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바른 견해(정견)
팔정도의 여덟 가지 요소들은 하나가 끝난 다음에 다음 요소를 차례차례 밟아가야 하는 단계가 아니라 구성요소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이는 마치 여러 가닥을 꼬아서 만든 밧줄이 여러 개의 가닥을 꼬아서 만들었기에 기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수행이 어느 정도 진전된 다음에는 8개 요소가 모두 서로가 서로를 지원하면서 동시에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그 수준이 되기 전까지는 팔정도를 시현하기 위해 어느 정도는 순서대로 익혀야 한다.
실제적인 훈련의 관점에서 여덟 개의 요소는 다음과 같이 세 개의 그룹으로 나뉜다.
(ⅰ) 도덕 무더기[戒蘊]: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ⅱ) 집중 무더기[定蘊]: 바른 정진, 바른 사띠, 바른 삼매
(ⅲ) 지혜 무더기[慧蘊]: 바른 견해, 바른 사유
이 세 그룹은 삼 단계의 훈련[三學], 즉 더 높은 도덕 훈련(계학), 더 높은 집중 훈련(정학) 그리고 더 높은 지혜 훈련(혜학)에 해당한다.
세 가지 훈련의 순서는 팔정도의 전체적인 목표와 방향에 의해 정해진다. 팔정도가 지향하는 최종 목표가, 궁극적으로 무명을 뿌리 뽑음에 의한 괴로움으로부터의 해방이므로, 팔정도의 클라이맥스는 어리석음에 직접적으로 맞서는 훈련이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즉 꿰뚫어 보는 이해력을 계발하기 위해 설정된 지혜(wisdom) 훈련이다. 지혜는 점차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아주 희미한 위빳사나 지혜(insight)라도 나타나려면 들뜸과 산만함이 사라진 집중된 마음이 되어야만 비로소 가능해진다.
삼학의 두 번째 분야인 집중은 보다 높은 의식 상태에서 훈련할 때 생기며, 이 집중에 의해 지혜를 계발하는 데 필요한 고요함과 침착함이 길러진다. 그러나 마음이 집중되려면 마음에 작용해서 주의를 산만하게 하고 온갖 걱정에 시달리게 하는 불선한 성향을 점검해야만 한다. 불선한 성향은 기회가 주어지기만 하면 몸과 입을 통해서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으로 계속 밖으로 표출된다.
그러므로 훈련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번뇌의 도구가 되지 않도록 신업과 구업을 억제할 필요가 있다. 이 과제는 삼학의 첫 부분인 도덕 훈련(계학)에 의해 달성된다. 그리하여 팔정도는, 집중의 기초가 되는 도덕 훈련, 지혜의 기초가 되는 집중 훈련(정학), 해방에 도달하는 직접적인 도구로서의 지혜 훈련(혜학)이라는 세 단계로 나뉘어 전개된다.
팔정도의 요소 배열과 계정혜의 순서가 일치하지 않아서 혼란스럽게 느껴진다. 바른 견해와 바른 사유를 포함한 혜학은 계정혜에서 제일 마지막 단계이지만, 팔정도에서는 마지막이 아니라 시작 단계에 배열된다. 이는 실수가 아니라 논리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즉, 초기 단계의 바른 견해와 바른 사유는 삼 단계 훈련을 시작하도록 고무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바른 견해는 팔정도의 수행에 대한 시각을 갖게 하고, 바른 사유는 수행의 방향을 제시한다.
그러나 두 요소들의 역할은 준비로만 끝나지 않는다. 도덕 부문과 집중 부문에서의 훈련으로 마음이 청정하게 된 다음에는, 수승한 단계의 바른 견해와 바른 사유로 돌아와서, 보다 높은 단계에서 적합한 지혜 훈련을 하기 때문이다.
