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지혜의 계발
바른 삼매가 성스러운 팔정도의 요소들 중에서 마지막 위치를 점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른 삼매 자체가 도의 최종적 절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삼매를 성취했다는 것은 마음이 고요해지고 안정되었으며, 마음과 함께 생기는 마음부수들을 통일시키고, 행복해지고 평온해지며 힘차게 될 전망을 활짝 열어젖혔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괴로움의 굴레에서 해방된 가장 높은 단계에 도달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괴로움을 종식시키려면 팔정도가 진리발견의 도구, 즉 사물의 궁극적 진실을 밝혀내는 통찰지를 생기게 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팔정도의 여덟 요소 모두가 협동적으로 기여해야 하며, 그러려면 정견과 정사유의 두 요소가 새로운 차원에서 재가동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까지 이 첫머리의 두 요소는 예비적 기능만 수행한 셈이다. 이제 그것들을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지금까지 정견은 현상을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데 그쳤지만 이제부터는 현상의 참 성질을 곧바로 꿰뚫어보는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 또 정사유는 모든 번뇌를 놓아버림, 다시 말해 깊은 이해에서 우러난 진정한 놓아버림이 되어야 한다.
8.1 세 가지 번뇌와 계정혜
지혜를 계발하는 문제로 들어가기 전에, 왜 집중만으로는 해탈을 성취하는 데 충분하지 못한지를 검토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집중이 해탈을 가져오기에 충분하지 못한 이유는 집중이 번뇌를 건드리면서도 그 근본을 뿌리 뽑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번뇌가 잠재성향 단계, 드러나는[明示] 단계, 범(犯)하는 단계라는 세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가르치신다. 가장 깊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잠재성향(anusaya)’ 수준인데 여기서는 번뇌가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고 잠복하고 있을 뿐이다. 두 번째 수준인 ‘드러나는(pariyuṭṭhāna)’ 단계에서는 번뇌가 여러 자극에 영향 받아 갑자기 강화되어 생각, 감정, 의욕 등의 형태로 물밀듯이 표면에 떠오른다. 그리고 세 번째 수준인 ‘범하는(vītikkama)’ 단계에서는 번뇌가 마음속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몸이나 말로 짓는 불선한 행위를 하도록 부추긴다.
이 번뇌의 세 층에 대응하여 그 각각을 적절히 저지하기 위해서 팔정도를 세 부분[三學]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계율수행은 불선한 신체적, 언어적 행위를 제어함으로써 번뇌가 범하는 단계에 도달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두 번째, 집중수행은 한층 더 깊이 들어가서 번뇌가 드러나는 단계에 대비하는 방어수단이 된다. 다시 말해 집중은 이미 의식에 나타난 번뇌들은 지워내고 또 한편으로는 계속 유입해 들어오는 번뇌들로부터 마음을 지켜낸다. 그러나 완전 본삼매의 깊이까지 집중을 추구해 들어가도 ‘마음상속(mental continuum)’ 내부에 잠복해 있는 잠재성향, 즉 고통의 근본적 원천까지는 건드리지 못한다. 이에 대해서는 집중도 속수무책인데 왜냐하면 이 뿌리들을 뽑아내기 위해서는 마음의 고요함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세 번째로, 통일된 마음의 평정과 고요함을 넘어 지혜(paññā) 수행이 요구된다. 즉, 근원적 존재양식 차원에서 현상을 꿰뚫어보는 눈이 필요한 것이다.
오로지 지혜만이 잠재성향을 뿌리째 뽑아낼 수 있다. 번뇌들 중 가장 기본적 요소이자 다른 요소들을 키우고 자리잡아주는 것이 바로 무명(無明)이며 지혜가 바로 무명을 치유하는 약이다. 무명이라는 단어가 ‘없을 무(無)’자를 앞세워 부정어 형태를 취하고는 있지만, 바른 앎이 결핍되어 있다는 실제적 부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무명은 오히려 우리 내면 구석구석을 파고들어 끊임없이 작용하고 있는, 방심할 수 없는 들뜬 마음부수인 어리석음이다. 그것은 인식을 왜곡하고, 의욕을 지배하며, 우리 존재의 전체 색조를 좌우한다. 부처님 말씀대로 “무명이야말로 참으로 위력적인 요소다.”
