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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좌불교

일상생활에 나타나는 24가지 조건

작성자그림자|작성시간23.04.02|조회수41 목록 댓글 1

"위빠사나 수행과 24조건" (보리수선원 064-744-2841) , 221~231쪽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18장 일상생활에 나타나는 24가지 조건

 

24가지 조건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뿌리 조건(헤뚜 빳짜야)
대상(아람마나) 조건
지배(아디빠띠) 조건
틈 없는(아난따라) 조건
더욱 틈 없는(사마난따라) 조건
함께 생긴(사하자따) 조건
상호(안냐만냐) 조건
의지(닛사야) 조건
강한 의지(우빠닛사야) 조건
선행(뿌레자따) 조건
후행(빳차자따) 조건
반복(아세와나) 조건
(깜마) 조건
과보(위빠까) 조건
음식(아하라) 조건
기능(인드리야) 조건
선정(자나) 조건
(막가) 조건
관련(삼빠윳따) 조건
비관련(위빠윳따) 조건
존재(앗티) 조건
비존재(낫티) 조건
떠난(위가따) 조건
떠나지 않은(아위가따) 조건
 
부처님께서는 생기는 각각의 실재가 어떻게 조건들에 의존하는지를 가르쳤다. 이 조건들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일상생활을 하는 중에 작용하고 있다. 우리가 나의 마음(정신)과 나의 몸이라고 여기는 것은 적절한 조건들 때문에 생기는 요소들일 뿐이며 자아가 없다. 우리는 항상 생기고 사라지는 몸 현상의 조건들을 숙고해야 한다. 우리가 입태되는 순간에 업이 재생연결식과 함께 심장토대를 비롯한 여러 가지 물질들을 만들었고, 살아가는 과정에서도 업은 심장토대와 감각기관들을 계속해서 만들어낸다. 업만이 아니라 마음과 온도와 음식도 몸 물질들을 만들어낸다. 우리가 몸을 만지면 땅 요소지대가 나타나는데, 이것은 생기고 사라지는 요소일 뿐이다. 아무도 그것을 생기게 할 수 없고, 그것은 나의 몸에 속하지 않는다. 실재들에 대한 알아차림을 통해서, 우리가 나의 몸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들 자체의 조건들 때문에 생기는 무상한 요소들일 뿐이라는 진리를 좀 더 분명하게 이해할 것이다.
 
생기는 마음은 여러 가지 조건들에 의존해서 생긴다. 마음은 하나가 생긴 다음에 조금의 틈도 없이 바로 이어서 다음 마음이 생긴다. (안식)은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생기고 봄이 사라진 다음에는 대개 불선심들이 생긴다. 우리는 형상에 집착하거나 그것을 중생 혹은 사람이라고 여긴다. 번뇌들은 축적되었기 때문에 생기고, 순간에서 순간으로, 생에서 생으로 전해진다. 번뇌들은 지금 이 순간에 생기는 불선심에 대하여 자연적으로 강한 의지 조건이다. 불선심은 우리의 본성이 되었지만, 우리가 불선법의 허물을 본다면, 불선법을 뿌리 뽑을 수 있는 바른 이해의 계발을 위한 조건들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 있는 중생 즉 사람과 동물을 본다는 관념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축적된 어리석음과 사견 때문에, 실재를 착각하고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텔레비전에서 사람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우리는 그 속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안다. 스크린에 빠르게 변하는 투사된 이미지들이 우리로 하여금 사람이 움직이고 있다는 환상을 갖게 한다. 이 이미지들은 단지 눈-감성물질을 통해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다른 형상들일 뿐이지만, 우리는 본 것 때문에 개념들을 생각하고, 사람들과 사물들에 대해서 생각한다.
 
실제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봄은 형상만을 보고, 우리는 본 것을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사람이나 사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스크린이나 우리 주변의 세상에서 보는 사람들은 궁극적 의미에서 실재가 아니다. 사람들, 중생들과 사물들의 세계는 개념적인 의미에서는 실재이다.
 
부처님께서는 궁극적 진리와 개념적(관습적) 진리가 있다고 가르쳤다. 우리는 개념적 진리에 대해서, 즉 사람과 사물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려고 할 필요는 없다. 개념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개념을 다루지 않으면서 일상생활을 할 수 없다.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며, 그들을 개념의 관점에서 생각하지 않고는 그들을 도울 수가 없다. 보시하려고 할 때, 무슨 선물을 줄 것인가, 그리고 누구에게 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자애와 연민을 계발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개념적 진리와 궁극적 진리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바른 이해가 계발되면 마음의 대상이 궁극적 실재(빠라맛타 담마, 실재)일 때는 언제이고, 개념일 때는 언제인지 알 수 있게 된다. 이 사람 혹은 저것이 있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그 순간에 마음이 생겨서 하나의 개념을 안다고 깨달아야 한다. 개념을 생각하는 마음은 실재이고, 개념 자체는 실재가 아니다. 일상생활에서 마음의 대상은 실재 혹은 개념이다.
 