바른 견해는 전체 팔정도의 선구자로서 다른 모든 요소들의 안내자이며, 우리들로 하여금 출발점, 목적지 그리고 수행이 향상되어 감에 따라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들을 이해하게 해 준다. 바른 견해라는 기반 없이 수행을 시작하려고 하는 것은, 지도를 보거나 숙달된 운전자의 의견을 경청하지도 않고 목적지로 차를 몰고 가는 것에 비유된다. 자동차의 핸들을 잡고 출발할 수는 있겠지만, 목적지에 접근하기보다는 오히려 멀어지기 십상이다. 원하는 장소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그곳을 향한 대략적인 방향과 그곳으로 가는 길을 알아야만 한다. 바른 견해를 기반으로 하는 이해의 틀에서 시도되는 팔정도의 수행도 이와 비슷하다.
실재(reality)와 가치라는 중대한 문제에 관한 우리의 시각들은, 단순히 이론적인 신념을 넘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바른 견해의 중요성이 평가될 수 있다. 그것들은 태도, 행동, 존재에 대한 전체적인 방침 결정을 지배한다. 우리의 견해는 마음속에 명확하게 설정되어 있지 않을 수도 있다. 단지 신념에 대한 어렴풋한 개념적 이해만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설정되어 있든 아니든, 표현되어 있든 아니든, 이러한 견해들은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친다. 그것들은 인식을 구성하고, 가치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세계 속에서 우리의 존재 의미를 자신에게 설명하는 관념의 틀 속으로 고착된다.
이러한 견해들이 행동의 조건이 된다. 이것들은 선택과 목표 뒤에 존재하며, 우리는 이러한 목표를 실현하려고 노력한다. 행동 자체가 결과를 결정하지만, 행동은 그에 따른 결과와 더불어 원천인 견해에 따라 나름대로 정해진다.
견해는 “존재론적인 표현” 즉 무엇이 실재하는 것이며 진실한 것이냐는 의문에 관한 의견을 의미하므로, 견해는 두 가지 종류, 즉 바른 견해와 잘못된 견해로 나뉜다. 전자는 실재하는 것이고, 후자는 실재하지 않는 것이므로 잘못임이 분명한 것이다.
부처님은, 이 서로 다른 두 종류의 견해들은, 전혀 다른 방향의 행동을 유발하여 결국 반대의 결과로 인도한다고 가르치신다.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으면, 견해가 확고하지 않더라도 결과적으로 괴로움으로 향하게 한다. 반면에, 바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면, 바른 행동을 하도록 조정하여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방향으로 향하게 할 것이다. 세상에 대한 개념적 방침 결정이 하찮은 것 같아 보이지만, 면밀히 조사해 보면 앞으로 전개될 모든 과정을 결정짓는 요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은 불선한 마음부수를 생기게 하는데 잘못된 견해처럼 책임 있는 요소가 없으며, 선한 마음부수가 생기게 하는데 바른 견해처럼 도움을 주는 요소가 없다고 말씀하신다. 또한 부처님은, 중생의 괴로움에 잘못된 견해보다 더 책임 있는 요소가 없으며, 중생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데 바른 견해보다 더 강력한 요소가 없다고 말씀하신다.
넓게 보면 정견은 부처님의 가르침(담마) 전부의 정확한 이해를 포함하므로 그 범위는 담마 자체의 범위와 일치한다. 그러나 실제 수행을 위해서는 두 종류의 정견이 우선적으로 두드러진다.
하나는 세속에서 기능하는 견해인 세간의 정견이고 다른 하나는 세속으로부터 해탈로 이끄는 출세간적 정견인 수승한 정견이다. 세간의 정견은 육도를 윤회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물질적 정신적 향상을 관장하는 법칙으로서 높은 단계 또는 낮은 단계의 생으로 태어나는 원리 및 세속적 고락과 관련된 것이다. 이에 비해서 두 번째 것은 해탈에 필수적인 원칙들에 관련된 것으로서, 우리가 생을 거듭하는 가운데 정신적 향상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할 뿐 아니라 반복되는 생과 사의 순환에서 벗어나는 궁극적 해탈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2.1 세간의 정견
세간의 정견에는 업의 법칙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포함된다. 그것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업 자기재산 정견”인데, 이를 정형구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중생들은 자기 업의 주인이고, 자기 업의 상속자이며, 자기 업에 의해 태어났으며, 자기 업에 묶여 있고, 자기 업으로 유지된다. 선업이건 불선업이건 자신이 지은 업의 상속자가 된다.”
