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시 사야도의 말룽꺄뿟따경 법문
우 틴 팟 영역
오 원 탁(향원) 옮김
A Discourses on Mālukyaputta Sutta by The Venerable Mahāsi Sayādaw of MYANMAR
Buddhasāsanā Nuggaha Organization
Mahasi Thathana Yeiktha
Yangon
Translated by U Htin Fatt
Second Edition
December, 1994
........................................
붓도 소 바가와- 보다-야 담망 데세띠
땅 바가완땅 아항 완다-미 삽바다-
소 바가와- : 우리들의 진정한 의지처이신 그 거룩하신 세존께서는
붓도 : 사성제의 바른 법을 당신 스스로도 분명히 깨달으시고
보다-야 : 다른 많은 중생들도 마찬가지로 사성제를 바르게 깨닫게 하기 위해서
담망 : 사성제의 바른 법을
데세띠 : 연민심을 앞세워 지혜로 설하셨습니다.
땅 바가완땅 : 분명히 현존하시는 그 거룩하신 세존께
아항 : 저는
삽바다- : 밤낮으로 항상
완다-미 : 지극 정성 두 손 모아 경의를 다하여 예경 드립니다.
이마-야 담마-누 담마빠띠빳띠야- 붓당 뿌제-미
이마-야 담마-누 담마빠띠빳띠야- 담망 뿌제-미
이마-야 담마-누 담마빠띠빳띠야- 상강 뿌제-미
이마-야 담마-누 담마빠띠빳띠야- : 네 가지 도, 네 가지 과, 열반이라고 하는 이러한 출세간 법 아홉 가지에 따른 실천으로,
붓당 : 거룩하신 부처님께,
담망 : 네 가지 도, 네 가지 과, 열반, 교학이라고 하는 이러한 열 가지 가르침에,
상강 : 도의 위치에 있는 네 분, 과의 위치에 있는 네 분이라고 하는 여덟 분의 성자이신 승가와 지금 계시는 일반 승가 여러분에게,
뿌제-미 : 예경 합니다.
이망 메 뿐냥 막가팔라냐-낫사 빳짜요 호뚜
메 : 저의
이당 뿐냥 : 오늘 베푼 보시의 선업, 잘 지킨 계의 선업, 많이 실천한 수행의 선업, 법문을 들은 청법의 선업이,
막가팔라냐-낫사 : 제가 바라는 도의 지혜, 과의 지혜의,
빳짜요 : 그러한 지혜를 얻고 그러한 지혜에 이르는 데 도움을 주는 바탕과 원인이,
호뚜 : 되기를.
이당 노 뿐냐 바-강 삽바삿따-낭 데마
이당 노 뿐냐 바-강 : 이렇게 오늘 행하고 들은 선업의 공덕 몫을,
삽바삿따-낭 : 법문을 같이 듣고 수행을 같이 하는 선한 이들을 포함해서, 부모님과 도움을 주신 이들을 비롯하여 삼십 일천의 모든 중생들에게,
데마 : 회향합니다, 회향합니다, 회향합니다.
................
목차
일러두기 … 8
1. 들어가는 말 … 9
방일하지 않고(압빠맛또) … 10
열심히(아따삐) … 11
네 가지 바른 노력 … 11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빠히땃또) … 13
2. 부처님의 훈계 … 14
3. 위빠사나 질문Ⅰ … 15
아닛티간다 꾸마라 이야기 … 17
4. 말룽꺄뿟따의 대답 … 20
5. 간단한 위빠사나 수행법 … 23
6. 안식(眼識)의 흐름 … 24
7. 이식(耳識)의 흐름 … 26
8. 빠라맛타(실재) 보기 … 28
9. 안문인식과정에서 의문인식과정으로 … 29
10. 빤냣띠(개념)의 탄생 … 31
뽓틸라 장로 … 32
11. 결정적 순간의 포착 … 34
12. 비난에 대한 답변 … 36
13. 들음 등을 관찰 … 40
14. 위빠사나 지혜의 이익 … 42
15. 열반을 봄 … 44
16. 말룽꺄뿟따경 요약 … 46
17. 볼 때 형상을 관찰하지 못함 … 47
18. 형상을 관찰하면 열반에 다가간다 … 50
19. 위빠사나 질문 Ⅱ … 54
20. 빤냣띠와 빠라맛타 … 55
21. 들을 때 소리를 관찰하지 못함 … 57
난다 장로 … 58
22. 소리를 관찰하면 열반에 다가간다 … 61
23. 위빠사나 질문 Ⅲ … 62
24. 냄새 맡을 때 냄새를 관찰하지 못함 … 63
25. 냄새를 관찰하면 열반에 다가간다 … 64
26. 위빠사나 질문 Ⅳ … 65
27. 맛 볼 때 맛을 관찰하지 못함 … 66
28. 맛을 관찰하면 열반에 다가간다 … 69
29. 법 체험 … 72
30. 위빠사나 질문 Ⅴ … 73
31. 들숨날숨에 대한 사띠를 권하지 않는 이유 … 75
32. 배의 움직임 관찰은 경전과 일치한다 … 77
33. 닿을 때 감촉을 관찰하지 못함 … 79
34. 감촉을 관찰하면 열반에 다가간다 … 81
35. 바른 수행법을 인정하지 않음 … 83
36. 위빠사나 질문 Ⅵ … 85
37. 알 때 마음의 대상을 관찰하지 못함 … 86
맺는 말 … 89
첨부 (역자 추가)
1. 눈의 문에서의 인식과정(안문인식과정) … 94
2. 의문인식과정 … 96
3. 말룽꺄뿟따 게송 … 97
.............
일러두기
1.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경우에 괄호 속에 원저에 있는 빨리어를 병기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할 경우 괄호 속의 글이 너무 길 때에는 각주로 달았습니다.
2. 원저의 빨리어 표기와 사전의 표기가 다른 경우에는 사전의 표기를 따랐습니다.
3. 역자의 주석은 각주에 “역주”라고 표기했습니다.
4. 영어로 번역된 마하시 사야도의 책을 번역했지만, 미얀마어 원전과 우 또다나 사아도(우 담마간다 스님 통역)의 “말룽꺄뿟따경에 대한 법문”(강릉 인월사 집중수행, 2011/1/16-1/21)도 참고로 했습니다.
5. 첨부는 역자가 추가한 것입니다.
6. 경전 표기에 사용된 약어는 다음과 같습니다.
A: 앙굿따라 니까야
D: 디가 니까야
M: 맛지마 니까야
S: 상윳따 니까야
...................
말룽꺄뿟따경 법문
1. 들어가는 말
말룽꺄뿟따경은 위빠사나의 교리와 수행법에 대한 기본 지식을 알려 줍니다. 이 경은 빨리어 경전인 상윳따 니까야에 실려 있으며, 이 경에 있는 24개의 게송은 테라 가타의 위사띠 닙빠따에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스리랑카 경전에 의하면, 말룽꺄뿟따경은 여자신도인 말룽꺄(Mālunkya)의 아들 말룽꺄뿟따 비구의 요청에 의해 부처님께서 법문하신 것입니다. 말룽꺄뿟따는 부처님께 이렇게 청했습니다.
“부처님, 법을 간단하게 설해 주시면 유익하게 되도록 그대로 실천하겠습니다. 법의 핵심을 들은 다음, 혼자 살면서,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바르게 노력하며,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하여, 수행하면서 살아가겠습니다.”
요컨대 말룽꺄뿟따가 조용한 장소에 가서 바른 방법으로 수행에 전념하고자 하니, 부처님께서 수행주제(Kammaṭṭhāna) 하나를 간결하게 설명해 주시기를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행할 때 혼자 살면 집중력인 사마디가 생기기 때문에 아주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과 같이 살면 방해받기 쉽습니다. 혼자 살 형편이 안 되어 다른 사람과 같이 살 때에는 자신의 수행에만 전념해야 합니다. 그럴 경우에는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걸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쳐다보지도 말고 마음을 수행주제에 집중해야 합니다.
방일하지 않고(압빠맛또)
압빠맛또(appamatto)는 ‘방일하지 않고’라는 뜻입니다. 이것도 아주 중요합니다. 이 선원에서 수행하고 있는 수행자들은 대개 방일하지 않고 있습니다. 즉 법을 체험하기 위해 힘써 노력하는 것을 단 한 순간도 잊지 않습니다. 대상을 볼 때 방일하지 않고 주시합니다.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맛볼 때, 닿거나 알 때에도, 들음, 냄새 맡음, 맛봄, 닿음이나 앎에 항상 사띠합니다. 그들은 아주 작은 움직임도 알아차리지 않을 때 즉 관찰하지 않을 때가 없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항상 깨어 있는 상태로 유지하고 있으면서, 더 잘 관찰하려는 의도를 잊지 않습니다.
열심히(아따삐)
아따삐(ātāpī)의 어원적 의미는 '뜨겁게 하다'입니다. 무엇엔가 열중하고 있을 때, 아따삐가 열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열기는 물을 증발시킵니다. 열정은 모든 오염물의 총칭인 번뇌를 증발시킵니다. 파리는 빨갛게 단 쇳덩어리 주위를 날아다니지 않습니다. 번뇌는 파리에 비유되고 열정은 빨갛게 단 쇳덩어리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열정이 식으면, 육근을 통하여 번뇌가 몸으로 침입해서 조건 지어진 모든 것들이 생겼다가 사라지는 현상을 주시하지 못하는 보통사람(범부)들을 괴롭힙니다. 관찰하고 있는 수행자에게는 번뇌가 발붙일 곳이 없습니다. 경전에 의하면 번뇌는 습기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최대한의 열정과 열의를 가지고 수행하면 번뇌가 사라져서 마음이 완전히 건조하고 깨끗하게 됩니다.
네 가지 바른 노력
바른 노력에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1) 첫째로 아직 일어나지 않은 불선한 행위(불선업)를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는 전염병에 대해서 여러 가지 예방조치를 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하겠습니다. 일상생활에서 불선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려면, 그런 일을 만나지 않도록 신중해야 하며 자신이 불선업에 오염되지 않게 특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2) 둘째로 이미 일어난 불선업을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하는 노력입니다. 불선업 재발을 막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번뇌가 생기기 쉬운 “잠재된 성향(anusaya)”을 없애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불선업을 일시적으로는 피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불선업을 하는 성향이 남아 있다면, 결국은 그것에 압도당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봄이나 들음은 감각대상에 마음이 쏠리는 성향을 촉진하는데, 그런 성향을 “대상에 잠재된 번뇌”라고 합니다. 이는 번뇌의 근본 원인이어서, 수행자에게 대상에 잠재된 번뇌가 있으면 수행이 잘 되지 않습니다. 수행자에게 성자의 도(道)의 지혜가 생기면 내면에 퍼져 있는 근본적인 번뇌인 “상속 성향 번뇌”가 일시에 사라집니다.
(3) 셋째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업이 일어나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아직 좋은 일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 즉시 보시하고 계를 지키고 수행을 해서 선업을 쌓도록 하십시오. 나는 여러분이 위빠사나 수행을 시작할 것을 간곡히 촉구합니다. 수행을 해서 위빠사나 지혜가 생기고 나아가서 성자의 도의 지혜가 생길 때까지 계속 수행하십시오.
(4) 마지막은 성자의 도의 지혜가 생길 때까지 선업을 지속적으로 향상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수행자들은 네 가지 즉 불선업을 하지 않고, 이미 행한 불선업은 다시 하지 않으며, 아직 하지 않은 선업을 하고, 이미 행한 선업은 지속적으로 향상시키려고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빠히땃또)
과거의 번역자들은 대개 빠히땃또(pahitatto)를 '열반을 향한 마음'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빠히땃또의 글자 그대로의 뜻에 따라서, 일단 수행자의 마음이 열반의 개념을 파악했으면 굳이 법에 따라 수행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는 불교 경전에 어긋납니다. 빠히땃또가 의미하는 것은, 마음을 도의 지혜와 과의 지혜와 열반에 기울이면서 목숨을 걸고 수행에 몰두하는 것입니다. 이는 정신 수양에 관한 계경의 주석서와 일치합니다.
2. 부처님의 훈계
부처님께서는 말룽꺄뿟따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말룽꺄뿟따야, 어떻게 이제 와서 그런 질문을 하느냐? 다른 비구가 나에게 이런 요구를 할 때 내가 뭐라고 할 것 같으냐? 너는 이미 인생의 후반부밖에 남지 않을 정도로 나이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법의 요점을 법문해 달라고 하는구나!”
부처님의 말씀은 책망과 칭찬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늙은 비구는 젊었을 때 법을 얻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한 발을 무덤에 들여놓고 있는 지금에서야 법을 추구하는 삶을 살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법문을 그런 식으로 받아들였다면 말룽꺄뿟따는 수행을 그만 두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룽꺄뿟따는 노령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추구하면서 은둔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젊은 비구들은 뭐라고 했을까요? 그들은 그를 모범으로 삼았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부처님께서 그를 칭찬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젊은이가, 나이 많은 사람들이 법을 깨닫기 위하여 치열하게 노력하는 모습을 본다면, 그들을 본받을 것입니다.
말룽꺄뿟따가 되풀이하여 간청하자, 세존께서는 연달아서 몇 가지 질문을 하셨습니다. 이 질문에 대답하면 위빠사나 수행법의 기초를 저절로 알게 됩니다.
3. 위빠사나 질문 Ⅰ
“말룽꺄뿟따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다음 질문에 대해서 최선의 대답을 해 보아라. 이전에 네가 가까운 과거나 오래 된 과거에도 본 적이 없고, 지금 현재 보고 있는 것도 아니고, 미래에도 보리라고 기대할 수 없는 어떤 형상이 있다고 하자. 그러한 형상에 대해 네가 욕구나 탐욕이나 애정을 가질 수 있겠느냐?”
