봄으로써도 얻어집니다. 실제로 실천하는 위빳사나 수행을 통해서도 얻어집니다.
세 가지 지혜 문혜(聞慧. 수따마야냐나): 법문을 듣거나 책을 읽어서 생기는 지혜. 사혜(思慧. 찐따마야냐나): 타인으로부터 전혀 듣지 못했지만 자신의 지혜로 생각해서 생기는 지혜. 법에 관련해서는 보디삿따 정도만이 사혜가 있다. 수혜(修慧. 바와나마야냐나): 법문을 듣고 실제로 수행해서 생기는 지혜. |
이런 식으로 노력해야 성숙한 지혜가 생깁니다.
불손해서는 안 되고(압빠갑보오): 거칠거나 거세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집착하지도 말아야 합니다.(꿀레스와나누깃도)
‘꿀레스와나누깃도’ = 꿀레수(kulesu. 신도들에게) + 아나누깃도(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ananugiddho)
지금부터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수행자들이 가끔 잘못하기도 합니다.
③-3 지혜로운 이에게 비난받을 작은 허물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혜로운 이로부터 비난 받을 만한 일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때 아주 사소한 허물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나쁜 이들이 하는 일을 하며 산다면 위험이 내게 닥쳐올 것인데 어떻게 내게 자애가 생기겠습니까? 나 자신도 타인에게 자애를 보내기 어렵습니다. 자애란 타인의 자애, 나의 자애 서로서로 주고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도 부처님께서 주의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이들에게 비난받을 만한 작은 허물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여기까지가 ‘미리 갖추고 있어야 할 소양’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자애 명상을 시작하기 전에 앞에 설명한 것들이 갖추어져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런 소양이 자기 자신에게 생기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소양이 갖추어져 있어야 자신이 하는 일이 성공할 수 있다고 합니다. 세간의 일을 보십시오. 소양이 갖추어지도록 먼저 배워야 합니다. 그 뒤에 기술을 가르쳐 줍니다. 소양을 갖추지 못한 채 재주를 익히면 어떤 일도 성공할 리 없습니다.
2-3 자애 명상(게송 ④~⑩)
이렇게 해서 소양 설명이 끝났습니다. 이제 자애를 증장시키는 방법과 관련하여 설하십니다.
④ 모든 중생들이 행복하고 위험이 없기를, 몸과 마음이 행복하고 평화롭기를.
자애 명상을 한다면 이렇게 혹은 이런 의미가 있는 말로써 자애를 보내는 것입니다.
‘모든 중생들이 행복하고 위험이 없기를, 몸과 마음이 행복하고 평화롭기를.’
이런 마음이 항상 생기도록 하는 것을 수행이라고 합니다. 한 번만 생기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 1초 생겨납니다. 다시 두 번째 1초, 다시 세 번째 1초, 헤아릴 수없는 많은 초 동안 생기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애의 마음이 자신 안에서 계속 생기도록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훈련시켜 “모든 중생에게” ‘행복하기를’ 또는 ‘위험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을 증가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애의 대상을 점점 더 넓혀 가야 합니다. 자신의 주변에 먼저 보냅니다. 그리고 모든 중생들에게 가리지 않고 보내는 것입니다.
⑤ 살아있는 생명이면 아라한이 아니거나 아라한이거나, 길거나 중간이거나 짧거나, 작거나 비대하거나
여기서는 중생의 종류에 따라서 자애 명상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앞에서는(게송 4) 모든 중생을 하나로 보고 자애 명상을 했습니다. 여기서는 지구 위에 사는 인간뿐만 아니라, 인간이 아닌 중생들 수천 수백만 마리를 대상으로 봅니다. 생명이 있는 중생 모두, 육지에 있는 중생이든, 물속에 사는 중생이든, 하늘을 날아다니는 중생이든, 생명 있는 모든 중생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예 께찌 빠아나부우땃티(Ye keci pāṇabhūtatthi)’는 ‘그 어떤 중생들’이라는 의미인데 여기서는 ‘살아있는 생명이면’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이후부터는 중생들을 종류에 따라 둘 혹은 세 부류로 나누어 자애를 보냅니다.