8.2 무상 고 무아
어리석음은 가장 기초적 작용 영역인 인지의 수준에서 인식, 사고, 관점에 침투해 들어와서 우리의 경험에 여러 겹의 전도를 덧씌워 경험을 엉뚱하게 해석하도록 만든다. 이런 전도 중에서도 다음 세 가지가 가장 중요하다. 무상을 영원이라고 하는 전도, 괴로움(苦)을 행복이라고 하는 전도, 없는 자아를 있다고 하는 전도이다. 모든 것은 변화하고 소멸한다는 사실을 언제 어디서나 확인할 수 있는데, 우리는 우리 자신과 세상을 견고하고 안정된 지속적인 실체라고 여긴다. 또 고통, 실망, 좌절을 거듭거듭 겪으면서도 우리는 즐거움을 누릴 천부의 권리라도 지닌 양, 조금도 기죽지 않고 마냥 기대에 부푼 채 어떻게든 즐길 거리를 늘리고 즐김의 강도를 높이고자 애를 쓰고 있다. 또 우리는 자신에 대해 스스로 만들어내는 각종 관념과 상(像. image)들이 마치 우리의 정체성을 뒷받침하는, 반론의 여지가 없는 진실인 것처럼 집착하면서 우리 자신을 일체가 완비된 자아로 인식한다.
어리석음이 사물의 진정한 본성을 가려서 감추는 데에 반해, 지혜는 왜곡의 장막을 걷어내고 직접적 인식 특유의 생생함으로 현상을 근원적 존재양식 차원에서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다. 지혜 수행은 통찰지의 계발(위빳사나 수행 vipassanā-bhāvanā)에 집중된다. 통찰지란 우리가 직접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인 경험세계에서 존재의 진실성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의 본성을 깊고 포괄적으로 보는 것이다. 보통 우리는 경험 속에 잠겨서 경험과 완벽하게 동일화되어 경험을 파악하지 못한다. 경험을 떠나 살 수 없으면서도 오히려 경험의 성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맹목성 때문에 경험은 잘못 해석되고, 영원하고, 행복하고, 자아가 있다고 하는 전도에 농락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인식적 왜곡 가운데 자아가 있다는 전도가 가장 깊게 자리 잡고 있으며, 또한 가장 집요하다. 즉, 우리 존재의 중심에 진실로 확정된 ‘나'가 실존하며, 그것과 우리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관념이다. 부처님은 이 자아라는 관념이 그릇된 것이며, 가리키는 실질적 대상이 없는 순전히 가상(假像)에 불과한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그러나 순전히 가상에 불과한 자아라는 관념이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다. 가상의 자아는 실은 엄청난 재난을 초래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아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모든 것을 ‘나’와 ‘나 아님’, ‘내 것인 것’과 ‘내 것 아닌 것’으로 양분하게 된다. 그리고 양분법에 사로잡혀서 이 양분법이 낳은 움켜쥐거나 파괴하려는 충동이라는 번뇌의 희생물이 되어 결국 고통을 피할 수 없게 된다.
8.3 존재의 분석
우리가 모든 번뇌와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그것들을 지탱하고 있는 자아가 있다는 환상을, 무아를 깨달음에 의해 폭파하고 축출해버려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지혜의 계발이 담당해야 할 과업이다. 이 계발을 시작하는 첫 번째 걸음이 분석하는 일이다. 자아가 있다는 견해를 뿌리 뽑으려면 경험 세계를 여러 요소들로 나눈 다음, 다시 이것들 중 어느 것도 단독으로나 합쳐서나 자아라고 할 것이 없다는 점을 확인할 때까지, 조리정연하게 점검해 나아가야 한다. 다른 어떤 심리학보다 더 높고 심오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불교 아비담마(논장)의 특성은 ‘경험’에 대한 분석적 태도에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경험들이 마치 시계나 자동차처럼 부속품들로 분해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경험은 하위 단위로의 분해가 불가능한 단일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단일성은 실체가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기능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단일성을 띤다고 해서, 경험의 구성 요소들과 분리된 하나의 통합된 자아, 끊임없이 변천하는 흐름 속에서 불변의 동일성을 견지하는 그런 자아를 가정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8.3.1 오온과 십이처
우리가 가장 자주 사용하는 분석법은 ‘나’라는 존재를 물질[色], 느낌[受], 인식[想], 형성들[行], 의식[識], 이렇게 다섯 가지 집착의 덩어리들[五取蘊]로 관찰하는 것이다. 그 중 물질은 존재의 물질적 측면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는 감각기능들과 함께 신체 조직을 이루는 것이기도 하고 또 인식 대상으로 존재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른 네 가지 집합체들은 마음의 측면을 구성한다. 느낌은 정서적 색조를 제공하고, 인식은 주목하고 확인하는 요소이며, 형성들은 의욕적, 감정적인 요소들이며, 의식은 모든 경험에 불가결한 기본적 앎이다.