맨 눈으로 볼 수 있는 물질이 실재(빠라맛타)입니다. 그러나 실재는 아니지만 실재처럼 생각되는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상상이나 꿈에 나타나는 대상인데, 그런 것은 모두 개념(빤냣띠)입니다.
경전에는 오래 된 과거의 대상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현재 기억하고 있는 전생의 대상을 말합니다. 부처님 시절에 전생을 기억할 수 있는 빠띠뿌지까(Patipujika)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전생의 남편은 말라바리(Mala- bari)라는 천신(天神. deva. 데와)이었습니다. 그녀는 전생의 남편을 계속 회상하고 있었습니다. 경전에 언급된 오래 된 과거라는 것은 이런 경우를 말합니다.
꿈꾸거나 상상하는 것에 대해 집착한다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꿈꾸거나 상상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해서는 집착이 생길 수 없습니다. 생각한 일도 없고 상상으로 만난 적이 없는 여자를 남자가 사랑하게 될 리 없고,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의 질문에 말룽꺄뿟따는 대답했습니다.
“부처님, 오래 된 과거나 가까운 과거에도 본 적이 없고, 지금 현재 보고 있는 것도 아니고, 미래에도 보리라고 기대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해서, 제가 욕구나 탐욕이나 애정을 가질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아닛티간다 꾸마라 이야기
법구경의 주석서에 자신의 마음속에 상상으로 만든 미녀에게 사랑에 빠진 아닛티간다 꾸마라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는 사람이 꿈이나 상상으로 어떤 상을 만든다면, 그 상에 대해서 욕구나 탐욕이나 애정을 느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아닛티간다 꾸마라는 사왓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전생은 범천이었습니다. 범천계(梵天界)에서 사는 동안 그는 감각욕망이나 탐욕의 속박을 받지 않았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다음에도 그는 이성에 대해 관심이 없었지만, 성년이 되자 부모님은 결혼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자를 싫어하는 그는 “저는 결혼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면서 거절했습니다. 부모가 계속 강요하자 결혼을 모면하려고 꾀를 냈습니다. 조각가를 물색하여 금으로 아름다운 소녀상을 만들게 한 다음, 그 조각처럼 생긴 여자가 있으면 결혼하겠다고 부모에게 말했습니다. 엄청난 부자인 부모는 브라만들을 고용하여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아들이 만든 금으로 된 미녀상을 닮은 신부를 찾게 했습니다.
브라만들이 맛다(Madda) 왕국의 사갈라(Sagala)라는 도시에 도착했을 때 미녀인 16세의 소녀가 7층탑에 유폐되어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그녀의 부모를 만나서 미모를 감정해 보게 해 달라고 요청하여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녀가 탑에서 내려왔을 때, 그들은 그녀가 금상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것에 깜짝 놀랐습니다.
중매인들은 부모에게 자신들이 신부감을 찾고 있다고 말하고 미의 여왕이 아닛티간다 꾸마라의 신부가 되게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허락을 받은 다음 밀사들은 신랑의 부모에게 그 소식을 급히 보냈습니다. 그러자 부모는 신부가 조각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는 소식을 듣고, 빨리 보고 싶어서 가능한 한 급히 데려 오게 했습니다. 이것이 순전히 상상으로부터 생긴 집착의 예입니다.
사갈라와 사왓티는 오백 마일 이상 떨어져 있었고 그 당시의 수송 수단은 매우 열악했습니다. 아마도 그녀는 말이 끄는 수레에 탔을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그녀는 여행 중에 완전히 기진맥진하여 마침내 병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아닛티간다 꾸마라는 이 소식을 듣고 그녀의 빼어난 아름다움을 볼 기회마저 놓친 것에 대해 너무나 괴로워했습니다. 그는 먹지도 못하고 잠도 못 잤습니다. 부처님께서 이 사실을 아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탁발하러 그의 집에 들르셨습니다. 부모는 정중하게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아들에 대해서 질문하였습니다. 아들도 부모가 시키는 대로 세존 앞에 다가가서 예경을 드리고 앉았습니다. 세존께서 아들에게 질문하자, 그는 결혼하러 오는 도중에 길에서 죽은 여인으로 인하여 걱정과 근심이 생겨서, 먹지도 못하고 마시지도 못할 정도로 비탄에 잠겨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원하는 감각대상과 그에 대한 탐욕을 조건으로 슬픔과 두려움이 생깁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를 게송으로 읊으셨습니다.
탐욕으로 인하여 비탄이 생기고,
탐욕으로 인하여 두려움이 생긴다.
탐욕으로부터 해방된 사람은
비탄도 없고 두려움도 없다.
이 법문을 들은 젊은이는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는 도(道)인 수다원도의 단계를 성취했습니다. 그는 결혼하기 싫어서 불가능한 조건을 제시하여 부모가 포기하게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는 이제 자신이 만든 것보다 더 아름다운 미녀를 발견했기에 불가능이 가능하게 되자, 마음속에 집착이 생겨서 그의 순진한 마음에 괴로움이 생겼던 것입니다.
4. 말룽꺄뿟따의 대답
부처님의 질문에 대해서 말룽꺄뿟따는 전에 경험한 적이 없고, 지금 현재 경험하고 있지도 않고, 미래에 꿈에도 경험하리라고 가대할 수 없는 감각대상에 대해서는 욕구나 탐욕이나 애정이 생길 수 없다는 취지로 대답했습니다. 여기 이 선원에서 수행하고 있는 수행자는 이를 이해합니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는 당혹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1952년에 내가 빠테인에 있는 탓담마 티따구 선원에서 말룽꺄뿟따경에 대한 법문을 했을 때, 탓담마 티따구 사야도의 누이도 참석했었습니다. 그녀는 본 적이 없는 물질이나 마음속으로 상상할 수 없는 물질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혼란스러웠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녀는 ‘그건 어떤 물질일까?’라고 의아하게 생각했었습니다. 그녀는 지성적인 사람이었으나 스스로 위빠사나 수행을 하기 전까지는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수행해 본 다음에 그녀는 법의 진리를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수행하여 지혜가 생기자 너무 기뻐서 법문에서 배운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사려 깊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본 적이 없는 감각대상들이 탐욕을 일으킬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전에 만난 적이 없는 사람에 대해 애정을 품을 수 있습니까? 그런 경우에 애정만이 아니라 성냄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사견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해서 여러분이 기억하기 쉽게 다음 격언을 만들었습니다.
(1) 형상이 보이지 않을 때 번뇌는 스스로 멈춘다.
(2) 형상이 보이면 번뇌는 생길 준비를 하고 있다.
(3) 보이는 것이 무엇이든지 사띠에 의해 마음을 가라앉혀서 마음속에 잠복하고 있는 번뇌를 쫓아버려라.
(4) 부처님께서 말룽꺄뿟따에게 하신 질문은 위빠사나 수행법을 명확히 설명하고 있다.
이제는 전에 만난 적이 없는 대상은 번뇌를 일으키는 욕구나 탐욕이나 애정이 생기게 할 수 없다는 것이 아마도 명백해졌을 것입니다. 따라서 전에 보거나 알게 된 적이 있는 대상은 번뇌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말룽꺄뿟따가 그 사실에 주목하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질문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대상을 회상할 때마다 번뇌가 계속 일어난다는 것을 깨닫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미소 짓거나 찌푸린 모습을 봤다면, 그 장면을 회상할 때마다 미소 짓거나 찌푸린 얼굴이 다시 떠오를 것입니다. 다시 나타날 때마다 그 장면이 만들어내는 느낌에 따라서 여러분의 마음이 반응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본 대상을 회상할 때마다 그 대상은 탐욕을 생기게 하고, 여러분은 탐욕스럽게 될 것입니다. 성냄과 어리석음도 비슷하게 일어날 것입니다. 볼 때마다 주시하지 못한다면, 조건 지어진 현상들의 무상하고 주체가 없음을 관찰하지 못하고, 그에 따라 번뇌가 여러분의 내부에 자리 잡을 것입니다. 부지런히 주시하면, 번뇌는 그냥 생기고 사라질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무상의 본성을 알게 됐을 때, 번뇌는 더 이상 여러분을 괴롭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상을 볼 때 봄을 주시해서 무상을 알게 되면, 번뇌는 나타날 기회가 없습니다. 번뇌는 언제나 여러분의 몸속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잠복해 있으면서 여러분을 장악할 기회를 엿보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봄을 주시해서 그 본성을 알게 되면, 여러분은 무상을 체험할 것이고, 그에 따라 번뇌는 가라앉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은 마치 대상을 지각하지 않은 것처럼 평온한 상태를 유지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지혜는 여러분으로 하여금 위빠사나 수행을 가장 잘 하는 방법을 알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질문에 대답하면 위빠사나 수행법을 알게 된다고 말한 것입니다. 소리와 귀와 관련된 부처님의 질문에 대한 법문을 하기 전에,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간단한 위빠사나 수행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5. 간단한 위빠사나 수행법
“말룽꺄뿟따야! 대상이 보이거나, 들리거나, 감지되거나, 알게 될 때는, 보인 대로, 들린 대로, 감지된 대로, 알게 되는 대로 놓아두어라. 볼 때는 보기만 하고, 들을 때는 듣기만 하고, 감지할 때는 감지하기만 하고, 알 때는 알기만 하라.”
앞에서는 감각대상들이 여섯 개의 감각의 문(육문)을 통해 들어오지 못 하면, 번뇌가 생길 기회가 없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제는 감각대상이 육문에 나타났을 때 번뇌를 어떻게 없앨까 하는 문제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보고 듣고 감지하고 아는 네 가지 경우에 대한 위빠사나 수행 방법의 요점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냄새와 맛과 감촉은 간결하게 하기 위하여 감지의 범주에 포함되었습니다.
삼법인인 무상, 고, 무아에 대한 관찰이 보고 듣고 감지하고 아는 네 가지 경우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들 감각과 감각대상은 ‘나’도 아니고, ‘나의 것’도 아니고, ‘나의 자아’도 아닙니다. 대상은 단 한 순간 동안 감각의 문에 나타날 뿐이고, 주체는 그 순간 동안 그것을 보고 들을 뿐, 그 이상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수행 방법의 요체입니다.
6. 안식(眼識)의 흐름
봄은 형상과 안근(眼根)이 접촉했을 때 생기는 현상인데, 안식을 생기게 합니다. 형상이 안문(眼門, 눈)을 통해서 안근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을 때 시작되는 인식과정으로부터 설명을 시작하겠습니다. 각 인식과정이 생길 때 정신적 순서대로 여러 개의 심찰나가 생깁니다.
첫째로, 안근에 형상의 이미지가 나타나면 바왕가가 깨어나서 세 개의 심찰나 동안 보는 인식과정을 시작합니다. 이것이 형상으로 향하는 안문전향식을 자극합니다.
이렇게 해서 안근에 나타난 형상의 이미지는 안식에 의해 인식되는데, 최초로 일어났을 때에는 번뇌에 의해 교란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리고는 즉시 “받아들이는(sampaṭicchana) 마음”에 의해서 이미지를 받아들입니다. 받아들인 다음에 “조사(santīraṇa) 마음”이 넘겨받아서 조사한 다음, “결정(voṭṭhabbanna) 마음”이 대상이 마음에 드는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합니다.
여기까지는, 머리를 쳐들 기회를 엿보면서 엎드려서 기다리고 있는 번뇌가 아직 작용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결정 마음이 대상이 마음에 드는 것인지 아닌지 판정을 내리자마자, 그에 따라서 좋아하거나 싫어함이 전개됩니다. 이는 다음에 이어지는 자와나가 행동을 개시할 때 나타납니다.
자와나는 보통 일곱 번 연속해서 일어납니다. 이 단계에서 도덕적이거나 비도덕적인 성향에 따라 판단합니다. 그리고 이제 번뇌가 탐욕, 성냄, 어리석음[貪瞋癡]으로 진면목을 드러내면서 데뷔합니다. 그 다음에 두 개의 심찰나 동안 “등록(tadārammaṇa)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상이 대상을 볼 때 마음이 일을 하는 안문인식과정입니다. 이를 인식과정이라고 하는데, 이 과정을 통해서 마음이 스스로를 드러내게 됩니다.
7. 이식(耳識)의 흐름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닿고 아는 의식의 흐름은 지금까지 설명한 안식의 흐름과 똑같습니다. 되풀이되지만 이해를 돕기 위하여 전체 인식과정을 다시 한 번 설명 드리겠습니다.
바왕가는 잠자고 있는 동안 작용하는 마음입니다. 바왕가는 주체적인 존재가 유지되기 위해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므로, 가장 가까운 영어 번역은 ‘life continuum’입니다. 바왕가는 현생의 감각대상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전생에서 죽음의 마음의 직전 마음의 대상을 대상으로 합니다. 바왕가는, 잉태될 때 생기는 현생의 첫 번째 마음인 재생연결식 다음에 일어나는 마음입니다. 바왕가는 계속적으로 일어난다고 생각되지만, 수동적이기 때문에 인식과정의 마음이 나타날 때는 언제나 가라앉습니다. 예를 들면, 감각대상이 오문 중의 하나를 통해서 마음의 흐름 속으로 들어오면, 바왕가는 오문전향식에게 자리를 내어줍니다. 오문전향식은 감각의 문을 통해서 비춰진 이미지의 본성을 즉각 대상으로 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면 대상에 따라서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이 생기고, 이어서 접수 마음이 이미지를 조사 마음으로 넘겨서 그 본성을 조사하게 합니다. 조사의 결과에 따라 결정 마음이 대상이 마음에 드는 것인지 아닌지 결정합니다. 이 결정된 것이 일곱 번 생멸하는 자와나에게 전달되고, 그 다음에 두 번 생멸하는 등록 마음에게 전달됩니다. 그리고는 바왕가로 가라앉는데 이는 잠드는 것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결정 마음이 대상을 사랑할만하고 애정을 품을 만한 것이라고 결정하면, 그 대상에 대한 욕망을 갖는 순간 성냄이나 탐욕 같은 불선한 마음부수(行. 반응. 심리현상)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불선한(akusala) 자와나의 작용입니다. 그러나 항상 그렇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불쾌한 경험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주체가 선한 행위를 하려는 경향으로 기울어지기 때문에 대상을 싫다고 판정 내릴 때도 있습니다.
