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담맏타 상가하> 9장 깜맛타나(kammaṭṭhāna. 수행 주제) : 우빠사마눗사띠(열반 상기) (2)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사
깜맛타나 장에서 아눗사띠(anussati) 10가지 강의하고 있습니다.
8. ①Buddhānussati ②dhammānussati ③saṃghānussati ④sīlānussati ⑤cāgānussati ⑥devatānussati ⑦upasamānussati ⑧maraṇānussati ⑨kāyagatāsati ⑩ānāpānassati ceti imā dasa anussatiyo nāma. |
우빠사마눗사띠(upasamānussati), 열반을 상기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범부들이 어떻게 열반을 떠올릴 것인가? 열반에 대해서 상기하려면 열반에 대해서 알아야하죠. 물질과 정신이라는 대상이 없는 상태, 대상으로서 물질도 없고, 대상으로서 정신도 없는 상태. 탐욕이 없는 마음으로 보는 대상이 열반입니다. 느낌으로 아는 행복을 웨다이따 수카(vedayita sukha)라고 하는데, 열반은 그런 느낌으로 아는 행복이 아니라 적멸(소멸)을 아는 느낌이 없는 상태를 행복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산띠 수카(santi sukha)라고 합니다. 무슨 느낌이라는 것은 사라지니까, 모든 게 생겼다가 좀 있다가 사라지지 않습니까? 모든 것이 무상하죠, 물질과 정신이 무상하죠, 열반은 물질과 정신이 아니니까 소멸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래서 느낌으로 아는 수카는 느끼는데, 느낌이 계속 사라지니까 또 느끼기 위해서 노력해야 됩니다. 우리가 사라져버린 것을 다시 느끼기 위해서 또 노력해야 합니다. 밥 먹었는데 다시 또 배가 고파져서 먹어야 하죠. 관광 가서 좋았는데 집에 오니 그때 생각나서 또 찾아 가야 하고. 좋던 느낌이 사라졌기 때문에 그걸 얻기 위해서 또 노력해야 한다는 거죠. 또다시 노력을 해야 한다는 거죠. 새롭게 노력하는 것 이게 둑카입니다. 그리고 이 둑카가 있어야 느끼는 수카(행복), 둑카라는 노력, 또 맛보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데 그 노력이 둑카인 거죠. 그 둑카를 투자해서 얻는 행복은 투자한 만큼, 노력한 만큼 기쁘지 않는다는 거죠. 투자 대비 이익이 별로 없다는 겁니다.
내가 느끼기 위해서,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을 했는데 노력한 뒤에 그 둑카를 투자한 뒤에 나오는 수카(행복)가 조금, 아주 아주 미미한 아주 아주 조금입니다. 아주 조금이기 때문에 내가 투자한 둑카보다 더 많은 수카를 얻기 위해서 빚을 내서 더 많이 수카를 느끼려고 하다가 지옥에 간다. 이렇게 책에 나와 있습니다.
그래 좀 더 행복을 맛보려고 하다 보니 해선 안 될 일도 하고 그러다가 지옥에 가서 그 빚을 내서 느끼던 수카(행복)의 빚의 이자까지 둑카로 갚아야 한다. 둑카로 갚으면서 내가 한 것에 대해서 계속 떠오르는 거죠. 결국 슬프고 후회하게 된다. 세간의 행복인 느낌으로 느끼는 수카라는 것이 그렇다. 그래서 그 느낌으로 아는 수카와 전혀 섞이지 않는, 느껴서 아는 행복이 아닌 전혀 다른 행복, 산띠 수카, 느낌이 없는, 느낌이 소멸한 이것은, 물질과 정신의 무상이 완전히 소멸해서 고요한 성품만 있다. 느낌이 완전히 없어진 산띠 수카는 물질과 정신의 무상이 멈추어서 고요하고 평화로운 이것만 있다. 한 번도 맛보지 못한 고요함이라서 이 열반을 우리가 아는 ‘고요하고 평화롭다.’라고 밖에 말할 수가 없는 거죠. 하지만 우리가 아는 고요와 평화가 아니겠죠. 고요와 평화도 느낌이니까. 그런 고요하고 그런 평화로운 게 아니어야 되겠죠. 당연히. 전쟁통에 잠시 총성이 멈춘 평화와, 선정에 든 요기의 평화가 정밀함이 다르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아는 수준에서만 얘기를 할 수 있는 거죠. 우리가 아는 건 다 웨다이따 수카입니다. 열반은 그와 전혀 다른 수카이구요.
