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하기 쉬운 성자 비방업
선한 이들 기리는
자신이 어떤 덕목을 갖췄다면 다른 사람에게 있는 그 덕목을 더욱 잘 알 수 있습니다. 승가의 덕목도 마찬가지로 승가의 덕목을 갖춘, 법을 얻은 이들이면 더욱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선한 이들’은 부처님과 벽지불, 제자들을 뜻합니다. 이들 뿐만 아닙니다. 다른 천신이나 사람들도 기리고 칭송합니다. 자신이 비록 도과를 얻지는 못했더라도 얻은 이의 모습을 보고서 유추해서 존경하고 칭송할 수도 있습니다. 나중에 사리뿟따 존자라고 불릴 우빠띳사는 앗사지 존자의 깨끗한 용모와 훌륭한 자세를 보고 ‘이 분에게는 특별한 법이 있을 것이다’라고 알았습니다. 그 뒤에 앗사지 존자의 게송을 듣고 우빠띳사는 깨달음을 얻어 수다원이 됐습니다. 깨달음을 얻어 감관이나 용모가 달라진 우빠띳사의 모습을 보고 나중에 마하목갈라나 존자라고 불릴 꼴리따도 ‘도반 우빠띳사가 불사(不死)의 법(열반)을 경험한 듯하다’라고 유추해서 알 수 있었습니다. 초전법륜을 설하러 가시는 부처님을 도중에 만난 우빠까도 부처님의 깨끗한 감관을 보고서 ‘특별한 분이구나’라고 알았습니다.
과거 스리랑카의 깟사까 동굴에서 지내던 아야밋따 장로를 어떤 청신녀가 친아들처럼 공양 올리며 시봉했습니다. 어느 날, 장로가 탁발을 갔을 때 청신녀가 숲에 가기 전에 딸에게 자신을 위해서는 쌀 부스러기와 나물을 섞어 만든 죽을 소박하게 준비하게 하고 장로를 위해서는 우유와 버터와 당밀로 푸짐하게 준비하게 시켰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장로는 경각심이 생겨나서 ‘아라한이 되지 않고서는 이 공양을 먹을 수 없다’라고 생각하고 다시 동굴로 들어가 수행했습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 사이에 아라한이 된 뒤 다시 탁발을 가서 공양을 받았습니다. 청신녀가 숲에서 돌아왔을 때 딸이 “오늘 오라버니 스님의 감관이 매우 깨끗했어요”라는 등으로 말하자 청신녀는 장로가 아라한이 되어 수행을 마쳤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음, 네 오라버니 스님이 부처님의 교법에서 즐기게 됐구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DA.ii.379)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번뇌가 사라진 이의 마음은 잘 다스려진 상태이기 때문에 몸의 행위나 감관도 특별하고 미묘합니다. 그렇게 깨끗한 감관 자체가 칭송할 만한 덕목입니다. 하지만 가끔은 무심코든, 아니면 그 아라한이 보통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행위를 해서든, 보통 사람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아라한인 장로와 함께 탁발을 나간 한 젊은 비구가 있었습니다. 장로는 속이 좋지 않아 탁발하며 받은 죽이 식기 전에 서둘러 길 옆 나무토막 위에 앉아 공양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젊은 비구가 마음으로 ‘부끄럽지도 않으신가?’라는 등으로 비난했습니다. 정사에 돌아왔을 때 장로가 물었습니다.
“자네는 이 교법에서 의지할 만한 법을 얻었는가?”
“저는 수다원입니다, 스님.”
“그렇다면 그보다 더 위의 도를 위해 노력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걸세.”
“무엇 때문입니까, 스님?”
“그대는 아라한을 비방했다네.”*
그제야 젊은 비구는 스님에게 용서를 구했다고 합니다.(Vis.ii.55., 대림스님, 『청정도론 제3권』, 380쪽, ⅩⅢ. 84.)
*주: 성자에게 마음으로 허물을 범한 것도 성자비방업에 해당된다. 성자비방업은 천상의 장애는 물론이고 도의 장애도 된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제1권, p.104 참조.
또 다른 일화도 있습니다. 아라한 장로와 함께 탁발을 나간 늦깎이 비구가 도중에 물었습니다.
“스님, 성자란 어떠한 분들입니까?”
“성자를 성자라고 알기란 어렵다네. 이 세상에 어떤 늦깎이 비구는 성자의 가사와 발우를 가지고 여러 소임을 행하면서 함께 지내더라도 그분이 성자인 줄 모른다네. 이 정도로 어렵다네.” (MA.i.23)
이렇게 타심통지를 얻었거나, 법담을 통해서 성자인 줄 알 수 있는 가능성은 있어도 보통사람들은 성자 여부를 틀리게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출처: 비구 일창 담마간다 편역, 『보배경 강설』, 불방일, 2020, 116-117쪽, 일부 용어 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