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으로 인도하는 팔정도
(수밧다 경에 대한 법문)
마하시 사야도 법문
우틴팟 영역/향원 옮김
여기 모가웅 아리야와사 담마용에서의 오늘 법문은 열반으로 인도하는 팔정도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후에 바로 다섯 명의 비구들에게 초전법륜경으로 설법하신 것입니다. 그 후에 부처님께서는 45년 동안 이 법을 계속 가르치셨습니다. 심지어는 대반열반에 드는 날 밤에도 유랑하는 고행자 수밧다에게 팔정도를 설명하셨습니다. 그는 부처님 생존 시에 아라한이 된 마지막 제자였으며, 이 이야기는 수밧다경이라고 합니다.
1. 수밧다경의 배경
45회의 안거를 마친 부처님께서는, 일전에 마라(Māra)가 요구한 대로 일생을 마감할 때가 되었다고 결정하셨습니다. 그래서 마하 삭까라이(mahā sakkarāi) 148년, 까손(Kason) 축제기간 중의 보름날 빠와(Pāvā)의 금세공인인 쭌다(Cunda)가 공양 올린 음식을 드시고, 설사병에 걸리셨습니다.
몹시 허약한 몸이었지만, 부처님께서는 빠와에서 꾸시나가라(Kusināgara)까지 약 6마일 정도를 걸어가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 두 가지 법문을 하시려고 결심하셨기에 이러한 엄청난 노력을 하신 것입니다.
얼마 전에 아난다가 부처님께서 대반열반에 드는 것을 연기해 주실 것을 요청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사건으로 인하여 부처님께서는 두 가지를 마음속에 새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마하수닷사나 경(Mahāsudassana Sutta. D17: 『부처님의 마지막 발자취 - 대반열반경』의 151~152쪽 참조)을 법문하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수밧다에게 팔정도를 설명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수밧다에게 법문하시기만 하면, 그는 몇 시간 내로 깨달아서 아라한의 지위를 얻게 되어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 꾸시나가라에 가시지 않고 빠와에서 열반하셨다면, 수밧다는 법의 빛을 볼 기회가 없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마지막 순간을 보내려고 의도하신 장소로 여행하시는 숭고한 노력을 하신 것은, 유랑하는 고행자에 대한 위대한 연민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제자를 측은하게 여긴다고 해도, 중병을 앓고 있는 노스님이 설법하기 위하여 몇 마일을 걷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가장 무더운 계절에 아난다와 쭌다의 도움을 받아서, 25군데에서 25번 쉬시면서 그 길을 걸어가시는 어려운 일을 하시었습니다.
말라(Mallā) 왕의 영토에 있는 사라나무 정원에 도착한 다음, 두 그루의 작은 사라나무 사이에 침상이 마련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머리를 북쪽으로 하시고 오른쪽 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이 침상에서 쉬셨습니다.
그때 수밧다는 우연히 꾸시나가라에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그날 밤 부처님께서 반열반에 들어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마음을 괴롭히는 의심을 없애줄 분은 부처님뿐이라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수밧다는 평범한 고행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부처님의 상수제자인 사리불 존자나 목련 존자와 같은 고귀한 신분이었으며, 백만장자라는 뜻인 마하살라(mahāsala) 계급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통상적인 고행자가 아니어서, 속세의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적절한 옷을 입고 진리를 찾아서 방랑하였습니다. 그를 우빠까(Upaka)의 아들인 동시에, 사냥꾼의 딸 짜빠의 남편인 방탕한 수밧다와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미얀마의 전설에 의하면 외도인 우빠까는 고귀한 신분이 아니었습니다.
수밧다는 자신의 의문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그 당시 번성했던 뿌라나깟사빠(Purānakassapa) 등의 외도 지도자들에게 질문했으나, 만족스런 대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부처님께는 여쭈어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뿌라나깟사빠 같은 노장들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을 그들보다 젊은 부처님이 대답할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석서에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그때 수밧다는, ‘부처님께서 지금 이 자리에서 열반에 드신다면, 진리를 물어볼 모든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몹시 불안해졌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 특이한 순간에 그의 마음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자세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그는 부처님의 배려로 법을 얻을 마지막 제자로 운명 지어져 있었습니다.
그가 마지막 제자가 된 것은, 그가 어느 전생에서 마지막 순간에 마지막으로 수확한 곡식을 공양물로 바쳤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고따마 부처님 시절에 꼰단냐(Kondañña)가 될 운명이었던 그의 형은, 제일 처음에 수확한 곡식을 공양물로 바쳤습니다.
2. 부처님 뵙기를 청함
한밤중에 수밧다는 서둘러 부처님께로 왔습니다. 그러나 스승을 면담하려면 우선 아난다의 허가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는 아난다에게 이렇게 간청했습니다.
“아난다여, 부처님이 영겁 동안 단 한 번만 출현하신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나는 고따마가 오늘 밤 늦게 반열반에 든다는 소식을 지금 막 들었습니다. 나는 풀어야 할 의심이 있는데 그가 이를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니 만나게 해 주기 바랍니다.”
아난다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고행자들은 대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반대한다. 수밧다와의 논쟁은 스승을 기진맥진하게 할 것이다.’
그래서 아난다는 수밧다에게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세존을 질문으로 괴롭히지 말라고 했습니다. 수밧다는 세 번 요청했지만 세 번 다 거절당했습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계시던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난다야, 수밧다를 허락하지 않는 것은 적절치 않으니 나를 만나게 하여라. 그는 물어보려는 것일 뿐 나를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대답하면 그는 즉시 깨달을 것이다.”
아난다의 허락을 받은 수밧다는 의례적인 말로 세존에게 인사하고, 부처님께서 쉬고 계신 침상을 기준으로 하여, 여섯 가지 잘못을 범하지 않는 적절한 장소에 앉았습니다. 경전에 의하면, 이는 너무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으며, 바람이 불어오는 쪽도 아니고 바람이 불어가는 쪽도 아니며, 마주 보고 앉는 것도 아니고 등을 돌리고 앉는 것도 아닌 장소입니다.
북쪽을 향하고 있는 침상의 머리 방향에는 작은 사라나무가 한 그루 있었고, 발 방향에도 또 하나의 작은 사라나무가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오른쪽 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누워 계셨으므로 얼굴은 서쪽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수밧다는 발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앉아서 얼굴을 침상의 머리 쪽을 향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때까지는 법을 묻는 고행자가 스승에 대해 예의를 갖추었다는 말이 경전에 없습니다. 이는 비록 부처님께서 의문을 풀어줄 능력이 있는 것은 믿게 되었지만, 세존에 대한 수밧다의 신뢰가 아직은 자신이 믿는 잘못된 사상에 대한 것만큼 강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하겠습니다.
3. 수밧다의 질문
그래서 수밧다는 경의를 표하지 않고 부처님을 평범한 고따마로 대하고 자기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을 물었습니다.
“(뿌라나깟사빠 등의 고행자에 의해 만들어진) 여러 가지 신흥종교의 많은 종파가 널리 퍼져 있고 제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들의 사상은 태어나고 죽는 끊임없는 윤회를 주장하는 것도 있고, 그 반대도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기들이 안다고 장담하는 것을 압니까, 아니면 모릅니까?”
그가 종파의 지도자라고 말한 것은, 뿌라나깟사빠, 막칼리고살라(Makkhaligosāla), 아지따(Ajita), 빠꾸다(Pakudha), 산자야(Sañjaya), 니간타 나따뿟따(Nigaṇtha Nātaputta)를 염두에 둔 것입니다. 이들 육사외도(六師外道)는 존재의 모든 현상들의 과거 현재 미래를 안다고 장담하고 있었습니다. 수밧다는 그들이 정말로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면 그들 중 일부는 아는가에 대해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그런 의심을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대부분의 세상 사람은 종교적 신조들을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 혹은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 전통적으로 전해왔기 때문에 아무런 의심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그들은 그것들이 타당한지 알아보지도 않고 맹목적으로 믿든가 아니면 그 반대로 추론해 보고 믿지 않습니다.
수밧다는 심사숙고하는 기질을 가지고 있어서 소문만 듣고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에 육사외도들이 진실로 진리를 안다면, 진리는 하나이어야만 합니다. 진리가 여러 가지일 수는 없습니다.
진리는 하나이며 나눌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날 부처님 법은 중도 즉 팔정도라는 단 하나의 기본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바로 계를 지키고, 집중을 향상시켜, 심오한 지혜와 사성제를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법을 실천하지 않고 불교의 목표와 목적이 달성된다고 설명한다면, 우리는 즉시 그가 정상 궤도에서 벗어났음을 알아야 합니다.
수밧다는, 육사외도들이 주장하는 노선의 지식이 저마다 각기 다른 것은, 그들이 기본을 모르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옛 스승들을 존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깨달은 분에게 세 가지 질문을 제시한 것입니다.
4. 부처님의 답변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수밧다여, 그대는 육사외도들이 진정으로 아는가 모르는가, 혹은 일부는 알고 일부는 모르는가를 묻고 있다. 그러나 이 질문은 옆으로 치워놓자. 내가 그대에게 유익한 법을 알려 주겠다. 잘 들어라.”
