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바른 사유(정사유)
팔정도의 두 번째 항목은 빠알리어로 ‘삼마 상깝빠(sammā saṅkappa)’인데 저자는 이를 ‘바른 의도(right intention)’로 번역했다. 이 용어는 보통 ‘바른 사유[正思惟. right thought]’로 번역된다. ‘사유’이라는 말이 특별히 의지나 의욕과 같은 정신활동의 목적적, 능동적 측면을 지칭하며, 정신활동의 인지적 측면은 첫 번째 항목인 ‘정견’의 몫이라는 단서를 붙인다면 ‘바른 사유’란 표현도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인지적 측면과 능동적 측면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것 자체가 부자연스럽다.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마음의 이 두 측면은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밀접하게 서로 얽히어 상호작용하고 있다. 감정적 선호가 견해에 영향을 미치고 견해는 감정적 선호를 결정한다. 그래서 깊은 숙고를 통해 존재의 본질을 꿰뚫는 정견이 생기고, 탐구를 통해 그런 견해를 확인함에 의해 가치체계는 재구성된다. 가치체계가 재구성되면 새로운 시각이 생기고, 이 새로운 시각에 상응하는 목표 쪽으로 마음은 움직이게 된다. 그러한 목표들을 달성하기 위한 마음 씀이 바로 ‘바른 의도(right intention)’이다.*1
*주1: 역주: 다른 한국어 번역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삼마 상깝빠를 이하에서는 바른 의도라고 번역하지 않고 바른 사유(정사유)로 번역하기로 한다. 『아비담마 길라잡이 제2권』 143쪽에 의하면 삼마 상깝빠가 마음부수로는 “위딱까(일으킨 생각)”이다. 이를 “바른 의도”라고 번역하면 “쩨따나(의도)”와 혼동되므로, “바른 사유”로 번역했다.
부처님은 바른 사유를 세 가지로 설명하신다. 출리(出離. renunciation) 사유, 선의(善意. 악의 없음. good will) 사유, 불해(不害. 해치지 않음. harmlessness) 사유가 그것이다. 이 세 가지는 이에 대응하는 세 가지 바르지 못한 사유인 욕망(desire) 사유, 악의(ill will) 사유, 해침(harmfulness) 사유와 각기 대립하고 있다. 이 바른 사유들은 각기 상대되는 바르지 못한 사유들에 맞선다. 출리(出離) 사유는 욕망 사유에 맞서고, 선의(善意) 사유는 악의 사유에, 그리고 불해(不害) 사유는 해침 사유에 맞선다.
이처럼 생각이 두 갈래로 나뉜다는 사실을 부처님은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 이미 알고 계셨다. 숲 속에서 수행을 하면서 해탈을 추구하고 있을 때 자신의 사유가 두 가지 상이한 부류로 나누어질 수 있음을 발견하셨던 것이다. 부처님은 욕망, 악의, 해침 사유를 한 쪽에, 출리, 선의, 불해 사유를 다른 쪽에 세웠다.
첫 번째 부류의 사유가 생기는 것을 지켜볼 때마다 이런 사유들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고, 지혜를 흐리게 하고, 열반으로부터 멀어지도록 이끄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런 사실을 깊이 숙고하면서 부처님은 그런 사유들을 마음에서 몰아내고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셨다. 반면, 두 번째 부류의 사유가 생길 때마다 그런 사유들이 이로운 것이며, 지혜의 증장에 도움이 되며, 열반의 성취를 돕는다는 것을 아셨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런 바른 사유들을 더욱 강화하고 완성에 이르도록 하셨다.
바른 사유는 팔정도 중 앞에서 두 번째 자리, 즉 정견과 정어로 시작되는 세 가지 도덕적 요소들(정어, 정업, 정명) 사이에 위치하는 것이 마땅하다. 왜냐하면 마음의 사유하는 기능은 우리의 인식상의 시각과 실제 활동양태를 잇는 필수적인 연결고리이기 때문이다.