책에서의 설명이 계속됩니다. 세간의 대상에 대해서 5욕락을 흠뻑 누리는 부자가 아주 깊은 잠에 들어있는데, 시중드는 하인이 부자가 새로운 날에 느낄 5욕락의 대상들을 잔뜩 준비해 놓고 잠들어 있는 부자를 깨웠습니다. 그러자 부자가 “내 잠을 깨웠다.”고 일어나면서 짜증을 낸다는 거죠. 왜? 잠 들어서 좋았는데 하인이 감각적인 행복을 맛보시라고 자고 있는 부자를 깨웠을 때 잠을 깨웠다고 짜증을 낸다는 거죠. 잠이라는 것은 어떤 느낌이 있는 행복이 아니죠. 오욕락의 행복 같은 그런 게 아닌데, 그런 잠든 상태를 깨웠을 때 5욕락의 행복보다 더 좋다고 잠을 깨우는 하인에게 뭐라 한다는 거죠. 열반의 행복이 그런 행복이다. 5욕락의 행복과는 다른, 그러니까 우리 깊이 잠자고 났을 때 좋아하는 것처럼, 열반의 행복이 그런 것이다. 이렇게 책에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뭐 열반의 행복이 잠을 잘 잔 행복과 같겠습니까? 그러면 열반을 보기 위한 노력을 하는 대신 잠만 자면 되지 우리가 굳이 열반을 얻으려고 노력하겠습니까? 집에서 잠 잘 자면 되는데 왜 집에서 나왔지? 부처님 당시는 출가하면 다 나무 밑에 가서 앉아서 수행하고, 나무 밑에서 자고, 탁발해서 드시는데, 열반의 행복과 자는 행복이 같으면 집에서 자고 있으면 되지 뭣 하러 나무 밑에 가서 풍찬노숙을 하겠습니까? 집의 잠자리가 더 편안했을 텐데. 다른 행복이겠죠. 잠을 잘 잤을 때 만족하는 그런 거랑 다르죠.
잠을 잘 자서 기분이 좋은 것은 이런 거겠죠. 배가 대양을 항해하다가 다시 항구에 돌아와서 정박해 있는 상태, 이게 잠을 자는 것과 같은 것이고, 열반을 보는 것은 비행기가 하늘을 나는 것. 하늘을 나는 비행기의 엔진과 땅 위를 달리는 자동차 엔진이 다르지 않습니까? 자동차보다 좀 더 좋은 엔진을 달고 하늘을 날다가, 그것보다 좀 더 강력한 엔진을 달고 대기권 밖으로 벗어나서 궤도를 도는 편안한 상태, 이게 열반의 행복이겠죠. 배가 바다를 돌다가 항구에서 멈춰 있는 것은 잠자는 행복이고, 대기권 밖으로 벗어나서 편한 상태가 열반의 행복이겠죠. 더 강한 노력과 더 강한 엔진이 있어야 느낄 수 있겠지요. 열반의 행복은 그런 다른 차원의 행복인거죠.
열반의 행복은 물질과 정신 모두로부터 벗어나서 평화로운 상태, 산띠 수카입니다.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아라한은 번뇌가 하나도 없는 상태이고 아나함은 생에 대한 갈애가 있죠. 색계, 무색계 생에 대한 욕심이 있습니다. 5욕락의 대상에 대해서는 전혀 욕심이 없고, 성냄이 없고, 아나함과 아라한들이 물질과 정신을 되게 무거운 짐처럼 여깁니다. 물질과 정신이라는 내 몸과 마음을 무겁게 생각합니다. 이걸 버릴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죠.
일시적으로 물질과 정신을 소멸시킨 상태
무겁게 생각하는 것처럼 물질과 정신에서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물질과 정신에서 완전히 벗어난 상태가 니로다사마빳띠(nirodha-samāpatti. 멸진정)이죠. 물질과 정신이 완전히 소멸한 상태에서 드는 선정입니다. 소멸시키고 드는 선정이죠. 제가 보기에 이건 일종의 대열반, 빠리닙바나(parinibbāna)인 것 같습니다. 아는 마음이 없어서 물질과 정신을 전혀 느끼지 못하지 않습니까? 과의 선정은 열반이라는 대상을 맛봅니다. 산띠 수카를 맛보는데 멸진정에는 물질과 정신이 없습니다. 과의 선정은 열반이라는 대상을 보고 있고 그 열반이라는 대상을 아는 마음에 있습니다. 마음으로 열반이라는 대상을 보고 있는 상태가 과의 선정입니다. 그런데 멸진정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는 마음도 없습니다. 열반이라는 대상을 보고 있지 않습니다.
