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
영적인 길의 탐색은 괴로움[苦. 불만족. dukkha. suffering. unsatisfactoriness]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시작은 빛과 환희가 아니라 고통, 실망, 혼란의 험난한 가시밭길이다. 그러나 진정한 영적 탐색이 시작되도록 하려면, 괴로움이 단순히 외부로부터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괴로움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접하는 세상에 대한 피상적인 자기만족을 뚫고 들어가서, 마음의 밑바닥에 영구히 자리 잡고 있는 위험을 희미하게라도 느끼는 내면적 깨달음이 시작되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
단 한 순간이라도 이러한 지혜(insight)가 떠오르면, 심각한 개인의 위기를 극복하기 시작할 수 있게 된다. 지혜는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목표와 가치를 뒤바꾸고, 통상적인 선입관을 비웃고, 지금껏 즐겁기만 했던 향락을 단호히 불만족스러워 하게 만든다.
처음에는 이러한 변화가 대개는 환영받지 못한다. 자신이 보아서 알게 된 것을 부정하고, 의심을 묵살하고, 새로운 일을 추구함으로써 불만을 몰아내려고 한다. 그러나 일단 시작한 탐구의 불꽃이 계속해서 타오르고, 피상적 재조정에 의해 휩쓸려 버리게 내버려두지 않거나, 자신의 낙관주의와 타협하지 않는다면, 결과적으로 지혜라는 최초의 희미한 빛이 다시 불붙어서 우리는 또 한 번 자신의 본질적인 곤경에 빠지게 된다. 모든 탈출구가 막혀 있다면, 그때가 바로 자신의 불안을 종식시킬 길을 찾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맹목적으로 감각적 쾌락을 갈망하거나 사회의 통상적인 관습에 따라 휩쓸리면서 계속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 더 심오한 실재(reality)가 우리를 오라고 손짓한다. 보다 더 차분하고(stable) 보다 더 진정한 행복의 소리를 들었으니, 우리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에는 편안히 쉴 수 없게 되었다.
바로 그때 새로운 곤경에 봉착하게 된다. 일단 이러한 영적 가치를 추구하는 길로 들어서서 필요한 영적 가르침을 찾다보면 너무나 다양하고 서로 다른 교리들이 있음을 알게 된다. 과거와 현재의 영적 유산을 쌓아놓은 서가에는, 구경의 경지를 추구하는 우리의 탐구를 위해 단 한 권으로 정리된 책이 있지 않고, 제각기 가장 높은 경지의, 가장 빠르고 가장 강력하며, 가장 심오한 길임을 자처하는 수많은 영적 가르침과 수행 방식들이 시장의 상품처럼 널려 있다. 서로 다른 수많은 가르침 속에서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혼란스러운 상황에 직면할 때, 과연 어느 것이 진실로 우리를 자유롭게 해 줄 것인지, 우리가 필요로 하는 진정한 해결책인지, 어느 길이 잘못된 옆길인지를 올바로 판단하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요즘 인기 있는 해결책 중 하나는 절충식 접근 방법이다. 여러 전통에서 편리한 대로 취사선택하여 자기 입맛에 맞게 꿰어 맞추는 것이다. 불교의 사띠 수행법을 힌두교의 만트라 암송과 조합할 수도 있고, 기독교의 기도를 수피즘의 춤과, 유태교의 카발라를 티베트 불교의 이미지수행과 결합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식의 절충주의는 우선 아쉬운 대로 세속의 물질주의로부터 벗어나 영적인 삶의 색조를 띠게 하는 데는 다소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결국 그런 색깔은 얼마 못가서 바래게 마련이다. 절충주의는 잠시 쉴만한 길가 주막집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종착점까지 타고 갈 수 있는 믿음직한 수레가 될 수는 없다.