우선 행위 쪽에서 보면 행위는 언제나 사유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유는 몸과 말에 방향을 지시하고 그것이 행위로 옮겨지도록 몰아세우고, 그것을 마음이 지니고 있는 목적과 이상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등, 언제나 행위에 앞선다.
한편 이 목적과 이상, 즉 우리의 사유는 이번에는 다시 한 걸음 더 되돌아가 그것에 앞서 지배력을 행사하는 견해 쪽을 돌아보게 만든다. 따라서 그릇된 견해가 지배하고 있을 때는 거기서 산출되는 것은 그릇된 사유이며 다시 이는 불선한 행위를 일어나게 만든다. 그래서 행위의 도덕적 효율성을 부정하고 성공의 척도를 오직 이득이나 지위에 두는 사람은, 이득과 지위만을 열심히 추구하며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런 식의 추구가 확산되면 그 결과는 괴로움뿐이다. 그 결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재산과 지위와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애쓰는 개인, 사회집단, 국가들은 어마어마한 괴로움을 겪게 될 뿐이다. 끝없는 경쟁, 갈등, 불의, 억압의 원인이 마음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탐진치 삼독에 의해서 조종되는 사유들이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유가 바를 때는 행위도 올바를 수 있다. 그리고 사유가 올바르게 되는 데에는 정견만큼 확실한 보장도 없다. 행위에는 반드시 과보가 뒤따른다는 업의 법칙을 인지하게 되면,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목표를 이 법칙에 준해서 설정하게 된다. 이렇게 될 때 사유의 표현인 행동도 ‘바른 행위의 규범[戒]’을 따르게 될 것이다.
부처님은 사람이 삿된 견해를 가지고 있을 경우, 그런 견해에 바탕을 둔 행위와 말과 계획과 목적은 괴로움으로 인도하고, 바른 견해를 가질 경우, 그런 견해에 바탕을 둔 행위와 말과 계획과 목적은 열반으로 인도한다는 말씀으로 이런 이치를 간명하게 요약하신다.
정견을 설명하는 여러 체계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사성제에 대한 이해를 들기 때문에, 사성제를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는가에 따라서 바른 사유의 내용도 결정될 것이 틀림없다. 이런 사실은 곧바로 확인할 수 있다. 사성제를 자신의 삶과 연관해서 이해하면 출리(出離) 사유가 생기게 되고, 다른 중생들과 연관시켜 이해하면 다른 두 가지 바른 사유인 선의(善意) 사유와 불해(不害) 사유가 생긴다.
우리의 삶에 괴로움이 속속들이 스며있으며, 이 괴로움이 갈애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알 때, 출리 즉 갈애와 그 갈애의 대상들을 버리는 쪽으로 마음이 쏠릴 수밖에 없다. 다시 다른 중생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으로 사성제에 비추어 보면, 공부를 해나갈수록 선의를 베풀고 해치지 않아야겠다는 마음이 크게 자라난다. 다른 모든 중생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행복을 누리기를 바란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와 마찬가지로 괴로움을 겪고 있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모든 중생들이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는 고찰은 선의(善意) 사유, 즉 모든 존재의 안녕과 행복, 평화를 기원하는 자애를 불러일으킨다. 또한 모든 중생들이 괴로움에 노출되어 있음을 생각하면 해치지 않겠다는 생각, 즉 그들도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게 되기를 기원하는 연민이 생기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팔정도의 계발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정견과 정사유 두 항목은 힘을 합쳐 세 가지 불선한 뿌리인 탐진치를 약화시키기 시작한다. 인식에 있어 주된 번뇌인 어리석음은 지혜의 싹이라 할 수 있는 정견의 저항을 받게 된다. 정견이 완전한 깨달음의 단계로 발전해야 비로소 어리석음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겠지만, 미미한 수준의 정견들도 각각 어리석음의 완전한 파괴에 이바지한다. 다른 두 가지 뿌리인 탐욕과 성냄은 감성의 번뇌이기에 사유의 방향부터 고치지 않으면 안 된다. 출리, 선의, 불해에 대해 적극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탐욕과 성냄에 대한 교정수단이 된다.
