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12 믿음(2) - 법문: 위뿔라냐니 식카와띠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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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사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 모든 번뇌 소멸하신 분, 스스로 완전히 깨달으신 부처님께 예경 올립니다.)
붇다왕사 170강 - '믿음'이란 (2)
5번째 믿음에 대해서 하고 있습니다. 1-5) 붇다께서 설하신 담마, 그리고 붇다를 믿는 것이 5번째입니다. 믿음의 뜻이 여러 가지 있는데 붇다가 설하신 법문과 붇다를 믿는 것. 이것도 믿음이라는 거지요. 붇다의 말씀과 붇다를 믿는 것입니다.
6번째 믿음은 1-6) 붇다가 설하신 법문을 믿는데 전혀 의심하지 않고 믿는 겁니다.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완전히 믿습니다. 일말의 흔들림도 없이 믿는 믿음입니다. 붇다의 법문을 한 치도 의심 없이 믿는 믿음, 이것을 6번째 믿음이라고 합니다. 조금 다르죠. 5번째는 붇다의 법문과 붇다를 믿는 것이고 6번째는 붇다의 법문에 대해서 조금도 의심 없이, 한 치도 흔들림 없이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으십니까? 저는 그렇지는 않습니다.
의심하지 않고 믿지는 않습니다. 어떤 것은 의심이 갑니다. 율장은 시대에 따라서 다르죠. 율장에 대해서 얘기가 많은데 율장을 읽어 보면 계속 바뀝니다. 붇다가 율을 정할 때 어떤 경우에는 “목욕을 일주일에 한 번 해라.”라고 합니다. 더운 지방이죠. 더운 지방에서 일주일에 한 번하면 냄새가 나고 옷에서 이가 생기니까 바꿉니다. 하루에 한 번 해도 된다. 계속 바뀝니다. 그 상황에 따라서 어디에 사느냐에 따라서 원래 비구들은 신을 못 신게 되어 있습니다. 신발을 못 신게 되어 있는데 소나 비구로 인해서 신발을 신어도 된다. 뒤가 없는 신발 뒤가 닫히지 않은 신발을 허락하십니다.
운동화나 구두 같은 것은 신으면 안 됩니다. 슬리퍼는 신어도 된다는 거죠. 뒤가 없는 신은 신어도 됩니다. 이렇게 바뀌는데 이렇게 바뀐 이유가 소나라는 이 빅쿠가 워낙 부자 집에서 자라서 발바닥이 연하기도 했지만 소나 빅쿠가 사는 지역이 땅이 아주 찰진 진흙이었습니다. 아주 찰진 진흙땅인 거죠. 땅이 그런 지역이 있잖아요. 물이 잘 빠져서 비온 흔적이 남지 않는 지역도 있고, 소나 빅쿠가 사는 지역은 땅이 아주 찰진 진흙이었습니다. 찰진 진흙 위를 소가 (소는 발에 굽이 있습니다. 말처럼 굽이 있습니다.) 달구지를 끌고 수레를 끌고 지나가고 나면 소발굽으로 찰진 진흙이 말라붙어서 뾰족하게 칼처럼 됩니다. 땅이 칼처럼 뾰족해 지는 거지요. 상상해 보십시오. 진흙바퀴가 지나가고 말발굽이 지나간 자리가 다 뾰족뾰족해지는 겁니다. 굳어서 진흙이 굳어서 그 위를 신을 신지 않고 지나가면 베이겠지요. 그런 길을 다니면 빅쿠들이 신을 신지 않고 다니면 발이 베이는 거지요. 살이 찢기는 거지요. 그 지역의 특성상 그 지역에 한해서 신을 허용하게 됩니다. 이때 소나 비구가 한 말이 있습니다. “내가 엄청난 부잣집 아들이었습니다. 내가 억만금의 재산을 버리고 나왔는데 이 신을 버리지 못 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신을 신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붇다가 신으라고 했는데 신지 않겠다고 합니다. 내가 그렇게 많은 재산을 버리고 나왔는데 이까짓 신을 버리지 못해서 계율을 바꾼다는 게 말이 됩니까? 붇다가 안 된다고 “신어라”, 그 지역의 특성상 맨발로 다니기에 너무 위험한 거죠. 신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소나 비구가 “신의 두께를 정하겠습니다.” 했지요. 신의 두께는 나중에 정해집니다. 