세간의 정견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도 다음과 같이 경전에 나온다.
“‘① 보시도 있고 ② 헌공도 있고 ③ 선사(善事)도 있다.
④ 선업과 불선업의 과보가 있다. ⑤ 이 세상과
⑥ 저 세상도 있다. ⑦ 어머니와 ⑧ 아버지를 섬길 의무가 있고, ⑨ 화생하는 중생도 있고 ⑩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여 알게 할 수 있는 사문, 바라문들이 있다.’라고 하는 것은 정견이다.”
이렇게 표현되고 있는 정견을 의미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업(業 kamma)라는 용어의 의미부터 알아야 한다. 업은 행위를 의미한다. 불교에서 행위에 해당하는 것은 의도적인 행위, 즉 도덕적으로 분명히 의도를 가지고 하는 행위이다. 왜냐하면 의도야말로 행위에 윤리적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행위와 의도를 같은 것으로 간주하는 데에 조금도 망설이지 않으셨다.
업을 분석하는 경에서 부처님은
“비구들이여, 내가 업이라고 하는 것은 의도(cetanā)를 말한다. 의도가 생겼기에 사람은 몸과 말과 마음으로 업을 짓는다.”
고 언명하셨다.
업을 의도라고 하는 업을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고, 마음의 욕구나 성향이나 목표를 실현시키고자 하는 정신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의도는 몸이나 말이나 마음이라는 세 가지 통로를 통해 나타나는데, 이를 ‘업의 문[業門 kammadvāra]’이라고 한다.
몸을 통해 표현되는 의도는 신업(身業)이며, 말을 통해 표현되는 의도는 구업(口業)이고, 생각 계획 사상 기타 정신 작용이 밖으로 표현되기 이전 상태의 의도를 마음으로 짓는 업[意業]이라 한다. 따라서 의도라는 한 가지 요인은 드러나는 경로에 따라서 세 가지 형태의 업으로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업에 대한 이런 정도의 개괄적 뜻풀이만으로는 정견을 갖기에 부족하다. 정견을 위해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첫째, 윤리적으로 구분되는 선업과 불선업이 있다는 것, 둘째, 구체적으로 무엇이 선업이고 무엇이 불선업인지, 셋째, 이런 업이 생기는 근본적인 뿌리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경에 이렇게 쓰여 있다.
“고귀한 제자가 무엇이 불선업인지를 알고, 그 불선업의 뿌리를 알고, 또 무엇이 선업인지를 알고 그 선업의 뿌리를 알면, 그는 곧 정견을 가진 것이다.”
(i) 이런 점들을 정리해 보면 먼저, 업은 불선한(akusala) 것과 선한(kusala) 것으로 구분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선업은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 영적 계발에 방해가 되는 것, 나와 남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것이다. 반면에 선업은 도덕적 면에서 권장할 만한 것, 영적 계발에 도움이 되는 것, 나와 남에게 이로움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ii) 선업과 불선업의 각각에 해당하는 사례는 수없이 많지만 부처님께서는 중요한 것을 열 가지씩 선택하여 이를 열 가지 불선업 및 열 가지 선업이라 부르셨다. 이 열 가지 중 세 가지는 몸으로, 네 가지는 말로, 그리고 나머지 세 가지는 마음으로 짓는 업이다. 열 가지 불선업을 표출되는 문에 따라 분류해보면 다음과 같다.