탐욕과 성냄은 뿌리가 깊어서 쉽게 다스려지지 않는다. 그러나 효율적인 전략을 구사하면 이것들을 극복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다. 부처님이 고안한 팔정도는 간접적 접근방식을 활용한다. 즉, 탐욕과 성냄을 정면으로 공략하기보다 먼저 이것들이 일으키는 생각부터 다룬다. 탐욕과 성냄은 ‘생각’의 형태로 표출되기 때문에 그와 정반대되는 생각으로 대체시켜 나가는 일련의 ‘생각 바꿈’ 과정에 의해서 그 뿌리를 약하게 만들 수 있다.
출리를 의도적으로 거듭 생각하는 것은 탐욕을 다스리는 좋은 약이다. 탐욕이라는 번뇌는 관능적인 생각, 획득하려는 생각, 소유하려는 생각 등 욕심스러운 생각들로 표출된다. 한편 출리(出離) 사유는 탐욕없음이라는 선한 뿌리로부터 솟아나며, 개발하면 할수록 탐욕없음의 뿌리를 더 활성화시키는 환원적 기능을 한다. 서로 상반되는 생각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에 출리 사유가 생기면 탐욕스러운 생각은 밀려나게 된다. 그래서 탐욕없음이 탐욕의 자리를 대신하게 만드는 것이다.
똑같은 방식으로 선의(善意)와 불해(不害) 사유도 성냄에 대해 해독작용을 한다. 성냄은 화나 적의나 복수심 같은 악의의 생각으로, 아니면 잔인이나 공격이나 파괴충동 같은 해악의 생각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선의 사유가 악의를, 불해 사유가 해침을 막을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성냄이라는 불선한 뿌리 자체를 잘라 들어가는 것이다.
3.1 출리(出離) 사유
부처님은 당신의 가르침이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는 것이라 하셨다. 욕망의 길인 세상의 길을 따르는 깨닫지 못한 중생은, 행복을 충족시킬 수 있으리라고 상상하는 대상을 추구하며 행복을 찾아 욕망의 흐름에 자신을 내맡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출리라는 가르침은 이와는 정반대되는 길이다. 욕망의 유혹에 저항해야 하고 마지막에는 욕망을 버려야 한다고 하신다. 욕망 자체가 도덕적으로 나쁠 뿐만 아니라 괴로움의 뿌리이기 때문에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갈애와 갈애의 충동질을 외면해 버리는 출리야말로 진정한 행복의 열쇠가 되고 집착에서 벗어나는 길이 된다.
부처님은 모든 사람이 가정생활을 떠나 절로 들어가라고 요구하지도 않으셨고 또 따르는 사람들에게 모든 감각적 즐거움을 당장 포기하라고 이르지도 않으셨다. 출리를 실천함에 있어 어느 정도 버려야 할지는 각자의 성향과 처지에 달린 문제이다. 그러나 해탈하려면 갈애를 완전히 근절시켜야 한다는 것은 여전히 수행의 엄정한 지침이다. 갈애를 극복하는 만큼 공부의 진척은 촉진되기 마련이다. 물론 욕망의 지배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워도 그 필요성은 엄존한다. 갈애가 괴로움의 원인인 이상 괴로움을 끝장내려면 갈애를 제거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마음을 출리 쪽으로 향하게 하는 일이야말로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나 집착을 놓아버리려고 노력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강력한 내적 저항에 부딪치게 된다. 마음은 집착하고 있는 대상에 대한 장악력을 포기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토록 오랫동안 손에 넣고, 거머쥐는 데 익숙해진 습관을 마음 한 번 먹었다고 해서 쉽게 놓아버릴 수는 없다. 출리의 필요성을 잘 알고 있고 집착을 버리려고 하지만, 막상 그 필요성이 현실로 다가오면 마음은 뒤로 물러나 욕망의 손아귀 안에서 안주하고 계속 즐기려 든다.
