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담맛타 상가하> 7장 범주의 모음(사뭇짜야 상가하 samuccaya-saṅgaha)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사
밋사까 상가하(Missakasaṅgaha)에서 인드리야(indriya) 22가지
18. Bāvīsatindriyāni – cakkhundriyaṃ sotindriyaṃ ghānindriyaṃ jivhindriyaṃ kāyindriyaṃ itthindriyaṃ purisindriyaṃ jīvitindriyaṃ manindriyaṃ sukhindriyaṃ dukkhindriyaṃ somanassindriyaṃ domanassindriyaṃ upekkhindriyaṃ saddhindriyaṃ vīriyindriyaṃ satindriyaṃ samādhindriyaṃ paññindriyaṃ anaññātaññassāmītindriyaṃ aññindriyaṃ aññātāvindriyaṃ. |
인드리야 22가지 중에서 빤닌드리야(paññindriya) 하고 있습니다.
빤닌드리야는 “빤냐(paññā) + 인드리야(indriya)”이죠. ‘빤냐’-지혜가 ‘인드리야’- 지배한다. 아주 강한 빤냐죠. 빤냐의 지배를 받는, 빤냐가 모든 것을 다 잡아버리는, 다 통치하는, 빤냐의 지배 안에 다 들어간 빤닌드리야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강한 ‘빤냐’라는 거죠. 되게 강한, 다 통치할 수 있는, 사로잡을 수 있는 빤냐입니다. 그러면 뭘까? 일단 뺜냐와 함께하는 마음이 아비담마에서 보면 47개 있습니다.
욕계 아름다운 마음 12개
색계 마음 15개
무색계 마음 12개 (이상 세간 마음 39개)
도의 마음 4개
과의 마음 4개(이상 출세간 마음 8개)
합계 47개
도의 마음과 과의 마음 모두 8개는 출세간 마음이고, 나머지 39개는 세간 마음입니다. 이 책(마하간다용 사야도의 <바사띠까>)에서 “세간의 마음에 있는 빤냐만을 빤냐라고 해야 하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아니겠죠. 빤냐가 아주 강한 지배력으로 지배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다. 이 정도 강하게 되면 당연히 도의 마음과 과의 마음이 들어가야겠죠. 빤닌드리야라고 할 만한 빤냐는 도 4개, 과 4개일 테니까. 믿음·노력·사띠·집중·빤냐, 이 다섯 가지가, 네 가지 세상, 욕계, 색계, 무색계, 출세간에 다 필요합니다.
우리가 욕계 선업 지을 때도, 색계 선업 지을 때도, 무색계 선업 지을 때도, 그리고 출세간 도과를 얻기 위한 선업 지을 때, 그리고 도와 과를 얻는 그 순간에도 믿음과 노력과 사띠와 사마디와 빤냐가 모두 있어야 된다는 거죠. 그 수준은 다르겠죠. 초등학생이 아는 수학, 대학생이 아는 수학이 다르듯이 지혜의 수준이 다르겠죠. 이 믿음·노력·사띠·사마디·빤냐의 날카로움과 힘의 세기가 차이가 있겠죠. 어쨌든 네 가지 세상에 다 필요합니다. 다 있어야 하고, 많으면 많을수록 더 좋다.
아난냐딴냣사미띤드리야(anaññātaññassāmītindriya)
1) anaññātaṃ : 안 적이 없는 열반을 또는 사성제를
2) ññassāmīti : 알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3) pațipannassa : 정진하는 존재의
4) indriyaṃ : 인드리야를
‘아난냐딴냣사미띤드리양(anaññātaññassāmītindriyaṃ)’이라고 부른다. (<바사띠까> 中)
위빳사나 수행자가 수다원이 될 때 수다원도의 찰라에 있는 빤냐를 말합니다. 이것을 아난냐딴냣사미띤드리야(anaññātaññassāmītindriya. 이전에 한 번도 안 적이 없는 열반을 알고자 하는 지혜의 힘)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도와 과를 원하는 요기가, 처음을 알 수 없는 윤회, 너무나 아득해서 도대체 시작이 언제인지 모를 만큼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끝없이 죽고, 끝없이 병들고 아프고 하면서도, 이 순간들을 행복이라고 알면서 살고 있습니다.
