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한 지위의 성취
바히야 다루찌리야는 범천의 말에 정신이 번쩍 나서 열반으로 가는 도(道)를 추구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곧장 사위성으로 향했다. 단 하룻밤 사이에 120요자나(약 1,680km)를 가서 다음 날 아침 사위성에 도착했다.
부처님께서는 바히야가 오고 있는 것을 아셨지만, 진리를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믿음 등의 그의 근기가 무르익지 않은 것을 아셨다. 그 근기가 무르익게 하기 위하여, 바히야가 도착하기 직전에 많은 비구들을 대동하고 탁발하러 시내로 들어가셨다.
부처님께서 제따와나 수도원을 떠나신 다음에 바히야가 수도원에 도착하니, 아침 식사 후의 나른함을 방지하기 위하여 몇 명의 비구들이 산책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부처님께서 어디 가셨는지 물었더니, 시내로 탁발하러 가셨다고 대답했다. 비구들은 그에게 어디서 오셨냐고 물었다.
“스님들이시여, 나는 숩빠라까에서 왔습니다.”
“대단히 먼 곳에서 오셨군요. 발을 씻으신 다음, 발에 기름을 바르시어 편안하게 하시고, 잠시 쉬시지요. 세존께서는 머지않아 돌아오셔서 그대를 만나실 것입니다.”
비구들이 아주 친절하게 호의를 베풀었지만 바히야는 성급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다.
“스님들이시여, 내 생명에 어떤 위험이 닥칠지 모릅니다. 나는 120요자나의 거리를 한 번도 쉬지 않고 단 하룻밤 사이에 왔습니다. 휴식하기 전에 세존을 만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라고 말하면서 시내로 들어가니, 비할 데 없는 풍모를 갖추신 부처님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걸어가시는 부처님을 보면서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아, 세존을 뵈올 기회를 가지려고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가!”
그는 부처님을 처음 발견한 그 자리에서 넋이 나간 사람처럼 서 있었다. 그의 심장은 환희로운 만족감으로 충만하였으며, 눈은 깜빡이지도 않고 부처님 한 사람에 고정되었다. 부처님께 예를 갖추려고 몸을 굽히자, 그의 몸이 부처님의 찬란한 후광에 휩싸였다. 숭배하는 마음으로 오체투지하면서 세존께로 다가가서, 존경의 표시로 세존의 발을 어루만지고는 거기에 열광적으로 키스하고 말했다.
“세존이시여, 저에게 법문을 하나 해 주십시오. 잘 설하신 분의 법문은 저에게 오랫동안 유익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바히야여, 지금은 법문하는 시간이 아니다. 우리는 시내에서 탁발 중이다.”
(원주: 여기에서 이렇게 반문할 지도 모르겠다. “부처님께서 중생을 위한 일을 하시는데 부적절한 시기가 있는가?” 그 대답은 이렇다.
여기서 ‘부적절한 시간’이란 부처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부처님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사람에 대한 것일 뿐이다. 어떤 사람의 근기가 붓다의 메시지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 없는지를 아는 것은 보통 사람의 능력을 벗어난다. 이에 관한 한 심지어는 보통의 아라한일지라도 마찬가지이다. 바히야의 근기는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법문하지 않는 이유를 단지 “우리는 탁발 중이다”라고만 말씀하시고, 근기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신 것이다. 포인트는, 부처님께서는 법문을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 언제나 법문하실 준비가 되어 있지만, 부처님께서는 그가 준비가 되어 있는지 아직 덜 되어 있는지를 아신다는 것이다. 세존께서는 듣는 사람의 근기가 무르익기 전에는 법문하지 않으셨다. 해봐야 그를 깨닫게 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바히야는 두 번째로 말했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께 어떤 위험한 일이 일어날지를 모르고, 또한 제 생명에 어떤 위험한 일이 일어날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세존이시여, 저에게 법문을 하나 해 주십시오. 잘 설하신 분의 법문은 저에게 오랫동안 유익할 것입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두 번째로 말씀하셨다.
“바히야여, 지금은 법문하는 시간이 아니다. 우리는 시내에서 탁발 중이다.”(원주: 바히야의 근기가 아직도 무르익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대답한 것이다.)
(원주: 여기서 바히야가 자신의 안전에 대해서 그렇게 걱정한 것은, 이번 생이 그의 마지막 삶이 될 운명이므로 그의 과거의 공덕이 그의 안전에 대해서 화급함을 언급하도록 촉구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윤회하는 삶의 마지막 생을 살아가고 있는 이는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바히야에게 법문하시고자 했으나 다음 이유로 두 번째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부처님께서는, 바히야가 여래를 만난 것에 대해 환희로운 만족감에 압도되어 있는데 이것이 위빠사나 지혜(통찰지)를 얻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과, 그의 마음이 평온한 상태로 고요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게다가, 바히야는 단 하룻밤에 120요자나의 험난한 여행을 해서 육체적으로 몹시 지쳐 있었기 때문에 법문을 유익하게 들을 수 있으려면 좀 쉬어야 했다.)