육문을 통해서 감각대상들을 경험하는 마음들은 실재들을 경험하지만, 사띠빳타나가 아직 계발되지 않았다면 형상이나 소리 등의 물질들이 실재들이라는 것을 모른다. 사띠빳타나가 계발되고 있으면 개념이 아닌 실재가 사띠의 대상이 된다.
 
실재만이 무상, (둑카), 무아라는 특성이 있다. 번뇌들을 뿌리 뽑으려면, 이 특성들이 있는 그대로 깨달아져야 한다. 우리는 선심 혹은 불선심을 가지고 개념들을 생각할 수 있다. 부처님과 아라한들도 개념들을 생각하지만, 그분들은 개념들에 속지 않았고, 그것들 때문에 번뇌들이 생기지 않았다. 개념들에 집착하고 그것들을 실제로 존재하는 것, 영원한 것인 자아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자기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나 자아라는 개념들에 대한 집착은 다른 많은 종류의 번뇌들을 생기게 하고, 엄청난 슬픔을 생기게 한다.
 
어떤 사람이 소중한 사람을 잃었을 때, 그는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자신의 기억들과 함께, 그에 대한 자신의 꿈들과 함께, 환상과 함께 사는 것과 같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 아직 살아 있어도 우리는 자신의 꿈들과 함께 산다. 즉 우리는 보고 듣고 접촉한다고 믿는 사람을 실재라고 여긴다.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진 사람은 실제로는 상대방에 대한 자신의 개념, 즉 자신이 그 사람에 대해 가진 이상화된 이미지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그는 적절한 조건들 때문에 생긴 여러 가지 다른 마음들인 실재들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사실일 수 없는 것을 기대하고 있을 수도 있는데, 이것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우리는 정신과 물질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들이 생기는 조건들에 대해서 배웠지만, 이론적인 이해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나타나는 궁극적 실재들을 고찰해야 한다. 우리는 봄이 조건 지어진 실재일 뿐이라는 것, 형상이 조건 지어진 실재일 뿐이라는 것을 잊는 경향이 있고, 그래서 우리는 감각접촉들에 쉽게 휩쓸린다.
 
, 들음 등의 전오식은 업의 결과인 과보심들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유익하다. 전오식은 그것들 각각에 해당하는 토대들에서 생기는데, 그 토대들도 업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이 토대들은 전오식보다 먼저 생겨야만 하고, 전오식에게 선행 의지 조건으로 조건이 된다. 물질들인 형상을 비롯한 다른 감각대상들도 전오식보다 먼저 생겨야만 되고, 전오식에게 선행 의지 조건으로 조건이 된다. 각각의 실재는 아주 복잡한 방법으로 작용하는 여러 가지 조건들이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에 생긴다.
 
나타나는 정신과 물질의 모든 조건을 정확하게 알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여러 가지 다른 조건들을 공부하는 것은, 실재들을 통제하는 어떤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실재들은 그것들 자체의 조건들 때문에 생긴다는 것을 우리가 이해하도록 돕는다. 아무도 봄을 생기게 할 수 없다. 과거생들에도 봄이 있었고 다음 생들에도 봄이 있을 것이다. 봄은 형상을 보기만 한다. 봄의 대상은 항상 같은 형상이지만, 보인 것에 대한 생각은 변한다. 어리석음과 함께 하기도 하고 바른 이해와 함께하기도 한다.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은 과거생들에서 서로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서로 다른 존재들이었으며, 미래생들에서도 다를 것이다. 우리는 뿌리 조건에 의해 조건 지어진 마음들로 생각한다. 이 마음들은 불선한 뿌리들을 가질 수도 있고 아름다운 뿌리들을 가질 수도 있다. 보이거나 들리는 것 덕분에 행복이나 슬픔이 있지만, 우리는 실재들을 모른다. 육문 중의 하나를 통해서 하나의 실재가 나타나자마자 사띠하고 있다면, 우리는 실재를 사띠하고 있는 순간들과, ‘전체를 사람이나 사물이라고 하나의 이미지로 생각하고 있는 순간들과의 차이를 알 것이다.
 
한 번에 하나씩 나타나는 실재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행동할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누가 나를 모욕한다고 해도 우리가 생긴 현상들의 조건들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비난하려는 경향이 줄어들 것이다. 누가 우리를 칭찬하거나 비난할 때, 소리를 듣는 것은 선업이나 불선업에 의해서 생긴 과보이다. 남이 우리에게 한 말의 의미를 생각하면 번뇌들이 생기기 쉽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선법조차도 불선법에 대해서 자연적으로 강한 의지 조건이 될 수 있다. 선행할 때 나의 선행에 집착하기 쉽고,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조건을 공부하는 동안 우리는 불선심을 조건 지을 수 있는 많은 요소가 있음을 배웠다. 감각대상들은 불선심에게 대상 조건’, ‘대상이라는 지배 조건혹은 대상이라는 강한 의지 조건으로 조건이 된다. 불선한 뿌리들은 불선심에게 뿌리 조건으로 조건이 된다.
 