신을 신으라고 하니깐 두꺼운 키 높이 신발 이런 거 신고 그래서 나중에 낮은 신을 신도록 신 밑창의 두께를 정합니다. 낮은 신을 신어야 됩니다. 두께가 없는 신을 신어야 됩니다. 이렇게 율장은 경우에 따라 바뀌지요. 그 때 상황을 알지 못하면 이해가 안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지금 시대에 사음(邪淫)이 무엇이냐고 물어왔습니다. 여러 명, 네 분이 물었습니다. 사음을 어떻게 결정짓느냐고, 사음이 뭐냐고. 어떤 경우에 사음이 되냐고. 그래서 성인인 남녀가 관계를 가졌으면 결혼하지 않고 그러면 그게 사음이냐고. 그래서 주석서에는 남자에게는 사음이고 여자에게는 사음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 판결이 났습니다. 미혼인 그러니깐 성인인 두 남녀가 혼인을 하지 않고 성관계를 했을 때 그게 사음인가 사음이 아닌가, 했을 때, 여성에게는 사음이 되지 않고 남성에게는 사음이라는 거죠. 왜냐하면 남성은 꼭 결혼을 하고 성관계를 해야 되는데 여성은 보호관찰에서 벗어난 상태가 되면, 정해지지 않은 꼭 남편이 아닌 존재와 성관계를 가져도 된다고 나와 있다는 거죠. 주석서에 동의하십니까? 이게 전제가 잘못되었습니다. 붇다 당시에 보호관찰 하에 있지 않는 여성이 거의 없었습니다. 붇다 당시에는 그 시대에는 모든 여성은 누군가의 보호관찰 아래에 있어야 했습니다.
아버지, 아니면 결혼을 해서 남편. 남편이 없으면 아들. 우리나라 조선시대에도 아버지에게 의지하고 그다음에 결혼해서 남편에게 의지하고 남편이 죽으면 아들에게 의지했지 않습니까? 인도도 그랬습니다. 그 시대에는 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아들도 없으면 어딘가에 속해야 됩니다. 어딘가 어떤 단체에 속해져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성은 매우 위험한 상태가 되는 겁니다. 반드시 어딘가에 소속되어야 됩니다. 혼자서 지낼 수 없었습니다. 아주 위험한 상태 아무에게도 호소할 데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 시대의 여성은 그러니깐 보호관찰 아래에 있지 않은 여성이라는 것 자체가 그냥 무방비 상태였던 겁니다. 그 시대에는 그런 전제 자체가 잘못된 거지요. 다 보호관찰 아래에 있어야 했습니다. 그 시대 여성은 결혼을 해도 인격체가 아니었습니다. 그 시대의 여성은 운 좋게 좋은 가문에 태어나 좋은 남편을 만나면 다행이었고 그렇지 않으면 뭐 맞아도 그리고 불 태워 죽임당해도 호소할 데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아니죠. 지금은 미투도 있고. 그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모든 여성이 반드시 누군가의 보호 아래에 있어야 했습니다. 보호 아래에 있지 않은 여성이라는 것. 자체가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인격이라는 게 없었습니다. 그 시대에는 아주 부잣집, 위사카 같은 경우는 매우 부잣집 딸이죠. 매우 부잣집 딸은 좀 다르죠. 모든 법이 다르게 적용됩니다. 요즘도 그렇지만 그 시대에는 당연히 법이 다르게 적용되었습니다. 권력이 있고 부가 있으면 다른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렇지 않고 그냥 일반인 여성은 그냥 아무에게도 보호받지 못하는 매우 위험한 상태가 되는 거죠. 현재와 전제가 다른 겁니다. 그 시대에는 혼자 있는 독립된 여성 자체가 아예 없었습니다.
붇다가 설하신 담마에서 전혀 흔들림이 없는 믿음, 이것이 6번째 믿음입니다. 이런 경우는 아라한이 아닐까. 이 테라와다 불교가 테라와다가 된 게 그때에 테라(장로)는 거의 다 아라한이었죠. 500아라한이 모여서 이 첫 번째 상가결집을 하고 붇다 말씀 그대로 다 지키겠다, 이렇게 딱 정해진 거죠. 아라한은 어디에도 걸릴 게 없는 존재들입니다. 목숨에 대해서 연연하지도 않고 생에 대해서도 연연하지도 않고 모든 법을 정말 의심 없이 떨림 없이 믿었습니다. 붇다의 법문에 대해서 전혀 의심하지 않는 것, 이게 6번째 믿음입니다.
