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822 깜맛타나 산냐와 웨다나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 모든 번뇌 소멸하신 분, 스스로 완전히 깨달으신 부처님께 예경 올립니다.
문단번호 24번 할 차례이지만, 그 전에 목요일의 법문에 대해서 보충 설명하겠습니다.
문단 번호 19번 보시면
Bhāvanābhedo(바와나 나눔) 19. ②Bhāvanāsu ①pana ③sabbatthāpi ④parikammabhāvanā ②바와나 중에서 ①이어서 ③모든 깜맛타나에서 ④빠리깜마바와나를 ⑤labbhateva, ⑥buddhānussatiādīsu ⑦aṭṭhasu ⑤얻는다. ⑥붓다눗사띠부터 시작하는 ⑦8가지가 되는 ⑧saññāvavatthānesu ⑨cāti ⑧음식에대한 혐오와, 4가지 성분의 와왓타나들도 ⑨이렇게 ⑩dasasu ⑪kammaṭṭhānesu ⑫upacārabhāvanāva ⑬ sampajjati, ⑩10가지가 되는 ⑪깜맛타나에서 ⑫우빠짜라바와나만 ⑬완성된다. ⑮ natthi ⑭appanā. ⑭압빠나바와나는 ⑮생기지 않는다. |
아눗사띠 8가지와 음식에 대한 혐오와 몸을 4대로 보는 것 합쳐서 10가지는, 근접삼매까지만 얻을 수 있고 본삼매(선정)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선정의 근처까지만 갈 수 있습니다. 아눗사띠는 상기하는 겁니다. 상기는 계속해서 생각하는 겁니다. 문장을 떠올린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의식은 문장이 없을 때가 없습니다. 항상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에 웨다나가 항시 붙어옵니다. 생각하면 그 생각과 함께 느낌도 같이 오죠. 뭔가 좋은 생각을 하면 좋은 느낌이 같이 따라오고, 안 좋은 생각을 하면 안 좋은 느낌, 도마낫사 둑카 느낌들이 더불어 옵니다.
욕계 중생들에게 생각과 느낌은 같이 붙어 있습니다. 12연기에서 보자면 이 자리에(7. 웨다나) 생각(산냐)과 느낌(웨다나)입니다. 이 7의 자리에 오온에서 말하는 산냐(상온)와 웨다나(수온) 두 개가 같이 있습니다. 같이 있죠? 보십시오. 좋은 생각하면 기분 좋고, 안 좋은 생각하면 기분 나쁩니다. 그래서 산냐와 웨다나는 함께 다닙니다. 12연기에서 이 자리를 산냐라고 하지 않고 웨다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욕계중생들에게 산냐와 웨다나는 붙어다니니까요.
하지만 웨다나만 남아 있을 때도 있습니다. 언제냐 하면 선정을 닦았을 때, 색계 선정, 무색계 선정에 들었을 때 거기 웨다나만 주로 있습니다. 생각도 있지만 생각은 지속적이지 않고 띄엄띄엄 있습니다. 선정에 든 상태에서는 우리들처럼 분명한 생각들이 계속 있지 않습니다.
선정의 요소는 위딱까 위짜라 삐띠 수카 에깍가따입니다. 앞에서부터 하나씩 떨어뜨려서 위딱까가 떨어지고, 그다음에 위짜라 떨어지고, 그래도 남아 있는 게 삐띠 수카 엑깍가따입니다. 에깍가따는 집중이니까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고, 삐띠나 수카나 우뻭카는 모두 웨다나죠. 느낌입니다. 선정에 든 요기들에게는 느낌이 힘이 강합니다. 느낌에 주력하는 거죠. 그러니까 선정에 들었을 때, 높은 단계의 선정일수록 산냐보다 강한 웨다나만 주로 남게 되는 거죠. 그래서 여기에(7번) 산냐라고 하지 않고 웨다나라고 하는 게 맞죠. 왜냐하면 웨다나라고 하면 욕계 중생들은 웨다나가 있으면 산냐가 있는 것이고, 산냐가 있으면 웨다나가 있는데, 색계 무색계 범천들에게는 산냐는 거의 없고 웨다나가 있을 테니까, 산냐보다 웨다나가 적절한 단어이죠. 그래서 아눗사띠는 산냐(생각,기억)를 이야기합니다. 아눗사띠는 산냐니까. 그리고 선정에 들면 산냐는 흐릿해지고 웨다나는 강해집니다. 주로 웨다나만 선명하게 남는 게 선정이죠. 번뇌는 희미해지고 느낌, 선정의 느낌(세간 선정)은 뚜렷해집니다.