그것은 절충주의가 안고 있는 서로 맞물린 두 가지 결함 때문이다. 그 중 하나는 절충주의가 끌어내고 있는 전통들 각각의 신뢰성을 떨어뜨린다는 점이다. 삶의 질이 손쉽게 고양되기를 원한 나머지 위대한 여러 가지 전통들이 제시해 놓은 수행법들을 제멋대로 오려내고 붙이는 것만으로는 만족할만한 성과가 나올 수 없다. 왜냐하면 위대한 영적 전통일수록 그것이 제시해 놓은 수행법들은 각각의 독립된 기법들을 단순히 모아놓은 것이 아니라, 서로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전체로서만이 완전체가 되는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것들은 실재의 본질과 영적 탐구의 궁극적 목적에 대한 일관성 있는 통찰의 내용을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무릇 영적 전통이란 발을 살짝 담갔다가 쉽게 뺄 수 있는 얕은 개울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격렬하게 소용돌이치며 흐르는 강물 같아서 우리 삶의 마당을 온통 덮쳐 버릴 수 있다. 그 강을 따라 여행하기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배를 띄워 깊은 곳까지 나아갈 만한 용기를 지녀야 한다.
절충주의가 갖는 두 번째 결함은 첫 번째 결함으로부터 나온다. 원래 영적 수행체계들은 각기 제 나름의 진리관과 궁극적 선(善)에 대한 인식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서로의 단점을 보완해 줄 수 없게 되어 있다. 실제로 이러한 전통들의 가르침을 세밀히 검토해 보면 각기 세상 보는 눈에서 중요한 차이를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차이들은 단순히 동일한 내용에 대한 표현상의 차이라고 손쉽게 간주해 버릴 것이 아니라는 점이 드러난다. 그 차이들은 최고의 목표와 거기에 이르기 위해 걸어야 하는 길이 보여줄 서로 다른 경험들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영적 전통들이 제시하는 시각과 수행법들이 서로 차이가 나기 때문에, 절충주의는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어느 한 길을 택하여 진지하게 전념해 볼 태세가 갖추어지면 또 다른 중대한 문제가 기다리고 있다. 과연 어떤 길이 참된 깨달음과 해방으로 이끌어 줄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이 난제의 해결을 위한 방법은 궁극적 목표가 무엇인지 자문자답해 보는 일이다.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이 자유 그 자체인가, 아니면 자유로워져서 무엇을 해 보겠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인가?
저마다 옳다고 주장하는 여러 가지 종교 교리에 직면하여, 어느 것이 진실로 해방시키는 것, 즉 우리의 필요에 맞는 진실한 해답인지, 아니면 결점을 숨기고 있는 외도인지 평가하려고 할 때 당황하게 된다.
심사숙고하면 주요 요구사항은 괴로움을 종식시킬 방법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알게 될 것이다. 모든 문제는 궁극적으로 괴로움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리하여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괴로움을 ‘완전히’, ‘최종적으로’ 종식시키는 방법이다. 두 개의 단어, 즉 ‘완전히’와 ‘최종적’이란 말이 중요하다. 그 방법은 모든 형태의 괴로움을 종식시키는 ‘완전한’ 것이어야 하고, 괴로움이 다시 생길 수 없도록 소멸시키는 ‘최종적인’ 것이어야 한다.
위에서 살펴본 것들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당위의 문제라면, 실제로 괴로움을 철저히 최종적으로 종식시킬 길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하는 점은 이와는 별개의 현실 문제로 다가온다. 우리가 어떤 길을 끝까지 따라가 보기 전에는, 그 길이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다. 어떤 길을 끝까지 따라가 보기 위해서는 그 길의 효험에 대한 충분한 신뢰가 필요하다. 영적인 길을 선택하고 추구하는 것은 새 옷을 고르는 것과 같을 수 없다. 새 옷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옷을 거울 앞에서 직접 입어보고 그 중 가장 보기 좋은 것을 고르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영적인 길의 선택은 오히려 결혼하는 일에 더 가깝다. 평생을 함께 살아갈 배우자를 구할 때에는 누구나 밤하늘의 북극성처럼 믿음직하고 한결같은 반려자와 만나기를 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난관에 봉착하게 되면, 막다른 골목에서 우리를 안내해 줄 길이란 어디에도 없으니, 발길 닿는 대로 무작정 따라가 보거나 아니면 동전을 던져 점이라도 쳐 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선택할 때 우리가 걱정하는 것처럼 그렇게 맹목적이고 아무런 정보가 없는 것만은 아니다. 이런 경우에도 유용한 지침은 있기 마련이다. 영적인 길은 대체로 종합적 가르침의 틀을 갖추어 제시되고 있기 때문에, 그 가르침의 틀을 잘 검토해 보면 그 틀 속에서 제시되고 있는 길이 과연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길인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이런 문제를 검토할 때에는 다음 세 가지를 평가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
첫 번째 기준은 그 가르침이 괴로움의 범위에 대해 충분하고도 정확한 그림을 제시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 가르침이 제시하는 괴로움의 그림이 불완전하거나 결함이 있으면, 그런 가르침 또한 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어서 만족할 만한 해결책을 마련해 주지 못할 것이다. 환자에게 병에 대해서 충분하고 정확한 진단을 내릴 수 있는 의사가 필요한 것처럼, 괴로움으로부터의 해방을 구하는 우리에게도 갖가지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는 우리의 상황에 대해 믿음직하게 설명하는 가르침이 필요하다.
