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법각지
가. 구나라타나 스님 “대념처경 법문” 중에서 - 법에 대한 고찰
그러면 고찰이라는 것은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인가? 무엇보다도 질문을 해야 합니다. 의심이 일어나면 그 질문을 묵살하지 말고 질문하십시오. 그 질문의 대답은 다른 사람에게 가서 대답을 찾으려 하지 마십시오. 절에 가서 해답을 찾으려 하지도 말고, 책에서 찾으려 하지도 말고, 멀리 있는 타인에게서 답을 구하려 하지도 말고, 자신에게서 가장 가까운 곳, 집 주변에서 답을 찾도록 하십시오.
예를 들면 어떤 남자가 있었는데 그는 일주일에 한번 당나귀를 타고 국경을 넘어가곤 했습니다.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넘어갈 때에는 이민국에서 나온 사람이 항상 조사를 합니다. 갈 때마다 그 사람의 모든 소지품을 조사했지만 밀수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사람이 국경 부근에 큰 집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이민국 사람이 보니 밀수한 것이 없는데 어디서 돈이 생겨서 저것을 짓는지 궁금해서 하루는 그에게 가서 물어봤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큰돈이 생겼소?” 그랬지만 그는 대답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나는 이제 더 이상 이민국에 근무하지 않으니 그냥 이야기해도 좋소.”라고 말하니 좀 머뭇거리다가 대답했습니다.
“내가 돈을 번 것은 바로 그 당나귀였소. 당나귀를 다른 나라에 가서 팔아서 돈을 벌었소.”
이는 당나귀가 가장 눈에 띄는 것인데 그대로 보내 주었기 때문에 돈을 번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보통 사람이 언제나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 확실한 것을 보지 않으며, 가장 중요한 자기 자신에게는 관심이 없고 다른 사람에게만 관심이 많습니다.
“저 사람 저렇게 화가 많으니 내가 가서 도와 줘야지. 저 사람은 자아가 강하니 내가 불자로서 가서 자아를 깨 줘야지.”
항상 남의 것만 보고 가장 뚜렷한 것, 나한테 가장 뚜렷하게 보이는 나 자신의 오온을 항상 놓치곤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자기 자신의 존재, 자신의 오온부터 보도록 해야 합니다.
법의 고찰이라는 것은 우리와 상관없는 곳에 있는 것을 고찰하는 것이 아니고, 전혀 우리가 전혀 들어 보지 못한 이상한 단어를 붙여 놓은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매일매일 실제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하는 고찰입니다. 질문입니다. 항상 질문하십시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에게 괴로움이 있는가? 괴로움이 어디에 있는가? 괴로움이 어디에서 생겼는가? 괴로움을 없애는 방법은 있는가? 그리고 나는 괴로움에서 해방되어 있는가? 내가 지금 화내고 있지 않은가? 나는 지금 질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왜 두려워하는가? 이 욕심은 무엇인가? 탐심이란 무엇인가?”
이런 것들을 자기 자신에게 물어 보는 것, 이것이 바로 법에 대한 고찰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왜 저 사람은 저 모양인가? 왜 그 사람은 그 모양인가?”와 같이 다른 사람의 문제를 찾으려 하지 마십시오. “왜 내가 이러한가?”하고 자신의 문제에 대한 답을 추구하십시오. 그리고 이것들은 엉뚱한 곳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사띠를 계속하시면 이러한 질문은 자연히 일어나는 사띠의 결과가 됩니다.
다시 또 예를 들면, 만약에 여러분에게 신심이 없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 경우에 “왜 나에게 신심이 없을까? 신심이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 부처님께서 그런 훌륭한 능력을 가진 분이라고 내가 실제로 믿고 있는가?”라고 자문해 보고, 또한 가르침에 대해서는 “과연 부처님의 가르침이 나를 이끌고 있는가? 가르침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라고 질문해 보십시오. 그 대답은 다른 데 가서 찾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에게 물어서 찾습니다.
