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담맛타상가하> 9장 깜맛타나(kammaṭṭhāna. 수행 주제) : 승가[僧伽] 공덕 9가지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사
깜맛타나 장에서 아눗사띠 10가지 강의하고 있습니다.
8. Buddhānussati dhammānussati saṃghānussati sīlānussati cāgānussati devatānussati upasamānussati maraṇānussati kāyagatāsati ānāpānassati ceti imā dasa anussatiyo nāma. |
아눗사띠(anussati)는 거듭해서 기억한다. 상기한다는 뜻입니다. 반복해서 상기한다는 뜻입니다. 계속해서 상기하면 좋은 거 10가지, 좋은 대상을 반복해서 상기하면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죠. 그때 그걸 상기하고 있는 동안에 마음이 다른 험한 대상으로 안 가니까 탐진치가 약해집니다. 탐진치를 잊어버리는 거죠. 좋은 생각을 하고 있으니 탐진치가 그 동안에는 창궐하지 않습니다. 다시 또 조건이 바뀌면 또 일어나겠지만 어쨌든 이 10가지를 상기하는 동안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희미해집니다.
담마눗사띠 = 담마 공덕 6가지를 상기함
그중에서 담마눗사띠(dhammānussati)는 법의 공덕을 떠올리는 겁니다. 법의 여섯 가지 공덕을 다시 되풀이하면, ‘스왁카또(svākkhāto)’ 잘 설해진 가르침이고, ‘산딧티꼬(sandiṭṭhiko)’ 스스로 보아서 알 수 있는 가르침, 내가 내 눈으로 직접 봐서 알 수 있다는 거죠. 남이 가르쳐줘서 아는 게 아니라 내가 내 눈으로 봐서 ‘이것이구나.’ 이렇게 알 수 있는 가르침입니다. ‘아깔리꼬(akāliko)’ 도와 과를 얻는 시간에 도라는 선업 다음에 과라는 결과가 즉시, 빈틈없이 바로 오는 공덕입니다.
제가 처음에 위빳사나 할 때, 사띠해서 지혜가 좋아지면 사띠하는 그 순간 순간마다 바로 생멸의 지혜 단계이면 바로 소멸한다거나, 아니면 생멸의 지혜가 아니더라도 대상에 대해서 다른 시각, 즉 보고 있던 부풂·꺼짐이 다르게 보이고, 통증도 순간 달라지고, 이렇게 지혜가 생기는 게 그 즉시 생기죠. 사띠하는 순간 바로 생기고, 행선을 하고 나서 좌선을 하면 바로 다르죠. 그래서 그게 ‘아깔리꼬’인 줄 알았어요. 그 즉시 사띠하는 순간 바로 바뀌니까. 근데 그게 아니라 이 ‘아깔리꼬’의 뜻은 도라는 선업과 그것의 결과인 과가 빈틈 없이 붙어서 온다는 뜻입니다.
‘에히빳시꼬(ehipassiko)’ 와서 보라고 권장할 만한 것, 좋으니까 이거 와서 보십시오. 이거 해 보십시오. 이렇게 할 만한 가르침입니다. ‘오빠네이꼬(opaneyyiko)’ 내 마음 안에 딱 붙여서 가져갈 만한 가르침입니다. 딱 붙여 가져갈 만한 것이라는 게 도와 과, 도의 지혜, 과의 지혜. 수행의 힘으로 딱 붙여서 ‘upana+ṇika’ 가져갈 만한 가르침입니다. 어디까지? 마지막 생까지, 아라한이 될 때까지 가져갈 만한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에 ‘빳땅 웨디땁보 윈뉴히(paccattaṃ veditabbo viññūhi)’에서 ‘윈뉴히(viññūhi)’는 아비담마 배울 때 ‘산냐’가 있고 ‘윈냐나’가 있고 ‘빤냐’가 있다고 했습니다. 세 가지 다 ‘ña’가 들어가 있습니다. ‘냐(ña)’는 ‘지혜가 있는, 아는’이라는 뜻입니다. 산냐, 윈냐나, 빤냐는 ‘냐’라는 어근에서 나온 명사입니다. 산냐는 지식입니다. 정보, 지식, 아는 것들이 범람하는 정보들, 가짜도 많으니 다 믿으면 안 됩니다. 들리는 거 보이는 거 다 믿으면 안 되죠. 그 다 믿으면 안 되는 산냐입니다. 산냐 정보는 바뀝니다. 저희가 학교 다닐 때는 분식 잡곡을 권장했는데 자식은 둘만 낳아야 한다. 그러고 요즘은 많이 낳으라고. 밀가루보다 쌀이 좋다고. 이렇게 계속 바뀌는 정보가 산냐입니다. 다 믿으면 안 되죠. 산냐는 정보이고, 이걸 지식이라고 하죠. 지식인데 제가 보기에는 이건 정보이거든요. 우리가 아는 지식이라는 것은 정보, 끊임없이 바뀌는 것이지요.
