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나 천신 이야기
요정 경(S1:46) 이야기
수행자가 집성제인 갈애를 없애기 위해 열심히 수행을 하고 있어도, 도의 지혜를 완벽하게 계발하기 전까지는 여전히 갈애가 남아서 재생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사마나 천신의 이야기에서 잘 드러납니다.
부처님 당시에 한 젊은이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믿음이 생겨서 출가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다섯 안거동안 스승을 모시고 지냈습니다. 사마나는 스승님에 대한 크고 작은 모든 의무를 최선을 다하여 수행하였고, 비구가 지켜야 할 계목 중에서 두 가지를 철저히 배웠습니다. 큰 것에서부터 사소한 계율에 이르기까지, 계율로 자신을 지키고 청정하게 하는 과정을 통달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수행주제를 선택한 후, 숲속의 외진 곳으로 가서 부단히 수행에 매진하였습니다.
사마나는 수행을 아주 열심히 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 한밤중에는 휴식하고 잠을 자도 된다고 하셨지만, 잠을 안 자고 수행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렇게 밤낮으로 매진하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충분히 섭취하지 못하자 몸이 쇠진해져서, 갑자기 칼로 베는 듯한 고통과 함께 마비성 일격으로 척추신경이 끊어져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경행을 하는 도중에 죽었기 때문에 비구의 의무를 지키면서 죽은 것으로 이야기가 되고 있습니다.
주석서에 따르면, 비구가 경행대를 오가며 경행하는 중이거나, 기둥에 기대어 서있거나 혹은 경행 복도의 앞부분에서, 머리에 가사를 두 겹으로 두르고 앉거나 누워있을 때 사망하는 경우, ‘의무를 다하다가 죽었다’고 말합니다. 만약 비구가 설법, 특히 윤회에서 벗어남을 주제로 설법을 하던 중 사망한다면 이 또한 ‘의무를 다하다 죽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지금 이야기 하고 있는 비구는 경행대를 오가며 경행에 전념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염처경의 가르침에 따라 몸의 자세 중에서 정신과 물질을 지켜보는 동안에 사망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수행에 대단한 공을 들였지만, 아라한도를 얻는데 필요한 바라밀 공덕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는 아라한도를 얻지 못한 채 세상을 뜨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라한도를 얻기 못하면 갈애를 완전하게 제거할 수 없습니다. 이 비구는 수다원과도 아직 얻지 못했다는 사실이 나중에는 밝혀질 것입니다. 그래서 사마나는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는 갈애 때문에 도리천(삼십삼천)에 재생하였습니다. 수행을 해서 얻은 공덕의 과보로 웅장한 하늘의 궁전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치 잠에서 방금 깨어난 것처럼 완전히 성장(盛裝)한 천신의 모습으로 궁전 문 앞에 화생하였습니다.
바로 그때 궁정의 주인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천여 명의 천녀들이 소리쳤습니다.
“우리들의 주인님이 오셨다! 그 분을 환영하도록 하자!”
천녀들은 사마나를 에워싸고 손에 악기를 들고서 기쁘게 환영하였습니다. 하지만 정작 궁전의 주인인 천신은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났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사마나는 자신이 아직도 인간세계의 비구라는 생각 속에 있었습니다. 천녀들을 보고는 자기 사원을 찾아온 여자신도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맨 왼쪽 어깨를 상의로 가리고 눈을 아래로 깔고 아주 근엄하고 조용한 자세를 취하며 앉아있었습니다.
새로 온 천신이 전생에 비구였음이 틀림없다고 곧바로 알아차린 천녀들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인님, 이곳은 천신의 세계입니다. 비구의 계율을 지키실 때가 아니고 천상의 즐거움을 누리실 때입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근엄한 침묵과 위엄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 천신은 천상의 천신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환락을 베풀어 환영하여 천신이 되었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도록 해주자.”
천녀들은 이렇게 말하고는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천신은 여자신도들이 자신의 숲속 거처까지 와서 실없는 환락에 빠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더욱 더 조용히 성품을 추스르고 위엄을 갖추고 품위를 유지하였습니다.
그러자 천녀들은 몸 크기의 거울을 갖다가 천신 앞에 놓았습니다. 거울에 비춘 자기의 모습을 보고는 비구의 생을 마감하고 천상계에 재생했음을 알았습니다. 사마나 천신은 크게 당황하여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천상계에 재생하려고 수행을 한 것이 아니었다. 내 목표는 가장 유익한 아라한과를 얻는 것이었지만 지금의 나는 금메달 우승컵을 노리고 권투경기장에 들어섰지만 오직 무 다발만을 받은 권투선수와도 같다.”