아눗사띠 같은 경우는 산냐를 계속 떠올리는 거죠. 좋은 산냐이기 때문에 좋은 상기죠. 붓다 담마 상가 지계 보시 이런 좋은 기억이기 때문에 좋은 생각이기 때문에 웨다나도 좋은 웨다나가 생기겠죠. 이 상태가 근접삼매입니다. 아눗사띠 8가지로 드는 근접삼매입니다. 여기에서는 근접삼매까지만 생기는 거죠. 산냐가 강하니까 본삼매에 들 수는 없습니다. 본삼매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반복적인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본삼매에 들어갈 수가 없는 거죠. 기분은 적당히 좋습니다.
과의 선정은 열반을 보는 것이고, 과의 선정이 아닌 다른 선정들은 웨다나를 강하게 하는 거죠. 오선정이 되면 우뻭카(평정심) 에깍가따(집중)가 되는 거죠. 평정심과 집중만 남는 거죠. 그때도 우뻭카가 강하죠. 우뻭카라는 웨다나가 강합니다. 이 얘기를 지난 시간수업 중에 빠뜨렸습니다.
문단번호 24번
24. ①Upekkhā ② pañcamajjhānikāti ⑥chabbīsat ③i ①우뻭카브라흐마위하라는 ②5선정과 함께한다 ⑥26가지이다 ③iti- 이렇게 ④rūpāvacarajjhānikāni ⑤kammaṭṭhānāni. ④색계선정과 함께하는 ⑤깜맛타나들은 |
우뻭카 브라흐마흐마위하라는 오선정과 함께 하고, 색계 선정과 함께 하는 까맛타나들은 26가지이다.
브라흐마 위하라가 네 가지가 있었는데, 그중에서 멧따 까루나 무디따, 세 가지는 사선정까지만 얻을 수 있죠. 우뻭카 브라흐마 위하라는 오선정까지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색계 선정과 함께하는 깜맛타나들은 26가지다. 색계 선정 26가지가 뭐냐 하면, 까시나 10개, 지수화풍 4가지, 색깔 네 가지(갈색 황금색 붉은색 흰색) 그리고 허공과 빛 까시나, 모두 10가지 까시나입니다. 그리고 아수바(시체 관찰. 不淨觀) 10개, 그리고 까야 가따사띠(몸의 부분 32가지 관찰) 1가지, 들숨날숨 관찰 1가지, 브라흐마위하라 4가지, 다 합치면 26개입니다. 이 26가지는 색계 선정과 함께하는 명상주제입니다. 26가지는 색계 선정과 함께 한다. 즉, 무색계 선정에 들어갈 수는 없다는 얘기입니다. 26개는 색계 선정과만 함께하고 무색계 선정 4가지와는 함께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문단 번호 25번
25. ②Cattāro ①pana ③āruppā ④āruppajjhānikāti. ②4가지가 되는 ①그리고 ③무색계 깜맛타나들은 ④무색계 선정과 함께 한다. |
“네 가지가 되는 무색계 까맛타나는 무색계 선정과 함께한다.”
무색계 선정 4가지 주제 있죠? 첫 번째 무색계 선정은 허공이었습니다.
12번 문단번호 6번과 문단번호 12번에 보시면
6. ①Kathaṃ? ② Pathavīkasiṇaṃ ③ āpokasiṇaṃ … … … ①어떻게 나뉘는가? ②흙 까시나도, ③물 까시나도 … … … ⑦pītakasiṇaṃ ⑧lohitakasiṇaṃ ⑨ odātakasiṇaṃ ⑩ākāsakasiṇaṃ ⑦황금색 까시나도 ⑧붉은 까시나도 ⑨흰색 까시나도 ⑩허공 까시나도 ⑪āloka kasiṇañ ceti imāni ⑫dasa ⑬ kasiṇāni nāma. ⑪빛 까시나도 iti imani-이것들이 ⑫10가지가 되는 ⑬까시나들이다. |
12. ①Ākāsānañcāyatanādayo ②cattāro ③āruppā nāmā ①아까사난짜 야따나 등의 선정들이 ②4가지가 되는 ③무색계이다. |
문단번호 6번의 끝의 앞에 아까사(허공) 까시나가 나오고, 문단번호 12번에 보시면 아까사난짜(끝없는 허공) 야따나(공무변처)부터 시작하는 네 가지 (무색계) 선정 마음이 나옵니다.
