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18 삼마빠다나 4가지 (3) : 팔정도 (위뿔라냐니 식카와띠님)
<아비담맛타상가하> 7장 범주의 모음(사뭇짜야 상가하 samuccaya-saṅgaha) - 보디빡키야 - 삼마빠다나 (3)
삼마빠다나(sammappadhānā)입니다. 삼마빠다나(正勤)는 도의 지혜를 얻기 위한 바른 노력이죠. 사띠빳타나가 첫 번째 보디빡키야 담마이고, 사띠빳타나를 하기 위해서 삼마빠다나가 있는 거죠. 삼마와야마(바른 정진)는 팔정도 중에 하나인데, 그 바른 정진 안에 삼마빠다나 네 개가 들어가야 되는 거죠.
팔정도 안에 삼마와야마가 있고, 삼마와야마 안에 삼마빠다나 4가지가 들어가야 됩니다. 팔정도가 사띠빳타나 4가지입니다. 팔정도는 사띠빳타나 4가지, 사띠빳타나 4가지를 닦는다는 것이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것이고, 위빳사나 수행은 팔정도이죠.
삼마사띠가 사띠빳타나 4가지입니다. 사띠빳타나 4가지는 팔정도이고, 위빳사나이고, 중도이고, 그리고 그 일을 하는 데 쓰는 노력이 삼마빠다나입니다. 삼마빠다나 4가지를 여러분이 위빳사나 수행을 할 때 노력을 하고 있으면, 그 노력이 삼마빠다나 4가지를 하고 있는 것, 바른 노력 4가지를 하고 있는 겁니다.
⑴ 일어난 불선업은 자르고
⑵ 일어나지 않은 불선업은 누르고
⑶ 일어나지 않은 선업은 일으키고
⑷ 일어난 선업은 더 크게 키우고
이걸 하는 겁니다.
다시 보디빡카야 담마는 (보디bodhi+빡카pakkha+이야iya), 즉 보디냐나(bodhi-ñāṇa), 깨달음, 도의 지혜를 얻는 데 필요한 구성 성분들 37가지가 있다. 이게 보디빡키야 담마입니다. 보디빡키야 담마는 첫 번째로 사띠빳타나 네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 사띠빳타나 네 가지는 위빳사나이고, 위빳사나는 8정도입니다. 사띠빳타나, 4가지를 사띠하고 있다는 것은 팔정도의 삼마사띠(sammā-sati)를 열심히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삼마사띠를 열심히 한다는 것은 삼마상깝빠(sammā-saṅkappa)가 되고 있고. 위라띠(virati. 피함) 세 가지(바른 말·바른 행위·바른 생계)를 밑에 깔고 있고, 그리고 그걸 하는데 열심히 노력하는 삼마빠다나를 하고 있다는 거죠. 삼마와야마를 하면 삼마빠다나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삼마사마디(sammā-samādh)가 있어야 됩니다. 사마디가 좋은 사람들은 마음의 힘이 센 사람들입니다. 힘이 세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어떤 사람은 2리터(2kg)짜리 물병을 한 번에 하나씩만 나를 수 있고, 어떤 사람은 2리터짜리 물병 10개(20kg)를 한 번에 들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20kg를 한 번에 들어 올릴 수 있는 사람은 사마디가 좋은 겁니다. 그런 사람들은 일을 짧은 시간에 끝내겠죠. 도끼로 장작을 팰 때, 다른 사람들은 10번 내리쳐야 되는데 힘이 있고 능숙한 사람은 한 번만 내리쳐도 장작이 잘립니다. 힘이 없으면 여러 번 내리쳐야 나무를 넘어뜨리는데, 힘센 사람은 도끼질을 한 번에 일을 끝내죠. 힘이 삼마사마디입니다.
근데 삼마와야마가 있으면, 노력을 많이 하면, 사마디가 좋은 사람은 한 번 찍어서 넘어가는데, 힘이 없어도 노력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한번이 아닌 열 번 찍어서 장작을 패는 거죠. 10번 안 찍고 한 번만 찍으면, 사마디도 없는데 노력도 안 하면 장작이 패질 리가 없죠.