세 번째로 바히야는 부처님께 간곡하게 청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다음 사항을 아시고 그에게 법문할 때가 되었다고 결정하셨다.
⑴ 바히야의 마음이 평온한 상태가 되었다.
⑵ 육체적으로 좀 쉬었기 때문에 피로가 회복되었다.
⑶ 그의 근기가 무르익었다.
⑷ 그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간단히 법문하셨다.
“① 바히야여, 그런 까닭으로 너는 이렇게 수행해야 한다. 어떤 사물을 볼 때 봄을 단지 봄 그대로 알아야 하고, 소리를 들을 때 들음을 단지 들음 그대로 알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냄새나 맛이나 감촉대상을 경험할 때, 각각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함을 단지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함을 경험하는 그대로 알아야 하며, 마음의 대상 즉 생각이나 관념을 인지할 때 단지 인지함 그대로 알아야 한다.”
“② 바히야여, 만약 네가 봄과 들음, 그리고 네 가지 종류의 감각대상을 경험하거나 인지함을 놓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알 수 있게 된다면, 그러면 너는, 보이는 사물이나, 들리는 소리나, 경험되는 감지대상이나, 혹은 인지되는 마음의 대상으로 인한 집착이나 증오나 당황함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 될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너는 틀림없이 집착하지 않는 사람, 증오하지 않는 사람, 당황하지 않는 사람이 될 것이다.”
“③ 바히야여, 만약 보이는 사물이나, 들리는 소리나, 경험되는 감지대상이나, 인지되는 마음의 대상과 관련하여, 네가 집착이나 증오나 당황함과 관련이 없게 된다면, 즉 만약 네가 진실로 집착하거나 증오하거나 당황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면, 그러면 바히야여, 너는 진실로 보이고 들리고 경험되거나 인지되는 감각대상으로 인한 갈망, 자만, 사견이 생기지 않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면 너는 (갈망으로 인한) ‘이것은 내 것이다’라는 생각이 없을 것이며, (자만으로 인한) ‘나’라는 개념이 없을 것이며, (사견으로 인한) ‘나의 자아’라는 관념이나 개념에 대한 미련이 없을 것이다.”
“④ 바히야여, 만약 네가 진실로 보이는 시각대상, 들리는 소리, 경험되는 감지대상, 인지되는 마음의 대상으로 인한 갈망이나 자만이나 사견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러면 바히야여, (네 안에 갈망이나 자만이나 사견이 없기 때문에) 너는 여기 인간계에 더 이상 재탄생하지 않을 것이며, 나머지 네 곳(즉, 천상, 지옥, 축생계와 아귀계)에서도 재탄생하지 않을 것이다. 현재의 인간계와 나머지 네 곳을 제외하고 네가 갈 곳은 없다. 새로운 정신과 물질이 생기지 않음은 사실상 둑카(苦)인 번뇌의 종식이며, 둑카인 윤회하는 존재의 종식이다.”
부처님께서는, 존재의 토대(khandha)들이 완전히 뿌리 뽑혀 버린 궁극적인 소멸 즉 열반을 완성시키는 교리를 이렇게 법문하셨다.
(원주: 여기서 바히야는 간단한 설명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여섯 가지 감각대상을 설명하실 때 여섯 가지 모두를 상세히 설명하지 않으시고, 냄새, 맛과 감촉대상을 ‘감지대상’으로 묶어서 설명하셨다. 그래서 감각대상이 여기서는, 보이는 것, 들리는 것, 경험하는 것과 인식하는 것 네 가지로 구분되어 있다.
위의 네 단계 설법 가운데 ①은, 조건 지어진 현상인 네 가지 종류 감각대상과 관련하여, 각각 봄을 단순히 봄으로, 들음을 단순히 들음으로, 경험함을 단순히 경험함으로, 인지를 단순히 인지로 단지 알기만 하라는 것은, 시각대상을 보는 순간 눈의 의식(眼識)이 일어날 때, 소리를 듣는 순간 귀의 의식(耳識)이 일어날 때, 냄새를 맡는 순간 코의 의식(鼻識)이 일어날 때, 맛을 보는 순간 혀의 의식(舌識)이 일어날 때, 몸이 감촉하는 순간 몸의 의식(身識)이 일어날 때, 마음의 대상을 인지하는 순간 마음의 의식(意識)이 일어날 때, 단지 의식만 있고 거기에 집착이나 증오나 당황함이 없다는 뜻이다. [원주: 독자는 각자 오문인식과정(五門認識過程)과 의문인식과정(意門認識過程)의 특성을 잘 알아야 한다.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이들 다섯 가지 의식을 오문인식(五門認識)이라 한다.