지난번에도 말씀 드렸지만, “와서 보라. Come and see.”를 다시 한 번 기억하십시오. 오라고 그랬는데 “누가 초청장을 보냈는가? 어디로 오라는 것인가? 무엇 때문에 오라는 것인가?”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십시오. 누가 보냈습니까? 진리, 법이 여러분에게 초청장을 보냈습니다. 어디로 오라는 것입니까? 결국은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라는 초청장이지요. 그리고 법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바로 고집멸도 사성제가 법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생활하는 매 순간에 법을 질문하고 이해하고 알고 오로지 여러분 가운데서 오로지 깨어 있는 마음으로 항상 “와서 보라” 스스로 와서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법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입니다.
법에 대한 고찰에 대해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법에 대해 파고들어서 탐구하는 것입니다. 마치 연구실에서 연구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어디에 가서 무엇을 연구하는 것인가? 바로 우리 자신의 오온으로 돌아와서 오온을 탐구하는 것입니다. 오온은 우리의 연구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마라의 덫에 걸릴 것입니다.
이에 대한 좋은 비유가 있습니다. 논에 사는 메추리(quail)가 논에서 벗어나서 들에서 놀고 있는데 매가 쏜살같이 하강하여 잡아채서 하늘로 올라가니 메추리가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오늘 운이 나쁜 날이구나. 내가 만약에 우리 동네에만 있었어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그러자 매가 물었습니다. “너의 동네가 어디냐?” 그러자 “우리 동네는 저기 논이다.”고 하자
“그러면 내가 너를 거기다 놓아 주겠다. 그러나 내가 내일 다시 오겠다. 그래도 나에게 잡히면 너는 꼼짝없이 내 밥이 되어야 한다.”라고 매가 말하고 놓아주었습니다. 다음 날 매가 와 보니 과연 메추리가 논 두럭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메추리를 잡으려고 쏜살같이 하강했습니다. 메추리는 매가 내려오는 것을 보고 자기 동네를 잘 아니까 금방 땅 속으로 숨어버렸습니다. 매는 메추리를 잡지 못하고 가버렸습니다.
바로 이와 같이 오온이 우리의 동네이고 우리의 수행처입니다. 항상 우리 자신의 오온을 보면 아무리 마라가 우리에게 나타나서 우리를 잡으려 해도 금방 피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항상 자기 자신으로 돌아와서 오온을 고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오온에 가서 연구하려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의 오온이 바로 여러분들의 집이요 수행처입니다. 그것을 연구하십시오.
여러분들이 자신의 속으로 돌아와서 자신의 오온을 탐구하면 그 안에 모든 것이 다 보입니다. 즉 선업을 일으키는 현상들, 불선업을 일으키는 현상들, 그리고 나타나지 않은 것들,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것들,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 그 무엇이든 오온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계속 그렇게 고찰하면 여러분 마음속에 열정이 생기고 에너지가 생깁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속에서 법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자신의 마음속을 고찰해서 그 안에 있는 현상을 보기 전에는 아마도 여러분들이 책을 통해서 무엇인가 탐구하여 알고자 할 것입니다. 이 책 저 책, 여기 저기 온갖 책들을 전부 보고 있지만, 아무리 책을 보아도 결국은 여러분 자신 속을 고찰해서 현상을 보기 전에는 법을 볼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으로 돌아와서 법을 볼 때, 그때 비로소 기쁨과 함께 많은 용기와 그리고 에너지가 솟아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법에 대해서 고찰을 하기 전에 중요한 것은 그 전에 있는 사띠를 제대로 해서, 선명한 사띠를 가지고 고찰해야 합니다. 만약에 선명한 사띠로 고찰하지 않으면 자신의 단점, 자신의 화, 자신의 여러 가지 부족한 점을 발견할 때 아주 비관적으로 되고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고 싶지 않게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무엇보다도 먼저 선명한 사띠를 가지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그래서 자신 안에 있는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그런 힘이 있어야 합니다.
나. 우 떼자니야 사야도 “알아차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중에서 -
현상의 조사(담마위짜야), 칠각지(봇장가)와 분명한 앎(삼빠잔냐)
수행자: 책 『번뇌를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에는 “현상의 조사(담마위짜야)”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야도께서는 “Be Aware Intelligently(지혜로운 알아차림)”라는 장에서 그것을 설명하신 것 같은데 맞습니까?
사야도: 맞습니다.
