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 축소판' 아파트, "저는 그곳의 경비원입니다"
https://news.v.daum.net/v/20210820162553293
조해람 기자
경향신문 2021. 08. 20.
한때는 ‘대표님’ 소리를 들었다. 고급 아파트에 살면서 무역회사 사장 명함을 들고 해외를 오갔다. 잘 나가던 삶은 한순간에 고꾸라졌다. 사업이 망하고 집도 경매로 넘어갔다. 극단적인 생각도 들었지만 한 번만 더, 악착같이 살기로 했다. 친구에게 10만원을 빌려 경비 학원에서 자격증을 따 2018년 아파트 경비원으로 취직했다.
유니폼을 입은 지 어느덧 3년, 그는 세상을 원망하고 있을까. 그는 “경비원이 되면서 많이 똑똑하고 겸손해졌다”며 “나락에 떨어지고서야 전에는 보이지 않던 타인의 삶이 눈에 들어온다”고 말했다. 경비실에서 이면지에 적어내려간 에세이를 엮어 책을 냈다. 경비실에서 바라본 한국사회는 어떤 얼굴일까. 지난 6월 <나는 아파트 경비원입니다>를 펴낸 최훈(필명) 작가를 20일 경기 용인시에서 만났다.
■‘갑질’에 치이고 ‘해고’로 마음 졸이고
탄탄대로였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대학을 나오고, 이름 있는 건설회사에 취업해 1980년대 건설업 황금기를 맛봤다. 2004년에는 무역회사를 차렸다. 곧게 뻗은 삶은 2015년 반대로 꺾였다. 빚쟁이에게 넘어간 집을 뒤로하고 집안 손아래 동생 사무실 한켠에 살림을 마련했다. 필사적인 심정으로 경비원 면접을 보러 다닌 끝에 2018년 경비원 일을 시작했다.
한때 ‘갑’이었던 그가 ‘을’이 되자 생전 처음 겪는 갑질이 쏟아졌다. 갑을관계는 상대적이지만 ‘절대 을’인 경비원에게는 갑질이 유독 가혹하다고 했다. 인테리어로 짐을 빼던 어떤 집에서는 대형폐기물 처리 비용을 얘기하다가 “아침부터 턱 들이밀고 돈, 돈 해야 돼냐”는 욕설을 들었다. 최 작가보다 스무 살은 아래로 보이는 주민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목까지 찼는데 못했죠. 감정을 가지면 경비 일을 못해요. 빨리 잊어야 하는데 보통 며칠은 가죠.” 갑질하는 사람은 극히 일부라고 믿고 싶어도, 밖에서는 ‘을’일 사람이 아파트에서 갑질을 하는 모습을 보면 속이 상한다.
아파트에서 경비원은 죄가 없어도 죄인이다. 최 작가는 “입주민과 트러블이 있을 때, 누가 봐도 경비원 잘못이 아니어도 사과해야 한다. 지난 3년간 일하는 동안 관리실은 단 한 번도 경비원 편을 들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3개월마다 돌아오는 계약기간을 무사히 넘길 수 없다. 경비원은 본사-관리회사-관리실-경비초소로 이어지는 먹이사슬의 맨 아래에 있다.
그의 눈에 아파트는 ‘한국사회의 축소판’이다. 바깥세상의 촘촘한 격차는 아파트에서 그대로 재현된다. 8월 말이 되면 경비초소는 에어컨을 꺼야 하지만 관리실 직원들은 9월에도 냉방병 걱정에 가디건을 입는다. 동대표들은 당선 후 목이 뻣뻣해지는 국회의원의 모습과 겹친다. “좋은 동대표들도 많지만, 동대표 되는 순간 주차를 아무렇게나 하는 분들이 있어요. 저희는 동대표 차를 다 기억하고 있어요. 아무렇게나 주차해도 건드리지 않으려고요.”
■“투명인간이 보이기 시작했다”
올해로 66세.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고된 일이지만 최 작가는 “배우는 게 더 많았다”고 했다. 회사 대표 시절에는 보이지 않던 시설노동자, 필수노동자들의 삶이 보인다. 투명인간의 ‘투명 마법’이 풀리듯 그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고 최 작가는 말했다. “예전에는 위만 보고 살았는데, 몸이 낮아지니 그제서야 눈도 낮아졌어요. 대리기사도 이웃으로 보이고, 연세 든 미화원은 선배님으로 보여요. 낮아지고 나서야 비로소 볼 수 있다니 참 바보 같죠.”
아파트 밖 시설노동자들의 삶에도 공명할 수 있게 됐다. 최근 필기시험 등 직장 내 괴롭힘과 과로에 시달리다가 서울대 휴게실에서 숨진 채 발견된 청소노동자의 사연이 특히 안타까웠다. 최 작가는 “시험이 익숙한 세대에게는 필기시험이 익숙하겠지만 청소노동자 분들은 학력이 낮은 경우가 많다”며 “그들에겐 시험이 고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설 자리가 없구나’라는 모멸감과 절망이 컸을 것”이라고 했다. 최 작가의 경비실 동료 중에도 영어로 된 자동차 상표를 찍어 보내며 읽어달라는 이가 있었다.
지난 6월 에세이 <나는 아파트 경비원입니다>를 펴낸 경비원 최훈(필명) 작가가 20일 자신의 책을 들어 보이고 있다. 조해람 기자
지난 6월 에세이 <나는 아파트 경비원입니다>를 펴낸 경비원 최훈(필명) 작가가 20일 자신의 책을 들어 보이고 있다. 조해람 기자
세상에 ‘남의 일’은 없다고 그는 말한다. “더불어 사는 사회인데 ‘저 사람은 남이야, 내 일 아니야’라고 말할 수 있나요. 살아보니 그렇지 않아요. 저도 경비원 될 줄은 몰랐거든요(웃음).” 경비원이 갓 됐을 때 ‘내가 밑바닥이다’라고 생각한 게 얼마나 건방졌는지 깨닫는다고 한다. “사회적으로 약자들이 많잖아요. 장애인도 그렇고 시설노동자도 그렇고. 자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봐 주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어요.”
코로나19가 기승인 요즘은 어린 아이들이 그렇게 안타깝다.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에게 마스크를 쓰라고 할 때마다 속으로 운다. “너무 안타깝죠. 아이들은 천사인데….” 꼬마들의 마스크 속 미소를 떠올리는 그의 눈가에 얇은 물기가 잠시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