‘Tasā(따사아)’는 ‘두려워하는, 깜짝 놀라길 잘하는 중생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에는 범부들과 유학들(수다원, 사다함, 아나함)이 포함됩니다. 이들에겐 성냄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타아와라아(thāvarā)’는 다시 태어날 생이 없는 성자인 아라한을 의미합니다. ‘따사아’와 ‘타아와라아’를 합치면, ‘두려워 떠는 중생들도 행복하기를, 두려움과 떨림에서 벗어난 아라한들도 행복하기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중생을 세 가지로 나눕니다.
길거나 크거나 중간이거나, 짧거나 작거나 비대하거나
중간인 중생은 길지도 짧지도 않은 중생입니다. 긴 중생이란 뱀처럼 길이가 긴 중생입니다. 사람들 중에도 키가 큰 사람도 있고, 작은 사람도 있고 중간인 사람도 있습니다. 이처럼 ‘길거나 크거나 중간이거나, 짧거나 작거나 비대한 중생 모두에게 행복하고 건강하기를…’이라고 자애를 보내야 합니다.
어떤 중생들은 개미나 진드기처럼 작습니다. 코끼리처럼 큰 덩치의 중생도 있습니다. 작지도 크지도 않은 중간인 중생도 있습니다. 이렇게 중생을 크기에 따라 세 종류로 나누어 ‘크건 작건 중간이건 모두 행복하고 건강하기를…’이라고 자애 명상을 하는 것입니다.
⑥ 눈에 보이는 중생이건, 보이지 않는 중생이건,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태어날 일이 끝난 아라한이든, 태어날 일이 남은 유학이나 범부이든, 이 세상 모든 중생들이 행복하기를!
내 눈에 보이는 중생이 있듯이, 보이지 않는 중생도 있습니다. 두 가지 모두 매우 많습니다. 나로부터 멀리 있는 중생이든, 가까이 있는 중생이든, 자애를 보내야 합니다. ‘멀리서 살든, 가까이서 살든 모든 중생들이 행복하기를…’이라고 자애를 펼쳐야 합니다.
여기서는 ‘부우따아(Bhūtā)’라는 중생과 ‘삼바웨시이(sambhavesī)’라는 중생 두 종류로 나뉩니다. ‘부우따아’는 다 자라서 분명하게 모양을 갖춘 중생입니다. 입태된 지 얼마 안 되어, 사지가 다 갖추어지지 않은 중생을 ‘삼바웨시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아직 병아리가 되지 않은 달걀 안에 있는 중생이면 ‘삼바웨시이’ 단계입니다. 닭으로 태어났으면 ‘부우따아’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중생을 ‘부우따아’와 ‘삼바웨시이’ 두 가지로 나눕니다. 혹은 아라한을 ‘부우따아’라고 합니다. 이때 ‘삼바웨시이’란 범부인 중생들,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는 중생들을 의미합니다. ‘태어날 일이 끝난 아라한과 태어날 일이 남은 유학이나 범부가 행복하기를…’ 이라고 자애를 보내는 것입니다.
자애를 증장시키는 것은 중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입니다. 어떤 중생에게든 자애 명상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행복하기를…’이라는 단어 외의 다른 표현을 써서 할 수도 있습니다. 게송7에서는 다른 표현을 써서 자애 명상을 합니다.
⑦ 서로 속이지 말고, 어디서나 다른 이를 무시하지 않으며, 몸과 입으로 다른 이를 괴롭히지 않고, 서로서로 다른 이의 고통을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 서로서로 속이며 삽니다. 한 사람이 와서 거짓말하고 사기를 칩니다. 이런 일을 당하면 피해자들은 마음이 괴롭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자애 명상을 할 때도 ‘서로 속이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정직해야 한다.’ 이렇게 자애 명상을 해야 합니다.
그 누구도 어떤 이유로든지 업신여기지 마라.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며 과소평가하기도 합니다. 학식이 부족해서든, 가난해서든, 자기 직업에 능숙하지 못해서든, 무시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습니다. 어떤 일로든 누구이든 업신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업신여김 당하는 사람은 참으로 견디기 어렵습니다. 자애의 마음이 말라 버립니다. 다시 자애로운 사람이 되기 힘들어집니다. 무시하는 사람도 자기 자신에 대한 자애가 없기 때문에 무시하는 것입니다. 업신여기는 것은 두 사람 사이에 자애가 파괴될 원인이 되기에 이런 일들이 없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에서 서로 간에 무시하는 경우는 절대 있어선 안 됩니다. 학식과 관련해서든, 경제력 때문이든 어떤 이유로든 ‘어디서나 다른 이를 무시하지 않으며’ 라고 자애를 보내야 합니다.