신업(kāyakamma)
1. 살생
2. 주지 않은 것을 가짐
3. 잘못된 성행위
구업(vacīkamma)
4. 거짓말
5. 이간질하는 말
6. 거친 말
7. 쓸데없는 말
의업(manokamma)
8. 간탐
9. 악의
10. 사견(邪見)
이 열 가지 불선업에 반대되는 것이 바로 열 가지 선업이다. 다시 말해 앞의 살생에서부터 쓸데없는 말까지의 일곱 가지 불선업을 짓지 않고 간탐과 악의에서 벗어나고, 정견을 갖는 것 열 가지가 선업이다. 설령 앞의 일곱 가지 불선업을 짓지 않으려는 생각이 오직 마음에서 그칠 뿐 명백한 외적 행위를 수반하지 않더라도, 육체적, 언어적 선업으로 간주하는 것은, 그런 마음상태가 몸과 말의 기능을 제어하는 데 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iii) 업은 앞에서 ‘뿌리(mūla)’라는 근본 동기들에 입각해서 선과 불선으로 구분되며, 이 근본 동기에 따라 수반되는 의도의 도덕적 성질이 달라진다. 그래서 업은 그 뿌리가 선한지 불선한지에 따라 선한 것이 되기도 하고 불선한 것이 되기도 한다. 선업과 불선업의 뿌리는 각각 세 갈래이다. 선의 뿌리는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탐욕(lobha), 성냄(dosa), 어리석음(moha)인 세 가지 번뇌이다. 이 번뇌들로부터 비롯된 행위는 모두 불선업이 된다.
세 가지 선의 뿌리는 이와 반대로서 옛 인도 어법대로 부정의 접두사 ‘a(없음. 無)’를 붙여 탐욕 없음(alobha), 성냄 없음(adosa), 어리석음 없음(amoha)으로 표기되는 것들이다. 이 세 가지가 어휘상으로 부정적 형태를 띠고 있지만, 세 가지 번뇌가 없다는 것을 뜻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에 따르는 덕성까지도 포함한다. ‘탐욕 없음’은 출리(出離), 초연함, 관대함을 내포하고 ‘성냄 없음’은 자애, 연민, 친절을, 그리고 ‘어리석음 없음’은 지혜를 내포한다. 이 세 가지 뿌리에서 나오는 행위는 어떤 것이든 선업이 된다.
업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어떤 행위의 윤리적 성질 여하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낳는 효능에 있다. 우주에 편재하는 하나의 법칙이 있어 이 법칙의 작용으로 일체의 의도가 빚는 행위는 응보적 결과로 끝을 맺는다. 이 결과를 과보(vipāka) 또는 과(果. phala)라 한다. 행위와 그 과보를 잇는 이 법칙은, 불선한 행위는 고통을 가져오고 선한 행위는 행복을 가져온다는 단순한 원리로 작용한다. 과보는 당장 이루어져야 하는 것도 아니고 꼭 금생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도 아니다. 업은 여러 생에 걸쳐서 작용할 수도 있고 여러 겁을 잠재해 있다가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의도적인 행위를 할 때마다 의도는 의식의 흐름에 흔적을 남기고 이 흔적은 잠재력으로 저장된다. 저장된 업이 숙성을 도와주는 조건들을 만나면 잠재 상태에서 깨어나 어떤 결과를 촉발시켜 원래의 행위에 상응하는 과보를 가져오게 한다. 이런 과보는 금생에서 일어날 수도 있고 다음 생, 또는 그 다음의 어느 생에서 나타날 수도 있다. 업은 재생의 원인이 되어 다음 생의 존재 형태를 결정할 수도 있고, 한 생애 속에서 행복과 고통, 성공과 실패, 발전과 퇴보 등 다양한 경험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때 어떤 방식으로 업이 성숙하든 선업은 좋은 결과를, 불선업은 좋지 못한 결과를 낳는다는 보편법칙에는 변함이 없다.
이 원칙을 인지하는 것은 세간의 정견을 갖는 것이다. 일단 이런 견해가 확립되면 다른 다양한 형태의 사견과는 공존할 수 없으므로 사견들을 즉시로 배제할 수 있다. 즉, 금생의 내 행위가 미래의 나의 운명에 영향을 미친다는 견해를 확실히 인정하게 되면, 우리의 삶이 금생에서 끝나고 우리의 의식은 죽음과 더불어 끝난다는 허무주의는 설 자리가 없게 된다.
