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목하게 사는 법(사라니야 담마) *
마하시 사야도 법문
우 틴 팟 영역/향원 옮김
*주: 이 법문은 마야따빈 와드(Mayantabin Ward)에서 1953년(미얀마 달력으로 1314년) 미얀마력 1월(Tagu) 12일과 13일에 마하시 사야도께서 “화목하게 사는 법”과 “위대한 반조의 지혜”에 대해서 설법하신 것인데, 이는 맛지마 니까야의 “처음 50경들의 묶음(Mūla- paṇṇāsa)” 중의 꼬삼비 경(M48)에 있다. 화목하게 사는 법은 앙굿따라 니까야(기억해야 함 경. Sāranīya Sutta. A6:12), 디가니까야의 합송경(合誦經. Saṅgīti Sutta. D33), 맛지마 니까야의 사마가마 경(M104. Sāmagama Sutta)에도 있다. ‘사라니야(Sāranīya)’는 ‘기억하게 함’이라는 뜻이다. 사라니야 담마를 실천하는 사람은 항상 남에게 기억될 것이며, 이는 비구와 재가불자 모두에게 이로운 것이다.
1. 들어가는 말
부처님께서는 화목하게 사는 법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화목하게 사는 법을 실천하는 사람을 동료들이 오랫동안 기억하게 하는 법 여섯 가지가 있다. 이는 같이 사는 사람들의 마음에 자애를 생기게 하고, 서로 아끼고 존경하고 화목하게 한다. 그리하여 모든 논쟁을 불식시키고, 공동체를 일치단결하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화목하게 사는 법을 잘 실천하는 사람은, 동료나 친구나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라고 기억될 것입니다.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자애가 생기게 하므로, 그들도 그를 좋아하게 되고 나아가서는 존경하게 됩니다. 모든 사람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존경받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남들로부터 존경받지 못한다면, 이는 그 자신 때문이지만 기분 나쁜 일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은, 존경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존경받도록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존경받도록 하는 것은 온전히 자기 자신의 몫입니다. 자신이 존경받을 만한 행동을 하지 않는 데 존경할 사람이 이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
논쟁하지 않는 것이 만장일치의 기반입니다. 화목하게 사는 법은 의견이 맞지 않는 경향을 모두 불식시킵니다. 그리하여 전체를 하나로 통합시키는 데 도움이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가 된다면 불화의 요인이 될 만한 행동들은 모두 멈출 것입니다.
한 가족은 대개 적어도 두 명, 많으면 서너 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한 가족의 구성원들은 반드시 화목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 방법이 화목하게 사는 법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화목하게 살면 이러한 가족들로 구성된 마을 전체가 사이좋게 살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도시 전체, 나라 전체, 세계 전체가 사이좋고 평화롭게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화목하게 사는 법의 장점은 어느 특정한 인간사회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국적이나 종교와 무관하게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는 보편적인 것입니다.
2. 화목하게 사는 법의 여섯 가지 요소
일치단결하여 화목하게 사는 법 여섯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자애에는 자애로운 몸의 행위, 자애로운 말의 행위, 자애로운 마음 모두 세 가지가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화목하게 사는 법의 앞의 세 가지 구성요소입니다. 다른 세 가지는 나눔(베풂. 버림, cāga. 짜가), 지계와 지혜입니다. 화목하게 사는 법의 이 여섯 가지 특성은 인류에게 화합이라는 축복을 줍니다.
모든 행동은 선(善)하거나 불선(不善)한 의도가 포함된 업입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자신이 마음이나 말이나 행동으로 잘못한 것을 용서해 달라고 애원합니다. 우리의 죄를 사면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할 때 그것만 빌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행한 선하고 도덕적인 행위에 대한 공덕에 대해서도 보상해 달라고 빌어야 합니다. 탐욕과 성냄이 없이, 마음과 말과 행동으로 한 의도적 행위들은 자애를 생기게 할 뿐 아니라, 아무런 죄가 없는 업입니다. 그것들은 공덕을 받을 만한 것들입니다. 이웃 사람들의 행복을 기원하고, 그들에게 행복이 담긴 말을 하고, 그들이 행복하게 하도록 행동해서 그 공덕을 받으십시오.
중생들은 고통받기를 원하지 않고 행복을 바랍니다. 여러분이 그들이 잘 살고 행복하기를 기원한다면, 그 바람은 성취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여러분이 시원한 나무 그늘로 그들을 데리고 갔다고 느낄 것입니다. 그러니 무엇을 하든지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하여 자애로 하고, 무슨 말을 하든지 자애로 하고, 무슨 생각을 하든지 자애와 더불어 하십시오. 인류에게 자애의 정신이 퍼져 있을 때, 자애의 세 가지 업은 달성될 것입니다. 그것들이 바로 화목하게 사는 법의 세 가지 요소입니다.
이 세 가지 외에,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나눔, 지계와 지혜도 있습니다. 경전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나는 나눔(짜가)이라는 용어를 썼습니다. 경전은 단순히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을 계를 지키는 동료들과 나누어 써야 한다고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지계가 나눔을 포함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나눔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지계와 지혜를 더하면, 앞의 세 가지 업과 합하여 모두 여섯이 됩니다. 마지막 두 가지는 위빳사나 수행과 관련된 것인데, 성자들이 실천하는 계인 ‘성자의 계’(ariyāsīla)와 성자들에게 있는 지혜인 ‘성자의 지혜’(ariyāpaññā)입니다.