부처님께서는 수밧다의 질문에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육사외도들이 안다고 장담하는 것을 그들이 모른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면 그에게 좋을 것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러한 편협한 사람들에게는 이와 같은 평범한 말이 단순히 질책으로만 여겨질 수 있고, 불선업(不善業)이 되고 아무 소용이 없게 될 것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잘못을 지적해 주면 잘못한 사람이 오히려 화를 냅니다. 그러므로 우리 비구들은 말할 때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바른 법을 실천하는데 거슬리는 행동을 하지 않는 한, 그들의 잘못을 너그럽게 눈감아 주기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남에게 피해를 주었을 때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법의 심오함을 설명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은 우리들이 사물의 이치도 모르면서 그들을 압도하려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들을 나쁜 사람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세존께서는 의도적으로 수밧다의 날카로운 질문을 젖혀 두고 그에게 도움이 될 것만 법문하셨습니다.
이제 수밧다는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일 태세로 부처님을 “존자여(Bhante)”라고 불렀습니다. 어떤 사람이 상대방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자신의 교리를 설명하려고 하는 경우를 상상해 보십시오. 질문한 사람은 틀림없이 적대감을 나타낼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수밧다는 세존의 말씀을 받아들여 “그렇게 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마음속에서 믿음이 우러나왔음을 나타냅니다.
5. 번뇌는 성자의 도를 통해서만 근절된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수밧다에게 이렇게 법문하셨습니다.
“어떤 종교의 교리(法. dhamma)와 계율(律. vinaya)에 팔정도가 빠져 있다면, 그 종교를 따르고 실천해도 점점 청정으로 인도하는 흐름에 들어 첫 번째 성자인 수다원이 될 수 없고, 두 번째 성자인 사다함이 될 수 없고, 이 세상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아나함이 되는 세 번째 성자도 될 수 없다. 나아가서 최종적으로 모든 번뇌를 극복한 아라한이 될 수 없다.”
이것은 주석서에서 인용한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깊이 명심해야 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팔정도가 없는 가르침으로는, 위에서 말한 해탈의 네 가지 단계를 통과한 네 가지 범주의 성자를 배출해 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탐욕 성냄 어리석음에서 비롯되는 14가지 불선한 마음부수로 구성되어 있는 번뇌를 뿌리 뽑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나는, 재가불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종교 혹은 종교의 가르침이라는 의미로 교리와 계율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팔정도가 없다면 어떤 종교적 가르침이라도 결코 수다원이나 사다함이나 아나함이나 아라한을 배출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자명한 이치입니다. 불교 이외의 종교는 성자의 도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다음 초전법륜경을 설법하시기 전까지는, 선정의 제7단계를 획득한 알라라(Alāra)와 8단계를 획득한 우다까(Udaka)조차 이 성자의 도를 몰랐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남에게 가르쳐 줄 수도 없었습니다. 이런 지식이 없기 때문에 기본적인 수다원 단계조차 체험할 수 없었습니다.
요즈음은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것과 반대로 말하는 사람들도 생겼습니다. 그들은 누구든지 일단 지식을 획득하기만 하면 법을 실천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 말은 실질적으로 법의 실천을 거부하는 것이며, 팔정도를 배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팔정도는 계속해서 수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팔정도의 본성을 통찰하는 힘을 배양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바베땁바라고 하는 계율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노력하지 않고 저절로 되는 것은 없습니다.
심지어는 노력 자체가 고통이니 거기에 빠지면 안 된다는 틀린 사상을 주장하는 종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고생스럽게 팔정도에 따라서 수행하고 계율을 실천하려고 하겠습니까? 아무도 이 법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법의 빛이 수행자의 내부에서 우러나오겠습니까? 성자의 도의 본성에 대한 통찰 없이 어떻게 번뇌를 제거하고 열반이라는 평화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위빳사나 수행 방식으로 사띠하고 관찰해야만 팔정도의 교리를 알 수 있습니다. 성자의 도의 교리와 수행을 부정하는 어떤 주장도 불교의 가르침을 방해하거나 파괴하는 것입니다. 불교가 활성화되지 않는 이면에는 성자의 도가 없기 때문이며, 성자의 도가 없는 곳에는 열반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는 번뇌의 근절이 없습니다.
수밧다에게 이 법문을 하시는 부처님에게는 사견(邪見, personal illusions)이 없었습니다. 부처님은 육사외도들의 종교적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나, 당시의 주류였던 브라만의 종교적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팔정도가 없는 곳에는 평화로 가는 길에 장애물뿐이라는 것을 강조하시기만 하셨습니다.
여기서 수밧다는 즉각 깨달았습니다. 육사외도들이 팔정도의 교리에 의한 방법과 수행을 모르기 때문에, 그들이 장담하는 바와 달리 모든 것을 알지 못함을 알았기에 수밧다가 깨달은 것입니다. 육사외도들과 브라만의 가르침에는 성자의 도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으로 평화로 가는 길을 방해하는 번뇌를 제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6. 팔정도를 실천
팔정도를 실천한다는 것은 계를 지키고 집중해서 지혜가 생기도록 하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충실하게 계를 지킨다면, 세 가지 계(戒)의 도(sīla magga) 즉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계를 준수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사띠 수행을 한다면, 세 가지 정(定)의 도(samādhi magga)의 요구 사항 즉 바른 노력, 바른 사띠, 바른 집중이 달성될 것입니다. 통찰지에 대한 수행은 위빳사나 수행인데 바른 견해와 바른 생각을 촉진합니다. 이 두 가지 특성은 혜(慧)의 도(paññā magga)의 구성요소입니다.
계정혜는 수행자를 성자의 도로 인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르침에 대해 확신한다면 계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자신의 신봉자들에게 단순하고 쉬운 방법을 창안했다는 종교 지도자에 의해서 제창되곤 합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부처님 시절에는 지성적이고 뛰어난 인물들이, 부처님의 법문을 듣는 순간 법의 빛을 보는 사례가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물론 간단한 설명만 들으면 ‘즉각 사성제의 의미를 파악하는 사람’(ugghaṭitaññū)이나, ‘좀 더 상세한 설명을 듣고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사람’(vipañcitaññū) 같은 천재도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부처님 시대에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고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는 동안 지혜의 빛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지혜를 깨닫기 위해 배우지 않으면 안 되는 범부(보통 사람)인 경우에는, 부처님이라도 즉각 법의 빛을 보게 할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다음 게송이 경각심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대 스스로 힘써 노력하라.
여래는 다만 길을 알려줄 뿐.
누구든지 이 길을 따라 수행하는 이는
마라의 속박에서 벗어나리라.
(법구경 276)
그렇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길만 가르쳐 주실 뿐이어서, 도의 이러저러한 단계에 도달하려면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고 명령하실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사마타 수행을 하여 집중력(삼매)을 향상시키고, 위빳사나의 대상인 다섯 가지 집착의 무더기[五取蘊]를 관찰해서, 위빳사나 지혜를 생기게 하고 점점 더 높은 단계의 지혜를 생기게 해야 합니다.
7. 스스로 노력하라
부처님께서 맨 처음으로 초전법륜경을 다섯 명의 비구들에게 설법하셨을 때, 다섯 사람 중의 네 명, 즉 왑빠(Vappa), 밧디야(Bhaddiya), 마하나마(Mahānama)와 앗사지(Assaji)는, 법이 너무나 심오하여 설법하는 동안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부처님의 지도하에 엄청난 노력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들은 각각 순서대로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동안 치열한 수행을 한 다음에 가서야 비로소 수다원이 되었습니다.
8. 번뇌로부터의 해방
부처님의 가르침 안에서만 번뇌의 굴레로부터 해방되는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계속해서 수밧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수밧다여, 내가 정해 놓은 법(교리)과 계율 아래에서만 여덟 가지 요소를 가진 거룩한 도(팔정도)가 있다. 이 교단에서만 첫 번째 성자인 수다원을 만날 수 있고, 두 번째 성자인 사다함을, 세 번째 성자인 아나함을, 그리고 네 번째 성자인 아라한을 만날 수 있다. 내 가르침이 없는 곳에는 안다고 장담하는 것을 실제로 알고, 잠재되어 있는 번뇌를 근절할 수 있는 사문이 있을 수 없다.”
지금까지의 설명을 요약합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시고 나서 팔정도를 설명하시기 전에는, 알라라나 우다까나 범부인 범천들도 도의 지혜를 얻지 못했습니다. 법의 바퀴가 처음으로 굴러가기 시작했을 때, 일억 팔천만 명의 범천(brahmā)들과 수많은 천신(deva)들이 지혜를 얻어서 번뇌를 근절하였습니다.
인간 가운데는 꼰단냐만이 맨 처음으로 수다원이라는 영적으로 계발된 상태를 획득했지만, 다섯 명 가운데 나머지 네 명은 나중에 번뇌를 없앤 사문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부처님 이전에는 아무도 팔정도를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번뇌를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불교가 번성하고 있는 요즈음에도 팔정도를 모르거나 회의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 중에는 수다원이 있을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불교의 교단이 아닌 곳에는 사문이 있을 수 없다는 점을 수밧다에게 강조하셨습니다.
