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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7 사정근(四正勤) - 2

작성자그림자|작성시간23.08.04|조회수7 목록 댓글 1

20230717 삼마빠다나 4가지 (2) (위뿔라냐니 식카와띠님)

 

<아비담맛타상가하> 7장 범주의 모음(사뭇짜야 상가하 samuccaya-saṅgaha) - 보디빡키야 - 삼마빠다나 (2)

 

사뭇짜야 장에서 삼마빠다나(sammappadhānā) 하고 있습니다. 삼마빠다나(正勤)는 바른 노력이란 뜻입니다. 바른 노력인데, 아주 열심히 하는 노력을 말합니다. 그냥 대충하는 노력이 아니라 매우 열심히 하는 바른 노력을 삼마빠다나라고 합니다.

 

이 바른 위리야(삼마빠다나)일어난 불선업을 자르고, 일어나지 않은 불선업을 누르고 일어나지 않은 선업은 일으키고 일어난 선업은 더 크게 만드는 것, 네 가지가 노력입니다.

 

근데 아라한에게는 이런 노력이 없습니다. 일단 아라한들은 불선업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겠죠. 그러니까 일어난 불선업을 자를 필요가 없겠죠. 그리고 일어나지 않은 불선업을 일어나지 않게 조심할 필요도 없겠죠. 일어날 게 없으니까요. 숨어있는 불선업이 없으므로 일단 두 가지 노력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아라한들은 어떤 미세한 갈애도 없으므로 선업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좋은 결과로 돌아오는 선업을 짓고 싶은 마음이 없어진 거죠. 선업을 짓고자 하는 갈애가 없습니다. 선업 짓고 싶은 것도 탐욕 없다는 뜻입니다. 범부들과 유학들은 선업을 짓고 싶다는 갈애로 선업을 짓죠. 이건 물론 지혜와 함께하는 갈애입니다. 어리석음은 자신을 구렁텅이로 데리고 가는 마음이고, 선업을 짓고 싶어 하는 마음은 지혜가 있긴 하지만 이 역시 갈애인 거죠. 그런 갈애가 있는데 아라한이 되면 그게 없는 거죠. 갈애가 완전히 없으니까, 선업을 짓고 싶은 마음도 없고 불선업은 아예 없어진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아라한은 불선업의 마음이 없으니까 앞에 두 가지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뒤에 두 가지 위리야 선업을 짓고 싶은 마음도 없으니까 뒤의 두 가지 위리야도 일어나지 않겠죠. 갈애를 다 제거했으니까. 네 가지 위리야 모두 아라한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범부와 유학(아래 세 단계의 성인)들에게만 해당되는 위리야입니다.

 

삼마빠다나 위리야는 아라한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질문 : 위방가에 네 가지 삼마빠다나는 몇 개가 선업이고 몇 개가 불선업이고 몇 개가 아뱌까따(abyākata. 선도 아니고 불선도 아닌 것 즉 작용과 과보)인가?”

대답 : 네 가지가 모두 선업이다.

 

그러니까 일어난 불선업을 자르는 것도 선업이고, 일어나지 않은 불선업을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도 선업이고, 일어나지 않은 선업을 일으키는 것도 선업이고, 일어난 선업을 더 많이 더 많이 되게 하는 것도 선업이라는 거죠. 집중수행처에 온 수행자가 하루 종일 하는 게 이것이지 않습니까? 계속 불선업이 일어나는 것을 일어나지 않게 하고 일어나면 누르고 이렇게 하는 것.

 

삼마빠다나 = 21가지 선업 마음

이 위리야는 뭐냐 하면 선업의 마음 21개입니다. 즉 마하꾸살라(mahāk-usala. 욕계 선업) 8, 루빠꾸살라(rūpa-kusala. 색계 선업) 5, 아루빠꾸살라(arūpa-kusala. 무색계 선업) 4, 그리고 로꿋따라 꾸살라(lokuttara-kusala) 4개 모두 21개가 선업 마음입니다. 이 네 가지 마음이 이 마음입니다. 21개가 네 가지 위리야, 네 가지 선한 의도가 이 21개의 마음입니다.