사마디가 좋고 위리야도 좋으면 수행이 빠르겠죠. 사마디가 안 좋아도 위리야가 좋으면 수행이 빠릅니다. 사마디가 좋은데 위리야가 쳐지면, 가다 쉬다 가다 자다 가다 자다 이렇게 되겠죠.
바른 노력이 있으면 졸지 않습니다.
위리야(삼마빠다나)가 있으면 졸지 않습니다. 위리야가 좋은 사람은 혼침이 없습니다. 하기 싫은데 하고 마지 못해 하고 있을 때 생기는 것이 혼침이죠. 그러니 하고 싶은 마음으로 열심히 하면 혼침이 저절로 없어집니다. 그렇겠죠? 하고 싶은 마음으로 열심히 하면 혼침이 사라집니다. 그러니까 삼마와야마, 아주 하고 싶어서 노력한다면 혼침이 안 생기겠죠. “불에 달아서 아주 뜨거운 쇳덩어리 위에 파리가 앉을 수 없는 것처럼, 뜨거운 위리야가 있으면 혼침이라는 파리가 들러붙지 않는다.” 너무 뜨거운데 감히 파리가 어떻게 앉겠습니까? 위리야가 아주 좋으면 잠이라는 파리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위리야가 좋다는 것은 사띠가 잘 된다는 뜻이죠. 사띠가 잘 된다는 뜻은 바로 볼 수 있다는 겁니다. ‘나’(5온)를 대상으로 볼 수 있다는 겁니다. ‘나’를 대상으로 볼 수 겁니다. 나를 대상으로 볼 수 있어야 삼마사띠를 할 수 있습니다. 나를 대상으로 보지 못하면 사띠를 할 수가 없는 거죠. 삼마사띠가 생기지 않습니다. 내가 대상으로 안 보이는데 어디에 어떻게 사띠를 하겠습니까? 대상으로 본다는 것은 삼마딧티(sammā-diṭṭhi), 빤냐가 있는 겁니다.
삼학(三學)은 계학(戒學), 정학(定學), 혜학(慧學)을 말합니다. 8정도 중에서 앞의 두 가지, 삼마딧티(바른 견해)와 삼마상깝빠(바른 사유. 바른 겨냥)가 혜학(慧學)입니다. 삼마딧티는 무상·고·무아입니다. 이 밑에 8정도 일곱 개가 완성이 돼서 마지막에 오는 것이 삼마딧티(바른 견해)이죠. 지혜가 있기 위해서는 삼마상깝빠(바른 겨냥)이 있어야 합니다. 나를 대상으로 볼 수 있는 겨냥, 이것부터가 지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린 나를 나로 알지, 나를 대상으로 보지 못하죠. 나를 대상으로 보는 것. 일단 나를 나에게서 뚝! 떨어뜨리는 거죠. 이게 일단 되고 난 뒤 그다음에 삼마사띠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삼마사띠가 있기 위해서는 일단 나를 대상으로 볼 수 있는 지혜부터 있어야지 삼마사띠가 됩니다. 이 삼마사띠가 계속 잘 들기 위해서는 지혜도 있어야 되고 노력도 있어야 됩니다. 노력이라는 건 이어지는 거죠. 계속 이어지는 겁니다. 사띠가 계속 이어지게 하는 노력 하다 말다 하다 말다 하지 않고 계속 이어지게 하는 게 8정도의 노력입니다.