주석서는 그러한 사문을 12가지로 제시하고 이를 세 가지 부문으로 나누었습니다. 첫 번째 부문에는 위빳사나 수행을 이미 충분히 해서 성자의 도를 얻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는 아랏다위빠사까(āraddhavipassaka)라고 불리는 네 종류의 위빳사나 수행자가 있습니다. 두 번째 부문에는 도의 지혜(magga-ñāṇa)를 얻은 성자 네 종류가 있습니다. 세 번째 부문은 과의 지혜(phala-ñāṇa)를 얻은 성자 네 종류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열심히 수행하는 아랏다위빠사까를 주목해서 봐야 합니다. 그에게는 언젠가 생멸의 지혜가 생길 것입니다. 이 사실로부터 판단해 볼 때, 도의 성취를 열망하는 수행자는, 첫 번째인 수다원도를 획득하기 위하여 위빳사나 수행을 해야만 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수다원도를 체험하려는 수행자는 무상, 고, 무아라는 삼법인(三法印)을 관찰해야 합니다. 관찰해 감에 따라, 그는 지금 일어나고 있고, 지금 사라지고 있는 모든 현상들의 흐름에 자신의 주의를 계속 보낼 것입니다. 마음이 그렇게 변화하는 현상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번뇌가 그의 마음을 괴롭힐 기회가 없을 것입니다. 사실상 번뇌는 모두 제거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사문(수행자. 비구)이라고 합니다. 불교의 영역을 벗어나면, 위빳사나 수행을 모르기 때문에 사문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불교도라고 하면서 불교란 정신과 물질에 관한 것이며, 무상과 불만족과 실체가 없다는 것에 관한 것이지 위빳사나 수행을 할 필요가 없다는 종파에 속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여덟 가지 거룩한 성자는 말할 것도 없고, 사문의 계보도 끊어지게 되는 결과가 됩니다.
9. 가르침이 오래 지속되게 하는 방법
번뇌를 근절시킨 진정한 사문은 불교 안에서만 존재하며, 불교가 쇠퇴하게 된 이면에는 사문의 계보가 단절되어 있음을 보이신 다음, 부처님께서는 수밧다를 깨우쳐 주시기 위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계속 존속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을 말씀하십니다.
“수밧다여, 이 교단의 법과 그것을 보완하는 팔정도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는 사문들이 오랫동안 유지되게 하는 방법을 알려주겠다. 내가 열거한 12가지 종류의 비구들이 잘 살아간다면, 아라한을 포함한 진정한 사문의 계보가 단절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나는 주석서의 주해에 따라서 12가지의 사문에 속한다는 의미로 비구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12가지는 네 가지 위빳사나 수행자와 여덟 가지 거룩한 성자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잘 산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비구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법에 푹 빠져서 산다는 의미일까요? 천만에 말씀입니다! 그들이 편안한 생활을 한다면 아라한의 계보는 이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팔정도가 보급될 때에만 성자들이 계속 출현하고 아라한의 계보가 끊어지지 않게 됩니다. 이에 대해서 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사문이 ‘잘 산다’는 말은, 성자의 첫 번째 도를 획득한 수다원이 자신이 획득한 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보급시켜서 그들도 자신과 같은 수다원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해설은 명쾌합니다. 수다원은 자신이 얻은 법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하고 그들에게 팔정도를 잘 실천하는 방법을 가르칠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는 위빳사나 수행을 실천하도록 다른 사람들을 납득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노력의 결과로, 어떤 수행자가 성자의 도를 획득하여 수다원이 된 다음에, 계속해서 같은 방식으로 열심히 수행하여 더 높은 수준인 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의 지위에 도달한다면, 후대에까지 아라한이 계승될 것입니다.
‘잘 산다’는 말의 이런 취지가 사다함 등에도 적용된다는 것을 되풀이하여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요. 새로운 아라한들이 계속해서 출현하는 한, 그들의 계보는 결코 단절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주석서에 처음 네 가지 성자의 도를 기반으로 해서 어떻게 점점 더 많은 수다원이 생겨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10. 수다원을 성취하기 위한 위빳사나 수행
계속해서 주석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또한 수다원의 지위를 얻기 위하여 힘써 노력해서 생멸의 지혜를 획득한 위빳사나 수행자는, 자신이 탁월하게 수행하는 모습을 실제로 보여주면서 설명하여,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수다원의 도를 얻기 위해 따라하게 할 수 있다. 그렇게 한다면 그는 ‘잘 산다’는 말을 들을 것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도를 얻기 위해 힘써 노력하여 생멸의 지혜를 얻은 위빳사나 수행자가 진정한 아랏다위빠사까입니다.
정신과 물질의 현상들을 계속해서 지켜봐서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 조건을 파악하는 지혜나, 명상의 지혜를 얻은 수행자는, 생멸의 지혜를 얻을 때까지는 진정한 아랏다위빠사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수행자가 이 지혜를 얻은 다음에만, 경험이 풍부해져서 다른 사람들이 도를 계발하도록 하는 촉진제 역할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방법을 알기만 하면 충분하지 수행을 꼭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엉뚱한 주장에 대하여, 이 아랏다위빠사까가 각별한 관심을 갖고 대응하기를 바랍니다. 그 견해는 전적으로 틀립니다. 성자의 네 가지 범주는 팔정도에 대해서 수행을 한 다음에만 성자의 도 안에서 확립됩니다. 만약 수행자가 지속적인 수행에 의해서, 대상인 물질과 그 대상을 아는 마음인 정신이, 소멸되는 것을 아는 단계인 소멸의 지혜에 도달한다면, 꼭 필요한 것을 성취했기에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위빳사나 수행자가 생멸의 지혜에 도달하면 수행에 능숙하게 된 것이고, 형성에 대한 평온의 지혜에 도달한다면 수행에 완전히 숙달된 것입니다. 그런 단계에 도달한 수행자들이 위빳사나 수행 방법을 자기와 친한 사람들에게 알려 줄 것을 강력히 권합니다.
권유에 의해서 그의 친구와 이웃 사람들이 생멸의 지혜에 도달한다면, 성자의 도를 얻으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아랏다위빠사까가 된 것입니다. 영감을 얻게 되면, 아라한을 체험할 때까지 계속해서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면 새로운 세대의 아라한이 출현하게 됩니다.
우리 비구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 보완물인 아라한과 함께 유지하려는 관점에서, 수행이라는 과업을 떠맡고 있습니다. 나는 진정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 지속되기를 기원하는 사람들이, 우리의 벤처 사업을 도와줄 것을 강력히 호소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어떤 사람들은 우리들이 없는 자리에서 비우호적으로 비난하며 우리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실로 유감스런 일입니다.
과거의 부처님들 시대에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오랫동안 유지하려는 비슷한 노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법이 더 이상 설명되지 않고 보급되지 않아서, 결과적으로 실천될 수 없었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 하에서 세상 사람들은 팔정도를 완전히 잊어버렸으며, 성자의 도와 그것을 얻는 방법을 알게 되는 것은 새로운 부처님이 출현하였을 때입니다. 수행자가 성자의 도의 부흥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한, 진정한 사문은 계속해서 활약하게 될 것입니다.
11. 팔정도를 향상시키는 법
그러므로 나는 팔정도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하고자 합니다. 팔정도의 여덟 가지 요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바른 견해(正見)
2. 바른 생각(正思惟)
3. 바른 말(正語)
4. 바른 행동(正業)
5. 바른 생계(正命)
6. 바른 노력(正精進)
7. 바른 사띠(正念)
8. 바른 집중(正定)
여덟 가지 요소 중에서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계는 계(戒)의 도(sīla magga)입니다. 입으로 짓는 네 가지 죄인 거짓말, 이간질하는 말, 거친 말과 쓸데없는 말을 삼간다면, 바른 말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살생하고 훔치고 간음하는 세 가지 죄를 범하지 않는다면, 바른 행동을 실천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수행자가 이 일곱 가지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면 이는 바른 생계를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 계를 지키는 것은 수행하기 전에 준수해야 할 기초가 되는 팔정도입니다.
바른 노력, 바른 사띠와 바른 집중은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정(定)의 도(samādhi magga)입니다. 그것은 사마타(samatha)나 위빳사나 수행을 열심히 해야 얻어지는 것입니다. 지켜보는 마음이 사마타의 대상 혹은 위빳사나의 대상을 주시하고 있으면, 다음 네 가지 정근[四正勤]을 달성할 수 있는 바른 노력[正精進]을 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즉 사정근은 ① 아직 생기지 않은 불선업은 생기지 못하도록 하고 ② 이미 생긴 불선업은 제거하고 ③ 아직 생기지 않은 선업은 생기도록 하고 ④ 이미 생긴 선업은 증가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관찰해야할 대상을 기억하는 것이 바른 사띠(sammāsati)입니다. 그것에는 사마타의 바른 사띠와 위빳사나의 바른 사띠 두 가지가 있습니다. 빠알리어 경전은 바른 사띠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네 가지 사띠 확립, 즉 몸에 대한 사띠, 느낌에 대한 사띠, 마음에 대한 사띠, 법에 대한 사띠 확립이 있다. 몸, 느낌, 마음과 법을 지속적으로 관찰하면 사띠가 확립된다.”
이들 네 가지 사띠 확립은 명백히 “바른 사띠의 도(sammāsati magga)”로 분류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과정을 주시하는 것은, 머리카락, 몸의 털 등의 인체의 해부학적 구성 요소를 주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마타의 바른 사띠입니다. 또한 까시나나 마음을 훈련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체를 관찰하는 것도 사마타의 바른 사띠입니다. 그러나 육체적 행동이나, 보고 듣고 집착하고 화내는 등의 몸이나 마음의 느낌을 주목하고 기억하는 것은 위빳사나의 바른 사띠입니다.
바른 사띠가 확립되었을 때, 수행자는 정신(마음)과 물질(몸)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아는 지혜라는 바른 견해, 그리고 존재의 삼법인인 무상, 고, 무아에 대한 지혜라는 바른 견해를 지녔다고 하겠습니다.
