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반조의 지혜
마하시 사야도 법문
우틴팟 영역/향원 옮김
오늘 법문의 주제는 맛지마 니까야의 꼬삼비 경(M48)에 있는 “위대한 반조의 지혜(Mahāpaccavekkhanā ñāṇa)입니다. 이는 내가 어제 이야기한 화목하게 사는 법의 마지막 요소인 성자의 도의 지혜(ariyāmagga paññā)를 상세히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주제를 설명하기 위하여 부처님의 질문을 먼저 소개하기로 합니다.
“비구들이여, 수다원의 단계로 인도하는 성자의 도의 지혜가 있다. 이 지혜는 실천하는 자를 어떻게 고통(dukkha)의 완전한 소멸로 이끄는가?”
위대한 반조의 지혜는, 고통으로부터 해탈시키는 성자의 지혜가 자기 자신에게 있는지 없는지를 파악하기 위하여, 일곱 가지 항목으로 자신을 평가하는 방법입니다.
1. 내 안에서 장애들이 다 제거되었는가?
“비구들이여, 내 교단에서 비구 혹은 재가불자가, 숲으로 가거나, 나무 밑에 앉거나, 혼자서 집중할 수 있는 곳으로 가서, 자기 자신을 이렇게 평가한다. ‘내 마음에 번뇌들이 있다면, 마음과 몸에서 생기고 사라지는 현상의 본성을 느낄 수 없고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나에게 번뇌들이 아직 남아 있는지 자신을 평가해야 한다.’라고 하면서 자기 자신을 스스로 평가한다.”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번뇌들에 지배되고 있으므로, 범부는 마음과 물질이 생기고 사라지는 현상, 즉 정신적 물질적 현상을 주시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무 밑이나 사원 내에서 홀로 수행하고 있는 수다원은, 마음을 오염시키는 걱정과 불안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됐기에, 모든 조건 지어진 것들이 생기고 사라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범부의 마음을 현혹시키는 번뇌들이란 무엇일까요? 그것들은 감각욕망, 악의 등입니다. 수행하면서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이나, 배의 부름과 꺼짐을 주시하고 있을 때, 초보 수행자의 마음속에 탐욕, 분노 등이 생길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드러난 번뇌들(pariyuṭṭhāna-kilesā)”입니다. 수다원은 그것들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1.1 여러 가지 번뇌
“비구들이여, 비구가 감각욕망에 압도되어 있다면 드러난 번뇌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수행하는 도중에 비구가 배의 부름과 꺼짐이나, 앉아 있음이나, 대상에 닿고 있음을 주시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가 집착하게 되는 감각대상에 대한 즐거움을 생각하고 있다면, 번뇌로부터 고통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즉시 이 집착을 주시해서 제거해야 합니다. 실패한다면, 그는 단지 사라지기 위해 생기는 정신과 물질의 본성인 실재를 알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마음속에서 분노나 악의가 일어난다면 드러난 번뇌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비구가 배의 부름과 꺼짐을 주시하고 있을 때, 그의 마음속에 분노가 생기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는 자신이 드러난 번뇌 때문에 고통당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분노가 일어날 때 주시해서 제거하십시오. 그렇게 할 수 없으면, 정신과 물질이 생기고 사라지는 현상의 본성을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비구들이여, 비구에게 마음을 괴롭히는 의심이 있다면 드러난 번뇌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비구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정신적 물질적 현상을 주시하고 있는 도중에, 이렇게 주시하기를 계속하면 진정으로 위빳사나 지혜가 생기게 될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의심에 사로잡힐 수가 있습니다. 그는 이제 드러난 번뇌의 먹이가 된 것입니다. 자신에게 의심이 어떻게 생겼는지 주시해서 제거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그는 정신적 물질적 현상의 본성을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은 범부에 대한 것입니다. 수다원은 없애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의심이 저절로 해결됩니다. 그러므로 의심을 없애려고 애써서 주시하고 제거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범부의 해탈에 걸림돌이 되는 장애(nīvaraṇa)들을 모두 나열하여 설명하기 위해서 예를 드는 것입니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이번 생과 다음 생에 대한 사유에 탐닉하면 드러난 번뇌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누가 이 우주를 창조했는가? 누가 인류를 창조했는가? 생명은 아무 이유 없이 존재 속으로 들어오는가? 자아란 있는가, 없는가?’ 그런 것들과 이번 생에 대해서 사유하면, 그는 사견을 만들고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런 관념들은 일반적으로 범부들을 괴롭힙니다.
