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424 6가지 바라밀을 4가지 결심으로 압축함 (법문: 위뿔라냐니 식카와띠님)
붓다왕사 286강 - 6가지 바라밀을 4가지 결심으로 압축함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사
10바라밀 = 6바라밀 = 4가지 결심
10가지 바라밀을 비슷한 성품끼리 묶으면 6가지가 됩니다. 6가지가 다나(보시), 실라(지계), 칸띠(인내), 위리야(노력), 자나(선정), 빤냐(지혜)입니다. 10개를 같은 성품끼리 묶으면 6개, 6개의 바라밀을 또 다시 같은 성품끼리 묶으면 4개가 되는 것이지요. 4가지의 아딧타나(결심)가 됩니다. 10개가 6개가 되고 6개를 또 압축하면 4가지 결심이 됩니다. 즉 “4가지 결심을 하면 10가지 바라밀이 완성된다.”라는 뜻입니다. 즉 4가지 결심을 하면 10가지 바라밀을 채울 수 있다는 겁니다. 다른 거 할 필요 없이 4가지 결심을 하고 실천하면 진짜 10가지 바라밀이 다 채워집니다. 이를 다른 말로는 기도 4가지를 하면 10가지 바라밀이 완성된다고 해도 되겠네요.
보살들이 붓다가 되기 위해서 바라밀을 채울 때, 계속해서 네 가지 결심(아딧타나)을 실천하면 붓다가 된다는 뜻입니다. 네 가지 결심은
1. 삿짜 아딧타나(Sacca-adhiṭṭhāna. 진실 결심),
2. 짜가 아딧타나(Cāga-adhiṭṭhāna. 버림 결심),
3. 우빠사마 아딧타나(Upasama-adhiṭṭhāna. 고요함 결심),
4. 빤냐 아딧타나(Paññā-adhiṭṭhāna. 지혜 결심)
삿짜 아딧타나는 진실하기로 결심합니다. 핵심이 무엇인가? 무엇이 진짜이고 진리인가? 이것을 계속 찾습니다. 버리기로 결심(짜가 아딧타나)합니다. 그리고 우빠사마 아딧타나, 우빠사마란 ‘뜨거운 없음, 고요함, 번뇌 없음, 고통 없음’인데 이러한 우빠사마를 얻겠다고 결심합니다. 고통 없고, 걱정 없고, 뜨거움 없고 완전한 행복을 추구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빤냐 아딧타나, 지혜를 결심합니다. 지혜로 보기를 원한다는 거죠. 이것을 찾기를 결심합니다. 계속해서 네 가지를 결심하면 10가지 바라밀이 갖춰집니다.
진리를, 핵심을 알겠다고 결심합니다. 버림에 대해서 결심합니다. 안 좋은 것(탐진치)을 버리는 거죠. 우빠사마 아딧타나, 뜨거움 없음, 고요함, 걱정 없음, 고통 없음, 절대 행복, 절대적인 고요한 행복을 얻겠다고 결심합니다. 지혜에 대한 결심, 모두 네 가지 결심을 합니다. 이 네 가지 결심을 계속하면 바라밀 10개가 채워지고 붓다도 될 수 있습니다.
1, 삿짜 아딧타나(Sacca-adhiṭṭhāna), 진리에 대한 결심.
① 빠라맛타 삿짜(paramattha-sacca)란 실제로 존재하는 진리이죠. 실제로 존재하는, 관념이 아닌 실제로 존재하는 진리인 열반, 그리고 열반에 이르게 되는 원인, 길(magga), 열반으로 향해 가는 그 앞의 길(pubbabhāga-paṭipadā)입니다. 열반으로 가는 길(magga)을 터주는 길(paṭipadā)을 말합니다. 즉 위빳사나 수행 그러니까 팔정도인 거죠.
이 수행을 위해 필요한 것이 ② 와찌 삿짜(vaci-sacca). 바른 말이죠. 참말만 하는 것. 그리고 위라띠 삿짜(virati-sacca), 이것은 거짓말을 피하는 것입니다. 바른 말 하는 것과 거짓말을 피하는 것은 다르죠. 위라띠 삿짜는 정어(正語)이고, 와찌 삿짜는 그냥 바른 말입니다. 제가 법문을 하는 것은 와찌 삿짜, 그냥 바른 말 하는 것이고, 거짓말할 수 있는데 거짓말을 하려다가 참말 하는 것, 이것은 위라띠 삿짜입니다. 자신이 낭패를 보더라도 거짓말을 피하는 거죠. 도둑이 도둑질하고 “도둑질 안 했는데요.”라고 거짓말하려다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참말을 하면 위라띠 삿짜입니다. 참외 서리했는데 서리 안 했다고 거짓말하려다가 “서리했습니다.”라고 참말 하면 위라띠 삿짜입니다. 장사꾼이 “팔아도 남지 않는다. 본전도 안 남는다.”라고 거짓말하면 위라띠 삿짜가 아닌 거죠. 거짓말이 됩니다.