지혜가 있는 범부들은 그 처음을 알 수 없는 윤회에서, 한 번도 맛본 적이 없는, 좋은 맛, 열반 또는 4성제를 ‘내가 반드시 알도록 노력하겠다.’ 이 마음이 그의 내부에 있습니다.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이거 꼭 얻어야 되겠다. 꼭 맛을 봐야 되겠다. 이 마음이 그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거죠.
그래서 그 서원, 그 마음, 그 열망으로 이 사람이, 이제 어떻게 하면 이것을 맛볼 수 있을까? 이런 마음으로 살다가, 또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고 노력해서, 제일 처음에 얻게 되는 열반의 맛을 제일 첫 순간 보는 게, 수다원의 도의 지혜죠. 제일 처음으로 열반을 맛보는 것, 그전에는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이것을 꼭 봐야 되겠다. 이 서원으로 삽니다. 이 열망으로 삽니다. 방법을 찾아서 늙고 죽음을 지겹게 반복하며 삽니다.
그러다가 그 갈망하던 열반을 찾던 뜨거움이 화르르 타올라 소진되어 처음 맛보는 차가운 맛이 수다원도입니다. 고뜨라부 냐나(gotrabhū ñāṇa. 종성의 지혜)에서도 열반을 보지만, 수다원 도과에서 정말로 열반의 맛을 압니다.
그 전까지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처음은 알 수 없고 언제부터인가 내가 이 열반을 한 번도 못 본 열반을 제일 좋다는 이것은 내가 언젠가는 맛보고 말리라, 이 갈애로 살다가 그 갈애의 종지부를 찍는 거죠. 윤회를 돌면서 한 번도 맛보지 못했던 단 한의 도의 순간에.
제가 번역한 책 <난다말라비왐사 큰스님 가르침>의 마지막 장 ‘찾음과 얻음’ 보셨습니까? 재밌는데… 우리가 찾아다니죠. 허구한 날 찾아다니는데, 행복을 찾아서 다닙니다. 행복, 이걸 하면 행복할까? 저걸 하면 행복할까? 이걸 먹으면 행복할까? 저 옷을 입으면 행복할까? 차를 뭐로 바꾸면, 언제 진급을 하면 행복할까? 연봉을 많이 받으면 행복할까? 어느 나라에 여행 가면 행복할까? 이런 행복을 찾아다니는데, 그게 그때뿐이고 오래 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 욕계 행복이라는 것이 투자한 것에 비해서 그 결과를 받는 유효기간 그 만족감이 현저히 떨어지지 않습니까? 그렇게 느끼지 않습니까? 주식 해서 갑자기 공돈이 많이 생기면 행복합니까? 그 노력에 비해서 만족감 오는 것은 너무 적습니다. 노력 대비 투자 대비 시간과 노력을 들인 것에 비해서, 만족감 그것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은 너무 짧습니다.
하지만 모르죠. 욕계 물질의 행복만 누려본 사람들에게는 그보다 더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행복이 있다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겠죠. 더 나은 행복을 누려보지 못한 사람한테는 그 욕계 행복이 되게 가치 있고 노력 대비 노력 대비 시간 투자 대비, 오래 간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어쨌든 그렇게 나옵니다. 이 욕계 행복(수카)라는 게, 먹고 나면 금방 버려야 되지 않습니까? 먹은 게 얼마나 갑니까? 먹고 나면 다시는 보고 싶지 않습니다.. 먹기 위해서 식당을 찾아가야 하고, 집에서 하면 준비해야 되고, 사야 되고, 썰고 끓여야 되고 먹고 나면 끝나죠. 그렇게 손에 넣고 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욕계 중생으로 태어나 5욕락의 행복만 열심히 쫓아서 살아야죠. 그렇게 하염없이 물거품 같은 행복만 쫓고 살던 존재들이 제일 처음 수다원의 도의 지혜를 얻습니다.