그러므로 욕망의 족쇄를 과연 어떻게 부숴버릴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부처님은 결코 억압적 방법을 해결책으로 제시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무서워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가득 찬 채로 욕망을 몰아내려 덤비는 방법은 해결책이 아니라고 보시는 것이다. 이런 방법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문제를 표면 아래로 가라앉힐 뿐이다. 문제는 계속 뿌리를 뻗는다.
마음을 욕망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부처님께서 일관되게 제시하시는 도구는 이해이다. 진정한 출리는, 마음속으로 미련을 가진 채 억지로 사물을 포기하도록 자신을 다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이 더 이상 우리를 묶을 수 없도록 사물을 보는 눈 그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 욕망의 성질을 이해하게 될 때, 날카롭게 주의를 기울여 욕망을 면밀히 점검할 때, 욕망은 싸울 것도 없이 저절로 떨어져 나간다.
욕망의 장악력을 느슨하게 하기 위해서는 욕망은 언제나 어김없이 괴로움과 밀착돼 있음을 알 필요가 있다. 결핍감과 충족감이 끝없이 반복하는 욕망이라는 현상은 모두 사물을 바라보는 우리 눈에 의해서 좌우되는 문제이다. 우리가 욕망에 매인 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욕망을 행복 쟁취 수단으로 보기 때문이다. 욕망을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게 되면 욕망의 힘은 줄어들게 되고, 그 결과는 마침내 출리 쪽으로 이동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들의 인식을 바꾸는 데 필요한 것이 바로 ‘지혜로운 마음기울임(yoniso manasikāra)’이다. 인식이 생각에 영향을 미치듯이 생각도 인식에 영향을 미친다. 평소 우리들의 인식에는 ‘어리석은 마음기울임(ayoniso manasikāra)’이 섞여 있다.
보통 우리는 사물의 겉모습만 보거나 당장의 관심과 욕망에 이끌려 대충 훑어볼 뿐, 우리가 관여하고 있는 일의 뿌리를 파 보거나 장기적으로 미칠 결과를 철저히 탐구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행위의 기조를 이루는 어떤 숨어 있는 특정한 정신 상태를 주의 깊게 살펴보고 그 결과를 탐구하고, 우리의 목표가 지니는 가치를 평가해 보는 것과 같은 여러 가지 고려, 즉 ‘지혜로운 마음기울임’이 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점검할 때 우리의 초점은 무엇이 즐거운 것이냐가 아니라 무엇이 진실한 것이냐에 맞추어지게 된다. 우리는 편안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진실한 것을 찾아나갈 준비와 각오를 하게 된다. 진정한 안녕은 편안한 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진실한 쪽에 있기 때문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욕망에는 항상 둑카(괴로움)가 그림자처럼 따라 다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번뇌는 둑카가 아픔이나 짜증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불만에 의한 긴장상태로 지속되기도 한다. 어떻든 욕망과 둑카, 이 둘은 떼려고 해도 뗄 수 없는 동반자이다. 이 사실은 우리 마음속에서 욕망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고 있는지 그 전체 과정을 살펴보면 스스로 확인할 수 있다. 욕망이 처음 고개를 쳐들 때에는 부족감, 즉 결여의 고통을 만들어낸다. 이 고통을 없애기 위해 우리는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애를 쓴다. 이런 노력이 실패하면 우리는 좌절과 실망, 때로는 절망하기까지 한다.
