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담맛타상가하> 9장 깜맛타나(kammaṭṭhāna. 수행 주제) : 담마 공덕 6가지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사
깜맛타나 장에서 아눗사띠 10가지 강의하고 있습니다.
8. Buddhānussati dhammānussati saṃghānussati sīlānussati cāgānussati devatānussati upasamānussati maraṇānussati kāyagatāsati ānāpānassati ceti imā dasa anussatiyo nāma. |
담마 10가지
그 중 지난 시간에 붓다눗사띠 중에서 아라한의 공덕을 강의했습니다. 다음은 담마눗사띠, 법의 공덕에 대해서 거듭 상기하는 것입니다. 법에 대해서 기억하고 떠올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법(담마)이라는 것은 도 4 개, 과 4 개, 열반 1개, 빠리얏띠(pariyatti. 경전. 삼장) 1개 모두 합쳐 10가지를 말합니다.
빠리얏띠는 부처님의 말씀, 니까야(nikāya)를 비롯한 삼장(경·율·논)을 말합니다. 다른 것은 외도(外道)라고 합니다. 앗타까따(aṭṭhakathā. 주석서)까지 빠리얏띠라고 하는데, 주로 삼장과 삼장을 설명하는 주석서를 말합니다. 출가자의 의무는 경전에 대한 의무(간타두라 gantha-dhura)와 위빳사나에 대한 의무(위빳사나 두라 vipassanā-dhura) 두 가지입니다. 위빳사나 두라는 아라한과를 얻을 때까지 수행하는 것입니다. 위빳사나 두라를 할 능력이 되지 않으면 경전의 의무(간타두라)를 다해야 합니다. 간타두라는 삼장과 주석서를 암기해야 합니다. 옛날에는 다 암송해서 전했죠. 종이가 귀해서 책이 없었으니까요. 나무 밑에 살면서 책을 짊어지고 다닐 수 없었을 테니까요. 경전을 다 암송하고 있어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죠.
삿담마 3가지
선근(善根) 있는 이들의 법, 담마(삿담마 saddhamma. 정법 正法)는 1. 빠리얏띠(pariyatti) 2. 빠띠빳띠(paṭipatti) 3. 빠띠웨다(paṭivedha) 세 가지입니다. 담마라는 것은 도 4개와 과 4개, 열반 1개, 빠리얏띠 1개(pariyatti. 삼장)인데, 도와 과를 얻기 위해서 가는 과정, 열반을 얻기 위해 가는 길인 위빳사나를 하는 것이 빠띠빳띠(paṭipatti) 즉 수행입니다.
담마 공덕 6가지
그 담마 즉, 법(法)의 공덕은 6가지입니다. 삼보에 예경 올릴 때 이걸 외워서 독송합니다.
‘스왁카또 바가와따 담모(svākkhāto bhagavatā dhammo), 산딧티꼬(sandiṭṭhiko), 아깔리꼬(akāliko), 에히빳시꼬(ehipassiko), 오빠네이꼬(opaneyyiko), 빳짯땅 웨디땁보 윈뉴히(paccattaṃ veditabbo viññūhi).’
1) ‘스왁카또 바가와따 담모(svākkhāto bhagavatā dhammo)’ : '바가와따(bhagavatā)'- 부처님께서 설하신 가르침은 ‘스왁카또(svākkhāto)’- 잘 설해진 가르침이다. 부처님 예경에서 부처님을 ‘수가또(sugato)’라고 했습니다. 바르고 훌륭한 말씀을 전하시는 분입니다. 잘 오셨다는 뜻이 좋은 말씀만 하신다는 것이죠. ‘스왁카또’도 같은 뜻입니다. 법이 잘 설해져 있다, 담마는 잘 설해진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2) ‘산딧티꼬(sandiṭṭhiko)’ : ‘눈앞에 보아서 알 수 있는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눈앞에 본다.’고 얘기합니다. 열반을 볼 때, 도와 과를 볼 때, 눈앞에 본다고 얘기합니다. 눈 뜨고 본 게 아니고 눈 뜨고 육안으로 본 게 아니라 눈을 감고 혜안으로 본 걸 말하죠. 각자의 마음의 눈으로 열반을 보고 도와 과를 본다고 얘기합니다.
