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411 위웨까 3가지 (법문: 위뿔라냐니 식카와띠님)
붓다왕사 277강 - 위웨까 3가지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사
삭깟짜 바와나 : 정성스럽게 노력함
어제 한 위웨까(viveka) 이어서 하겠습니다. 붓다왕사에서 위리야 바라밀 강의하고 있습니다. 위리야(viriya)를 보살이 어떻게 닦는가? 위리야 바라밀을 어떻게 채우는가? 할 때 위리야를 채울 때 삭깟짜 바와나(sakkacca bhāvanā)라고 한다 했습니다.
이게 위리야에 들어가는 거였군요. 삭깟짜 바와나는 정성스럽게 한다는 겁니다. 바라밀을 채우는데 매우 정성스럽게 선업을 짓는다는 거죠. 선업을 짓는데 정성스럽게 짓는 걸 삭깟짜 바와나라고 합니다. 우선 업을 짓는데 쉬지 않고 계속 이어서 짓는 겁니다. 하다가 쉬고, 하다가 눕고, 하다가 앉고, 이렇게 쉬는 게 아니라 하루 하고 이틀 쉬고, 6일 하고 하루 쉬고 이러지 않고 계속 계속한다는 거죠. 계속 그 바라밀 선업을 쌓는데 쉬지 않고 한다는 뜻입니다.
위빳사나 수행할 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위빳사나 할 때 정성스럽게 하고, 하면 할수록 더 정성스러워지고, 노력을 하는데 쉬지 않습니다. 행선이나 좌선이나 일상이나 다 쉬지 않고 노력합니다.
쉬지 않고 명칭 붙입니다. 위빳사나를 한다는 것은 명칭을 한다는 말인데 명칭이 쉬지 않고 붙습니다. 명칭을 하지 않았으면 놓친 겁니다. 위빳사나에서는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계속 명칭이 안 붙습니다. 삭깟짜가 되면 점점 정성이 더 많이 들어가고 그리고 사띠 선업이(사띠는 선업이죠.) 점점 빈틈없어지면 명칭이 점점 더 붙습니다. 쉬지 않고 붙습니다. 그렇게 위리야를 쌓는데 위리야 바라밀을 채우는데 그 중의 하나, 위웨까 3가지로 마음이 기운다고 했습니다.
3가지 위웨까가 무엇이냐면
(1) 까야 위웨까(kāya-viveka) (2) 찟따 위웨까(citta-viveka) (3) 우빠디 위웨까(upadhi-viveka) 이렇게 3가지였습니다.
까야 위웨까 : 몸이 홀로 있음
까야 위웨까는 몸이 혼자 있는 것을 말합니다. 몸이 무리에서 떨어져서 홀로 지내는 것, 몸이 혼자 있는 것을 말합니다. 독방입니다. 감옥 독방에 혼자 있는 것, 한적한 곳에 혼자 있는 것이 까야 위웨까입니다. 여러 명이랑 같이 있지 않고 혼자 있는 겁니다. 제가 우리 선생님한테 "위웨까가 뭐예요?"라고 물었을 때 까야 위웨까 몸이 혼자 떨어져서 있는 것이다. 한적하게 홀로 지내는 것인데 '까야 위웨까'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몸이 혼자 있어도 마음이 다른 사람과 있으면 혼자 있는 게 아니라고 마음은 여러 명이랑 같이 있을 수 있는데 위웨까가 안 되지 않느냐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찟따 위웨까도 있다. 그리고 우빠디 위웨까도 있다. 이렇게 3가지를 얘기했습니다.
까야 위웨까, 혼자 살아도 혼자 있어도 번뇌가 득실거리면 혼자 있는 게 아닙니다. 그냥 몸만 남들과 어울려 있지 않을 뿐이지 마음은 남들과 같이 섞여 있는 거죠. 번뇌와 같이 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일단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까야 위웨까, 수행처에서 법당 안에서는 여러 명이 같이 앉아서 하죠. 같이 앉아서 하는데 까야 위웨까인가? 이것은 까야 위웨까라고 봐야 됩니다.
이 까야 위웨까라는 게 보통 가족들과 어울려서 하하 호호 하는 무리들과 떨어져 있는 것을 말합니다. 한 공간에 같이 있어도 수행처처럼 독립적으로 있으면 찟따 위웨까가 되면, 번뇌로부터 멀어져 있으면 까야 위웨까라고 봐야 합니다.
내 마음이 여러 명과 같이 있어도 그 여러 명과 같이 어울리지 않으면 까야 위웨까입니다. 논어에 이런 말이 나오던데 어울려도 물들지 않는다. 그러니까 같이 있어도 마음이 같이 물들지 않으면 까야 위웨까입니다.