서로서로 다른 이의 고통을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고통을 생기게 하지 마라. 세상에 한 인간이 고통에 빠져 있는 걸 보며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고통에 빠지도록 해야지.’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누군가를 고통에 빠지도록 하겠다.’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매우 저급한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을 제거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미워해서이든, 어떤 이유로든 서로를 고통에 빠지도록 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군가의 죽음을 바라선 안 됩니다. 중생들에게 자애의 마음을 보내야 합니다.
이 시대에는 테러가 생겼습니다. 이런 이들은 사람들이 고통에 빠지도록 합니다. 누가 죽든 상관 않고 죽이는 무리들입니다. 매우 무서운 일입니다. 이것은 자애가 마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람들은 지구의 온도가 오르고 있는 것만 압니다. 세상의 자애가 마르고 있는 것은 모르고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 안에 자애가 메말라서 화가 불타오르고 있음에 주의해야 합니다. 지구가 뜨거워지는 것을 해결하고자 회의를 개최하는데, 누구도 마음이 말라가는 일에 대해선 말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불타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평화롭고 시원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자애의 마음을 자신 안에 생기게 해야 한다고 부처님께서 설하시는 것입니다. 자애 명상의 의미는 매우 좋습니다. 독송할 때 이 뜻을 새기면서 독송해야 합니다. 그리고 직접 실천해야 합니다. 우선 뜻을 안 다음에 실천해야 합니다.
⑧ 어머니가 하나뿐인 자식을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듯, 이 세상의 모든 중생들을 향하여, 한없는 자애의 마음을 닦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이번에는 사람들이 자애의 특성을 이해하도록 설명하셨습니다. 외아들을 가진 어머니는 그 아들을 어떻게든 보호하려 합니다. 자신의 목숨은 개의치 않고 아들을 살리려 합니다. 이런 것을 목숨을 던져 보호한다고 합니다. 아이를 향한 어머니의 자애가 얼마나 큽니까? 이처럼 큰 자애를 모든 중생들에게 보내라고 합니다. 한없는 자애를 모든 중생에게 보내라.’ 고 합니다.
⑨ 온 세상의 위로 아래로 옆으로, 원한도 적의도 넘어선, 한없는 자애의 마음을 널리 펼쳐야 합니다.
온 세상에 그런 마음을 보내도록, 방향으로 말하자면 ‘위에 있든 아래에 있든 어디에 있든 세상에 있는 모든 중생들이 행복하기를…’ 이렇게 자애의 마음을 증장시켜야 합니다.
좁은 마음을 가지지 않아야 합니다. 자애의 마음은 매우 광활한 마음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자애를 보내고 저 사람에게는 자애를 보내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모든 중생에게 고르게 자애를 보내야 합니다.
적이 없어야 합니다. 자애에 적이 없어야 합니다. 자애경에서 이 부분이 아주 중요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위험 없이 살고 싶어 합니다. 적이 없이 살고 싶어 합니다. 여기서 적이란 무엇을 말하는지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적을 외부 중생으로만 봅니다. 그래서 바깥에서 오는 적만 막으려 합니다. 하지만 바깥의 적은 내게 올 수도 있고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정말로 내게 다가와서 나를 위태롭게 하는 사람도 이번 생에서만 해를 끼칠 뿐입니다. 진정 무서운 것은 자신의 마음 안에 있는 성냄이라는 적입니다. 외부의 원수는 부부가 이혼하도록 하기 어렵습니다. 내부에 있는 미움이라는 원수는 이혼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 미움이라는 성냄이 원수임을 사람들은 모릅니다. 마치 자기 자신인 양 한평생 가슴 안에 품고 지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냄을 자랑하기조차 합니다. ‘내가 한 성깔하지’라고 스스로 자랑하기도 합니다. 나의 진짜 원수는 내 안의 성냄입니다. 자신의 가슴 안에 있는 미움이라는 적이 없도록(아웨라)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원수로부터 멀어지도록 자애의 마음을 증장시켜야 합니다. 언제 증장시키는가 하면,
⑩ 서거나 걷거나 앉거나 눕거나, 깨어 있는 동안 언제 어디서나, 자애의 마음을 닦는 삶을 ‘청정한 삶’이라 부처님께서 설하셨습니다.