또는 도덕적 행위를 할 때 주체가 자애와 연민으로 대상을 아름답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자와나는 도덕적인 것이 됩니다. 여러분은 오문전향식에서 등록 마음까지 14개의 심찰나가 있다는 것을 눈 여겨 보았을 것입니다. 자와나가 보통 때에는 일곱 심찰나가 일어나지만, 감각대상이 약하고 인상 깊지 않을 경우에는 다섯 번 혹은 여섯 번만 일어납니다.
봄이 생길 때는 그것을 보기만 하십시오. 그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하지 마십시오. 경전은 “볼 때는 보기만 하라”고 말합니다. 듣거나 맛보는 인식과정이 진행될 때에도 볼 때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듣는 현상이 생길 때는 듣기만 하십시오. 들을 때는 들음만 있도록 하십시오. 다른 어떤 것도 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경전의 “들을 때는 듣기만 하라”와 일치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좀 더 다루기로 하고, 우선은 형상을 주시할 때 얻어지는 실재에 대해서 설명 드리겠습니다.
8. 빠라맛타(실재) 보기
안문인식과정의 마음들인 오문전향식, 안식, 접수 마음, 조사 마음, 결정 마음, 자와나와 등록 마음이 각기 자기 역할을 하고 있을 때, 감각대상인 형상의 빠라맛타(궁극적 실재)가 드러납니다. 여기서 형상을 보는 주체인 마음은 대상이 남자 혹은 여자라는 빤냣띠(개념)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이 시점에서 아마도 불선한 자와나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약하기 때문에 강한 반응을 일으킬 수는 없습니다. 말하자면 불선한 자와나가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초기 단계에, 불선한 자와나에 아직 관성(momentum)이 붙지 않았다면, 대상을 본 그대로 주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안식에 비친 것처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보는 주체와 보이는 대상이라는 궁극적 실재(빠라맛타)를 체험할 것입니다. 물론 주체는 정신이고 대상은 물질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제 궁극적 실재인 정신과 물질에 직면한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아직 여러분이 보고 있는 대상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숙고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아직 본 것에 대한 빤냣띠(개념)를 얻는 데까지 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단계에서는, 현상들을 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숙고를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볼 때는 보기만 하라”는 말과 일치합니다.
9. 안문인식과정에서 의문인식과정으로
대상을 볼 때, 봄이 생기는 순간에 봄만을 끊어서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초보자는 인식과정을 구성하고 있는 심찰나를 따라갈 수 없을 것입니다. 현상이 생길 때 잘 관찰할 수 없으므로, 안식을 돌이켜 생각하는 의문인식과정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의문인식과정이 일어나는 모습을 상세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첫 번째 의문전향식이 생긴 다음, 일곱 개의 자와나가 생기도록 자극하고, 자와나는 인지한 것을 두 개의 등록 마음에 전달합니다. 그러므로 이 경우의 의문인식과정은 모두 10개의 심찰나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감각대상이 약한 인상 밖에 주지 못하는 경우에 자와나는 다섯 번이나 여섯 번 만에 끝나기도 합니다.
안문인식과정이 끝난 다음에 첫 번째 의문인식과정이 이어받지만, 이때까지는 형상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별하지 못합니다. 이 단계까지도 앞의 안식이 작용하고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빠라맛타의 영역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즉 안식은 지금 이 순간의 형상을 인지하는 반면에, 의식은 형상이 과거의 것이 되어 희미해졌을 때 인지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의식은, 안식에 의해 이전에 보았던 과거의 이미지를 회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때까지도 이미지는 빠라맛타인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초보자로서 형상이 첫 번째 의문인식과정을 통과할 때 주시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렵습니다.
10. 빤냣띠(개념)의 탄생
대상이 첫 번째 의문인식과정에 들어 왔을 때 사띠로 주시하지 못하면 두 번째 의문인식과정이 생기게 됩니다. 이 단계에서 형상의 모양과 형태에 대한 빤냣띠(개념)가 생기기 시작하여 다음 단계인 세 번째 의문인식과정에서 굳건히 확립됩니다. 주체는 이제 대상을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별할 수 있습니다. 이 분명한 인지는 물질과 정신 두 가지 모두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물질 빤냣띠와 정신 빤냣띠가 인지됩니다. 이 빤냣띠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의문인식과정 동안 빠르게 연이어서 성립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현상들의 진정한 본성을 가리고 있는 무명(無明. avijja. 어리석음)을 통해서 생긴 빤냣띠일 뿐입니다.
주석서는 무명은 숨기는 경향이 있다고 말합니다. 사띠빳타나 수행 즉 사띠의 기본 훈련은, 수행자가 대상을 보는 즉시 관찰하고 주시할 것을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무명이 빤냣띠(개념)로 인도하기 전에, 그러한 관찰과 주시가 수행자를 빠라맛타(실재)와 직면하게 할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수행자가 사띠와 집중과 지혜를 충분히 마스터하지 못하여 힘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실재를 파악하는 것이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특성이 수행자 안에 확고히 자리 잡게 되면, 처음에 안문인식과정이 진행되고 있는 순간에도 현상들의 진정한 본성을 재빨리 깨달을 것입니다.
수행자에게 소멸의 지혜(bhaṅga ñāṇa)나 상카라(행)에 대한 평온의 지혜가 생기면, 마음의 흐름이 반드시 자와나까지 진행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두 개나 세 개의 결정 마음 다음에, 보고 듣는 등의 “여섯 구성요소를 가진 평온”과 함께 생기는 통찰지혜를 체험할 것입니다. 이는 물라빤나사 주석서에 의한 것이며, 상세한 것은 위빠사나 수행에 관한 내 법문을 참고하기 바랍니다.
뽓틸라 장로
부처님 시절에 경율론 삼장을 통달한 뽓틸라(Potthila)라는 장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을 등한시했기에 부처님께서는 그를 “쓸모없는 뽓틸라”라고 하시면서 꾸짖으셨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수행을 등한시한 것을 깨달은 장로는, 30명의 아라한이 있는 숲 속의 선원으로 가서 수행법을 알려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큰스님인 아라한은 교학에 대한 그의 자만심을 알았기에 어떤 충고도 하지 않고 다른 아라한에게 가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도 다른 스님에게 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수행주제를 달라고 부탁할 사람은 아라한이지만 나이가 일곱 살인 사미만 남았습니다. 사미는 자기는 어리고 경험도 없다고 말했지만 뽓틸라 장로는 막무가내로 수행주제를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래서 사미는 이런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장로님, 이구아나가 개미 언덕의 굴속에 살고 있는데 여섯 개의 출구가 있습니다. 이구아나를 잡으려면 다섯 개의 출구를 막고 나머지 한 개의 출구에서 나오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여섯 가지 감각대상이 들어올 수 있는 문이 여섯 개 있습니다. 다섯 개를 막고 마음의 문만 열어놓고 기다리면 하고자 하시는 바를 성취하실 것입니다.”
사미가 뽓틸라에게 제시한 것은, 자와나가 눈, 귀, 코, 혀와 몸이라는 오문에 좌지우지되도록 내버려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신에, 오문은 닫고 마음의 문만 주시해서 자와나가 그를 위빠사나 수행으로 인도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박식한 스님에게 위빠사나 수행법의 실마리를 제공했습니다.
볼 때, 결정 마음에서 멈추고 모든 현상들을 사띠를 가지고 주시해야 합니다. 이것이 “볼 때는 보기만 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제시된 대로 수행하여 뽓틸라 장로는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11. 결정적 순간의 포착
여기서 “전오식”이 제일 처음 일어나는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빤냣띠에 의해 현혹되게 마련입니다. 봄이 생길 때 주시하지 못하면, 빤냣띠의 세상에 살게 됩니다.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네 단계의 과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의문의 영역에 대상이 들어오면 먼저 의문전향식이 숙고한다.
2. 그 숙고의 순간이 마음을 통해서 인지하려는 첫 번째 의문인식과정이다.
3. 두 번째 의문인식과정에서 개념(빤냣띠)이 생긴다.
4. 세 번째 의문인식과정에서 대상의 본성이 이름(빤냣띠)으로 파악된다.
현상이 일어나는 순간 그 본성을 관찰하면, 빠라맛타로 정신과 물질을 알게 됩니다. 실제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즉각 알기 때문에, 삼법인인 무상, 고, 무아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됩니다. 다음 네 가지도 주목해야 합니다.
1. 봄의 맨 처음 순간을 포착한다.
2. 처음 인식과정에서 의식의 흐름을 정지 시킨다(“볼 때는 보기만 하라”는 것임).
3. 물질로부터 마음을 구분한다(이것이 물질과 구별해서 마음이라는 실재를 아는 것임).
4. 삼법인(무상, 고, 무아)을 인지한다.
위빠사나 지혜가 생기면, 마음인 정신(빠라맛타)으로부터 형상인 물질(빠라맛타)이 구별됩니다. 이 단계에서 소멸이 분명히 보입니다. 점차적으로 소멸의 지혜가 날카로워지면, 보는 주체와 보이는 객체가 엄청난 속도로 휙휙 지나갈 때, 소멸이 잘 보이게 됩니다.
소멸을 관찰하는 수행자는 의식이 허공으로 해체될 때, 의식을 실제로 하나의 파동으로 보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렇게 생긴 소멸의 이미지가 몽롱해서 수행자는 자기 눈에 이상이 있는 것이나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는 이제 소멸이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보는 경험을 했으며, 무상이라는 지혜를 직접 체험으로 알게 되어서 그에 따른 이익을 얻게 됩니다. 그는 정신과 물질에 대해서 실질적으로 속수무책이기 때문에, 이 지혜는, 무상한 것은 불만족스럽고 실체가 없다는 의식의 일대전환을 가져옵니다. 그것이 생멸할 뿐인 정신과 물질의 본성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실재입니다.
보고 듣는 등의 현상들을 알아차린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현상들은 생멸할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현상들은 생겼다가 사라집니다. 수행자는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조사하기 위하여 보고 들은 것을 넘어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의 마음이 빤냣띠에 머물지 않습니다.
12. 비난에 대한 답변
관찰(수행)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 중에는, 현상을 주시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관찰하는 전체 과정이 틀렸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차욱(Chauk)에서 어떤 사람이 나에게 다가와서, 정신과 물질이 생기고 사라질 때, 안식이 그 생성과 소멸을 인지하지 못한다고 비난했습니다. 안식은 형상이 안식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는 경우에만 인지합니다. 안식은 형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식별하지 못합니다. 그의 비난은 이렇게 계속되었습니다. “안식은 형상이 실제로 생기는 것을 못 보는데, 관찰하고 주시하는 것이 어떻게 형상의 생멸을 아는 지혜를 생기게 할 수 있습니까?”
주석서와 아비담마에 의하면, 물질은 안식보다 넷 혹은 다섯 심찰나 전에 생겼다가, 안식이 소멸한 다음에 열 둘 혹은 적어도 열이나 아홉 심찰나 후에 소멸합니다. 그러므로 보는 순간에 안식이 형상의 생성과 소멸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사띠(알아차림)가 개입됩니다. 사띠는 안식에 의해 지각된 실제 현상의 생성과 소멸을 회상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데사나 숫따(Desana Sutta)에 의하면, 사띠의 힘으로 현상을 알게 됐다면, 감각대상의 생성과 소멸도 안식에 의해서 인지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앙굿따라니까야의 선정 경(A9:36, Jhana Sutta)은, 선정에서 나온 수행자는, 그가 선정 상태에서 인지했던 선정의 마음, 그 마음부수 즉 정신의 무더기를 회상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그는, 그것들을 자신의 안식으로 실제로 관찰하고 있는 것처럼 통찰력으로 그것들을 압니다. 그러나 물질의 생성과 소멸이 뚜렷하게 지각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선정 중에는 그의 마음을 그것에 집중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정의 마음과 그 마음부수 즉 정신의 무더기가 명백하게 이해된 다음에는, 선정에 의존하는 물질 즉 선정에 의해서 생긴 물질의 본성이 추론에 의해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에 인용한 경전에 의해서, 형상을 주시하고 있을 때, 안식이 의존하고 있는 물질인 형상의 생성과 소멸을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수행자가 물질을 관찰하고 있을 때, 번개 치는 것을 보는 것처럼 물질의 생성과 소멸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상카라(행)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갱신한다. 그것들은, 번개가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생겼다가 소멸한다.”
지금 번갯불의 번쩍임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비록 번갯불의 모든 현상들을 봤을지라도, 누가 “나는 번개의 생성과 소멸을 볼 수 있었다”라고 진정으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번개의 시작도 끝도 볼 수 없었음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 번개를 보았습니다. 소멸의 지혜나 상카라에 대한 평온의 지혜가 생긴 수행자에게는, 번개가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형상이 모습을 나타냈다가 사라진다는 사실이 명백합니다. 이것은 소리나 감촉이 수행주제일 경우에는 더욱 명백합니다. 정신과 물질이 생기고 사라지는 현상을 직접 체험함에 의하여 무상, 고, 무아라는 삼법인을 깨달았을 때, 수행자는 자신이 위빠사나 지혜를 획득했다고 확신할 것입니다.