 

이 삼마빠다나 위리야는 그냥 보통의 위리야가 아닙니다. 그냥 일반적인 위리야가 아니고 아주아주, 아주아주 심한, 그리고 아주 끈질기고, 아주 지나치게 넘치는 그런 위리야만 말한다.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삼마빠다나 위리야, 보디빡키야 담마 37개에 들어가는 4개이지 않습니까? 보디빡키야 담마(bodhipakkhiya-dhammā) 소제목 일곱 가지는 사띠빳타나(4념처), 삼마빠다나(4정근), 잇디빠다(4여의족), 5, 5, 7각지, 8정도입니다. 삼마빠다나, 노력은 잇디빠다, 5, 5, 7각지, 8정도에도 들어가 있습니다.

 

이 삼마빠다나는 일반적인 노력이 아니라 심한 노력입니다. 지나치고 그리고 잠시 뜨겁고 마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놓지 않고 계속 점점 더 세게 강도를 올리는 것을 유지해가는 위리야입니다.

 

위빳사나의 위리야는 점점 더 위리야를 올려야 지혜가 점점 올라갑니다. 위리야를 같은 수준으로 계속해가지고는 계속 같은 자리입니다. 3개월 해도 똑같고 3년 해도 똑 같고.

 

그리고 사띠빠타나의 위리야 하나가 4가지로 나뉩니다. 이 삼마빠다나의 본질은 위리야 하나인데 왜 삼마빠다나 네 가지라고 하는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대답은 그 본질은 위리야 하나인데, 일어난 불선업을 제거하고, 일어나지 않는 불선업은 일어나지 않게 하고, 일어나지 않은 선업은 일으키고, 일어난 선업은 더 크게 만드는 일, 4가지를 한다는 거죠.

 

위리야라는 마음부수 혼자서 4가지 일을 한다는 겁니다. 보디빡키야에 들어가지 않습니까? 보디빡키야는 도의 지혜를 얻는 구성 요소인 거죠. 그럼 이게 위빳사나 수행을 할 때 위리야여야 될 거 아닙니까?

 

오른발, 왼발이라고 명칭을 쓰지 않고 그냥 걸으면 번뇌와 함께 걷는 것입니다. 걷는 것은 같은데 오른발, 왼발이렇게 하면 오른발, 왼발 하는 그 순간만큼은 번뇌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오른발, 왼발이 들어간 거죠. 그 순간 그 1초 동안의 오른발 왼발 22초 동안만큼의 번뇌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1초에 마음 1조 개가 일어나고 사라진다니까, 1초의 찰나만큼은 들어오지 않습니다. 아니면 번뇌는 계속 있습니다. 우리는 번뇌와 같이 사는 거죠. 명칭 하면 명칭 한 만큼 그 찰나만큼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어나지 않은 불선업을 내가 명칭으로 누른 거죠.

 

그리고 내가 생각하고 있을 때, 안 좋은 생각이나 좋은 생각이나, 대개 안 좋은 생각이 들죠. 아라한들은 선업도 짓지 않죠. 갈애가 없기 때문에 갈애라는 불선 마음부수가 없어서 그것도 짓지 않는데, 우리가 하는 생각들이 일어난 불선업이죠. 이것을 내가 생각이라고 명칭하면 일어난 불선업이 제거됩니다. 오른발 왼발하면 일어나지 않은 불선업을 일어나지 않게 막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명칭을 많이 하면 할수록 번뇌가 들어오지 않겠죠. 들어오는 순간들이 점점 없어집니다. 일어나지 않은 선업을 일으키는 거죠. 왜냐하면 불선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니까요.

 

뭐가 선업인지 뭐가 불선업인지 구분이 됩니까? 저는 위빳사나 할 때 뭐가 선업이고 뭐가 불선업인지 구분이 안 되던데요. 선업에서 불선업으로 순식간에 바뀌어서요. 어쨌든 명칭을 하면 일어나지 않은 선업(지혜)을 일으키는 겁니다. 명칭을 하면 일어나지 않은 선업을 일으킨다는 게 출세간 선업을 일으킨다는 거죠. 업을 만들지 않는 선업을 일으킵니다. 일어나지 않은 선업을 일으킵니다. 늙고 병들고 죽음을 일으키지 않는 겁니다. 사띠를 한다는 것은 일어나지 않은 깨끗한 선업을 일으키는 겁니다. 가장 현명한 선업, 가장 똑똑한 선업입니다.

 

그다음에는 일어난 선업을 더 크게 만듭니다. 더 많이 하면 많이 할수록 사띠를 더 많이 하면 더 많이 할수록 점점 더 커지겠죠. 어리석음과 함께 하는 선업도 짓지 않고 불선업은 당연히 짓지 않고. 4가지가 다 해결됐습니다.