오온의 방식으로 분석해 들어가면, 보지도 못한 ‘자아’를 맹목적으로 들먹이는 대신, 경험을 오로지 그 구성요소 면에서만 보려는 시도가 가능해지게 된다. 이런 안목을 얻으려면 강한 사띠를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존재 요소 관찰 즉 법에 대한 사띠 수행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수행자는 오온과 오온의 생김과 사라짐을 관찰하며 살아가게 된다.
비구는 현상[法], 즉 오취온을 관찰하며 살아간다.
그는 물질이 무엇이며 어떻게 생기고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안다.
느낌이 무엇이며 어떻게 생기고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안다.
인식이 무엇이며 어떻게 생기고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안다.
형성들이 무엇이며 어떻게 생기고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안다.
의식이 무엇이며 어떻게 생기고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안다.
또는 수행자는 위의 방법 대신, 감각 경험의 여섯 안팎의 영역, 즉 여섯 감각 기능들과 그에 상응하는 여섯 대상들을 관찰할 수 있고, 그것들 간의 감각접촉으로부터 생기는 족쇄인 번뇌들을 주시하면서 살아갈 수도 있다.
비구는 현상[法], 즉 여섯 가지 안팎의 감각장소를 관찰하며 살아간다.
그는 눈과 형상,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닿음, 마음과 마음의 대상을 안다.
더 나아가서 이것들에 의지해서 생기는 족쇄도 안다.
그는 생기지 않았던 족쇄가 어떻게 생기며,
생긴 족쇄를 어떻게 버리며,
버린 족쇄가 장차 어떻게 다시는 생기지 않는지를 안다.
8.3.2 상호의존
존재의 요소들을 분석적으로 접근하는 데서 더 나아가 그 관계 구조의 측면에서 살피게 되면 자아관은 현저히 약화된다. 잘 살펴보면, 무더기[蘊]들이 조건에 의지해서만 존재한다는 것이 바로 드러난다. 오온 중에서 ‘나’라는 가정에 대한 근거가 될 만큼 온전한 자기 충족성을 띠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몸과 마음의 복합체의 요소는 무엇이나 시공의 양면으로 외연, 확장되는 광대한 사건들의 그물망에 매여 서로 의존해서 생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우리 몸은 정자와 난자의 결합으로 생긴 것이고 음식, 물, 공기에 의존해서 유지된다.
느낌, 인식, 형성들[行]은 몸과 감각기능들에 의지해서 생긴다. 그것들은 대상(예로 형상)과 그에 상응하는 의식인 안식(眼識), 그리고 감각기능(눈)의 매개에 의한 대상과 의식의 접촉에 의해 생긴다. 이번에는 의식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의식은 의식대로, 서로 맞물려 함께 생기는 마음부수들 및 감각기관에 의존한다. 다시 이 모든 생성과정은 윤회 속의 전생들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전 존재들의 모든 업(業)을 상속받고 있다. 따라서 그 어떤 것도 다른 것과 무관하게 스스로 존재하지 못한다. 모든 조건 지어진 현상들은 다른 것들을 조건으로 해서 상호의존하면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8.3.3 무상 고 무아로 분석
위의 두 접근 방식, 즉 오온의 분석과 연기적 안목은 자아라는 관념에 대한 집착을 끊는 데 크게 기여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만으로는 잘못된 인식에 의해 지탱되는 뿌리 깊은 자아에의 집착을 모두 파괴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이 미묘한 자아 집착을 뿌리 뽑기 위해서는 그것에 대응하는 인식, 즉 현상이란 알맹이가 없이 텅 비어 있는 것임을 직접 보는 통찰지가 필요하다.