성공의 즐거움 역시 이런 괴로움의 성격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모처럼 얻은 자리를 다시 잃게 될까봐 걱정한다. 우리의 지위를 확보하고 우리의 영역을 보호하고 더 많이 얻고, 더 높이 올라서고, 더 확고한 지배체제를 세우고 싶어 안달하게 된다. 이렇듯 욕망이 내세우는 요구는 끝없이 펼쳐진다. 뿐만 아니라 모든 개개의 욕망은 그 대상이 영원하기를 요구한다. 우리가 얻은 것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욕망의 대상들은 사실 영원하지 않다. 재산이나 권력이나 지위는 사라져버리고, 사람은 언젠가는 헤어질 수밖에 없다. 헤어짐의 고통은 집착의 강도에 비례한다. 강한 집착은 많은 고통을 가져오고 적은 집착은 적은 고통을 가져오며 집착이 없으면 고통도 없다.
욕망에 내재해 있는 둑카를 관찰하는 것 역시 마음을 출리 쪽으로 돌리는 한 가지 방법이다. 또 다른 방법은 출리가 가져다주는 이익을 곧바로 숙고하는 것이다. 욕망에서 출리로 이행하는 것을 혹자는 행복으로부터 슬픔으로, 풍요로부터 빈곤으로 이행하는 것으로 상상할지도 모르나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거칠고 뒤엉킨 쾌락에서 고양된 행복과 평화로, 노예 상태에서 자기자신을 다스리는 주인의 입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욕망은 궁극적으로 두려움과 슬픔을 낳지만 출리는 두려움 없음과 기쁨을 가져다준다. 이에 더해서 출리는 계정혜 삼학이 제각기 단계적 임무를 완수하도록 촉진시켜 준다. 다시 말해 계학은 정학을 위한 기초가 되고, 정학은 혜학을 위한 기초가 되며, 또 혜학은 더 높은 수준의 계학을 위한 기초가 되는 것이다. 출리는 행위를 정화하고 집중력을 도우며 지혜의 씨앗을 틔운다. 사실 수행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 전체 과정은 놓아버림이 발전해 가는 과정이며, 놓아버림의 궁극 단계인 열반, 즉 ‘중생을 형성하는 모든 기반 요소들을 놓아버림’에서 절정에 달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욕망의 위험과 출리의 이로움을 체계적으로 관찰하게 되면, 점차로 우리 마음을 욕망의 지배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 있다. 집착은 늦가을 나뭇잎처럼 자연스럽게 저절로 떨어져 나간다. 이런 변화가 갑자기 오는 것은 아니지만, 꾸준히 수행하기만 하면 언젠가는 틀림없이 오기 마련이다. 거듭거듭 관찰하고 있는 동안에 한 생각이 다른 생각을 쫓아내고 출리(出離) 사유가 욕망에 찬 사유를 제거하게 된다.
3.2 선의(善意) 사유
선의(善意) 사유는 악의(惡意) 사유인 노여움과 성냄에 지배되는 생각과 맞선다. 욕망과 마찬가지로 악의를 다루는 데 있어서도 두 가지 적절치 못한 방식이 있다. 한 가지는 행동이나 말로 분노나 혐오를 표현함으로써 악의에 굴복하는 것이다. 이 접근방식은 긴장을 당장 해소하고 분노를 자신의 몸 밖으로 뱉어버리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여러 가지 위험을 불러온다. 이런 접근 방식은 남의 원한을 사고 보복을 불러오며 적을 만들고 인간관계를 악화시키고 불선업을 생기게 한다. 이렇게 되면 결국에 가서는 악의가 몸 밖으로 나가기는커녕 몸속으로 더 깊이 스며들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계속 망가뜨리게 된다.
다른 한 가지 접근 방식은 악의를 억압하는 것인데 이 또한 악의의 파괴적인 힘을 없애버릴 수는 없다. 이 방식은 다만 악의의 힘을 돌려서 안으로 밀어 넣는 꼴이 되는데 이렇게 되면 이 힘은 자기비하, 만성우울증이나 이성을 잃고 폭력을 휘두르는 경향 등의 이상한 형태로 변하게 된다.