‘이번 생을 마친 다음에 나는 어디에서 탄생할까? 그때 나는 무엇으로 태어날까? 내가 앞으로 계속 존재한다면, 다음 생에서는 어떻게 될까?’ 범부는 이런 식으로 생각합니다. 수다원에게는 의심과 사견을 생기게 하는 그런 사유가 결코 생기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마을이나 도시나 나라에서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더 나아가서 천신이나 지옥 같은 악처의 삶에 대해서 추측하는 것은, 범부에게 흔히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는 들뜬 마음이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추측은 수행자가 수행하고 있을 때 일어납니다. 그것들은 들뜸의 결과이며 거친 번뇌에 속합니다. 생기고 사라지는 조건 지어진 현상들의 본성을 깨달을 수 있도록, 그러한 방황하는 마음을 주시하여 제거하십시오.
“비구들이여, 비구가 언쟁하고, 말다툼하고, 논쟁에 끼어들고, 날카로운 말로 비방한다면, 드러난 번뇌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비구가 실제로 논쟁하거나 감각대상을 주시하고 있는 동안 상상으로 논쟁한다면, 드러난 번뇌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그가 말다툼하고 있는 것을 상상한다면, 그 사실을 주시하여 제거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그는 정신적 물질적 현상의 진정한 본성을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날카로운 말로 다른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했다면 빠찟띠야(pācittiya. 참회해야 하는 죄. 파일제(波逸提))를 범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의 계는 오염된 것입니다. 그가 계를 철저히 지키지 못한다면, 정신과 물질이 생기고 사라지는 현상에 대한 진정한 지혜를 다른 사람이 부정할 때, 바른 견해를 유지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법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은 논쟁이나 말다툼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예들은 삼매와 심청정(心淸淨)의 확립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를 보여주려는 것들입니다. 그것들이 제일 먼저 제거되어야 하는데, 지금부터 그 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① 감각욕망
수행자가 까시나 수행하면서 지대(地大. 땅 요소. pathavi dhātu)에 집중하든지, 혹은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이나, 혹은 염처경대로 앉고 서고 구부리고 뻗고 수축하는 등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을 때, 그의 마음이 망상할 수가 있습니다. 마음은 수행자가 일하는 사무실이나 공장으로 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만나고 싶은 사람과 상상으로 대화할 수도 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계획에 대해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욕망들은 경전에서 ‘감각욕망(kāmarāga)’이라고 하는 ‘감각적 즐거움(kāmacchanda)’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그런 인간의 욕망들을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수행자가 어떻게 지대에 집중하는 사마타 수행을 하고, 호흡의 과정이나 앉음, 섬, 걸음 등의 자세에 집중하는 위빳사나 수행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욕망에 빠져 있는 것은 사마타나 위빳사나의 수행에 장애물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생각을 피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생각이 마음에서 생길 때, 생김을 주시하십시오. 한 번, 두 번, 세 번, 거듭해서 주시하면 사라질 것입니다. 그 다음에 자기가 하고 있던 배의 부름과 꺼짐이라는 원래의 감각대상으로 주의를 돌려야 합니다.
감각욕망은 다른 사람에게 빚을 진 것과 유사합니다. 수행자가 빚을 졌을 때는 채권자에게 고분고분해야 합니다. 채권자의 질책을 참아내야만 하고, 채권자가 요구하는 대로 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인 경우에, 둘 사이에 불만이 생기지 않도록,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것을 하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가장 겸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행 중에 마음속에 욕망이 생기면, 그것을 빚이라고 여기고, 그것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② 악의
다음 장애는 악의(惡意. byāpāda)인데 이는 병과 같습니다. 병을 앓고 있을 때는 삶을 즐길 수 없고 향락을 누릴 수도 없습니다. 중병을 앓게 되면 모든 감각이 손상됩니다. 먹어도 맛을 모릅니다. 환자 주변에서 노래하고 춤춰도 고통에 시달리고 기진맥진한 환자는 즐거울 수 없습니다. 분노에 휩싸이기 전까지는 웃음 가득한 얼굴로 친구들을 만나겠지만, 화가 나면 그들을 반가워 할 수 없습니다. 친구들이 그를 위해서 충고를 해도 고마워할 줄도 모를 것입니다.