게다가, 지금 제시된 방법으로 계속 수행한다면, “역겨움의 지혜(Nibbida ñāṇa)”가 생길 것입니다. 그가 오취온을 싫어하게 되면 갈망이 없어지고, 갈망이 없어지면 성자의 도(道)에 도달하여 수다원(sotāpanna)이 될 것입니다.
안식에 의해 인지되는 물질은, “지나간 바왕가”가 생길 때 함께 생겨서, 인식과정의 두 번째 등록 마음이 사라질 때 함께 사라집니다. 그러나 생성과 소멸이라는 의식의 두 관점을 수행자가 직접적으로 알기는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문혜((聞慧)에 의해서 이해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간접적으로 현상들을 이해하는 것은 위빠사나 지혜를 일깨우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며, 나아가서는 역겨움의 지혜도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통상적으로 어떻게 즉 어떤 방식으로 물질이 첫째 아니면 둘째 아니면 셋째 지나간 바왕가 다음에 생기는지 아닌지, 어떻게 인식과정의 두 번째 등록 마음 아니면 일곱 번째 자와나 다음에 소멸하는지 실제로 정확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위빠사나 지혜가 이런 형태의 인식과정과 엄격한 정확도를 요구하는 것이라면, 수행자가 그것을 얻을 희망은 거의 없습니다. 아비담마 주석서의 의도는, 필요하면 수행자가 응용된 방법으로 지혜를 얻으라는 것입니다. 그런 상세한 것은 위빠사나 수행에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수행자에게, “번개 치는 현상을 주시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현상이 생기는 순간 주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라고 말하면 충분합니다. 이는 “가고 있을 때 ‘가고 있음’을 알아라.”와 일치합니다.
13. 들음 등을 관찰
말룽꺄뿟따는 여섯 가지 감각들의 활동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했습니다. 끊어지지 않고 사띠가 이어지면, 무슨 소리가 들려도 듣기만 하고 다른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게 됩니다. 여러분이 지금 내 법문을 들으면서, 발음하는 음절 하나하나마다에 마음을 집중한다면, 내가 전달하려는 취지를 파악하지 못할 것입니다. 내 목소리를 인식하기 전에 멈춘다면, 빤냣띠로 주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들은 것에 대한 어떤 개념도 형성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냄새 맡을 때 냄새를 맡기만 하십시오. 그러면 의식의 흐름은 냄새를 느끼기만 하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감촉을 느낄 때 닿음을 느끼는 데서 멈추십시오. 그러면 무언가를 만졌다든지 무언가가 와 닿았다는 것만 느끼지, 느낌을 넘어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무언가를 알 때에도 마찬가지로, 의식이 생기는 포인트에서 멈추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개념을 축적하는 데까지 진행시키지 마십시오. 그러면 번뇌가 머리를 쳐들지 못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좀 더 설명하겠습니다.
여기서 앞에서 인용됐던 보고 듣는 등의 현상에 대한 구절을 다시 한 번 상기해 봅시다. “볼 때는 보기만 하라. 들을 때는 듣기만 하라. 감지할 때는 감지하기만 하라. 알 때는 알기만 하라.” 이것은 위빠사나 수행을 간결하게 표현한 것으로, 감각대상에 대해서 의식이 생길 때, 거기서 멈추도록 생김을 주시하라는 뜻입니다. 현상에 사띠하면서 주시하지 않으면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주시하려고 노력하고 있을 때에도, 여러분의 마음이 주된 목적에서 벗어나서 관찰된 대상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려고 할지도 모릅니다. 수행을 이제 막 시작한 초보자일 경우에는 특히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단순히 무상, 고, 무아라는 삼법인에 대해 내관(內觀)하기만 하면, 의식이 생길 때 의식이 생긴 그대로에 머물게 된다.”고 역설하곤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보거나 듣는 현상들을 인지하는 순간 스스로 멈출 때까지, 마음을 있는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고 할 만큼 극단적입니다. 그것은 아무런 감시도 하지 않고 마음을 자유롭게 내버려둬야 한다는 말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사띠를 버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한 반대론자에게는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그대의 귀를 괴롭히는 거친 말에, 그대를 격분시키는 허튼 소리에, 그대의 평온한 마음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손상시키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 대해서, 그대의 마음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사띠로 마음을 주시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마음을 있는 그대로 유지할 수 있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자신들의 단언의 진정한 가치를 스스로 판단하게 합시다.
수행자가 보고 듣는 등의 현상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관찰할 때, 그에게 소멸하는 순간을 인지하는 소멸의 지혜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가 그 순간에 머물 때 위빠사나 지혜가 확립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는 위빠사나 지혜의 이익을 온 몸으로 느낄 것입니다.
14. 위빠사나 지혜의 이익
그 이익은 이렇게 나타납니다.
“말룽꺄뿟따야! 볼 때 보기만 하고, 들을 때 듣기만 하고, 감지할 때 감지하기만 하고, 알 때 알기만 한다면, 네가 인지한 감각대상들은 너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지혜가 생길 것이다.”
이는 감각대상들을 인지할 때마다 전혀 관여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감각대상들이 만들어내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탐진치)으로부터 벗어납니다. 보고 듣는 것 등에서 멈추지 못하면 마음이 그 감정에 집착하게 되어, 대상들을 회상할 때마다 또다시 탐진치에 빠지게 됩니다. 보고 듣는 등의 현상을 주시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이 접촉한 형상이나 소리 등에 깊숙이 말려듭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여 소멸의 지혜가 생긴 사람들은, 감각대상 및 그것을 주시하는 마음 두 가지의 소멸하는 본성을 체험합니다. 그들은 대상을 주시하는 마음도 알 수 있으며, 삼법인의 중요성도 알 수 있습니다. 수행 중에 감각대상에 집착하지 않음에 따라, 수행자가 대상들을 회상하는 일이 없고, 그에 따라 번뇌가 생기지 않게 됩니다. 조건이 갖추어 지면 감각대상에 의해 생길 수 있는 번뇌를 “대상에 잠재된 번뇌”라고 합니다.
주석서는 수행자에게 불선한 자와나를 피하라고 요구합니다. 사실상 그런 종류의 자와나는 자연적으로 버리게 되므로 악을 피하려고 별다른 노력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위빠사나 지혜가 예리하고 날카로워지면 의식의 흐름이 결정 마음까지만 진행되고 더 이상 나아가지 않기 때문에 자와나가 생기지 않습니다. 즉 자와나가 작용하기 전인 결정 마음에서 의식의 흐름이 가라앉습니다.
부처님께서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말룽꺄뿟따야! 네가 인지하는 감각대상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을 때, 너는 그것들에서 아무런 발판을 얻지 못하게 될 것이다.”
15. 열반을 봄
우다나 까타(Udāna Kathā) 주석서는 "발판"이란 단어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수행자가 갈망과 자기 본위의 생각을 놓아버릴 때, “나”라든가 “내 것”이라든가 “나의 자아”라는 관념으로부터 벗어나서 감각대상에 사로잡히지 않게 됩니다.
여기에 대해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말룽꺄뿟따야! 네가 감각대상들에 발판을 잃어버릴 때, 너의 정신과 물질의 무더기는 여기 이 세상에 있는 것도 아니고, 저기 저 세상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이 존재가 두 세상 중 어디에도 없다는 것은 고통의 종식을 의미한다.”
자아가 발붙일 곳이 없게 되면, 정신과 물질은 이 세상이나 저 세상 그 어디에도 존재하기를 멈추며, 이 소멸은 고통의 종식을 뜻합니다. 거룩한 도의 지혜를 깨달음에 의해서 수행자의 마음이 열반을 경험할 때, 이것이 명백해집니다. 아라한이 반열반(般涅槃. parinibbāna)하면 정신과 물질의 어떤 흔적도 남지 않습니다. 반열반할 때 죽음의 의식이 일어나자마자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 anupādisesa nibbāna)이 성취되어, 존재의 흔적이 전혀 남지 않게 됩니다. 이에 대해서 주석서들은, 수행자가 물질에 대해 발판을 잃어버린다면, 그는 여기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 있는 것도 아니고, 저기 여섯 가지 감각대상에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여섯 가지 의식에 있는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소멸의 지혜와 상카라에 대한 평온의 지혜가 생긴 위빠사나 수행자의 실제 경험과도 일치합니다. 흐르고 있는 상태에서의 물질의 본성에 대한 진리를 체험하면 그의 내부에서 번뇌가 생길 수 없습니다. 보는 형상과 듣는 소리에 대해서 그는 고귀한 무아의 견해와 객관적인 견해를 갖게 됩니다. 그런 다음에 수순하는 지혜(anuloma ñāṇa)가 생겨서 더 고귀한 길로 들어설 자격을 갖추게 됩니다. 그리고서 욕계의 혈통을 벗어난 거룩한 단계로 올라가게 하는 종성의(gotrabhū) 지혜로 들어갑니다. 욕계를 벗어나면 그는 실제로 열반을 깨닫습니다.
이에 대해서 밀린다왕 문경(Milinda Pañhā)은 이렇게 말합니다.
“방일하지 않고 사띠하는 수행을 계속한 수행자는 정신과 물질이 사라진 성품에 도달합니다. 대왕이시여! 바르게 수행하여 정신과 물질이 사라진 성품에 도달한 수행자를, 열반을 경험했다고 말합니다.”
16. 말룽꺄뿟따경 요약
부처님께서 말룽꺄뿟따에게 수행에 대해서 가르치신 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보거나 듣거나 감지하거나 아는 것에 대해서 사띠로 주시할 때, 너는 보고 듣고 감지하고 아는 것을 인지하기만 할 뿐 더 이상 아무 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
2. 보고 있는 것, 듣고 있는 것, 감지하거나 알고 있는 것을 그렇게 보거나 듣거나 감지하거나 알기만 한다면, 그러한 현상들에 관여하지 않게 된다.
3. 너는 그것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으므로, 네가 지각하는 감각대상들에 발판이 없게 된다.
4. 그것들에 발판이 없기 때문에, 너는 여기나 저기 혹은 다른 아무데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바로 그 사실은, 네가 모든 고통이 종식된 열반을 경험했다는 뜻이다.
말룽꺄뿟따는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만족스러움을 24절의 게송으로 표현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말룽꺄뿟따야, 훌륭하다!”라고 말씀하시고는 24절을 모두 몸소 읊으셨습니다. 나는 지금부터 그 게송을 한 절씩 설명하겠습니다.
17. 볼 때 형상을 관찰하지 못함
1. 형상을 볼 때 사띠하지 못하여
그 매력에 마음을 빼앗기면 탐욕이 생기네.
마음에 드는 대상에 매혹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여러분은 즐겁기 때문에 현상을 보고, 보는 순간 수행해야 함을 잊어버립니다. 수행자조차 즐거운 느낌을 주는 형상에 이끌려 거룩한 목적으로부터 주의가 벗어날 수 있습니다. 수행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쉽게 형상의 유혹에 넘어가곤 합니다.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이라는 빤냣띠에 압도당하자마자 그들은 수행해야 함을 잊어버릴 것입니다. 형상은 수행자로 하여금 사띠를 잊게 합니다.
아름다운 미소는 보는 사람의 마음속에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그것을 회상할 때마다 기쁨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며칠, 몇 달 혹은 몇 년이고 계속 되풀이하여 기억합니다. 그의 마음은 이제 마치 형상에 빠져드는 것처럼 현혹되고 있습니다.
지금 설명한 것은 형상에 대한 반응의 예를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물론 보는 대상을 싫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때로는 덤덤하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이든 간에, 형상이 고통, 쾌락, 탐욕, 성냄 등의 여러 가지 느낌들을 생기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느낌들은 결과적으로 고통이 되풀이되게 하는 업을 만듭니다.
형상이 일으키는 고통은 다음과 같습니다.
2. 형상에서 생긴 탐욕과 성냄이
집착하는 이를 괴롭히니
마음은 고통에 빠지네.
수행하지 않고 고통을 짊어지고 다니는 이는
열반으로부터 멀어지리.
모든 형상은 느낌이나 열정을 생기게 합니다. 개인에게 마음에 드는 대상이 나타나면 기뻐하지만, 그것은 결국 행복한 느낌입니다. 싫어하는 대상이 나타나면 불행한 느낌이 들지만 그것은 괴로운 느낌입니다. 그러한 느낌들이 그를 괴롭히는 고통의 원인입니다. 아름다운 대상을 보면 그것을 가지려는 욕망이 생깁니다. 다른 사람이 그것을 얻으려는 것을 방해한다고 생각되면 그는 불쾌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마음이 그런 성향을 갖는 것은 탐욕과 성냄의 작용입니다.
그 성향이 괴롭혀서,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지속적으로 악행을 하게 됩니다. 탐욕과 성냄의 부추김에 의해, 실재하는 적이나 가상적인 적에 대항하여 맞서 싸울 기력이 거의 없을 정도로 지쳐버립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사띠하지 않는 생활을 합니다. 사띠하지 않는 생활에서 사띠하는 생활로 바꾸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사띠를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은 고통이 반복되게 하는 번뇌를 받아들일 것입니다. 열반은 그런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수행하지 않으면 무상, 고, 무아라는 삼법인의 지혜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마치 불에 기름을 붓는 것처럼 번뇌를 불러들여 고통에 불행을 추가할 것입니다.
형상에 대한 요점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⑴ 형상은 열정이 생기게 하여 사띠를 잊게 한다.
