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619 열반 상기 - 5 (법문: 위뿔라냐니 식카와띠님)
<아비담맛타상가하> 9장 깜맛타나(kammaṭṭhāna. 수행 주제) : 우빠사마눗사띠(열반 상기) (5)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사
깜맛타나 장에서 아눗사띠 10가지 중에서 우빠사마눗사띠(upasamānussati) 강의하고 있습니다.
8. ①Buddhānussati ②dhammānussati ③saṃghānussati ④sīlānussati ⑤cāgānussati ⑥devatānussati ⑦upasamānussati ⑧maraṇānussati ⑨kāyagatāsati ⑩ānāpānassati ceti imā dasa anussatiyo nāma. |
아눗사띠 열 가지는 거듭 자주 상기하면 좋은 것이고 사마타 수행입니다. 번뇌를 가라앉힐 수 있습니다. 붓다, 담마, 승가를 떠올리고 자신의 지계를 떠올리고, 자신의 보시 공덕을 떠올리고, 데와따눗사띠(천신의 공덕을 상기), 자신이 지은 선업으로 ‘천상계에 태어날 수 있겠구나.’라고 떠올리고, 우빠사마눗사띠, 열반에 대해서 상기하는 것입니다. 열반을 본 적이 없으니 열반에 대해서 말해 놓은 것을 듣고 읽어서 ‘아, 이렇게 좋은 것이겠구나!’라고 상기하는 겁니다.
열반의 공덕에 대한 게송을 하고 있는데 ‘윈냐낫사 니로데나(viññāṇassa nirodhena)’ 설명할 차례입니다.
‘윈냐낫사(viññāṇassa) – 다시 생을 만드는 업이라고 부르는 이전 윈냐나의, 니로데나(nirodhena) -소멸로’, 업이라고 부르는 윈냐나의 소멸로 인해서, 세세생생 무지와 집착으로 선업과 불선업을 지어왔습니다. 그런데 아라한도의 순간에, 아윗자(avijjā. 무명)와 함께 딴하(taṇhā. 집착)를 제거해서, 더 이상 새로운 생을 만들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리석음과 집착을 아라한도의 순간에 다 소멸시켜서, 이제 생을 다시 만들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아라한도를 보는 그 순간에 어리석음과 집착을 완전히 제거했기 때문에, 아윗자가 있어야 생을 만들어내는데 그것을 만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라한의 도(道)로 완전히 없애버렸기 때문입니다.
아라한도에서 완전히 소멸시킨다고 했는데 그전에도 계속 없앴습니다. 수다원에서 한 번 없애고 사다함에서 더 약하게, 아나함에서 또 줄인 거죠. 4분의 3을 줄이고 4분의 1 남은 거를 아라한도의 순간에 완전히 없앤 거죠. 처음부터 한꺼번에 없애진 않습니다. 불선심 12개를 한꺼번에 다 없앤 건 아니고, 아래 단계의 도에서 4분의 1씩 줄여서 마지막에 4분의 1 남은 거를 아라한의 도의 순간에 완전히 없애는 거죠.
위빳사나 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깜깜하게 시작하죠. 깜깜하게 시작해서 지혜가 조금씩 생기면서 어둠이 조금씩 걷힙니다. 조금씩 조금씩 조금씩 조금씩 걷혀서 생멸지 그다음에 소멸지, 그리고 싫어하는 지혜, 평온의 지혜(상카루뻭카냐나saṅkhārupekkhā-ñāṇa)가 되면서 무지가 조금씩 조금씩 걷히는 거죠. 조금씩 조금씩 걷혀서, 조금씩이 아니지 많이 걷혀서 수다원도의 순간에 다섯 개의 불선심이 완전히 없어지죠. 다섯 개가 없어지는데 그전에 그 밑의 위빳사나 지혜의 단계에서 서서히 힘을 빼놓습니다. 그 다섯 개가 사견과 함께하는 탐욕 뿌리 마음 4개와 의심과 함께 하는 마음 1개입니다. 5개의 힘들이 위빳사나 지혜의 단계에서 많이 빠지는 거죠. 이빨 뺄 때 흔들리는 이빨을 한 번 딱 쳐서 뽑지 않습니까? 흔들리지 않는 이빨을 뽑을 수 없습니다. 많이 흔들릴 때 툭 치면 저절로 빠지는 것처럼 수다원이 될 때도 위빳사나로 무지가 많이 걷혔을 때, 많이 약해졌을 때 수다원의 도와 과, 그 전에 상카루뻭카 지혜가 있고, 다음에 수다원의 도와 과가 생겨서 완전히 잘리는 거죠. 유아견이 한 번에 뚝딱 없어지지 않습니다. 순서가 있겠죠. 열매가 열리는데 차례가 있는 것처럼, 씨앗을 심고 싹이 트고 가꾸고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는 거죠. 번뇌가 순서대로 계속 점점 힘이 빠지면서 사라지는 거죠.