③ 그다음에 냐나 삿짜(ñāṇa-sacca), 즉 마음부수인 빤냐입니다. 이 세 가지가 삿짜 아딧타나입니다.
삿짜 아딧타나는 진실에 대한 결심을 말합니다. 보살의 생은 바라밀을 채우는 생들이죠. 이것은 보살이 붓다의 생으로 나아가는 과정이죠. 그 길에서 와찌 삿짜, 바른 말 하고, 위라띠 삿짜, 거짓말을 피하고, 그리고 냐나 삿짜, 지혜가 있는 진실을 말합니다. 진실해도 지혜는 없을 수 있습니다. 거짓말은 피했으나 지혜롭지 못하여 많은 살생이나 출혈이 있을 경우 이는 냐나삿짜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진리에는 지혜도 있고 삿짜도 있습니다. 삿짜 아딧타나는 진실하고 진리를 향한 결심입니다. 진리는 지혜를 향한 결심이기도 합니다. 붓다가 되는 생, 보살의 마지막 생이 돼야 이 아딧타나 삿짜가 멈춥니다. 그래서 열반을 ‘빠라맛타 삿짜 아딧타나’라고 합니다. 열반은 진실 너머 진리 그러니까 실제 본질로서 가장 고귀한 삿짜 아딧타나입니다.
이 삿짜 아딧타나는 붓다가 되는 생이 돼야지, 앞서 말한 와찌 삿짜, 위라띠 삿짜, 빤냐 삿짜들이, 이 아딧타나들이 완성된다는 거죠. 긴 과정들이 끝나고 붓다가 되면 열반이라는 ‘빠라맛타 삿짜 아딧타나’가 완성이 됩니다. 모든 바라밀이 붓다가 되어야 완성이 되죠. 일반 붓다의 제자들은 아라한이 되면 바라밀이 완성이 됩니다. 그 전까지는 미완성입니다.
2. 짜가 아딧타나(Cāga-adhiṭṭhāna). 버림을 결심하는 겁니다.
짜가(cāga)는 버린다는 것입니다. 아라한도로 모든 번뇌들을 남김없이, 뿌리까지 완전히 버리는 것, 이것이 짜가 아딧타나(버림에 대한 결심)입니다. 버리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아라한의 도로 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뿌리까지 잘라서 버리는 것, 이것이 버림에 대한 결심입니다.
앞부분 보살의 생에서 보시부터 시작하는 여러 가지 바라밀(보시, 지계, 출리, 지혜, 정진, 참음, 진실, 결심, 자애, 평정)들을 채우죠. 보살로 사는 생 동안에 보시부터 시작하는 여러 바라밀들로, 왓투 까마(vatthu-kāma. 감각적 욕망의 대상), 낄레사 까마(kilesa-kāma. 감각적 욕망의 번뇌)들을 버립니다. 왓투 까마라는 것은 감각의 즐거움을 채워주는 물질을 말합니다. 5욕락을 즐길 수 있는 물질입니다. 낄레사 까마는 5욕락의 번뇌입니다. 5욕락의 번뇌가 있고 그다음에 5욕락의 물질이 있겠죠. 5욕락의 물질로 인해서 5욕락의 번뇌도 생겨나겠죠. 이 두 가지가 다릅니다. 5욕락을 주는 물건이 없어도 낄레사 까마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은 5욕락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으면 낄레사 까마가 있는 겁니다. 5욕락의 물질이 있어도 내가 그것에 대해서 즐거워하지 않고 좋아하지 않으면 낄레사 번뇌는 없는 겁니다. 두 개가 다른 거죠. 이 두 가지 다를 버리는 것, 이것이 짜가 아딧타나입니다. 왓투 까마, 낄레사 까마. 5욕락의 물질 그리고 5욕락을 원하는 번뇌, 두 가지를 다 버리는 것이 보살의 생에서 짜가 아디타나라는 겁니다.