이러한 통찰지는 존재를 이루는 모든 요소들을 무상(aniccatā), 불만족(dukkhatā), 자아가 없음(anattā)이라는 세 가지 보편적 특성[三法印]인 면에서 관찰함으로써 생긴다. 일반적으로 이 세 가지 특성 중 우리가 맨 먼저 분명하게 인식해야 할 것이 무상인데, 통찰지의 수준에서 무상은 모든 것이 결국 종말에 이르고 만다는 단순한 의미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 수준에서 무상은 더 깊고 더 보편적인 것을 의미하는데, 말하자면 조건에 매인 모든 현상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 거의 생기자마자 바로 부서지고 없어져 버리는 덧없는 사건들이라는 것을 뜻한다. 감각에 나타난 안정되어 보이는 대상들이, 실제로는 찰나적 형성들이 이어진 끈들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난다. 일반 상식적 의미의 인간 역시 물질적 사건들의 흐름인 색온과 나머지 정신적인 수온, 상온, 행온, 식온으로 구성된 정신적 사건들의 흐름, 이 두 가닥이 서로 꼬여 만들어낸 흐름 속으로 용해된다.
무상을 바로 볼 수 있는 경지에 이르면 다른 두 가지 특성에 대한 통찰지도 곧 뒤따라온다. 무더기[蘊]들이 항상 해체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지속적 만족에 대한 희망을 거기에 걸 수가 없다. 즉, 오온의 변화하는 성질 때문에 오온에 거는 기대가 무엇이든 그 기대는 산산조각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통찰지로 보면 오온은 ‘둑카(dukkha)’, 즉 가장 깊은 뜻에서의 ‘괴로움(苦)’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무더기들은 무상하고 만족스럽지 못하기에 자아로 받아들일 수 없다. 만약 무더기들이 자아나 자아에 속한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들을 우리 뜻대로 지배하고 조종할 수 있고, 영원한 행복의 원천으로 만들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오온을 지배하기는커녕 오온이야말로 바로 고통과 실망의 바탕임을 깨닫게 된다. 오온에게는 어떤 지배력도 통하지 않기 때문에 존재를 구성하는 요소이지만 자아가 아니며, 자아에 속한 것도 아닌 것으로, 단지 조건들에 의존해서 생기는, 텅 빈 주인 없는 현상에 불과한 것이다.
8.4 출세간
위빳사나 수행에 들어서면 팔정도의 여덟 요소들은 이전과는 다른 강도를 띠게 된다. 그것들은 우선 힘이 강해진다. 그리고 목표를 향해 밀어붙이는 응집력이 강한 하나의 통일체로 융합된다. 이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팔정도와 삼학(계정혜) 모두가 하나의 유기적 통합체로 된다. 제각기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다른 모든 것들을 받쳐 준다. 다시 말해 모두가 수행에 대해 자기만의 고유한 기여를 하는 것이다.
계학(戒學)에 해당하는 도덕적 훈련의 요소들(정어, 정업, 정명)은 강력한 주의력으로 탈선 성향들을 계속 감시함으로써, 비윤리적 행위는 엄두조차 내지 못하도록 만든다. 정학(定學)에 해당하는 요소들은 어떤 일이 일어나건 간에 그것을 흠잡을 수 없을 만큼 꼼꼼하게, 잊어버리는 일 없이, 산만함이 없이 관찰함으로써, 마음을 현상들의 흐름에 확고하게 고정되게 한다. 혜학(慧學) 중 정견은 이제 통찰지로서 점점 더 예리하고 심오해진다. 또 정사유 역시 시종일관 차분하고 균형 잡힌 관찰이 되도록 도움으로써 초연하게 한결같은 목적을 지향하는 본연의 자세를 견지한다.
통찰수행은 오온에 포함되는 ‘조건 지어진 형성들’을 대상으로 삼는다. 통찰수행의 과업은 형성들의 본질적 특성인 무상 고 무아를 가리고 있는 장막을 벗겨내는 일이다. 아직은 이 수행이 조건에 매인 사건들의 세계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위빳사나 단계의 팔정도를 세간도(lokiyamagga)라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위빳사나 수행의 목표가 기껏 세간적인 것에 그치므로, 목표를 성취한다 해도 윤회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위빳사나 수행은 어디까지나 초월을 추구하며 우리를 해탈로 이끌어준다. 다만 그것이 관찰하는 대상이 아직은 조건에 매인 세계임을 가리키고 있을 뿐이다. 이 조건에 매인 것에 대한 세간적 관찰은 어디까지나 조건에 매이지 않은 세계인 출세간으로 가기 위한 수레이다.