⑵ 열정적인 마음이 물질에 현혹된다.
⑶ 형상은 괴롭거나 즐거운 느낌을 생기게 한다.
⑷ 탐욕과 성냄에 조건지어진 것이 불안과 걱정의 원인이다.
⑸ 그렇게 고통을 만드는 조건을 받아들인 사람은 항상 고통과 함께 살아갈 것이다.
⑹ 고통의 순환은 열반을 멀리 떨어져 있게 한다.
18. 형상을 관찰하면 열반에 다가간다
위의 게송은 어두운 면을 보여줬지만 밝은 면을 보여주면 다음과 같습니다.
3. 형상을 볼 때 사띠로 지켜보면
탐욕이 생기지 않아 현혹되지 않네.
이 게송은 위빠사나 수행의 요체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수행자가 대상을 볼 때 사띠로 지켜보고 수행해야 함을 알려줍니다. 그럴 때 그는, 실제로 보고 있는 대상을 보는 것이지, 보고 있지 않은 대상을 보고 있지 않는 것이 명백합니다. 이는 실제로 경험하는 지혜에 의한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 들은 지식으로는 결코 얻어질 수 없습니다.
장로게(長老偈) 주석서는, 수행자가 눈을 통해서 안식으로 들어오는 형상을 인지할 때, 분명한 앎의 네 가지 요소인 목적을 앎과 무지가 없는 앎 등을 사띠로 지켜보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앞의 안문인식과정을 설명한 것과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같은 내용입니다. 볼 때 봄이 생기는 안문인식과정을 주시하지 못한다면, 의문인식과정을 주시하도록 노력하십시오. 그 순간을 포착하여, 물질의 빠라맛타를 지켜보는 수행자는, 보는 바로 그 순간 형상과 안식의 소멸을 주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볼 때 본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보는 행위에만 집중할 때, 보는 형상에 대한 인식은 한 과정만 지속될 것입니다. 이는 “볼 때는 보기만 하라”와 일치합니다. 그럴 경우에 번뇌가 나타날 시간이 없습니다. 번뇌가 나타나지 않으면 갈망은 가라앉습니다.
형상에 집착하면 탐욕이 갈망을 생기게 하는 느낌이나 정열을 자극합니다. 수행하지 않는 사람은 형상을 보고 있음을 완전히 알더라도 사띠로 주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갈망이 일어나는 것을 막지 못합니다. 그러나 수행자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실제로는 알지 못하며, 언제나 그렇게 사라짐을 알아차리고 있기 때문에 갈망이 생길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어리석음이 사라지고 지혜가 생깁니다. 갈망 등의 번뇌가 없으면, 업이나 과보나 재탄생이 생길 수 없습니다. 그는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것입니다. 이 사실이 다음 게송에서 강조됩니다.
4. 형상을 볼 때 형상에 빠지지 말고
보기만 하고 봄을 느끼기만 하라.
그러면 고통은 멈추게 되리라.
수행자는 이렇게 수행해야 한다.
이러한 수행자에게 열반은 멀지 않으리.
수행자가 사띠로 주시하여 형상에 빠지지 않을 때, 업과 과보를 가져오는 번뇌가 생기지 않습니다.
장로게 주석서는 형상을 본다는 사실은, 보는 것은 무상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본다고 설명합니다. 안식은 보는 감각을 생기게 하고, 의식은 이를 마음으로 가지고 갑니다. 마음은, 마치 욕심 많은 사람이 재산을 축적하듯, 이 감각을 수집하여 저장해 둡니다. 그 결과 번뇌가 모습을 드러낸 것 중의 하나인 탐욕이 증가됩니다. 이에는 업과 과보가 따릅니다. 수행자는 이런 결과를 초래하는 안식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즉 고통이 되풀이되게 하는 번뇌에 빠지기를 거부합니다. 봄을 관찰할 때마다 위빠사나 지혜가 생깁니다. 위빠사나 지혜가 생길 때마다 번뇌가 사라집니다. 그래서 그는 순간적 열반(tadaṅga nibbāna) 즉 오염된 마음이 청정해지는 순간 획득되는 열반(평화로운 지복)을 즐긴다고 하겠습니다.
빠라맛타(실재)의 세계에 살고 있는 수행자에게는, 위빠사나 지혜가 서서히 생길 것입니다.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nāmarūpa pariccheda ñāṇa)로부터 수순하는 지혜를 거쳐 종성의 지혜까지 생길 것입니다. 빳타나에 의하면, 이는 궁극적으로 도의 지혜와 과의 지혜로 이어집니다. 수순하는 지혜는 열 단계의 위빠사나 지혜 중 가장 높은 단계임에 주목하십시오. 그러므로 열반을 얻고자 하는 수행자는 반드시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의 핵심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⑴ 형상을 사띠로 지켜보면 탐욕이 사라진다.
⑵ 탐욕이 없으면 마음은 대상에 현혹되지 않는다.
⑶ 대상을 보는 순간 즉시 주시하고, 보고 있음을 알아라.
⑷ 이렇게 수행하면 고통의 순환이 멈출 것이다.
⑸ 이것이 수행하는 방법이다.
⑹ 고통이 멈추면 열반이 나타날 것이다.
19. 위빠사나 질문 Ⅱ
이제 부처님께서 말룽꺄뿟따에게 물으신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말룽꺄뿟따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다음 질문에 대해서 최선의 대답을 해 보아라. 이전에 네가 가까운 과거나 오래 된 과거에도 들은 적이 없고, 지금 현재 듣고 있는 것도 아니고, 미래에도 들으리라고 기대할 수 없는 소리가 있다고 하자. 그러한 대상에 대해 네가 욕구나 탐욕이나 애정을 가질 수 있겠느냐?”
말룽꺄뿟따는 가까운 과거나 오래 된 과거에도 들은 적이 없고, 지금 현재 듣고 있는 것도 아니고, 미래에도 들으리라고 기대할 수 없는 소리나 목소리에 대해서는 욕구나 탐욕이나 애정이 일어날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대답은 적절합니다. 아름다운 목소리를 듣고 그 목소리를 가진 사람을 알게 되면, 듣는 사람은 목소리의 주인공에 대해서 애정이나 집착이 생깁니다. 집착이 생김에 따라 번뇌가 작용하기 시작하고 앞서 이야기한 결과가 발생됩니다. 들을 때 관찰하면 번뇌가 접근하지 못할 것입니다. 앞에서 설명한 봄에 대한 법문을 참조하십시오.
20. 빤냣띠와 빠라맛타
안식과 관련하여 설명한 인식과정 중에서 필요한 부분만 바꾸면 내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이식의 흐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그러므로 이식과 관련된 인식과정에 대해서는 요점만 설명하겠습니다.
들을 때 소리가 이문(耳門)의 영역으로 들어오면, 소리가 들린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이식과 관련된 처음 인식과정(이문인식과정)입니다.
그 다음에 이식은 받아들인 소리의 본성에 대해 당연히 해야 하는 조사를 합니다. 이것이 첫 번째 의문인식과정입니다.
두 번째 의문인식과정에서는 인지된 소리에 이름이 붙여집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세 번째 의문인식과정에서, 소리에 주어진 이름에 수반된 빤냣띠가 적절한지 평가됩니다.
대상이 소리를 만들면 귀는 듣기만 합니다. 이를 사띠로 주시하기만 하고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않을 때, 듣는 과정(이문인식과정)을 멈추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때 그 자리에서 이문인식과정은 더 이상 진행되지 않습니다.
사띠하지 못하면, 소리를 회상하고 소리에 대해서 생각할 때 상카라들과 행동들이 작용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의문인식과정이 인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때까지도 의문인식과정의 마음이 소리를 알기만 할 뿐입니다. 빤냣띠는 아직 생기지 않았습니다. 이때 사띠로 주시할 수 있다면 자와나는 소리에 대한 빠라맛타 단계에서 멈춥니다.
더 이상 정신 작용이 진행되지 못하게 정지시키지 못하면, 두 번째 의문인식과정의 마음이 누구의 목소리인가에 대해 생각할 것이고, 나아가서는 세 번째 의문인식과정이 그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별하는 데까지 진행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그에 대해 여러분의 마음속에 축적되어 있는 과거의 정보에 따라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의문인식과정이 번뇌를 만들어 냅니다. 그러므로 듣자마자 들음을 알아차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상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현상을 사띠로 주시하지 못하면 빤냣띠로 넘어갈 것이다. 빠라맛타에서 멈추게 하기 위해서는 다음 사항을 명심해야 한다.
⑴ 듣는 순간 사띠로 주시하라
(이문인식과정이 생기는 순간 주시하라.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첫 번째 의문인식과정이 일어나는 순간 주시하라).
⑵ 첫 번째 의문인식과정이 끝나는 순간 정지시켜라
(그렇게 할 때, 두 번째 의문인식과정이 생기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들을 때 듣기만 하라’는 말과 일치한다).
⑶ 그러면 물질로부터 마음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들음은 물질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주시하고 있으면 마음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과 물질은 그렇게 구별된다. 들음과 주시함은 다음 순간에 사라지기 위해서 생긴다).
⑷ 결국 무상, 고, 무아라는 삼법인을 보게 될 것이다.
21. 들을 때 소리를 관찰하지 못함
5. 소리 들을 때 사띠하지 못하여
그 매력에 마음을 빼앗기면 탐욕이 생기네.
소리가 이문(귀)에 나타나면, 듣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그 소리가 기분 좋고 마음에 드는 것이기를 기대하면서 감상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대개는 불선한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을 생기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소리의 내용에 몰입하여 들으면 사띠하지 못합니다. 소리가 즐거운 것이면 탐욕이 일어납니다. 마치 들음에 동화되는 것처럼 빠져듭니다. 그것을 회상할 때마다 탐욕이 일어나서 또다시 괴롭힙니다. 여기에 대한 예화는 난다 왕자 이야기입니다.
난다 장로
싯닷타 왕자와 난다(Nanda) 왕자는 이복형제였습니다. 전자는 마하 마야(Mahā Māyā) 부인에게서 태어났고, 후자는 마하 빠자빠띠 고따미(Mahā Pajāpati Gotamī)에게서 태어났는데, 이들은 모두 숫도다나(Suddhodana) 왕과 결혼한 자매였습니다. 난다 왕자가 사오일 늦게 태어났습니다. 마하 마야가 출산한지 칠 일만에 죽자 마하 빠자빠띠 고따미는 자신의 아들은 유모에게 맡기고 싯닷타에게 자신의 젖을 먹여 키웠습니다.
싯닷타 왕자는 깨달아서 부처님이 된 다음 라자가하(Rājagaha. 王舍城)를 처음으로 방문하였습니다. 부처님이 도착한지 사흘 후에, 숫도다나 왕은 둘째 아들 난다 왕자와 약혼녀 자나빠다 깔랴니(Janapada kalyānī) 공주의 결혼식을 마련했습니다. 부처님도 초대받았기에 왕궁으로 가서 탁발을 했습니다. 정사(精舍)로 돌아오기 직전, 부처님은 난다 왕자에게 자신의 발우를 주고 따라오라고 했습니다. 왕자는 형님의 위엄에 압도당하여 시키는 대로 했지만, 부처님께서 언젠가는 발우를 돌려주고 자기를 놓아주리라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왕궁을 막 떠나려고 할 때 자나빠다 깔랴니 공주는 그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왕자님, 빨리 돌아오세요!”
그러나 부처님은 일단 정사로 돌아오자 동생에게 “비구가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왕자는 황색 가사를 입을 마음은 없었지만 위엄에 압도되어 “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계를 받았지만 전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그는 이렇게 불평했습니다. “나는 이 거룩한 수행을 하는 것이 행복하지 않다. 더 이상 비구 생활을 할 수 없으니 환속하겠다.”
난다 장로가 비구 생활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소문을 마침내 부처님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깨달으신 분은 난다에게 왜 그러냐고 물으셨습니다. 신참 비구는 부처님께 자나빠다 깔랴니가 빨리 돌아오라고 부르는 소리가 귀에 윙윙거린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부처님은 동생의 손을 잡고 최근에 불이 나서 황량하게 타버린 들판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거기서 불에 그슬린 통나무 옆에 앉아 있는 보기 흉하게 늙은 불구 원숭이 노파를 보여주었습니다. 거기서 천신들이 사는 삼십삼천(도리천)으로 가서 사랑에 번민하는 왕자에게 500명의 아름다운 천녀(天女)들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서 부처님은 자나빠다 공주와 천녀 중의 한 명과 비교할 때 누가 아름다운지 난다 장로의 의견을 물었습니다. 그는 “세존이시여! 자나빠다 깔랴니는 천녀들과 비교하면 마치 조금 전에 본 늙은 원숭이와 같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난다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비구 생활을 잘 해라! 지금 보고 있는 미녀 500명을 네가 얻게 될 것을 내가 약속하마.” 두 사람이 천상에서 내려온 다음, 난다 장로는 언젠가는 천녀에 대한 자신의 욕망이 달성되리라는 맹목적인 희망을 가지고 승려로서의 수행을 열심히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난다 장로가 아름다운 천녀를 아내로 삼겠다는 꿈을 가지고 수행을 한다는 소문이 정사에 퍼졌습니다. 도반들은 그를 물질적 이득을 위해서 일하는 일당을 받는 노동자나 심지어는 노예와 비유하였습니다. 심한 굴욕감을 느낀 그는 홀로 떨어져서 수행 대상에 마음을 기울였습니다. 그의 내부에서 모든 번뇌가 말라버릴 때까지 최대한의 노력과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수행을 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도의 지혜와 과의 지혜를 얻고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소리를 듣는 순간 사띠로 주시하지 못하면, 회상할 때마다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그 소리를 들으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갖가지 느낌으로부터 갈망이 생깁니다.
