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 경(S22:22)
Bhāra-sutta
2. 비구들이여, 그대들에게 짐과 짐을 나르는 사람과
짐을 지는 것과 짐을 내려놓는 것을 설하리라(*1)
3.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짐인가?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五取蘊]라는 것이 그에 대한 대답이다.
어떤 것이 다섯인가?
취착의 [대상이 되는] 물질의 무더기, 취착의 [대상이 되는] 느낌의 무더기,
취착의 [대상이 되는] 인식의 무더기, 취착의 [대상이 되는] 심리현상들의 무더기, 취착의 [대상이 되는] 의식의 무더기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짐이라한다.” (*2)
4.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짐을 나르는 사람인가?
이러한 이름과 이러한 족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 그에 대한 대답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짐을 나르는 사람이라 한다.(*3)
5.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짐을 지는 것인가?
그것은 갈애이니,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4)
즐김과 탐욕이 함께하며 여기저기서 즐기는 것이다.
즉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가 그것이다.(*5)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짐을 지는 것이라 한다.”
6.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짐을 내려놓는 것인가?
이러한 갈애가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함, 버림, 놓아버림, 벗어남, 집착 없음이다.(*6)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짐을 내려놓는 것이라 한다.”
7.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스승이신 선서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뒤
다시 [게송으로] 이와 같이 설하셨다.
“짐은 오온이요
짐을 나르는 자는 사람을 말하네.
짐을 지는 것은 세상에서 괴로움이요
짐을 내려놓는 것은 즐거움이라네.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다른 짐을 지지 않는 자는
갈애를 뿌리째 뽑아버려 갈증이 풀리고
[삼독의 불이] 꺼지노라”(*7)
(*1) 『청정도론』ⅩⅥ.87에는 본경에 나타나는 짐(Bhāra) 등의 비유를 사용하여 사성제를 다음과 같이 비유하고 있다.
“비유로 : 괴로움의 진리는 짐(Bhāra)처럼 보아야 한다.
일어남의 진리(갈애)는 짐을 지는 것(Bhār-adana)처럼,
소멸의 진리(열반)는 짐을 내려놓는 것(Bhāra-nikkhepana)처럼,
도의 진리(팔정도)는 짐을 내려놓는 방법(Bhāra-nikkhepan-upāya)처럼 보아야 한다.”
(*2)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五取蘊]를 ‘짐(bhāra)’이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유지하는데 짐이 된다는 뜻이다.
이것들(오취온)을 서게 하고, 가게하고, 앉게 하고, 누워서 쉬게 하고,
목욕하게 하고, 장식하고, 먹이고, 영양을 보급하게 하는 등을 통해서
유지하는데 짐이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유지하는데 짐이 된다고 한 것이다.”(SAⅱ.263)
(*3) “‘짐을 나르는 사람(bhārahāra puggala)'에서 사람(puggala)은 단지 인습적인 표현일 뿐임을 보여준다.
이 사람이라 불리는 것은 재생연결의 순간에 오온이라는 짐을 집어 올려서
10년이든 20년이든 100년이든 수명이 있는 한 이 오온이라는 짐을
목욕시키고 먹이고 하는 등을 통해서 나르다가 죽음의 순간에 그것을 버리고
다시 재생연결의 순간에 다른 오온이라는 짐을 취하기 때문이다.(SAⅱ.263~264)
(*4)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는 것(ponobhavikā)’이란 ‘다시 태어남을 생기게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SAⅱ.264)
“다시 태어남을 만드는 것이 뿌놉바와(ponobhava)이고,
습관적으로 다시 태어남을 만드는 것이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는 것’이다.”(DA.ⅲ.799) 이처럼 초기불전 도처에서 갈애는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정의되고 있다. 그러므로 섣불리 초기불전은 윤회나 재생을 설하지 않는다는 말을 일삼아서는 안 된다.
(*5) “‘여기저기서 즐기는 것’이란
태어나는 곳과 형색 등의 대상들과 같은 여러 곳에서 즐기는 습성을 가진 것을 말한다.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에 대한 탐욕(rāga)을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欲愛, kāma-taṇhā]’라 한다.
색계와 무색계에 대한 욕망, 禪에 대한 열망, 상견(常見)과 함께하는 욕망,
이것을 일러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bhava-taṇhā]’라 한다.
단견(斷見)과 함께하는 욕망을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無有愛, vibhava-taṇhā]’라 한다."(SAⅱ.264)
(*6) “여기서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함(asesa-virāga-nirodha), 버림(cāga),
놓아버림(paṭinissagga), 벗어남(mutti), 집착없음(anālaya)’은 열반의 동의어다. 왜냐하면 이것을 의지하여 갈애는 남김없이 빛바래고, 소멸하고, 버려지고, 놓아지고, 벗어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더 이상 감각적 욕망에 의지함과 사견에 의지함이 없다.
그래서 이를 일러, 짐을 내려놓는 것이라 한다.”
(*7) “‘갈애를 뿌리째(samūaṃ taṇhṃ)’라고 했는데, 무명(avijjā)이 바로 갈애의 뿌리이다. ‘뽑아버려’라는 것은 아라한도에 의해서 그것을 뿌리째 뽑아버려 라는 말이다. ‘갈증이 풀리고’란 갈애가 없음을 말한다.”(SAⅱ.264)
각묵스님 옮김 『상윳따니까야』 3권 154-158쪽
일부 용어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