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집, 박완서
심설
2022. 2. 20. 10:11
<노란집> 박완서
열림원
노란 집에서 지은 소설인가 싶었는데 짧은 소설과 수필들이 모인 책이었다.
따뜻하고 소박하지만 깊은 울림을 주는 글들이다.
천천히 글을 읽고, 필사를 하면서, 박완서 작가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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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가 왜 나만 보면 웃으셨을까. 나는 그 수수께끼가 좋다. 그 무서운 할아버지도 나를 좋아했는데 누가 나를 싫어할까 싶은 이 세상에 대한 나의 친밀감과 믿음이 그 수수께끼의 해답이기 때문이다. (78p.)
새로운 문물에는 내가 더 살면 무슨 꼴을 더 보려나 싶게 역겨운 것도 많건만, 살갑고 포근한 봄볕 속에서 땅위를 기는 기쁨은 이 좋은 것들을 앞으로 몇 해나 더 누릴 수 있을까, 마냥 아쉽고 애틋하니 이 무슨 조화인가. 이팔의 아름다운 나이, 그저 순하고 무던한 줄만 알고 지내던 마을 청년의 심상치 않은 뜨거운 눈길을 등뒤로 느끼게 해준 것도 이런 봄볕이 아니었을까. 사람은 속절없이 늙어가는데 계절은 무엇하러 억만년을 늙을 줄 모르고 해마다 사람 마음을 달뜨게 하는가. (49p)
부엌 쪽에서 마나님이 설거지하는 소리가 점점 아득해진다. 마지막 날까지 저 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면, 죽음도 이렇게 달콤하게 왔으면, 그러면서도 그에게 가장 익숙한 생활음, 그릇 달그락대는 소리에 안타깝게 매달리다가 마침내 스르르 놓아버린다. 농가에 설거지 소리 멎고 뻐꾸기 소리 들린다. (55p.)
인생이란 과정의 연속일 뿐, 이만하면 됐다 싶은 목적지가 있는 건 아니다.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사는 게 곧 성공한 인생이다. 서로 사랑하라고 예수님도 말씀하셨고 김수환 추기경도 말씀하셨다. 그 말씀은 너희 모두모두 행복하라는 말씀과 다름없을 것이다. (67p.)
이윤 추구가 지상의 목적인 정보산업의 홍보 전략은 그것이 없으면 연애도 못하고 시대에도 뒤떨어질 것처럼 우리를 세뇌시키고 있지만, 정말 시대를 앞서가려면 이성적 판단을 흐리게 하는 대기업의 홍보 전략에 현혹되기 이전에 올바른 정신으로 자신의 선택권을 확보하는 일이 중요하다.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에 선다고 해도 어차피 신속한 정보통신화 시대로 흐르고 말 것이지만 말이다. 물의 흐름도 수많은 들과 굴곡을 만남으로써 속도가 조절되듯이 우리의 발전도 반대나 회의하는 입장이 있음으로써 비로소 곤두박질을 면하고 균형을 잡을 수 있는 게 아닐까. (83-84p.)
주변을 치우니 정말 천국과 같다. 넓은 바위 위에 앉아 아이들이 냇물에서 옷을 적시며 노는 소리를 들으니 아무리 들어도 싫증이 나지 않고 머리가 맑아진다. 해는 저물고 산에서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새들은 숲속 집을 찾아 들어가는데 어디선가 거룩한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102p.)
자연이 놀랍고 아름다운 까닭은 목련이 쑥잎을 깔보지 않고, 도토리나무가 밤나무한테 주눅 들지 않고, 오직 타고난 천성을 완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데 있지 않을까. (132p.)
남편 기 살리기와 노숙자가 교묘하게 맞물려 남편들에게는 무책임한 현실도피에 대한 면죄부를 주는 대신 아내들에게는 근거 없는 죄의식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 아닌지. 도대체 남편들은 얼마나 못났고, 아내들은 얼마나 기가 세고 넘쳐 그렇게 시시때때로 기를 북돋아줘야 하는지. 기도 가까이 있어야 사리지, 기 살리기가 요술이나 도술이 아닌 바에야 행방불명된 사람의 기를 무슨 수로 살린단 말인가. (140p.)
그런 꿈에서 깨어나면 한동안 나는 내가 어른 되고 늙어버렸다는 걸 전혀 깨닫지 못하고, 물질문명 이전의 소박한 풍요와 화목이 살아 있던 농경사회에서 근심 없이 뛰놀던 계집애인 줄 안다. 그런 착각은 고단한 몸을 따뜻한 물에 담근 것만큼 편안하고 노근해서 현실감이 돌아오는 것도 완만하다. (150p.)
제 힘으로 당당하게 걸어 내려오려면 올라갈 때 힘을 다 써버리지 말고 남겨놓아야 한다. 등산에 있어서만 아니라 권력이나 명예, 인기에 있어서도 오르막보다는 내리막에 품위 있기가 더 어렵다는 걸 전직 권력자들의 언행을 보면서 곰곰이 느끼게 되는 요즘이다. (173p.)
내가 가장 좋아하는 덕담은 예수님의 덕담이다. 당신의 기적의 힘으로 병을 고치시고도 내가 고쳤다고 생색을 내지 않고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그 말씀이 그렇게 듣기 좋을 수가 없다. 약한 인간에게 잠재한 믿음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을 일꺠워주는 것 이상의 덕담이 어디 있겠는가. (189p.)
사람이 살다 보면 이까짓 세상에 왜 태어났을까 싶게 삶이 비루하고 속악하고 치사하게 느껴질 때가 부지기수로 많다. 이 나이까지 견디어 온 그런 고비고비를 생각하면 먹은 나이가 한없이 누추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삶은 누추하기도 하지만 오묘한 것이기도 하여, 살다 보면 아주 하찮은 것에서 큰 기쁨, 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 싶은 순간과 만나질 떄도 있는 것이다. (272p.)
그러나 돈벌이와 출세에 유리한 공부에만 치중하여, 모든 문화 예술과 인간에 대한 존엄성의 기초가 되는 순수학문이 상대적으로 형편없이 위축된, 오랜 경제제일주의 시대를 돌이켜볼 때, 다시 한 번 빛내야 할 전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277p.)
들꽃이 예쁘게 보이면 그건 늙었다는 징조라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맞는 말이다. 산 날은 길고 긴데 살날은 아주 조금밖에 안 남았다는 걸 몸으로 느낀다.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나도 가서, 아름다웠노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내가 속한 지구촌에는 지금 너무도 추악한 역병이 만연해 있다. 칼끝처럼 섬뜩한 증오와, 살의가 살의를 부르는 복수심으로부터 아무도 자유롭지 못하다. 내가 하찮은 것들을 예뻐하려는 것은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기 위함인지 당면한 공포를 슬쩍 외면하고 망각하기 위함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 (299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