이 두 가지 중에서 위빳사나의 근본적인 법인 성자의 지혜는, 범부에게는 너무 미묘하므로 길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다섯 가지는 화목하게 사는 법 실천의 기본이기 때문에 상세히 설명하겠습니다.
2.1 자애로운 몸의 행위
자애로운 몸의 행위에 대하여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훈계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동료 비구들과 함께 살거나 서로 떨어져 살거나, 그들의 행복을 기원하는, 너희들의 자애 정신이 나타나도록 행동하여라.”
여기서 동료 비구들이라고 한 것은 이 법문이 처음에 비구들을 대상으로 설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재가불자들이 실천해도 이익이 있습니다. 함께 지내는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한다면, 그것은 자애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아내나 아들이나 딸이나 부모나 친척이나 제자나 친구 등의 아주 가까운 사람들에게 자애를 실천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의 일가친척 간에조차 불평과 불협화음이 생기게 하는 원인이 되는 성냄을 반드시 피하도록 하십시오. 모든 조직에서 일을 할 때, 불화의 씨앗이 되는 것은 바로 악의(惡意)입니다.
자애를 실천할 때, 자신에게 가까운 사람이거나 멀리 떨어져 사는 단지 알기만 하는 사람이던지, 남들이 잘 되기를 기원하는 사람은, 모든 행동을 선한 의도가 드러나도록 해야 합니다. 남에게 봉사하는 정신으로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무거운 짐을 운반하는 사람을 보면 도와줘야 합니다. 아픈 사람을 보면 건강을 회복하도록 보살펴 줘야 합니다. 잠자고 있는 사람 곁을 걸을 때는, 그가 깨지 않도록 살금살금 걸어야 합니다. 이런 작은 것들이 멀리까지 영향을 미쳐서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합니다.
멀리 떨어져 안 보이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자애를 베푸는지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소지품을 남겨놓고 떠날 수도 있고, 하던 일들을 끝내지 않고 가버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 경우에 여러분은 자신이 마치 그들의 재산 관리자인 것처럼 그것을 보살펴야 합니다. 끝내지 않은 일들도 완성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자애를 실제로 적용해서 그들을 돕는다면, 여러분은 항상 기억될 것입니다.
남을 돕는 사람은 사랑받고 존경받을 것입니다. 자애가 있는 곳에 말다툼하고 논쟁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와 같이 살거나 떨어져 살거나, 그들은 그와 하나임을 느낄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도 그들과 하나가 됩니다. 이런 식으로 서로 아는 사람들 간에 화합하게 됩니다. 그들은 자애와 연민으로 결속되어 하나가 될 것입니다. 자애는 일반적으로 연민을 가져오기 때문에, 나는 일부러 연민을 자애에 포함시켰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좋은 명성과 평판이 잊히기를 원할까요? 아닐 것입니다. 그들은 사랑받고 존경받기를 좋아할까요? 물론입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말다툼해서 반목하고 분열되기를 원할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과 사귀기를 좋아하고 조화롭게 함께 사는 것을 좋아합니다.
반목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은, 일치단결하게 하는 자애를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집에서 아내에게 화를 내면서 말해서는 안 되고, 나아가서는 찌푸려도 안 됩니다. 그의 미소는 아내를 기쁘게 하고, 언제나 남편을 사랑하고 존경하게 할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이 성실하고 관대하다고 생각하곤 할 것입니다. 사랑이 사랑을 불러오면 가정 전체가 행복합니다. 집에서 가족들 각자가 서로에게 자애를 실천한다면 그 가정은 화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2 자애로운 말의 행위
자애를 염두에 두고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비구들이여, 동료 비구들과 함께 살거나 서로 떨어져 살거나, 그들과 대화할 때는 자애로운 말로 하여라.”
자애로운 말은, 상대방이 있거나 없거나 간에, 그가 잘 살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의도가 담긴 말을 의미합니다. 할 말이 있다면, 그 말을 듣는 사람이 잘 살고 행복하기를 바라면서, 듣기 좋고 부드러운 단어를 사용해서 말해야 합니다. 자기 동료들을 나무라는 말을 할 때도 화가 난 상태에서 말해서는 안 됩니다. 화가 수그러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꼭 해야만 하는 말을, 상대방이 받아들일 수 있게 말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발견했다면, 부드러운 말로 그가 자신의 잘못을 알아차리게 하면, 그는 자신의 방법으로 자발적으로 천천히 수정할 것입니다.
때로는 동료의 잘못을 비난하는 것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비난받는 사람을 옹호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친구를 비난하는 말이, 비난하는 사람이 모르는 사이에 그 친구를 헐뜯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도 그를 옹호하는 말을 해 주어야 합니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에는 남이 잘 되는 것을 바라는 척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남을 해롭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진실한 친구는 항상 자기 동료들에게 이로운 말을 합니다. 그는 보통 자신들을 위해서 말하거나 행동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도와주러 갑니다. 불화가 있으면 그는 의견 차이를 조정합니다. 그는 동료들이 쓸데없는 일에 몰두하는 것을 예방합니다.
남이 잘 되기를 바라는 모든 말들은, 귀에 듣기 좋고 부드러워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말로 자애를 실천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영원히 기억될 것이며, 그들은 자애에서 우러나오는 그의 선한 말을 칭찬할 것입니다.