이 위빳사나 수행이 정점에 도달하게 되면, 그래서 형성된 모든 것들의 무상 고 무아를 완벽하게 알게 되면, 마음은 조건 지어진 것을 돌파하여, 조건 지어지지 않은 것인 열반을 깨닫게 된다. 마음은 열반을 직시하게 되며, 열반을 즉각적 깨달음의 대상으로 삼게 되는 것이다.
8.4.1 네 가지 출세간도
조건 지어지지 않은 것으로의 돌파는 출세간도(出世間道 lokuttaramagga)라 불리는 마음에 의해서 달성된다. 네 단계로 나타나는 출세간도는, 한층 더 깊은 수준의 깨달음, 더 완전한 수준의 해탈을 성취하며, 마지막 네 번째 단계에서 완전한 해탈을 이룬다. 이 네 가지 도는 서로가 아주 근접한 가운데서 달성될 수도 있는 것이어서, 비상하게 예리한 기능을 갖춘 사람은 앉은 그 자리에서 이 모두를 이루어내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시간이 걸리는 것이 보통이고 심지어는 여러 생에 걸쳐지기도 한다.
이 네 가지 출세간도는 모두 사성제를 꿰뚫어 본다. 즉 성자들은 개념적이 아니라 직관적으로 사성제를 이해한다. 즉 사성제를 존재에 대한 불변의 진리임을 직접 눈으로 보고 알게 된다. 네 가지 출세간도는 네 가지 진리를 한 순간에 모두 본다. 사고력이 이해수단인 숙고의 단계에서처럼 네 가지 진리가 순차적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사성제가 한꺼번에 보인다. 즉 출세간도로 하나의 진리를 보는 것은 네 가지 진리 모두를 보는 것이다.
도가 사성제를 꿰뚫어 보는 순간 마음은 각 진리에 상응하는 네 가지 기능을 동시에 수행한다. 마음은 조건에 매인 모든 존재들이 불만족이란 도장으로 날인되어 있는 것을 봄으로써 고성제를 완전히 파악한다. 이와 동시에 마음은 갈애를 버리고 괴로움을 반복적으로 생성하는 이기심과 욕구의 덩어리를 잘라낸다. 다시 마음은, 이제는 내면의 눈앞에 곧바로 드러나 있는 소멸[滅], 즉 죽음 없음(deathless)이라는 요소인 열반을 체험한다.
그리고 네 번째로 마음은 성스러운 팔정도를 증장시키는데, 팔정도의 여덟 요소들은 엄청난 힘을 받은 데다 출세간에 이르도록 충분히 성장했기 때문에 이제 마음껏 활짝 피어난다. 정견은 열반을 직접 봄으로써, 정사유는 열반에 마음기울임으로, 정어 정업 정명의 세 윤리적 요소들은 도덕적 탈선에 대한 제어로, 정정진은 출세간도 마음에의 에너지로, 정념은 사띠로, 그리고 정정은 한 점에 모아진 마음의 초점으로 제각기 활짝 피어난다. 마음이 동시에 네 가지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은 양초가 동시에 심지를 태우고, 초를 소모하고, 어둠을 몰아내고, 빛을 주는 것에 비유된다.
이 출세간도들은 번뇌를 근절하는 특별한 과업을 맡고 있다. 이 도들을 증득하기 전의 집중의 단계나, 심지어 위빳사나 수행의 단계에서도 번뇌는 잘려나가지 않은 채, 더 높은 정신 기능을 수행하는 기운에 눌려 약화되고 저지되고 억압되고 있을 뿐이었다. 번뇌는 의식의 깊숙한 밑바닥에서 언제든지 드러날 수 있는 잠재성향의 형태로 계속 꿈틀대고 있다. 그러나 출세간의 도에 이르면 마침내 번뇌를 근절하는 작업이 본격화된다.