악의에 대응하는 처방으로, 특히 그 대상이 사람일 경우, 부처님께서 권하신 처방이 빠알리어로 ‘멧따(mettā)’라고 하는 ‘자애’이다. 이 말은 ‘친구(mitta)’라는 말에서 파생된 것이지만 일상적인 우정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여기서는 차라리 이 말을 ‘사랑어린 친절(loving kindness)이라는 복합어로 옮기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이 복합어가 다른 존재들에 대해 이기심 없는 강한 사랑의 느낌을, 그들의 평안과 행복을 위해 진심어린 관심으로 밖으로 방사한다는 본래의 의도를 가장 잘 살려낸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자애는 단순한 감상적 선의(善意)도, 도덕적 의무감이나 신의 뜻에 양심적으로 반응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어떤 형태의 의무감과도 무관해야 하며 자발적인 따뜻함을 특성으로 하는 깊은 내면적 느낌이어야 한다. 일체 중생의 안녕을 기원하여 자애를 간절히 방사하여 절정에 도달하면, 범천(梵天)이 거주하는 범천계[Brahmavihāra]’에까지 도달한다.
자애가 뜻하는 사랑은 관능적 사랑과 구별되어야 하며 물론 특수한 개인적 관계에 얽힌 사랑과도 구별되어야 한다. 관능적 사랑은 일종의 갈애로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고, 개인적 관계에 담긴 사랑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집착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우리에게 쾌락이나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우리의 가족이나 집단에 속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자아상을 강화시켜주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람을 사랑한다. 애정의 느낌이 자기와 관련된 요소를 완전히 벗어나는 경우는 아주 드물고 설령 벗어난다 해도 그 범위는 한정된 것일 수밖에 없다. 이런 애정은 특정한 개인이나 특정 집단 구성원들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결국 누군가는 제외시킬 수밖에 없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자애가 담고 있는 사랑은 몇몇 개인들에 대한 특정한 관계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자기와의 개인적 관련성이 전혀 없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자애의 마음으로 가득 채우는 데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이 자애의 마음이 완전한 것이 되려면 아무런 제한이나 유보 없이 일체 중생에게 퍼져나가는 보편적 마음상태로 계발되어야 한다. 자애에 이런 우주적 차원의 보편성을 주입하는 길이 바로 수행하면서 자애를 보내는 연습을 통해 자애를 계발하는 방식이다.
아무런 훈련 없이 저절로 생기는 선의(善意)의 감정을 분노에 대한 치유책으로 삼기에는 너무 산발적이고 범위도 제한되어 있다. 사랑을 의도적으로 계발한다는 발상은 부자연스럽고 기계적이며 계산적인 것이라고 비판할지도 모른다. 사랑은 일부러 불러일으키거나 노력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자연발생적일 때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여기에 이의가 있을 수 없다. 다만 불교에서 문제 삼는 것은 사랑이 어떻게 자발적으로 우러나는가 하는 것이다. 자발적으로 사랑하라고 마음에 명령할 수는 없기에 그것을 계발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실천하라고 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시작 단계에서는 의도적인 노력이 다소 필요하다. 그러나 수행을 해나가는 동안 사랑의 느낌이 마음에 차츰차츰 깊이 배어들어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성향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 자애 계발 방법이 불교 수행에서 아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자애 수행[慈愛觀. mettā-bhāvanā)이다. 이 수행은 자기자신을 향한 자애의 계발에서 시작한다. 자기자신을 자애의 첫 대상으로 삼는 이유는 진정한 자애는 자기자신에게 참다운 사랑을 느끼는 경우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분노나 적개심의 대부분이 사실은, 자기자신에 대해 품고 있는 부정적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애가 자기자신을 향하도록 하면 우리의 부정적 태도가 만들어 놓은 두꺼운 껍질을 녹아내리게 해서 친절과 동정이 밖으로 방사될 수 있다.