극도로 마음이 어지러워진 그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습니다.
“천상의 즐거움 따위는 쉽게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정등각자께서 세상에 계시는 시기는 아주 드문 경우이다.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성스러운 도를 얻는 것이 어느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천상의 즐거움 속에 빠져있으면 부처님을 만날 기회를 잃어버릴 위험이 있다.”
천신은 천궁으로 들어가지 않고, 비구였을 때 지켰던 절제의 계를 고스란히 지키며 서둘러 부처님께로 갔습니다. 천녀들도 천신을 보지 못할까봐 그를 쫓아갔습니다. 부처님 앞에 이르자 천신은 다음과 같이 말씀드렸습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하면 이 낙원을 피하고 비껴갈 수 있겠습니까? 이 정원은, 이곳을 찾아오는 천신들에게 어리석은 행동을 하도록 하기 때문에 어리석음의 정원이라고도 부르며, 수많은 천녀들이 노래와 합창에 빠져있고, 무수한 야차와 도깨비, 귀신들이 출몰합니다.”
천신이 여기서 천녀들을 야차와 도깨비라 하고, 기쁨의 동산을 어리석음의 정원이라고 말한 이유는 그가 위빠사나 수행에 쏟은 강한 정진으로 감각욕망에 대해 혐오하는 마음상태를 여전히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떻게 비껴갈 수 있는지요?’라는 천신의 질문에 대한 주석서의 해석은, 이 천신이 부처님에게 아라한과에 이를 수 있는 위빠사나 가르침을 청한 것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은 천신과 관계된 모든 상황을 헤아려보고는 다음의 세 가지 게송으로 팔정도를 가르치셨습니다.
1. Ujuko nāma so magga, abhayā nāma sā disā,
ratho akuJano nāma, dhammacakkehi sam.yuto.
“벗어나기를 갈망하는 천신아. 빠르게 벗어날 수 있는 지름길은 바로 그대가 비구였을 때 이미 계발한 위빠사나의 팔정도이다.”
오직 ‘도에 이르는 지름길’이라고 말한 게송의 첫 구절은 여기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청중들을 위해 해설을 덧붙인 것입니다. 원래 그대로의 번역은 청중들이 매우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수행에 매진하던 사원에서 곧바로 나온 것과 같은 천신에게는 그 의미하는 바가 너무나 분명했습니다.
주석서의 해설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직 계율이 확립되지 않은 사람에게 수행을 시킬 때 세존께서는 항상 이렇게 충고하셨다. ‘계를 청정히 하고, 사띠와 집중을 계발할 것이며, 업과 그 과보에 대한 견해를 바르게 하라.’
그렇게 먼저 기초적인 수행을 굳건히 확립하도록 지도하셨다. 이미 수행에 매진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아라한도와 아주 근접한 위빠사나만을 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그 천신은 이미 수행을 하였고 아직도 계율이 청정하였습니다. 그는 이미 성스러운 도를 선도하는 선구자가 되는 위빠사나 도를 닦았기 때문에 이제 닦아야할 것은 오직 성스러운 도뿐이었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위빠사나를 지도하기 위해 세 가지 게송을 가르치신 것이다.”
이 주석서 해설을 통해서, 그의 계는 비구의 생에서 천신의 생으로 넘어가서도 여전히 청정하였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합니다. 이는 살생, 도둑질, 음행 등과 같은 어떠한 계율도 범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계를 청정히 유지해 나갔습니다. 그래서 계를 지키겠다는 공식적인 서약 없이도 범해서는 안 될 악행을 삼간다면 그 계는 청정하게 유지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 게송은 또 위빠사나를 가르쳤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앞서 설명한 대로 천녀들로 가득한 천상계의 ‘기쁨의 동산’에서 빠르게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지름길은 비구였을 때 하던 위빠사나의 도입니다.
위험 없는 피난처를 묻는 다음 질문에 대해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위험 없는 피난처란 네가 비구로 있을 때 얻고자 했던 열반이다.” 이는 그가 열반을 얻을 때까지 정진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어떠한 탈것을 타고 가야 하는지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조용하게 피난하려면 육체적 노력과 정신적 노력이라고 하는 위빠사나의 두 바퀴가 달린 조용한 수레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육체적인 모든 동작들을 알아차리는 것과 관련한 정신적 노력을, ‘마음의 노력이라고 합니다. 가고, 서고, 앉는 것과 같은 몸의 동작을 알아차릴 때 이러한 각각의 자세를 지탱하는데 필요한 몸의 노력을, 육체적 노력이라고 합니다. 누워서 하는 수행인 와선은 육체적 노력이 아니라 정신적인 노력에 속합니다.