8.4.2 수다원
우리를 윤회에 묶는다는 측면에서 번뇌를 분류하면, (1) 자아가 존재한다는 견해[有身見] (2) 의심 (3) 계행·의식에 대한 집착[戒禁取] (4) 감각욕망 (5) 악의 (6) 색계에 대한 집착 (7) 무색계에 대한 집착 (8) 자만 (9) 들뜸 (10) 어리석음[無明] 이렇게 열 가지로 이루어진 ‘족쇄(saṁyojana)’들이 된다. 네 가지 출세간도는 각기 특정 번뇌를 제거한다.
첫 번째인 ‘수다원도[豫流道 sotāpatti-magga]’는 이 중 가장 거친 앞머리의 세 가지 족쇄를 끊어내고 다시는 일어날 수 없도록 근절해 버린다. 자아가 존재한다는 견해인 오온 속에 자아가 존재한다는 견해는 일체 현상에 자아가 없음을 본 이상 끊어질 수밖에 없다. 부처님이 천명하신 진리를 파악하고, 스스로 그것을 보았기 때문에 ‘의심’이 또한 제거되고, 다시는 불확실성으로 인해 퇴행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해탈은 팔정도 수행을 통해서만 얻어질 뿐, 엄격한 도덕률이나 의식 준수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계행·의식에 대한 집착’에서도 벗어나게 된다.
이 도(道)에는 ‘과(果 phala)’라는 또 다른 출세간의 마음이 곧바로 따라오는데, 이것은 도가 행한 번뇌 제거 작업의 결과물이다. 각 도에는 그 자체의 과가 뒤따르는데, 이 과에서 마음은 세간의 마음 수준으로 다시 내려가기 전에, 잠시 몇 순간 동안 열반의 더없는 행복과 평화를 누린다. 첫 번째는 수다원도의 과를 경험한 사람은 ‘수다원(sotāpanna)’이 된다. 그는 궁극의 해탈로 실어다주는 법의 흐름에 들어선 것이다. 이제 그에게 해탈은 기약된 것이고 더 이상 깨닫지 못한 범부의 삶의 방식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의 마음 됨됨이 속에는 여전히 번뇌들이 남아 있기 때문에 최종 목적지에 도달하려면 일곱 생이 걸릴 수도 있겠지만,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서 필요한 깨달음이 생겼기 때문에 범부로 되돌아가는 일은 결코 없다.
8.4.3 사다함
예리한 기능을 갖춘 열성적인 수행자라면 수다원과에 도달한 후에도 노력을 늦추지 않고 되도록 빨리 모든 도를 마치기 위해 힘을 쏟는다. 그는 다시 위빳사나 관찰을 계속해서 통찰지의 단계를 통과하여, 조만간에 두 번째 도인 ‘사다함도(sakadāgāmi-magga)’에 도달한다. 이 출세간의 도는 족쇄 중 어떤 것을 완전히 근절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탐진치의 뿌리를 약화시키는 것이다. 이 도를 따라가면 수행자는 그 과를 경험하게 되고 이제 완전한 해탈을 얻기 위해 많아야 한 번만 더 이 욕계로 되돌아올 뿐인 ‘사다함’이 된다.
8.4.4 아나함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관찰에 몰두한다. 다음의 출세간 단계에서 그는 세 번째 도인 ‘아나함도(anāgāmi-magga)’에 도달하게 되고 거기서 ‘감각욕망’과 ‘악의’라는 족쇄를 끊어낸다. 이 시점 이후로는 어떤 경우에도 다시는 감각적 쾌락을 탐하는 욕구로 떨어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되며, 어떤 자극에 대해서도 분노, 혐오, 그리고 불만을 일으키지 않게 된다. 돌아오지 않는 자이기 때문에 그는 어떤 미래세에도 사람이라는 존재 상태로는 돌아오지 않는다. 바로 금생에 마지막 도인 아라한의 도에 들지 않으면 죽은 후에 색계(rūpaloka) 중 정거천(淨居天)에 재생하여 거기서 바로 해탈에 이르게 된다.
8.4.5 아라한
그러나 이 수행자는 다시금 발분 노력해서 위빳사나 지혜를 발전시켜 마침내 네 번째인 아라한도(arahatta-magga)에 든다. 여기서 드디어 나머지 다섯 족쇄들 ― 색계에 대한 집착, 무색계에 대한 집착, 자만, 들뜸, 무명을 끊어낸다. ‘색계에 대한 집착’은 네 가지 선에 의해서 접근할 수 있게 된, 보통 ‘범천계(梵天界)’라는 천상계에 태어나고자 하는 욕구이다. ‘무색계에 대한 집착’은 네 가지 무색계 선정에 의해 접근할 수 있게 되며, 무색계에 태어나고자 하는 욕구이다.