‘아난냐딴냣사미띤드리야(anaññātaññassāmītindriya)’라고 하는데, 아난냐딴냣사미띤드리야 중에 ‘anaññātaṃ’, ‘ññā’는 안다는 뜻입니다. 제 이름 ‘위뿔라냐니(Vipulañāṇī)’ 중의 “냐(ñā)”가 안다는 뜻입니다. ‘윈냐나(viññāṇa)’에도 ‘냐(ññā)’, 빤냐(paññā)에도 ‘냐(ññā)’ 들어갑니다. 그 ‘냐(ññā)’가 안다는 뜻입니다. 그 앞에 ‘안(an)’이 들어가면 반대입니다. 부정의 뜻이 됩니다. ‘아난냐(anaññā)’가 되면 ‘안 적이 없는, 한 번도 안 적이 없는’이라는 뜻입니다. ‘이전에 한 번도 안 적이 없는 열반’ 수다원의 도 이외에 다른 모든 것들은 윤회가 너무 길어서 오랫동안 헤매면서 우리가 다 봤습니다. 욕계 선정, 색계 선정도 봤고, 천상계 5욕락도 누려봤고, 인간계의 최상의 행복도 누려봤는데, 한 번도 맛보지 못한 게 열반인 거죠. 열반 또는 4성제의 통찰지. 열반을 안다는 것은 4성제를 안다는 겁니다. 우리가 열반을 봤으면 4성제 네 가지, 진리 네 가지를 통째로 다 꿰뚫어서 본 겁니다. 열반 하나만 봤으면, 고성제를 알았고, 집성제는 제거했고, 멸성제는 눈으로 봤고, 도성제는 완전히 증장시켰고, 네 가지가 한꺼번에 다 끝나는 거죠. 돌멩이 한 개를 던져서 새 네 마리를 잡은 것이죠. 이렇게 완성되는 거죠.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열반과 그리고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4성제를 ‘아나냐딴낫사미띠(anaññātaññassāmīti)’한 번도 안 적이 없는 4성제를 알 것이다. 내가 알도록 노력하고야 말 것이다. 이렇게 마음을 먹고 수행하는 존재가. 내가 한 번도 못 본 열반, 그리고 그 알지 못하는 4성제를 알아내고야 말겠다. 이렇게 마음먹고 힘을 쥐어 짜내서 수행하는 수행자의 인드리야, 감관을 다스리는 능력이죠. 6문을 다스리죠. 5온을 다스리고 6문을 다스립니다. 6문을 다스린다는 것은 사띠한다는 뜻이죠. 감각기관 여섯 가지를 다스린다는 것은 사띠한다는 뜻입니다.
눈으로 들어오는 대상, 그리고 번뇌, 귀 그리고 마음으로 들어오는 것, 중요한 건 마음인데, 마노돠라(mano-dvāra), 이 의문(意門)을 완전히 다스리기 위해서 다스려야 되는 게 5문, 몸에 붙은 문들이죠. 몸을 다스려야 되는 거지. 모두 다 잘 사띠할 수 있어야 됩니다. 수행이 재밌지 않습니까? 재밌죠. 제일 재밌는 게 수행이죠.
이걸 다스리는 것이 ‘아난냐딴냣사미띤드리야’입니다. 그러니까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열반, 그리고 4성제를 ‘ññassāmīti’, ‘내가 알고야 말리라’. 이렇게 이 마음으로, 쥐어짜내서 수행하는 수행자의 그 감관을 다스리는 능력, 통제 능력, 인드리야, 이것이 아난냐딴냣사미띤드리야입니다.
또 아난냐딴냣사미띤드리야에 이어서 안닌드리야(aññindriya), 안냐따윈드리야(aññātāvindriya)를 합쳐서 출세간의 지혜가 모두 세 가지입니다.
안닌드리야(aññindriya)
1) a - 아자나띠(ājānāti) : 아래 도에서 구분해 확고히 안 것을 다시 분명히 안다.
2) iti : 그래서
3) 안냐(aññā)라고 한다. 수다원 도에서 안 사성제를 다시 아는 중간 6가지 지혜(수다원과~아라한도)를 안닌드리야(aññindriya)라 한다.