2.3 자애로운 마음
동료들의 마음속에 자애가 우러나오게 하는 생각에 대해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비구들이여, 동료 비구들과 함께 살거나 떨어져 살거나, 동료 비구들을 생각할 때는, 그들의 행복을 기원하는, 너희들의 자애 정신이 나타나도록 하여라.”
동료 비구들에게 자애를 기원할 때 우리들은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모두 위험에서 벗어나기를! 모두 마음의 고통(악의)에서 벗어나기를! 모두 몸의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모두 자기 자신의 마음과 몸을 잘 돌볼 수 있기를!”*
이것이 자애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감정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낼 때는 반드시 충심에서 우러나와야 합니다. “모두 행복하기를!”이라고 말하면서 다른 사람이 아프기를 바란다면 자애관(마음으로 자애를 실천함)이 아닙니다. 자애관은 마음에 잘 확립되어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거나 행동할 때는 언제나 그들의 행복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좋은 사람이라고 기억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사랑한다면, 불화가 생기지 않고 일치단결할 것입니다.
나는 모두 기억하도록 하려고 다음 격언을 만들었습니다.
“자애에서 우러나오는 행동과 말과 마음으로 행한 인간의 모든 행동은 평생 동안 기억될 것이다.
자애와 연민과 존경이 가득한 인간사회는 영원히 화합될 것이다.”
자애를 마음과 말과 행동에 실제로 적용하는 이 세 가지 업은, 사람들이 화합하고 잘 살도록 하는 데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실천하기에 어려운 것이 아니니, 모든 가정은 일상생활 속에서 자애를 실천해야 하며, 그런 다음에 학교나 절, 마을이나 도시로 확대해야 합니다. 그러면 세계가 화합하고 행복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굳게 결심하고 자애를 실천하기를 촉구합니다. 지금부터는 나머지 세 가지 화목하게 사는 법을 설명하겠습니다.
2.4 나눔
나눔(짜가)에 대해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또 다른 화목하게 사는 법이 있다. 비구들은 음식 등의 필수품을 얻는다. 예를 들어 발우에 받은 것은 바른 생계를 통해서 얻은 정당한 소득이다. 비구는 자신이 정당하게 얻은 것을 승가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 아낌없이 사용해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짜가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예언하거나 약을 팔아서 돈이나 재산을 획득하는 것은 잘못된 생활입니다. 비구가 그런 수단으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재산을 모아서 자신이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재산을 계율을 엄격히 지키는 다른 비구들이 받아서도 안 됩니다. 계율을 지키면서 얻은 모든 필수품은, 그것들을 받은 비구와 그가 나누어 주는 동료 비구 모두에게 사용할 자격이 있습니다. 비구가 재가불자로부터 공양물들을 받을 때, 그는 그것들을 승가 전체의 공동 재산이며,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자기 소유이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나누어 주어도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짜가를 실천하는 비구는 일반적으로 계율에 따라서, 예를 들어서 탁발한다든지, 법문을 한다든지, 마음의 번뇌를 제거하기 위하여 13가지 두타행을* 하는 등의 자신 임무를 수행하고 재가불자들로부터 음식을 공양받아서, 계를 지키는 비구들에게 먼저 나누어 줍니다. 그다음에 그것을 병든 비구들이나 다른 절에서 방문한 비구들이나 새로 수계해서 아직 비구 생활에 아직 적응되지 않은 비구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그렇게 나누어 준 다음에도 음식이 남았으면, 나머지 비구들에게 선임 순으로 나누어 줍니다. 그러나 만약 모자라면, 다시 탁발해서 같은 방식으로 나누어 줍니다. 이렇게 나누어 준 다음에 남으면 자기가 먹습니다. 빠알리어 경전에 명시된 바와 같이, 이는 계를 지키는 비구들에게 적용되는 것이지, 지키지 않는 비구들에게도 음식을 반드시 나누어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 두타행(頭陀行) 13가지는 다음과 같다.
① 분소의(糞掃衣)를 입는 수행: 버린 천만으로 옷을 만들어 입는 수행
② 삼의(三衣)만 수용하는 수행: 여벌의 옷을 갖지 않고 하의, 상의, 대가사만 갖는 수행
③ 탁발 음식만을 수용하는 수행: 탁발을 통해 얻은 음식만 먹는 수행
④ 차례대로 탁발하는 수행: 집을 가리지 않고 차례대로 탁발하는 수행
⑤ 한 자리에서만 먹는 수행: 한 번 앉은 자리에서 식사를 끝내는 수행
⑥ 발우 하나의 탁발 음식만 먹는 수행: 여러 그릇을 사용하지 않고 한 발우에만 담아 먹는 수행
⑦ 나중에 얻은 밥을 먹지 않는 수행: 추가로 받은 음식을 먹지 않는 수행
⑧ 숲에 머무는 수행: 마을의 숙소에 살지 않는 수행
⑨ 나무 아래 머무는 수행: 지붕 아래 머물지 않고 나무 아래에만 머무는 수행
⑩ 노천에 머무는 수행: 나무 아래에도 들어가지 않고 노천에서 지내는 수행
⑪ 공동묘지에 머무는 수행: 공동묘지에서만 지내는 수행
⑫ 배정된 대로 머무는 수행: 자기에게 배정된 숙소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머무는 수행
⑬ 눕지 않는 수행: 어떤 경우에도 눕지 않는 수행(長坐不臥).
대림 스님 옮김, 『청정도론 Ⅰ』, 초기불전연구원, 220쪽 참조.