12. 사띠와 수행
사띠가 확립되면 삼매가 생깁니다.
분명한 앎과 더불어 바른 사띠를 확립하려면 다음 네 가지를 명심해야 합니다.
1. 몸이 나타날 때마다 몸의 움직임을 분명히 안다.
2. 마음이 나타날 때마다 마음의 움직임을 분명히 안다.
3. 느낌이 나타날 때마다 느낌(좋거나 싫거나 덤덤함)을 분명히 안다.
4. 현상(법, 마음의 대상)이 나타날 때마다 현상을 분명히 안다.
내가 초전법륜경에 대한 법문에서 이런 것들을 자세히 다루었으니 참조하십시오.
바르게 알면서 하나의 감각 대상에 집중해 가다 보면 바른 사띠가 확립되고, 그와 동시에 사띠와 함께 생기는 “삼매”도 확립될 것입니다. 이 삼매는 부처님께서 삼매의 가장 높은 단계인 네 가지 선정으로 상세히 설명하셨습니다. 선정에 아주 근접해 있기 때문에 삼매의 가장 낮은 단계를 근접 삼매(upacāra samādhi)라고 합니다. 이 근접 삼매의 단계에서 심청정(心淸淨, citta-visuddhi)이 달성됩니다.
또한 수행자의 마음이 눈 깜짝할 동안 밝아지는 위빳사나 찰나 삼매(khaṇika samādhi)도 있습니다. 이 위빳사나 찰나 삼매는 해태와 혼침 등의 장애들을 몰아내는 능력이 있는 점에서는 근접 삼매와 거의 동격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 장애들은 선한 생각들이 생겨나지 못하도록 막기 때문에 열반을 가로막습니다. 주석서에 이 찰나 삼매가 근접 삼매라고 서술되어 있습니다.
수행자의 위빳사나 사마디가 강해졌을 때, 바른 생각은 수행자가 집중하고 있는 감각 대상의 실재(빠라맛타)에 그의 마음을 기울이게 할 것이고, 그 결과로 수행자는 바른 견해를 갖게 될 것입니다. 바른 견해는 이런 식으로 생깁니다.
사띠가 확립되고 그에 따라서 마음이 청정해지면, 수행자는 주시되는 대상과 그것을 아는 마음을 구별할 수 있게 됩니다. 예를 들어 배의 부풂과 꺼짐을 관찰하고 있을 때, 수행자는 부르고 꺼지는 현상을, 아는 마음으로부터 구별하게 될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걸을 때, 수행자가 발을 들고 앞으로 나아가고 내려놓는 행위를, 움직이도록 하는 마음으로부터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앎의 대상인 물질로부터, 앎인 정신을 구별할 수 있게 됩니다. 이는 미리 생각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자가 현상에 어떤 생각을 부여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압니다.
수행자의 집중력이 좋아져서 지혜의 힘이 강해지면, 무릎이 굽혀지기를 원하기 때문에 무릎이 굽혀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걷기를 원하기 때문에 걷습니다. 보는 눈이 있고 보일 물체가 거기 있기 때문에 봅니다. 듣는 귀가 있고 소리가 거기 있기 때문에 듣습니다. 자신의 업이 호의적이기 때문에 인생을 즐깁니다. 그는 이런 식으로 생기는 모든 현상들과 관련된 원인과 결과를 구별할 수 있게 됩니다.
집중력과 지혜가 더욱더 강력해짐에 따라, 어떤 한 순간 생긴 아는 주체와, 그 앎의 대상인 객체가, 다음 순간에 사라진다는 것까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다시 새롭게 생기고 사라집니다. 이런 지속적인 과정을 알게 되면, 그는 모든 것은 무상하며, 모든 것은 불만족스러운 것이며, 모든 것은 불변의 실체가 없다는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런 것들이 모든 실재에서 발견됩니다. 그것들은 단지 상상에 의해 꾸며낸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그러한 것들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아도 이제는 이러한 것들을 압니다. 현상들이 생기는 것을 주시하고 있으면, 그 현상들의 진정한 본성을 알게 됩니다. 정신과 물질이 진정으로 다르므로, 그것들이 전혀 다른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 다음에, 그 모든 사건들의 원인과 결과를 깨닫습니다. 관찰된 현상들의 실재가 모든 정신과 물질은 무상하고 만족스럽지 않고 불변의 실체가 없다는 지혜를 갖도록 그를 격려합니다. 이렇게 올바르게 아는 것을 바른 견해라고 합니다.
수행자는 육문을 통해서 나타나는 모든 대상을 주시하고 관찰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자면 노력해야 하는데, 이것이 바른 노력입니다. 그러자면 주시하고 있는 대상을 알기 위해서 그 대상에 마음을 붙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른 사띠입니다.
사띠하고 있으면, 마음이 대상에 고정(집중)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른 집중입니다. 도의 이들 세 가지 구성요소, 바른 노력, 바른 사띠, 바른 집중은 정(定)의 도(samādhi magga)입니다.
그러면 거기에 대상의 본성을 향하여 마음을 기울이는 과정이 있는데 이것이 바른 생각입니다. 이 바른 생각의 결과로 바른 견해를 갖습니다. 이 두 가지는 혜(慧)의 도(paññā magga)입니다. 정과 혜 다섯 가지는 모두 함께 촉진제가 되어, 자발적으로 주시하고 아는 과정 속에서 그것들의 노력을 통합합니다.
바른 말, 바른 행동과 바른 생계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계(戒)의 도를 구성합니다. 이는 일반적으로 위빳사나 수행에 몰두하기 전부터 충족되고 있다고 여겨도 됩니다. 수행기간 도중 이들 세 가지 계의 도는 오염되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상 그것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더 정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 그룹의 세 가지 요소가 앞 그룹의 다섯 가지에 더해져서, 수행해야 할 위빳사나의 도는 여덟 가지가 됩니다.
위빳사나 수행을 향상시키려면, 근원도(根源道, mūla magga)의 세 가지 기본 특성이 충족되어야만 합니다. 맨 처음 특성은 업의 법칙을 확신하는 견해입니다. 행위와 그 결과에 대한 절대적인 신념이 있어야만 위빳사나 수행을 할 수 있습니다. 수행한 결과가, 도(道)의 지혜와 그 결과인 과(果)의 지혜, 그리고 최종적으로 열반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믿음이 있어야만 바른 노력을 할 수 있습니다.
근원도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계를 지키는 것인데, 이는 영원히 깨끗하고 순수한 상태가 유지되어야 합니다.
세 번째로 중요한 것은 위빳사나 찰나 삼매인데, 이는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근접 삼매와 비슷한 것입니다.
이 근원도를 성취한 수행자는 위빳사나 지혜를 얻을 수 있는, 위빳사나로 가는 바른 길로 들어섰다고 하겠습니다. 위빳사나의 도는 전단계의 도인데 성자의 도를 완성시키기 전에 거쳐야 하는 준비단계입니다.
13. 근원도를 계발하는 방법
세 가지 근원도는 첫째로 업의 법칙을 받아들이는 바른 견해, 둘째로 바른 말, 바른 행위와 바른 생계의 계를 지키는 것, 그리고 셋째로 선정(깊은 삼매), 근접 삼매와 위빳사나 찰나 삼매의 세 가지 종류의 집중이라는 것을 여기서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수행하면 찰나 삼매가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찰나 삼매가 아직 약하다면, 가장 낮은 단계인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도 생기지 않습니다. 장애가 제거되어야만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찰나 삼매를 확립해야 한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아무런 삼매도 확립되기 전에 무상, 고, 무아라는 삼법인에 대해서 집중하라고 수행자를 지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위빳사나 지혜를 생기도록 하는 데 권장할 만한 것이 못 됩니다.
수행을 시작하기 전에 기본이 되는 세 가지 근원도가 확립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초보자는 선정 혹은 근접 삼매 수행을 건너뛰고, 다음에 인용하는 “가르침의 상속에 대한 경”의 주석서에 나와 있는 것과 같이, 우선 오취온을 관찰하기 시작해도 좋습니다.
“이 교단에서, 어떤 사람들은 위빳사나 수행을 하기 전에 먼저 근접 삼매나 깊은 삼매를 얻기 위한 수행을 선택한다. 이것이 사마타 수행이다. 수행자가 삼매를 성취한 다음에, 무상, 고, 무아라는 삼법인을 관찰하는 수행, 즉 나타나는 현상(법)들을 관찰하는 수행을 한다면, 이것도 위빳사나이다.”
이것은 사마타를 수단(samatha yānika)으로 사용하여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방법을 설명한 것이지만, 삼법인을 포함한 수행을 여기서는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을 뿐입니다. 청정도론에는 깊은 삼매를 얻는 수행을 통하여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와, 그 지혜와 짝을 이루는 조건을 파악하는 지혜를, 근접 삼매 수행을 통해서 얻는 주제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수행자가 위빳사나를 수단(vipassanā yānika)으로 사용하여 수행함에 의해 위빳사나 지혜를 얻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교단에서, 어떤 수행자들은 근접 삼매 등의 사마타 수행을 하지 않고, 오취온에 대한 무상, 고, 무아라는 삼법인을 주시하고 관찰하는 수행을 선택한다. 이것이 위빳사나 수행이다.”