7번째 믿음은 담마까티까입니다. 담마까티까는 법을 이야기하는 스님, 법문 잘하는 스님을 담마까티까라고 합니다. 미얀마에서 법문 잘하는 스님, 그리고 그들의 제자. 1-7) 법문하는 스님과 그 스님의 제자, 이들의 법문을 믿는 것. 이것도 믿음이라고 합니다. 법문을 듣고 믿는 거지요. 이것은 법문을 들으면 진짜인지 아닌지 좀 의심해야 됩니다. 듣고 다 믿으면 안 되지요. <깔라마숟따>에 나오는 내용이 이런 거지요. 내가 하는 말이라고 나의 제자가 하는 말이라고 다 믿지 마라 이거죠. 법문을 믿는 것, 법문하는 스님의 법문을 듣고 그리고 그 제자들이 하는 법문을 듣고 믿는 것, 이것도 믿음입니다.
8번째 믿음은 1-8) 업과 업의 결과 그리고 다음 생, 미래생(내생)을 믿는 거죠. 업과 업의 결과와 내생을 믿는 것, 이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런 구절들이 나옵니다. 믿음으로 나는 믿음을 가지고 빅쿠가 되겠습니다. 이렇게 업과 그 업의 결과 그리고 내생, 미래생을 믿고 거기에 의지해서 내가 빅쿠가 되겠습니다. 출가하는 거지요. 업과 업의 결과, 결국은 내생을 믿어서 거기에 의지해서 그 믿음으로 빅쿠계를 받는 거지요. 윤회의 위험을 보고 출가하는 거지요. 윤회라는 게 있는 한 안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출가하는 것. 이게 업과 업의 결과와 내생을 믿는 믿음입니다.
9번째 믿음은 1-9) 세간과 출세간 양쪽 다에 관련된 믿음입니다. 세간(로끼)과 출세간(로꾿따라). 거기서 일어나는 믿음. 두 가지 믿음입니다. 세간의 믿음과 출세간의 믿음. 세간의 믿음이면 삳다(saddha), 실라(sīla), 바훗수따(bahussuta), 짜가(cāga), 빤냐(pañña). 믿음과 그리고 지계. 바훗수따. 여기서 수따(suta)는 법문을 듣는 겁니다. 법문을 듣고 견해가 생기죠. 바른 견해가 생깁니다. 법문을 듣고 바른 견해가 생겼다는 사람들 많이 봅니다. 법문을 듣고 니까야를 읽고 바른 견해가 생겼다. 이런 법문을 듣고 테라와다 법문을 듣고 바른 견해가 생겼다. 책을 읽고 생겼다. 저는 수행을 하고 생겼습니다. 법문을 듣고 생긴 게 아니고. 그리고 또 짜가- 보시. 그리고 빤냐- 지혜. 세간의 지혜와 출세간의 지혜. 사성제에 대한 지혜. 삼법인에 대한 지혜. 이 5가지. 삳다, 실라, 바훗수따, 짜가, 빤냐. 믿음과 지계와 그리고 법문으로 듣는 법에 관련된 이야기들이 있죠. 그리고 보시.
이런 것들을 하는 데 있어서 계를 지키고 법문을 듣고 보시를 하고 지혜가 생기고 원인과 결과를 믿는 지혜가 생기고 이걸 할 때 기본적으로 믿음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것을 믿는 마음이 있어야지 계도 지키고 법문을 계속 들을 수 있고 보시를 할 수 있고 지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일단 일차적으로 믿음이 없으면 계를 지키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죠. 법문 듣고 싶지 않습니다. 매우 불편합니다. 법문 듣기가 매우 불편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그렇습니다. 다른 타종교들은 이 붇다의 법문 듣기 싫어하지요, 이런 믿음이 없으니깐. 그리고 보시하지 않습니다.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 하겠습니까? 믿음이 없는데. 그리고 믿음을 가지고 하는 보시와 믿음 없이 하는 기부가 또 다르죠. 좀 다른 개념입니다. 그리고 빤냐- 지혜. 이것이 다 믿음이 있어야지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믿음 없으면 생겨나지 않습니다. 할 수 없고, 하더라도 잠시이고 금세 바뀌지요. 바뀌거나 후회하거나 화내거나 보시한 것을 화내거나 계를 어기거나 들은 법문을 의심하고 듣고 싶어 하지 않거나 그렇게 됩니다, 믿음이 없으면.