아까사난짜 야따나. 空無邊處. 무색계 초선 (대상:끝없는 허공, 관념) 윈냐냔짜 야따나. 識無邊處. 무색계 2선 (대상:무색계 초선을 아는 마음. 실재) 아낀냐 야따나. 無所有處. 무색계 3선 (대상: 무색계 2선의 대상을 없애 버린 아무것도 없는 관념) 네와산냐나산냐 야따나. 非想非非想處. 무색계 4선 (대상:무색계 3선을 아는 마음. 실재) |
무색계 초선과 무색계 3선의 대상은 관념이구요. 무색계 2선과 무색계 4선은 그 관념을 아는 마음을 대상으로 합니다. 대상이 다릅니다. 아까사가 두 번 나옵니다. 두 번 나오는데 문단 번호 24번에서 보셨듯이 ‘까시나 10가지는 색계 선정까지만 얻을 수 있다.’ 이렇게 되어 있고, 문단번호 25번에서 무색계 선정 4가지의 대상에 아까사(허공)가 들어갔습니다. 아까사가 두 번 나왔습니다. 허공대상은 색계선정, 무색계 선정 둘 다 가능하다고 봅니다.
이리하여 바와나로 나눔이 다 끝났습니다.
질문: 열반을 대상으로 보는 초선의 도의 마음과 과의 마음에는 36가지 마음부수가 있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7가지 공통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느낌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리뿟따 존자가 열반에는 느낌이 없다고 한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대답 : 마음의 장에서 마음을 89개로 나누었고, 출세간 마음으로 도 4개, 과 4개가 됩니다. 도와 과를 얻을 때 세간 선정을 닦아서 수다원이 되거나, 사다함이 된다면 각자가 얻은 선정의 요소들을 가지고 도와 과를 얻는다. 그러므로 4×5=20, 도 20개와 과 20개가 된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89개가 아니라 121개가 된다는 거죠. 왜냐하면 도 4개와 과 4개이던 것이 도 20개와 과 20개가 되니까 32개가 증가되어 89개가 121개가 된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러면 초선의 요소가 위딱까 위짜라 삐띠 수카 에깍가따라고 좀 전에 제가 법문한 것과 연관됩니다. 제가 법문한 거랑 지금 이 질문이랑 일맥상통하기 때문에 이어서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좀 전에 선정을 얻는다는 게 웨다나가 강해지는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산냐가 없는 게 아니라 있긴 있습니다. 있지만 희미해집니다. 근데 무색계 선정 같은 경우는 네와산냐나산냐(비상비비상처)라는 말에서부터 ‘산냐가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니고’라는 뜻 아닙니까? 산냐가 아주 흐릿해집니다. 선정이 올라갈수록 초선에서는 위딱까 위짜라 삐띠 수카 에깍가따가 있지만, 선정의 단계가 점점 올라갈수록 웨다나만 강해집니다. 여기 삼선정은 삐띠 수카 에까가따, 사선정은 수카 에깍가따, 오선정은 우뻭카 에깍가따, 이렇게 되는 거죠. 다른 선정의 요소들은 떨어지고 웨다나만 분명해지지 않습니까? 웨다나 강해지죠. 제가 저번에 의심했지 않습니까? 이거(초세간 마음40) 아닌 것 같다고. 만약에 이 논리대로라면, 강한 우뻭카가 지속되는 상카루뻭카 상태에 있다가, 웨다나가 없는 열반이라는 대상을 볼 때, 삐띠 수카 에깍가따, 수카 에깍가다가 불현듯 강해야 되는 거죠. 이 웨다나가 강해야 되지 않습니까? 삐띠, 수카 웨다나가 갑자기 강해져야 되죠.
근데 사리뿟따 존자가 열반에 느낌이 없다고 분명히 얘기했죠. 우다이가 열반에는 좋다는 느낌이 없는데, 어떻게 열반을 좋은 거라고 얘기하냐고? 여쭈었더니 ‘그 느낌이 없기 때문에 열반이 좋은 거’라고 대답하셨죠. ‘그런 느낌(무상한 것)이 없어서 좋은 것이다.’
그 열반이라는 것을 볼 때 도는 딱 한 번 보는 거니까 순간 찰나이고, 과는 계속 열반을 보고 있는 상태죠. 열반을 계속 보고 있습니다. 열반이라는 대상, 느낌이 없는 대상을 보고, 만약에 열반에 느낌(웨다나)이 있으면 무상하죠. 물질과 정신이 다 무상하지 않습니까? 웨다나라는 무상한 대상을 보고 있는 게 되는 거죠. 그러면 열반이 아닌 거죠. 열반은 무상하지 않아서 열반이니까. 만약에 초선으로, 초선정(初禪定)으로 본다면, 도와 과를 얻을 때의 느낌이 강해야 하는 거죠. 느낌이 없는 열반을 보는데? 느낌이 없는 게 열반이니까 웨다나가 두드러진 선정의 요소들을 가지고 열반을 볼 수 없는 거죠. 삽바삿다사다라나 쩨따시까 (모든 마음에 들어가는 마음 부수: 팟사, 웨다나, 산냐, 쩨다나, 엑가까따, 지위띤드리야) 는 모든 마음에 들어가므로 열반을 볼 때도 웨다나가 있습니다. 하지만 열반을 보는 그 순간 웨다나가 매우 약합니다.