경전에서 근접 삼매나 깊은 삼매의 도움 없이, 수행자가 오취온에 대해서 관찰하면 무상, 고, 무아라는 삼법인에 대한 위빳사나 지혜를 얻는다고 말하고는 있지만, 수행 초기에 삼법인을 깨닫고 식별한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장애들이 제거되지 않으면, 정신과 물질, 빠알리어로는 나마(nāma)와 루빠(rūpa)의 특성을 완전히 식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위빳사나 찰나 삼매가 필요합니다.
이 삼매에서는 집중이 잠시 동안 지속됩니다. 그러나 찰나 삼매가 확립되었을 때에는 관찰하는 순간 마음이 고요해지고 청정해집니다. 마음이 청정해져야만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가 생깁니다. 그 다음에 정신과 물질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원인과 결과에 대한 지혜가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되는데, 이때 수행자가 조건을 파악하는 지혜의 단계에 도달했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것들이 청정도론에 상세히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오취온과 연관시켜야 무상, 고, 무아가 관찰되고 주시된다고 간단하게만 말해 두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관찰이 수행을 시작하면 바로 삼법인에 대한 위빳사나 지혜를 얻는 것을 보증하지는 않습니다. 수행자가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청정도론에 반하는 것이며, 진리로부터 멀리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정신과 물질이 생기고 사라지는 것을 아는 지혜가 생겨서, 세 가지 삼매인 근접삼매, (깊은) 본삼매, 찰나삼매에 의하여 마음의 청정을 유지하고 있는 수행자는, 전단계의 도에 접어들었다고 하겠습니다.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능력은 위빳사나의 도로 인도합니다. 정신과 물질이 생기고 사라지는 본성의 원인과 결과를 아는 능력도 위빳사나의 도로 인도합니다.
무상, 고, 무아라는 삼법인을 깨닫는 능력은, 성자의 도를 실현하기 전의 예비단계인 위빳사나의 도로 인도합니다. 이 위빳사나의 도는 명상의 지혜로부터 수순하는 지혜까지 열 단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인 수순하는 지혜가 생긴 다음에 종성(種姓)의 지혜가 생기는데, 이는 감각적 영역인 욕계의 혈통에서 벗어난 가장 거룩한 혈통에 속하는 심찰나(心刹那)입니다. 그것은 범부(성자가 아닌 사람)의 신분에서 거룩한 성자의 신분으로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14. 전단계의 도를 계발하는 방법
전단계의 도는 성자의 도의 바로 앞 단계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만 내딛으면 거룩한 성자의 단계입니다. 오취온을 관찰해서 전단계의 도에 도달한 수행자는, 존재가 불만족이라는 고(苦)의 진리(고성제)를 확신하게 됩니다. 이 진리를 깨달으면 수행자는 고의 원인의 진리(집성제)를 발견합니다. 이 진리에 계속적으로 집중하면, 이번에는 고의 원인을 제거하는 방법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위빳사나 수행 과제의 완성입니다. 일단 무상의 법칙을 확신하게 되면, 수행자의 마음은 영원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게 되고, 그 상태에 도달하면 마음에서 무명이 제거될 것입니다. 그러면 윤회하게 하는 업을 만드는 형성(saṅkhāra. 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때 수행자는 한 순간 동안 열반을 봅니다.
그러므로 오취온을 잘 알아차려야 합니다. 줄줄 외우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수행해서 실제로 경험해 보고 알아야 합니다. 정신과 물질이 생기고 사라지는 현상을 스스로 체험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위빳사나 지혜란 스스로의 탐구와 노력을 통해서 얻어지는 통찰을 의미합니다. 계속해서 수행한 결과로 스스로 발견했을 경우에만 자아가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하고 그와 관련된 모든 의심이 제거될 것입니다. 그래야만 실체라고 불릴만한 것이 없으며, 실체인 것처럼 보이는 것은 결국 정신과 물질의 무더기일 뿐이라고 확신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깨달음을 얻게 됨에 따라 수행자는 원인과 결과의 법칙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 인과의 법칙을 계속 알아차리면 수행자는 흐름, 즉 무상한 것일 뿐인 정신과 물질이 지속적으로 생기고 사라지는 것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15. 현상들의 본성을 아는 법
현상들이 생길 때 관찰하고 주시해야만, 정신과 물질로 구성된 그 현상들의 진정한 본성뿐만이 아니라, 그것들이 생기고 사라지는 원인과 결과를 알 수 있게 됩니다. 몸이 뜨거워지는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뜨거움’에 주목해서 지속적으로 관찰하면 그 본성을 깨닫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뜨겁고 차가운 열기인 화대(火大. tezo dhātu)의 특성입니다. 열기의 본성에 마음을 집중하고 있을 때, 그것을 ‘나’라고 하거나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나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뜨거움’을 바르게 인식합니다.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몸의 ‘뻐근함’에 마음을 집중하고 있다면, 자신이나 다른 사람과 연관시키지 않고 단지 ‘뻐근함’에만 주목할 것입니다. 모든 움직임마다 그렇게 해 보십시오. 언제나 움직임을 인지하지, 움직이는 개인을 인지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그 움직임은 움직임의 요소인 풍대(風大. vāyo dhāta)에 의해서 생긴 것임을 깨달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들이 가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가고 있다는 사실을 주시해서 알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서 있거나, 앉아 있거나, 쉬고 있거나, 잠들려 하고 있을 때, ‘서 있음’을 ‘서 있음’으로, ‘앉아 있음’을 ‘앉아 있음’으로, ‘쉬고 있음’을 ‘쉬고 있음’으로, ‘잠들려 하고 있음’을 ‘잠들려 하고 있음’으로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떤 육체적 행동을 할 때마다 즉시 주시해야 합니다. 단순히 어떤 현상이 생기는 순간에 마음을 기울여서 그 사건을 주시하면 됩니다. 모든 움직임은 움직이려는 욕구가 풍대를 자극했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여러분의 지식은 책을 통해서 다른 사람의 경험을 간접적으로 얻은 것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책에서 얻은 지식에 의존하지 않고, 실제로 관찰하고, 숙고하고, 수행함에 의해서 현상들을 압니다.
번갯불을 지켜보십시오. 벼락이 치는 순간 번갯불을 지켜보면 번개의 모든 것을 스스로 압니다. 번개치기 전이나 후에 번개에 대해서 단지 마음속으로 상상하기만 한다면, 번갯불을 봤다거나 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상들이 일어날 때 스스로 실제로 관찰함으로써 그것들을 알도록 하십시오.
관찰하는 수행 초기에는 아무런 특이한 것을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규칙적으로 수행하면 잔인한 생각 등의 장애들이 제거되고, 육체적 움직임과 그것을 주시하는 마음을 명백하게 구분할 것입니다. 가고 있을 때를 예를 들어 설명하면, 자신의 마음이 가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리고 자신의 몸이 ‘가고 있음’을 구성하는 운동을 발생시키기 때문에, 수행자는 자신이 ‘가고 있다’는 것을 명확히 압니다.
염처경의 주석서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마음속에 생긴 ‘가려고 하는’ 의도가 풍대로 하여금 (몸을) 가도록 한다. 마음의 자극에 의해서 풍대의 팽창성이 전달되어 몸이 움직인다. 그러면 우리가 ‘간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서 수행자가 자신의 배의 부풂과 꺼짐에 지속적으로 주목하여 관찰해 가면, 결과적으로 집중력이 점점 더 강력해질 것입니다. 그러면 ‘배의 부풂’이라는 현상들을 구성하고 있는 계속적인 움직임들이 나타날 때 분명하게 주시될 것입니다.
초보자는 육문에서 생기는 모든 현상을 지켜보고 주목하기가 어려울 것이며 심지어는 불가능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수행자에게 배의 부풂과 꺼짐을 관찰하는 것부터 시작하라고 지도합니다.
이렇게 연습하는 동안 다른 것에 대해서 생각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것도 주시한 다음에 다시 배의 부풂과 꺼짐의 관찰로 돌아오면 됩니다. 관찰하는 동안 피로나 고통이나 뜨거움을 느끼기도 할 것입니다. 이러한 느낌을 주시한 다음에 배의 움직임을 주시하는 본래의 과업으로 되돌아오십시오.
관찰을 계속함에 따라 이 불쾌한 것들이 모두 고통 즉 불만족스러운 느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런 현상을 계속 관찰하십시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초보자는 보통 처음에는 현상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배운 대로 하나의 현상을 주시하고, 다음에는 무엇을 주시해야 할지 모르기 쉽습니다. 그런 식으로 망상하면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한 번에 하나의 대상에 대해서 집중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삼매가 강해졌을 때 즉 의지력이 강해졌을 때, 여섯 가지 감각의 문에서 생기는 모든 현상들에 대해서 집중하십시오. 많은 수행자들이 정신과 물질이 생기고 사라지는 것과 관련된 모든 현상을 주시할 수 있는데, 그것이 모든 현상의 생성과 소멸입니다.
16. 현상들의 실재를 알 때
정신과 물질이 생기고 사라지는 현상들을 지켜보기를 계속하면 그것들의 본성에 대한 지혜가 마음속에 생깁니다. 그러면 모든 생성된 현상들은 결국 없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생긴 것은 소멸되어 버립니다. 생성의 과정이 ‘우다야(udaya)’이며 소멸의 과정이 ‘와야(vaya)’입니다. 그래서 생기고 사라지는 현상을 ‘우다얍바야(udayabbaya)’라고 합니다. 정신과 물질의 의미를 완전히 식별하지 않는 한, 이 두 국면의 실재를 느끼거나 인지할 수 없습니다.