서 있는 동안에도 자애 명상을 해야 합니다. 걷고 있는 동안에도 자애를 증장시켜야합니다. 앉아 있는 시간에도 자애의 마음을 가지고 앉아 있어야 합니다. 누워 있는 시간, 아직 잠들지 않은 시간에도 자애를 증장시켜야 합니다. 네 가지 자세 중에 어떤 자세에서건 자애가 자신의 마음에 생기도록 해야 합니다.
자애의 마음을 가지고 있어라. 이 자애를 밥할 때도 지니고 있고, 직장에서도 이 마음으로 일하라. 모든 중생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으라고 합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청정한 삶(브라흐마 위하아라)’이라고 부릅니다. 청정한 삶은 불법 안에서 가장 고귀하게 사는 방법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게송 ④~⑩) 자애 명상이 끝났습니다. 부처님께서 어떤 시간에 자애 명상을 해야 하는지 하는 방법까지 상세히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이는 ‘모든 중생들이 적이 없기를’이라고 자애 명상을 독송하고 잠들면 끝이라고 여깁니다. 자애의 마음이란 거듭해서 생기도록 해야 합니다.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들숨 날숨을 쉬듯이 자애의 마음도 자신의 마음 안에 계속해서 생기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애 수행입니다.
자애 수행으로 선정도 얻을 수 있습니다. 자애로 선정을 얻으려면 어떤 사람 한 명에게 집중해서 해야 합니다. 그 뒤에 자애의 대상을 늘려 가는 것입니다. 자애 명상의 목적에는 선정을 얻는 것과 단지 선업을 지으려고 하는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선정을 얻기 위해 자애 명상을 할 때는 이성을 대상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남성은 남성에게만, 여성은 여성에게만 자애를 보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자애와 가장 가까운 적이 집착입니다. 남성이 여성을 향해 집중적으로 자애를 보내면, 또는 여성이 남성을 향해 몰입해서 자애를 증장시키면 심경의 변화가 생길 수 있습니다. 이성 간에 집중적으로 자애를 증장시켜서는 안 됩니다. 한 명에게 집중적으로 자애 명상을 한다면 남성은 남성에게, 여성은 여성에게만 해야 합니다. 그 사람의 사진을 보고 하든지, 마음속으로 그 사람의 모습을 떠올려서 하든지 ‘그가 행복하기를…’ 이런 마음을 1) 한 시간이 채워지도록, 2) 두 시간이 되도록, 3) 세 시간이 되도록, 4) 네 시간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 마음이 삼매를 생기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에게 생긴 자애의 마음이 얼마나 한없이 확장되는가 보겠습니다.
1. 자기 자신
2. 자신과 친한 친구
3. 자신과 맞지 않는 사람
4.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않는 불특정한 사람
사람을 이렇게 네 종류로 나누었을 때, 이 네 사람의 구분이 없어집니다. 나 자신을 우선시하지 않습니다. 나와 친한 친구라고 더 배려하지 않습니다. 내가 모르는 사람이라고, 나의 원수라고 따로 차별하지 않습니다. 이 네 사람이 한 사람처럼 되면 이 자애가 아주 견고한 자애가 된 것입니다.
2-4 위빳사나 수행(게송 ⑪)
이렇게 자애를 증장시켜서 자애의 기초가 다져졌다면 위빳사나 수행을 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자애경에서 아라한까지 될 수 있도록 법문을 설하셨습니다.