육체적 노력과 정신적 노력의 바퀴로 된 이륜차를 탈것을 권하셨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는, 걷고, 서고, 앉는 모든 동작에 대한 주위 깊은 사띠를 요구하는 위빠사나 수행을 뜻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육체적 노력과 정신적 노력이라는 두 개의 바퀴로 된 위빠사나 도의 웅장한 수레를 타기 위해서는 오며 가며 경행을 할 때 주의 깊게 사띠에 매진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걸을 때 걷고 있는 것을 분명히 안다’고 하는 염처경의 가르침대로 ‘걸음’, ‘듦’, ‘앞으로’ ‘놓음’ 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정진하는 동안 집중이 강해지면서, 수행자는 알 때마다 단단함과 움직임을 일으키는 물질이 있고, 그것을 아는 정신이 있다는 것을 구별합니다. 집중이 강해짐에 따라 수행자는 원인과 결과도 구별합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것을 알게 됩니다.
“가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에 간다고 하는 육체적 현상이 일어난다. 아는 대상이 있기 때문에 알게 된다.”
수행이 더 향상되면, 그러한 현상의 일어남은 잠시이며, 가고자 하는 의도, 간다고 하는 육체적 현상, 아는 마음 뒤에 오는 그 사라짐을 마치 자기 손바닥 안에 쥔 것처럼 확연하게 알게 됩니다. 그러면 잠시 일어났다가 바로 사라지는 것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일어남과 사라짐이 계속된다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괴로움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게 됩니다. 수행자는 또한 이런 현상들이 스스로 일어난다는 것, 누구의 의지도 따르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어느 누구의 통제를 받지 않는 무아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래서 가끔씩 서 있거나 앉아 있을 때 주의 깊은 사띠가 이어져야 합니다.
여기서 말한 조용한 수레는 고대의 말이 끄는 마차를 언급한 것입니다. 수레는 그 자체로는 소리가 안 나지만 많은 승객이나 무거운 짐을 실으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도의 수레’는 어떠한 소리도 내지 않고 무한정으로 승객들을 실어 나를 수 있습니다. 때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있는 동안에는, 팔만사천명의 승객이 이 ‘도의 수레’를 타고, ‘위빠사나의 도’를 마부로 하여, 소리 없이 최종 목적지인, 열반으로 이끌어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수레는 소음 없는 수레로 찬사를 받았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바로 이 수레를 타고, 천녀들이 알지 못하게 조용히 탈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암시를 주셨습니다.
2. Hīri tassa apālambo, satyassa parivāranaṃ,
dhammahaṃ sārathiṃ byuhi, sammādiṭṭhi pure javaṃ.
“악행을 저지르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인 히리(도덕적 부끄러움)는, 수레가 움직일 때 승객들이 뒤로 넘어지지 않게 하는 의자의 등받이 역할을 한다. '도의 수레바퀴'는 히리와 옷빱빠(도덕적 두려움)라는 훌륭한 등받이를 가지고 있다.”
수행 중인 수행자는, 어떤 대상에 대한 주의 깊게 사띠하지 못해서 불선한 생각이 일어날까봐 이를 회피하고 두려워합니다. 이것은 마치 상쾌하고 깔끔한 목욕을 하고 나서 똥을 만졌을 때 느끼는 혐오와도 같은 것입니다. 불선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려는 양심적인 염려(걱정)와 이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것을 히리라고 합니다. 또 이 불선한 생각으로 인하여 불선과보를 받게 하는 악행을 저지르게 되고, 또한 윤회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운 마음도 있습니다. 이러한 악행과 이에 따른 불선한 과보에 대한 두려움을 옷땁빠라고 합니다.
이 히리와 옷땁빠 때문에 수행자는 공경하는 마음으로 어떠한 것도 놓치지 않고 모든 정신과 물질에 사띠하는 일에 매진합니다. 이렇게 함에 의해 사라지는 매 순간마다 괴로움이 지속적으로 계발됩니다. 이는 수레의 등받이가 승객들이 뒤로 넘어지는 것을 방지하고 자세를 유지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히리와 옷땁빠를 위빠사나 도의 등받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부처님께서는 사띠가 어떻게 도의 수레를 보호하는 덮개와 차양의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 설명하셨습니다. 차양을 갖춘 수레는 날아오는 돌이나 막대기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될 수 있습니다. 생기는 모든 정신과 물질을 생기는 바로 그 순간에 사띠로 관찰하면, 수행자는 불선행을 범할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됩니다. 그래서 사념처 수행은 도의 수레를 보호하는 덮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위빠사나의 정견의 뒤를 이어서 생기는 성스러운 도의 정견을 수레를 끄는 마부라 한다.” *
*이 구절은 “Dhammāhaṁ sārathiṁ brūmi, sammādiṭṭhipurejavaṁ”에 대한 다음의 영어 번역을 참고로 하여 번역했다.