두 사람이 말다툼할 때 말리는 사람은 대개 오해받습니다. 양쪽이 모두 그가 상대방 편을 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악의가 증가합니다. 그것은 병과 같습니다. 병은 전염되기 때문에 아무도 환자 곁으로 가지 않습니다. 위빳사나 수행을 하지 않더라도 분노를 피하면 이롭습니다. 악의를 제어하지 못하면, 그것은 친구와 가족 사이에 퍼져나갈 것입니다. 위빳사나 수행 중에 악의가 생기면 관찰하고 주시해서 마음에서 몰아내십시오.
머리가 아플 때 두통약을 먹으면 두통이 사라질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화가 날 때 주시라는 약을 사용하면 즉시 사라집니다. 화가 사라진 다음에만 꼭 해야 할 말을 하십시오. 그러면 부드럽게 말하게 될 것이고, 그에 따라 우정이 돈독해질 것입니다. 이 악의라는 병을 가라앉히십시오.
③ 해태와 혼침
기도하지도 않고 선업도 쌓지 않고 있을 때, 해태와 혼침(thīna-middha)에 의해서 고통받는다고 합니다. 감옥에 갇힌 사람은, 감옥 밖의 오락물들을 즐길 수 없습니다. 해태와 혼침으로 고통받는 사람은 감옥에 갇힌 사람과 같아서, 법을 즐길 기회를 박탈당합니다.
게으름뱅이는 위빳사나 수행을 하려고 앉아 있지도 못하고, 종교적인 강의나 토의에 참석하지도 못합니다.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해 주어도, 고맙게 여기지도 않습니다. 그는 게으른 습관에 갇혀 있는 죄수입니다.
그러므로 수행 중에 해태와 혼침에 사로잡혀 있을 때는, 자신이 감옥에 갇혀 있다고 알아야 합니다. 그것들이 일어날 때 주시함으로써 마음속에서 제거하도록 해야 합니다.
④ 들뜸과 후회
들뜸과 후회(uddhacca-kukkucca)는 마음이 방황하는 것과 걱정을 의미합니다. 이것들에 사로잡혀 있을 때는 자신이 잘못한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감정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해야만 하는 노예에 비유됩니다. 노예는 주인이 지정한 곳에서 살아야 하고, 주인이 준 것을 먹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기 방식대로 할 기회가 없습니다. 노예의 자식은 모두 노예가 되므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에게는 기본적인 권리도 없습니다.
들뜸과 후회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그것들은 집중과 지혜의 향상에 장애입니다. 수행자는 그것들이 생기고 있는 것을 주시하여 제거해야 합니다.
⑤ 의심
마지막으로 의심(vicikicchā)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이는 평상시의 일상생활과 관련된 것이 아닙니다. 시장에 가고 있을 때 지금 가고 있는 이 길이 맞는지 의심한다든지, 오랜만에 사람을 만나면 내가 저 사람의 이름을 맞게 불렀는지 의심하는 것, 이런 의심들은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장애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들은 불선업을 가져오는 장애가 아닙니다.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의심은 사마타와 위빳사나 수행을 해서 성자의 도를 깨닫는 데 장애가 되는 것들입니다.
단순히 지대를 관찰하든지,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을 주시하기만 하면 선정에 든다는데 그것이 사실인지 의심합니다. 사마타 수행이나 위빳사나 수행을 하면서 그런 의심에 사로잡힌다면, 위빳사나 지혜는 물론, 삼매도 결코 생기지 않습니다.
정신과 물질이 생기고 사라지는 현상을 주시하고 있을 때, 그런 방법으로 위빳사나 지혜를 얻을 수 있는지, 스승이 가르친 것이 정말 옳은 것인지 틀린 것인지, 자신의 노력이 성자의 도와 과를 깨닫는 길로 인도한다는 것이 맞는지 등의 생각이 그에게 떠오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음과 의심하고 있음을 주시해서 그런 생각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이는 많은 돈을 가진 사람이 쫓아오는 강도들을 피해서 달아나고 있는 경우에 비유됩니다. 그가 두 갈래 길에 도착했을 때 의심에 사로잡혀 있다면, 어느 길로 갈지 결정할 수 없습니다. 갈림길에서 왼쪽 혹은 오른쪽 중에 어느 쪽으로 가야 안전할지 의심합니다. 망설이고 있으면 강도들에게 잡혀서 돈을 뺏기고 목숨도 잃을 것입니다.