위빳사나 할 때 수행자들이 ‘배가 보인다.’고 하죠. 눈 감고 있는데 배가 어떻게 보입니까? 그것도 느껴지죠? 그것도 본다고 하죠. 통증도 본다고 하죠. 관찰한다는 게 본다는 뜻이죠. 도와 과 열반도 눈으로 보듯이 봅니다. 목격한다고도 합니다. 삿치끼리야(sacchikiriyā), 눈앞에 목격하듯이, 도와 과, 열반이 잠시 짧게, 진짜 1조 분의 1초로 짧게 지나가는 걸 한순간 보는 거죠. 번개 칠 때 환하게 보듯이. ‘산딧티꼬’, 스스로 봐서 알 수 있는 가르침, 그러니까 내가 봐서 안다는 거죠. 남이 봐서 아는 게 아니라 내가 직접 눈을 감고 마음의 눈으로 본다고 합니다. 그것도 눈을 감고 보니까 남은 절대 볼 수 없겠네요. 두 눈 다 뜨고 보는 거면 시력이 정상인 사람들은 다 볼 텐데, 각자 눈을 감고 자기 안에서만 보는 거니까 자기만 볼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산딧티꼬, ‘스스로 자기가 직접 보아서 알 수 있는 가르침’입니다. 봐서 안다고 얘기합니다. 느낌이 사라지는 것도 봐서 알고, 부풂 꺼짐도 마음으로 봐서 알고.
3) ‘아깔리꼬(akāliko)’ : '깔라(kāla)'는 시간입니다. 앞에 ‘아(a)’가 붙어서 ‘시간이 걸리지 않는 가르침’입니다. 왜냐면 결과가 나타나는 데 시간이 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통 선업과 불선업을 짓고 그 결과가 나타나는데 시간이 걸리잖아요? 농부가 씨를 뿌리고 열매를 맺기까지 모판을 만들고 씨를 뿌리고 비가 오고 해가 비치고 시간이 흘러서 쌀밥이 돼서 밥상에 올라오기까지 시간이 걸리죠. 로또를 사도 당첨 발표할 때까지 시간이 걸리는데, 이것은 시간이 안 걸린다는 겁니다.
도와 과를 보는데 시간이 안 걸린다는 것입니다. 도(道)라는 선업을 짓고 과(果)라는 결과가 나타나는데, 도라는 선업과 그 선업의 결과라는 ‘과’ 사이에 빈틈이 없다는 것이 아깔리꼬입니다. 도와 과 사이에 빈틈이 없이 딱 붙어서 옵니다. 다른 선업들은 짓고 나서 결과가 좀 있다가 옵니다. 경전에는 보시하고 바로 부자가 되는 경우들이 있죠. 탁발 오신 수행자에게 공양을 드리고 돌아섰는데 밭이 다 황금으로 변해 집 마당에 땅을 팠더니 황금이 나왔다. 돌아서는 동안이라는 시간이 걸리죠. 돌아서서 자기 밭을 보기까지 시간이 걸리는데 이거는 그런 시간도 걸리지 않습니다. 도라는 선업을 지었으면 과라는 결과가 지체 없이 따라온다는 것이 아깔리꼬입니다. 즉시 결과를 주는 가르침.
4) ‘에히빳시꼬(ehipassiko)’ : ‘에히(ehi)’는 오라, ‘빳시꼬(passiko)’는 보라, ‘에히빳시꼬’는 ‘와서 보라’는 뜻입니다. 와서 보라고 권유할 만한 가르침입니다. 와서 보라고 제가 아침마다 권유하고 있습니다. 와서 보시겠습니까? 법문하는 이유는 수행하게 하려고 하는 것이지 다른 목적이 있어서 하는 게 아닙니다. 부처님이 4아상케야(asaṅkheyya)와 10만 번의 세상이 동안 인욕과 자비로 바라밀을 채워 붓다가 되신 이유도 윤회에서 벗어나 4성제를 깨닫게 하는 하려고, 8정도를 가르쳐 주려는 것이지, 다른 이유가 아니지 않습니까? 감각의 행복을 누리고 살게 하려고 붓다가 되신 것이 아니죠. 욕계의 행복을 원하는 중생들에게는 그걸 이룰 수 있는 방법도 가르쳐줬습니다.