자기를 향해서 자애의 감정을 키워가는 데 익숙해지면 그 다음은 다른 사람들을 향해 자애의 감정을 펴는 단계이다. 자애의 확장은 자기의식을 변화시키고 자기의 정체성을 통상적 한계성 너머로 넓혀서 남들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이 변화는 방법론상 순전히 심리적인 것이며 모든 존재에 보편적 자아가 내재해 있다는 식의 신학적, 형이상학적 주장들과는 전연 무관하다. 이 변화는 단순하고도 매우 수월한 투영과정에서 시작되며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주관을 공유하게 되고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세상을 적어도 상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이 절차는 자기자신에서부터 출발한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우리 존재의 근본적인 열망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하는 바람임을 알게 된다.
일단 자신 속에서 이런 사실을 보게 되면, 우리는 곧바로 모든 중생이 이 같은 근본적인 소망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모두가 편안하고 행복하고 안전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남들을 향해 자애를 계발하려면 먼저 행복을 소망하는 그들의 내심을 상상력을 통해 공유하는 일부터 해야 한다. 행복을 향한 우리 자신의 욕구를 실마리로 삼을 수 있다. 우리 자신의 이 욕구로부터 추론하여 남들도 그러한 열망을 가졌으리라고 생각하여, 그들이 궁극적 목적을 성취하기를, 그들이 편안하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소망을 그들을 향해 보내는 것이다.
자애를 펼치는 방법은 처음에는 특정 그룹에 속하는 개인들을 향해 자애를 방사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 그룹의 배열순서는 먼저 자기와 가까운 쪽에서부터 시작해서 점차적으로 먼 쪽을 향하도록 한다. 처음에는 부모나 스승 중에서 친근한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해서, 다음에는 한 명의 친구에게로, 다음에는 중립적인 사람에게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나에게 적대적인 사람에게로 옮겨간다.
이런 관계 유형은 나와 그들과의 관계에 의해 규정된 것이긴 하지만, 여기서 계발해야 할 사랑은 그런 관계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그들 각자의 공통적 행복 염원에 기초한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각자에 대해 그의 모습을 초점에 떠올리고는 “그가 편안하고, 행복하고, 평화롭기를!”바라는 염원을 방사한다.
그 사람을 향해 선의와 친절의 따뜻한 느낌을 일으키는 데 성공한 다음에야 다음 사람을 향한다. 개개인에게 보내는 것이 어느 정도 성공하면 더 큰 단위를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모든 친구들을 향해, 모든 중립적인 사람들을 향해, 모든 적대적인 사람들을 향해 자애를 계발하려 노력한다. 그 다음에는 동쪽, 서쪽, 남쪽, 북쪽, 위, 아래 등 여러 방향으로 펴나가는, 방향에 따른 펼침에 의해 자애가 넓어질 수 있고, 그리고는 아무런 구별 없이 모든 중생에게 확대될 수 있다. 마지막에는 온 세상을 ‘방대하고, 숭고하고, 한량없고, 혐오도 싫음도 없는’ 자애의 마음으로 가득 채운다.
3.3 불해(不害) 사유
불해 사유는 잔인하고, 공격적이고, 난폭한 생각에 반하여 일어나는, 연민(karuṇā)에 이끌리는 생각이다. 연민은 자애를 보완해준다. 자애가 남들의 행복과 안녕을 기원하는 특성을 갖는 데 비해서, 연민은 남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기원하는 특성을 가지며, 이 기원 역시 일체 중생에게로 한량없이 뻗어나가야 할 성질인 것이다. 이 생각은 다른 사람의 속으로 들어가 그의 내면세계를 깊고도 총체적으로 공유함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다른 모든 중생이 우리 자신과 같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 바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고통과 두려움, 슬픔, 그 밖의 여러 가지 형태의 괴로움으로 인해 끊임없이 고통 받고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연민은 생긴다.
수행으로 연민을 계발하려면 실제로 고통 받고 있는 누군가를 마음에 두고 시작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연민은 실제 고통 받고 있는 사람을 향해서는 자연스럽게 우러나오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괴로움을 직접 목격한대로, 아니면 상상해서 그려보는 식으로 깊이 숙고한다. 그리고 나와 마찬가지로 그도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라고 내 마음에 비추어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반복하면서, 가슴 속에서 강한 연민의 정이 솟아오르게 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숙고한다.