찟따 위웨까 : 마음이 번뇌로부터 멀어짐
두 번째 위웨까가 찟따 위웨까입니다. 찟따 위웨까는 마음이 번뇌로부터 멀리 있는 겁니다. 마음이 번뇌로부터 멀리 있다. 찟따- 마음이 위웨까- 멀어져 있다. 어디로부터 멀어져 있냐면 번뇌로부터 멀어져 있는 거죠. 몸은 혼자 있는데 마음은 번뇌가 있어서 이것저것 시키고 이것저것 주문하고, 전화로 시키고 이러면 위웨까가 아닙니다. 몸은 혼자 있어도 마음은 번뇌와 같이 살고 있으니까 위웨까가 아닌 거죠. 정말 위웨까가 되려면 찟따 위웨까부터 위웨까가 됩니다.
멀어져 있음. 홀로 지냄이 됩니다. 몸이 여러 명이랑 있어도 마음이 이렇게 번뇌와 같이 있지 않으면 조용합니다. 위웨까를 찾는 이유가 조용히 있으려고 찾는 거죠. 조용히 있으려고 고요하게 있으려고 멀어져 있으려고 찾는데 여럿이 있어도 마음이 고요하면 위웨까입니다.
그래서 찟따 위웨까. 번뇌로부터 멀어져 있는데 이 번뇌라는 것은 여기서 찟따 위웨까는 뭘 말하는가 하면 선정. 색계 선정, 무색계 선정 있죠. 사마타 수행해서 선정을 얻는 것과 그리고 로꿋따라(lokuttara. 출세간) 출세간은 수행해서 번뇌로부터 멀어져 있는 상태. 이게 찟따 위웨까입니다.
즉 니와라나 담마(nivāraṇa-dhammā). 선정에 방해가 되는 니와라나 담마, 여섯 가지로부터 멀어져 있는 것. 선정의 장애 요인. 까맛찬다(kāmacchanda) 5욕락으로부터 멀어져 있고, 그리고 성냄. 심한 성냄으로부터 멀어져 있고, 게으름, 혼침. 여기서 게으름이라는 것은 세간의 일하지 않는 게으름 이런 게 아니라 앉아 있는데도 계속 졸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수행자들은 보통 몸이 게으르지는 않습니다. 수행하러 오는 사람들은 그렇게 게으른 사람들은 잘 오지 않습니다. 오기도 하지만 드뭅니다. 열심히 시간표는 지킵니다. 3시에 일어나서 9시에 자는 시간표는 다들 지킵니다. 몸이 법당에 있어야 되는 시간에 방에서 자고 있거나 그러진 않습니다. 근데 앉아서 조는 거죠. 이런 게으름입니다. 마음이 게으른 상태 티나밋다(thina-middha) 니와라나입니다.
티나밋다, 혼침입니다. 앉아서 게을러서 조는 것. 티나밋다로부터 멀리 있고 그리고 들뜸, 후회로부터 멀리 있고. 그리고 위찌낏차(vicikicchā. 의심) 자기가 하고 있는 수행에 대한 의심, 이것으로부터 멀리 있는 상태가 찟따 위웨까입니다.
아직 열반은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선정을 얻는 집중을 방해하는 장애 요인, 이것들로부터 멀어져 있는 거죠. 마음이 깨끗하고 고요하고 활발한 상태. 깨어 있는 상태. 마음이 자고 있지 않은 상태. 이게 찟따 위웨까입니다. 마음이 자고 있다는 것은 앉아 있지만 졸고 있는 상태입니다. 제가 혼침을 되게 싫어했습니다. 조는 상태. 왜냐하면 성격이 고약해서 조는 걸 아주 싫어했습니다. 어떻게든 졸지 않으려고. 졸지 않으려고 하는 게 위리야더군요. 그게 위리야인지 몰랐습니다. 그냥 조는 게 싫었습니다.
조는 게 꼴 보기 싫었습니다. 남이 조는 것도 싫고. 내가 조는 것도 싫고 그걸 싫어하는 게 위리야입니다. 이 티나밋다를 싫어하면 위리야가 저절로 생깁니다. 자고 있는 상태를 싫어하면 위리야가 저절로 생깁니다. 위빳사나 할 때 그렇습니다. 물론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고. 생각해 보면 제가 잠이 참 적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학교 다닐 때도 그 학교 다닐 때 수업시간에 앉아서 조는 애들 너무 신기했습니다. 나도 졸아보려고 어떻게 저렇게 앉아서 졸 수 있을까? 수업시간에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은 아니었는데 수업시간에 졸진 않았습니다.