번갯불에 비유하면, 실제로 보지 않는다면 번개를 알 수 없습니다. 현상들이 생기는 것을 실제로 보지 않고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결코 알 수 없습니다. 단순히 ‘일어나고 사라짐’일 뿐이라고 아무리 외쳐도 정신과 물질에 관련된 모든 현상의 실재를 아는 지혜가 생기지 않습니다. 이를 분명히 알지 못하는 사람은 위빳사나 지혜를 얻은 것이 아닙니다.
17. 무상을 확신
정신과 물질의 실재를 알면, 현상들은 사라지기 위해서 존재 속에 나타난다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주석서에 “생성된 것은 사라진다. 그것이 무상이다”라고 했습니다. 생성과 소멸이라는 실재의 본성을 분명히 알 경우에만, 존재의 무상에 대해 확신하게 됩니다. 주석서는 계속 말합니다.
“무상을 알라. 무상의 특징을 알라. 무상을 관찰하는 방법을 알라.”
오온은 모두 무상합니다. 초전법륜경에서는 이를 오취온라고 설명했습니다. 조건 지어져서 존재 속으로 들어왔다가 사라지는 모든 현상은 무상합니다.
육문을 지켜보고 있으면 수행자는 보는 것, 듣는 것 등의 과정을 알아차릴 것이며, 결과적으로 명상의 지혜와 생멸의 지혜가 생길 것이며, 이에 의해서 무상의 법칙을 깨달을 것입니다.
들판에 집을 한 채 짓는다고 합시다. 전에는 거기에 그 집이 없었습니다. 이제 집을 지었기 때문에 그 집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젠가 무너지게 될 것이고 언젠가는 모두 사라질 것입니다. 전에는 없었으나 존재 속으로 들어온 것은 다음 순간 완전히 사라집니다.
무상이란 그런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번갯불을 보지만 다음 순간 캄캄해집니다. 번갯불이 영원합니까?
주석서는 다시 말합니다.
“생긴 것은 소멸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 무상의 특성이다.”
18. 무상을 관찰
우리들은 용모나 외모에 특징이 있어서 다른 사람과 구별될 수 있습니다. 이와 똑같은 방법으로 그 특징에 의해서 존재의 본성을 인식합니다. 특징을 알아차리기 전에는 누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이와 같이 무상의 특징을 깨닫기 전에는 무상에 대한 진정한 지혜를 얻지 못했다고 하고, 그 수행자가 무상을 관찰(aniccānupassanā)하는 단계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책에서 배운 대로 “무상! 무상!”을 아무리 외쳐도 그 단계에 이를 수 없습니다. 보거나 듣는 것을 지켜볼 때, 그리고 보거나 듣는 것이 사라지는 것을 주시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무상이 관찰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지속적으로 무상에 대해서 관찰해서 존재의 무상한 본성의 진리를 체험했을 때, 비로소 진정으로 무상의 법칙을 깨닫게 됩니다.
19. 무상으로부터 고통과 무아로
무상이 실재임을 진정으로 분명히 알았을 때, 존재의 불만족(苦)과 실체가 없다는 것(無我)도 실재임을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피상적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항아리가 깨졌을 때, “그것은 오래 가지 않기 때문에 무상하다”고 말합니다. 가시에 찔렸을 때 “아프기 때문에 불만족스럽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개념적 진리(명칭. paññatti)입니다.
우리는 궁극적 진리(實在. paramattha)에 관심이 있습니다. 무상과 불만족에 대한 지식만 가지고 있다면, 무아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주석서는 말합니다.
“무상의 특성이 인지됐을 때, 실체가 없음(무아)의 특징도 인지될 것이다. 삼법인 중의 하나를 아는 것은 그것들 모두를 아는 것이다.”
수행자가 모든 조건 지어진 현상들이 실체가 없다는 것을 봤을 때 열반에 이르는 길로 들어설 준비가 된 것입니다.
20. 열 가지 위빳사나 지혜
위빳사나 지혜에는 열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명상의 지혜”인데, 수행자는 이 지혜에 의해서 오온이 여러 가지가 모여 있는 혼합물임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됩니다. 이 지혜가 생기면, 대상의 특성이 무상, 고, 무아[三法印]라는 진리를 철저히 확신하게 됩니다.
이렇게 계속 관찰하면, 정신과 물질이 생기고 사라지는 것을 아는 지혜가 생기게 됩니다. 이것이 “생멸의 지혜”입니다. 이 단계에서 마음속의 빛을 볼 것이며 큰 기쁨을 맛볼 것입니다. 사띠의 힘은 매우 강력해져서 사띠하지 못하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의 마음은 날카로워지고 기억력은 명석해집니다. 믿음이 확고해집니다. 육체적으로 기뻐하고 정신적으로 기뻐합니다.
이 마음의 상태는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 단계에서 수행자가, 부정적인 측면으로 그러한 즐거운 감각에 집착한다면, 번뇌의 전조가 되어 더 이상 높은 단계의 지혜가 생기지 않게 됩니다. 기쁨은,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더 높은 위빳사나 지혜를 얻기 위해 힘써 노력하는 데 있어서, 힘을 받고 결심을 단단히 하는 데 다소간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더 높은 단계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기쁨이 일어날 때 단지 주시하기만 하고 모두 버려야 합니다.
빛이라든가 즐거운 느낌을 모두 버린다면, 수행자는 정신과 물질이 생기고 소멸되는 것을 분명하게 볼 것입니다. 그 다음에 아는 마음인 정신과, 감각의 대상인 물질 두 가지 모두, 그것들이 나타나자마자 금방 사라진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는 대상과 대상을 아는 마음(ārammanika) 두 가지가 쌍을 이루며 동시에 재빨리 사라진다는 것을 즉시 압니다. 이 체험이 “소멸의 지혜”입니다.
이 지혜가 생기면, 외부 자극으로부터 어떠한 느낌들이 일어나더라도, 그것들은 영원하지 않고(무상), 만족스럽지 않으며(고), 불변의 실체가 없다는 것(무아)을 수행자는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감각 대상과 관련하여 그의 마음속에 생성된 느낌들에도 적용됩니다. 이 단계에서 수행자는 영원과, 만족과, 실체가 있다는 것과 관련된 모든 관념을 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모든 조건 지어진 것들이 금방 소멸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두려워하게 됩니다. “두려움의 지혜(bhaya-ñāṇa)”가 생긴 것입니다. 여기서 모든 두려운 것은 재난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다음 단계인 “허물의 지혜(ādīnava-ñāṇa)”에 도달합니다. 여기서 기진맥진하고 모든 재난을 혐오하게 되면 “염오의 지혜(nibbida-ñāṇa)”로 이동합니다. 이 지혜가 무르익어서 거기서 빠져나오고자 할 때, 더욱더 노력하여 “벗어나려는 지혜(muñcitukamyatā-ñāṇa)”에 도달합니다. 그리고 그런 고난에서 자신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수행자의 의지가 더 계발되면, “재성찰의 지혜(paṭisaṅkhā-ñāṇa)”가 생깁니다. 이 단계에서 그는 고요함 즉 삼매를 얻기 위해 비상한 노력을 합니다. 삼매가 강화되면 모든 조건 지어진 “형성(행)에 대한 평온의 지혜(saṅkhārupekkhā- ñāṇa)”가 생깁니다.
청정도론에 두려움의 지혜와 그 이후의 지혜가 어떻게 계발되고 향상되는지에 대해서, 어부의 곤경에 비유하여 설명해 놓았습니다. 어떤 어부가 그물에 손을 넣어 보니 고기가 잡혀서 무척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꺼내어 보니 그건 물고기가 아니라 세 가지 특징이 있는 독사였습니다. 무서워서 소름이 끼쳤습니다. 그는 잡은 것이 잘못임을 깨달았습니다. 잡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 없애 버리기를 몹시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 놓아줬다가는 뱀에게 물릴 수도 있습니다. 이런 판단이 서자 그는 뱀을 머리 위로 높이 들고 세 바퀴 휘두른 다음에 멀리 던져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재빨리 달아나고 나서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삼법인(무상, 고, 무아)을 알기 전의 우리들은 자신의 정신적 육체적 존재에 대단히 집착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물고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어부처럼, “자아”에 대해서 기뻐했었습니다. 삼법인을 알게 된 다음에 가서야 비로소 공포에 휩싸이고, 잘못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고 우리가 본 것에 대해 혐오하게 됩니다. 그러면 자신의 정신과 물질에 대해서 더 이상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사실상 마음과 몸이라고 부르는 것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어 할 것입니다.
수행자는 정신과 물질을 혐오스러운 것으로 보기 위하여 위빳사나 수행을 하고, 마치 어부가 독사를 멀리 던져 버리는 것처럼, 정신과 물질이 자신을 억누르는 것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려고 하게 됩니다.
무상, 고, 무아를 알기만 하면 목표를 달성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둑카에 대해서 숙고하면 둑카를 발견하며, 둑카뿐”이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그런 주장은 경전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이 아는 무상, 고, 무아는 피상적입니다. 이런 피상적이고 개념적인 지식(빤냣띠)은 수행자의 마음속에 두려움이 스며들게 하지 못합니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현상들을 아는 데 도대체 무서워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들은 보고 싶어 하는 것을 보고, 듣고 싶어 하는 것을 듣는 것은 즐거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맛 좋다고 하고, 향기롭다고 하고, 감촉이 좋다고 하고, 그 생각을 하면 기분 좋다고 할 것입니다. 자유롭게 무슨 생각을 해도 되고 마음대로 상상해도 된다면, 사람들은 그러한 경험이 가장 즐겁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 마음속에 자신을 가둬놓고 수행해야 한다고 하면 몹시 따분해 할 것입니다. 아마도 그것이 일부 사람들이 지혜를 얻는 데 ‘쉬운 방법’을 창안하려고 하는 이유겠지요.
