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8 전환시키는 것
사념처 수행에도 선정(자나)들이 있다. 이것들은 매순간 관찰하는 집중의 단계들인데, 이는 위빳사나 선정(찰나삼매)들이라고 알려진 아주 강력한 상태를 생기게 한다.
*
두 가지 문제.
관념적 진리와 궁극적 진리.
동시에 … 괴롭힌다!
매순간. 단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는다.
병듦, 늙어감, 죽음으로부터!
이 단계에서 ‘생김과 사라짐’이 시작되기 때문에 불안과 공포 등의 느낌에 압도당하기 쉽다. 반드시는 아니지만, 경험하는 현상을 ‘나’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나’가 있다고 생각하기만 하면, 그런 현상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이 현상들이 무아임을 볼 수 있다면, 다른 이야기가 될 것이다. 생각하지 말고 지켜보기만 하라.
물론 ‘생김과 사라짐’의 강렬함에 의해 약간 지치고 아프고 피곤하겠지만, 그것을 시야에서 놓쳐서는 안 된다. 결코.
현상의 생김과 사라짐이 사라졌기 (수행이 끊어졌기) 때문에 지혜가 약해지면 번뇌가 즉시 공격할 것이다. 그로 인해서 아무리 피곤하더라도, 지금은 생김과 사라짐을 지켜보는 것을 그만둘 때가 아니다.
우리는 …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고 있다!
몸과 마음의 과정을 다루는 단 하나의 길은 그것을 더 면밀하게 보는 것이다.
아무 것도 실재하지 않는 것 같고… 의미 없고… 환상이고… 통제되지 않고…
*
좌선할 때, 자신이 앉아 있는 곳이 아닌 다른 장소에 앉아 있는 듯(장소에 대한 감각을 잃음), 그리고 수행자가 생각하는 그 날이 아닌 다른 시간인 듯(시간에 대한 감각을 잃음)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시간과 장소가 개념이기 때문이다. 수행이 이 단계에 이르렀을 때 개념들이 떨어져 나가기 시작한다. 수행자는 ‘개념 없음’과 접촉하게 된다.
*
붕괴되고 있는 현상들의 세계로 온 것을 환영한다.
즉각적인 생김과 사라짐의 세계. 무슨 대상이든지 아는 순간,
그것은 분해되고 있고, 사라지고 있다.
여기서 모든 경험은, 모든 의미를 완전히 잃는다.
그리고 아무 것도 결코 얻어질 수 없다.
그 경험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알 수 있게 되자마자,
그것을 아는 앎과 함께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상일 뿐이다.
그러한 특성으로 인하여, 그것이 몸의 경험이거나 마음의 경험이거나, 나 혹은 다른 사람에 의해 소유될 수 없고, 나 혹은 다른 사람일 수 없고, 나 혹은 다른 사람에 의해서 창조될 수 없다.
현상일 뿐이다.
*
궁극적 실재와 직면 그리고… 개념에서 해방!
멀리 떨어져 있지만 가깝기도 하다. ‘자기 자신을 이해하면 모든 것을 이해한다.’
더 이상 남자나 여자도 없고, 인간도 없고, 동물이나 새, 뱀이나 곤충, 물고기도 없고, 나무나 구름, 우주도 없다! 중간에 ‘경계선’도 없다. 모든 것은 하나다. 한 가지 종류의 본성 즉 현상일 뿐이다.
다른 마음을 갖고,
다른 세상에 있으니!
… 마음은 더 이상 전과 같지 않을 뿐이고
… 세상은 더 이상 전과 같지 않을 뿐이네.
*
가능성과 변화…
심각한 위험의 감지…
새로운 공포의 새벽…
지금 당장 걸어 나와야 할 유일한 길이 있다.
어리석음으로부터. 고통으로부터. 윤회로부터.
*
이제 자신이 무엇인지 추호의 의심도 없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알 수 있다. 이런 식으로 현상을 진정으로 꿰뚫어 이해할 수 있을 때, 자신이 모든 과거의 전생에서 무엇이었으며, 내생에서 무엇이 될 것인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현상일 뿐이다.