비구들 가운데에는 이 화목하게 사는 법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실천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석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나눠 준 다음에만 자신이 먹을 수 있다는 이 화목하게 사는 법은, 아주 경험이 많고 이를 받아들이는 비구들이 많이 있는 사원이 아닌 한, 실천되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 화목하게 사는 법이 충족되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보통 12년입니다. 그러나 어떤 비구가 12년간의 서약 기간이 하루 남은 마지막 날, 보시자가 그 비구를 위해서 남겨놓은 음식을 어느 괴팍한 비구가 먹어버렸기 때문에, 12년간을 채우지 못했다고 기록에 남아 있는 예가 있습니다. 그와 같이 짜가를 준수하려고 서원을 세운 비구는 12년간 위반하지 말고 지켜야만 합니다. 그 기간에는 무슨 이유에서든 짜가에 대해서 미흡함을 느끼는 경우가 단 한 가지라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엄격히 그 서약을 지킬 수 있다면 이익이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탁발을 나가면 가장 좋은 것을 받을 것입니다. 주석서들은 짜가의 과보에 대한 많은 예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옛날, 어떤 비구가 기근임에도 불구하고 짜가를 엄격하게 실천했습니다. 천신들이 그에게 음식을 주었기 때문에, 그의 발우는 항상 가득했습니다. 아무리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도 음식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너무 어렵기 때문에, 나 자신도 지금 내가 설명한 대로 짜가를 실천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범부가 할 수 있는 것을 말하겠습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눔으로써 자기 자신의 공동체에서 나눔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집이나 사원이나 학교에서 그렇게 한다면, 여러분이 함께 사는 사람들 간에 사랑과 존경이 생기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나누어 주는 데 익숙한 사람은, 비록 멀리 떨어져 살게 될지라도, 동료들에 의해서 기억될 것입니다.
나눔의 정신이 널리 퍼져 있는 사회는 말다툼하고 논쟁할 이유가 없게 될 것이며, 서로 화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행복이 실현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종교적이거나 사회적인 목적만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돈과 물건을 보시하는 인정 많고 자애심 많은 사람과 만날 것입니다. 친절은 사람들이 고마워하고, 보시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계속 도울 생각을 하면서 삽니다. 주는 자와 받는 자 사이에 사랑과 존경이 널리 퍼질 때, 불화가 사라져서 화목하게 될 것입니다. 화목한 곳에 행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격언을 기억하십시오.
“나눔은 인류에게 사랑과 존경을 생기게 하고
사람들의 기억에 영원히 남게 하므로,
세계 전체를 화목하게 하는 초석이다.”
2.5 성자처럼 계를 지키기
성자처럼 계를 지키는 데 대해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계라는 또 하나의 화목하게 사는 법이 있다. 단 하나의 계도 위반하지 않고 완벽하게 지켜야 한다. 지계는 끝이 찢어지지 않은 옷감과 같아야 한다. 가운데에 구멍이 뚫린 옷감과 같아서는 안 된다. 계율이라는 옷이 얼룩덜룩하다든지 여기저기 때가 묻어 있어서도 안 된다. 계를 지킴에 있어 나 혼자만이 청정하다는 생각으로 이기적이어서는 안 된다. 찰나 삼매나 근접 삼매나 깊은 삼매가 있다면 모두 계를 지키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이렇게 계를 지키면 동료 비구들과 함께 살거나 서로 떨어져 살거나, 계를 지킴에 있어 동료들과 같다.”
‘끝이 찢어진 옷감’ 등은 무슨 뜻일까요? 재가불자는 오계만 지키면 됩니다. 예를 들어서, 첫 번째 계인 살생 금지를 위반해서는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마지막 계인 취하게 하는 것들을 마시지 말라는 것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비구들도 첫 번째이건 마지막 계율이건 위반하지 말고 지켜야 합니다. 무슨 이유에서나 첫 번째나 마지막 계율을 위반했다면, 이는 끝이 찢어진 옷감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만약 중간 계율을 어겼다면, 계라는 옷이 마치 총알 맞은 것처럼 구멍이 뚫린 것입니다. 두세 가지 계율을 어겼다면 계라는 옷이 얼룩덜룩해진 것입니다. 계를 여기서 하나, 저기서 또 하나를 어겼다면, 옷에 때가 묻은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모든 계를 청정하고, 결점이 없고, 흐트러지지 않게 지켜야 합니다.
재가불자이건 비구이건 성자들의 지계는 완벽하게 청정합니다. 이 청정성은 다른 사람이 있거나 없거나 간에 유지됩니다. 신경을 써서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됩니다. 이 지계의 청정성이 성자들의 진면목입니다. 이는 동료들이 있느냐 없느냐에 영향받지 않습니다.
자신을 그러한 성자들의 반열에 올려놓으려면 수다원 단계를 성취해야 합니다. 수다원의 계는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항상 청정합니다. 수다원이 비구인 경우는, 고의로 계를 위반했더라도 사면받을 것입니다. 동료 비구들과 함께 있거나 혼자 있거나 간에, 그의 계는 그들과 같은 종류이며 같은 특성을 가진 것입니다.
성자와 같은 수준으로 계를 지키는 이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기억될 뿐 아니라 사랑받고 존경받을 것입니다. 서로 싫어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는 그들과 하나가 될 것이며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행복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성자들의 계의 청정성과 마찬가지로, 계를 완벽하게 지키는 사람은, 동료들과 함께 있거나 혼자 있거나, 좋게 기억되고 사랑받고 존경받을 것이다. 공동체가 이러한 분위기에서, 친해지고, 화합하고, 화목하고, 일치단결하게 될 것이다.”
