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담맛타상가하> 9장 깜맛타나(kammaṭṭhāna. 수행 주제) : 우빠사마눗사띠(열반 상기) (1)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사
깜맛타나 장에서 아눗사띠(anussati) 10가지 강의하고 있습니다.
8. ①Buddhānussati ②dhammānussati ③saṃghānussati ④sīlānussati ⑤cāgānussati ⑥devatānussati ⑦upasamānussati ⑧maraṇānussati ⑨kāyagatāsati ⑩ānāpānassati ceti imā dasa anussatiyo nāma. |
아눗사띠(anussati)는 상기하면 좋은 것을 거듭해서 상기하는 것입니다. 붓다눗사띠(buddhānussati) : 붓다의 공덕 9가지에 대한 상기, 담마눗사띠(dhammānussati) : 법의 공덕 6가지에 대한 상기, 상가눗사띠(saṅghānussati) : 상가의 공덕 9가지에 대한 상기입니다. 실라눗사띠(sīlānussati), 지계의 공덕을 상기함은 자신이 잘 지키고 있는 계를 상기하는 것입니다. 큰 허물이 없게 살았다는 뜻이죠. 나쁜 말과 행동을 하지 않고 잘 살아왔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선업을 상기하고 기분 좋은 겁니다. 짜가눗사띠(cāgānussati)는 버림, 자신의 보시를 떠올려서 마음이 흡족한 것입니다. 아눗사띠는 자기 마음 편하여 번뇌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하는 겁니다.
여섯 번째 데와따눗사띠(devatānussati)에서, 데와따는 천신이니까 데와따눗사띠는 천신들을 거듭 상기하는 겁니다. 천신과 범천들을 증인으로 세우고 내가 지은 선업을 거듭거듭 숙고하는 겁니다. 숙고하고 기억하는 겁니다. 내가 이번 생에 한 좋은 일을 기분 좋게 계속해서 상기하는 겁니다. 아눗사띠는 마음을 편하게 하려고 하는 수행입니다. 번뇌가 있으면 피곤하지 않습니까? 번뇌가 없는 기분 좋은 상태, 마음이 편한 상태를 만들기 위해서 좋은 대상을 거듭 상기하는 겁니다.
실라눗사띠, 짜가눗사띠, 데와따눗사띠, 지계는 자신이 바르게 산 것을 상기하고, 짜가는 자신의 보시 공덕을 떠올리는 거죠. 데와따눗사띠는 내가 지은 선업, 내가 이번 생에 지은 선업이 천신과 범천들 앞에 내놔도 부끄러울 게 없다. 내가 그에 버금간다. 이렇게 생각하고 떠올리는 겁니다. 나 자신의 선업 - 삿다(신심), 실라(지계), 수따(경전에 대한 지식. 붓다의 말씀에 대한 이해), 짜가(보시), 빤냐(지혜), 히리(부끄러움), 옷땁빠(두려움) 이것은 참사람(선근 있는 이)들이 완전히 채워야 되는 덕목 일곱 가지입니다.
이 일곱 가지를 내가 이번 생에 많이 이루었다. 이 인간계에서 내가 죽으면 천상계, 범천계에 태어날 것이다. 이렇게 떠올리는 겁니다. 이런 상상하는 거죠. ‘나 말고 누가 이 정도 했겠는가? 나만큼 한 사람 누가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겁니다. 자신의 신심과 자신의 지계와 자신의 경전에 대한 해박함, 자신의 보시 공덕, 자신의 지혜, 불선업을 부끄러워 함, 부끄러워해서 불선업을 짓지 않는 거죠. 불선업을 두려워해서 불선업을 짓지 않은 것들을 떠올리고, ‘나도 인간계에서 죽으면 천상계나 범천계에 태어나겠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기분 좋아하는 겁니다. 이게 데와따눗사띠입니다. 이렇게 구족된 사람은 이 인간계에서 죽어서 천상계, 범천계, 더 높은 데 태어나서 편안히 살 것이다. 이렇게 떠올리는 거죠. 이번 생에 열심히 살았으니 다음 생에 더 좋은 곳에 태어나서 편히 살 것이다. 이건 바랄 바가 아닌 거 같은데 책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렇게 상기하는 거, 이게 데와따눗사띠입니다.
그 다음에 일곱 번째 우빠사마눗사띠(upasamānussati)입니다.
우빠사마(upasama)는 고요함이고, 우빠사마눗사띠는 고요함을 거듭 상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빠사마는 열반이라는 뜻입니다. 우빠사마의 뜻 자체가 불이 완전히 꺼져버린 상태입니다. 완전히 불이 꺼진 상태가 열반이니까 열반을 말합니다. 우빠사마라는 단어 자체에 소진, 고요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완전한 고요는 열반이니까 열반에 대해서 거듭 상기하는 것이죠. 열반을 보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열반을 상기하겠습니까? 그래서 그 방법이 나와 있습니다.