수행자: 담마위짜야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서 좀 더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야도: 위빠사나 수행은 지성이 일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담마위짜야가 아주 중요합니다. 위빠사나의 목표는 지혜입니다. 지혜를 얻고자 한다면, 지혜를 가지고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혜를 좀 더 얻으려면 지혜를 투자해야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가끔 수행자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우리는 모두 범부(뿌툿자나, 보통 사람)이며, 범부의 정의는 ‘번뇌로 가득 찬 사람’입니다. 그러니 당신이 어떻게 번뇌 없이 나의 수행법을 따르겠습니까?”
번뇌로 가득 차 있기에 번뇌 없이 수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어디서 시작해야 하겠습니까? 범부는 아모하(지혜)에 대한 정보를 알고 수행을 시작해야 합니다. 비록 모든 범부들이 번뇌로 가득 차 있기는 하지만, 약간의 지혜도 가지고 있습니다. 불교는 세 가지 종류의 지혜인 문혜, 사혜와 수혜를 구분해서 설명합니다. 문혜는 정보, 일반적인 지식이고, 사혜는 지성과 이성적인 마음과 논리와 추론을 사용하는 것이며, 수혜는 통찰지입니다. 담마위짜야는 사혜에 속합니다.
담마위짜야를 사용하는 능력은 이디에서 올까요? 정보에서 오며, 우리는 많은 바른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일단 이러한 기본적이고 일반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생각하는 법을 알게 됩니다. 나 자신에게는 많은 정보와 조언을 주신 아주 훌륭한 스승이 계셨고, 나는 그것을 내 수행에 적용할 수 있었습니다.
스스로 배우라고 스승께서 나에게 주신 일종의 “간격(space)”에 대해서 대단히 고맙게 생각합니다. 수행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면 나는 언제나 사야도님께 가서 그것을 모두 말씀 드렸지만, 스승께서는 자주 “왜?”라고 묻기만 하셨습니다. 나는 대개 답을 몰랐는데 스승께서는 즉시 대답해 주시는 적이 없었습니다. 나는 너무나도 알고 싶었기 때문에, 답을 찾는 데 모든 힘을 쏟아 부었습니다.
이런 종류의 조사를 하려면 알아차리기만 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머리를 많이 써야만 했었습니다. 이것이 지성적인 조사인 담마위짜야입니다. 나는 알기를 원했고, 이것은 나에게 항상 - 게임 이상으로 - 아주 건설적인 도전이었기에, 답을 찾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사용했습니다. 나는 보통 답을 찾았지만 항상 정답은 아니었습니다. 스승께서 내가 답을 못 찾는 것을 아시면, 현상들을 나에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칠각지(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 봇장가) 가운데 세 가지는 원인이고 네 가지는 결과입니다. 원인은 사띠(염각지, 念覺支), 담마위짜야(택법각지, 擇法覺支), 위리야(정진각지, 精進覺支)입니다. 당신은 이것들을 ‘입력’시킬 수 있습니다. 즉 이것들을 능동적으로 행할 수 있습니다. 결과는 삐띠(희각지, 喜覺支), 빳삿디(경안각지, 輕安覺支), 사마디(정각지, 定覺支), 우뻭카(사각지, 捨覺支)입니다. 우리는 이것들을 만들어낼 수 없고 일어나게 할 수 없습니다. 세 가지 지혜를 설명할 때, 담마위짜야가 사혜에 속한다고 말했습니다. 칠각지 중의 우뻭카(평온)는 수혜에 속합니다. 이 평온은 진실한 이해로 인해 생기는 것입니다.
지성 혹은 지혜는 위빠사나에 필수입니다. 담마위짜야는 일종의 지혜이므로 아주 중요합니다. 위빠사나는 지성적이며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을 위하여 일합니다. 그들은 쉽게 이해합니다. 즉 내적인 지혜가 많은 사람, 사혜에 강한 사람에게 수혜는 아주 쉽게 나타납니다. 사혜, 추리하는 능력, 논리적인 능력 등이 약한 사람들은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사혜가 약한 사람들은 문혜에 많이 의지해야 합니다. 많은 정보를 수집할 필요가 있으며, 다른 사람들의 조언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답을 알아낼 수 없으므로,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일러줄 필요가 있습니다.