이렇게 출세간 마음을 40가지로 나누어서 보는 것은 주석서 사야도들의 견해입니다. ‘이런 견해도 있다.’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꼭 이게 붓다의 말씀은 아니라는 거죠. ‘이렇게 볼 수도 있겠구나.’ 라는 견해입니다. 출세간 마음을 40가지로 보는 것은 하나의 견해입니다.
열반이라는 대상은 느낌이 없으니까, 열반이라는 느낌이 없는 대상을 볼 때, 이런 강한 웨다나가 들어가지 않겠죠. 과의 선정에 들어있을 때는 오래 보니 누적된 느낌이 있습니다. 느낌이 있으니까 좋은 줄 알겠죠. 열반 자체는 느낌이 없는 거죠. 열반을 보고 난 뒤에 반조의 지혜 단계에서는 느낌이 있겠죠. 여기서는 숙고하는 거니까요. 열반 그 자체는 느낌이 없지만 열반을 보고 난 뒤에 느낌이 있겠죠.
열반을 또 보고 또다시 좋아하고 이런 상태들이 있습니다. 그 느낌이 있는 거죠. 열반 자체는 느낌이 없는 거죠. 그러니까 열반을 딱 보는 도와 과의 순간에는 느낌이 없겠죠. 느낌이 굳이 있다면 우뻭카가 있겠죠. 우뻭카가 계속 유지되다가 도와 과를 보는 거니까 열반 그 자체를 볼 때는 그걸 볼 때는 강한 느낌이 들어갈 수가 없는 거죠.
열반이 무상한 웨다나가 없어서 열반이고, 무상한 산냐가 없어서 열반인 거죠. 무상하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죠. 무상하다는 것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거지 않습니까? 열반은 그렇지 않다는 거죠. 무상하지 않은 것 변치 않는 것, 그러니까 변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배제된 거죠. 변할 수 있는, 마음 마음부수 물질이 배제된, 무언가들이 빠진 ?가 열반인 거죠.
그 열반은 웨다나가 없으니까 그걸 보는 그 순간의 아는 마음도 대단하고, 보고 난 뒤에는 있겠죠. 좋은 것을 보고 나서, 우리가 영화 보고 나와서 뒤에 여운이 남는 것처럼, 어딘가 갔다 와서, 뒤에 그것을 떠올릴 수 있는 것처럼. 그렇죠. 그걸 반조의 지혜라고 하죠. 내가 본 그 순간에는 없습니다. 찰라 스쳐 보고 난 뒤 떠올릴 수 있죠.
잠시 봤지만 뒤에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이 있듯이, 열반이라는 가장 좋은 것도 볼 때는, 그게 아무것도 아니니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게, 우리가 알 수 있는 뭔가가 아닌 거죠. 관념도 아니고, 그렇다고 물질도 정신도 느낌도 아니고, 그러니까 뭔지 모르고 보다가, 보고 나서 그게 지나가고 나서 그것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거죠. 그게 반조의 지혜입니다. 보고 나서 지나고 난 뒤에 되돌아보고 그것에 대해서 숙고하는 것, 그거였구나, 좋구나. 이렇게 돌아보는 숙고가 반조의 지혜입니다.
열반을 보는 딱 그 순간에는 진공이겠죠. 아무것도 없으니까 진공도 아니고 하여튼 뭐가 뭔지 모르겠죠. 어떻게 설명을 할 수가 없는 거겠죠. 말로 설명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 열반은 산냐가 아니니까. 웨다나도 아니고 느낌도 설명을 잘 못하는데 느낌을 설명할 때 말로 설명하지 않습니까? 말로 설명을 하긴 하지만, 느낌은 느낌이고 말은 말이죠. 말이라는 관념에 넣어서 느낌(빠라맛타-실재)을 설명하는데, 느낌과 산냐(말)은 다른 거죠. 우리는 느낌을 말(산냐)로 얘기하죠. 그런데 열반은 느낌(웨다나)도 아니고, 산냐도 아니고, 물질도 아니니까, 계속 열반에 대한 환상적인 설명(말)들이 난무하겠죠. 그것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겠죠. 열반은 본 사람만이 알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알 수가 없습니다. 열반을 보기 전에 이정표가 있는데 그게 ‘도와 과’라는 겁니다.
도과를 봤으면 열반을 봤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도과와 열반은 다른 것이지만 도과를 얻었으면 열반을 본 겁니다. 확실히 본 겁니다. 도과를 봤으면.
첨부1
오늘 여기까지 하고 마치겠습니다. 회향하겠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공덕이 우리를 번뇌의 소멸로 이끌기를.
이러한 우리의 공덕을 모든 존재들에게 회향합니다.
사-두 사-두 사-두
일부용어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