이 화목하게 사는 법은 꼬삼비 경에 나와 있는데, 이는 계를 서로 다르게 해석하는 꼬삼비 비구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을 때 부처님께서 법문하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이 서로 파벌을 만들지 말고 화목하게 함께 살아야 할 필요성을 깨닫기를 바라셨습니다. 재가불자에게는 적용하기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이 성자의 계를 지켜야만 일치단결할 수 있습니다. 오계를 지키는 것도 성자들에 의해서 승인된 계를 지키는 것입니다. 성심성의껏 오계를 잘 지킨다면, 사람들이 사랑하고 존경하고 일치단결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이 법문에서 ‘동료들과 함께 있거나 혼자 있거나’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이 말의 목적은 죄는 숨길 곳이 아무 데도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죄를 저지를 때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쁜 짓을 하는 것을 천신들이 볼 수 있습니다. 아무도 볼 수 없다고 하더라도, 여러분 자신이 지금 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는 행위가 임종할 때 여러분의 마음에 떠오를 것입니다. 악행을 숨길 곳이 없다는 이야기가 실라위맘사나 자따까(Sīlavīmamsana Jātaka)에 나옵니다.
① 실라위맘사나 이야기
사리뿟따는 전생에 500명의 제자를 거느린 스승이었는데, 아름답고 지성적인 딸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딸을 계를 잘 지키는 사람에게 시집보내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제자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에게는 아름답고 현명하고 교양 있는 딸이 있다. 너희들 중에서 내 딸의 결혼식에 사용될 보석을 아무도 모르게 가져오는 사람과 딸을 결혼시키겠다.”
제자들은 각양각색의 보석들을 가지고 와서 스승의 주변에 늘어놓았습니다. 그러나 내세에 부처가 될 운명인 제자 한 명은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스승은 그에게 왜 훔치지 않았냐고 물었습니다. 제자가 대답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아무도 모르게 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훔치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모른다고 하더라도 훔치는 저는, 자기 자신이 훔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무도 모르거나 아무도 안 볼 때 죄를 지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훔친 것을 가져올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미래의 부처인 제자가 계를 잘 지키는 사람임을 알고 딸과 결혼시켰습니다.
② 악은 숨을 곳이 없다
여러분이 몰래 나쁜 짓을 할 때,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고 하더라도, 자신은 자기가 그 짓을 하는 것을 압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자신의 마음은 속으로 “내가 했다! 내가 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임종할 때 여러분이 행한 악행이 양심을 쿡쿡 찌릅니다. 행한 악행에 대한 집착을 가지고 죽게 되면 틀림없이 악처로 떨어집니다. 업과 그 과보를 믿는다면, 마음과 말과 행동으로 악행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계를 위반하지 않고 엄격히 지킨다면, 함께 사는 사람들의 신임을 얻을 것입니다. 언제나 사랑받고 존경받으면서 그들의 마음속에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화목하게 단합하도록 하는 방법입니다.
2.6 성자의 지혜
성자의 지혜가 생기도록 하는 방법에 대해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지혜라는 또 하나의 화목하게 사는 법이 있다. 그것은 악에서 해방시키는 과업을 완수할 수 있으므로 고귀하다. 지혜가 있고 그 지혜가 일러주는 대로 바르게 행동하는 이는 모든 고통에서 해방될 것이다. 동료 비구들과 함께 살면서 이런 지혜가 확립된 비구는, 그들과 함께 살거나 서로 떨어져 살거나, 지혜에 있어서 다른 이들과 동등하게 될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에는 네 가지 도와 네 가지 과에 대한 고귀하고 출세간적 지혜가 있는데, 이것들의 본질은 같은 것입니다. 도는 원인을 나타내고 과는 결과를 나타내는 것만이 다를 뿐입니다. 네 가지 성자의 도는 마음의 번뇌를 제거하고 윤회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그것들을 뭉뚱그려서 해탈로 통하는 견해(출리의 견해. niyyānika diṭṭhi.)라고 하는 데, 왜냐하면 고통으로부터 해탈시키기 때문입니다.
이 지혜가 생긴 사람은 모든 종류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을 근절시키는데 잘못된 방법과 바른 방법 두 가지가 있습니다. 잘못된 길을 가면 고통에서 일시적으로만 벗어납니다. 바른 길을 택하면 고통을 영원히 제거할 수 있습니다.
① 잘못된 방법
다리를 오랫동안 구부리고 있으면 뻐근해질 것입니다. 그럴 때 다리를 뻗으면 편해집니다. 그러나 얼마 후에 다시 뻐근해질 것이고, 이번에는 또다시 편해지려고 구부릴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앉아 있으면 뻐근해질 것이고, 일어서면 편안해질 것입니다. 이 모든 육체적 활동을 할 때 자세를 바꿈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고통에서 벗어납니다. 더울 때 부채질하거나 샤워하면, 일시적으로 고통이 경감되지만 다시 더위를 느끼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불편함과 싸우면 고통은 일시적으로만 제거됩니다.
배고픔을 생각해 보십시오. 음식을 먹으면 배고픔이 가라앉지만, 얼마 후에 다시 배가 고파집니다. 그래서 하루에 두세 번 식사해야 합니다. 때로는 이것으로 모자라서 여러분은 하루에 서너 번 식사합니다. 사람이거나 동물이거나 모든 중생은, 배고프면 먹을 것을 찾아서 돌아다니지만, 배고픔은 결코 충족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평생 먹이를 찾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배고픔을 가장 심각한 만성병이라고 하셨습니다.