자애 명상도 명상법 중의 하나입니다. 이 사마타 수행법에서 위빳사나 수행으로 넘어간다면 대상을 바꾸어야 합니다. 자애 명상으로 자애의 마음을 증장시키는 것은 중생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위빳사나는 중생을 대상으로 해선 안 됩니다. 중생이 있다고 여기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견해 중의 하나입니다. 이것을 유아견이라고 부릅니다. 자애 명상은 중생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중생이 있다는 견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견해를 제거해야 합니다. 제거한다는 것은 몸과 마음 두 가지만을 대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⑪ 삿된 견해에 빠지지 않고, 계행과 지견을 갖추어 감각욕망을 제거한다면, 다시는 입태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자애를 보내는 이도 몸과 마음만 있을 뿐, 자애를 보내는 나도 몸과 마음만 있을 뿐입니다. 유아견을 제거해 버려야 합니다. 중생이란 없습니다. 이 관념을 없애지 않고는 위빳사나를 할 수 없습니다. 위빳사나의 대상은 몸과 마음뿐입니다. 중생이 아닙니다. ‘유아견을 뽑아 버려라’는 뜻은 ‘몸과 마음을 볼 수 있도록 관찰하라’는 뜻과 동일합니다.
수행을 한다면 내 안에 있는 몸과 마음, 타인에게 있는 몸과 마음을 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려면 중요한 것이 지계입니다. 지계가 왜 필요한가 하면 삼매가 생기기 위해 필요합니다. 지계가 갖추어지면, 지계를 바탕으로 마음이 흐뭇해집니다. 흐뭇함을 바탕으로 즐거움이 생깁니다. 즐거움을 기반으로 희열이 일어납니다. 희열로 인하여 편안함[輕安]이 밀려옵니다. 편안함이 있으면 몸과 마음에 행복(수카)이 생겨납니다. 이 행복이 생긴 뒤에는 삼매라는 마음의 고요함이 쉽게 얻어질 수 있습니다. 이 마음의 고요함이 있으면,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지혜’가 들어옵니다. 지계가 청정하지 못하면 앞에 열거한 이 재산들을 모두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계를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지계를 바탕으로 치열하게 노력한다면 위빳사나 지혜가 점점 올라가서 열반을 보게 됩니다. 형성(상카라. 몸과 마음)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보고 난 뒤에, 형성의 완전한 소멸인 열반을 보게 됩니다.
감각적 욕망을 제거한다는 것은 아나함이 된다는 뜻입니다. 아나함이 되면 감각적인 대상에 집착함을 제거한 것이 됩니다.
이렇게 감각적인 대상의 집착에서 멀어진 뒤에 위빳사나의 속력이 한층 더 올라가면 다시는 절대 태어나지 않는 단계에 이릅니다. 이렇게 자애를 시작으로 해서 위빳사나 지혜를 닦으면 아라한이 될 수 있습니다. 자애를 증장시켜서, 자애의 마음을 대상으로 관찰합니다. 그 마음이 머무는 자리, 심장은 물질로서 관찰합니다. 이렇게 관찰하다 보면 위빳사나 지혜가 점점 무르익어서 수다원이 됩니다. 더 익으면 사다함이, 더 익으면 아나함이 됨과 동시에 오문으로 들어오는 대상들에 대한 갈애가 떨어져 나갑니다. 여기서 더 올려서 수행할 때 번뇌가 완전 소멸하여 다음 생에 태어나지 않는 아라한이 됩니다.
법을 사랑하는 불자들이, 자애를 바탕으로 위빳사나 지혜까지 이르게 하는 이 자애경의 핵심을 듣고 난 뒤에, 이 가르침대로 정말 열심히 수행하여야 합니다. 이 의미를 명확히 이해하여 자애 수행을 하고, 자애를 증장시킨 뒤에 위빳사나 수행을 해서 열반의 행복을 누리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사아두, 사아두, 사아두.
참고자료
① "난다말라비왐사 큰스님 가르침" (난다말라 시리즈1), 위뿔라냐니 스님 옮김
https://cafe.daum.net/DHAMMADIPAKOREA/DTZD/3
② 우 또다나 사야도 법문, 비구 일창 담마간다 통역, 한국마하시선원 일요정기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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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머묾(자애) 1 (2018.10.14.) https://cafe.daum.net/mahasi/PmAf/32
~ 거룩한 머묾(자애) 5 (2019. 4. 7.) https://cafe.daum.net/mahasi/PmAf/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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