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마간디야에 대한 설법의 경
[Māgandiyasutta](*1)
『숫따니빠따』, 제4품 ‘여덟 게송’ 중의 9 마간디야에 대한 설법의 경
1. [세존] “딴하와 아라띠와 라가를 보고(*2) 성적 교섭에 대한 욕망이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그 오줌과 똥으로 가득 찬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두 발조차 그것을 건드리고 싶지 않다.
2. [마간디야] “만약 당신이 인간의 왕들이 원했던 여자, 그와 같은 보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당신은 어떠한 견해, 계율, 습관, 생활과 어떠한 존재로의 재생을 주장합니까?”
3. [세존] “미간디야여, ‘이와 같이 나는 말한다.’라고(*3) 진술할 뿐, 그런 나에게 가르침에 대한 집착은 없다. 관찰하면서 견해에 집착하지 않고, 성찰하면서 나는 내면의 적멸을(*4) 본 것이다.
4. [마간디야] “성자시여, 사변적 이론들이(*5) 있는데, 그것들을 인정하지 않고, 내면의 적멸을 강조하시고 그 의미를 설하는데, 어떻게 현자들이 그것을 설합니까?”
5. [세존] “마간디야여, 견해나 배움에 의한, 또는 계행이나 맹세에 의한 청정을 나는 말하지 않는다. 마간디야여, 견해가 없고 배움이 없고 계행이나 맹세가 없는 청정도 나는 말하지 않는다. 그것들을 버리고, 고집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며, 집착 없이, 고요하여 존재를 갈구하지 말아야 한다.”
6. [마간디야] “견해나 배움이나, 또는 계행이나 맹세에 의한 청정을 말씀하시지 않고, 견해가 없고 배움이 없고 계행이나 맹세가 없는 청정도 말씀하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람을 혼미케 하는 가르침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본 것에 의해 청정해질 수 있습니다.”
7. [세존] “마간디야여, 견해에 집착하여 자꾸 물어보는데, 그대가 집착하여 혼란에 빠진 것이다. 그대는 내가 말한 것을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래서 그대가 혼란스럽다고 여기는 것이다.
8. 사람이 ‘동등하다’든가 ‘우월하다’든가 ‘열등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그 때문에 다툴 것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에 대해서 흔들리지 않는다면 그에게는 ‘동등하다’든가 ‘우월하다’는 것이 없다.
9. 그 거룩한 님이 어째서 ‘진실하다’고 하고, 또는 ‘거짓이다’라고 누구와 논쟁을 하겠는가?, ‘동등하다’든가 ‘동등하지 않다’는 것이 없다면, 그가 누구와 논쟁을 벌이겠는가?
10. 집을 버리고 거처 없이 방황하며, 마을에서 친교를 갖지 않는 성자의 삶을 사는 자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떠나 선호를 두지 않으며(*6) 또한 사람들과 논란을 벌여서도 안 된다.
11. 용이라면 멀리 떠나 세상을 거닐어야 하므로 고집을 부려 논쟁해서는 안 된다. 이를테면, 물위로 솟아나 가시 줄기에 핀 연꽃이 물이나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듯이, 성자의 삶을 사는 자는 적멸에 관해 말할 뿐, 탐욕이 없어,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도 세상에도 더럽혀지지 않는다.
12. 지혜를 성취한 사람은 견해나 사변으로 판단하지 않으니 그러한 본성이(*7) 없기 때문이다. 행위나 학식에 영향 받지 않고, 견해의 집착에도 이끌리지 않는다.
13. 여러 지각에서 떠나면(*8) 속박이 없고, 지혜로서 해탈하면(*9) 미혹이 없다. 지각과 견해를 고집한다면 그들은 남과 충돌하면서 세상을 방황한다.