불선심이 생길 때에는, 각 자와나 마음이 다음 자와나 마음에 반복 조건으로 조건이 되기 때문에, 한 형태의 마음만이 아니라 일곱 형태의 마음이 있다. ‘탐욕에 뿌리박은 마음이 생길 때 그 마음은, 다른 인식과정에서 생기는 탐욕에 뿌리박은 마음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탐욕을, 특히 그것이 즐거운 느낌과 함께 생길 때, 즐기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에서 생으로 집착을 축적한다. 지금 생기는 탐욕은 미래에 생길 탐욕에 대하여 자연적으로 강한 의지 조건이다. 우리는 자신의 탐욕을 후회할 수도 있는데, 이때 탐욕은 후회를 동반하는 성냄에 뿌리박은 마음의 대상이다. 그렇게 많은 번뇌를 축적해 왔으므로, 우리가 하는 말은 선심보다는 불선심에 의해서 더 자주 생긴다. 우리는 말에 집착하고 그것을 자아그리고 나의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마음이 생김과 동시에 생기는 말 암시라는 물질을 생기게 하는 것은 마음이다. 말할 것을 결정하고 말하게끔 하는 자아는 없다.
 
물질을 생기게 하는 마음은 여러 가지 방법 즉 함께 생긴 조건, 의지 조건, 음식 조건*7), 기능 조건*8), 함께 생긴 비관련 조건, 함께 생긴 존재 조건 및 떠나지 않은 조건으로 물질에게 조건이 된다.
 
*7) 마음은 세 가지 정신적 음식 중의 하나이고, 그렇기 때문에 마음은 음식 조건으로 물질의 조건이 될 수 있다.
*8) 마음은 마노 기능이므로 물질을 기능 조건으로 조건이 될 수 있다.
 
선심이나 불선심이 예를 들어 말 암시인 물질을 생기게 할 때, 함께 생기는 뿌리들은 그 물질에 뿌리 조건으로 조건이 된다. ‘함께 생긴 지배 조건’*11)이 될 수 있는 네 가지 중에서 마음이 지배하는 요소라면, 마음은 자신이 만들어내는 물질에게 함께 생긴 지배 조건으로 조건이 된다. 조건을 공부하는 것은, 우리의 삶은 현상들 자체의 조건들 때문에 일어나는 무상한 현상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삶의 사건들을 통제할 수 있는 자아는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더욱 분명하게 한다.
 
*11) 4장 참조. 원함과 정진과 마음과 검증은 함께 생긴 지배 조건이 될 수 있는 네 가지 요소이다. 적어도 두 개 이상의 뿌리를 가진 자와나 마음만이 지배 조건이 될 수 있다.
 
지금만이 아니라 미래에 불선법을 조건 짓는 많은 요소가 있다. 이 조건들을 배우면 우리는 불선법을 축적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불선법이 고(둑카)로 이끈다는 것을 이해하면, 법을 배우는 목적이 자아가 있다는 사견에 대한 집착의 근절 그리고 모든 번뇌의 근절로 이끄는 바른 이해의 계발임을 잊지 않을 것이다.
 
조건을 공부함은 우리로 하여금 계속 윤회하게 하는 원인이 되는 요소들을 좀 더 이해하도록 우리를 돕는다. 어리석음과 집착 때문에 삶은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으며, 이는 재탄생의 원인이 근절 될 때까지 계속된다. 계속 윤회하도록 선택하는 자아는 없으며, 재탄생의 원인을 근절시킬 수 있는 자아도 없다. 모든 것은 조건들에 의해서 생기지만, 이것이 우리를 절망에 빠뜨리는 것도 아니다. 법을 듣고 법을 철저히 숙고할 때, 우리는 고(둑카)의 종말로 이끄는 바른 조건들을 계발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쌍윳따 니까야셀라 경’(Selā-suttaI, Sagāthā-vagga, V, Suttas of Sisters, §9)에 사왓티에서 마라가 셀라 비구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누가 인간이라는 환영을 만들었는가?
환영을 만든 자는 어디에 있는가?
환영은 어디에서 생겼는가?
환영은 어디에서 소멸하는가?”
 
셀라 비구니가 대답했다.
 
이 환영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며
이 불쌍한 것은 남이 만든 것도 아니네.
원인으로 말미암아 생겼다가
원인이 소멸하면 사라져버리네.
 
마치 씨앗이 밭에 뿌려져
흙 속의 영양소라는 원인,
습기라는 조건,
이 두 가지 때문에 성장하듯이
 
다섯 가지 무더기와 구성요소들
또는 이 여섯 가지 감각장소들은
원인으로 말미암아 생겼다가
원인이 소멸하면 사라져버리네.”
 
그러자 마라는 셀라 비구니는 나를 알고 있다.’라고 하면서 괴로워하고 슬퍼하면서 그곳에서 즉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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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금강 | 작성시간 23.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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