아무리 해도 앉아서 조는 게 안 되더라고요. 버스 안에서 조는 거 되게 신기했는데. 언제부터 그렇게 하게 되었냐면 미얀마에 출가한 뒤로 몸에 힘이 없으면 졸더라고요. 버스만 타면 자고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졸더라고요. 어쨌든 수행할 때는 졸지 않았습니다.
티나밋나입니다. 앉아서 조는 거. 마음이 게으른 상태. 마음이 게으른 것. 이걸 싫어하면 위리야가 생깁니다. 자는 걸 싫어하면 위리야가 저절로 생깁니다. 그 다섯 가지 니와라나에서 멀어져 있는 게 찟따 위웨까입니다.
우빠디 위웨까 : '생의 고통이 세워지는 자리'를 떠남
세 번째 위웨까. 이게 제일 중요한데 이게 진짜 위웨까입니다. 정말 멀어져 있는 상태, 진짜 독립된 상태, 홀로 있는 상태 이게 우빠디 위웨까입니다.
우빠디(upadhi)가 먼저 뭔지 이걸 알아야 됩니다. 우빠디는 '생의 고통이 세워지는 자리' 이런 뜻입니다. 생의 고통이 건축되는 자리, 토대. 기반. 이런 뜻입니다. 생의 고통이 서는 자리. 이게 있어야지 생의 고통이 세워집니다. 이게 없으면 인생의 고통이 세워지지 않는다는 거죠. 그게 우빠디입니다. 모든 고통이 서는 자리. 그런데 우빠디 위웨까는 이 우빠디 4가지로부터 멀어져 있는 상태. 떨어져 있는 상태. 끊어져 있는 상태입니다.
우빠디는 4가지가 있습니다. 생의 고통이 세워지는 자리가 4가지가 있다.
1) 까무빠디 : 5욕락이라는 고통의 토대
5욕락이 있으면 생의 고통이 세워진다. 감각적인 행복 있죠. 감각으로 즐기는 행복. 감각에서 느끼는 행복. 좋은 거 보고, 좋은 거 듣고, 좋은 냄새, 좋은 맛, 좋은 감촉, 그 외에도 명예욕, 권력욕, 수면욕, 그러고 보니 수면욕이 없군요. 제가 수면욕이 되게 적네요. 그런 것들. 그런 욕심들 그런 것들 다 까무빠디(kāmupadhi)입니다.
5욕락이라는 감각적인 행복을 즐기는 것은 알겠는데. 이 잠자는 게 행복하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미얀마 빤디따라마(우리 절)에 강원생들은 잠자는 걸 되게 좋아하는데 일단 밥 먹고 나면 낮잠을 잡니다. 먹고 나서 낮잠을 자는 게 진짜 이해가 안 되는데. 잠이 맛있다고 하는데 저는 잠을 자고 나면 잠을 많이 자면 기분이 나쁜 거죠. 그날 일단 기분이 나빴습니다. 잠자고 기분 좋은 거, 그런 것들. 그런 게 우빠디. 그런 거 좋아하는 거 까무빠디(kāmupadhi)입니다.
2) 칸두빠디 : 오온이라는 고통의 토대
그다음에 칸두빠디(khandhupadhi)가 있습니다. 칸다 우빠디(khandha upadhi). 칸다(khandha. 오온). 칸다라는 오온이 있으면 이 오온으로 인해서 생의 고통이 생겨납니다. 법구경 게송 202에 이렇게 나옵니다. “탐욕만 한 불길이 없고, 성냄만 한 허물이 없고, 오온만 한 고통이 없고, 열반만 한 행복이 없다.” 오온만 한 고통이 없다. 오온이 있으면 고통이 생깁니다. 탐욕 같은 불이 없고, 성냄 같은 허물이 없고, 열반만 한 행복이 없다. 오온이 제일 심한 고통인 거죠. 오온은 뭡니까? 우리가 보통 이야기하는 ‘나’죠. 오온은 나입니다. 나라는 내 몸, 그리고 내 느낌. 느낌이라는 것은 행복과 고통 다 들어가죠. 행복이라는 느낌과 행복하다는 느낌, 즐거움 그리고 고통스럽고 그리고 도마낫사(domanassa) - 성냄 그리고 우울, 분노 이런 거 다 느낌에 들어가죠. 그리고 나의 기억력. 이런 것 다 그 외 정신 작용들은 전부 다 오온이죠. 나라는 것이 오온입니다.