진정한 짜가 아딧타나는 아라한의 도로 번뇌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버림에 대한 결심입니다. 보살이 아니더라도 번뇌의 소멸을 원하면서 진정한 버림을 결심할 수 있습니다. 5욕락을 채우는 물질과 5욕락을 원하는 번뇌, 이 두 가지를 버리는 거죠. 짜가 아딧타나 할 수 있습니다. 버림에 대한 결심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살의 생에서 바라밀을 채우는 기간 동안에는 번뇌들을 남김없이 뿌리까지 아직 자르지 못했습니다.
보살의 생에는 아직 번뇌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보시 등의 바라밀들을 가능한 한 채웁니다. 보시, 지계 등의 10가지 바라밀들을 채우는 과정에서, 왓투 까마를 버리고 낄레사 까마, 5욕락 원하는 번뇌를 버리는 것을 따당가 빠하나(tadaṅga-pahāna)라고 합니다. 한 순간 버립니다. 주로 물질을 버리는 보시를 말하겠죠. 물질을 버릴 때, 물질을 원하는 번뇌도 같이 버리죠. 같이 떨어져 나가야 내 손에서 물건이 나갈 수 있습니다. 안 그런 경우도 있겠지만 거의 대부분은 내가 5욕락에 대한, 물질에 대한 번뇌를 버릴 때 보시도 할 수 있습니다. 버리는데 그때 한순간 버립니다. 누군가의 기쁨을 위해 버릴 때 그 한 순간, 찰나에 탐욕 버림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때 보시의 마음이 있지 않습니까? 지나고 나면 또 다시 모읍니다. 계속 끊임없이 모읍니다. 하지만 보시가 이루어지는 그 한 순간 버립니다. 한 순간 번뇌를 버리고 욕심을 버리는 거죠.
그리고 또 ‘윅캄바나 빠하나(vikkhambhana-pahāna)’, 이건 버리는 게 좀 더 지속되는 겁니다. 계속해서 지속되게 버리는 것, 이건 주로 선정을 말합니다. 세간 선정을 닦을 때 5욕락에 대한 번뇌가 없어야 선정을 얻을 수 있겠죠. 그러니까 5욕락에 대한 물건, 그리고 그것을 갈망하는 마음, 이 두 가지를 계속해서 버려야 합니다. 선정을 얻기 위해서 일단 이 마음이 없어야 됩니다. 그래야지 선정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곧 보살의 생 동안에는 순간 버리는 것, 그러니까 그 번뇌를 5욕락에 대한 번뇌를 잠시 버리거나, 또는 그 버린 상태를 장시간 유지하는 것, 즉 선정을 얻거나 범천계에 태어나면 한참 동안 번뇌가 잠들어 있습니다. 이 정도만 할 수 있었죠. 한 순간 버리는 것. 그리고 그 버린 상태, 5욕락을 원하는 마음이 없는 상태를 장시간 유지하는 것은 할 수 있는데, 그 번뇌를 뿌리까지 뽑아서 버리는 것은 못합니다. 숨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도 이게 있습니다. 버리는 찰나에는 없고 버리지 않는 동안은 계속 있습니다. 수다원이 되면 좀 떨어지고, 아라한이 돼야 완전히 없어지는 거죠.
보살의 생 동안은 한 찰나찰나 버리거나, 그 버림의 마음을 장시간 유지하는 것만 할 수 있습니다. 아라한의 도의 지혜, 그리고 붓다의 모든 것을 아는 지혜(삽반뉴따냐나sabbaññutā-ñāṇa)에 이르러야만 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뿌리까지 잘라 버리는 단계에 완전히 도착하게 됩니다. 그제야 멈춥니다. 짜가 아딧타나가 완성되는 것은 붓다가 되어야 완성이 됩니다. 아라한의 도로 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뿌리까지 버립니다, 보살의 생에서 보시부터 시작하는 여러 바라밀들로, 각각의 왓투 까마, 5욕락의 물질, 그리고 낄레사 까마, 그 물질을 원하는 번뇌, 이런 것들을 한 순간 제거하고(따당가 빠하나), 또는 그 따당가 빠하나를 지속하는 것이 윅캄바나 빠하나입니다. 이렇게 버리는 것을 짜가 아딧타나라고 합니다.
그 짜가 아딧타나(버림에 대한 결심)는 실제로는 이 두 가지입니다. 보시를 매일매일 하는 것, 혹은 하루에 몇 번씩 하는 것, 이런 따당가 빠하나가 이어지면 윅캄바나 빠하나가 되겠죠. 아니면 선정으로 5욕락에 대한 갈애, 이것들을 계속해서 누르는 것, 계속 일어나지 못하게 누르는 것, 이것이 윅캄바나 빠하나입니다. 이것이 짜가 아딧타나입니다.