8정도의 노력이 좌선의 사마디가 행선으로 이어지고, 행선의 노력이 좌선으로 이어지고, 일상생활 동작을 다 사띠하고, 일상생활 동작에 다 명칭하라고 했는데 …… 명칭도 안 하고 다니고. 일상 동작에 다 명칭하고, 집중하고, 행선과 좌선하는 사이에, 사이도 다 이어지도록, 사이가 계속 이어지도록 노력하는 것, 이게 삼마와야마죠. 이게 삼마빠다나입니다. 바른 노력. 그러면 사띠가 계속 이어지겠죠. 그걸 하는데 그때 쓰는 집중이 무게가 있으면 힘이 세면, 남들은 10번 부풂 꺼짐 하는데, 1번 부풂 꺼짐 해도 지혜가 생기는 거죠. 삼마딧티, 지혜가 생깁니다. 삼마사마디의 힘이 좋으면, 그리고 노력을 많이 하면 할수록, 점점 빈틈없이 계속 위리야를 쏟을 수 있으면, 빈틈없이 위리야를 쏟는다는 것은 삼마상깝빠, 바른 겨냥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계속 이어지고 있고, 계속 나를 대상으로 보고 있고, 그리고 사띠를 계속하고 있는 것인데, 사띠는 명칭하는 겁니다.
이렇게 명칭하는데 명칭은 어디에 합니까? 명칭을 나에 하지 않습니까? 나, 내 몸, 내 느낌, 내 생각에 사띠(명칭)를 하죠. 삼마상깝빠(바른 겨냥)으로 나를 대상으로 보고 난 뒤에, ‘나’라는 것에다 명칭을 하지 않습니까? 내 몸, 내 느낌, 내 생각 여기에 명칭을 하죠.
명칭한다는 것은 떼어 놓고 보는 겁니다. 나를 분리해서, 나와 나는 붙어 있는데 떼서 보는 거죠. 강물이 하류로 흐르는데, 흐르는 강물을 뜯어서 거꾸로 상류로 흐르게 하는 겁니다. 밑으로 내려가야 되는데 위로 계속 역류시키는 거죠. 그게 삼마상깝빠입니다. 이걸 하기 위해서 노력을 지속하고, 그리고 그 노력이 빈틈없도록 계속되는 게 삼마빠다나입니다. 좀 사띠로 좀 이어지게 좀 해보십시오. 이어지게. 계속 이어지게 좀 해보십시오.
다른 건 다 해봤다는데 생이 너무 많아서 다른 일들은 다 해봤는데, 내가 해보지 못한 게 수다원의 도를 얻는 것, 이거 말고는 다 해봤다지 않습니까?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거 하면 재밌고 신기할 텐데.
바른 노력 = 사띠를 계속 이어지게 함
계속 이어지게 하는 게 삼마와야마입니다. 사띠를 계속 이어지게 하는 거. 계속 사띠를 하려면 삼마상깝빠가 돼야 됩니다. 나를 대상으로 보는 겁니다.
사마디에 무게가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쓰는 칼에 무게가 있어야 합니다. 칼을 쓰긴 쓰는데, 예를 들어서 연필 깎는 칼로 생선을 토막 내기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통나무를 자르는데 연필 깎는 칼로는 자르기 어렵겠죠. 근데 도끼가 있으면, 무겁고 칼날이 날카로운 도끼가 있으면 통나무를 잘 쓰러뜨리겠지요. 연필 깎는 칼이면 한참 걸리겠네요. 1년을 해야 되겠네요. 그게 삼마사마디입니다. 칼의 무게.
무엇이든 자꾸 하면 됩니다. 뭐든지 거듭하면. 해서 안 되는 게 어디 있겠습니까? 이번 생에 안 되면 다음 생에 해야 하고, 계속해야 되는 게 8정도이고, 그 그중에서 삼마빠다나가 삼마와야마, 위리야입니다. 그래서 명칭을 쓰는데 명칭이 삼마사띠라고 했습니다. 사띠는 명칭을 쓰는 것이다.
명칭을 쓸 때 ‘나’에다 명칭을 쓰지 않습니까? 나라는 것이 바른 겨냥, 삼마상깝빠인 거죠. 내 몸 내 느낌 내 생각 여기에다 명칭을 쓰는 거죠. 삼마상깝빠, 여기에 명칭을 쓰고 그리고 노력 삼마빠다나, 삼마와야마라는 이 위대한 노력을, 띄엄띄엄하지 않고, 하다 말다 하다 말다 하지 않고, 계속 이어지게 명칭을 써 보십시오.