범부는 열반을 보지 못했지 않습니까? 범부가 아는 열반과 수다원이 아는 것과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이 아는 것이 다를 것이고, 붓다에 대해서 아는 것도 그 만큼씩 또 다르겠죠. 자기가 아는 만큼 할 수 있습니다. 선업도 아는 만큼 지을 수 있으니까, 아는 만큼. ‘아, 이게 더 선업이구나.’ 이렇게 생각해서 더 효율적인 데 에너지를 투자 하는 거죠. 뭐든지 다 아는 만큼 할 수 있습니다.
우빠사마눗사띠, 열반에 대한 상기는 열반의 고요함, 산띠 수카(santi sukha)라고 합니다. 열반의 행복을 산띠 수카(고요한 행복)라고 합니다. 다른 행복들을 웨다이따 수카(vedayita sukha), 느낌으로 느끼는 행복이죠. 근데 열반은 느낌 없이 느끼는 행복을 말합니다. 산티 수카를 거듭해서 떠올리는 것, 상기하는 것을 우빠사마눗사띠라고 합니다. 열반을 물질과 정신, 그리고 몸 안에 있는 핵심, 몸 안에 있는 핵심은 뭐가 있습니까? 핵심 없죠. 우리 몸 속에 핵심이 뭐가 있습니까? 없죠. 그러니까 몸 안에 죽지 않는 것은 없지 않습니까? 물질이라는 게 소멸하게 돼 있죠. 이 안에서 죽지 않는, 소멸하지 않는 영원한 무언가를 찾는 것, 그리고 물질과 정신이 ‘나’라는 것이 소멸했을 때, 죽었을 때, 핵심 죽지 않는 핵심, 나는 죽었지만 죽지 않는 핵심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그 소멸하지 않는, 죽지 않는 핵심을 떠올리는 겁니다. 그 사라지지 않는 핵심, ‘나’라는 것 안에 있는, ‘나’라는 물질과 정신(껍질) 안에 있는, 소멸하지 않는 핵심(열반), 이렇게 열반을 떠올립니다.
물질과 열반에 대해 책에 이렇게 나오는데, 제가 부연 설명하자면, 열반은 물질과 정신이 아니죠. 열반은 물질도 정신도 아닙니다. 근데 우리가 열반을 찾을 때 안에서 찾죠. ‘나’라는 물질과 정신을 대상으로 해서 열반을 찾죠. ‘나’라는 물질과 정신에 가지는 집착을 계속 제거하면서 열반을 찾아가는 거죠. 그러니까 여기에서 말하는 뜻은 나라는 물질과 정신 안에서 열반을 찾아야 된다. 이게 맞죠. 열반은 물질과 정신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열반을 찾기 위해서는 나 즉 물질과 정신을 사띠로 관찰해야 되는 거죠. 그냥 보는 게 아니고 그냥 거울 보듯이 tv 보듯이 보는 게 아니고 사띠로 봐야 되는 거죠. 사띠 사마디로 보면 빤냐(지혜)가 생기는데, 지혜가 생기고, 생기고, 생겨서 마지막에 생기는 지혜가 열반을 볼 때 지혜인 거죠. 그것은 소멸하지 않고 영원하고 절대 죽지 않고, 나머지 내가 아는 열반을 보기 전까지의 ‘나’라는 물질과 정신은 반드시 죽게 돼 있습니다. 반드시 버려야 될 것이고, 언제 버려야 될지도 모르는, 내일 버릴 수도 있고, 10년 뒤에 버릴 수도 있고, 평생 살 것처럼, 100년, 만 년 살 것처럼 사는데, 사실은 언제 버려야 될지 모르죠.
이 물질과 정신 안에 있는 죽지 않는 것, 열반을 상기하는 겁니다. 열반에는 물질과 정신이 없습니다. 열반은 물질도 정신도 아닙니다. 열반이라는 대상은 물질도 아닌 정신도 아닌 전혀 다른 것이니까. "열반 안에는 물질과 정신이 없고, 열반 안에 물질과 정신이 없는데, 어떻게 열반을 느낄 수 있는가?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자신에게 우리가 각자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열반이라는 것이 물질과 정신 안에 있는 것이 아니지만, 각자 개개인이 분명히 보고, 그것에 대해서 말도 할 수 있고, 어떤 어떤 대상을 원인으로 해서, 그 대상을 본 사람, 그러니까 어떤 대상을 본 사람, 열반이면 열반을 본 사람, 선정이나 선정을 얻어 본 사람만이 그것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는 것처럼, 열반이라는 것을 열반을 본 아리아(성인)들만 그것에 대해서 확실하게 알 수 있죠. 열반을 본 사람이나 열반에 대해서 상기할 수 있겠죠. 근데 범부들은 상상만으로 그 열반의 심오함을 상상해야 되는 거죠. 상상해서 상기할 수 있답니다. 상상으로 열반, 우리가 들은 열반에 대한 상상으로 그것에 대해서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을 그리워하는 것.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럴 수 있지 않나요? 동화책에 나오는 왕자가 공주를 떠올리는 것처럼 ‘이게 제일 좋다더라.’ 이렇게 들어봤기 때문에 보물섬을 찾아가는 것처럼,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전설에 내려오는 보물섬을 찾아가기 위해서, 배를 만들고 또 사람을 구하는 것처럼, 그렇게 열반에 대해서 상상으로 제일 좋은 것, 불멸에 대해서 쓴 책을 보고 각자의 지혜로 상상해서 떠올릴 수 있습니다. 열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생각해 보니 그러네요. 그러니까 열반을 보지 못했더라도 열반에 대해서 상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꼭 가본 것만 떠올릴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열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열반에 대한 상상을 할 수도 있죠.