6. 소리에서 생긴 탐욕과 성냄이
집착하는 이를 괴롭히니
마음은 고통에 빠지네.
수행하지 않고 고통을 짊어지고 다니는 이는
열반으로부터 멀어지리.
봄의 마음가짐에서 충분히 이야기했으므로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을 것입니다. 봄을 들음으로 대체하기만 하면 됩니다.
22. 소리를 관찰하면 열반에 다가간다
7. 소리 들을 때 사띠로 지켜보면
탐욕이 생기지 않아 현혹되지 않네.
8. 소리 들을 때 소리에 빠지지 말고
듣기만 하고 들음을 느끼기만 하라.
그러면 고통은 멈추게 되리라.
수행자는 이렇게 수행해야 한다.
이러한 수행자에게 열반은 멀지 않으리.
이 게송들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봄에 대해서 말한 것을 적절히 변경하면 들음에 대한 것이 되며, 이는 격언으로 표시한 요약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23. 위빠사나 질문 Ⅲ
부처님께서는 말룽꺄뿟따에게 다음과 같이 세 번째 질문을 하셨습니다.
“말룽꺄뿟따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다음 질문에 대해서 최선의 대답을 해 보아라. 이전에 네가 가까운 과거나 오래 된 과거에도 냄새 맡은 적이 없고, 지금 현재 냄새 맡고 있는 것도 아니고, 미래에도 냄새 맡으리라고 기대할 수 없는 어떤 냄새가 있다고 하자. 그러한 대상에 대해 네가 욕구나 탐욕이나 애정을 가질 수 있겠느냐?”
말룽꺄뿟따는 가까운 과거나 오래 된 과거에도 냄새 맡은 적이 없고, 지금 현재 냄새 맡고 있는 것도 아니고, 미래에도 냄새 맡으리라고 기대할 수 없는 냄새에 대해서는 욕구나 탐욕이나 애정이 생길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알지 못하는 특성에 대해서는 욕망이 생기지 않으니, 그것을 관찰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냄새와 코 의식[鼻識]을 관찰하지 못하면 열반에 가까이 가지 못할 것입니다.
24. 냄새 맡을 때 냄새를 관찰하지 못함
말룽꺄뿟따의 대답에 만족하신 부처님께서는 “훌륭하다!”라고 말씀하시고 앞서와 같은 방법으로 네 개의 게송을 읊으셨습니다.
9. 냄새 맡을 때 사띠하지 못하여
그 매력에 마음을 빼앗기면 탐욕이 생기네.
수행자들은 향기를 즐길 기회가 별로 없습니다. 그들은 주로 역겨운 냄새에 대해 혐오감을 느끼게 되는 것을 염려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향기를 동경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런 집착이 법을 잊어버리게 합니다.
10. 냄새에서 생긴 탐욕과 성냄이
집착하는 이를 괴롭히니
마음은 고통에 빠지네.
수행하지 않고 고통을 짊어지고 다니는 이는
열반으로부터 멀어지리.
여기서도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수행에 실패하면 열반으로부터 멀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25. 냄새를 관찰하면 열반에 다가간다
11. 냄새 맡을 때 사띠로 지켜보면
탐욕이 생기지 않아 현혹되지 않네.
12. 냄새 맡을 때 냄새에 빠지지 말고
냄새 맡기만 하고 냄새 맡음을 느끼기만 하라.
그러면 고통은 멈추게 되리라.
수행자는 이렇게 수행해야 한다.
이러한 수행자에게 열반은 멀지 않으리.
고통을 없애려면 냄새가 마음에 나타날 때마다 사띠로 주시하십시오. 지금부터 맛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위빠사나 수행법을 알게 될 것입니다.
26. 위빠사나 질문 Ⅳ
부처님께서는 말룽꺄뿟따에게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말룽꺄뿟따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다음 질문에 대해서 최선의 대답을 해 보아라. 이전에 네가 가까운 과거나 오래 된 과거에도 맛본 적이 없고, 지금 현재 맛보고 있는 것도 아니고, 미래에도 맛보리라고 기대할 수 없는 어떤 맛이 있다고 하자. 그러한 대상에 대해 네가 욕구나 탐욕이나 애정을 가질 수 있겠느냐?”
여기서 맛이라는 즐거움에 대해 인간이 얼마나 약한가에 대해 잠깐 이야기하겠습니다. 외국에서 수입된 과일이나 과자를 먹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그런 것들을 즐겨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먹고 싶어 하는 탐욕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얼마나 맛있는지 아는 사람들은 그것들에 대한 갈망이 생깁니다. 맛이 생기는 바로 그 순간 먹고 있음이나 맛을 관찰하면 번뇌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27. 맛 볼 때 맛을 관찰하지 못함
13. 맛 볼 때 사띠하지 못하여, 그 매력에 마음을 빼앗기면 탐욕이 생기네.
먹고 있음이나 맛을 항상 관찰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보통 불자들은 이 먹는 것에 대한 수행을 알지 못합니다. 수행을 좀 하는 사람들조차, 음식을 먹을 때 맛을 알면 되지 사띠로 주시할 것은 없다고 생각하고 중요시하지 않습니다. 이는 위빠사나 수행의 가르침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태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맛을 관찰하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고, 수행 시간을 늘리기 위해서 식사는 빨리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대부분의 수행자는 음식에 대해 사띠하지 않아서 떳떳하지 않습니다. 일단 먹을 때 맛을 주시하지 못하면, 사띠를 잊고 맛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것은 식사를 즐기겠다는 욕망을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모든 음식물은 맛있게 준비되고 요리됩니다. 재가불자들이 스님에게 공양을 올릴 때는 맛있게 하려고 특별히 신경을 써서 만듭니다. 이는 우리가 얼마나 혀 의식[舌識]의 계발을 중요시해야 하는가를 알려 줍니다.
나는 몰라메인(Mawlamyaing)의 따웅웨인 갈라이 땍 꺄웅(Taungwaing Galay Taik Kyaung) 사야도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한때 그는 공양을 드린 재가불자에게 “승려들은 평소에, 맛있는 음식이 마치 비위에 거슬리는 듯이, 맛을 부정하는 것처럼 사띠를 가지고 제공된 음식을 먹는다.”라고 법문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그 재가불자는 “스님, 제가 스님께서 좋아하시는 맛있는 음식을 준비했는데 비위에 거슬린다고 보는 것은 아주 부적절합니다.”라고 항의했습니다. 음식을 제공하는 사람은 대개 공양을 받는 사람이 맛있게 먹도록 준비하므로, 그의 말은 아주 논리적입니다. 여기서 먹을 사람의 입맛에 맞도록 음식을 준비하는 것은 음식을 제공하는 사람의 책임입니다. 승려들은 번뇌가 달라붙지 못하도록 맛있는 것을 비위에 거슬리는 것으로 보는 가르침을 묵묵히 따릅니다.
그러므로 승려의 행동은 반조의 지혜에 따라서 내성(內省)하면서 먹을 것을 요구합니다. 재가불자와 달리 승려들은, 즐기거나 탐닉하거나 살찌거나 풍요함을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몸과 생명을 유지하고 배고픔과 갈증을 해소하고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수행을 하기 위해서 음식을 먹습니다. 물질인 ‘음식에 대해 혐오하는 인식’에 집중하는 수행을 한다면 더욱 좋은 일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청정도론(Visuddhi Magga)을 보십시오. 그러나 우리의 목적에 가장 적합한 것은 염처경대로 수행하는 것입니다.
14. 맛에서 생긴 탐욕과 성냄이
집착하는 이를 괴롭히니
마음은 고통에 빠지네.
수행하지 않고 고통을 짊어지고 다니는 이는
열반으로부터 멀어지리.
여기서는 냄새를 맛으로 바꾸는 것 외에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세 가지는 의식주입니다. 이 세상에는 수백만 명이 굶주리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식량을 구하는 것이 커다란 짐입니다. 사람들은 식량을 구하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합니다. 살기 위해 분투하면서 정당하건 부당하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원하는 것을 손에 넣으려고 하고, 상대방으로부터의 경쟁이나 반대에 부딪치면 화를 냅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이 경우는 맛을 관찰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욕망과 집착으로부터 발생된 것입니다. 번뇌에 압도당하면, 고통의 순환을 생기게 하는 업과 과보에 의해 고통 받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음식과 식사를 관찰하는데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들이 음식을 관찰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것은 거의 습관입니다. 이런 습관은 점점 강화됩니다. 그런 경우는 고통을 지속적으로 축적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28. 맛을 관찰하면 열반에 다가간다
15. 맛 볼 때 사띠로 지켜보면
탐욕이 생기지 않아 현혹되지 않네.
이것은 맛을 보는 순간 맛 의식[舌識]의 현상에 대해서 위빠사나 수행을 하려는 수행자에게 적절한 가르침입니다. 이는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맛을 사띠로 주시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수행자는 식탁에 앉아서 차려진 음식을 볼 때, 보고 있음을 주시합니다. 음식을 집으려고 손을 들어 올릴 때, 손을 들어 올리고 있음을 주시합니다. 한 수저를 뜰 때 한 수저를 뜨고 있음을 주시합니다. 입으로 가져갈 때 입으로 가져가는 것을 주시합니다. 입에 닿을 때 입에 닿는 것을 주시합니다. 입을 벌리고 입에 넣고 입을 다물고 손을 내리고 손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그 동안 음식을 씹고 있는 것, 이 모든 것이 진행되고 있는 것을 주시합니다. 손이 움직이고 음식을 씹음에 따라 움직임의 요소인 풍대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손에 뜨거운 것이 닿을 때 열기 요소인 화대가 작용하고 있음을 압니다. 혀에서 달거나 신맛을 느낄 때, 맛의 특성을 주시합니다. 그렇게 먹거나 맛보는 것과 관련된 모든 현상을 주시할 때, 욕구를 제거하고 나아가서는 탐욕을 제거합니다.
집중력이 강화되면 수행자는 맛은 맛일 뿐 다른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는 특정한 접시의 닭고기가 맛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는 음식에 대한 쾌락을 버렸다는 뜻입니다. 이런 식으로 번뇌를 제거해 갑니다.
이 선원의 수행자들의 경험이 그 증거입니다. 수행자가 먹을 때, 음식의 향기와 달콤한 맛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러나 느끼자마자, 냄새와 맛과 코 의식과 혀 의식과 그 의식을 아는 마음이라는 현상들은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수행자가 맛은 맛일 뿐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탐욕이 작용할 기회가 없습니다. 어떤 수행자들은 맛의 현상을 주시하고 있으니까 음식의 맛을 모르고 먹을 때가 있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있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욕망과 집착이라는 번뇌가 없기 때문에, 먹은 음식으로부터 즐거움이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집착이 없기에, 음식을 허겁지겁 먹을 때처럼 느낌에 포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16. 맛 볼 때 맛에 빠지지 말고
맛보기만 하고 맛봄을 느끼기만 하라.
그러면 고통은 멈추게 되리라.
수행자는 이렇게 수행해야 한다.
이러한 수행자에게 열반은 멀지 않으리.
수행자도 다른 보통 사람들처럼 식사를 하고 음식 맛을 느낍니다. 그러나 즐기는 수단으로서의 맛을 부정하기 때문에, 맛과 관련하여 선업도 불선업도 짓지 않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맛은 업이나 과보를 만들지 않습니다. 업이 없으니 새로운 유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고통 순환의 끝이 될 것입니다.
12연기는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느낌이 진정될 때 갈애가 생기지 않으므로, 집착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번뇌인 업과 과보가 작용하지 않게 됩니다.
흔들림 없이 확고하게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수행자는, 그러한 고통의 원인이 제거됨에 따라, 그 동안 마음의 평화가 유지되는 ‘순간적 열반’의 상태를 획득합니다. 이것이 결국 거룩한 도(道)의 지혜와 과(果)의 지혜의 성취로 인도합니다.
29. 법 체험
먹고 있을 때 생기는 현상을 관찰하여 열반을 체험하는 많은 사례들이 주석서에 나와 있습니다. 스리랑카에서는 옛날에 승려들이 평상시 탁발할 때 식사할 수 있도록 휴식처를 많이 지어 놓았습니다. 거기서 이른 새벽에 죽을 먹고, 같은 장소에서 탁발해 온 음식으로 온전한 식사를 하는 것이 하루 일과였습니다. 그들의 대부분은 먹는 동안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이것이 예외라기보다는 관습이었습니다.
인시설론 주석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걷고 서고 앉고 눕거나 혹은 가벼운 음료나 딱딱한 식사를 하는 동안, 절대적인 신념의 힘을 가지고 혼신의 힘을 다해서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도의 지혜와 과의 지혜를 깨달을 수 있다. 그렇게 수행할 때 지혜를 얻는데 실패하는 경우란 없다.”
먹을 때 먹는 모든 과정을 상세히 주시하십시오. 혼자서 식사할 때는 그렇게 하기 쉬울 것입니다. 음식을 한 숟가락 먹을 때 주시할 만한 작은 사건들이 약 60가지가 있을 것이며, 그렇게 주시하기를 계속한다면 식사하는데 약 한 시간 걸릴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 함께 먹게 되면 그렇게 주시하기가 불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해 보십시오.
30. 위빠사나 질문 Ⅴ
말룽꺄뿟따에게 물은 다섯 번째 질문은 이렇습니다.
“말룽꺄뿟따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다음 질문에 대해서 최선의 대답을 해 보아라. 이전에 네가 가까운 과거나 오래 된 과거에도 닿은 적이 없고, 지금 현재 닿고 있는 것도 아니고, 미래에도 닿으리라고 기대할 수 없는 어떤 감촉대상이 있다고 하자. 그러한 대상에 대해 네가 욕구나 탐욕이나 애정을 가질 수 있겠느냐?”