아라한도의 순간에서도 무명과 집착이 완전히 걷힐 때, 그 전의 아래 성인의 단계들에서 이미 많이 없어진 상태로 있다가 아라한도의 순간에 완전히 사라지는 거죠. 그래서 새로운 생을 만들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무지와 집착이 더 이상 도와주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새로운 삶을 만들도록 도와주지 않습니다. 없애버렸기 때문에 문을 닫아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오지 못하는 거죠. 약해져 있던 원수들을 한 번에 몰살해 버려서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생을 만들지 못합니다. 새로운 업도 더 이상 만들 수 없습니다. 새로운 업이라는 게 선업 불선업 둘 다입니다. 무지와 집착이 없죠. 없어졌기 때문에 이제 새로운 선업을 더 이상 만들 수도 없습니다. 불선업은 당연히 짓지 않고, 선업도 더 이상 짓지 않습니다. 더 이상 새로운 업을 짓지 않습니다. 새로운 업을 안 지어야 안 태어나겠죠. 계속 새로운 업을 지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좋은 업을 지어서 좋은 곳에 좋은 조건으로 태어나면 행복할 줄 알고. 안 그렇다고 아무리 얘기를 해도 안 됩니다. 이런 어리석음에서 오는 새로운 업을 더 이상 만들 수가 없습니다.
무지와 집착이 완전히 없어져 버렸기 때문에. 그래서 새로운 업도 만들 수 없고 새로운 생도 만들 수 없고 윤회의 바퀴를 부숴버려서 더 이상 굴러갈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고귀한 아라한들은 빠리닙바나(parinibbāna. 반열반. 돌아오지 않는 열반)에 들기 전에 물질과 정신이 같이 있습니다. 아라한이 돼서 어리석음과 집착이 없어졌지만, 몸이 있고 정신도 있습니다. 통증을 아는 마음이 있죠. 느낌도 있고 없어진 것은 불선심 12개, 불선 마음부수 14가지가 없어졌지 다른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물질과 정신이 있기 때문에 고통을 겪습니다.
아라한도 고통이 있습니다. 아헤뚜까(ahetuka. 원인없는 마음. 여기서는 신식(身識)과 함께 하는 둑카 웨다나(dukkha-vedanā. 통증)가 있습니다. 통증이 있어서 생겨난 경전들이 있습니다. 봇장가 숫따(bojjhaṅga-sutta. 환자들을 위해 칠각지를 설하신 경전)는 성자들에게 읽어주는 <칠각지 경>입니다. 부처님도 몹시 아플 때 제자들에게 봇장가 숫따를 읊으라고 해서 듣고 일어나셨답니다. 아라한들도 고통이 있습니다. 물질과 정신이 있어서 여러 가지 고통을 겪습니다.
붓다도 반열반에 들기 전에 혈변을 보시고 그리고도 법문하시고 반열반에 드셨습니다. 목갈라나 존자도 편안히 돌아가시지 않았습니다. 아주 많이 맞아서 돌아가셨습니다. 편안히 죽는 것은 복입니다. 죽음이 아쉽긴 하겠지만 목갈라나 존자처럼 죽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입니다. 신통제일인데도 쌀자루에 든 쌀처럼 맞았습니다. 뼈가 다 부서져서 가죽 안에 들어 있는 쌀처럼 되도록 맞아 죽었습니다.
'윈냐낫사 니로데나 엣테땅 우빠룻자띠(viññāṇassa nirodhena etthetaṃ uparujjhati. 업을 짓는 마음이 소멸되어 이 물질과 정신이 소진한다.)'
무명과 집착이 완전히 소멸해서 열반이다. 그다음에 또 열반의 공덕이 열반의 고요함으로 인해서 물질과 정신 전부 다 소멸합니다(etthetaṃ uparujjhati). 책에 보면 '물질과 정신이 전부 다 소멸해서, 물질과 정신과 연관되는 둑카도 타던 불이 소멸한 것처럼 고요해졌다. 불이 다 타고 열도 식은 것처럼 고요한 상태를 열반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불이 꺼진 상태, 등잔의 기름이 다 타고 완전히 불이 꺼져 있는 상태, 불이 완전히 소진된 상태, 이것을 어떻게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처럼, 물질과 정신이 완전히 다 한 존재, 이런 존재들을 ‘나’라고 또는 ‘그’라고 ‘너’라고 부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름 붙일 수 있는 게 물질과 정신뿐이지 않습니까?