그런 다음, 우리는 그 감정을 표준으로 삼아서 다른 개인들에게도 돌려가며 적용시켜 그들이 각각 어떻게 괴로움에 노출되어 있는지 생각하면서 그들에게 따뜻한 연민을 방사한다. 연민의 폭과 밀도를 더 높이려면 중생들이 접하는 가지가지 괴로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또한 괴로움의 여러 가지 모습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사성제의 첫 번째인 고성제가 훌륭한 안내자가 될 수 있다. 늙음을 피할 수도, 병에서 벗어날 수도, 죽음을 비켜갈 수도 없는, 그리고 슬픔, 비탄.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 등에 지배당하게 되어 있는 일체의 중생들을 숙고한다.
직접 괴로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숙고함으로써 높은 수준의 연민을 일으키는 데 성공한 다음에, 다시 부도덕한 수단을 통해 얻은 행복을 누리고 있는 내 눈앞의 사람들 쪽으로 관심을 돌릴 수 있게 된다. 그런 사람들은 겉으로는 행복을 누리는 듯 보이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틀림없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비록 그들이 내면적 고민의 흔적을 표출하지는 않지만 결국 악행의 쓰디쓴 과보를 받게 될 것이고 그 과보가 심한 고통을 안겨다 줄 것은 자명하다.
결국 이렇게 해서 이 숙고의 적용범위는 일체 살아있는 중생에까지 확대된다. 다시 말해 일체 중생이 자신의 탐진치에 떠밀려 생과 사를 돌고 돌면서 윤회의 보편적인 괴로움에 매여 있는 모습을 숙고하게 된다. 전연 낯선 중생들에 대해 연민을 일으키기가 쉽지 않을 경우에는 ‘시작이 없는 저 윤회의 길고 긴 과정에서 한 때 나의 부모 형제 자식이 아니었던 사람을 찾기는 어려우리라’는 부처님 말씀은 큰 도움이 된다.
요약하면 출리, 선의, 불해라는 세 가지 바른 사유는 욕망, 악의, 해침의 세 가지 그릇된 사유를 저지한다. 이런 바른 사유들이 일어나도록 숙고를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런 숙고는 단순히 이론적 섭렵의 대상이 아니라 계발되어야 할 실질적인 방법으로 전해져 내려왔다. 출리(出離) 사유를 계발하기 위해서는 세속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 괴로움과 밀착되어 있다는 점을 숙고해야 한다. 선의(善意) 사유를 계발하기 위해서는 모든 중생이 얼마나 행복을 갈구하는지를 숙고할 필요가 있다. 불해(不害) 사유를 계발하기 위해서는 모든 중생이 얼마나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바라는지를 숙고해야 한다.
불선한 사유는 마음속에 박혀 있는 썩은 나무못과 같고 선한 사유는 이것을 대체하기에 알맞은 새 못과 같다. 숙고를 실천하는 것은 새 못을 대고 두들겨 박아 낡은 못을 빼낼 때의 망치질에 해당한다. 새 못을 박는 일이 곧 수행이며 성공을 거두기까지 이러한 수행을 꾸준히 거듭할 필요가 있다. 부처님은 성공을 보증하셨다. 무엇이든 우리가 자주 마음을 쓰면 그것이 마음의 성향으로 자리 잡는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감각욕망이나 악의나 해치려는 사유를 자주 품으면 욕망, 악의, 해침이 우리 마음의 성향으로 자리 잡고, 그 반대쪽으로 마음을 자주 쓰면 출리(出離), 선의(善意), 불해(不害)가 우리 마음의 성향으로 자리 잡는다. 여기서 우리가 선택하는 방향은 우리 자신에게로 되돌아 와서 인생의 매순간 일으키는 사유에 반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