“I call the right view pertaining to Ariya magga, ariya magga sammādiţţhi, preceded by vipassanā sammādiţţhi, the right view pertaining to vipassanā, the driver of the carriage.”
정견은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가 있습니다.
➀ 업 자기재산 정견 ➁ 선정 정견 ➂ 위빠사나 정견
④ 도 정견 ⑤ 과 정견 ⑥ 반조 정견
이 중에서 ⑤ 과 정견은 도에 이른 결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⑥ 반조 정견도 도와 과를 얻은 뒤에 일어나는 반조의 지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⑥을 개발하기 위해서 특별히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➀ 업만이 자신의 것이라는 정견인 업 자기 재산 정견은 수행을 시작하기 전에 확고히 다져져 있어야 합니다. ➁ 선정 정견은, 위빠사나의 기초인 심청정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스러운 도와 관련된 정견의 증장을 위해 계발되어야 하는 가장 가까운 지혜는, ➂ 위빠사나 정견입니다. 위빠사나 정견이 완전히 계발되면 성스러운 도의 지혜 즉, ④ 도 정견이 자연히 일어납니다. 이는 마치 군경의 호위대에 의해 도로가 깔끔이 정리되고 나서 왕의 행렬이 오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➂ 위빠사나 정견이 선행하고, 그 뒤에 성스러운 도 정견이 뒤따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에 매진하고 있는 동안 위빠사나의 지혜가 다른 도를 닦기 위한 길로 이끕니다. 성스러운 도를 얻는 순간 도의 지혜가 다른 도로 이끌어줍니다.
이러한 이유로 부처님은 ➂ 위빠사나 정견과 성스러운 도 정견을 수레의 마부라고 하셨습니다.
마지막 게송은 다음과 같습니다.
3. Yassa etādisanyānam, Itthiyā purisassa vā,
sa ve etena, yanena nibbānasseva santike.
“이 팔정도의 수레를 가진 남녀는 수레의 힘으로 열반에 도달할 수 있다.”
이 마지막 게송에 따르면 팔정도라는 도의 수레를 가진 사람은 성별과는 관계없이 열반에 ‘도달’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열반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위빠사나 도에 기초를 둔 성스러운 도를 계발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 명확합니다.
어떤 형태의 교통수단이든 그것을 가진 사람이라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교통수단을 갖지 못하고, 그 기계구조에 대한 지식만 가지고 있다면 어느 곳에도 이르지 못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형태의 정신과 물질, 그리고 갖가지 도에 대하여 줄줄이 열거할 줄만 알아서는 절대 열반에 이를 수 없습니다. 정신과 물질이 실제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아서 위빠사나 도의 수레를 자기 것으로 하여, 팔정도의 수레를 타야만 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앞에서 설명한 세 가지 게송을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1. 도에 이르는 지름길, 그 목적지는 위험이 없는 열반이다.
2. 육체적 노력과 정신적 노력의 두 바퀴를 갖춘, 도의 수레는 조용하다.
3. 히리와 옷땁빠는 수레의 등받이가 되어주고, 사띠는 수레의 덮개와 차양의 역할을 한다.
4. 위빠사나의 지혜는 도의 지혜를 이끌어주는 수레의 마부 역할을 한다.
5. 이런 수레를 가진 사람은 남자일수도 있고, 여자일수도 있다.
6. 누구나 편안하게 이 수레에 타고 열반에 이를 수 있다.
부처님께서는 세 가지 게송을 가르치고 나서 우리가 도성제의 장에서 다시 논하게 될 사성제에 대한 법문을 하셨습니다.
사마나 천신은 법문을 듣는 동안 전생에 닦았던 수행에 대하여 숙고하였습니다. 비록 비구였을 때 불퇴전의 노력으로 수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높은 지혜를 얻지 못하였지만, 이제 더러움이 없는 천신으로 태어나, 곧바로 위빠사나의 지혜를 단계별로 계발할 수 있었으며, 마침내 열반을 체험하여 첫 번째 단계의 도과를 얻었습니다. 그리하여 성인의 대열인 수다원이 되었습니다.