윈냐나는 산냐를 통해 알게 되는 지혜입니다. 지혜라는 게 무상하구나. 산냐가 계속 바뀌는구나. 산냐를 믿으면 안 되겠구나. 이렇게 알게 된 지혜, 이걸 믿고 있으면 큰일 나겠구나. 고통스러운 것이구나. 이런 무상을 아는 것이 윈냐나입니다. 무상하다는 것을 알기 시작하는 게 윈냐나입니다. 산냐가 많고 적고 관계없이, 지식(정보)이 많은가, 적은가에 관계없이, 윈냐나를 빨리 알 수도 있습니다. 산냐가 많아도 윈냐나는 모를 수 있습니다. 윈냐나와 산냐 두 개가 개념이 아니니까요. 지식과 지혜는 실은 전혀 상관관계가 없습니다. 그래서 윈냐나는 무상하다고 아는 지혜가 생기고, 인과를 생각하게 되는 겁니다. 원인과 결과가 있구나. 이렇게 무상의 지혜 인과의 지혜가 생기는 것이 윈냐나입니다. 윈냐나가 있으면 지혜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윈냐나는 산냐의 양과 비등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빤냐는 위빳사나 지혜를 말합니다. 아비담마에서는 그렇게 얘기합니다. 아비담마에서 빤냐는 인과를 믿는 것, 위빳사나 지혜가 생기고, 도의 지혜, 과의 지혜입니다.
그래서 여기 제일 마지막에 ‘빳짯땅 웨디땁보 윈뉴히’에서 ‘윈뉴히(viññūhi)’는 지혜가 있는 이들, ‘빳짯땅(paccattaṃ)’-개개인이 ‘웨디땁보(veditabbo)’ 알아 마땅한 가르침이다. 지혜가 있는 이들이라면 각자 개개인이 ‘웨디땁보’ 알 수 있는 가르침이다. ‘웨디땁보’는 웨다나에서 온 말입니다. ‘느끼다. 느낌을 아는 것, 아는 것’이니까 알 수 있는 가르침입니다. 지혜 있는 이들이라면 각자가 알 수 있는 가르침입니다. 지혜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담마가 무엇인지 아는, 도와 과를 볼 수 있다는 거죠. 지혜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각자 볼 수 있는 가르침, 알 수 있는 가르침입니다.
상가눗사띠 = 상가 공덕 9가지를 상기함
그다음에 상가[僧伽]의 공덕입니다.
상가의 공덕은 9가지가 있습니다. 붓다의 공덕 9가지, 담마의 공덕 6가지, 그리고 상가의 공덕 9가지, 그 9가지를 읽어보겠습니다.
숩빠띠빤노 바가와또 사와까상고(suppaṭipanno Bhagavato sāvakasaṅgho),
우줍빠띠빤노 바가와또 사와까상고(ujuppaṭipanno Bhagavato sāvakasaṅgho),
냐얍빠띠빤노 바가와또 사와까상고(ñāyappaṭipanno Bhagavato sāvakasaṅgho),
사미찝빠띠빤노 바가와또 사와까상고(sāmīcippaṭipanno Bhagavato sāvakasaṅgho),
야디당 짯따리 뿌리사유가니 앗타 뿌리사뿍갈라(yadidaṃ cattāri purisayugāni aṭṭha purisapuggalā),
에사 바가와또 사와까상고(esa Bhagavato sāvakasaṅgho),
아후네요(āhuneyyo), 빠후네요(pāhuneyyo), 닥키네요(dakkhiṇeyyo), 안잘리까라니요(añjalikaraṇīyo),
아눗따랑 뿐냑켓땅 로깟사(anuttaraṃ puññakkhettaṃ lokassā).