경전에 의하면, 담마위짜야가 생기려면 다음 일곱 가지 조건이 갖춰져야 합니다.
① 계속 담마에 대해 질문하고, 담마의 성품을 주제로 이야기하고, 조사하고, 그것들에 대해서 생각하기
② 소유물들을 안팎으로 깨끗이 하기. 이렇게 하면 마음이 청정해집니다. 마음의 청정은 지혜를 생기게 하는 조건의 하나입니다. (밖을 깨끗이 한다는 것은 - 가능한 정도까지 - 몸과 환경을 깨끗이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의 번뇌들을 깨끗이 하는 것, 즉 안을 깨끗이 하는 것입니다.)
③ 다섯 가지 마음의 기능(오력)의 균형 잡는 법 배우기. (여기서는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이 오력을 인지할 수 있고, 그것들의 균형을 잘 잡을 수 있도록 어느 것이 너무 많고 어느 것이 너무 적은지 알아야 합니다.)
④ 지혜가 없는 사람들 피하기.
⑤ 지혜가 있는 사람들 사귀기.
⑥ 심오한 지혜 관찰하기, 보다 더 심오한 현상들을 관찰하거나 성찰하기.
⑦ 지혜를 증장시키겠다는 욕구 갖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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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자: 담마위짜야와 분명한 앎(사띠-삼빠잔냐)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네 가지 분명한 앎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사야도: 그것들은 모두 지혜입니다. 염처경에 사띠와 함께 분명한 앎인 삼빠잔냐가 함께 있어야 한다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네 가지 삼빠잔냐들은 모두 지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아주 간단히 설명하면, 첫 번째 것(삿타까 삼빠잔냐)은 적합성을 이해하는 것이고, 두 번째 것(삽빠야 삼빠잔냐)은 유용성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문혜와 사혜에 속합니다. 그것들은 실제 수행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수행이 관성을 받고 이해가 증가하면, 세 번째 삼빠잔냐인 고짜라 삼빠잔냐를 체험하는데, 있는 것은 단지 정신과 물질의 과정뿐이라는 것, 그리고는 거기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것인 아삼모하 삼빠잔냐는 아닛짜(무상) 둑카(고) 아낫따(무아)를 이해함을 의미합니다. 뒤의 두 가지는 수혜에 속합니다. 무엇이 적합하고 무엇이 유익한지를 이해하는 앞의 두 가지는 원인이고, 뒤의 두 가지는 결과, 즉 일어나는 통찰지입니다.
첫 번째인 삿타까 삼빠잔냐는 적합성에 관한 것입니다. 지금 즉시 해야 하는 가장 적절한 것은 무엇입니까? 두 번째 것은 유용성에 관한 것입니다. 지금 즉시 적용해야 하는 가장 유익한 것은 무엇입니까? 해야 할 가장 좋은 일은 무엇인 것 같습니까? 이 모든 것이 담마위짜야입니다. 당신은 지금 이 순간 일하고 있는 마음을 보고, 전체 그림, 즉 알아차림의 장(場)에서 마음이 어떻게 힘을 쏟고 있는지, 마음이 대상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등을 봅니다. 그리고는 마음은 스스로에게 “나는 지금 즉시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고 묻습니다. 단지 현상들을 조용히 응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내가 ‘있는 그대로 주목(bare attention)'이라는 말에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 이유입니다.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앞의 두 가지 삼빠잔냐는 아주 상식적인 지혜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수행하고 있을 때 일하고 있는 지혜이며, 그것은 당신에게 어떤 일을 하는 방법을 일러주는 지혜입니다.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 적합한가? 이런 식으로 한다면 유익한가? 예를 들면 힘을 더 많이 쏟는 것이 수행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을 함에 있어서도 이 상식적인 지혜는 일하고 있는 것이어서, 무슨 일을 하려고 할 때 현명하게 결정하도록 당신을 돕고, 그것이 적합한지 아닌지 유익한지 아닌지를 분명하게 보도록 돕습니다.
수행자: 저는 아직도 사띠-삼빠잔냐와 담마위짜야가 어떻게 다른지 잘 모르겠습니다.