아산냐삿따(asaññasatta. 無想天)계는 정신은 없고 물질만 있는 세상이라서, '산냐가 없는 세상', 이렇게 이름 붙이고 무색계면 물질이 없고 정신만 있어서 '무색계(=물질이 없는 세상)' 이렇게 이름을 붙일 수 있는데, 열반이라는 것은 물질도 아니고 정신도 아니고, 그게 완전히 없어진 어떤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기껏 위빳사나 지혜로 아는 것이, 관념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물질과 정신뿐이다.’ 이제 그나마 지혜가 생겨서 아는데, 열반이라는 것은 그것도 없다는 거죠. 그것이 없는 상태, 우리가 아는 세상은 관념의 세상인데, 제대로 알면 관념이 없고 '물질과 정신이 있구나.'라고 압니다. 근데 열반은 물질과 정신도 아니고 또 관념도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이 특별한 열반에다가 어떻게 이름을 붙이기가 어렵다는 거죠. 뭐라고 불러야 될지 모른다는 것. 열반에 대해서.
탐욕이 없어져서, ‘닙바나 = 니(ni. 멀어지다) + 바나(bana = 와나 vana. = 갈애, 탐욕)에서 멀어져서 ‘닙바나’라고 부르는 거죠. 갈애가 없는 상태가 닙바나(열반)이다. 갈애가 없는 마음으로 보는 대상이 닙바나인 거죠.
갈애가 있는 마음으로 보는 것은 모두 문제가 있는 겁니다. 열반을 볼 때만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거죠.
‘그래서 이름을 붙일 길이 없다면 이름을 뭐라고 붙여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늙지 않고 죽지 않고 항상 있는 아주 아주 서늘하고 좋은 성분, 이것만은 분명하다. 열반은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그리고 항상 고정돼 있고 근심 없어 서늘하고 좋은 맛이 아주 분명한 것이다.’ 섞일 수가 없죠. 물질도 아니고 정신도 아니니까. 물질도 아니고 정신도 아니기 때문에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그래서 항상하고, 그래서 그 맛이 제일 좋다는 거죠.
위빳사나를 모르는 대부분의 범부는 나를 물질로 알지 못하고 정신으로 알지 못하고 '나'라는 관념으로 압니다. '나'라는 관념에서 시작해 관념의 세상에서 허우적대다가 죽기를 무한 반복합니다.
붓다의 출현으로 8정도를 닦아서 이제 지혜가 생기면 내가 물질과 정신, 5온으로 보이기 시작하죠. 5온을 조금씩 조금씩 보다가 그다음에 열반을 보는 거죠. 이렇게 열반이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항상하고, 제일 좋은 맛이다.
2002년도에 제가 수행할 때 수녀님이랑 같이 수행을 하는데 저와 띠 동갑이었습니다. 저보다 24살이 많았습니다. 왜 위빳사나 수행하시냐고 물었더니, 이게 제일 좋은 것이지 않냐? 열반이 제일 좋은 것이지 않냐? 이게 제일 좋은 것, 제일 행복한 것이라서 수행한다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다음 열반에 대한 게송이 이어집니다.
“사데와깟사 로깟사, 에떼 워 수카삼마따(sadevakassa lokassa, ete vo sukhasammatā. 범천, 천신을 포함한 모든 세상이 5욕락을 행복이라 정의했다.”
“얏타 쩨떼 니룻잔띠, 땅 떼상 둑카삼마땅(yattha cete nirujjhanti, taṃ tesaṃ dukkhasammataṃ. 모든 성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그 열반에서 5욕락은 소진한다. 그 열반을 어리석은 범부들은 고통이라 정의한다.”
‘사데와깟사(sadevakassa)’ : 범천, 범천의 왕, 천상계 천왕, 그리고 천신들을 포함하는
‘로깟사(lokassa)’ : 세상의 범부들, 범부 중에서도 지혜가 낮은 범부들, 그들이 사는 모든 세상이 색·성·향·미·촉 다섯 가지 대상들, 이 5욕락들을 ‘수카삼마따’ 행복이라고, 좋은 것이라고 정의한다. 감각의 행복을 좋은 것이라고 한다. 이 행복을 좋은 것이라고 하죠. 범천, 천신들, 범부들 중에서도 어리석은 범부들은 이런 것들, 좋은 소리, 냄새, 맛 이런 5욕락의 대상들을 수카(sukha), 행복이라고 정의하였다. 지혜가 뛰어난 아리야(ariya)들이 보는 아주 좋은 열반에서는 이런 색·성·향·미·촉의 대상들이 소멸한다. 감각의 행복이 소멸한 그 열반을 지혜가 둔한 범부들은 둑카(dukkha), 고통이라고 정의한다.
오늘 여기까지 하고 마치겠습니다. 회향하겠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공덕이 우리를 번뇌의 소멸로 이끌기를.
이러한 우리의 공덕을 모든 존재들에게 회향합니다.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사-두 사-두 사-두
편집자: 담마삐야
* 2023-06-19 인터넷
(https://us05web.zoom.us/j/4694074327?pwd=b2pNRUk4VzExbWFMSitFa1Jkc0wyUT09)으로 하신 법문을 필사하였습니다. 필사 후 위뿔라냐니 식카와띠님께 보여드리고 요약, 수정, 추가한 부분이 있습니다.
https://cafe.naver.com/dhammadipakorea/387
일부용어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