 

명칭을 한다는 것은 내가 명칭을 붙일 때 어디에 명칭을 붙일까? 내 몸에 내 느낌에 내 생각에 명칭하죠. 명칭은 내 몸에, 내 느낌에, 내 생각에 명칭하지 않습니까? 다른 데 명칭하지 않습니다. 명칭으로 엉뚱한 데, 예를 들어 치약 뚜껑 엶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의자에 앉음하면 안 되고, ‘잡음, 닿음, 누름이렇게 해야 하는 거죠. 내 몸에 명칭해야 됩니다. 의자에 앉음이 아니라 앉음, 닿음이렇게 명칭해야 합니다.

 

명칭을 한다는 게 항상 몸과 느낌과 생각에 명칭을 하고 있으니까, 마음이 다른 데로 가지 않고 삼마상깝빠(sammā-saṅkappa), 바른 겨냥, 나의 몸에, 나의 느낌에, 나의 생각에 이쪽 방향으로 계속 갑니다. 방향이 다른 거죠. 삼마상깝빠, 바른 겨냥입니다. 엉뚱한 데로 가지 않고. 일상을 살면서 평소에 명칭을 오른발, 왼발, , 나아감, 내림이렇게 하지 않죠. ‘마심, 삼킴, 잡음, 놓음하지 않죠. 그냥 마시고 그냥 삼킬 때 마음은 저기 딴 데 가겠습니다. 근데 명칭을 하면 내 몸에 나의 느낌에 나의 생각에 마음이 갑니다. 나에게로 명칭이 향하는 것이 바른 겨냥인 거죠. 명칭을 한다는 게, 나에게 마음이 가 있는 상태가 바른 겨냥(바른 사유, 삼마상까빠)입니다.

 

어떤 수행자는 명칭을 하라고 하면 상추를 보고 초록색, 초록색이라고 명칭했다는데, 그렇게 명칭하면 안 되고 , 이라고 명칭해야 됩니다. 몸에 명칭하는 겁니다. 보고 있는 내 몸에 명칭해야 됩니다. 몸에 명칭한다는 게 바른 겨냥입니다. 명칭을 하지 않으면 그냥 생각하고 있죠. 하루 종일 뭐든 생각하면서 움직이죠. 생각하면서 움직이는데 명칭을 하면, (12연기 표)

 

보이십니까?

 

명칭을 하지 않으면 마음이 항상 이렇게 갑니다. 이렇게 여기에서 이렇게 가는데 (웨다나 -> 딴하 -> 우빠다나) 명칭을 하면 여기(웨다나와 딴하 사이)를 막는 거죠. ‘좋아함, 좋아함웨다나가 좋아함이면 좋아함’, 행복하면 행복’, 싫어하면 싫어함성내면 성냄통증이면 통증’, 이 웨다나로 인해서 생겨나는 생각들을 생각이라고 내가 명칭함으로써, 이렇게 가지 못하게 여기서 (웨다나와 딴하 사이를) 가로막는 거죠. 바퀴를 세웁니다. 세운다는 것은 이렇게 굴러가게 하는 이 힘을 계속 막는 거죠. 계속 막습니다. 계속 못 굴러가게, 계속 본능에 반발하는 힘인 거죠. 반발하는 위리야입니다. 삼마와야마, 바른 노력이 명칭할 때마다 들어 있습니다. 지금 삼마빠다나(바른 노력)이 여러분이 명칭할 때마다 이 바퀴를 세우는 겁니다. 굴러가지 못하게 멈춰 세우는 거죠. 그 노력을 합니다.

 

삼마빠다나 = 위빳사나의 노력

 

우리는 평소에는 절대 이런 노력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위빳사나가 아니고는 이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좋은 웨다나를 더 많이 만드는 노력을 하죠. 우리가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좋은 느낌, 수카(sukha. 행복감) 삐띠(pīti. 희열) 이런 거를 더 많이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은 그거죠. 이 웨다나를 좋은 쪽으로 더 많이 더 많이 더 크게 만드는 게 행복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애써 만든 웨다나는 사라집니다.

