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27 사무찌. 보디빡키야 37 (위뿔라냐니 식카와띠님)
보디빡키야 담마(菩提分法. 도의 지혜와 과의 지혜를 얻는데 필요한 것들)에 37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첫 번째가 사띠빳타나 4가지입니다. 사띠 4가지라고 하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사띠 하나입니다. 도와 과를 얻으려면 제일 먼저 필요한 게 사띠이고, 그리고 노력이 있어야 되죠. 사띠만으로는 안 되고, 사띠는 노력이랑 같이 있어야 사띠가 됩니다. 노력 없이 사띠가 절대 될 수 없습니다. 도와 과를 얻는 노력은, 도와 과뿐만 아니라 세간 선업인 보시하고 봉사하고 계를 지키고 부모님을 모시고 자식을 먹여 살리고, 바른 방법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이것도 다 노력이 들어가죠. 그때도 바른 노력이 들어가는데 위빳사나 할 때 사띠를 하려면 그냥 노력이 아니라 삼마빠다나(四正勤. 네 가지 노력)가 여기에 들어가는 거죠.
그다음에 잇디빠다(如意足), 도과를 얻기 위한 기본 바탕이 있어야 되는데, 내가 도과를 얻고 싶다는 서원(열의. 찬다)이 있어야 하고, 위리야(노력)가 있어야 하고, 마음이 있어야 하고 위망사(검증.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제가 생각을 돌이켜보니 사람들은 도와 과를 얻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대부분의 중생들은 도와 과를 얻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수행처에 와도 도과를 얻기 위해서 수행하지 않습니다. 집에 돌아가서 좀 스트레스 덜 받고 잘 살기 위해서 수행을 하러 오는 거죠. 그래서 찬다가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행하러 안 오는 사람들은 당연히 찬다가 없고, 오는 사람들도 열반을 위해서 온다기보다는 그냥 너무 스트레스 받으니까 사는 게 힘들어서 쉬러 오는 거죠. 수행처는 자신의 뜨거운 선업의지로 급속충전하는 충전소가 아닌 휴식처죠.
“도과를 얻어야 되겠다. 열반을 봐야 되겠다. 윤회에서 벗어나야 되겠다.” 이런 찬다가 없습니다. 그냥 스트레스를 좀 어떻게 해소해야 되겠다는 열망은 있습니다. 그런 찬다로는 위빳사나가 안 되죠. 찬다가 없는 사람한테 제가 위빳사나를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는 할 수가 없습니다. 없는 찬다를 내가 무슨 수로 키워주겠습니까? 사람들이 열반에 대한 찬다가 없이 수행처에 수행하러 온다는 사실을 저는 출가하고 10년 뒤에나 알았습니다. 수행처에 오는 사람들이 열반을 보고 싶은 마음으로 오는 게 아니라, 실은 일상에서 벗어나 그냥 좀 쉬러 오는 거죠. 그냥 세간에 살기 힘들어서 쉬러 오는 거죠. 자기 존재를 열렬히 태워버리려고 오지는 않습니다. 그런 찬다가 애초에 없습니다. 찬다가 없으니까 그에 걸맞은 노력(위리야)도 생기지 않는 거죠.
이 찬다가 없기 때문에 위리야도 안 생기고 위리야가 안 생기니까 위망사는 당연히 없겠죠. 찬다가 없는데 하고 싶은 맘이 없는데 100점 맞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무슨 수로 이 학생이 공부를 열심히 하겠습니까? 타고난 머리가 아주 좋아서 수업시간에 계속 자다가 시험만 보면 100점 받는 사람들도 있긴 있죠. 그런 사람들 봤어요. 그런 사람은 아주 드물지만 위빳사나에서는 그런 게 절대 통하지 않습니다. 세간의 일에서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사람에게는 통하지만. 일단 진정으로 사성제를 알고 싶다는 찬다가 없습니다. 찬다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위리야도 없고 위망사도 없습니다. 위망사(지혜)는 “도와 과를 얻기 위해서 내가 어떻게 해야 되겠다.” 이렇게 작전을 짜는 게 위망사죠. “내가 수행을 하려면 어떻게 작전을 짜야 되겠다, 어떻게 프로그램을 짜야 되겠다. 내가 더 나이 들기 전에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되겠다.” 이게 있어야 되는데 찬다가 없으니까 이게 없는 거죠. 그래서 뒤에 세 가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는 찬다를 가지고 이 방법을 찾다가 운 좋게 발견한 거라서 너무나 귀하게 있을 때 이걸 내 것으로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이 차고 넘쳐서 달려 들었기 때문에 그 간절한 마음까지 주입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릇은 자신이 준비해서 가져와서 받아야지요. 그릇까지 챙겨줄 수는 없으니까요. 찬다가 없는 사람에게 그 거대한 욕심을 몇 번의 법문으로 이 번생에 한 번에 넣어줄 수는 없습니다. 바라밀을 쌓아온 욕심이 거대한 사람에게 방법을 가르쳐 줄 수는 있습니다. 다이아몬드보다 사금파리로 소꿉장난에 정신이 팔린 아이에게 다이아몬드를 캐내야 한다고 말해봤자 피곤합니다. 갈증 나는 사람은 물을 차려주면 마시지만, 갈증을 모르는 사람들은 물을 마시려고 하지 않습니다.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학생에게 하고 싶은 마음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선생님은 아주 훌륭하신 스승이시죠. 저는 그렇게 할 수 없고 공부하고 싶어 하는 학생에게 공부를 잘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줄 수는 있습니다. 100점 받게 해줄 수는 있는데 공부할 마음이 없는 학생을 공부하도록 할 수는 없는 거죠.