그런데 이어지게 명칭을 쓰기 위해서 먼저 이 ‘나’가 대상으로 보여야 됩니다. 내 몸과 내 느낌과 내 생각이라는 것이 계속 대상으로 보여야 사띠가 가능합니다. 명칭을 쓰기 위해서 일단 나를 대상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명칭을 붙여야 되니까 이것을 대상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혜학 삼마상깝빠(바른 겨냥)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계속 명칭을 이어지도록 붙이는 노력(삼마와야마=삼마빠다나). 그래서 삼마사띠가 뭐냐면 명칭입니다. 명칭을 어떻게 붙입니까? 오른발 왼발 듦 나감 내림 부풂 꺼짐 통증 가려움 더움 추움 소름끼침 좋아함 싫어함 성냄, 이런 명칭을 쓰겠죠. 이게 사띠입니다.
명칭을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명칭을 하면 일어난 불선업, 내가 생각하고 있을 때 생각, 생각이라고 명칭하면 생각이라는 그 불선업이 잘리겠죠. 명칭을 하면 생각이 이어지지 않습니다. 생각 생각하다가 끝나는 거죠. 생각이 이어지지 않고 여기서 끊어졌다가 또 들어오지만 그래도 또 하면 됩니다. 그럼 일어난 불선업이 제거되는 겁니다.
생각, 생각, 오른발, 왼발 하고 있는 동안 늘상 들어오는 번뇌들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부풂, 꺼짐이라고 명칭하고 있으면 들어올 수 있는 번뇌들이 그 명칭에 막혀서 못 들어오는 겁니다. 잠재된 불선업이 일어날 틈이 없어지는 거죠. 들어오지 않습니다. 잠재된 불선업을 막습니다.
그리고 또 명칭을 쓰면 어떻게 되는가? 잠재된 일어나지 않은 선업이 일어나게 됩니다. 명칭을 쓰면, 명칭을 하면, 오른발 왼발 듦 나아감 내림 생각, 무슨 통증이라고 명칭을 하면, 통증을 보고 일어날 수 있는 성냄, 지루함, 지겨움, 짜증, 실망 이런 것들이 일어나지 않겠죠. 명칭을 쓰면. 그리고 오른발, 왼발이라고 명칭을 쓰면, 일어날 수 있는 불선업을 일어나지 않게 하니까, 잠재된 일어나지 않은 선업을 일으키는 겁니다. 내가 명칭을 하고 있지 않으면, 그냥 살면, 계속 불선한 마음이 밀려오는데, 우리가 일으키는 세간의 선한 마음은 탐욕과 함께 하는 세간 선업입니다. 세간에서 일으키는 선한 마음이 보시, 지계, 마음을 다스리는 수행 이런 일들을 하죠. 이런 것들이 다 이런 마음들이 탐욕과 함께 해서 다시 태어나게 하지 않습니까? 다시 태어나므로 죽음이라는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여기서 죽지 않습니까? 죽고 병들고 아프고 이렇게 안 좋은 것들을 가져오는 선업인 거죠. 아무리 좋은 마음을 써도 결국은 늙고 아프고 잊어버리고 병들고 이런 쪽으로 안 좋은 결과를 가지고 오는 선업입니다. 아무리 좋은 마음을 내도 결국 그렇게 가지 않습니까? 그런 선업을 내고 있는데 그 선업이 아니라 ‘오른발, 왼발’ ‘생각, 생각’ 이런 명칭을 하면 12연기의 바퀴를 앞으로 굴리지 않고 늙고 병들고 죽음으로 가지 않고 느낌에서 죽음으로 굴러가는 바퀴를 세웁니다. 여기를 딱 세웁니다. 죽음으로 빨려들어가는 소용돌이를 세우는 참신한 선업을 짓게 됩니다. 늙고 병들고 죽음으로 가지 않고 명칭을 쓰면. 웨다나(느낌)에서 멈추니까요.