다음의 ‘자만(māna)’은 자신의 덕성과 재능을 과대평가함으로써 곧잘 빠지게 되는, 조악한 유형의 자존심이 아니라 개념적 차원의 명료한 유신견이 근절된 후에도 남아 있는 미세한 자아 관념이 지속되는 것이다. 이런 유형의 자만을 경전에서는 ‘내가 있다는 자만(asmimāna)’이라 한다. 다음으로 ‘들뜸’은 미처 완전히 깨닫지 못한 마음에 남아있는 미세한 흥분이며, 마지막의 ‘무명’은 사성제의 완전한 이해를 막는 근본적인 인식의 모호함이다. 두껍게 덮인 무명은 앞의 세 도에서 지혜의 기능[慧根]으로 마음에서 닦아냈지만, 아주 얇은 무명의 덮개는 심지어 아나함에게서도 진리를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아라한의 도는 마지막 무명의 덮개마저 벗겨내고, 나머지의 모든 번뇌들도 벗겨낸다. 이 도는 사성제의 완벽한 이해로 끝맺는다. 완벽한 이해는 첫째, 괴로움의 진리를 완전하게 파악한다. 둘째, 괴로움이 생기는 원천인 갈애를 근절한다. 셋째, 괴로움의 소멸에 해당하는 것으로, 조건에 매이지 않은 경지인 열반을 더할 나위 없이 명료하게 깨닫는다. 그리고 끝으로 팔정도의 여덟 가지 요소들의 계발을 완성시킨다.
네 번째 도(道)와 과(果)에 도달함으로써 수행자는 바로 이생에서 모든 족쇄로부터 해방된 사람인 아라한이 된다. 아라한은 팔정도를 끝까지 걸었고, 빠알리어 경전에 다음과 같은 정형구로 자주 언급되고 있는 궁극적 경지를 실제로 구현하는 삶을 살게 된다.
“태어남은 다했고 청정범행은 성취되었으며 할 일은 다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아라한은 더 이상 도를 닦는 자가 아니라 도의 살아 있는 구현자인 무학(無學)이다. 도의 여덟 가지 요소를 완성의 경지까지 발전시켰기 때문에 이제 이 해방된 자[解脫人]는 그 요소들의 결실인 깨달음과 구경의 해탈을 누리며 산다.
맺는말
이것으로 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신, 괴로움으로부터 시작해서 해탈로 끝나는 길인 팔정도를 대략적으로 설명했다. 지금 우리 위치에서 이 도의 높은 경지에 이르는 것은 요원해 보이고, 팔정도 수행이 요구하는 것을 충족시키는 것도 어렵게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그 실현의 고지들이 지금은 아득히 멀지라도, 거기에 이르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은 바로 여기 우리 발밑에 있다. 우리는 언제든지 이 도의 여덟 가지 요소들에 접근할 수 있다. 그것들은 결단과 노력만 기울인다면 얼마든지 우리 마음속에 확립시킬 수 있는 마음부수들이기 때문이다.
우선 바른 견해를 갖고(정견), 욕심을 버리는 방향으로 생각하는 일(정사유)부터 시작하면 된다. 다음으로 우리의 행위인 말과 행동과 생계를 순화한다(정어, 정업, 정명). 이런 조치를 기반으로 해서 우리는 정진과 사띠를 수단으로 삼아 집중과 통찰지를 계발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 나가야 한다.
그러면 남는 것은 결과를 얻으려고 안달하지 않고 점진적으로 수행하고 발전하는 일에 스스로를 맡기는 것뿐이다. 그 진전은 사람에 따라 빠를 수도 있고 느릴 수도 있다. 그러나 빠르다고 우쭐할 것도, 느리다고 안달할 것도 없다. 꾸준히 지속적으로 수행하면 필연적 결과로 해탈은 반드시 따라온다. 최종 목표에 이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오로지 시작하는 것과 계속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만 충족시키면 목표는 반드시 성취될 것이다. 이것이 잘못될 수 없는 법칙인 담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