말룽꺄뿟따는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여기서 친숙하지 않은 대상들에 대해서는 번뇌가 일어날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외국산 드레스를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순박한 사람은 그에 대한 취미를 가질 수 없습니다. 우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도 만나거나 본 적이 없는 사람과는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보통 가끔 보거나 듣습니다. 항상 보거나 듣지 않습니다. 항상 먹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맛보는 것도 역시 자주 있는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감촉은 자주 일어나며, 다른 어떤 감각보다 더 두드러집니다. 그것은 앉아 있거나 가만히 서 있거나, 혹은 먹거나 마시고 있을 때에도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날이면 날마다 항상 무엇인가에 닿고 있습니다. 수행자가 관찰할 때에는 다른 어떤 감각대상보다도 감촉을 더 많이 관찰합니다.
경전은 “가고 있을 때는 ‘가고 있음’을 알아라.”고 합니다. 발을 들고, 앞으로 나아가고, 발을 내딛는 것 즉 걸음을 주시할 때, 여러분은 걸어가는 과정과 관련된 모든 움직임을 알아차립니다. 이것이 “걸음을 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알 때는 알기만 하라”는 가르침에 따라서 앎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그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마십시오. 이것이 움직임의 요소인 풍대의 작용을 관찰하는 것이지만, 때로는 열기 요소인 화대, 딱딱함의 요소인 지대가 자동적으로 포함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집중해야할 것은 풍대입니다.
경전은 계속해서 “서 있을 때는 ‘서 있다’고 알아라. 앉아 있을 때는 ‘앉아 있다’고 알아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풍대의 주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서고 앉고 누워 있을 때, 배가 불러오고 꺼지는 것을 지켜봄에 의해 풍대의 작용을 주시하십시오.
31. 들숨날숨에 대한 사띠를 권하지 않는 이유
열 가지 계속해서 생각함 가운데 들숨날숨에 대한 사띠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호흡은 풍대의 작용입니다. 지금쯤 내가 왜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을 사띠하라고 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떠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들숨날숨에 대한 사띠로 위빠사나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청정도론에서 물질인 몸에 대한 사띠인 14가지 신념처를 열거할 때, 들숨날숨에 대한 사띠를 다음과 같이 위빠사나 수행이 아닌 선정(samatha) 수행의 범주에 넣었다는 것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가고 서고 앉고 눕는 네 가지 자세, 분명한 앎(삼빠잔냐) 네 가지, 네 가지 사대인 지수화풍을 분석하는 것은 위빠사나 수행의 범주에 속한다. 한편 들숨날숨에 대한 사띠와 몸의 깨끗하지 못함에 대한 사띠는 사마타 수행의 범주에 속한다.”
그렇게 들숨날숨에 대한 사띠는 삼매 수행, 집중의 계발, 사마디 수행주제, 집중 연습에 속한다고 분명하고도 명백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들숨날숨에 대한 사띠를 주장한다면 위빠사나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사마타를 가르친다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청정도론의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으면서 비난을 반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들숨날숨을 수행대상으로 삼고 싶은 사람은 그렇게 해도 좋습니다.
무애해도와 청정도론은, 들숨날숨에 대해서 사띠할 때 마음을, 들이쉬는 공기의 흐름을 따라가지 말고 코에 집중해야 한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수행자에게 근접 삼매와 본삼매가 생겨서 선정에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 수행자가 한 번에 단 하나의 현상만 주시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 몸의 여러 부위에서 일어나서 느껴지는 현상들을 모두 주시하라고 한다면, 또다시 무애해도와 청정도론에 어긋난다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위빠사나 수행을 하려는 수행자에게 들숨날숨에 대한 사띠를 적극적으로 권장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32. 배의 움직임 관찰은 경전과 일치한다
배의 “부름, 꺼짐”을 관찰하라는 가르침이 정말로 빨리어 경전에서 요구하는 것과 합치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대답은 상윳따 니까야의 육처품을 근거로 해서 “그렇다”입니다. 육처품에는 “육문에 나타나는 정신과 물질이 생기고 사라지는 것을 주시하지 못하면 번뇌가 쇄도하고, 주시하면 번뇌를 억제하여 도의 지혜와 과의 지혜를 깨달음을 통해서 열반에 가까이 다가간다.”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내가 지금 현재 설명하고 있는 말룽꺄뿟따경도 이 점에 있어서 명백합니다. 적합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염처경의 가르침에서 사대를 분석하라고 하는 것은, 네 가지 기본 요소에 의해 생기는 분명한 현상을 관찰하라는 것입니다. 배의 움직임을 보는 수행은, 사대 분석법이 요구하는 대로, 풍대(사대 중의 하나)인 배의 움직임에 마음을 고정시켜 놓고, 그 풍대의 작용을 주시하는 것입니다. 나는 어려운 빨리어보다 평범한 일상용어를 선호합니다. 그래서 풍대라고 말하기보다는 배의 부름과 꺼짐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이렇게 평범한 대화체로 말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가르치실 때 “‘가고 있다’고 알아라.”라고 단순히 말씀하시는 것과 일치합니다. 지속적인 위빠사나 수행으로 수행자의 집중이 강해지면, 배의 움직임으로 표현되는 동작의 요소의 본성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염처경과 상윳따 니까야의 다른 경전들을 근거로 해서, 수행자는 경전에 많이 나오는 네 가지 자세만이 아니라, 일상생활 중에 취하게 되는 다른 자세나 행동에 대해서도 집중해야 합니다.
배의 부름과 꺼짐을 주시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앉아 있을 때 ‘앉아 있음’이나, 서 있을 때 ‘서 있음’이나, 누워 있을 때 ‘누워 있음’을 주시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호흡을 주시하라고 강조하지는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들숨과 날숨에 대해 선정을 얻은 다음에 위빠사나 수행을 하라는 청정도론과 염처경의 주석서의 가르침에 위배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가 호흡을 주시하더라도 말리지는 않습니다. 이제 원래의 주제로 돌아가겠습니다.
33. 닿을 때 감촉을 관찰하지 못함
17. 감촉에 닿을 때 사띠하지 못하여 그 매력에 마음을 빼앗기면 탐욕이 생기네.
몸의 어느 곳에서나 감촉이 생깁니다. 생명체에 무생물이 닿을 때 그런 느낌이 생깁니다. 팔다리가 서로 닿을 때도 닿은 느낌이 생깁니다. 그런 것들이 외부적인 감촉입니다. 마찬가지로 내부적인 감촉이 있지만 우리들은 모르고 지나칩니다. 예를 들면 혈액이 우리의 몸속에 파묻혀 있는 근육 조직에 흘러 들어가서 닿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르고 살아갑니다.
사띠를 확립하는 수행이 습관이 되지 않은 사람은, 내부적인 것은 그만두고 외부적인 감촉도 완전히 주시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수행을 느슨하게 한다면, 아름다운 것을 볼 때 아름다움은 기억하지만 법은 잊기 쉽습니다. 즐거움을 주는 감각대상을 갈망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어서, 그런 것들이 발견되면 오온이 생기고 사라지는 것을 주시해야 함을 잊습니다. 때로는 못마땅한 광경을 보거나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면 싫어하기도 할 것입니다. 이런 것들도 법을 잊게 합니다.
사띠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 쾌락의 다섯 요소는 번뇌를 생기게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도 쾌락을 즐기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푹신한 침대에서 잠잘 때는 편안함을 즐깁니다. 최신 유행하는 옷을 입으면 자랑하고 싶어집니다. 심지어 매일 건강을 위해서 산책을 하면서도 몸이 아름답게 되리라는 생각으로 기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모든 기쁨과 쾌락들은 감각의 다섯 요소를 숭배하다시피 하는 환경의 산물입니다. 그것들이 번뇌를 만들어 냅니다. 그러한 번뇌가 있는 마음과 열반은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다음 게송은 이렇습니다.
18. 감촉에서 생긴 탐욕과 성냄이
집착하는 이를 괴롭히니
마음은 고통에 빠지네.
수행하지 않고 고통을 짊어지고 다니는 이는
열반으로부터 멀어지리.
보는 것과 듣는 것 등에 대해서 설명한 모든 것을 감촉에도 적용하십시오.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강조되는 것은, 번뇌가 원하는 것에 복종함은 고통의 덩어리를 축적하여 열반에의 길로부터 멀어진다는 사실입니다.
34. 감촉을 관찰하면 열반에 다가간다
19. 감촉에 닿을 때 사띠로 지켜보면
탐욕이 생기지 않아 현혹되지 않네.
서 있을 때 ‘서 있음’을 관찰하는 동안 수행자는 피곤하거나 지루하거나 고통스럽거나 가려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은 둑카 웨다나(dukkha vedanā)라고 하는 괴로운 느낌들입니다. 그런 것들이 나타나면 불편함의 근원에 대해서 집중하거나 피곤이나 통증의 본성을 주시해야 합니다. 이것이 둑카 웨다나를 관찰하는 수행인 느낌 관찰입니다.
열기를 주시하면 화대를 관찰하는 것이며, 딱딱하고 거친 바닥에 닿고 있음을 느끼면 지대를 관찰하는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열기 요소와 움직임의 요소가 동시에 나타나는 것을 느끼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럴 때에는 두 가지 모두를 알아차리십시오.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움직임을 주시해도 좋습니다. 팔과 다리를 구부리거나 뻗을 수도 있습니다. 머리를 앞뒤로 구부릴 수도 있습니다. 눈을 감기도하고 뜨기도 하고 윙크할 수도 있겠지요. 옷을 입거나 세수하거나 목욕하면서 여러 가지 동작을 취하기도 할 것입니다. 소변을 보거나 대변을 볼 때조차도 풍대가 나타났음에 대해 주시할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수행을 많이 하면 말하고 있을 때 말하고 있는 것까지도 주시할 수 있게 됩니다.
배의 부름 꺼짐을 주시하라는 것은 초보자를 위한 것입니다. 원한다면 호흡을 주시하는데 집중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으로 수행을 시작한 적지 않은 수행자들이, 나중에는 배의 부름 꺼짐을 관찰하는 것으로 바꾸었으며, 그렇게 해서 법을 체험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집중력이 강해진 수행자에게는 육문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을 주시하라고 지도합니다.
사띠를 확립하는 수행에 의해서 탐욕이 제거되면 감촉에 집착하는 욕망이 없어질 것입니다.
20. 감촉에 닿을 때 감촉에 빠지지 말고
닿기만 하고 닿음을 느끼기만 하라.
그러면 고통은 멈추게 되리라.
수행자는 이렇게 수행해야 한다.
이러한 수행자에게 열반은 멀지 않으리.
다른 감각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한 것이 이 경우에도 적용됩니다.
35. 바른 수행법을 인정하지 않음
어떤 반대론자들은 수행하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이 수행하는 것을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자기 몸의 움직임을 알고 있으므로 그것을 사띠로 주시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수행 방법을 거부합니다.
수행의 목적은 감각대상이 육근과 실제로 접촉해서, 의식이 일어나는 순간 생기는 번뇌를 예방하는 것입니다. 보거나 들은 적이 없는 것에 대한 관찰은 제외됩니다. 반대론자들은 우리가 가르치는 방법을 비난하기 위해서, 배의 부름 꺼짐을 계속 주시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주장은 말룽꺄뿟따경이나 대념처경에 위배됩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숨 쉬고 있음을 압니다. 자신이 숨 쉬고 있는 것을 모르도록 해야 한다면 터무니없는 말이 될 것입니다.
머리나 팔다리나 배 등의 물질인 몸이나 그 일부를 관찰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전적으로 부처님의 가르침과 반대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위빠사나 지혜를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자신의 몸에 나타난 물질을 보고 주시할 때, 그것은 “볼 때는 봄을 주시하라”는 가르침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같은 방법으로 “닿을 때는 감촉을 주시하라”라는 가르침에 따라 감촉을 관찰해야 합니다. 빨리어 경전이나 주석서에 누가 자신의 육체적 행동을 주시한다면 그만 두게 해야 한다는 말이 없습니다. 모든 육근과 육경과 육식은 몸에서 생기며, 그것들을 주시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은 가르침에 어긋납니다. 그런 생각을 주창하는 사람들은 ‘법이 아닌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위빠사나 수행법을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물질과 정신이 생길 때마다 주시하라. 그러면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가 생길 것이고, 결국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무상)과, 불만족스럽다는 것(고)과, 실체가 없는 것(무아)이라는 삼법인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수행하는 사람은 열반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면 지금부터 의식이 일어나게 하는 원인인 마음의 대상(법)을 관찰하는 것에 대해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가르침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36. 위빠사나 질문 Ⅵ
“말룽꺄뿟따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다음 질문에 대해서 최선의 대답을 해 보아라. 이전에 네가 가까운 과거나 오래 된 과거에도 안 적이 없고, 지금 현재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 미래에도 알리라고 기대할 수 없는 어떤 마음의 대상(법)이 있다고 하자. 그러한 마음의 대상에 대해 네가 욕구나 탐욕이나 애정을 가질 수 있겠느냐?”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말룽꺄뿟따는 아니라고 대답했으며, 부처님께서는 그에게 위빠사나 수행 방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말룽꺄뿟따야! 대상이 보이거나, 들리거나, 감지되거나, 알게 될 때는, 보인 대로, 들린 대로, 감지된 대로, 알게 되는 대로 놓아두어라. 볼 때는 보기만 하고, 들을 때는 듣기만 하고, 감지할 때는 감지하기만 하고, 알 때는 알기만 하라.”