조건 지어진 현상들(상카라)의 본성을 주시하고 있는 자신을 의심하고 있는 수행자는, 이 우유부단한 사람과 아주 비슷합니다. 의심으로 인하여 무명이 생기고, 무명으로 인하여 불선업이 생기고, 불선업으로 인하여 불선한 과보가 생깁니다. 그런 과보로 인하여 재탄생하게 되는데, 이는 다시 늙고, 병들고, 죽음을 맞이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위빳사나 지혜가 생기는 데 장애가 되는 의심을 제거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섯 가지 장애가 없을 때, 조건 지어진 현상들을 주시하는 마음은 청정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 마음의 청정을 심청정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이런 상태가 된 사람은 정신과 물질 및 그것들의 관계, 그리고 그것들을 생기게 한 원인과 결과를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범부는 여기에 열거된 장애들 때문에 이러한 법의 진정한 본성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
1.2 장애가 없는 수다원
수다원은 성자의 도의 지혜에 의해서 의심을 제거합니다. 그에게는 걱정과 불안이 없습니다. 홀로 외로이 위빳사나 수행을 함에 의해서 자신의 마음속에서 모든 장애를 털어 버릴 수 있습니다. 그의 청정한 마음은 생기고 사라지는 정신과 물질의 모든 현상을 주시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장애를 극복한 성자를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홀로 외로이 위빳사나 수행을 한 수다원은 ‘전에는 장애들이 사방팔방에서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조건 지어진 현상들의 본성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나는 이제 그것들을 제거할 수 있게 되었기에, 사성제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이것이 장애가 없이 홀로 외로이 조건 지어진 것들의 현상을 관찰하는 수다원의 자기 평가입니다.
“이러한 자기 평가에 의해서 얻어진 지혜를 첫 번째 ‘위대한 반조의 지혜’라고 하는데, 이는 출세간적이고 범부에게는 없는 것이다.”
이는 이 지혜가 성자의 도와 관련된 것으로서 성자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스스로를 평가해서 자신이 이 지혜를 얻었다고 확신하면, 자신은 수다원이 되었다고 여겨도 무방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그 단계에 도착했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은, 홀로 외로이 육문에서 생기는 모든 현상들을 주시하고 있을 때, 자신이 물밀듯 몰려오는 번뇌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는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자기 평가를 해야 합니다. 앞에 열거된 모든 장애들이 자신의 마음에서 제거된 것을 알게 되면, 자신이 수다원의 단계에 도달한 것이 틀림없다고 느껴도 좋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자신의 욕망과 연관된 수많은 상상된 대상에 의하여 마음이 시달리고 있다면, 자신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것으로 알아야 합니다.
2. 열반을 체험하였는가?
“비구들이여, 자신을 평가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 있다. 성스러운 제자인 수다원은 ‘나는 이 지혜를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실천해서 계발시키고 증장시킴에 의해, 나의 마음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고 번뇌로부터 해탈하는 상태에 도달하였는가?’라고 자신을 되풀이하여 조사한다.”
수다원의 마음속에는, 무상과 불만족(고)과 불변의 실체 없음(무아)에 의해 조건 지어진 정신과 물질에 대한 견해가 확고히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도의 지혜와 과의 지혜에 의하여 열반의 본성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제, 번뇌로부터 해탈하는 길을 가로막고 있던 모든 장애들을 근절시키는 삼매를, 자신이 얻었는지 못 얻었는지를 평가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이 번뇌들에는 거친 것과 미세한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보통 모든 거친 번뇌들은 아무런 찌꺼기를 남기지 않고 제거됩니다. 하지만 미세한 번뇌인 잠재 성향 번뇌들(anusaya kilesā)에 대해서는 아주 조심해야 하는데, 이것도 마음속에서 추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에 대해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평가한 수다원은 ‘나는 여러 번 이 지혜를 실천했으며, 계발했으며, 증장시켰다. 그리하여 마음속에 있는 번뇌들을 제거하는 삼매에 능숙하게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제 번뇌들로부터 해방되는 단계에 도달하였다.’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수다원은 감각적 쾌락과 연관된 걱정과 불안과 들뜸을 제거함에 의해 마음의 집중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범부는 그러한 미세한 번뇌들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정신과 물질의 본성을 알지 못하고 살아있는 존재로서 자신의 몸속에서 살고 있다고 여깁니다.