병에 걸렸을 때 처방된 약을 먹으면 병이 낫습니다. 그러나 배고픔이라는 병은 예외입니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의 젖을 먹었지만, 아직도 여러분의 배고픔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매일 자기 자신을 먹이지만, 때가 되면 또 배고픕니다. 이번 생 내내 배고픔으로 고통받습니다. 다음 생에서도 그럴 것입니다. 그러므로 배고픔을 충족시킨다고 해서 고통이 영원히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과거에 나쁜 행위를 많이 하여 불선한 과보를 받았다면, 이번 생에서 좋지 않게 태어나서 고생을 많이 할 것입니다. 가난에 시달려 굶주릴 수도 있으며, 온갖 병을 앓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참회하면서 미래의 이익을 위하여 선행을 하면, 이번 생에서 여러분이 당하는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것입니다. 이 인간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면 고귀하게 탄생할 것입니다. 아니면 천상에서 천신으로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선행의 힘이 영원히 계속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소진되면, 고통의 바다에서 불쌍한 사람으로 재탄생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를 지키는 선행을 해서 인간이나 천신으로서의 행복을 성취하는 것은 일시적이지 영원하지 않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얻은 평화와 행복은 진정한 평화와 행복이 아닙니다.
사마타 수행을 해서 초선, 이선, 삼선, 사선에 차례로 들어가고, 계를 지키는 삶을 산다면, 색계나 무색계에서 재탄생할 것입니다. 그러면 수많은 겁 동안 선정의 황홀경 속에서 머물 것입니다. 비상비비상천에서 태어난다면 84,000겁 동안 황홀경에 묻혀 지낼 것입니다. 그러나 업의 힘이 소진되면,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서 삶을 즐기거나 고통받을 것입니다. 인간의 삶을 살면서 악행을 한다면, 불선업과 비도덕적 행위가 여러분을 사악처로 끌어내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시와 지계가 범천계에 태어나게 할 수 있지만, 그런 좋은 곳에 태어나는 것이 영원한 평화와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닙니다.
② 고통의 진정한 소멸
그렇다면 불만족 즉 고통의 진정한 소멸은 어떤 것일까요? 사성제의 길을 걸어가서 열반을 봐야만 고통이 사사집니다. 가장 낮은 단계인 수다원을 성취하면 고통으로 가득한 사악처에는 결코 떨어지지 않습니다. 낮은 단계를 성취한 수다원이라도 사람이나 천신으로 최대 일곱 번 재탄생할 것이며, 마지막 생에서 아라한이 되어 열반에 들어갈 것입니다. 사다함은 두 번 더 태어나는데, 우선 사람으로 태어난 다음에 천신으로 태어나서, 그 사이에 열반에 들어갈 것입니다. 아나함은 이 세상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는 색계나 무색계에 태어난 다음에, 거기서 아라한이 되어 열반으로 들어갑니다.
그런 경우를 ‘반열반에 들어간다.’라고 하는데, 그 단계에 들어간 다음에는 정신과 물질이 다시는 생기지 않으며, 그것들과 연관된 모든 불만족이 함께 사라집니다. 늙고 병들고 죽게 되어 있는 정신과 물질이 없게 됩니다. 늙음과 병듦과 죽음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의 원인이 없습니다. 몸이나 마음과 관련된 모든 불만족이 제거됩니다. 아무것도 생기지 않으므로 완전한 평화와 고요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에 의하면, 성자의 도의 지혜는 모든 불만족 즉 고통이 소멸된 단계로 인도합니다. 그러나 도의 지혜는 실제로 도를 실천하는 사람들만 해방시킨다는 것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③ 아는 것을 실천하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해탈
여행할 때 수송 수단은 여러분을 원하는 목적지로 데리고 가지만 기다리기만 하는 사람은 내버려 둡니다. 거룩한 도에 대한 지식은 수송 수단과 같습니다. 그것을 타면 목적지에 가겠지만, 기다리고만 있다면 뒤에 남겨질 것입니다. 모든 고통에서 해방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 수송 수단을 사용해야 합니다. 즉 얻은 지식을 실제적인 목적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이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는 시대에 태어난 여러분의 가장 중요한 과업은, 모든 고통이 사라진 열반을 얻기 위하여 법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사악처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기본 단계인 수다원의 지위를 얻도록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태어난 이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는 시대에서 값어치 있는 일은, 고통에서의 해방을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는 것입니다.
인간이나 천신이나 범천이 가진 속세에서의 즐거움은 본질적인 끝이 아닙니다. 이는 보시하고, 계를 지키고, 수행해야 얻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교단 안에 있거나 밖에 있거나 간에, 이 세 가지 덕행을 실천하면 이익을 얻습니다. 그것들은 불교신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실천하면 되는 덕행들입니다.
만약 언젠가는 사악처에 떨어질 운명이라면, 여러분이 부처님 제자라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보시와 지계와 수행을 넘어서는 단계에 도달하여, 사악처로 떨어지는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지혜를 얻도록 노력하기를 강력히 촉구합니다.
값비싼 보석은 보통사람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내가 말하는 지혜와 관련된 법은 진정한 보석이어서 보통 인물들은 쉽게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최상의 공덕을 쌓아서 얻어진 성품인 바라밀(波羅蜜)이 있는 사람만을 위한 것입니다. 아직 그러한 성품을 갖추지 못했다면, 바라밀을 계속 쌓아서 그것을 갖추도록 하십시오. 그 방법을 지금부터 알려 드리겠습니다.