두 번째 기준은 괴로움을 생기게 하는 원인을 정확히 분석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 가르침은 외적 증상을 개괄하는 정도로 그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드러난 증상 아래에 깔려 있는 근본 원인까지 꿰뚫어보고, 그 원인을 정확하게 설명해 주어야 한다. 어떤 가르침이 원인 분석에서부터 잘못되어 있다면 치료에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세 번째 기준은 처방 즉 길 자체와 관련된 것이다. 어떤 가르침이든 그것이 제시하는 길은 반드시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제거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그 길은 괴로움의 원인부터 제거함으로써 괴로움을 완전히 종식시킬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 그 길이 괴로움을 근본적인 수준에서 해결할 수 없는 것이라면, 궁극적 의미에서 그 길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런 식의 가르침은 병의 증상을 가시게 함으로써 병이 완전히 치료된 것처럼 느끼게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뿌리가 속에서 계속 자라는 치명적 병에 걸린 사람이 겉으로 성형수술이나 받고 만족할 수 있겠는가?
요컨대 괴로움을 종식시키는 참된 길을 제시하고자 하는 가르침이라면, 다음 세 가지 조건을 제대로 갖춘 것이어야 한다. 첫째 괴로움의 범위와 깊이에 대해 완전하고도 정확한 그림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고, 둘째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정확한 분석을 내놓아야 하며, 셋째 괴로움의 원인을 뿌리째 뽑을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여기는 세상의 온갖 영적인 교리들을 이 세 가지 기준에 의해 비추어 일일이 따져보는 자리가 아니다. 우리는 다만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담마)과 법이 괴로움의 문제에 대해 제시하는 해결책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에 대해서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것이 갖추고 있는 본연의 성질 즉 세상의 처음과 끝을 설명하면서 덮어놓고 믿음을 강요하는 식의 종교적 교의의 형태를 취하지 않고, 괴로움으로부터의 해방을 경험을 통해 스스로 확인할 수 있다는 메시지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선 문제 해결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 메시지는 괴로움의 종식으로 이끄는 길을 구체적인 수행방식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 길이 바로 팔정도이다. 이 팔정도는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심장이나 다를 바 없다. 팔정도를 발견함으로써 부처님의 깨달음이 개인적인 깨달음에 머물지 않고 보편적인 의미를 띠게 되었고, 그래서 그분은 일개 현자나 자비로운 성자의 지위를 넘어 “세상의 스승”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제자들의 눈에 비친 그분의 모습은 다음과 같이 그려지고 있다.
생긴 적이 없는 길을 생기게 하신 분, 만들어진 적이 없는 길을 만드신 분, 설해진 적이 없는 길을 설하신 분, 길을 아시는 분, 길을 보신 분, 길을 안내하시는 분.
그분 자신도 다음과 같은 말로 구도자들을 고무하고 약속하신다.
그대 스스로 힘써 노력하라.
여래는 다만 길을 보여줄 뿐.
누구든지 이 길을 따라 수행하는 자는
악마의 굴레에서 벗어나리라.
팔정도가 과연 해방으로 안내하는 확실한 길인지 점검하기 위해, 앞서 언급한 세 기준에 비추어 부처님께서 괴로움의 범위를 어디까지 잡는지, 또 원인을 어떻게 분석하는지, 치료책으로 어떤 처방을 제시하는지 검토해 봐야 한다.
1.1 괴로움의 범위
부처님은 괴로움을 피상적으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의 초석으로 삼고, 자신의 메시지를 요약한 사성제를 설명할 때, 인생은 둑카(dukkha)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먼저 가르친다.