심지어는 그들이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를 얻은 다음에도, 살아있는 존재(실체)라는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들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수다원에게 삶은 정신과 물질의 본성이 나타난 것 즉 정신적 물질적 현상일 뿐입니다. 살아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정신과 물질에 집중이 되면, 정신과 물질의 복합체는 “나”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 깨달음이 자아가 있다는 잘못된 견해인 유신견(有身見. sakkāya-diṭṭhi)을 떨쳐버립니다.
수다원들의 마음속에는 불법승 삼보와 관련된 계에 대한 의심이 결코 생기지 않습니다. 그들은 종교적인 의례를 행하면 해탈한다는 사견을 버립니다. 여기서 의례란 갠지스 강에서 목욕하면 모든 죄를 씻어낼 수 있다는 신조, 제물로 바친 동물의 피에 의해서 모든 죄가 사면된다는 신조, 몸을 학대하는 고행을 하면 악업의 과보가 중화된다는 신조, 단지 천신이나 제석천이나 범천이나 천상에 있는 신을 숭배하기만 하면 천상에 태어난다는 신조, 계를 지키거나 영적 계발을 위한 수행을 하지 않아도 마음을 편안하게 하기만 하면 열반에 도달한다는 신조에 따라 계금취(戒禁取. sīlabbataparāmāsa. 실천과 의례에 대한 집착)를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자의 도의 지혜와 과의 지혜를 얻지 않고는 결코 열반을 성취할 수 없다는 수다원의 견해는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수다원은 자아가 있다는 유신견과, 계를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의심과, 종교적 의례에 대한 신조인 계금취라는 족쇄들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그는 살생이나 도둑질 등으로 인도하는 거친 번뇌에 속하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부터도 해방되었습니다. 모든 것은 무상하고 불만족스럽고 불변의 실체가 없다는 진리에 대한 확신을 놓치면 미세한 잠재 성향의 번뇌가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두 번째 위대한 반조의 지혜는, 열반으로 인도하는 도의 지혜를 얻겠다는 생각으로 위빳사나 수행을 되풀이해서, 거친 번뇌들과 미세한 번뇌들이 근절되었는지 아닌지를 스스로 평가하는 것입니다.
3. 다른 종교에는 성자가 없다는 것을 알겠는가?
“비구들이여, 자신을 평가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 있다. 성스러운 제자인 수다원은 ‘나는 스스로 육문에서 생기고 사라지는 정신적 물질적 현상에 대한 지혜를 성취했다. 이 불교 교단 이외에, 이 지혜를 성취한 사문이나 성직자가 있는가?’라고 반조한다. 그리고는 자신은 진정으로 이 지혜를 성취했지만 불교 교단 이외에 이 지혜를 성취한 사문이나 성직자가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어떻게 수다원이 이런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불교 교단 이외의 가르침에는, 정신과 물질이 생기고 사라지는 것을 주시하는 위빳사나 수행에 대한 가르침이 없습니다. 그들은 “자아”라는 것이 없다는 사실, 그리고 자아라고 여기는 것이 실제로는 “무아”인 것으로서, 단지 정신과 물질이 생기고 사라짐이 드러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은 마음의 모든 불순물이 정화되고 모든 불만족이 종말을 고하는 열반으로 가는 방법을 모릅니다. 이러한 숙고가 수다원으로 하여금 불교 교단 이외에는 정신과 물질에 대한 지혜를 깨달은 사문이나 성직자가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합니다.
위빳사나 수행에 관해서, 나는 염처경을 인용하여 “화목하게 사는 법”에 관한 법문에서 상세히 다루었습니다. 그경에 수행자는 갈 때 “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쓰여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앉아 있음, 서 있음, 누워있음, 구부리고 있음, 뻗고 있음 등을 주시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마음과 몸의 모든 행동이 주시되어야 합니다.
초보자는 이 모든 현상을 주시하는 것이 어려움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배의 부름과 꺼짐을 주시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주시함에 따라 여러분은 물질의 무더기가(色蘊. rūpakkhandhā) 작용하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한 걸음 한 걸음씩, 마음의 무더기(識蘊. viññāṇakkhandhā), 느낌의 무더기(受蘊. vedanakkandhā), 인식의 무더기(想蘊. saññakkhandhā), 형성(행)의 무더기(行蘊. saṅkhārakkhandhā)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계 경(S22:122, Sīlavanta Sutta)에, 계를 완벽하게 지키는 비구는 집착의 다섯 가지 무더기[오취온]를 무상하고, 불만족스럽고, 불변의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알게 된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 앎이 수다원의 단계를 깨닫는 도인 수다원도와 수다원과로 인도합니다. 여기서부터 그는 더 높은 사다함, 아나함과 공양 받을만한 분(응공)인 아라한의 단계로 발전합니다.