붓다의 법문은 순서가 있습니다. “다나까타(dāna-kathā), 실라까타(sīla-kathā), 삭가까타(sagga-kathā), 보시에 대한 법문, 5계를 지켜서 오는 안전한 생에 대한 법문, 보시와 지계의 결과로 부유하고 안전한 생, 천상계의 행복에 대한 법문, 그래도 결국 너희들을 피눈물 나게 할 것이다. 아무리 좋은 것도 그 끝이 있고, 끝은 항상 아프고 슬프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다. 그 5욕락의 행복을 찾는 길이 아니라 8정도를 잘 닦으면 그렇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와서 보라고 권유할 만한 가르침이다.” 에히빳시꼬, 와서 보라고 권유할 만한 가르침입니다.
5) ‘오빠네이꼬(opaneyyiko)’ : 우빠나야(upanaya)는 '붙어 있다'는 뜻입니다. 붙어 있다 할 정도로 밀착해 있는 거죠. 딱 붙어 있는 것.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이 수행의 힘으로, 자기 마음에 붙여서 가져가기에 합당한’이라는 뜻입니다. 윤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이 수행의 힘으로 자기 마음에 딱 붙여서 굳히기에, 붙여서 가져가기에 합당한 담마. 자기 마음을 그 법에 붙여서 가져가기에 합당한 도와 과입니다. 이게 ‘오빠네이꼬’의 뜻입니다. ‘오빠네이꼬, 자기 마음에 붙여서 가져가라’는 뜻입니다. 어깨에 메고, 가마꾼이 가마를 어깨에 메고 가듯이, 그렇게 짊어지고 가는 것보다 더 밀착해서 가지고 가기에, 마음에 붙여서 가져가기에 합당한 담마. 윤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이 수행의 힘으로 자기 마음에 딱 붙여서 가져가기에 합당한 담마.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이 수행이 힘으로 자기 마음에 딱 붙여서 가져가기에 합당한 담마’ ‘자기 마음을 법에 딱 붙이기에 합당한 것’ 그게 ‘도와 과’라는 거죠. 우리의 의식 안에서 다음 생으로 가져갈 수 있는 게 수행이죠. 우리가 ‘다음 생으로 건너갈 때 마음에 딱 붙여서 가져가기에 가장 확실한 게 수행해서 지었던 업’입니다. 다나(dāna), 실라(sīla), 바와나(bhāvanā. 수행), 이렇게 1. 보시 2. 지계 3. 수행, 세 가지 선업 중에서, 보시는 힘이 가장 떨어지죠. 실라는 내가 계속해서 계를 지키고 살려는 의지가 계속 있는 것이죠. 지계의 의도나 수행의 의도가 보시 의도보다 지속적이지 않지 않습니까? (계속 보시하는 것이 아닌) 한 번 한 보시는 일상생활할 때 여러분이 한 보시를 계속 떠올리면, 그때만은 마음이 기쁘고 흡족합니다. 근데 보시는 “내가 계를 지키겠다.”는 마음이나 수행할 때 애쓴 노력에 비해서 약한 거죠.
수행할 때 지은 마음의 근육은 마음에 딱 붙어 있죠. 그렇게 해서 얻게 된 결과, 도와 과, 이게 우리 마음에 딱 붙여서 가져가기에 가장 적당한 담마라는 겁니다.
그리고 도와 과를 얻었으면 이 사람이 진짜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지 않습니까? 도와 과 아래 단계의 수행까지는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다음 생에 잃어버릴 수도 있지만 도와 과라는 이 수행의 결과물들은 수다원이나 사다함이 되면 절대 잃을 수 없지 않습니까? 절대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게 절대 안 떨어지는 거니까,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거니까, 가져갈 수밖에 없는 거죠. 절대 나랑 분리되지 않는 거죠. 그렇게 가져가기에 확실한 담마, 도와 과입니다. 자기 마음을 마음으로 붙여서 눈앞에 목도하듯이 눈으로 보기에 합당한 열반. 이게 오빠네이꼬의 뜻입니다. 자기 마음을 마음으로 딱 붙여서 터치하듯이 붙여서 보기에 합당한, 눈을 감고 보는 거니까 그렇죠. 눈을 감고 보는 거니까 진짜 눈에 딱 붙어서 보이겠네요. 열반이라는 것이. 눈을 감고 보인다는 것은 마음에 있는 것을 보는 것이잖습니까? 몸에 있는 것도 아니고 마음에 있는 것을 보는 것이니까, 진짜 딱 붙어서 뭔가 보기에 마땅한, 당연히 이렇게 봐야만 하는 열반, ‘오빠네이꼬’입니다.