저는 중학교 1학년 때 국민윤리 시간에 불교에 대해 배우면서 무상하다는 교리가 맘에 들어서 출가를 결심했는데, 열반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게 이것이구나!’라고 확신했습니다. 이 제일 좋은 것 얻어야 겠다. 근데 교과서에 나온 8정도는 기억이 안 납니다. 이해가 안 됐습니다. 그때도. 저처럼 이야기를 듣고 열반을 보고 싶다는 마음도 생기겠죠. 보물섬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야지, 보물섬을 찾아갈 배를 만드는 것처럼, 돈을 모으는 것처럼, 해도를 구하는 것처럼, 일단 들어야 되는 거죠. 듣고 상상하고 매일 매일 상상하고 그래야지. 보물섬을 찾아가려고 배를 타겠죠. 그렇듯이 열반에 대해서, 이왕 할 거면 이걸 하는 게 제일 낫겠네요. 제일 좋은 영역이니까 꿈을 꿀 거면 제일 좋은 꿈을 꾸는 게 낫죠. 차선을 꿈꾸는 것보다 더 필요하겠죠. 얻을 거면 제일 좋은 것을 목표로 계획을 세우는 게 낫습니다.
열반은 물질이 아니다. 네 가지 빠라맛타 담마(paramattha dhammā)가 마음·마음부수·물질·열반이죠. 열반은 마음도 아니고 마음부수도 아니고 물질도 아닌 전혀 다른 빠라맏타 담마, 고귀한 담마입니다. 사실 우리는 빠라맛타 담마를 모르고 ‘나’를 압니다. ‘나’를 알지 마음·마음부수·물질을 알지 않습니다. 상카라인 물질과 정신은 무상합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 두 가지가 다 무상하지 않습니까? 똑같은 걸 먹어도 어젠 좋았는데 오늘은 별로이죠. 똑같은 옷인데 작년에 유행이 바뀌어서 새로 또 장만해야 되고. 물질과 정신이 항상하지 않습니다. 계속 변하죠. 마음이 변하죠. 옷을 보는 마음이 변하죠. 이것을 보고 있는 마음이 계속 변하죠. 계속 변하는 것, 변해서 흔들리는데 열반은 전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어떤 결과를 얻을 때도 있고 못 얻을 때도 있고, 어떤 결과를 얻어도 얼마 못갑니다. 내가 지금 노력해서 얻어 놓으면 평생 가지고 산다 해도 죽을 때는 놔두고 가야 되고, 항상하지 않습니다. 열반은 그렇지 않습니다. 죽을 때 가지고 가고 더 좋은 데로 데려갑니다. 열반은 영원합니다. 다이아는 영원하지 않고. 내부에 있는 것과 외부에 있는 것, 두 가지 중에서 열반은 어디에 있습니까? 외부와 외부 두 가지 중에서 열반은 밖에 있다. 이렇게 책에 나와 있습니다. 밖에 있어서 몸 안에, (물질인 몸을 말합니다.) 이 몸 안에는 죽지 않는 것이 없죠. 몸 안에는 물질이라는 것은 소멸하지 않는 물질은 없습니다. 그래서 열반은 물질이라는 몸 안에 있지 않습니다. 열반은 중생(존재)처럼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분명히 말하자면 열반은 우리 마음이라는 것, 정신은 대상을 아는 특징이 있지 않습니까? 마음(정신)은 대상을 아는 특징이 있습니다.
열반이라는 것은 대상을 아는 특징도 없습니다. 열반은 대상이 될 뿐, 대상을 알지 못합니다. 위빳사나를 해야지 이게 설명이 됩니다. 위빳사나의 대상이 신·수·신·법이죠. 이 중에서 몸은 물질이고 느낌은 정신이죠. 그리고 생각도 정신입니다. 이 생각을 대상으로 보죠. 생각이 대상이지 않습니까? 생각을 대상으로 봅니다. 생각을 대상으로 보는 데, 뭐가 이 네 가지를 대상으로 보는가 하면, 우리 마음이 몸도 대상으로 보고, 느낌도 대상으로 보고, 생각도 대상으로 봅니다.