‘숩빠띠빤노 바가와또 사와까상고’ : 붓다(바가와또 Bhagavato)의 제자가 되는 상가(사와까상고 sāvakasaṅgho)는 ‘숩빠띠빤노(suppaṭipanno)’에서 ‘수(su)’는 잘, ‘빠띠빤노(paṭipanno)’는 수행하는 이라는 뜻입니다. ‘빠띠빤노’는 중도인 팔정도, 위빳사나 수행을 중도라고 합니다. ‘향락으로 도와 과를 얻을 수 있다’도 아니고, ‘고행으로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도 아닌 그 중간, 중간을 취해서 윤회에서 벗어나는 길이 중도입니다. 향락의 길도 아닌 고행의 길도 아닌 중간으로 가는 수행이라는 거죠.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중립의 수행입니다. ‘숩빠띠빤노’하면 수는 잘한다는 뜻, 잘 수행한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잘 수행하는가? 번뇌를 제거하기 위해서 잘 수행하는 붓다의 상가입니다. 바가와또, 붓다의 사와까상고, 제자가 되는 상가인데, 숩빠띠빤노, 잘 수행하는, 잘 바르게 수행하는, 붓다의 제자이신 상가라는 뜻입니다.
‘우줍빠띠빤노’에서 우주(uju)는 곧다는 뜻입니다. 재가자들의 열 가지 선행할 때 제일 마지막이 딧티주깜마(diṭṭhijukamma)였습니다. 견해가 곧은 것, 견해의 ‘곧음’이죠. 원인과 결과를 믿는 것이 기초적인 견해의 곧음인 거죠. 딧티(견해)가 ‘우주’ 곧다 이런 뜻이죠. ‘딧티주(diṭṭhiju)’라고 할 때의 그 우주(uju)입니다. 곧게 수행하는 붓다의 제자이신 상가라는 뜻입니다. ‘우줍빠띠빤노(ujuppaṭipanno)’ 그런 거짓이나 왜곡 없이 바르고 곧게 수행한다는 뜻입니다. 곧게 수행하는 붓다의 제자이신 상가. 곧게 수행한다는 게 뭘까요? 위빳사나 하면 곧아집니다. 우리는 항상 대상을 보고 있습니다. 마음이라는 게 항상 대상과 함께 하지 않습니까? 근데 그 대상을 볼 때 마음이 번뇌로 보죠. 관념으로 봅니다. 우리가 대상을 볼 때 주입 받은 나의 산냐와 나의 짜리따(carita. 성냄형인가 신심형인가 지혜형인가), 나의 성향으로 대상을 보죠. 어떤 대상을 접할 때 우리가 가지고 있던 배경지식과 성향 기질을 가지고 대상을 봅니다. 그리고 대상을 봄으로 인해서 또 다른 번뇌가 파생되죠.
지금 아비담마를 들면서도 각자 다른 마음으로 아비담마를 배우지 않습니까? 지금 여섯 분이 들으시는데 여섯 분이 다 다르게 새길 겁니다. 말하는 저까지 포함해서 7명이 다 다르게 아비담마를 압니다. 말을 기억하는데 그래서 곧다는 것은 그런 각자가 자기 개성대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정말 정말 절대 ‘곧게’ 라는 뜻이죠. 위빳사나 대상 신, 수, 심을 대상을 사띠를 통해 내가 나의 관념과 나의 취향을 제거하고 대상을 볼 때 곧게 보는 거죠. 그렇지 않으면 다들 자기 취향대로 자기 번뇌대로 보죠. 자기 취향대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배경 지식과 섞어서 대상을 받아들입니다. 배우는 것도 먹는 것도 읽는 것도 전부 다 5문으로 들어온 대상들. 그렇지 않고 곧게 수행하는, 관념을 제거하면 자신의 성향을 제거하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겠죠.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위빳사나 지혜이죠. 성향과 취향을 그리고 산냐를 제거하면 있는 그대로 곧게 드러나겠죠. 보는 대상에 대해서 왜곡 없이. 그렇게 수행하는 그렇게 보도록 수행하는, 붓다의 제자이신 붓다의 상가입니다. 지혜가 있어야 위빳사나 대상 3가지를 대상으로 보고 쳐낼 수 있기 때문에 곧게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지혜가 없으면 대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대상을 사띠할 수 없기 떄문에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볼 수 없습니다.