도와 과를 얻는데 여의족 네 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위리아가 있어야 하고 원하는 마음이 있으면 위리아가 생기고 검증도 생기고 보살이 붓다가 되고 싶은 마음, 찬다가 강해서 위리야도 생기고 검증도 생겨서 바라밀 10가지를 채워서 붓다가 된 것처럼. 왜 사람들은 지고의 열반이 있는데 얻고 싶은 찬다는 왜 안 생길까요? 말세니까, 점점 안 좋은 쪽으로 가는 세상이니까, 사람들은 생각을 안 하고 살죠. 생각을 안 하고 그냥 계속 머릿속에 정보만 주입만 하고 사는 거죠. 유행 지나면 버릴 쓰레기들만 계속 수집하고 살면서 생각을 안 하니까 ‘지금 이렇게 살아서 될 일이 아니다.’ 이런 생각이 안 드는 거죠. 현재에만 머물라고 하는데 아닙니다. 미래에 대한 숙고과 과거에 대한 회상으로 두려움에서 오는 지혜(상웨가. 경각심)가 필요합니다. ‘나는 늙고 병들 것이다. 죽을 것이다. 다시 어딘가에 태어나서 업을 짓는 것도 두려운 일이고.’ 이런 생각들을 안 하니까 그런 찬다가 안 생기겠죠. 아니면 다 늙어서 생기거나 이미 다 늙어서 힘이 없으면 수행할 수 없습니다. 절대로.
그래서 여의족 네 가지 필요합니다. 하고 싶은 마음 서원이 있어야 하고, 그다음 원하는 마음이 있으면 위리야가 생깁니다. 욕심과 위리야가 붙으면 ‘작전을 이렇게 짜야 되겠다.’ 하는 검증도 생기죠. 하고 싶은 마음이 없으면 하지 않습니다. 학생이 100점 받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어떻게든지 시간을 짜내고 아껴서 공부를 하겠죠. 100점 받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어떻게든지 합니다. 마음이 없으면 시간이 넘쳐도 공부는 안 합니다. 나름대로 다른 일을 하지.
무상한 세상에서 영원한 열반에 대한 찬다가 없는 이유는 생각하지 않고 살았기 때문이죠. 지혜로 생각해 보지 않아서, 아니면 아직 때가 되지 않았거나. 때가 되지 않은 거나, 생각을 하지 않는 거나, 지혜가 없는 거나, 다 같은 말이죠.
그 다음에 필요한 건 인드리야 다섯 가지, 도와 과를 얻기 위해서 다섯 가지가 필요합니다. 삿다 위리야 사띠 사마디 빤냐 다섯 가지가 필요합니다. 이 다섯 가지 조건들이 여기에 팔정도 안에 다 들어가죠. 팔정도 안에 이 모든 것들이 이 5가지 안에 다 들어갑니다.
그다음에 봇장가 7가지(칠각지)가 있습니다. 깨달음의 조건 요소들 7가지 이것도 팔정도 안에 다 들어가고. 어떻게 들어가는지 봅시다.