그리고 또 수행으로, 위빳사나 수행으로, 그리고 도의 지혜, 과의 지혜가 있죠? ‘아깔리꼬’할 때, ‘도라는 선업’을 짓고 나서 그 뒤에 ‘과라는 결과’가 온다는데, 그 도라는 지혜 수행으로 도의 지혜로 붙여, 딱 붙여서 가져가기에 적당한 담마라는 뜻입니다. 뭐냐 하면 도와 과와 열반이 수행으로 그리고 도의 지혜로 마땅히 가져가야 되는 담마. 지혜가 있는 사람이면 마땅히 가져가게 됩니다. 인간으로 태어났을 때 붓다의 출현이 있을 때 마땅히 챙겨가야 하는데, (무명과 갈애에 휩싸인) 우리는 이거보다 더 좋은 게 많습니다. 더 좋은 5욕락의 행복을 먼저 '다 맛보시고' 시간이 남으면 이걸 하시면 됩니다. 시간이 안 남으면 다음 생을 기약하시고. (그렇게 하면 안 되겠죠?)
그다음에 딱 붙여서 가져가기에 마땅한 청정한 담마라는 뜻도 있습니다. 오빠네이꼬의 뜻입니다. upanaya + ṇika, ‘우빠나야’가 ‘붙이다’라는 뜻입니다. “붙여서 내가 가지고 가다” 이걸 얻으면 절대 잃지 않습니다. 우리가 얻은 것들은 기껏해야 이번 생이고, 다음 생에 어찌 될지 막연하지만 열심히 한 것은 분명히 흔적이 남죠. 가지고 가겠죠. 우리가 윤회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서원을 세우고 10가지 바라밀을 채우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면 되겠죠.
그 바라밀 10가지의 결과로 얻은 도와 과, 열반이라는 것은 떨어지지 않습니다. 얻었으면 반드시 날 따라온다는 거죠. 나에게서 절대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마패가 있으면 안전한 곳으로만 데려가고, 좋은 곳으로만 데려가고, 나쁜 곳으로 데려가지 않고, 더 높은 곳으로만 데려가는 거죠. 아무리 방일하게 살아도 7생 안에 아라한이 될 수 있는 법입니다. 그게 딱 붙여서 가져가기에 적절한 담마, ‘오빠네이꼬’입니다.
6) ‘빳짯땅 웨디땁보 윈뉴히(paccattaṃ veditabbo viññūhi)’ : ‘빳짯땅(paccattaṃ)’은 ‘각자, 각각 이렇게 각자 개개인 한 명, 한 명’입니다. ‘윈뉴히(viññūhi)’는 지혜가 있는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윈뉴히’는 5온 중에서 식온(識蘊. 윈냐나 칸다. 마음 89개)에서 나온 말입니다.
윈냐나(viññāṇa. 마음)는 아는 특성이 있죠. 윈냐나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는 거 하나뿐입니다. 다른 것들은 아무것도 할 줄 모릅니다. 윈냐나(아는 것), 안다는 것은 지혜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죠.
우리가 일반적으로 마음이라고 생각하는 것들, 나의 행복, 나의 괴로움, 나의 지적 능력 이런 것들은 다 마음부수입니다. 산냐(saññā), 지적인 능력들, 외우는 것들, 일에 능숙한 것들 이런 것들 다 산냐 마음부수이죠. 웨다나(vedanā. 느낌) 마음부수는 기분 좋은 거, 기분 나쁜 거, 화나는 거, 아픈 거 다 느낌 마음부수이죠. 나머지는 상카락칸다(saṅkhārakkhandha. 행온)입니다.
다음 시간에 ‘빳짯땅 웨디땁보 윈뉴히’에 대해서 계속 이어서 하겠습니다.
회향하겠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공덕이 우리를 번뇌의 소멸로 이끌기를.
이러한 우리의 공덕을 모든 존재들에게 회향합니다.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사-두 사-두 사-두
편집자: 담마삐야
* 2023-06-05 인터넷
(https://us05web.zoom.us/j/4694074327?pwd=b2pNRUk4VzExbWFMSitFa1Jkc0wyUT09)으로 하신 법문을 필사하였습니다. 필사 후 위뿔라냐니 식카와띠님께 보여드리고 요약, 수정, 추가한 부분이 있습니다.
https://cafe.naver.com/dhammadipakorea/383
일부용어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