멸진정에서는 열반이라는 대상도 보고 있지 않고, 그리고 그런 대상을 알 수 있는 마음도 없는 상태, 몸은 있지만 아는 마음이 없으니 몸도 모릅니다. 다 없애버린 거죠. 아나함과 아라한은 물질과 정신, 5온의 무상함이 고통스러워 너무 싫어서 싹 없애버려서.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있는 거죠. 일종의 완전히 죽은 상태인 거죠. 돌아오지 않는 열반에 들었는데 살아서 든 거죠. 또 깨어납니다. 깨어나서 일을 하고 그런 상태가 멸진정인 것 같습니다. 아는 마음이 없으니까.
잘 때도 마음이 있습니다. 몸이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마음은 있죠. 그래서 모기한테 물리면 자다 깨고 꿈꾸다가도 깨고 아는 마음이 있습니다. 근데 멸진정에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물질과 정신도 없고 아는 마음도 없고. 그래서 아나함과 아라한들은 이 5온을 되게 무겁게 생각해서 오온에서 가능한 한 벗어나려고 멸진정에 뛰어 듭니다. 멸진정에 든 동안에 느낌이 전혀 없기 때문에 무엇을 알 수 있는 마음이 없어요. 알 수 있는 마음이 없으니까 마음과 마음부수라는 정신과 그리고 일부의 물질, 새롭게 생기는 물질도 없이 멈췄습니다. 세워놨습니다. 그런 것처럼 물질과 정신도 완전히 소멸한 상태가 아주 행복하다. 아주 행복하다고 알고 아나함과 아라한들은 멸진정에 듭니다.
그리고 또 물질만 있는 범천계, 5선정까지 얻고 마음을, 정신적인 것들을 버려서 물질만 남은 세상, 아산냐삿따부미(asaññasatta-bhūmi. 무상천(無想天). 정신 무더기가 일시적으로 소멸한 세계), 그리고 무색계 범천들은 물질을 완전히 소멸시켜서 무색계에 태어나죠. 물질에 대한 혐오가 몸을 소멸시켜서 무색계에 태어납니다. 물질만 있는 범천계와 정신만 있는 범천계. 여기를 생각해 보면 산띠 수카(열반의 행복)가 아주 고요하고 좋은 것이다. 이렇게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물질만 있는 세상의 범천들은 정신이 없어서 마음이 없어서 느낌이 없다. 느낄 수 없죠. 마음이 없으니까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500겁, 500생이 아니라 세상이 500번 멸하고 생기는 그 기간 동안, 대상을 알 수 있는 마음을 완전히 없앤 상태에서 지냅니다. “아, 여기가 좋구나, 고요하구나.” 이렇게 지냅니다. 얼마나 자기 번뇌가 시끄럽고 고통스러웠으면 마음을 완전히 없애버렸을까 이해도 갑니다. 그렇죠. 잘못 들어간 상태죠. 잘못된 견해로 잘못 들어간 길입니다. 그때는 아주 시끄럽고 힘들어서 그랬겠죠. 보살들은 아산냐삿따부미와 무색계에 태어나지 않는다죠. 그 정도의 바른 견해는 있는 거죠. 몹시 엉뚱한 데로 빠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강도짓은 해도 보살이 강도였던 적도 있습니다. 나쁜 직업을 가졌죠. 근데 아주 심한 사견 쪽으로는 빠지지 않는다는 거죠.
무색계 범천에게 일어나는 마음
무색계 범천들도 물질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서 정신만 있는 세상에 살죠. 높은 범천의 의식 안에 생겨날 수 있는 마음들은 아주 적습니다. 욕계에 살고 있는 우리 범부들에게 일어나는 욕계 불선마음들이 무색계 범천들에게는 생기지 않죠. 안 생깁니다. 일단 무색계 범천들은 5문이 없으니까 5문을 통해서 들어오는 감각적인 대상들, 감각적인 행복이 안 생기겠죠. 감각기관이 없으니까. 그로 인해서 생기는 행복감 그리고 번뇌 이런 것들이 없습니다.