-마간디야에 대한 설법의 경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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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해(*1) 세존께서 사왓티에 계실 때였다. 꾸루국의 바라문인 마간디야(Māgandiya)는 마간디야(Māgandiyā)라는 황금색 피부를 가진 아름다운 딸이 있었다. 그는 딸을 황금색 피부를 가진 배우자와 혼인시키려 하였다. 많은 귀족들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으나 바라문은 탐탁지 않게 여겼다. 어느 날 부처님은 사왓티에서 나와 깜마사담마라는 총림에 앉아 금색의 광명을 비추었다. 바라문은 그 빛을 보고는 ‘그것이 무엇일까’ 라고 생각했는데 부처님인 것을 알고는 대단히 기뻐했다. 그는 자신의 딸과 동일한 피부를 가진 부처님께 자신의 딸을 주려고 생각했다. 그는 급히 집으로 가서 아내에게 말했다. ‘딸과 동일한 피부를 가진 남자를 발견했으니 딸을 치장시켜 그에게 줍시다.’ 그래서 바라문의 처는 딸을 향수로 목욕시키고 의복 꽃 장식으로 치장했는데 그때 세존께서 탁발하는 시간이 되었다. 세존께서는 깜마사담마로 탁발을 나갔다. 그들이 딸을 데리고 부처님이 앉아 있던 곳으로 왔으나 세존께서 사라진 것을 알았다. 마간디야의 아내는 그 앉아있던 자리의 풀로 만들어진 자리를 보고는 앉아계시던 분은 모든 번뇌에서 해탈한 분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바라문 마간디야는 ‘축복의 순간에 불길한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하면서 개의치 않았다. 그러고서 바라문의 처가 여기저기 걷다가 부처님의 발자국을 발견하였다. 마간디야의 아내는 그 발자국을 보고도 그 발자국의 주인은 욕망에 묶여있지 않은 분이라고 말하였다. 그녀는 ‘욕망에 물든 자의 발자국은 굽어있고, 분노한 자의 발자국은 끌려 있고, 어리석은 자의 발자국은 급히 눌려 있으나, 번뇌를 걷어낸 자의 발자국은 이와 같다’고 말했다. 그때에 세존께서는 식사를 끝내고 총림으로 돌아왔다. 바라문의 아내는 상서로운 광명으로 가득 찬 세존을 보고는 ‘이런 분을 보고 욕망을 즐기라고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라고 바라문에게 말했다. 그렇게 하는 사이에 세존은 풀로 만든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바라문은 왼쪽 손으로 딸을 잡고 오른 손에 물병을 잡고는 다가가서 ‘수행자여, 그대가 금색이고 나의 딸도 마찬가지니 잘 어울릴 것입니다. 아내로서 맞아 주십시오. 때가 없는 청정한 딸을 바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바라문의 말에 상관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설하는 것처럼 이 경을 설했다. 이 경에서 부처님은 청정은 내적인 평화에서 오는 것임을 설했다.
주해(*2) 각각의 악마의 세 딸의 이름. ‘갈애(딴하)와 혐오(아라띠)와 탐욕(라가)’을 의미한다.
주해(*3) 이것은 경전에 자주 등장하는 말인데,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며 신의 정언명령이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다른 종교의 도그마와는 다른 불교만의 특징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주해(*4) 열반을 말한다.
주해(*5) ‘62가지의 견해’ ‘견해의 결정들’을 말한다.
주해(*6) ‘미래에 자신의 존재를 다시 생겨나지 않게 하면서’라는 뜻이다.
주해(*7) ‘갈애나 견해에 의한 본성’을 말한다.
주해(*8) ‘멈춤이 앞서가는 고귀한 길을 닦는 것’을 말한다. 네 가지 지각(산냐)을 제거하는 것은 곧, 감각적 쾌락에 대한 지각, 분노에 대한 지각, 폭력에 대한 지각, 견해에 대한 지각을 제거하는 것이다. 멈춤(사마타)으로 이끄는 구분 해탈에 의해 해탈된 것을 의미한다.
주해(*9) 통찰이 앞서가는 고귀한 길을 닦는 것을 말하며, 선정에 들지 않는 통찰자(건관자)를 의미한다.
출처:
https://cafe.daum.net/vipassanacenter/42rb/1083
전재성 역주, 『쿳다까니까야(小部阿含) 숫타니파타』, 한국 빠알리 성전협회, 2004, 419-4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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