우리는 이 오온을 ‘나’라고 생각해 집착합니다. 안 그래도 오온 자체가 괴로움인데 내가 있으면 더 고통스럽습니다. 아라한은 ‘자만’을 완전히 제거하여 오온을 ‘나’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오온은 아라한에게도 여전히 짐과 같습니다. 오온이라는 끊임없이 무상한 정신-물질보다 열반이 더 평온합니다. 그래서 열반만 한 행복이 없다고 했습니다.
오온을 ‘무아’로 보게 되면 괴로움이 줄어듭니다. 삼법인이 무상, 고, 무아죠. 무상하고 변하니까 고통스럽고 그러고 나서 무아를 “무상과 고통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아서 무아이다.”라고 설명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무상을 무상하지 않게 영원하게 세울 수 없습니다. 무상하기 때문에 오는 고통, 일단 무상이 있으니까 고통은 따라올 수밖에 없는데, 그 고통을 수카(sukha. 행복)로 바꿀 수 없습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아서 무아이다.” 이렇게 보통 설명하죠.
오온이 고통스럽고 무상하다는 건 그대로이지만 무상해서 고통인 오온이 내가 아니면 아무 상관이 없어지는 거죠. 내 것이 아닌데 뭐 어떻습니까? 무상해도 되고 고통스러워도 됩니다. 내 것이 아니니까. 내가 아니니까. 그 무상한 내 몸과 내 기억력 내 느낌이, 그 느낌으로부터 내가 떨어지면 상관이 없는 거죠. 그게 내 것이 아니니까. 무상해도 고통스러워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무상해도 그리고 고통스러워도 나랑 상관없는 일이 되니까 내 자식이 나를 힘들게 해도 그 느낌. 날 힘들게 하는 느낌. 걱정되고 화나고 불안한 것이 내 것이 아니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옆의 나라에서는 전쟁이 나도 우리나라에서 나지 않으면 아무렇지도 않지 않습니까? 어느 나라에서는 굶어 죽어도 내 자식이 굶어 죽지 않으면 아무렇지도 않지 않습니까? 잠자는 데 이상이 없습니다. 내 것이 아니면 됩니다. 그 고통스러운 것이.
이 무상하고 고통스러운 것이 “내 게 아니구나. 내가 아니구나.” 이렇게 알면 이게 무아를 아는 거죠. 거기서 자유로워집니다. 이 ‘무아’의 이해가 완전해지면 그게 자유인 거죠. 열반의 자유. 내 것이 아니면 됩니다. 고통을 오온을 내 거라고 붙잡고 있으면 고통인 거죠. “오온만 한 고통이 없다.” 이렇게 되는 거죠. 그 느낌과 그 불안과 걱정과 성냄과 행복. 불안과 걱정은 어디서 옵니까? 앞에 행복이 있었으니까 뒤에 불안과 걱정 근심이 오는 거죠. “그 행복이 내 것이 아니다.” 그러면 됩니다. 이제 해결이 되는 거죠. 앞의 두 가지 문제점이 해결됩니다.
그래서 “오온만 한 고통이 없다.” 칸두빠디, 오온이라는 우빠디, 오온(나)이라는 고통이 자라는 자리, 고통이 머무는 자리, 이것이 우빠디이고. 우빠디로부터 멀어지는 것. 오온에서 멀어지는 것이 진정으로 고통에서 멀어진 우빠디 위웨까입니다. 무아를 본 겁니다.
3) 낄레수빠디 : 번뇌라는 고통의 토대
그 다음에 세 번째 낄레수빠디(kilesupadhi). 번뇌라는 우빠디에서 멀어져 있는 것. 이게 우빠디 위웨까입니다. 번뇌는 앞에서 찟따 위웨까. 여기에서도 얘기했죠. 낄레수빠디(kilesupadhi). 번뇌라는 고통과 행복이 머무는 자리. 윤회의 고통이 세워지는 번뇌. 이게 낄레수빠디입니다. 낄레사 우빠디. 번뇌라는 우빠디. 번뇌가 있어서 윤회의 고통이 그 자리에서 서는 거죠. 번뇌는 뭡니까? 12가지 아꾸살라 찟따(akusala-citta). 탐진치. 이게 번뇌이죠. 탐진치 그리고 또 뭐가 있죠? 번뇌 10가지. 같은 말입니다. 탐진치 12개나. 번뇌(낄레사) 10가지나. 윤회가 생겨나죠.