그리고 또 무색계 범천은 아래 색계 선정으로 내려가지 않지 않습니다. 색계 범천의 선정의 마음도 생기지 않습니다. 무색계 범천들은 범부일지라도 무색계 마음, 무조건 범천들에게 성냄이 생기지 않습니다. 천상계 천신들도 강한 성냄은 없죠. 천상계 천신들은 몸이 워낙 섬세한 몸이라서, 심하게 화내면 몸이 타버린다고 합니다. 성냄으로 몸이 타서 죽습니다. 그 자리에서 없어져 버립니다. 천신이 성내다가 죽으면 좋은 데는 못 오겠네요. 성내다가 죽은 거니까, 4악처로 떨어질 확률이 높네요. 그래서 천상계 천신들도 강하게 성내지 않습니다. 무색계 범천들도 당연히 우리가 아는 그 탐진치가 없습니다. 5문으로 들어와서 생기는 마음들이 생기지 않고 아래 단계 선정의 마음들, 색계 선정의 마음들이 생기지 않고, 무색계 범천들에게 생기는 마음은, 무색계 범천의 과의 선정의 마음들만 생기죠. 마음의 가지 수가 아주 적고, 그 마음 자체가 되게 섬세하고 선하고 좋은 마음들만 무색계 범천들에게 생기는데 마음의 가지 수도 적고 매우 섬세한 마음들만 생긴다는 거죠.
그리고 아산냐삿따부미의 범천들에게는 마음이 아예 생기지 않고, 무색계 범천들은 아주 약간의 섬세한 마음만 있는데, 이 무색계 범천들이 아라한이 되면 어떤 마음이 있습니까?
1) 아라한이 되면 아헤뚜까 찟따(ahetuka citta. 원인없는 마음) 중에서 의문전향식이 생기겠죠. 마음의 문에서 마음으로 들어오는 대상을 받는 마음, 의문전향식이 1개 생깁니다.
2) 무색계의 아라한도 마하끼리야 찟따, 욕계 아라한의 일만 하는 마음(작용 마음)이 일어나죠. 아라한들은 업을 짓지 않죠. 일은 하는데 업을 짓지 않는 아라한의 욕계 마음 8개가 다 생깁니다.
3) 무색계에서, 예를 들어 비상비비상처에 있는 아라한에게는 네와산냐나산냐 위빠까(nevasaññānāsaññā-vipāka. 비상비비상처 과의 마음) 1개, 아라한의 끼리야(kiriya. 일만 하는 마음 = 비상비비상처 선정) 마음 1개,
4) 아라핫따 팔라(arahatta-phala. 아라한 과) 1개,
이렇게 총 12개의 마음이 생긴다고 책에 나와 있습니다.
무색계 제일 높은 세상(비상비비상처)에 있는 아라한에게 생기는 마음을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의문전향식이 1개 있습니다. 비상비비상처, 산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산냐가 없는 것도 아닌,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닌 가장 높은 범천계에 태어날 때는 아라한이 아니었죠. 거기에 있다가 아라한이 된 겁니다. 태어날 때는 아라한이 아닌 아래 단계의 성인으로 태어났겠죠. 비상비비상처에 태어났으니 거기에 태어나게 한 과보 마음 1개가 이 존재에게 있을 것이죠. 욕계 아라한의 마음 8개가 있을 것이고, 그리고 무색계 4선정(=비상비비상처정)의 아라한의 마음 1개, 아라한과의 마음 1개, 이렇게 12개의 마음만 그 아라한에게 생깁니다. 아라한에게 생기는 마음의 가지 수는 엄청 적죠.
우리는 불선심(akusala-citta) 12개, 그리고 아헤뚜까(ahetuka) 18개에서 미소 짓는 마음 1개를 제외한 17개 생기고, 그리고 마하꾸살라(mahākusala-citta) 8개, 욕계 재생연결하게 한 과보 마음 1개가 생깁니다. 선정을 얻지 않고 살면 이렇습니다.
내일 이어서 하겠습니다. 회향하겠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공덕이 우리를 번뇌의 소멸로 이끌기를.
이러한 우리의 공덕을 모든 존재들에게 회향합니다.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사-두 사-두 사-두.
편집자: 담마삐야
* 2023-06-13 인터넷
(https://us05web.zoom.us/j/4694074327?pwd=b2pNRUk4VzExbWFMSitFa1Jkc0wyUT09)으로 하신 법문을 필사하였습니다. 필사 후 위뿔라냐니 식카와띠님께 보여드리고 요약, 수정, 추가한 부분이 있습니다.
출처 : https://cafe.naver.com/dhammadipakorea/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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