④ 성자의 지혜를 얻는 법
여기서 ‘성자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 즉시 성자의 도를 실천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으로부터 시작해서는 안 됩니다. 성자의 도의 전제조건인 ‘전단계의 도’가 있습니다. 이것은 위빳사나 단계에서부터 실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 육문에서 정신과 물질의 일어남을 주시하는 것입니다. 매순간 그런 일어남을 관찰하고 주시하십시오. 어떤 대상을 볼 때 자신이 ‘보고 있음’을 주시하십시오. 대상을 듣거나, 냄새 맡거나, 맛보거나, 닿거나, 생각할 때, 그러한 들음, 냄새맡음, 맛봄, 닿음, 생각함의 현상들을 주시하십시오.
초보자는 모든 경우마다 모든 현상을 주시하고 관찰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분명한 것부터 주시하기 시작하십시오. 걸을 때는 바람의 요소인 풍대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다음에 걷고 있음을 주시해야 합니다. 염처경에 “가고 있을(行) 때, 가고 있음을 알라. 서 있을(住) 때, 서 있음을 알라. 앉아 있을(坐) 때, 앉아 있음을 알라. 누워 있을(臥) 때, 누워 있음을 알라.”고 되어 있습니다. 풍대가 작용하는 것인, 가고 있음, 서 있음, 앉음, 누움 등을 주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대부분의 수행자는 좌선에서부터 위빳사나 수행을 시작합니다. 앉아 있을 때 앉아 있는 자신의 몸 전체를 주시해야 합니다. 그러나 앉아 있으면서 숨도 쉬고 있으므로,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 그에 맞춰서 배의 부풂과 꺼짐도 주시해야 합니다.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건 간에, 자기가 취하고 있는 자세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을 하려고 앉아 있을 때 배의 부풂과 꺼짐을 주시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염처경은 그러한 몸의 움직임을 주시해도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수행자가 단지 배의 부풂과 꺼짐만을 주시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들을 주시하는 동안 그의 마음에 다른 것이 나타날 것입니다. 예를 들면, 몸에 뻐근함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덥거나 통증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이런 느낌들을 주시해도 됩니다. 뻐근함을 해소하기 위하여 팔을 뻗거나 구부릴 때는, 뻗음이나 구부림을 주시하십시오. 그는 기꺼이 자신의 모든 정신적 육체적 행위를 주시하고, 몸과 마음에 특별한 것이 생기지 않을 때는 배의 부풂과 꺼짐만을 주시하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주시해 감에 따라,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게 되고, 그 관계를 알게 되고, 그것들의 생김과 사라짐이라는 원인과 결과를 알게 됩니다. 감각대상과 아는 마음을 주시함에 따라 그것들은 나타났다가 사라집니다. 즉 그것들의 활동이 생기고 사라집니다. 그러면 생김과 사라짐은 무상을 나타낸다는 생각이 수행자에게 떠오릅니다. 무상한 것은 불만족 즉 고통입니다. 현상들은 단지 그 특성에 따라서 일어납니다.
수행해서 숙달되면, 모든 현상이 생길 때마다 주시할 수 있게 되어, 결국은 무상과 고통만이 아니라 무아도 깨닫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그는 성자의 도의 지혜를 얻고 열반을 봅니다. 이 단계에서 그가 깨달은 삼법인(三法印. 무상 고 무아)은, 주시할 때나 주시한 것을 반조할 때, 그의 마음에 영원히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성자들은 모두 이 도의 지혜를 체득했습니다. 이를 획득한 수행자는 자신을 성자와 동일시해도 됩니다. 그들과 함께 살고 있거나 떨어져 살거나, 삼법인에 대한 그의 확신은 확고합니다.
이에 대한 부처님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성자의 도의 지혜를 얻었을 때, 성자들과 함께 살고 있거나 떨어져 살거나 간에, 그는 성자들과 같은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수행자는 사람들에게 영원히 기억될 것이며, 또한 사랑받고 존경받을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그는 자기 주변을 화목하고 단합하게 만들 것입니다.
육사외도의 한 명인 니간타 나따뿟따의 신봉자들 사이에서 파벌이 생겼을 때, 부처님께서 이 화목하게 하는 법을 맛지마 니까야의 “마지막 50개 경들의 묶음(Uparipaṇṇāsa)” 중의 사마가마 경(Sāmagāma Sutta. M104)으로 가르치셨습니다. 니간타 신도들이 견해 차이로 분열된 것과 마찬가지로, 불교 승가에 불화가 생길 가능성을 처음으로 우려한 것은 아난다였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 논쟁의 원인을 말씀하신 다음에, 화목하게 사는 법 여섯 가지를 가르치셨는데, 그것들의 본질은 승가를 화목하고 단합하게 하는 특성들입니다.
여섯 가지 중의 마지막 것은 성자의 지혜를 강조한 것입니다. 함께 사는 비구들이 정신과 물질이 일어남과 사라짐을 아는 지혜에 대해서 의견이 일치한다면, 그리고 무상, 고, 무아의 법칙을 굳게 확신하다면, 지혜에 대한 논쟁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논쟁이 생긴다면, 이는 두 파벌 중의 하나는 성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나타난 것이며, 더욱 나쁜 경우는 두 파벌 모두 성자가 아닌 경우입니다.
