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무’-조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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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중
불교신문 2015.03.17. 12:15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 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버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청록집’
종교의식 시화 성공한 최고 절창
한 밤중 대웅전 앞마당서
벌어지는 승무 의식 표현
‘나빌레라’ ‘파르라니’ 등
우리말의 극치 보여준 시
조지훈(1920~1968)은 동국대의 전신인 혜화전문 출신으로 불교를 전공한 시인이다. 또한 강원도 월정사 강원의 강사와 동국역경원 역경위원을 지낸 불교학과 유학에 정통한 최고의 선지식이다.
조지훈의 ‘승무’를 이해하려면 한국 전통무용 중의 하나인 승무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승무란 부처님께 예배와 공양을 올리는 데 몸짓과 손짓으로 하는 춤을 통하여 부처님을 기쁘게 하고 번뇌를 해탈하는 뜻이 담긴 무용이요, 불교의식이다.
승무는 불교적인 색채가 강한 한국의 민속무용으로 승려가 머리에 흰 고깔을 쓰고, 어께에 붉은 가사를 걸치고, 남색 치마에 흰 저고리와 흰 장삼을 걸치고 추는 춤이다. 머리에 고깔을 써서 얼굴을 확연히 볼 수 없게 한 점은 관객에게 아첨하지 않으려는 예술 본연의 내면적인 멋을 자아내는 춤이다. 조지훈은 이러한 가장 한국적이고 예스러우며 아름다운 승무를 포착했다. 승무의 춤사위는 우리나라 춤의 백미이다.
시인은 ‘시작(詩作)의 과정’에서 이 시를 창조하기 위해 수원 용주사에서 승려가 고깔을 쓰고 승무를 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아 그 모습을 시로 표현하기 위해 열 달을 씨름하다가 김은호 화백의 ‘승무도’를 보고 마침내 시를 창작하였다고 시 창작 과정을 밝혔다.
나비가 춤을 추는 형상을 표현한 춤이 나비춤이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어 하늘로 날아가는 장엄하고 기적적인 모습을 몸짓 특히 손짓을 통하여 연출한다. 이는 중생이 부처가 되는 과정을 상징하는 것이다. 시인은 이를 아름다운 우리말 ‘나빌레라’로 표현했다.
이 시의 무대는 “빈 무대의 황촉 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는 삼경인데”에서 볼 수 있듯이 오동잎 떨어지는 가을 밤 달과 별이 떠있는 한 밤중에 대웅전 법당 앞마당에서 벌어지고 있는 승무 의식이다. 젊은 미모의 여승이 긴 소매의 흰 옷을 입고, 얇은 비단으로 만든 하얀 고깔을 쓰고 외씨버선을 신고 나비춤을 춘다. 감추면서 보여주는 숨김의 미학이다.
망자(亡者)를 극락으로 천도하려는 정성스런 여승의 춤사위가 오히려 자신이 출가 전 속세에서 시달린 번뇌를 삭이고 녹여내는 간절한 마음이 하늘에 떠있는 별빛에 닿아 있다.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음 마음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고”에서는 번뇌를 승화시켜 거룩한 종교의 법열의 세계에 이르게 하고 있다.
여승은 출가 전에 세상사의 번뇌를 떨어내고 검은 눈동자를 부처님이 계신 별빛나라에 집중하고 마음속에 합장하여, 마치 중생이 부처가 되는 승화의 기쁨과 환희를 표현하고 있다. 번뇌를 녹여내서 깨달음으로 승화시켰다.
‘나빌레라’‘파르라니’ 등 고유어를 구사하여 아름다운 우리말의 극치를 보여주는 시이다. 조지훈은 우리의 전통적 고전미와 멋을 가장 잘 살리는 시인이다. ‘승무’는 종교의식을 우아하게 시화(詩化)한 불교시 가운데 최고의 절창이다.
김형중 동대부중 교감·문학박사 ililsihoil1026@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