찬다(서원)은 37가지 중에서 서원이라는 건 딱 한 번 나옵니다. 한 번 나오고, 찟따(마음)가 한 번 있고, 우뻭카(평정심) 한 번 있고, 신심(삿다)은 두 번 나왔습니다. 신심은 인드리야(기능. 오근)와 발라(힘. 오력)에 나왔습니다. 인드리야와 발라 두개가 똑같죠. 그다음에 빳사띠(차분함. 편안함)은 희열이 가라앉은 상태입니다. 봇장가 일곱 가지에 있는 빳사띠는 삐띠가 가라앉으면 빳사띠가 되는 겁니다. 이거 한 번 나옵니다. 그다음에 삼마딧티(바른 견해)는 다섯 번 나옵니다. 팔정도에 정견으로 한 번, 봇장가에 담마위짜야(택법각지)로 한 번, 인드리야와 발라에서 빤냐로 두 번, 여의족에서 한 번, 모두 빤냐(지혜)가 다섯 번 나왔습니다.
보디빡키야 담마에서 37가지(37보리분)라고 하지만 겹치는 것 제외하면 14가지(노력, 사띠, 지혜, 집중, 믿음, 위딱까, 차분함, 희열, 중립, 서원, 마음, 정어, 정업, 정명)인 거죠.
지혜 다섯 번, 삼마상깝빠(바른 겨냥. 정사유) 한 번 나왔습니다. 그다음에 위리야(노력) 제일 많이 나옵니다. 보디빡키야 담마에서 많이 나오고, 제일 중요한 게 노력입니다. 붓다왕사에서 “가죽만 남아도 좋다. 신경만 남아도 좋고 뼈만 남아도 좋다. 피와 살이 다 말라도 좋다.” 이렇게 하는 노력, 삼마빠다나(정근), 이 바른 노력이 삼마빠다나에서 4번, 여의족에서 1번, 인드리야와 발라에서 2번 봇장가에서 1번 팔정도에서 1번 총 9번인 거죠. 삼마빠다나에서는 4개로 칩니다. 사띠빳타나 4가지를 제외하고는 모두 다 들어가 있습니다.
위리야 바라밀은 이렇게 말하죠.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 바라밀인데 위리야 바라밀은 불선업 짓는 것을 열심히 해도 바라밀이 된다고 했습니다. 진짜인지 아닌지 모르겠는데 근데 전 그렇게 들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열심히 하면 위리야 바라밀이 됩니다. 이왕이면 선업을 열심히 하면 좋겠죠. 불선업을 열심히 하면 안 좋은 결과가 나한테 많이 오지 않습니까? 좋은 일을 열심히 해놓으면 좋은 결과가 나한테 많이 오겠죠. 열심히 하는 것, 무슨 일을 하든지 열심히 하십시오. 그러면 그게 위리야 바라밀이 됩니다. 이왕이면 좋은 일을 열심히 하면 좋은 결과가 나한테 많이 올 테니까 하여튼 열심히 하십시오. 열심히 아주 열심히 무슨 일을 하시든지 열심히 하십시오. 열심히 해놓으면 좋은 결과가 많이 옵니다. 그게 바라밀이 됩니다. 세간의 일을 열심히 한 사람이 위빳사나 수행할 때도 열심히 합니다. 하던 습(習)이 있거든요. 하던 습성이 있어서 수행할 때 게으르게 하지 못합니다. 열심히 하던 사람은 시간을 대충 쓰는 거를 참지 못합니다. 살 때 열심히 살면 위빳사나 할 때도 열심히 합니다. 시간을 대충 쓰는 게 습관이 된 사람은 위빳사나를 하면서도 계속 자고 있는데 자기가 자고 있는지 모릅니다. 자고 있는지 모르는 게 제일 문제죠. 자고 있는 줄 알면 안 자려고 어떻게 해볼 텐데, 자면서도 자는 줄 몰라서 계속 자는 거죠.
위라띠(피함. 정어 정업 정명 3가지임), 불선업을 피하는 거죠. 위라띠가 피한다는 뜻인데 불선업을 피하는 겁니다. 불선업을 지을 수 있는 장소를 피하십시오. 불선업을 지을 수 있는 장소를 피해서 살아야 하는데, 좋은 장소가 어디인 것 같습니까? 싸우면 안 되죠. 부처님께서 싸우지 말라고 했으니까 피해야 되는 거죠. 그렇다고 아닌 것을 보고 그냥 넘어갈 수도 없고. 하여튼 피해야 합니다. 살생을 피하고, 혼침을 피하고, 사람을 피하고, 거짓말을 피하고, 술과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약물을 먹는 것을 피하는 것, 위라띠(계학)는 팔정도에 한 번 나왔습니다.
