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연민이 다른 사람과 나누는 단 하나의 길이다
그 어떤 것보다도 자신의 마음과 자신의 삶에 대해서 공부하는 것이 훨씬 더 가치 있는 일이다.
통증이 시작되는 것을 아는 순간 자신의 마음을 보고 그 마음과 함께 머물러라. 그러면 통증을 전혀 느끼지 않게 될 것이다.
걸을 때와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할 때 자신이 ‘원함’을 알도록 하라.
사띠를 놓치게 하는 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 ‘원함’이라는 것을 알도록 하라.
집중수행을 시작할 때 사띠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고, 느긋한 마음으로 할 것이며, 긴장이 증가되고 있는지 항상 점검하라.
너무 많이 너무 열심히 집중하려 하지 말라. 나중에 계속적인 사띠가 마음을 강화시키면 집중은 저절로 강하게 될 것이다.
처음에는 지켜보는 마음이 따라올 수 없지만, 나중에 보다 잘 할 수 있게 되고 유연하게 되면, 지켜보는 마음이 주시하는 마음을 가까이 따를 수 있게 된다. 마음이 고분고분하게 길들여진다.
어느 마음이 주시하는 마음인가?
그것은 대상과 함께 있고, 대상에 대해 알고, 대상과 함께 생기며, 대상으로 인하여 생기는 마음이다. (그리고 대상과 함께 사라지고 대상으로 인하여 사라지는 마음이다.)
어느 마음이 지켜보는 마음인가? 그것은 주시하는 마음이 어디 있는지, 그것이 무얼 하는지 아는 마음이다.
많은 느낌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면, 노력해서 사띠-사마디를 증가시키기 위하여, 보다 미세한 것을 택해야 한다.
미세한 느낌을 많이 볼수록 마음은 더 강해진다.
번뇌가 있음을 알고 번뇌가 있는 마음에 유혹당하고 있을 때, 행동하기 전에 이렇게 물어라. “번뇌를 만족시키고 싶은가 아니면 없애고 싶은가?” 그에 따라 행동하라.
때로는 어렵더라도 사띠하라. 사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될 때, 그때가 사띠해야 할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수행 방법을 이해했다면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를 좋아한다면 가르치는데 단 한 가지 방법이 있다.
그것은 수행자가 좋고 귀중한 것을 알게 돼서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자신을 ‘스승’이라고 여기지 말라. 그러면 거기서부터 꼬이기 시작한다.
자신이 어떤 식으로 되기를 바라면, ‘스승’이라는 가면을 채택하면, 남을 깔보기 시작하고, ‘한 단계 위’, ‘모든 사람은 나에게 의존하고 있다,’ ‘나는 이러저러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 ‘모든 사람은 내가 말한 대로 해야 한다’ 등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 모든 것들이 나타나서 수행자 자신과 제자들에게 상처를 줄 것이다. 그보다는 자신을 주는 사람으로 여겨라.
자신을 ‘탁월한’ 스승으로 만들기 위한 실적으로 제자들을 이용하려 하지 말라. ‘탁월한’ 스승이 되려 하지 말고, 적절한 스승이 되어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연민이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단 하나의 길이다.”
행복이란 조용한 마음을 갖는 것이다. 행복은 완전히 사띠하고 있는 것, ‘나’라는 생각, ‘나’라는 느낌이 없을 정도로 사띠하고 있는 것이다!
이 행복은 과거나 미래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도 생기지 않을 때 찾아온다. ‘나’도 없고, 내일도 없고, 계획도 없다. 그때 그 순간에는 지복을 경험하는 ‘나’도 없다. 행복만 있다.
진정한 행복은 이유가 없다.
진정으로 행복할 때 ‘나는 … 때문에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다. 행복하려고 하면 틀림없이 실패할 것이다. 진정한 행복은 초대받지 않고 찾아온다. ‘내가 왜 이렇게 행복한가?’
행복할 때 수행자는 왜 행복한지 알고 싶어 한다. 마음은 그런 식이다. 항상 왜 그런지 알고 싶어 한다.
마음이 어떻게 소설을 쓰고 수행자를 끌어들이는지 계속 지켜보라.
소설을 보지 말고, 마음의 기능을 보도록 하라. 개념, 소설을 보지 말고, 자기 자신이 아닌, 마음이 어떻게 소설을 쓰는지 보라.
마음과 소설은 다른 것이다.
마음은 소설을 써서 수행자에게 서비스한다. 수행자는 그것을 받아들인다. 그것을 지켜보면, 마음이 어떻게 마음의 불행을 만드는지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현상들이 마음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지 보라. 마음에 드는 현상들이 사띠와 삼매와 지혜를 마음으로부터 빼앗아서 마음을 탐욕의 노예로 만든다.
망상들(마음이 창조한 소설들)이 실재로부터 마음을 어떻게 끌어내는지 보라.
화가 어떻게 생겨서 마음을 접수하고 현명하지 못하게, 심지어는 위험하게 마음을 다루는지를 지켜보라.
수행자는 화가 생기는 것은 볼 수 있지만, 화의 원인을 볼 수 있는가? 그것이 자만이라는 것을 볼 수 있는가? ‘네가 어떻게 나에게 그럴 수 있어(혹은 말할 수 있어?)’라는 생각이 생기는 것은 자만 때문이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것이 진정으로 배우는 방법이다. 번뇌, 화, 위축, 정욕, 부러워함, 자만, 질투, 욕망, 탐욕, 모든 것으로부터 배우는 것이다. 그것들을 지켜보는 것은, 법과 우리 자신에 대해서, 지켜본 만큼 우리 자신에게 가르칠 수 있다. 그것들은 지켜봄에 의해 극복될 수 있다.
마음을 보호하고 참아라, 그것은 모두 지나가는 것일 뿐이다.
마음에 있는 이미지를 보는 것, 생각함, 기억함, 상상함, 계획함은 실재가 아니다. 마음에서 생기는 이 여러 가지 마음들은 실재가 아니다. 그것을 아는 것이 실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