바른 노력 = 위빳사나의 노력
명칭을 쓰면 일어난 선업은 증장시킵니다. 이 수행을 하고 있다는 것, 위빳사나를 하고 있다는 것은 선업을 짓고 있는 거죠. 앞에서 말한 일어난 불선업은 막고 일어나지 않는 불선업은 누르고, 명칭하는 동안 못 일어나요. 일어나지 않은 선업을 일으키고, 불선업이 들어오는 것을 막는 거니까, 사띠를 하고 있는 동안 생각을 ‘생각’이라고 사띠하고, ‘오른발, 왼발’ 이렇게 하는 동안 계속계속 선업이 많아지고, 선업이 많아진다는 것은 불선업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죠.
그리고 위빳사나 지혜가 생깁니다. 사띠를 한다는 것은 잠재된 선업을 일어난다는 거죠. 아직 일어난 적이 없는 위빳사나 생멸지부터 소멸지 혐오하는 지혜, 이런 지혜 그리고 도의 지혜, 과의 지혜 이런 것들을 계속 그쪽으로 계속 향하고 있는 거죠. 보디빡키야 담마 37가지를 채우고 있는 겁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업들을 계속 일으킨 거지죠.
그리고 또 지혜와 함께 하는 늙어 죽지 않게 해주는 선업들을 계속 일으키고 있습니다. 명칭을 한 번 쓰면 한 번 일으킨 거고, 100번 쓰면 100번 일으킨 거고, 만 번 쓰면 만 번 일으킨 거죠. 1분이 60초이니까, 1초에 한 번씩 명칭을 쓰면 1분이면 60번의 명칭을 쓸 수 있겠네요. 그리고 1시간은 60분이니까 3600번이네요. 명칭을 1시간 동안 3600번 정도 쓸 수 있겠네요.
3600번 써도 마음이 1초에 1조개가 일어난다고 하니까, 3600번 써도 남은 마음들이 엄청 많이 있죠. 그 마음으로 대상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남은 마음으로 지혜도 생깁니다. “명칭을 많이 써서 대상의 특성을 알 수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뭔가 잘 이해를 못하고 있는 거 같습니다. 명칭을 써도 할 일은 다 할 수 있습니다. 지혜도 생기고 대상도 알고.
명칭을 쓰면 잠재된 선업, 위빳사나 지혜가 일어나고, 그리고 도의 지혜, 과의 지혜 쪽으 점점 다가갑니다. 계속 다가갑니다. 명칭 쓰고 있으면, 사띠하고 있으면, 사띠를 하고 있다는 것(명칭이 이어진다는 것)은 삼마와야마, 삼마빠다나가 계속 생기는 것이고, 바른 겨냥이 지속되는 지혜가 계속 커간다는 뜻이고, 쓸 때마다 제대로 이 삼마와야마와 삼마사띠와 삼마사마디, 이 세 가지가 이렇게 딱 아귀가 딱 맞으면, 균형을 딱 이루면, 삼마딧티(빤냐)가 생깁니다. 여기에서.
성냥개비와 성냥곽에 발라놓은 유황이 축축하면 불이 잘 안 붙지만, 적당히 마르고 건조하고 그리고 알맞은 힘으로 성냥을 그으면 불이 켜지듯이, 성냥개비에 불이 붙듯이, 지혜가 생기는 거죠.
이 세 가지가 딱 맞아떨어지면 균형을 이루면 지혜가 생깁니다. 자꾸 노력하다 보면 균형을 잘 이룰 수 있게 됩니다. 어느 정도 해야 되는지 수행자에게 감이 생깁니다. 수행자가 하면 할수록 뭐든지 반복하면 잘 할 수 있는 거니까요.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회향하겠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공덕이 우리를 번뇌의 소멸로 이끌기를.
이러한 우리의 공덕을 모든 존재들에게 회향합니다.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사-두 사-두 사-두
편집: 담마삐야
* 2023-07-18 인터넷
(https://us05web.zoom.us/j/4694074327?pwd=b2pNRUk4VzExbWFMSitFa1Jkc0wyUT09)으로 하신 법문을 필사하였습니다. 필사 후 위뿔라냐니 식카와띠님께 보여드리고 요약, 수정, 추가한 부분이 있습니다.
https://cafe.naver.com/dhammadipakorea/525
일부용어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