그다음에 제일 중요한 사띠는 여덟 번 나왔습니다. 사띠빳타나에서 4번, 그리고 인드리야와 발라에서 2번, 봇장가 1번 팔정도에서 1번 모두 8번 나오죠. 여의족에는 사띠가 들어가지 않습니다. 여기는 도와 과를 얻기 위한 전초 단계인 거죠. 아직 전쟁터에 나가지 않은 겁니다. 전쟁터에 나가기 전에 전쟁을 치르고 싶다는 마음이 있는 상태죠. 전장에 들어가면 6개(사띠, 위리야, 인드리야, 발라, 봇장가, 팔정도)가 필요하겠죠. 6개를 사띠로 하는 거죠. 삼마빠다나 네 가지죠. 위리야라고 하지만 사띠와 함께 하는 위리야인 거죠. 사띠가 들어가면 사띠 하나만 해도 위리야 삼마빠다나 4가지가 다 이루어집니다. 여러분이 ‘오른발, 왼발, 생각, 생각’ 이렇게만 해도 4가지 삼마빠다나(위리야)가 다 채워지는 겁니다. 일석사조(一石四鳥), 4가지 위리야, 그것도 제일 좋은 위리야를 다 채울 수 있는데. 세간에서 1등하고 이런 게 아니라, 돈을 잘 벌고 이런 게 아니라, 제일 좋은 위리야를 채울 수 있는데 하지 않는 이유는 찬다가 부족해서이지. 그래서 하지 않고 다른 선업을 짓는 거죠. 다른 선업을 짓는 게 뿌듯한 거죠.
선업에 세 가지가 있지 않습니까? 보시 지계 수행 이렇게 얘기하죠. 보시 지계 수행 이렇게 얘기하면 보시가 제일 쉽다. 보통 이렇게 얘기하죠. 하긴 그렇습니다. 보시는 시켜서 할 수도 있고, 가불해서 할 수도 있고, 남이 대신해줄 수도 있지만, 지계는 내가 해야 되는 거죠. 계는 내가 지켜야 합니다. 봉사도 내가 해야 합니다. 내가 직접 가서 해야 하는 거죠. 내 몸으로 한 게 나의 선업이 되는 거니까, 내 몸이 들어가야지 되는 선업 이게 지계죠.
수행은 뭡니까? 수행은 몸도 들어가야 하고, 마음도 온전히 들어가야 합니다. 봉사나 지계는 몸과 말로만으로도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안 들어가도 할 수 있죠. 그냥 그 자리에만 가 있으면 봉사한 것으로 쳐주지 않습니까? 봉사 몇 시간 이렇게 채우고, 계를 지키는 것도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는데 계는 지킬 수 있죠. 수행은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거죠. 수행은 앉아 있기는 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해서는 지혜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앉아서 시간만 보내지 위빳사나 지혜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수행을 한다는 것은 몸도 들어가야 되고 마음이 온전히 다 들어가야 됩니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마음을 갈고 닦는 거죠. 다른 일들, 보시는 재물을 쓰는 것이고 봉사나 지계나 이런 것들은 몸의 행위 말이 들어가는 것이죠. 말은 교언영색(巧言令色)도 할 수 있습니다. 수행은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수행은 마음을 다루는 연습을 하는 겁니다. 보통 보시와 지계와 봉사를 하고 그마저도 지루하면 더 치열한 수행이 하고 싶어집니다. 이거 아무리 해도 재미가 없다. 이거 말고 더 좋은 거를 해보고 싶다. 이거보다 더 재밌는 게 있지 않을까? 더 가슴 벅찬 게 있지 않을까? 그래서 찾는 게 수행인 거죠. 수행이라는 밀도 높은 즐거움을 찾고 싶어합니다. 그전에는 보시와 지계와 봉사와 이런 선업으로도 만족합니다. 그 선업을 해도 해도 배가 부르지 않고 채워지지 않으면 그다음에 다른 걸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이런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어린애는 자기 똥오줌을 가지고 놀고, 나이가 들면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좀 더 나이가 들면 오욕락을 가지고 놀고, 좀 더 지혜가 성숙하면 위빳사나(팔정도)를 가지고 논다고. 팔정도에서 재미를 느낍니다. 성숙하지 않아서 찬다도 안 생기고, 팔정도에서 재미도 못 느끼고. 아직은 때가 안 된 거죠. 그래서 제대로 된 팔정도를 닦는 사람들이 없는 거죠.
오늘 여기까지 하고 마치겠습니다. 회향하겠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공덕이 우리를 번뇌의 소멸로 이끌기를.
이러한 우리의 공덕을 모든 존재들에게 회향합니다.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사-두 사-두 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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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용어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