안냐따윈드리야(aññātāvindriya)
1) 아자닏타(ājānittha) : 아래 도에서 이미 알았다. 하지만 아는 일을 완전히 마쳐서
2) iti : 그래서
3) 안냐따위(aññātāvi)라고 한다.
4) 업이 다하고, 길(道)이 다하고, 힘을 다 바쳐서 안, 모든 에너지를 소진해 안 아라한과를 안냐따위(aññatavi)라고 한다. (<바사띠까> 中)
아난냐딴냣사미띤드리야, 안닌드리야, 안냐따윈드리야, 이 세 가지가 다 빤냐죠. 이것은 모두 열반을 볼 때의 빤냐인데, 차이점이 무엇인가?
10. Dasa saṃyojanāni – kāmarāgasaṃyojanaṃ rūparāgasaṃyojanaṃ arūparāgasaṃyojanaṃ paṭighasaṃyojanaṃ mānasaṃyojanaṃ diṭṭhisaṃyojanaṃ sīlabbataparāmāsasaṃyojanaṃ vicikicchāsaṃyojanaṃ uddhaccasaṃyojanaṃ avijjāsaṃyojanaṃ suttante. 10. 10가지 족쇄는 -5욕락(감각욕망 족쇄), 색계 갈망 족쇄, 무색계 갈망 족쇄, 적의 족쇄, 자만 족쇄, 유아견 족쇄, 계행과 의식에 대한 족쇄, 의심 족쇄, 들뜸 족쇄, 무명 족쇄이다. (경전 방법의 의하면) 11. Aparānipi dasa saṃyojanāni – kāmarāgasaṃyojanaṃ bhavarāgasaṃyojanaṃ paṭighasaṃyojanaṃ mānasaṃyojanaṃ diṭṭhisaṃyojanaṃ sīlabbataparāmāsasaṃyojanaṃ vicikicchāsaṃyojanaṃ issāsaṃyojanaṃ macchariyasaṃyojanaṃ avijjāsaṃyojanaṃ abhidhamme (vibha. 969). 11. 또 다른 10가지 족쇄(상요자나)는 – 5욕락(감각욕망 족쇄), 존재 갈망 족쇄, 적의 족쇄, 자만 족쇄, 유아견 족쇄, 계행과 의식에 대한 족쇄, 의심 족쇄, 질투 족쇄, 인색 족쇄, 무명 족쇄이다. [아비담마(위방가)의 의하면] |
경장과 논장이 다르지만 각각의 도에서 제거되는 상요자나(족쇄)는 경장 방식으로 공부하기로 합니다.
수다원도에서 제거되는 상요자나(saṃyojana)는 유아견, 실랍바따빠라마사, 의심 모두 3가지입니다. 실랍바따빠라마사(sīlabbataparāmāsa. 계행과 의식에 대한 집착)는 잘못된 수행방법을 매일매일 반복해서 하면서 내가 번뇌에서 벗어날 것이다. 이렇게 확고하게 믿는 것입니다. 의심은 팔정도에 대한 의심입니다. 위빳사나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도 되지 않을까? 이거 너무 어려운데 다른 편한 방법으로도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절을 한다거나 목탁을 친다거나 붓다눗사띠, 붓다를 상기한다거나, 챈팅을 한다거나, 세간 선정을 해서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의심하는 마음을 제거합니다. 수다원의 도의 지혜로 제거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마치겠습니다. 회향하겠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공덕이 우리를 번뇌의 소멸로 이끌기를.
이러한 우리의 공덕을 모든 존재들에게 회향합니다.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사-두 사-두 사-두!
편집자: 담마삐야
* 2023-06-05 인터넷 (https://us05web.zoom.us/j/4694074327?pwd=b2pNRUk4VzExbWFMSitFa1Jkc0wyUT09)으로 하신 법문을 필사하였습니다. 필사 후 위뿔라냐니 식카와띠님께 보여드리고 요약, 수정, 추가한 부분이 있습니다.
출처 : https://cafe.naver.com/dhammadipakorea/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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