4) 아비상카루빠디 : 선업과 불선업이라는 고통의 토대
그리고 네 번째 아비상카루빠디(abhisaṅkhārupadhī). 생의 고통이 머무는 선업과 불선업의 의도입니다.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 아비상카라는 무상함입니다. 무상함이라는 우빠디입이다. 무상함이라는 생의 고통이 세워지는 자리. 여기서 무상하다는 것은 의도의 무상함입니다. 상카라의 뜻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삼장 사전에 67개가 나오더라고요. 12연기에서 상카라는 의도를 말하죠. 빠띠산디하게 하는. 태어나게 하는 의도입니다. 우리가 전생에 좋은 선업을 지어서 지금 인간으로 태어난 거죠. 인간이라는 좋은 생에 태어나서 살고 있습니다. 제일 좋은 생 천신들도 부러워하는 생이 인간생입니다. 천신들은 결과로만 삽니다. 결과로만 사는 게 천신입니다. 주어지는 대로만 살아야 됩니다. 거기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천신들은 왜냐하면 태어날 때부터 태어난 집, 태어난 부모, 입고 있는 옷. 이것을 바꿀 수 없습니다. 천신들은 옷을 바꿔 입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옷을 바꿔 입을 수 있죠. 시장에 가서 옷을 사서 바꿔 입을 수 있습니다. 근데 천신들은 주어진 옷을 평생 입고 살아야 됩니다. 선업의 결과로 주어진 생을 사는데 인간은 노력해서 더 낫게 바꿀 수 있기 때문에 천신들이 부러워하는 생이 인간생입니다. 선업을 지어서 현재 인간으로 태어난 거죠.
근데 또 상카라가 무상함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12연기에서는 의도라는 뜻이고 무상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물질과 정신의 무상함. 이런 뜻도 있습니다. 근데 여기 아비상카루빠디는 선업, 불선업의 의도입니다. 우빠디가 고통이 세워지는 자리인데 고통이 세워지는 자리라는 것이 선업의 의도 그리고 불선업의 의도 이 두 가지 의도 다 고통이 세워지는 자리라는 거죠.
우리가 선업의 의도가 있어서 인간으로 태어나고, 인간으로 태어나서 고통스럽지 않습니까? 인간으로 태어나서 행복하십니까? 어떨 때는 행복하다 싶으면 고통이 옵니다. 행복하다고 생각할 때 조심하십시오. 그 행복이 곧 고통이 됩니다. 그래서 선업의 결과로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무상하여 편치 않습니다.
완전하지 않고 항상 문제가 있습니다. 불선업의 의도는 말할 것도 없고 불선업은 당연히 직접적으로 고통을 가져오고 선업의 의도도 고통을 가져옵니다. 왜 고통을 가져 오냐 하면 우리가 짓는 선업이라는 것이 항상 집착과 어리석음을 가지고 선업을 짓습니다. 정도의 차이가 다를 뿐 탐욕과 무지를 가지고 선업을 짓습니다. 왜 그게 있냐 하면 내가 있기 때문에, 오온을 나라고 여기는 앗따(atta). 유아견. 이걸 가지고 선업을 짓지 않습니까? 진리는 무아인데 우리는 ‘나’를 가지고 선업을 짓습니다.
어리석음을 섞어서 선업을 짓기 때문에 뒤에 따라오는 결과가 항상 문제를 가지고 따라옵니다. 대표적인 문제점이 무상이라는 늙음, 병듦, 죽음, 그와 함께 따르는 슬픔, 통곡입니다. 선업임에도 좋은 것만 가지고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선업과 불선업의 의도, 선업의 의도도 마찬가지이고 불선업의 의도도 마찬가지이고 다 윤회의 고통이 세워지는 자리입니다. 근데 이 아비상카루빠디 이 선업, 불선업의 의도 둘 다로부터 위웨까 멀어져 있는 상태가 있다는 거죠. 멀어지는 것. 선업, 불선업 의도. 둘 다 해서 멀어지는 이게 뭔지.
이건 내일 이어서 하겠습니다. 회향하겠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공덕이 우리를 번뇌의 소멸로 이끌기를.
이러한 우리의 공덕을 모든 존재들에게 회향합니다.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사-두 사-두 사-두
필사자: 아꿉빠
편집자: 담마삐야
* 2023-04-11 인터넷
(https://us05web.zoom.us/j/4694074327?pwd=b2pNRUk4VzExbWFMSitFa1Jkc0wyUT09)으로 하신 법문을 필사하였습니다. 필사 후 위뿔라냐니 식카와띠님께 보여드리고 요약, 수정, 추가한 부분이 있습니다.
출처 : https://cafe.naver.com/dhammadipakorea/368
일부용어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