출세간의 믿음은 도와 과, 열반. 이것을 보면 믿음이 당연히 생기죠. 이런 것들이 다 믿음에 의지해서 일어난다는 거지요.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믿음이 있어야지 계도 지키고 법문도 듣고 보시도 하고 그로 인해서 지혜도 더 생기는 것 같습니다. 일단 전제가 믿어야지 가능한 것이지 믿지 않으면 될 수가 없습니다. 이제 그 믿음이 어떤 종류가 있느냐, 이걸 지금 애기하고 있는 거죠. 9번째 믿음입니다. 믿음의 종류가 여러 가지가 있다는 거죠. 여러 단계의 믿음이 있다는 겁니다. 수행을 할 때 믿음이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의 믿음이 제가 보기에는 제일 용감한 믿음인 것 같습니다. 수행을 하려면 많은 것을 짜가(cāga) - 버려야 됩니다. 재산만 버리는 게 아니라 시간도 버리고 인간관계도 그 기간에 포기해야 됩니다. 그 기간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 포기해야 될 수도 있습니다. 재물 보시는 재물을 버리는 거지요 내놓는 건데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들을 버려야 됩니다. 건강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어야 됩니다. 믿음 중에서 제일 큰 믿음이죠. 수행을 하려고 덤벼드는 믿음인 거죠. 그렇지 않고 이것저것 다 챙기면 덤벼들 수 없습니다. 그 기간에 봐야 되는 손해들이 너무 아까운 거지요. 내가 세간에 있으면 할 수 있는 것들이,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인정받을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는데 그걸 다 포기하는 짜가(버림). 이게 안 되면 그 기간이 일주일이든 한 달이든 석 달이든 버릴 수 없습니다. 제일 큰 믿음은 수행하는 믿음이고 출가하는 믿음인 거죠.
10번째 믿음은 1-10) 삳데이야 왇투(saddheyya-vatthu)에 깊이 들어가서 생기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빠사다니야 왇투(pasādanīya-vatthu)에 의해서도 매우 존경하는 마음 일어납니다. 삳데이야 왇투는 뭐냐 하면 믿음을 일으킬 수 있는 대상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믿음을 일으킬 만한 물건을 보고 존경하는 마음이 생기는 거죠. 어떤 게 있겠습니까? 붇다의 사리. 석가 탑, 쉐다곤 탑. 불상, 벽화. 그림 이런 걸 보고 믿음이 생깁니까? 하여튼 이런 뭔가를, '믿음이 생길 만한 대상'(삳데이야 왇투)을 접하고. 천주교에서는 웅장한 성당과 성모 마리아상. 십자가와 예수님. 이런 형상들을 보고 믿음이 생기겠지요. 불교의 믿음은 어떤 기물을 보고 생기는지 에밀레종을 보고 믿음이 생기나 잘 모르겠네요.
그 다음에 빠사다니야 왇투라는 것은 '맑게 하는 대상'이라는 겁니다. 마음이 맑아지게 하는 물건. 이것도 좀 비슷한 거죠. 절이나 상가를 보고, 상가라는 눈으로 보이는 형상이죠. 예를 들어 상가 탁발하는 사진을 보고. 저는 상가 사진 보는 걸 좋아합니다. 이런 것을 보고 믿음이 생길 수 있겠네요. 이런 것들을 보고 일어난 믿음. 이것은 상가라는 사람. 그들에게 있는 실라, 사마디, 빤냐를 느껴서 일어나는 믿음인 거죠 그냥 물질을 보고 일어나는 믿음이 아니라. 이런 믿음이 있습니다. 가사를 보고 일어나는 믿음. 말리까 왕비가 지옥에 있다가 천상계로 태어날 때 자기가 보시했던 가사, (말리까 왕비는 생전에 많은 가사를 보시했습니다.) 지옥 불을 보고 붉은 가사를 떠올린 거죠. 지옥의 불을 보고 가사를 떠올리기도 참 힘들 텐데. 워낙 가사를 보시한 공덕이 있어서 지옥의 불을 보고 가사를 떠올려서 바로 천상계로 올라갑니다. 그런 경우 가사라는 것이 마음을 맑게 하는 물질이 될 수 있겠지요.