나라는 것이 5온이라고 보이지 않습니다.
‘냐얍빠띠빤노 바가와또 사와까상고’ : ‘냐얍빠띠빤노(ñāyappaṭipanno)’에서 ‘냐야(ñāya)’는 지혜라는 뜻입니다. 좀 전에 했던 윈냐나, 산냐, 빤냐 할 때의 ‘냐’입니다. ‘냐야’ 지혜를 얻기 위해 수행하는 붓다의 제자이신 상가입니다. 어떤 지혜인가하면 도의 지혜, 과의 지혜, 열반을 원하는 지혜를 말합니다. 열반을 원한다는 것은 지혜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열반은 탐욕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열반을 볼 수 있는데, 탐욕이 있으면 대상을 아까 좀 전에 말한 자기 취향대로, 자기가 주입받은 관념과 믿을 수 없는 정보에 버무려서 대상을 엉터리로 보는데, 그런 관념, 정보, 취향 탐욕들이 완전히 제거된 상태에서만 보이는 게 열반이니까, 정말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지혜가 있어야 열반이 보이는 거죠. 그 열반, 그 지혜를 얻기 위해서 수행하는 붓다의 제자이신 상가입니다.
‘사미찝빠띠빤노 바가와또 사와까상고’ : ‘존경받기에 합당하게 수행하는 상가이다’. '사미찝빠띠빤노(sāmīcippaṭipanno)'에서 사미(sāmī)는 사마디(samādhi)의 사미입니다. 번뇌가 없어야 마음이 고요하고 청정하겠죠. 그런 마음의 고요를 닦는, ‘바가와또’ 붓다의 ‘사와까상고’ 제자이신 상가라는 뜻입니다.
‘야디당 짯따리 뿌리사유가니 앗타 뿌리사뿍갈라’ : 짯따리(cattāri), 4개로 쌍을 이룬 존재들, 4개의 쌍이니까 여덟 분이죠. 4쌍으로 된 8분인 존재입니다. 4쌍의 8분, 도 4개, 과 4개이므로 4쌍입니다. 수다원의 도과, 사다함의 도과, 아나함의 도과, 아라한의 도과, 이렇게 해서 4쌍인 거죠. 상가라는 것은 아리아 상가를 말하죠. 도의 순간에 있는 아리야 성인을 ‘막갓타(maggaṭṭha)’, 과의 순간에 있는 존재를 ‘팔랏타(phalaṭṭha)’라고 합니다. 그렇죠. 그 순간에 있는 존재, 도의 순간, 과의 순간에 있는 존재를 말합니다.
도의 순간은 중생의 윤회 내내 딱 4찰나밖에 안 생깁니다. 윤회하는 그 많은 세월 동안 딱 4찰나만 생깁니다. 수다원 한 번, 사다함 한 번, 아나함 한 번, 아라한 한 번, 이렇게 네 번만 생기는 거죠. 두 번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죠. 정말 딱 한 순간만 생기는 것, 다시는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도의 순간에 있는 존재를 ‘막갓타’라고 합니다. 그리고 팔라, 과의 순간에 있는 존재인 ‘팔랃타’는 여러 번 생길 수 있습니다. 과의 선정에 들 때는 계속 길게 여러 번 생길 수 있습니다. 이 여덟 분을 ‘아리야 상가(ariya saṅgha)’라고 합니다. 이 아리야(ariya) 성인들은 모두 좀 전에 말한 네 가지 공덕(숩빠띠빤노, 우줍빠띠빤노, 냐얍빠띠빤노, 사미찝빠띠빤노)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법문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회향하겠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공덕이 우리를 번뇌의 소멸로 이끌기를.
이러한 우리의 공덕을 모든 존재들에게 회향합니다.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사-두 사-두 사-두
편집자: 담마삐야
* 2023-06-07 인터넷
(https://us05web.zoom.us/j/4694074327?pwd=b2pNRUk4VzExbWFMSitFa1Jkc0wyUT09)으로 하신 법문을 필사하였습니다. 필사 후 위뿔라냐니 식카와띠님께 보여드리고 요약, 수정, 추가한 부분이 있습니다.
https://cafe.naver.com/dhammadipakorea/381
일부용어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