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온 아프간 이방인, 심신건강 관리 시스템 마련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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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2021.09.04 00:21
2014년 아프가니스탄의 23세 여성 카테라는 국영TV에 나와 10년 이상 지속한 친아버지의 성폭행으로 다섯 번 출산했고 여섯 번째 아이를 임신 중이라는 사실을 폭로한다. 처음 태어난 네 명은 출생 직후 부친이 사막에 버려 다섯째 딸만 키우고 산다. 그간 친부의 만행을 15명의 율법학자와 상의하며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14명은 “부패한 현 정부의 경찰과 법원은 도움을 안 줄 것”이라며 “탈레반이 재집권하면 아버지를 투석형(投石刑)에 처할 수 있다”는 말만 반복한다. 다행히 15번째 만난 율법학자가 “현 상태에서 유일한 해결책은 방송을 통해 피해 사실을 공론화시키는 일”이라며 출연을 주선해 공개적인 친부 고발이 가능했다.
한국 온 아프간인 61%가 미성년자
방송이 나가자 가해자가 구속됐는데 이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학대받은 여성 편에서 정의가 구현된 첫 번째 사건으로 불린다. 2009년 여성을 학대한 가해자를 처벌하는 법은 도입됐지만, 오히려 피해 여성이 죄인으로 몰릴 위험이 크다 보니 집행된 적은 없었던 것이다.
시간이 흘러 카테라의 뱃속 아이가 태어나 유전자검사가 진행됐고 가해자가 아버지임이 확인됐다. 그래도 판사는 유전자검사는 부족한 증거라며 아버지의 강간을 입증하라고 또다시 그녀를 압박했다. 카테라는 “탈레반이 통치하는 사회라면 아버지는 처형될 텐데...”라며 눈물로 탄식한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이후 우여곡절 끝에 2015년 카불 법원에서 재판이 열렸고 유전자 결과가 기자들에게 공개됐다. 검사는 가해자에게 사형을 구형했지만 이후에도 카테라는 투옥 중인 부친과 친척들의 지속적인 살해 위협을 받고 수시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다행히 법률 자문가 등의 도움으로 그녀와 두 자녀는 프랑스 비자를 받아 가해자 집단을 떠날 수 있었다. 공항 대합실에서 카테라는 “TV에 출연하기 전에는 누구도 내 말을 안 들었다. 아프가니스탄에는 나 같은 피해를 보는 소녀들이 수천 명은 더 있을 것”이라는 말을 남긴다.
사라 마니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침묵하는 여성들을 위하여(A Thousand Girls Like Me)’는 카테라를 통해 아프가니스탄 주민들의 암담한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2001년 발생한 9·11 테러로 시작된 미국과 아프가니스탄의 20년 전쟁이 끝나면서 지난주 국내에도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의 정부기관 업무를 도와준 조력자와 가족 390명이 입국했다. 국내 거주 외국인 약 200만 명에 390명이 더해진 셈이지만 탈레반 정권의 폭력성과 극적인 카불 탈출 작전으로 국민적 이목이 쏠리고 있다.
역사적으로 아프가니스탄과 한국은 인종·언어·종교·풍습 등이 달라 교류가 드물었다. 조력자들이 전형적인 이방인 집단으로 비치기 쉬운 이유다. 통상 이방인에 대한 반응은 소규모 전통사회일수록 심하게 경계하고 배척한다. 자신들의 영역과 자원을 노리는 침입자나 염탐자로 보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문화인류학자 재레드다이아먼드도 “뉴기니 사회에서 낯선 사람은 적대적 부족의 일원으로 보고 우호적으로 대하지 않는다”고 밝힌다.
이방인에 편견 없어야 선진국
문명화가 진행되고 공동체 규모가 커지면서 이방인에 대한 시각은 변화를 거듭해왔다. 특히 사람의 이동이 늘고 공동체 규모가 수십만, 수백만이 되자 수시로 이방인을 만나게 됐고 두려움이나 경계심도 점차 사라졌다. 특히 화폐가 통용되는 시장경제가 발달하면서 이방인은 잠재적인 동업자, 소비자, 공급자, 고용주 등 다양한 역할로 사회에 기여하는 긍정적인 존재로 부상했다. 현실적으로 우리 사회도 선진 대한민국으로 나아가려면 이방인에 대한 편견을 멀리하고 그들을 미래 한국에 도움이 될 인적 자원으로 봐야 한다. 이방인의 국내 정착은 더는 개개인의 선호도나 선악의 판단이 필요한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낯선 땅에 온 이방인은 언어·인종·종교·문화 등이 다른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때까지 크고 작은 어려움과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점이다. 문화 정신의학적으로 이방인(이주민)들은 개개인의 성격·태도·적응 능력뿐 아니라 그들을 대하는 사회 분위기 따라 현지 적응 과정을 통해 거부·통합·동화·주변화 등 다양한 형태의 문화변용 현상이 나타난다. 〈표 참조〉 따라서 그들이 한국 문화를 거부하거나 반감을 가지지 않고 자연스레 통합될 수 있도록 체계적인 지원을 해줘야 한다.
우선 한국인 누구에게나 제공되는 심신 건강 관련 정보는 충분히 제공하고 필요한 경우 현실적인 도움을 줘야 한다. 특히 언어 장벽으로 간과하기 쉬운 정신건강은 전문가의 주기적 진료뿐 아니라 약물치료, 정신치료, 정신 재활치료가 병행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이번에 입국한 아프가니스탄인들은 61%(238명)가 앞날이 창창한 18세 미만의 미성년자들이다. 이들의 심신 건강을 적극적으로 관리하고 원만한 한국 사회 적응을 돕는 일은 향후 한국이 아프가니스탄에 진출할 상황을 대비하는 선구안적인 투자라 할 수 있다.
필자 : 황세희 국립중앙의료원 건강증진예방센터장. 서울대 의대 졸업 후 서울대병원에서 인턴·레지던트·전임의 과정을 수료했다. 서울대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미국 MIT에서 연수했다. 1994년부터 16년간 중앙일보 의학전문기자로 활동하면서 ‘황세희 박사에게 물어보세요’ ‘황세희의 남자 읽기’ 등 칼럼을 연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