그러나 사실적인 측면에서 보면, 수행자에게 좋아하는 것에 대해 상상할 자유가 있는데 즐거운 생각을 못하게 하면 거부감을 느낄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 어부가 징그러운 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처럼, 수행자가 어떻게 해야 이 물질과 정신으로부터 해방되겠습니까? 따라서 소위 지식은 해탈을 추구하는 데 충분하지 않습니다. 해탈을 원하는 지혜에 의해 배양된, 존재에 대한 혐오감을 계발하는 것은, 지혜가 풍부한 사람에게도 어렵습니다.
정신과 물질에 연관된 형성으로부터 탈출하려고 할 때, 수행자는 독사를 멀리 던지려고 하는 어부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재성찰의 지혜를 사용하여 그러한 형성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려는 비상한 노력 끝에, 그는 열 가지 위빳사나 지혜 중에 가장 특별한 단계인 형성에 대한 평온의 지혜의 단계에 도착합니다.
21. 형성(행)에 대한 평온의 지혜의 여섯 가지 특징
이 조건 지어진 것인 형성에 대한 평온의 지혜에는 여섯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감각 대상에 의해 생긴 두려움이나 즐거움에 의해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중립에 관한 것입니다. 이 지혜의 단계에 도달하기 전에 수행자는 조건 지어진 것에 의해 생기는 위험을 두려워합니다. 두려움의 지혜가 생기면 현상들이 잘못된 것에 대하여, 수행자는 두려움과 불안을 몸으로 느낍니다. 그러면 마음속에 지겹다는 생각이 생겨서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갈망합니다. 그래서 혼신의 힘을 다하여 수행합니다. 그러기를 계속하면 형성에 대한 평온의 지혜가 생겨서 두려움이나 불안에 영향을 받지 않게 됩니다. 그리하여 편안함이 지속됩니다.
두 번째 특징은, 즐거운 것에 대해서 기뻐하지도 않고 고통과 걱정스러운 것에 대해서 슬퍼하지도 않는 정신적 균형입니다. 그는 이제 기쁨을 기쁨으로, 고통을 고통으로, 슬픔을 슬픔으로 주시할 수 있습니다. 또한 집착하지도 않고 화내지도 않으면서 편견 없이 감각대상을 봅니다.
세 번째 특징은 마음의 균형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가 자신의 형성을 관찰할 때, “한 가운데 위치하면서” 마음의 균형을 완벽하게 유지합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자신의 형성의 모든 대상에 대해서 중립에 머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형성에 대한 평온의 지혜가 형성의 대상에 대해서만 중립인 것은 알겠는데, “위빳사나 수행의 실제 행위에 대해서는 중립인지 아닌지?”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주석서들은 마음이 감각대상을 평온하게 보기 때문에 위빳사나의 행위도 평온으로 받아들인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보다 앞 단계의 위빳사나 지혜에서 수행자는, 감각대상이나 관찰하는 마음에 집중하기 위하여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었습니다. 이제 형성에 대한 평온의 지혜를 얻었기에, 감각대상에 초점을 맞추고, 초점을 맞추는 바로 그 행위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데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처음에 한 두 번은, 배의 부풂과 꺼짐이나 앉아 있음, 닿아 있음 등의 행위를 주시하려고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으로 준비 끝입니다. 그 다음에는 그런 노력이 필요 없습니다. 대상을 주시하는 과정과 아는 과정 두 가지가 저절로 각각 순서대로 일어납니다. 쉽게 집중이 됩니다.
이 세 가지 특징에 빠띠삼비다막가가 언급한 세 가지를 추가하기로 합니다.
네 번째 특징은 지혜의 확고한 확립입니다. 얻어진 지혜가 오랫동안 순서대로 지속된다는 것입니다. 관찰을 통해 얻어진 이보다 앞 단계의 지혜는 4~5분 지속된 다음에 여러 가지 이유로 흩어지거나 잊어 버렸었습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수행을 새로 시작해야 했었습니다. 그러나 형성에 대한 평온의 지혜가 확립되면, 처음에 관찰하려고 네다섯 번 아니면 기껏해야 열 번만 되풀이하여 노력한 다음에는, 지혜의 흐름이 힘을 잃지 않고 흐를 것입니다. 이러한 힘을 받았을 때에는 수행자는 조건 지어진 현상을 단숨에 두세 시간씩 주시하고, 알고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지혜가 얼마든지 오랫동안 확립됩니다.
형성에 대한 평온의 지혜의 다섯 번째 특징은 정제입니다. 벼를 방아에 찧어 체로 치고 또 치면, 왕겨가 다 제거되어 정제된 쌀알만 남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지혜를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연습하면 정제될 것입니다.
이 지혜의 마지막 특징은 관찰하는 마음을 스스로가 설정한 대상에만 고정시켜 흔들림 없이 머물러 있게 하는 능력입니다. 이 단계에서 마음은 만나는 많은 즐거운 감각에 빠지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다고 경전은 말합니다. 잠깐 동안은 즐거운 감각을 주목하기도 하겠지만, 오랫동안 거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마음은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않고 전과 마찬가지로 조건 지어진 현상들을 주시하고, 아는 본래의 일로 되돌아갑니다. 수행자는 그 자신 안에 있는 여러 가지 감각대상을 주시하고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의 마음은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함에 의해 분산되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상 그것들로부터 떨어져 언젠가는 그들 중에서 몇 개의 두드러진 대상만을 선택하여 마음을 집중할 것입니다.
빠띠삼비다막가에서 언급한 세 가지 특징들은, 지혜의 확고한 성취, 정제의 획득과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구축이라고 간명하게 서술할 수도 있습니다. 앞에서 설명한 세 가지와 합치면 형성에 대한 평온의 지혜의 특징은 모두 여섯 가지입니다. 수행자는 자신이 이 여섯 가지 특성을 갖추었는지 스스로 점검해 봐야 합니다. 만약 이들 중 어느 한 가지라도 부족한 점이 발견된다면, 숙달됐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며, 나아가서는 성자의 도의 단계에 도달했다고 여겨서도 안 됩니다.
22. 성자의 도과를 통한 열반 체험
형성에 대한 평온의 지혜가 무르익으면, 마음이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감각대상을 주시하게 되어 아는 과정에 속도가 붙습니다. 과정에 속도가 붙으면 마음은 활기를 띄게 되는데, 이는 마음이 집중하고 있는 대상과 함께 사라지는 단계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됩니다. 여기에 도착한 것은 정신과 물질의 형성(행)를 넘어서 열반이라는 완전히 고요하고 평화로운 행복의 정문에 들어서는 것을 나타냅니다.
밀린다왕 문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수행자가 대상에 마음을 기울여서 한 걸음 한 걸음씩 관찰해 가면, 마음은 정신과 물질이 끊임없이 생기고 사라지는 현상과 흐름을 같이 하게 되고, 드디어는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정신적 물질적 힘의 흐름이 멈추는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초기에 수행자는 자신의 마음과 몸에서 생기는 접촉하고, 생각하고, 듣고, 보는 현상과 관련된 과정을 한 걸음 한 걸음씩 주시하면서, 너무나 많아서 고려하기 힘들 정도인 여러 가지의 형성들의 특성을 발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모두 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언젠가는 모든 감각대상들과 이것들을 아는 마음이 소멸됩니다. 이 단계에서 그는 열반을 봅니다.
그래서 밀린다왕 문경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대왕이시여, 성자의 도의 전단계의 도인 위빳사나를 잘 실천한 수행자는, 정신 및 물질과 연관된 힘의 흐름이 멈추는 단계에 도달합니다. 그러면 그는 열반을 보게 됩니다.”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정신과 물질이 생기고 사라지는데 집중하는 것과, 무상 고 무아라는 삼법인을 관찰하는 것은 예비적인 전단계의 도입니다. 전단계의 단계에 도착한 다음 거기서부터 한 걸음 한 걸음씩 전진하면, 수행자는 형성에 대한 평온의 지혜에 도달하고, 거기서부터 계속 전진하여 다음 단계인 수순하는 지혜에 도달합니다. 이를 수순하는 지혜라고 하는 이유는 깨달음을 열망하는 수행자가 이 지혜를 통해서 37조도품에 자신을 잘 적응시키기 때문입니다.
이 지혜가 생기면 수행자는 성자의 도로 접어들어서 열반의 평화롭고 상쾌한 그늘에 피난처를 발견할 준비가 된 것입니다. 일단 이런 식으로 열반을 본 수행자는 사악처(四惡處)에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 수다원이 됩니다. 불변의 실체가 없다는 무아의 본성을 통찰하면 열반에 들어가며, 일단 열반을 본 수행자는 사악처에서 탈출하게 됩니다.
정리합니다. 지금까지의 설명은, 위빳사나 수행을 통하여 열반을 체험함에 의해 자신을 번뇌로부터 해방시키고, 성스러운 사문인 아라한이 되는 방법에 관한 것입니다.
자, 이제 수밧다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부처님께서는 대반열반의 날 저녁에, 이제는 경건한 마음으로 열심히 귀를 기울이는 고행자를 불쌍히 여기시어, 마지막 법문을 하셨습니다.