또 이 견해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원칙에 입각하여 선과 악, 정과 사를 구분하기 때문에, 선악을 개인적 의견의 단순한 발로나 사회 통제를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윤리적 주관주의와도 상반된다. 또 이 견해는 사람들이 자기가 처한 상황 속에서 어느 정도 제약이 있기는 해도 자유롭게 행위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따라서 우리의 선택이 언제나 어쩔 수 없는 필요에 따라 내려질 뿐이고, 그러므로 자유의지란 환상이며 도덕적 책임 역시 근거가 없다고 주장하는 ‘완고한 결정론적’ 노선과도 상반된다.
업과 그 과보를 바로 살펴보라는 정견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함축하고 있는 내용 중 어떤 부분은, 오늘날의 사고경향과 상충되는 면이 없지 않기 때문에 그 차이점을 분명히 밝히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 정견에 대한 가르침은 선과 악, 정과 사의 문제가 일반적으로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무엇이 좋고 나쁘며 무엇이 옳고 그른가 하는 상투적 의견들을 초월하는 심오한 문제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 한 사회 전체가 무엇이 도덕적으로 바른 가치인지에 대해 혼란에 빠질 수 있고, 그래서 심지어 그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어떤 특정 행위를 옳다고 손뼉을 치고, 그와 다른 행위를 그르다고 비난한다 해서 그 도덕적 가치가 진정으로 옳거나 그른 것은 아니다.
부처님의 입장에서는 도덕적 기준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객관적이며 따라서 가변적일 수 없다. 행위의 도덕성 여부는 그 행위가 어떤 상황에서 이루어졌느냐 하는 조건에 매여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어떤 행위를, 또는 그 행위를 이루는 배경인 도덕규범을 평가할 도덕성의 객관적인 기준은 엄존한다.
도덕성에 대한 이러한 객관적 기준이야말로, 우주적 진리인 담마(법. dhamma)에 불가결한 것이다. 의도가 행위가 나오며 행위자에게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가져다준다는 사실, 그리고 행위와 그 결과간의 상응성은 근본적으로 의도 그 자체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 이러한 사실들은 담마의 타당성에 초개아적 기반이 되는 것이다. 신과 같은 재판관이 있어서 상벌을 통해 우주적 상황전개를 관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직 행위 그 자체가 원래 띠고 있는 도덕적, 비도덕적 성격으로 인해 그에 알맞은 결과를 생기게 하고 있을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업과 그 과보에 관한 정견이라는 것은 스스로 깨달아 알게 된 것이 아니라, 모든 행위에는 도덕적 업력이 있다고 가르치는 저명한 영적 스승들의 말씀을 받아들여 알고 있는 수준일 것이다. 비록 스스로 확인해서 알게 된 것은 아니더라도 업의 원리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여전히 정견으로서의 일면은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정견은 이해하는 일, 특히 사물의 전 체계에서 인간의 위치를 이해하는 일과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수준의 견해 그 자체로도 정견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의도가 빚는 행위가 도덕적 힘을 발휘한다는 원리를 받아들인다면 그 사람은 이미 그만큼 우리 존재의 본질에 대해 중요한 사실을 제대로 파악한 셈이 된다.
뿐만 아니라 행위가 갖는 업의 효력에 대한 정견은 우리 이해범위 저 너머에 있는 순전히 믿음의 대상만은 아니다. 이 업의 원리는 우리가 직접 볼 수도 있다. 깊은 삼매의 어느 단계에 도달하면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는 초감각적 투시력인 ‘천안(天眼. dibbacakkhu)’이라는 특수한 기능(천안통)을 계발할 수 있다. 이 천안통이 생기면 업의 법칙이 중생의 세계에서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볼 수 있다. 중생들이 죽은 다음에 업에 따라 어떻게 재생하게 되며, 선업이나 악업의 과보로 행복을 누리거나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을 천안통으로 스스로 직접 볼 수 있게 된다.
2.2 수승한 정견
업과 그 과보에 대한 정견은 선한 행위를 할 충분한 근거를 마련하게 되고 따라서 윤회의 세계에서 상당히 높은 경지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지만, 그것만으로 바로 해탈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대다수 사람은 모처럼 업의 원리를 수용했음에도 막상 자신이 지향하는 목표를 세속적 성취에 한정시켜버리고 만다. 결국 선업을 짓는 동기가 지금 여기에서 번영과 성공을 가져올 선업을 축적하기 위한 것으로 되어버린다. 즉, 사람으로 행복하게 다시 태어나거나 또는 천상세계에서 행복을 누리는 데에 목표를 두게 된다.