이 사마나 천신 이야기에서 우리가 절실히 느낄 수 있는 것은, 비록 비구가 위빠사나 수행을 열심히 했더라도 갈애를 제거하는 성스러운 도를 얻지 못했다면, 집성제인 갈애 때문에 죽은 뒤에는 천신으로 재생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이야기는 또한 어떻게 하면 성스러운 도를 닦을 수 있는지, 그리고 천신의 몸으로 어떻게 하면 더 높은 지혜를 쉽게 얻을 수 있는지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출처: 마하시 아가 마하 빤디따 지음, 『초전법륜경』, 김한상 옮김, 행복한 숲, 2011, 298~313쪽.
일부용어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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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정 경(S1:46)
Accharā-sutta
2.
[천신]
"요정들의 노래가 메아리치고
유령의 무리들이 출몰하는 곳
이런 숲을 미혹이라 부르옵니다.
어떻게 이곳에서 벗어나리까?"
<주해 215> … 전생에 이 천신은 부처님의 교법에 출가하여 명상주제에 몰입하여 자고 먹는 것도 잊고, 과도한 열정으로 숲에서 정진을 하던 비구였다. 그는 너무 열심히 정진하다가 풍병에 걸려 죽어서 삼십삼천의 앗차라 요정들의 수행원으로 태어났다. 그는 너무 갑자기 죽어서 천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자신이 죽었는지도 몰랐으며, 아직도 자신을 비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앗차라들이 유혹을 했지만 거절하고 수행을 계속하였다. 앗차라들이 거울을 가져다주자 그는 자신이 신이 되어 있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천상에 태어나기 위해서 고행을 한 것이 아니라 아라한과를 증득하기 위해서 수행했다.'라고 여기면서 앗차라들에 둘러싸여 세존을 찾아뵙고 첫 번째 게송을 읊었다.
이 게송에서 난다나(Nanadana) 정원을 미혹(mohana)이 가득한 곳이라고 bygus하고 있는데, 앗차라들이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라한과의 토대가 되는 위빳사나를 가르쳐주십시오.’라는 의도를 가지고 이 게송을 읊었다고 한다.(S.A.85~87)
3.
[세존]
"그 길을 일러서 올곧음이라 하고
그 방향은 두려움 없음이라 하며
마차는 삐걱거리지 않음이라 하고
그것에는 법의 바퀴가 달려 있노라.
양심있어 그것의 버팀목이고
마음챙김 그것의 장비가 되며
바른 견해가 앞서 가는 법이 되나니
그런 법을 일러 나는 마부라 하네.
이 마차에 탄 사람은 여자·남자할 것 없이
이 마차에 올라타고 열반으로 가느니라."
<주해 216> "세존께서는 그 천신에게 공함을 드러내는 위빳사나를 설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기서 '올곧음' 이라 한 것은, 팔정도라는 길은 몸이 비뚤어짐 등이 없기 때문에 올곧음이라 한다. '그 방향은 두려움 없다'는 것은 열반을 두고 한 말씀이다. 거기에는 어떤 두려움도 없기 때문이다. '마차는 삐걱거리지 않음' 이라는 것도 팔정도를 두고 한 말씀이다. 일반 마차는 차축이 부러지지 않은 것이라 할지라도 너무 많은 사람이 타면 삐걱거리고 덜걱거리지만 성스러운 도는 그렇지 않다. '법의 바퀴가 달려 있다.' 는 것은 몸과 마음의 정진이라 불리는 법의 바퀴가 달려 있다는 뜻이다."
(Devatā:) 46. Accharāgaṇasaṅghuṭṭaṃ pisācagaṇasevitaṃ
Vanantaṃ mohanaṃ nāma kathaṃ yātrā bhavissatīti.
(Bhagavā:) Ujuko nāma so maggo abhayā nāma sā disā,
Ratho akūjano1 nāma dhammacakkehi saṃyuto.
Hiri tassa apālambo satassa2 parivāraṇaṃ,
Dhammāhaṃ sārathiṃ brūmi sammādiṭṭhipurejavaṃ,
Yassa etādisaṃ yānaṃ itthiyā purisassa vā,
Sa ve etena yānena nibbāṇasseva santike.
Akujjano-syā. 2. Satyassa, - machasaṃ, [pts]
참조문헌:
https://blog.naver.com/esshgc/221334141882
https://cafe.daum.net/vipassanacenter/ODUp/47?q=%EC%9A%94%EC%A0%95%20%EA%B2%BD%28S1%3A46%29&re=1
각묵 스님 옮김, 『상윳따 니까야 제2권』, 224-226쪽.
일부용어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