37. 알 때 마음의 대상을 관찰하지 못함
21. 법을 알 때 사띠하지 못하여
그 매력에 마음을 빼앗기면 탐욕이 생기네.
여기서 법은 마음의 대상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으며, 빠라맛타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눈, 귀, 코, 혀, 몸과 마노(意)라는 육근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남자와 여자라는 관념을 만들어 냅니다. 그것은 생명과 영양분이라는 물질적인 것도 포함합니다. 그것은 인간과 신, 소 등의 동물, 항아리나 냄비 같은 현상들, 집과 같은 장소의 모든 개념(빤냣띠)을 포함합니다. 모든 감각대상들은 실재하는 것이거나 가상적인 것이거나 모두 법입니다.
보통사람들은 자연 속에 존재하는 현상들을 볼 때 나무나 숲이나 산이라는 개념(빤냣띠)으로 인식합니다. 무상, 고, 무아를 이해하는 지혜나 조건 지어진 것들이 생기고 사라지는 것을 아는 생멸의 지혜가 생긴 사람들은, 살과 피로 구성되어 있는 실제 대상 이외에, 가끔 신이나 아라한이나 부처님의 모습을 마음의 눈으로 봅니다. 어떻게 보이든 간에, 그것들을 보는 사람의 마음에 드는지 안 드는지에 따라 집착하거나 싫어하게 될 것입니다. 일단 그런 느낌이 생기면, 수행해야 함을 잊어버리고, 본 것을 받아들이고 흡수하고 동화될 것입니다. 그러면 번뇌가 생깁니다. 다음 게송은 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22. 법에서 생긴 탐욕과 성냄이
집착하는 이를 괴롭히니
마음은 고통에 빠지네.
수행하지 않고 고통을 짊어지고 다니는 이는
열반으로부터 멀어지리.
이는 수행하지 않는 사람의 인생이 어둡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수행자의 인생은 다음 게송과 같이 밝습니다.
23. 법을 알 때 사띠로 지켜보면
탐욕이 생기지 않아 현혹되지 않네.
여기서 법(마음의 대상)은 빠라맛타가 아니라 빤냣띠입니다. 그러나 의식은 빠라맛타이며, 마음의 대상에 의해 만들어진 생각과 관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나타나고, 나타난 바로 다음 순간 사라집니다. 그것이 무상입니다.
수행자가 대상을 보는 순간 사띠로 주시하면 주시되자마자 사라집니다. 이때 실제로 일어난 것은 정신인 의식이 사라진 것입니다. 관찰자가 대상에 집중하면 대상에 의해서 생긴 마음이 즉시 사라집니다. 이런 식으로 주시하면 마음에 집착이 생기지 않습니다. 즉 사띠가 탐욕을 추방합니다. 그런 경우에 의식은 일어나기만 할뿐 더 이상 진행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알 때는 알기만 하라.”는 말과 일치합니다. 마음의 대상을 관찰하지 못하면 느낌이 번뇌를 생기게 합니다.
24. 법을 알 때 법에 빠지지 말고
알기만 하고 앎을 느끼기만 하라.
그러면 고통은 멈추게 되리라.
수행자는 이렇게 수행해야 한다.
이러한 수행자에게 열반은 멀지 않으리.
번뇌가 생길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하여,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주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번뇌의 순환이 멈출 때 업과 과보의 순환도 따라서 멈춥니다. 모든 종류의 번뇌가 멈추는 그 특별한 순간에 수행자에게 평화로운 지복이라는 상이 주어집니다. 그 순간이 바로 순간적 열반(tadaṅga nibbāna)의 순간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 열반은 손이 닿는 거리에 있음을 아십시오. 거꾸로 수행하지 않는 사람으로부터는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맺는 말
24개의 게송을 읊으신 후에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말룽꺄뿟따야, 감각대상을 주시하는 방법을 아주 간단하게 설명했으니, 내가 지금 설명한 24개의 게송에 의거하여 그 의미를 보다 광범위하게 이해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희열이 생긴 말룽꺄뿟따는, 감사의 말씀을 올린 다음 부처님께 인사를 드리고 떠났습니다. 그리고는 홀로 숲속으로 가서, 아주 열심히, 사띠하면서, 수행 단 하나의 목적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바로 그 자리에서 통찰지를 얻어서 ‘거룩한 삶’이라는 거룩한 과실을 즐겼습니다. 이제 그는 진리와 직면한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의 탄생은 없습니다. 그는 고귀한 팔정도의 성스러운 삶을 살았으며, 해야 할 일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해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 우리의 말룽꺄뿟따는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한 때 부처님께서 사왓티에서 탁발하고 계실 때, ‘바히야 다루찌리야’(Bahiya Dāruciriya)라는 사문이 다가와서 깨달은 분에게 간단하게 가르침을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법문하셨습니다.
“볼 때는 보기만 하고,
들을 때는 듣기만 하고,
감지할 때는 감지하기만 하고,
알 때는 알기만 하라.”
이것은 말룽꺄뿟따경의 가르침과 똑같습니다. 그러므로 형상, 소리, 향기, 맛, 감촉이나 앎이 생길 때마다 사띠로 주시하라는 이 위빠사나 방법은 아주 간단하지만 의미심장합니다. 나는 1939년부터 거의 40년 간 고귀한 도의 지혜와 과의 지혜와 반조의 지혜에 대해 설명할 때에는, 수천 명의 깨달음을 위해서 이 법문을 해 오고 있습니다. 나는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지금쯤은 도의 지혜와 과의 지혜로 이끄는 지혜를 깨닫게 되었으리라고 믿습니다.
이제 우리가 행한 보시와 지계와 수행의 공덕을, 부모와 친척과 여기에 있는 후원자들과, 모든 인류와 모든 천신들과 모든 우주의 모든 존재들과 함께 나누기를 소망하고 기원하면서 이 법문을 마칩니다. 그들이 이 선업으로 기뻐하고 마음과 몸이 모두 행복하기를 기원합니다.
사두! 사두! 사두!
첨 부
첨부 1.
눈의 문에서의 인식과정(안문인식과정)
물질이 한 번 생겼다가 사라질 때, 아주 큰 대상일 경우에 마음은 다음과 같이 17번 생멸한다. 그 대상이 눈에 보이는 형상인 경우의 마음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1. 지나간 바왕가(過去有分, past bhavanga, aīita-bhavaṅga) - 과보심
2. 바왕가의 동요(有分動, vibrational bhavanga, bhavaṅga-calana) - 과보심
3. 바왕가의 끊어짐(有分斷絶, arrest bhavaṅga, bhavaṅga-upaccheda) - 과보심
4. 오문전향식(五門轉向識, five door adverting consciousness, paññca-dvāra-āvajjana citta)- 작용 마음
5. 안식(眼識, 눈 의식 마음, eye-consciousness, cakkhu-viññāṇa citta) - 과보심
6. 접수 마음(領受識, receiving consciousness, sampaṭicchana citta) - 과보심
7. 조사 마음(判別識, investigating consciousness, santīraṇa citta) - 과보심
8. 결정 마음(確定識, determining consciousness, voṭṭhabbana-citta) - 작용 마음
9~15. 자와나 마음(速行 마음, impulse consciousness, javana citta) -아라한이 아닌 경우에는선심 혹은 불선심
16~17. 여운 마음(保存識, registering consciousness, tadārammaṇa citta) - 과보심
첨부 2.
의문인식과정
의문인식과정(意門認識過程, manodvāra-vīthi)에는 두 가지 즉 ⑴ 제한된 자와나를 가진 욕계의 인식과정 ⑵ 색계, 무색계의 고귀한(mahaggata) 마음과 출세간의 증득과 관계되는 본삼매 인식과정이 있다. 욕계의 인식과정은 다음과 같다.
⑴ 선명한 것
B {C U M J J J J J J J T T} B
⑵ 희미한 것
B {C U M J J J J J J J} B
B : 바왕가(bhavaṅga-citta) - 과보심
C : 바왕가의 동요(有分動, bhavaṅga-calana) - 과보심
U : 바왕가의 끊어짐(有分斷絶, bhavaṅga-upaccheda) - 과보심
M : 의문전향식(意門轉向識, manodvāra-āvajjana citta) - 작용 마음
J : 자와나 마음(速行 마음, javana citta) - 아라한이 아닌 경우에는선심 혹은 불선심
T : 등록 마음(保存識, tadārammaṇa citta) - 과보심
첨부 3.
말룽꺄뿟따 게송
1. 형상을 볼 때 사띠하지 못하여
그 매력에 마음을 빼앗기면 탐욕이 생기네.
2. 형상에서 생긴 탐욕과 성냄이
집착하는 이를 괴롭히니
마음은 고통에 빠지네.
수행하지 않고 고통을 짊어지고 다니는 이는
열반으로부터 멀어지리.
3. 형상을 볼 때 사띠로 지켜보면
탐욕이 생기지 않아 현혹되지 않네.
4. 형상을 볼 때 형상에 빠지지 말고
보기만 하고 봄을 느끼기만 하라.
그러면 고통은 멈추게 되리라.
수행자는 이렇게 수행해야 한다.
이러한 수행자에게 열반은 멀지 않으리.
5. 소리 들을 때 사띠하지 못하여
그 매력에 마음을 빼앗기면 탐욕이 생기네.
6. 소리에서 생긴 탐욕과 성냄이
집착하는 이를 괴롭히니
마음은 고통에 빠지네.
수행하지 않고 고통을 짊어지고 다니는 이는
열반으로부터 멀어지리.
7. 소리 들을 때 사띠로 지켜보면
탐욕이 생기지 않아 현혹되지 않네.
8. 소리 들을 때 소리에 빠지지 말고
듣기만 하고 들음을 느끼기만 하라.
그러면 고통은 멈추게 되리라.
수행자는 이렇게 수행해야 한다.
이러한 수행자에게 열반은 멀지 않으리.
9. 냄새 맡을 때 사띠하지 못하여
그 매력에 마음을 빼앗기면 탐욕이 생기네.
10. 냄새에서 생긴 탐욕과 성냄이
집착하는 이를 괴롭히니
마음은 고통에 빠지네.
수행하지 않고 고통을 짊어지고 다니는 이는
열반으로부터 멀어지리.
11. 냄새 맡을 때 사띠로 지켜보면
탐욕이 생기지 않아 현혹되지 않네.
12. 냄새 맡을 때 냄새에 빠지지 말고
냄새 맡기만 하고 냄새 맡음을 느끼기만 하라.
그러면 고통은 멈추게 되리라.
수행자는 이렇게 수행해야 한다.
이러한 수행자에게 열반은 멀지 않으리.
13. 맛 볼 때 사띠하지 못하여
그 매력에 마음을 빼앗기면 탐욕이 생기네.
14. 맛에서 생긴 탐욕과 성냄이
집착하는 이를 괴롭히니
마음은 고통에 빠지네.
수행하지 않고 고통을 짊어지고 다니는 이는
열반으로부터 멀어지리.
15. 맛 볼 때 사띠로 지켜보면
탐욕이 생기지 않아 현혹되지 않네.
16. 맛 볼 때 맛에 빠지지 말고
맛보기만 하고 맛봄을 느끼기만 하라.
그러면 고통은 멈추게 되리라.
수행자는 이렇게 수행해야 한다.
이러한 수행자에게 열반은 멀지 않으리.
17. 감촉에 닿을 때 사띠하지 못하여
그 매력에 마음을 빼앗기면 탐욕이 생기네.
18. 감촉에서 생긴 탐욕과 성냄이
집착하는 이를 괴롭히니
마음은 고통에 빠지네.
수행하지 않고 고통을 짊어지고 다니는 이는
열반으로부터 멀어지리.
19. 감촉에 닿을 때 사띠로 지켜보면
탐욕이 생기지 않아 현혹되지 않네.
20. 감촉에 닿을 때 감촉에 빠지지 말고
닿기만 하고 닿음을 느끼기만 하라.
그러면 고통은 멈추게 되리라.
수행자는 이렇게 수행해야 한다.
이러한 수행자에게 열반은 멀지 않으리.
21. 법을 알 때 사띠하지 못하여
그 매력에 마음을 빼앗기면 탐욕이 생기네.
22. 법에서 생긴 탐욕과 성냄이
집착하는 이를 괴롭히니
마음은 고통에 빠지네.
수행하지 않고 고통을 짊어지고 다니는 이는
열반으로부터 멀어지리.
23. 법을 알 때 사띠로 지켜보면
탐욕이 생기지 않아 현혹되지 않네.
24. 법을 알 때 법에 빠지지 말고
알기만 하고 앎을 느끼기만 하라.
그러면 고통은 멈추게 되리라.
수행자는 이렇게 수행해야 한다.
이러한 수행자에게 열반은 멀지 않으리.
....................
옮긴이 : 오원탁(香圓)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화공기술사. 삼성 엔지니어링(주)의 프로젝트 매니저를 거쳐 한국가스안전공사 연구소장 역임.
수덕사 부설 무불선학대학원 수료.
인터넷 사이트 : http://cafe.daum.net/satisamadhi
편저 :
"빠알리어-한국어-영어 색인", 2021.
역서 :
"큰 스승의 가르침" (아신 자띨라 사야도의 법문, 행복한 숲, 2005)
"부처의 길, 팔정도" (구나라타나 스님 지음, 아름드리미디어, 2014)
"마하시 스님의 칠청정을 통한 지혜의 향상", (냐나포나카 테라 영역, 2009, 경서원 02-733-3345)
"부처님의 제자들2", (경서원, 2011)
"위빠사나 수행과 24조건", (니나 반 고르콤 지음, 2015, 보리수선원 02-517-2841, ridibook.com에서 전자책으로도 구입 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