23. 수밧다에의 마지막 법문
부처님께서는 수밧다에게 마지막으로 이렇게 법문하셨습니다.
“수밧다여, 스물아홉의 나이에 나는 완전한 깨달음을 찾아 출가하였고, 그 이래 오십여 년이 흘렀다. 내가 그동안 가르친 법과 율을 떠나서는 팔정도의 일부로서 위빳사나 수행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거기에는 성자의 일단계인 수다원이 된 사문이 없었고, 이단계인 사다함이 된 사문이 없었고, 삼단계인 아나함이 된 사문이 없었고, 사단계인 아라한이 된 사문이 없었다. 내 가르침의 범위 밖에서는 네 가지 범주에 속하는 열두 가지 종류의 사문이 없기 때문에, 마음의 번뇌로부터 해방되고 자신들이 진정으로 안다고 주장하는 것을 아는 사문이 없다. 수밧다여, 팔정도가 있는 한 진정한 사문의 계보는 영원히 끊어지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만약 열두 가지 종류의 사문인 비구가 진정으로 잘 산다면 진정한 아라한이 단절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 고별사에서 현저하게 드러나는 것은, 다른 어떤 종교나 이데올로기에서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빳사나가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조심하십시오. 그러한 말은 위빳사나 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만약 위빳사나 수행이 빠져 있으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일반적인 다른 가르침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24. 수밧다의 자기 성찰
그러자 수밧다는 생각했습니다.
‘나의 스승이나 스승의 스승이 가르친 교리 속에는 위빳사나 수행에 대한 가르침이 없었다. 그러므로 고행자들 중에는 마음의 번뇌라는 덫으로부터 해방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들 중에는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거나, 생각하고, 무상, 고, 무아(삼법인)를 관찰하는 등의 조건 지어진 현상(형성, 행)을 주시하는 수행자가 없었다. 위빳사나 도라는 예비적인 길을 가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니 어찌 번뇌를 없애고 성자의 도에 도착한 진정한 사문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고행주의를 포기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기로 한다.’
그렇게 생각한 그는 부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의 말씀은 저를 감동시켰습니다. 세존께서는 숨겨져 있던 것을 낱낱이 설명해 주셨으며, 길을 잃은 자에게 길을 가리켜 주셨으며, 등불로 어둠을 밝혀 주셨습니다. 여러 가지 법문으로 법의 빛을 비추시어 제가 보도록 해 주셨습니다. 세존의 가르침을 들은 저는 부처님과 법과 승가를 피난처로 삼겠습니다(三歸依). 세존의 곁으로 출가하고자 하오니 구족계(具足戒)를 받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25. 부처님께서 계를 주시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밧다여, 나의 가르침이 아닌 다른 종파에 속했던 사람은 시험 기간을 거치는 것이 관례다. 나의 법과 율을 받아들여 출가하고자 하는 사람은 4개월 동안 삼보에 귀의하고 계를 지키는 것을 전제 조건으로 한다. 그 다음에 장로들이 만족하면 계를 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전제 조건을 적용해야 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안다.”
그러자 수밧다는 부처님 앞으로 다가와서, ‘다른 사람들은 4개월만 하더라도, 필요하다면 저는 4년이라도 신뢰 시험을 받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시험기간이 필요 없다는 것을 아시고, 아난다에게 즉시 계를 주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난다는 수밧다를 데리고 가서 삭발했습니다. 그리고는 몸의 32부분 중의 처음 다섯 가지의 더러움에 대한 사띠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수밧다는 황색 가사를 입고 부처님과 법과 승가를 피난처로 삼겠다고 삼귀의를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그날 바로 사미가 되었습니다.
그때는 까손 축제 기간 중의 보름날 한밤중이었습니다. 아난다는 행자를 세존께 데리고 갔고, 세존께서는 구족계를 주셨습니다. 주석서에, 부처님께서 그를 “오너라. 비구여!”(Ehi Bhikkhu)”라고 말로 부풂에 의해 비구가 되었다고 기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승가에 들어온 비구는 머리를 깎을 필요도 없고 황색 가사를 입을 필요도 없으며, 삼보에 귀의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예비 비구에게 “오너라. 비구여!”라고 말씀하시면, 삭발이나 황색 가사 입기와 비구가 갖추어야 할 번잡한 절차를 모두 갖추지 않고도 비구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수밧다는 정식 절차를 밟아서 수계한 셈입니다.
26. 수밧다가 수행주제로 수행
그리고는 부처님께서 수행주제를 주셨습니다. 초기의 주석서에는 수행하라고 어떤 수행주제를 주었는지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그러나 후에 만들어진 경전에는 위빳사나 수행주제에 대한 언급이 있고, 수밧다가 위빳사나 수행에 몰두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전에는 부처님의 말씀을 들은 적이 없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는 이제 겨우, 부처님께서 반열반에 드시기 직전에 부처님의 법문을 들었습니다.
이런 온갖 약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존께서 수밧다에게 비구가 되자마자 수행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연기의 법칙에 정통하기 전에는 수행을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그런 주장은 법에 따라서 수행하려고 마음먹은 열성적인 사람의 사기를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수밧다가 비범하기 때문에 연기의 법칙을 배울 필요가 없다는 주장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만약 이 주장이 맞는다면 비범하기는 마찬가지인 찬다의 경우는 어떻게 될까요? 그는 연기의 법칙을 배우지 않았고, 자부심이 강했기 때문에 비범함에도 불구하고 법의 빛을 볼 수 없었습니다. 세속 생활에 대한 집착이 강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인과의 법칙을 깨닫는 것이 아주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일단 이 인과의 법칙에 확신을 갖게 되고 조건 지어진 것들이 일어날 때 주시하려고 노력하면, 스스로 인과의 법칙이 작용하고 있음을 깨달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초전법륜경을 설법할 때 설명했습니다.
부처님으로부터 수행주제를 받은 수밧다는 그것을 주시하면서 수행하기에 알맞은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습니다. 그 당시에는 부처님의 제자가 너무 많아서 비구가 없는 조용한 곳을 찾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적절한 곳이란 비구가 너무 많지 않은 곳을 의미합니다. 그런 장소를 찾아가서,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왔다 갔다 하면서 수행했습니다.
수행하는 동안 걸었기 때문에 그의 수행은 사마타 수행이 아닙니다. 그가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을 관찰하거나, 아니면 몸의 32가지 더러움을 관찰하는 수행을 했었다면 정지한 상태에서 움직이지 말고 수행했어야 합니다. 까시나 수행에서는 개념화된 원형 이미지에 수행자의 마음을 집중해야 합니다. 부정관에서는 시체에 마음을 집중해야 합니다. 신성한 머묾(梵住)에 대한 수행에서는 자애(慈), 연민(悲), 같이 기뻐함(喜)과 평온(捨)에 마음을 집중해야 합니다. 이러한 수행주제들을 사용하는 수행자는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수밧다에게 위빳사나 수행주제를 관찰하라고 지시하셨을 것이라고 추측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염처경에서 가고 있을 때 가고 있음을 주시하라고 요구하는 바와 같이, 수밧다가 사띠를 확립하는 수행인 위빳사나 수행을 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걸으면서, 수밧다는 움직이는 현상들이 일어날 때마다 주시했으며, 되풀이해서 집중한 결과로 위빳사나 지혜가 생겼으며, 마침내 사무애해*를 갖춘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부처님 계신 곳으로 와서, 경의를 표하고는 거기에 앉았습니다.
*역주: 사무애해(四無碍解): 분명하게 구분해서 아는 네 가지 분석적인 통찰지(paṭisambhidā ñāna)이다.
① 의무애해(義無碍解, attha paṭisambhidā): 말하려는 의미나 결과법들을 자세히 구분해서 아는 지혜
② 법무애해(法無碍解, dhamma paṭisambhidā), 말 자체나 원인법들을 자세히 구분해서 아는 지혜
③ 사무애해(詞無碍解, nirutti paṭisambhidā): 여러 가지 언어 특히 빠알리어를 자세히 구분해서 아는 지혜
④ 변무애해(辯無碍解, patibhāna paṭisambhidā): 위의 세 가지 지혜들에 대해 자세히 구분해서 아는 지혜. 즉 어떤 상황이 발생했을 때 그것에 대한 비유, 근거, 적당한 단어들이 빠르게 떠오르는 것. 『부처님을 만나다』(일창 스님, 이솔, 2012) 484쪽 참조.
초기 종단에서는 이 모든 사건들이 이야기되었고 주목되었습니다. 법에 대해서 생각하기만 해서는 도의 지혜나 과의 지혜나 열반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마음이 가고 싶어 하는 대로 가게 내버려두고, 마음을 훈련하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으면, 팔정도의 길을 갈 수 없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이 성자의 도를 체험하지 못하고는 그 누구도 모든 번뇌로부터 해방된 진정한 성자가 될 수 없습니다.
초기 종단에서는 부처님께서 살아 계시는 동안 수밧다가 마지막으로 아라한의 지위를 얻었다는 것을 당연히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수밧다경에 대한 이 법문을 듣는 모든 수행자가
기초 단계인 근원도에서부터, 예비단계인 전 단계의 도를 거쳐,
아라한들과 마찬가지로 최종 단계인 성자의 도에 이를 때까지 수행하여
열반을 성취하기를 기원합니다.
사아두, 사아두, 사아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