사실 업의 인과 논리 안에는 업과 과보의 윤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욕을 일으키는 요소가 결핍되어 있다. 윤회라는 존재질서로부터 완전히 해탈하는 데 필요한 추진력을 얻기 위해서는, 좀 더 깊고 차원이 다른 안목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가장 높은 세계에 속하는 존재까지를 포함해서 모든 형태의 윤회하는 존재가 본래 가진 결함과, 그것이 안고 있는 괴로움의 성질을 꿰뚫어볼 수 있는 통찰지를 생기게 하는 안목이어야 한다.
해탈로 인도하는 이 수승한 정견은 곧 사성제(四聖諦)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다. 이 올바른 이해가 팔정도의 첫 번째 항목으로 등장하는 정견, ‘성스러운 정견’라는 이름 그대로의 정견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 정견의 내용을 사성제와 연관시켜 명백하게 규정하셨다.
정견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괴로움(둑카)에 대한 이해이고,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이해이고,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이해이고,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에 대한 이해이다.
팔정도는, 생각과 숙고를 통해서 어슴푸레하게 밖에는 이해될 수 없는 사성제의 개념적 이해로부터 시작되어, 궁극적 깨달음과 동등한 수준의 명철함을 통해서 사성제를 꿰뚫어 볼 수 있게 될 때 그 절정에 도달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성제에 대한 정견이야말로 괴로움을 종식시키는 길의 시작과 완성 모두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사성제의 첫 번째는 괴로움(둑카)에 대한 진리(고성제)이다. 이 괴로움은 중생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불만족인데, 모든 형태의 삶에 내재되어 있는 무상, 고통, 그리고 영속적 불완전성(무아)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이다. 태어남이 괴로움이며, 늙음이 괴로움이며, 병도 괴로움이며, 죽음이 괴로움이며, 슬픔, 비탄,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이 괴로움이다. 싫어하는 대상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怨憎會苦]이며, 좋아하는 대상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愛別離苦]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求不得苦]이다. 요컨대 다섯 가지 집착의 무더기가 괴로움[五陰盛苦]이다.
위의 마지막 구절은 주의해서 살펴봐야 하는 포괄적인 언명이다. ‘다섯 가지 집착의 무더기[五取蘊]’는 우리 존재의 본질을 분해해서 보는 방식에 의해 규명한 결과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의하면 결국 우리는 물질[色], 느낌[受], 인식[想], 형성들[行], 의식[識]이라는 다섯 가지로 이루어졌으며, 이 모두가 집착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바로 그 다섯이고, 그 다섯이 곧 우리다. 무엇을 자신이라 여기든, 무엇을 자신의 자아라고 우기든, 그 무엇은 결국 이 다섯 무더기라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 다섯 가지 무더기가 함께 작용하여 만들어낸 온갖 종류의 생각, 감정, 관념, 성향 속에서 살고 있으니 이것이 곧 ‘우리의 세계’다. 이렇게 해서 다섯 무더기가 바로 괴로움이라는 부처님의 단언은 사실상 우리의 모든 경험, 우리의 전 존재가 괴로움이라는 말과 같다.
그러나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왜 부처님께서는 다섯 무더기를 두고 꼭 괴로움이라고 단언해야만 했을까? 부처님은 다섯 무더기가 모두 괴로움인 이유는 그것들이 무상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그것들은 매순간 변한다. 생겼다가는 사라져버린다. 또 그것들 배후에 따로 이 변화를 겪어내는 어떤 실체(자아)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 존재의 구성요소들은 항상 바뀌고 있고 영속하는 어떤 핵심도 결코 존재하지 않기(무아) 때문에, 그 요소들 속에는 우리가 안전판으로 삼기 위해 붙들어 둘 만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끊임없이 해체되고 있는 흐름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영속을 구하는 욕심으로 붙들고 있으면 괴로움에 빠져들 뿐이다.