세 번째 평가로 수다원은 불교 교단 이외의 가르침에는 자신과 같은 지위를 얻은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교단 안에서도, 사띠를 확립하는 사띠빳타나(satipaṭṭhāna. 사띠 확립. 네 가지 알아차림 확립. 사념처(四念處). 신수심법을 관찰) 수행을 바른 방법으로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조건 지어진 현상들의 특성인 삼법인(무상, 고, 무아)을 깨달을 수 없으며, 그에 따라 수다원의 지위도 얻을 수 없습니다.
4. 계를 지키려고 엄청나게 노력하는가?
“비구들이여, 자신을 평가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 있다. 수다원은 ‘도의 지혜를 얻은 성자는 거룩한 성품을 갖고 있다. 내가 그런 성품을 갖고 있는가?’라고 자신을 평가한다. 이와 같이 반조할 때 자신이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수다원의 단계를 성취한 성자의 성품이란 무엇일까요? 비구들이 지켜야할 계율이 있는데, 아무런 의도 없이 그중 하나를 어겼을 때 벌칙을 받으면 사면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비구가 재가불자 혹은 행자와 사흘 이상을 연달아서 같은 지붕 아래에서 우연히 잠을 잤다면 계율을 범한 것입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즉 그렇게 하려고 사전에 계획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함께 자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전문 용어로 말하면 죄를 지었습니다. 자신이 죄를 범한 것을 깨달으면 즉시 자신의 죄를 속죄합니다.
우연히 불 가까이 손을 뻗게 된 유아는 즉시 손을 움츠립니다. 마찬가지로 비구가 우연히 계율을 어겼으면 재빨리 속죄합니다. 나아가서 그는 파계를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각별히 조심합니다. 이런 습관이 수다원의 특성입니다. 재가불자도 사악처에 떨어지게 하지는 않는 사소한 계율을 위반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과실에 대해서는 대개 면책이 됩니다.
수다원은 살인, 절도, 간통, 사기, 술이나 약물 복용 등의 중대한 계율 위반은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직 탐욕과 성냄에서 완전히 해방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사소한 것들을 위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선량한 도반들이 질책한다면, 즉시 잘못을 고백하고 다시는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것을 약속할 것입니다. 이런 특성을 가진 것이 수다원이 범부와 다른 점입니다.
범부는 좀처럼 중대한 잘못들을 행하지 않겠다고 자신을 구속하지 않습니다. 동료들이 질책해도, 자신은 무죄인 척하고, 자백하지도 않고 되풀이하는 것을 그만두지도 않습니다.
수다원일지라도 감각욕망이나 성냄 등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지 않았기에 쾌락을 즐길 수도 있지만, 그는 그런 향락이 불선업이며 삼가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범부는 그렇지 않습니다.
5. 틈만 있으면 수행하려고 하는가?
다섯 번째 위대한 반조의 지혜는 단 한 가지를 제외하면 네 번째 위대한 반조의 지혜와 거의 똑같습니다. 네 번째 것은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반복해서 잘못하지 않는 수다원의 습관에 관한 것입니다. 다섯 번째 것은 습관적으로 더 훌륭한 삼학(3 sikkhās)을 실천하고 있는지, 즉 더 높은 계율(adhisīla)을 지키고, 더 높은 선정(adhicitta)에 들어가고, 더 높은 지혜(adhipaññā)가 생기도록 노력하고 있는지를 스스로 평가하는 것입니다.
절에는 비구들이 해야 할 크고 작은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수다원은 비구로서 해야 할 일들을 하면서도, 삼학을 실천하는 데 항상 자신의 마음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열정적으로 수행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어린 송아지를 거느린 암소가, 열심히 풀을 뜯으면서도 항상 송아지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에 비유됩니다. 수다원의 이런 특성에 대해서 주석서에 다음과 같은 예화가 있습니다.