정신과 물질과 삼법인에 대한 지혜는 언제나 변함없는 것이며, 진정한 성자들은 이것들에 대해서 한 마음입니다.
⑤ 수람밧타 이야기
부처님 시절에 이교도인 수람밧타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가 법문을 들으면 법의 빛을 볼 것임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그의 집으로 탁발하러 가셨습니다. 이교도들은 부처님을 숭배하지 않지만, 부처님은 워낙 위대한 인물이기 때문에, 그는 부처님께 음식 공양을 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공양의 덕행에 대해서 축복해 주기 위하여 부처님께서는 보시자에게 법문을 하셨고, 그는 법의 빛을 보고 수다원이 되었습니다.
이때 마라는 생각했습니다. “이 수람밧타는 우리 편이었는데, 오늘 부처님이 그의 집을 방문했다. 이 사람이 개종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는 부처님으로 변장하고 수람밧타에게 갔습니다. 간계에 능한 마라는, 자기가 생각하기에 지능이 떨어진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잔꾀를 부립니다. 보통 그는 여자에게 술수를 씁니다.
예를 들면, 어떤 비구니가 절에 혼자 있을 때 다가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를 해탈시키는 열반은 존재하지 않는다. 혼자 있으면서 무슨 이익을 봤느냐? 위대한 비구들조차 법을 깨닫지 못한다. 너의 모자라는 지혜로 네가 어떻게 빛을 보겠느냐?” 이런 식으로 그는 여성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비구니는 아라한이었기에 유혹할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잠시 여담을 하기로 합니다. 요즈음 자신의 틀린 견해로 다른 사람의 사기를 떨어뜨리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띠 확립은 성자만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범부가 할 수행이 아니라고 주장하곤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수다원 단계는 수행으로 실현될 수 없다. 법문을 들어서 알면 충분하다. 단지 가르침을 듣기만 하면 수다원이 된다.”
나아가서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단순히 자신이 가고, 서고, 앉고, 구부리고, 뻗고, 팽창하고, 수축하는 등을 주시하는 것만으로는 법을 깨달을 수 없다.” 그런 사람들은 마라의 군대에 속합니다. 아니면 그들은 무명과 사견과 자만이라는 번뇌의 탈을 쓴 마라에 홀려 있는 것입니다.
가장 나쁜 것은, 열반이란 마음이 푹 쉬고 있을 때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법을 실천하는 사람은 열반으로부터 더욱 멀어지므로, 법을 실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사악한 마라가 바라는 것에 영합하는 것입니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마라는 수람밧타를 속이려고 부처님으로 위장하고 그에게 갔습니다. 부처님께서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다시 오셨기에 그는 당황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위장한 자에게 왜 돌아왔는지 물었습니다. 마라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조금 전에 한 말을 정정하기 위해서 왔다. 나는 존재의 오온(五蘊)이 무상하고 불만족스럽고 실체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실, 어떤 오온은 영원하고 변함없고 일정하고 영속한다.”
그러자 수람밧타는 혼자 생각했습니다. ‘왜 이 말은 이다지도 무책임할까! 충분히 숙고하지 않고 그럴 듯한 말을 늘어놓는 것은 부처님들의 본성이 아니다. 마라는 부처님을 적대시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그가 단도직입적으로 너는 마라가 아니냐고 묻자, 마라는 자신이 마라라고 고백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악을 쫓아버렸습니다.
“백 명 아니 천 명의 마라가 와서 고따마 부처님에 대한 나의 믿음을 흔들어 보라고 해라. 어림도 없다. 부처님께서 모든 정신과 물질과 형성은 변하게 되어 있고, 그러므로 무상하다고 말씀하셨다. 이 법의 진리를 깨달았기에 나는 너와 다르다. 당장 꺼져라!”
이런 식으로 무상, 고, 무아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표현했습니다. 성자의 도에 대한 지혜가 약한 사람이었다면, 부처님께서 앞서 하신 말씀을 수정한다고 했을 때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요즈음에는 많은 사람이 외국에서 돌아옵니다. 그들 중 일부는 불교 포교를 위하여 외국에 간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이탈자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자의 도의 지혜에 대한 신념이 확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지혜를 깨닫지 않으면, 삼법인을 확실하게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현재 생에서는 아닐지라도, 다음 생에서는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공덕을 쌓은 미얀마 사람이 다음 생에 외국에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는 그 나라의 부모와 친척들의 사상에 의해 조건 지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 경우에, 전생에 갖고 있던 도의 지혜의 공덕처럼, 그가 법을 체험하는 것이 강력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자가 얻은 것과 같은 지혜를 얻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정신과 물질을 생기는 순간마다 주시할 때, 삼법인이 자명해질 때, 우리는 열반으로 가는 길인 성자의 도의 지혜 단계에 도달합니다. 이 지혜를 깨달을 때, 성자의 계를 지키게 되고, 마음과 말과 행동으로 자애를 실천하게 됩니다. 이것이 화목하게 사는 법 중에서 성자의 도의 지혜, 줄여서 성자의 지혜를 가장 고귀하게 여기는 이유입니다.
동료들에 의해서 항상 기억되도록 여러분 모두 화목하게 사는 법을 준수하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기를 기원합니다. 여러분 모두 조화롭게 살아서 일치단결하기를 기원합니다. 여러분 모두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행복하기를 기원합니다. 여러분 모두 도의 지혜와 과의 지혜를 얻어서 가장 짧은 시간 내에 열반을 체험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