이를 달리 말하면 오깝빠나 믿음(okappana-saddhāya)과 빠사다 믿음(pasāda-saddhāya)라고 합니다(삳다야띠 오깝빠나삳다야 빠사다삳다야 saddhāyāti okappanasaddhāya pasādasaddhāya.(디가니까야/3번째 권/134쪽에 대한 주석(D30. 삼십이상경)). 오깝빠나 믿음은 내일 설명할 겁니다. 위빳사나 지혜가 생기면서 생기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생길 만한 대상에) 깊이 들어가서 생기는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지혜로 들어가면서 움직일 수 없게 생기는 믿음, 빠사다 믿음은 그냥 뭔가를 보고 존경하는 마음이 생기는 겁니다. 벽화나 불상이나 탑이나 이런 것들을 보고 좋은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맑아지면서 생기는 믿음이 있습니다.
11번째 믿음이 있습니다. 1-11) 흔들리지 않는 믿음입니다. 뿌리는 흔들리지 않지만 가지와 꽃은 흔들리지요. 뿌리는 흔들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습니다. 뿌리처럼 흔들리지 않는 믿음.(소따빧띠막고 히 삳다야 물랑 나마 sotāpattimaggo hi saddhāya mūlaṃ nāma.(맛지마니까야 주석서/2권/286쪽(M47.관찰자 경)/ 삳다야 물랑 나마띠 아웻짭빠사다부따야 삳다야 Saddhāya mūlaṃ nāmāti aveccappasādabhūtāya saddhāya (같은 내용에 대한 복주석)) 11번째 믿음입니다. 이것은 어떤 믿음일까요?
성자가 되면 이런 믿음이 생기겠지요. 도와 과, 열반을 보면 일단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생깁니다. 이들은 생을 바꿔서 태어나도 믿음이 절대 흔들리지 않습니다. 성자들은 뿌리처럼 흔들리지 않습니다.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입니다. 12번째 믿음은 내일 하겠습니다.
이다노- 뿐냥 아-사왁카야-와항 호-뚜
이마노- 뿐냐바-강 삽바삳따-낭 바-제-마
삽베- 삳따- 수키따- 혼-뚜
(Idha no puññaṃ āsavakkhayāvahaṁ hotu.
이러한 우리의 공덕이 우리를 번뇌의 소멸로 이끌기를.
Ima no puññabhāgaṃ sabbasattānaṃ bhājema.
이러한 우리의 공덕을 모든 존재들에게 회향합니다.
Sabbe sattā sukhitā hontu.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사-두 사-두 사-두
(Sādhu sādhu sādhu.
훌륭합니다, 훌륭합니다, 훌륭합니다)
필사자: 사무량심
편집자: 담마삐야
* 2022-10-12 인터넷
(https://us05web.zoom.us/j/4694074327?pwd=b2pNRUk4VzExbWFMSitFa1Jkc0wyUT09)으로 하신 법문을 필사하였습니다. 필사 후 위뿔라냐니 식카와띠님께 보여드리고 요약, 수정, 추가한 부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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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확고히 뿌리 내린 믿음)
"비구들이여, 만일 다른 사람들이 그 비구에게 '존자는 무슨 이유와 무슨 증거로 '세존께서는 바르게 완전히 깨달으셨고, 가르침은 세존에 의해 잘 설해졌고, 승가는 잘 길을 걷고 있다.'라고 말합니까?'라고 묻는다면, 그 비구는 이렇게 바르게 설명해야 한다.
'여기, 도반들이여, 나는 법을 듣기 위해 세존을 뵈러 갔습니다. 그런 내게 세존께서는 선하고 선하지 않은 법의 이면에 대해 점점 더 높고 점점 더 수승한 법을 설하셨습니다. 도반들이여, 스승께서 내게 이런 방법으로 선하고 선하지 않은 법의 이면에 대한 점점 더 높고 점점 더 수승한 법을 설하실 때, 나는 그 법들 가운데 어떤 법을 최상의 지혜로 알아 여기 어떤 법들에 대해 결론에 도달했고 스승에 대해 청정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세존께서는 바르게 완전히 깨달으셨고, 가르침은 세존에 의해 잘 설해졌고, 승가는 잘 길을 걷고 있다.'라고."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든지 이런 이유들과 이런 용어들과 이런 표현들을 통해 여래에 믿음을 심고 뿌리내리고 정립되면 그런 믿음이야말로 합리적이고 뿌리를 갖춘 확고한 믿음이라고 한다. 신이 사는 세계, 마라가 사는 세계, 범천이 사는 세계, 사문과 바라문의 인간 세계, 하늘 사람이 사는 세계의 그 어느 누구도 그것을 꺾을 수 없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여래를 법답게 관찰했고, 이와 같이 법답게 관찰되었다."
- M47. 관찰자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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