옛날에 스리랑카의 아누라다뿌라(Anuradhapura)에서 성자인 어떤 비구가 마하쩨띠(Mahāceti) 탑을 시멘트와 회반죽으로 수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수리하면서 혼자서 수행하겠다는 생각으로 높은 플랫폼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때 수행에는 관심이 없는 그의 동료 비구 한 사람이 한담이나 하려고 그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러자 성자인 비구는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범부인 비구를 피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또 따라왔습니다. 성자는 솔직한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그에게 말했습니다. “탑의 플랫폼은 아주 넓으니, 자네가 다른 곳으로 가서 수리했으면 좋겠네.” 그제야 방해하려던 비구가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성자는 수행할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않습니다.
재가불자들은 일상생활을 하면서 비구들보다 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생계를 꾸려나가느라고 모두 바쁩니다. 게다가 여러 가지 공동체의 일에도 참여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다원은, 재가신도일지라도, 계정혜(삼학)를 실천하는 데 결코 게으름 피우지 않습니다. 위빳사나 수행인 나타나는 현상들을 주시하는 일을 결코 잊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자의 특성은 위빳사나 수행을 해야 함을 결코 잊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을 평가해 봤을 때 수행하는 것이 습관이 됐다는 것을 알면, 자신이 수다원의 단계에 도달했다고 여겨도 무방합니다.
6. 온 정신을 기울여서 법문을 듣는가?
“다시 비구들이여, 성자는 ‘도의 지혜를 성취한 성자는 힘을 가지고 있다. 나에게 그런 힘이 있는가?’라고 자신을 평가한다.”
말이나 소 같은 동물들은 힘이 있지만 그것은 주로 육체적인 힘입니다. 마음에도 힘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은 자로서의 힘이 있습니다. 그들은 과감히 살생과 도둑질과 거짓말 등을 합니다. 현명한 사람들은 지혜의 힘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든 중생에 대해서 연민과 자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선행에 대해서 기뻐합니다. 범부도 나름대로의 어떤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자는 성자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자의 힘이란 무엇일까요?
부처님께서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존경스런 스승이 설명하는 가르침과 계율에 주의를 기울일 때, 마치 자신의 소중한 재산에 주의를 기울이듯이 가르침과 계율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는 성자의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도의 지혜와 과의 지혜를 얻기 위한, 사띠 확립을 기반으로 하는 바른 사띠 그리고 바른 정진(sammappadhāna)을 기반으로 하는 바른 노력에 관한 것입니다.
스승이 이 교리를 설명할 때, 제자는 존경하는 마음으로 온 정신을 집중해서 듣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는 가르침을 자신의 재산이라고 여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상인은 거래할 때 손해 보지 않으려고 각별히 조심합니다. 농부는 곡식 한 톨이라도 못 쓰게 되지 않도록 각별히 노력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사업이나 농작물을 손해 보거나 손상되어서는 안 되는 자신들의 물질적 재산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은 스승이 가르치는 법들을 단 한 마디도 놓쳐서는 안 되는 자신의 정신적 재산이라고 여기지 않으면 안 됩니다. 법문을 들을 때는, 자신의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리지 말고, 설명되는 모든 단어와 요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렇게 주의 깊게 경청한다면, 여러분은 성자의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비교하기 위하여 범부의 힘이란 어떤 것이지 설명하겠습니다. 그들은 진지한 법문을 듣는 것을 지루해하고, 감정적인 어조로 감미롭게 들리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합니다. 그들은 이야기나 희극이나 비극을 즐기며, 유머는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차분하게 설해지는 법문이 지루하게 느껴진다면, 자신이 범부의 힘을 가지고 있음을 아십시오.
7. 법문의 의미를 알고 희열을 느끼는가?
일곱 번째 자기 평가는 여섯 번째 것의 변형입니다. 여기서는 성자의 힘이 이렇게 정의됩니다.
“가르침과 계율을 듣는 사람은 그 의미와 요지를 파악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법의 핵심이 어떤 식으로 정리되어 있는지도 이해하려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희열을 느끼면서 법문을 청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식으로 법에 몰입하는 사람은 성자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도 된다.”
주석서는 법문을 들을 때의 희열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법의 깊은 뜻을 충분히 깨닫고 있기에, 청취자는 온몸에 퍼지는 희열에 전율합니다. 비구들이 빠알리어 경전을 암송하는 것을 들은 재가 수행자가, 그 경전의 의미와 요점이 무엇인지를 즉시 파악하고는 희열이 온몸에 퍼졌다고 하는 말을 가끔 듣습니다.