이 둑카라는 빠알리어는 보통 괴로움(苦. suffering)으로 번역되지만, 본래의 의미는 육체적 고통이나 정신적 고통보다 좀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깨달은 사람을 제외한 보통 사람들의 일생 동안 계속되는 근원적인 불만족(unsatisfactoriness)에 관한 것이다. 이 불만족은 때로는 슬픔, 비통, 실망, 절망 등의 형태로 표출되기도 한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둑카는, 세상은 결코 완전하지도 않고, 마땅히 어떠해야 한다고 우리가 기대하는 대로 적절하지도 않기 때문에 생기는 구체적이지 않은 모호한 느낌으로, 우리의 인식의 주변을 맴돌고 있다.
둑카가 이렇다는 사실(fact)이 단 하나의 진정한 영적 문제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다른 문제들, 즉 몇 백년간 종교학자들이 논란한 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질문들을 부처님은 “인간을 해방시키는 방법이 아니다.”라고 조용히 옆으로 젖혀두신다. 그분은 단지 괴로움과 괴로움의 종식, 즉 둑카와 둑카의 소멸만을 가르친다고 말씀하신다.
부처님은 일반론으로 끝내지 않고, 둑카가 가지고 있는 명백한 면과 미세한 면을 파헤치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는 가까운 곳, 인생 자체가 가지고 있는 육체적 과정이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괴로움에서부터 시작한다. 둑카는, 태어나고, 늙고, 죽는 사건이 생길 때, 병들고, 사고가 발생하고, 부상당하여 감수성이 예민할 때, 심지어는 배고프고 목마를 때 나타난다. 둑카는 또한 불쾌한 상황에 대해 마음이 반응할 때, 즉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만나기 싫은 사람과의 만남,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함에 의한 슬픔, 분노, 좌절과 두려움으로서 나타난다.
부처님은 즐거울 때에도 둑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말한다. 즐거움이 계속되는 동안은 행복하지만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는다. 언젠가 즐거움이 사라지고 나면 상실감만 남는다.
우리의 삶은 대부분 쾌락에 대한 갈망과 고통에 대한 두려움의 연속이다. 우리는 한 가지를 뒤쫓고 다른 한 가지로부터 도망치면서 하루를 보내어, 평화롭게 만족하는 날이 거의 없다. 진정한 만족은 마치 수평선처럼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곳에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평생 동안 구축한 자기자신을 포기하고, 모든 것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뒤에 남겨 두고 죽어야만 한다.
그러나 죽는다고 해서 삶의 과정(life process)이 끝나는 것이 아니므로, 죽음조차도 우리를 둑카의 종식으로 데려가지 않는다고 부처님은 가르치신다. 한 생에서 육체의 생명이 끝나면, 마음이 하나씩 끊임없이 생멸하면서 계속 이어지는 것인 ‘마음상속(mental continuum)’즉 ‘의식의 흐름(the individual stream of consciousness)’은 어디선가 새로운 육체를 물질적 바탕으로 삼아 다시 이어진다. 그리하여 태어나고, 늙고, 죽는 순환은 존재하고자 하는 갈망에 의해 몇 번이고 계속된다.
부처님은 윤회(saṁsāra)라는 재생의 순환이 시작을 알 수 없는 시간으로부터 계속되고 있다고 단언한다. 시작한 장소가 없고, 시작한 시간적 기원이 없다. 아무리 먼 과거로 되돌아가더라도, 언제나 우리는 전생의 한 생명체에서 다른 생명체로 삶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부처님은 지옥, 축생, 인간, 천상계 등의 여러 가지 세계에서 재생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들 중 어느 곳도 최종적인 피난처를 제공하지 못한다. 어느 곳에서의 삶도 끝이 있다. 그것은 비영구적이어서 둑카의 심오한 의미인 불안정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이유로 둑카의 완전한 종식을 열망하는 사람은 어떤 상태이든 세간의 성취에 만족할 수가 없고, 총체적으로 불안정한 소용돌이로부터의 해방을 쟁취해야 한다.