‘짜가’는 버림이라는 뜻이므로 보통은 보시라고 생각하는데, 지혜로운 불자는 보시를 하는 이유가 부자가 되려고 보시를 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게 아니라 열반을 얻고자 보시하는 거죠. 번뇌를 버리는 게 열반을 얻는 거니까, 5욕락에 대한, 물질에 대한 탐욕을 버리는 연습이 물질 보시, 짜가 아딧타나인 거죠. 왓투 까마(5욕락의 물질)를 버리고 그리고 그걸 버리면서, 낄레사 까마, 5욕락에 대한 갈애를 같이 버리고. 모든 번뇌를 버리기 위한 연습입니다. 훈련인 거죠. 열반으로 가기 위한 연습. 그리고 이 연습이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어지는 때가, 아라한의 도를 얻었을 때 끝이 납니다. 그때는 더 이상 연습할 필요가 없죠. 그 전까지는 계속해야 됩니다.
3. 우빠사마 아딧타나(Upasama-adhiṭṭhāna). 고요함을 결심합니다.
우빠사마 아딧타나는 아라한의 도로, 번뇌라는 모든 뜨거움을 남김없이 고요하게, 불을 확 꺼버리면 서늘하겠죠. 고요한 것. 그러니까 빠리닙바나의 순간에 윤회의 모든 고통을 완전히 남김없이 다 뿌리까지 제거해 버리는 것, 그래야 이 우빠사마 아딧타나의 일이 끝납니다. 우빠사마 아딧타나는 고요해지기로 결심하는 겁니다. 번뇌 없기를 뜨거움이 없기를 결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빠리닙바나(반열반) 즉, 아라한이 빠리닙바나에 드셔야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아라한이 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아라한이 마지막 숨을 거둘 때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그 앞에 노력하는 부분들이 있죠. 노력하는 생들이 있지 않습니까? 보살이 붓다가 되기 위해서 앞에 많은 생들에서 노력하며 보시, 지계, 출리, 노력, 선정, 지혜. 이런 바라밀들을 채우죠. 바라밀들을 노련하게 갈고 닦습니다. 이 기간에 보살이 로바(탐), 도사(진), 모하(치) 이런 각각의 뜨거운 번뇌들을 한 찰나찰나 제거한다는 겁니다. 우리 범부의 생은 번뇌를 한 순간 제거하는 겁니다. 번뇌 없는 한 순간인 거죠. 한 순간 제거하고 그 한 순간 한 순간을 오랫동안 유지하는 것, 이것은 윅캄바나 빠하나입니다. 이것은 주로 선정을 얘기합니다. 욕계에 살면서 윅캄바나 빠하나를 기대하면 안 됩니다. 욕계 선업을 지으면서 윅캄바나 빠하나를 기대하면 안 됩니다. 색계 선업, 무색계 선업 이런 게 윅캄바나 빠하나입니다.
번뇌는 한 순간 잠시 왓투 까마, 낄레사 까마에서 벗어나고, 좋은 일 할 때, 보시뿐만 아니라 좋은 일들이 있죠. 봉사하고 계를 지키고, 거짓말하려다가 거짓말 안 하고, 죽이려다가 죽이지 않고, 이런 선업을 짓는 그 한 순간만 따당가 빠하나로 고요합니다. 그게 계속 유지되도록 하는 것, “나는 이걸로는 행복하지 않다. 더 행복해지고 싶다.” 이렇게 해서 선정 수행을 한다거나 이러면 윅캄바나 빠하나가 됩니다.
윅캄바나 빠하나 하면 오랫동안, 1시간 좌선하면 1시간 내내, 3시간 하면 3시간 내내 마음이 편안하게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고요의 결심이 우빠사마 아딧타나입니다. 내 마음을 번뇌 없이 고요하게 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죠. 보시도 있고 지계도 있고 출리도 있고 5욕락으로부터 계속해서 멀어지려고 하는 노력들, 그런 훈련들입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고 내일 이어서 하겠습니다. 회향하겠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공덕이 우리를 번뇌의 소멸로 이끌기를.
이러한 우리의 공덕을 모든 존재들에게 회향합니다.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사-두 사-두 사-두
편집자: 담마삐야
* 2023-04-24 인터넷
(https://us05web.zoom.us/j/4694074327?pwd=b2pNRUk4VzExbWFMSitFa1Jkc0wyUT09)으로 하신 법문을 필사하였습니다. 필사 후 위뿔라냐니 식카와띠님께 보여드리고 요약, 수정, 추가한 부분이 있습니다.
https://cafe.naver.com/dhammadipakorea/98
일부용어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