 

그게 아니라 위빳사나의 행복은, 팔정도의 행복은 이런 좋은 웨다나를 키우는 게 아닙니다. 위빳사나의 행복(성공)은 좋은 느낌이 성장해서 커지지 않게 일어나자마자 미연에 파괴시키는 것이 위빳사나 사띠가 불러오는 행복이고, 지혜입니다. 그러니까 팔정도 끝에는 행복이 있는 게 아니라 지혜가 있는 거죠. 그렇죠? 삼마딧티(sammādiṭṭhi. 바른 견해), 위빳사나 삼마딧티(위빳사나의 바른 견해), 막가 삼마딧티(출세간 도의 바른 견해), 팔라 삼마딧티(출세간 과의 바른 견해)가 있네요. 위빳사나의 결론은 행복이 아니라 지혜인데, 지혜가 있으면 고통으로 데려가지 않으니까 행복인 거죠. 고통의 반대가 행복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 웨다나가 집착(딴하)로 가서 업을 만들지 못하게 계속 막는 본능에 반발하는 위리야(vīriya. 노력)가 있습니다. 이게 바른 노력(삼마와야마sammā-vāyāma)입니다. 이게 팔정도의 바른 노력이죠. 팔정도가 아닌 다른 선정이나 욕계 선업에서의 바른 노력은, 좋은 웨다나를 계속 만드는, 좋은 웨다나(느낌), 냐나삼빠윧따(ñāṇa-sampayutta. 지혜가 결합한) 소마낫사나(somanassa), 우뻭카(upekkhā)를 계속 많이 만드는 게 붇다가 출현하기 전의 중생들이 찾는 행복을 위한 노력인 거죠. 팔정도(위빳사나)에서는 이 웨다나가 더 커지지 못하게, 실현되지 못하게 여기서 막아 파괴하는 거죠. 그래야 늙고 병들고 죽음으로 가지 않으니까. 안 그러면 더 커지면 계속 늙고 죽음으로 가니까.

 

늙고 병들고 죽는 거 좋습니까? 희망하십니까? 많이 해봤는데 질리지도 않고 지치지도 않고 매일 열심히 갑니다. 같은 길을.

 

늙음으로 죽음으로 가는 저급한 본능을 사력을 다해 막는 가장 똑똑한 의지가 삼마빠다나(바른 노력)입니다. 여러분이 명칭하시면 느낌에서 집착으로 안 넘어가지 않습니까? 넘어가지 않고 여기 웨다나(느낌)에서 끝납니다. 통증도 사라지고. 통증 사라져 본 분 있죠? 사띠해서 통증이 사라지는데, 그 순간이 기억나게 사라지죠. 잊히지 않게 사라집니다. 통증도 사라지고 통증 아닌 다른 것들도 사라집니다. 좋은 것도 사라지고 안 좋은 것도 사라지고. 좋은 것도 사라져야지 이쪽으로 가지 않고, 안 좋은 것도 사라져야 이쪽으로 가지 않죠. 다 사라집니다. 즉 선업의 마음도 사띠해야 되고, 불선업의 마음도 사띠해야 죽음으로 가지 않습니다. 사띠의 힘들이 모든 선업, 불선업 둘 다가 갈애와 함께 하기 때문에, 둘 다를 계속 차단해야 사띠의 힘이 점점 커집니다. 위빠사나 지혜란 선업은 키우고 불선업은 없애고 이렇게 되는 게 아닙니다. 업을 만들지 않는 거니까. 선업도 불선업도 다 안 만들어야 됩니다. 선업은 만들고 불선업은 안 만들고 이게 이렇게 되면 사띠에 힘이 붙지 않습니다. 둘 다를 계속 잘라야 나를 ‘5으로 보는 지혜가 생깁니다.

 

명칭한다는 것은 삼마와야마입니다. 지금 하고 있는 삼마빠다나인 거죠. 삼마빠다나, 일어난 불선업은 제거하고, 일어나지 않은 불선업은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은 다음 시간에 이어서 하겠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공덕이 우리를 번뇌의 소멸로 이끌기를.

이러한 우리의 공덕을 모든 존재들에게 회향합니다.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사-두 사-두 사-두

 

편집자: 담마삐야

 

* 2023-07-17 인터넷

(https://us05web.zoom.us/j/4694074327?pwd=b2pNRUk4VzExbWFMSitFa1Jkc0wyUT09)으로 하신 법문을 필사하였습니다. 필사 후 위뿔라냐니 식카와띠님께 보여드리고 요약, 수정, 추가한 부분이 있습니다.

 

https://cafe.naver.com/dhammadipakorea/524

일부용어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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