사성제의 두 번째 진리는 ‘괴로움의 원인’을 언급하고 있다. 부처님은 괴로움으로 귀결되는 일련의 마음의 번뇌 중에서 ‘갈애(taṇhā)’를 가장 파급 효과가 큰, 주된 괴로움의 원인으로 집어내셨다.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집성제)이다. 다시 태어나도록 하고, 환희와 탐욕이 함께 하며, 여기저기서 즐기는 것이 갈애이다. 즉 감각욕망에 대한 갈애[欲愛],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갈애[非有愛]가 그것이다.
세 번째 성스러운 진리는 이 인과 관계를 역으로 뒤집은 것이다. 갈애가 괴로움의 원인이라면 괴로움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갈애를 제거해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멸성제)이다. 그것은 이 갈애가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함, 버림, 놓아버림, 벗어남, 집착 없음이다.
갈애가 제거되었을 때에 오는 완전한 평화인 열반(조건지어지 않은 상태)은, 살아 있는 동안에도 탐진치의 불길이 꺼지면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네 번째 성스러운 진리는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도성제)’ 즉 열반의 체험으로 가는 길을 나타낸다. 이 길이 바로 성스러운 팔정도 그것이다.
사성제에 대한 정견에는 두 단계가 있다. 첫 단계는 진리에 수순(隨順)하는 정견(saccānu-lomika sammādiṭṭhi. 위빳사나 지혜를 말함)이고 두 번째는 진리를 꿰뚫어보는 정견(sacca-paṭivedha sammādiṭṭhi)이다. 진리에 수순하는 정견을 얻기 위해서는 그 진리가 우리들 삶 속에서 갖는 의미와 중요성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이런 이해는 처음에는 진리를 배우고 공부하는 데서 생긴다. 그 다음에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그 진리들을 깊이 숙고해 나가면, 그 이해가 더욱 깊어져서 드디어 그것의 진실성에 대해 강한 확신을 갖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 이르러서도 진리를 아직 투철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진리를 이해했다 해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채 개념의 문제에 그칠 뿐 여전히 미흡하다. 진리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수행을 시작할 필요가 있다. 이는 첫째 지속적 집중능력을 강화하기 위해서이고, 그 다음에는 통찰지(위빳사나 지혜)를 개발하기 위해서이다.
위빳사나 지혜는 존재의 구성요소들의 참다운 특성들을 판별하려는 목적으로 ‘다섯 무더기[五蘊]’을 관찰(위빳사나 수행)할 때 생긴다. 이러한 관찰이 절정에 이르게 되면, 위빳사나 지혜가 극도로 심화되어, 마음의 눈은 오온을 구성하는 조건에 매인 현상들을 떠나, 모든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인 열반 쪽으로 옮겨 간다.
이와 같은 ‘시선 옮김’의 결과 마음의 눈이 열반을 볼 때,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모두를 한꺼번에 꿰뚫어보게 된다. 괴로움을 넘어선 상태인 열반을 보게 됨으로써, 오온을 파악할 수 있는 안목을, 그리고 오온이 단지 조건 지어진 것이며 끊임없이 변하기 마련이기 때문에 괴로움이라는 것을, 충분히 아는 안목이 생긴다.
열반을 체험함과 동시에 갈애는 멈춘다. 이때 비로소 갈애가 괴로움의 진짜 원천이라는 사실이 이해된다. 열반을 보게 되면 존재가 빚어내는 소란으로부터 벗어난 평화로운 상태가 된다. 또한 팔정도를 수행함으로써 이런 경험을 하게 된 것이기 때문에 팔정도가 정말로 괴로움의 종식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도 스스로 알게 된다.
사성제를 꿰뚫어 보는 정견은 팔정도 수행의 시작이 아니라 마지막에 나타난다. 우리는 배우고 배운 것을 숙고함에 의해서 생기는 세간의 정견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 정견이 우리를 계정혜 삼학을 실천하는 수행의 길로 들어서게 한다. 이 수행이 무르익으면 지혜의 눈이 저절로 열려서 사성제를 꿰뚫어 보고 마음을 괴로움의 굴레에서 해방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