“어떤 성자가 자신이 들은 법문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고 희열을 느꼈다면, 자신이 성자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도 좋다. 이러한 자기 평가가 일곱 번째 위대한 반조의 지혜이다. 이런 깨달음은 범부에게는 없는 것이다.”
이 자기 평가라는 주제는 불교 교리에 대한 지식의 보급에 도움이 됩니다. 위빳사나 수행에 능통한 수행자는 경전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고 정신과 물질에 관한 철학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어떤 교학을 많이 공부한 사람이 법을 실천한 다음에 가서야 비로소 경전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다고 나에게 고백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읽은 것을 안다고 생각했었지만 실제로는 몰랐었습니다. 수행을 한 다음에 전에는 자신이 몰랐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보통 재가불자가 아니라, 경전에 능통한 비구였다가 환속한 사람이었습니다. 수행이 그를 깨닫게 했습니다. 어떤 교학을 많이 공부한 비구도 단순히 경전을 읽기만 해서는 법의 빛을 볼 수 없었다고 나에게 말했습니다.
일곱 가지 깨달음의 각지[七覺支] 가운데 사각지(捨覺支)는 실제로 수행을 해서 평온한 마음 상태를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이해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경전에 평온은 저울이 평형을 이루는 상태라고 쓰여 있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마음 상태를 경험해 보지 않고는 그것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수행을 해서 정신과 물질이 생기고 사라지는 것을 아는 생멸의 지혜와, 조건 지어진 상카라에 대한 평온의 지혜가 생긴 다음에 가서야, 우뻭카(upekkhā. 평온. 평등. 평정)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수행자는 배운 것이 많지 않아도 우뻭카가 나타나면 ‘아, 이것이 우뻭카로구나.’라고 즉시 알 수 있습니다.
희각지(喜覺支. pīti-sambojjhaṅga.)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위빳사나 수행자는 배운 것이 별로 없어도 즉시 그것을 압니다. 사실상 그는 다섯 가지 희열 즉 작은 희열(khuddaka-pīti), 순간적인 희열(khaṇika-pīti), 되풀이해서 생기는 희열(okkanitika-pīti), 들어 올리는 희열(ubbega-pīti), 충만한 희열(pharaṇa- pīti)의 미묘한 차이를 모두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는 교학을 많이 공부한 비구가 자기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위빳사나 수행자는 이론만이 아니라 법의 실천에도 위대한 공헌을 하는 것입니다. 교학과 수행 모두에 능통한 사람이 제자들을 가르친다면, 그는 이론을 실제에 접목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그가 가르치는 대로 위빳사나 수행을 한다면, 그들은 쉽게 집중할 수 있으므로 가르침을 쉽게 이해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제자들의 품성이 향상될 것이며, 그에 따라서 위빳사나 수행이 경전 공부를 촉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법문을 들으면서 희열이 자꾸 생기는 것은, 성자의 힘이 생기는 징조입니다. 범부는 가르침이 너무 심오하고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스승이 감미로운 목소리로 말하는 낭만적이거나 서정적인 이야기를 선호한다고 변명할 것입니다. 그러면 강의가 흥미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비구들은 법을 진지하게 가르치는 노력에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은 도의 지혜를 얻기 위한 위빳사나 지혜를 보급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자기 반조의 일곱 가지 항목에 대해서 스스로를 평가하여 자기 자신이 그러한 자격을 갖추었다고 판단되면, 그는 수다원이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일곱 가지 항목들은 수다원에 의해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수다원의 단계에 도달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것들을 적용해서 자신을 평가해 보십시오. 이 시험에 통과하면 자신이 생각하는 단계에 도달했다고 여겨도 됩니다.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더라도, 이 불교 가르침에서 수다원은 아주 높은 수준임을 알게 되며, 그렇지만 자신도 그 단계를 얻겠다는 포부를 가질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는 이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모든 제자들이 그 단계를 얻기 위해 힘껏 노력할 것을 촉구합니다.
일곱 가지 위대한 반조의 지혜의 자격 조건을 완전히 갖추기 위하여 여러분 모두 힘써 노력하기를 기원합니다. 가능한 한 가장 빠르게 열반에 들어갈 수 있도록, 여러분 모두 수행이 향상되어 도의 지혜와 과의 지혜를 얻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