1.2 괴로움의 원인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괴로움을 종식시키는 가르침은 괴로움의 근본 원인에 대해 신뢰할 수 있게 설명해야 한다. 괴로움을 멈추게 하는 것이 목적이므로, 괴로움이 시작되는 곳에서 괴로움 및 그 원인을 멈추게 해야 한다. 원인을 멈추게 하려면, 괴로움이 무엇이고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철저히 알아야 한다. 부처님은 “둑카의 원인에 대한 진리[集聖諦]”를 밝히는데 부처님은 가르침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시고, 그 근원이 우리 마음 안에 있다는 것 즉 우리 존재에 속속들이 스며들어 마음을 어지럽히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 및 세상과의 관계를 해치고 근본적인 질병으로 내재하고 있음을 밝히셨다.
보통 “번뇌(defilement)”로 번역되는 빠알리어 “낄레사(kilesa)”라는 불선 마음부수에서 이런 병폐의 조짐을 발견할 수 있다. 가장 기본적인 세 가지 번뇌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다. 탐욕은 자기중심적인 욕망으로서, 쾌락과 소유에 대한 욕망, 생존 욕구, 그리고 권력, 지위 및 명성과 관련하여 자아를 유지하려는 충동 등을 말한다. 성냄이란 부정적인 반응, 거절 등의 무안을 주는 행위, 짜증, 비난, 증오, 앙심, 분노, 폭행을 의미한다. 어리석음은 영적 어둠으로서 명료하게 이해하는 것을 방해하는 둔감한 덮개를 말한다.
이 세 가지 뿌리에서 자만, 질투, 야망, 무기력, 거만, 기타 여러 가지 번뇌가 생긴다. 그리고 이 모든 번뇌의 뿌리와 줄기로부터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의 둑카 즉 고통과 슬픔, 두려움과 불만, 목적 없는 생사의 윤회가 생긴다. 그러므로 괴로움에서 해방되려면 번뇌를 제거해야 한다.
번뇌를 제거하는 작업은 체계적으로 해야 한다. 괴로움은 사라져 버리기를 원하기만 하면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없애기 위해서 치밀하게 조사해야 하는 것이다. 번뇌가 무엇을 근거로 해서 발생하는지 알아야 하고, 어떻게 하면 그 원인을 우리의 힘으로 제거할 수 있는지 알아야 한다.
부처님은 다른 모든 번뇌를 일어나게 하는, 즉 다른 모든 것들의 뿌리가 되는 하나의 번뇌가 무명이라고 가르쳤다. 무명은 단순히 지식이 없음을, 어떤 특정한 정보가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세부적인 지식을 아무리 많이 축적해도 무명은 여전히 건재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럴수록 더 무섭게 약삭빨라지고 빈틈없게 된다. 괴로움의 근원적 뿌리라고 할 때의 무명은 우리의 마음을 덮고 있는 근본적 어둠을 말한다. 때로는 무명이 단순히 올바른 이해를 흐리게 만드는 소극적 태도를 취하다가, 다른 때에는 능수능란한 사기꾼이 되어 수없이 많은 인식과 개념을 만들어내는 적극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면 마음은 자기자신의 착각이 만든 것인 줄 모르고, 원래 세상이 그런 것이라고 이해한다.
이러한 잘못된 인식과 개념(concept)이 번뇌를 키우는 토양이 된다. 마음은 즐길 거리가 됨직한 것을 겉만 보고 그대로 받아들이는데, 그것이 결국 탐욕이 된다. 우리는 기쁨을 얻기를 갈망하지만, 장애가 나타나면 화가 나고 혐오하게 된다. 또는 잘 모르는 상태에서 허둥대다 보면 어리석음에 빠져든다.
이리하여 우리는 둑카의 온상을 발견한다. 즉 무명에 의해서 번뇌가 발생하고, 번뇌에 의해서 괴로움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인과 결과의 토대가 존재하는 한 우리는 아직 위험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감각적 쾌락, 사회적 쾌락, 영적 쾌락, 감성적 쾌락 등의 쾌락과 향락을 누릴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쾌락을 경험하더라도, 아무리 고통을 회피하는 데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인 문제가 우리의 존재 핵심에 그대로 남아있어서, 둑카의 영역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1.3 괴로움의 원인 제거
자신을 괴로움으로부터 완전하고도 최종적으로 해방시키려면, 괴로움의 근원을 제거해야만 되는데, 이는 곧 무명을 제거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어떻게 무명의 제거에 착수하는가? 그 대답은 명백히 무명의 반대인 지혜의 특성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무명이란 현상의 실제 모습을 모르는 상태이므로, 이를 제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현상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대한 지식(knowledge)이다. 단순히 개념적이거나 관념적인 지식이 아니라, 인지된 지식이며, 앎(knowing)이고 봄(seeing)이다. 이런 종류의 앎을 지혜라 부른다. 지혜는 무명에 의해 왜곡된 것을 교정한다. 지혜는, 마음과 실재(實在, reality) 사이에 우리의 마음이 설정해 놓은 관념이나 견해나 판단에 물들지 않고, 현상을 있는 그대로 직접적이고도 즉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 준다.