위빳사나를 하지 않을 때는, 우리가 몸은 대상으로 어쩌다 보일지 몰라도, 느낌이나 생각을 대상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아니 거의 불가능합니다. 근데 위빳사나를 하면서 마음과 느낌까지 대상으로 보입니다. 근데 이렇게 마음이 있어서 마음을 대상으로 보고 느낌을 대상으로 보는데, 열반은 그렇게 마음과 느낌을 대상으로 볼 수 있는 기능, 즉 대상을 아는 기능이 없다는 겁니다. 그냥 대상입니다. 대상을 알지 못합니다. 대상이 될 수만 있는 거죠.
그리고 형색·소리·냄새·맛·감촉, 이런 5욕락의 대상, 감각적인 대상처럼 느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5욕락의 대상 감각의 대상 우리가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형색·소리·냄새·맛·감촉을, 이 대상들을 우리가 느낍니다. 소리를 느끼고 모양과 색깔을 느끼고 맛을 맛 느끼고 감촉을 느끼고 이런 것도 느끼죠. 좋은 곳을 찾아다니고. 이렇게 느끼는데 열반은 그렇게 느낌을 주는 웨다이따 수카도 아니라는 거죠. 열반은 산띠 수카라고 했습니다. 좀 전에 느낌을 갖다 주는 형색 소리 냄새 맛 감촉,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 이 5문으로 들어오는 대상들이 느낌을 주는 대상인데, 열반은 대상이긴 한데 그런 느낌을 주는 대상은 아닌 거죠. 이 느낌이라는 것이 형색 소리 냄새 맛 감촉이라는 이 대상도 무상하지 않습니까? 변하죠. 변하니까 이것도 둑카인데, 열반이라는 대상은 느낌이 아니니까 무상하지 않은 거죠. 느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니까 신기하네요. 열반은 그렇습니다.
그래서 느낌으로 느끼는 행복보다, 말할 수 없이 훨씬 더 나은 산띠 수카이다. 고요하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특성이 있다.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고 우리가 뭔가를 묘사할 때는 느낌에서 가지고 온 단어로 설명을 하고 묘사를 하니까, 열반에 대한 좋은 것을 얘기할 때도, ‘고요하다, 평화롭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겠죠.
어쨌든 열반은 느낌으로 느끼는 행복도 아니고, 그리고 또 느낌을 아는 정신도 아닙니다. 또 물질은 사라지죠. 모든 물질은 소멸합니다. 정신도 소멸하죠. 변하는 이런 물질 대상도 아니고 정신 대상도 아니고 느끼는 행복도 아니고 소멸하는 물질도 아니고, 대상을 아는 특성을 가지지도 않았고, 오직 대상이 되기만 하고, 정신은 대상을 아는 특성도 있고 또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근데 열반은 그렇지 않은 거죠. 그래서 아주 좋다. 웨다이따 수카보다 비교할 수 없이 훨씬 더 좋은 대상이다. 상상하십시오.
그리고 이걸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을까 이런 궁리를 해보십시오. 보물섬을 찾아서 해도를 들고 험난한 바다를 가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지혜롭지 않겠습니까? 열반을 위해서 계획을 세우고 노를 저어 가는 것, 8정도를 가는 게. 보물선 찾아가는 그 어리석은 이들보다. 그 위험한 길을 평생 가다가 자기들끼리 또 싸우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기껏 얻은 게 보물인 거죠. 반짝이는 돌덩이를 얻어 돌아오죠. 그런 걸 찾는 것보다 훨씬 더 지혜로울 것입니다. 보물을 얻어봤자 한생만 쓰고 가야하거나, 도둑맞으면 원통한데, 열반은 가지고 갑니다. 아무도 훔쳐갈 수 없습니다. 가지고 가고 거듭 죽지 않게도 해주고.
오늘 여기까지 하고 마치겠습니다. 회향하겠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공덕이 우리를 번뇌의 소멸로 이끌기를.
이러한 우리의 공덕을 모든 존재들에게 회향합니다.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사-두 사-두 사-두
편집자: 담마삐야
* 2023-06-12 인터넷
(https://us05web.zoom.us/j/4694074327?pwd=b2pNRUk4VzExbWFMSitFa1Jkc0wyUT09)으로 하신 법문을 필사하였습니다. 필사 후 위뿔라냐니 식카와띠님께 보여드리고 요약, 수정, 추가한 부분이 있습니다.
출처 : https://cafe.naver.com/dhammadipakorea/378
일부용어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