사야도: 그것들은 서로 중복되는 부분이 있는데, 앞의 두 가지 삼빠잔냐가 담마위짜야입니다. 나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고짜라 삼빠잔냐에 대해서 다른 방식으로 좀 더 설명하면, 마음이 개념보다는 현상들의 성품에 점점 더 많이 주의를 기울일 때 고짜라 삼빠잔냐가 작용하기 시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는 수행에 관성이 있을 때 일어납니다. 마음이 상황의 개념이 아닌 실재를 보는 것이 거의 자연스럽게 됩니다. 법의 성품은 지혜의 방목장(放牧場. 고짜라의 원래 의미가 방목장임)이 됩니다. 이런 식의 알아차림이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다면, 아닛짜(무상)와 둑카(고)와 아낫따(무아)의 성품은 더 이상 오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무상 고 무아를 진실로 이해하지는 않고 사람들은 그것을 숙고하느라고, 즉 수행을 통한 진정한, 체험적인, 직관적인 이해를 하지 않고,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느라고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그래서 나는 법문할 때 무상 고 무아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조차 좋아하지 않습니다. 수행자들이 체험을 이야기할 때, 나는 그들이 무상이나 무아를 봤다는 이야기보다 (이는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무엇을 지켜보았거나 체험했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을 더 선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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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야도: 단지 고요하기만 한 것, 그리고 계속 알아차리려고 노력만 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오근이 모두 있는지 없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나는 내가 하고 있는 것에 대한 확신이 있는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진정으로 아는가?” 오근이 일하고 있는지 아닌지, 그리고 그것들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지 아닌지, 당신은 체험으로 항상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수행자: 칠각지는 어떻습니까? 칠각지도 항상 점검해야 합니까?
사야도: 그렇습니다. 칠각지는 원인과 결과로 나뉩니다. 당신은 원인인 사띠(알아차림)와 위리야(노력)와 담마위짜야(지혜)만 점검하면 됩니다. 노력에 특히 주의해야 합니다. 노력이 세 가지 중에 어려운 것입니다. 알아차림과 지혜는 언제나 건전한 것이기 때문에 (즉 번뇌가 없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지만, 노력은 아주 문제가 됩니다. 번뇌와 함께 하는 노력은 잘못된 노력입니다. 대부분의 수행자들은 일종의 욕구를 가지고 노력하기 때문에, 번뇌를 가지고 노력합니다. 욕구에는 두 가지 종류, 즉 불건전한 욕구인 로바(탐욕), 그리고 건전한 욕구인 찬다(열의)가 있습니다. 당신은 로바로 노력하는지 찬다로 노력하는지 아주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로바를 가지고 노력하면 긴장하게 되고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성공하면 행복하겠지만, 실패하면 속상하고 나아가서는 우울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찬다(현명한 욕구, 영적 성장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노력하면 당신은 고통스럽지 않을 것이고, 마음은 강력해질 것입니다. 성공해도 들뜨지 않고, 성공하지 못해도 속상하지 않습니다. 이는 바른 노력의 결과입니다. 바르게 노력하면 당신은 결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시도하기를 되풀이합니다. 그러므로 바른 동기를 가졌는지 자신의 마음을 계속 점검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질문하고 그 대답을 탐구하는 것은 담마위짜야에 도움이 됩니다. 염처경의 주석서들에 의하면 칠각지 별로 수행자가 조사해야 할 질문이 네 가지씩 있습니다. 예를 들어, 수행자는 언제 염각지(사띠)가 있는지, 언제 없는지, 왜 그것이 있는지, 그리고 왜 그것이 계발되고 있는지 알아야만 합니다. 이 질문들은 각기 다른 수준의 이해를 반영합니다. 어떤 것이 있는지 없는지를 인지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지만, 마지막 질문 두 개는 여러 가지 수준의 다양한 대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수준의 이해는 모두 어려울 수 있습니다. 스스로에게 그러한 질문을 해서, 스스로 현상들을 이해하고, 다른 사람과 의견을 나누는 것은 모두 지혜를 성장시키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런 식의 탐구는 담마위짜야를 생기게 하는 원인 중의 하나로 간주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