무명을 제거하기 위하여 지혜가 필요하다면 지혜는 어떻게 해야 생기는가? 현상의 궁극적 본성에 대한 명백한 지식이므로, 지혜는 단순히 배우거나, 어떤 사실들을 모으거나 축적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지혜는 계발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지혜는 우리들이 계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일련의 조건들을 통해서 생긴다.
이 조건들은 실질적으로 마음의 구성성분들인 마음부수인데, 말 그대로 목적지로 향하는 “도(道, path)”라고 부를 수 있는 체계적인 구조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 목적지란 괴로움의 종식이며, 그 곳으로 인도하는 길이란 여덟 가지 요소들로 구성된 팔정도를 말한다. 여덟 가지 요소들은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사띠(正念), 바른 삼매(正定)이다.
부처님은 이 길을 중도라고 부르신다. 그것은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두 가지 잘못된 시도인 두 극단을 피하기 때문에 중도이다. 하나는 감각적 쾌락에 빠지는 극단인데, 욕망을 충족시킴으로써 불만을 없애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쾌락을 주기는 하지만, 쾌락은 거칠고, 일시적이며, 심오한 만족이 결여된 것이다. 부처님은 감각욕망이 인간의 마음을 강력하게 지배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사람들이 감각적 쾌락에 얼마나 강하게 집착하게 되는지도 꿰뚫어 아셨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런 쾌락이 출리(出離)에서 오는 행복감에 비해서 매우 저급한 것이기 때문에, 결국 구경의 경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감각욕망을 끊을 필요가 있다는 것도 되풀이해서 가르치셨다. 그래서 부처님은 감각적 쾌락에 빠지는 것을 “저급하고 속되고 범속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목표로 인도하지 못한다.”고 하셨다.
다른 하나의 극단은 고행인데 자기 몸을 괴롭힘으로써 해방되고자 하는 시도이다. 이 방법은 해방되고자 하는 간절한 염원에 기인하는 것이겠지만, 결국은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 버리고 만다. 문제의 진실한 원천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사로잡힌 마음인데, 속박의 원인을 육체라고 간주하는 것이 잘못이다. 번뇌로부터 마음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몸을 괴롭히는 것은 부질없는 일일뿐 아니라, 해방을 위해 필요한 도구인 몸을 훼손하고 쇠약하게 하는 자기 파괴적인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두 번째 극단을 “고통스럽고 성스럽지 못하고 목표로 인도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
이 두 방법을 벗어나서, 두 극단 사이를 절충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갖고 있는 잘못을 범하지 않음에 의해 두 방법을 초월한다는 의미에서 팔정도를 중도라고 한다. 팔정도는, 탐욕의 무익함을 인식하여 그것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는, 출리를 강조함으로써 감각욕망에의 탐닉이라는 극단을 회피한다. 행복과는 거리가 먼 감각욕망과 쾌락은 괴로움의 원천이니 해방을 원한다면 우선적으로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출리를 실천해야 한다고 해서 몸을 괴롭히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영적 훈련이고, 이를 위해서 몸은 내적인 작업을 감당해 낼 수 있도록 건강해야 한다. 따라서 몸이란 잘 보살펴야 되고, 건강하게 유지되어야 하는 것인 반면에, 영적 기능들은 해방시키는 지혜가 생기도록 잘 훈련되어야 한다. 그것이 “눈(cakkhu)과 지혜(ñāṇa)를 생기게 하고, 적정(upasama)과 특별한 지혜(abhiññā)와 깨달음(sambodhi)과 열반(nibbāna)으로 인도하는” 중도 즉 팔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