그리고 모든 것은 고통이다.
이제 현상들이 아주 분명해졌다.
수행할 때 노력하지 않는 상태인, 이 ‘저절로’ 되는 몸과 마음의 ‘평온’의 효과는 대단히 매력적이다. 그러나 아무 것도 기대하지 말고, 방해하지 말고, 조작하지 말고 그것들을 그냥 일어나게 내버려두고, 끼어들지도 말고, 집착하지도 말라.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일어나게 내버려둬라.
이런 상황을 다룰 줄 아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그것을 경험할 수 있다. 그냥 수행하기만 하라.
‘그렇다. 삶에서 기대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할 수 있으며, 그것을 아주 분명하게 보고 알 수 있다. 수행자는 이제 스스로 ‘몸과 마음’에 대해서 안다. 그러나 그것을 불행하다거나 못마땅해 하지 않고 좋다고 느낀다. 수행자의 마음이 균형 잡혀있기 때문이다. 수행을 이와 같이 계속하면 열반에 도달할 것이다!
이제,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거나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거나, 혹은 정식 수행 이외의 다른 어떤 일을 하더라도, 자신의 마음이 여전히 ‘끊임없이 자동적으로 주시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몸은 좌선하고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분리되어 있음을 느낀다.
그것이 수행이 이 단계에 이르렀을 때의 관성의 힘이다!
이 단계에서 아주 특별한 마음의 정화가 나타난다. 사띠는 아주 강력해서 그만두려고 해도 그만둘 수 없다.
접착제로 붙인 것처럼 딱 붙어 있다! 수행자는 사띠가 그렇게 영원히 머물기를 바랄 것이다!
‘평온’에 대해서: 이 단계에서 모든 것을 경험하지만, 아무 것에도 영향 받지 않고, 자신이 안 것에 집착하지도 않는다.
‘평온’의 효과가 약해지기 시작하더라도 당황하지 말라. 당황하는 것은 수행자가 하는 것 중에서 가장 나쁜 것이다. 그것이 가야할 길을 자연스럽게 가도록 하라. 긴장하지 않고 감정적으로 끼어들지 않으면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 ‘바라는’ 순간, 모든 가능성이 말살된다.
*
그러나 머지않아, ‘평온’이 희미해진다. 결국 사라지고 사띠-사마디는 더 이상 ‘자동적이고 환상적’이 아니며, 다시 기를 쓰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충격 상태에서 벗어나라! 괜찮다!
강한 사띠-사마디 원하기를 멈추고, 수행의 어떤 ‘경지를 원하기를 멈춰라. (원하거나, 집착하거나, 기대하는지) 마음가짐을 점검하라. 번뇌는 수행을 방해하는 능력이 있다. 사띠하면서, 이 순간에 머물러라.
관성은 아직 거기 있다. ‘바라지’ 말기만 하라. 바라기 시작하는 순간, 수행자는 자신의 수행을 방해할 뿐 아니라, 자신에게 스트레스를 주며 자신을 지치게 한다.
다시 시작하고, ‘작게’ 시작하고, 인내하고, 바라지 말라.
오직 할 뿐! (Just do it!)
수행할 때 정진이 없으면 지루해진다. 자신이 너무 열심히 집중하는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주의를 약화시키지 말라.
능숙하지 않으면 수행이 조금도 향상되지 않는다.
마음을 계속 일하게 하고, 항상 무언가를 알고 있도록 하고, 멈추지 말라. 수행이 잘못되고 있다든지 수행에서 벗어났을 때에는…
받아들여라! 그것은 모두 수행의 일부이다. 마음을 느긋하게 가져라!
이것은 멋진 수행이다!
다시 시작하라!
긴장을 점검하라!
마음의 균형을 잡아라!
마음가짐, 기대, 갈망을 점검하라!
만들어내지 말라!
반응하지 말라!
그대가 항상 평화롭고 만족하며, 열반을 체험하기를.
방랑하는 비구 케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