부처님께서는 바히야에게, 갈망이나 증오나 당황함이 없이 순수한 감각을 인지할 뿐인 다섯 가지 종류의 감각의식이 일어나는 즉시 일어나는 오문인식과정과 의문인식과정에 따라 일어나는 자와나에, 갈망이나 증오나 당황함이 슬며시 끼어들지 못하도록 열심히 분투하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자와나 순간에서는 그들 감각대상의 식별이 자연스럽게 탐욕과 증오와 당황함을 유인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바히야가, 그 네 가지 그룹의 감각대상과 관련하여, 방심하고 있는 사이에 슬며시 끼어드는 경향이 있는 “이것은 영원하다”, “이것이 행복이다”, “이것은 아름답다”, 혹은 “이것이 실체가 있는 것이다” 등이 잘못된 개념이라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하여, 그에게 인식과정 중의 자와나 순간에 탐욕과 증오와 당황함이 생기지 않도록 부지런히 분투하라고 하셨다. 단지 그것들을 무상하고, 불행하고, 추하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간주하기만 하면, 그것들을 영원하고, 행복하고, 아름답고,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자와나가 생기지 않는다. 그래야만 대단히 유익한 자와나(감각인식 단계에서 평온한 인식과정)가 생기게 하는 위빠사나 지혜가 생긴다. 부처님께서는 바히야에게 조건 지어진 현상을, 네 가지 부류의 감각대상을 영원하고, 행복하고, 아름답고, 실체가 있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대단히 유익한 자와나를 생기게 하는 위빠사나 지혜가 계발되도록, 그것들을 진실로 무상하고, 불행하고, 추하고, 실체가 없는 것으로 보라고 경고하셨다.
조건 지어진 현상들인 네 가지 종류의 감각대상들에 대하여, 무상하고, 불행하고, 추하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는 바른 견해를 보임에 의해, 위의 ①에서 부처님께서는 바히야에게 여섯 단계의 청정과 열 단계의 위빠사나 지혜를 가르치셨다.
②에서 가르치신 것은 다음과 같다. "바히야여, 만약 네가 열 단계의 위빠사나 지혜를 거치면서, 조건 지어진 현상인 네 가지 종류의 감각대상을, 봄과 들음과 경험함과 인지함을 놓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알아서 도(道) 지혜를 성취한다면, 탐욕과 증오와 당황함을 뿌리 뽑게 될 것이다. 너는 갈망하지 않는 사람, 증오하지 않는 사람, 당황하지 않는 사람이 될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탐욕과 증오와 당황함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것이다. 이는 네 가지 도(道)를 의미한다.
③은 이런 뜻이다. 성인의 과(果)를 성취한 성자들은 갈망이나 자만이나 사견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아서, 네 가지 종류의 감각대상으로 표현되는 어떤 조건 지어진 현상도 결코 ‘나’라든지 ‘나의 것’이라든지 혹은 ‘나의 자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성인의 과를 의미한다.
④는 이런 뜻이다. 아라한은 죽음의 마음 다음에는 이 인간계나 다른 어떤 네 곳에서도 재탄생하기를 멈춘다. 이것은 정신과 물질의 무더기의 완전한 소멸이며, 오온의 어떤 미세한 흔적도 남기지 않는 열반라고 불린다. 이 단계는 이 궁극적 열반, 남긴 것 없는 소멸을 의미한다.]
바히야 다루찌리야는 부처님의 법문을 듣는 도중에 네 가지 종류의 비구의 도덕성이 청정해졌으며, 집중을 통해서 마음이 정화되었으며, 그 짧은 시간에 지혜가 계발되어 사무애해(Patisambhidā-Ñāṇa)와 함께 아라한과를 얻었다. 그는 모든 번뇌를 제거할 수 있었는데, 왜냐하면 과거에 쌓은 공덕에 의해 천부적인 지혜를 타고나서 극히 짧은 시간 내에 깨달음을 성취할 운명인 극히 드문 유형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아라한과를 얻은 다음 바히야 다루찌리야 존자는, 자신을 되돌아보는 지혜로 19가지 요소에 대해서 검토해 보니, 아라한이면 통상 그러하듯이 비구가 되어야겠다는 필요성을 느끼고, 부처님께 자신을 승가의 일원이 되게 허락해 달라고 말씀드렸다. 부처님께서는 그에게 물으셨다. “너는 발우와 가사가 있느냐?” 그는 “세존이시여, 아직 없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부처님께서 “그렇다면 먼저 가서 그것들을 구해 오너라.”라고 대답하셨다. 그렇게 말씀하신 다음 부처님께서는 사위성에서 탁발을 계속하셨다.
[원주: 바히야는 가섭불 시절 동안 비구였었다. 그는 2,400년 동안 비구로서 깨달음을 위해 분투했었다. 그 기간 동안 비구의 필수품을 받을 때마다 그는 자신이 그런 것을 얻는 것은 자신이 과거에 행한 보시 공덕에 의해 당연히 받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것들을 다른 동료 비구들과 나누어 가질 필요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한 다른 비구에게 가사와 발우를 주는 자비심의 결여 때문에, 부처님에 의해서 “오너라. 비구여”라고 불리는 공덕이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부처님께서 “오너라. 비구여”라고 부르시지 않은 이유를 달리 설명하는 스승들도 있다. 그들에 의하면 부처님이 출현하지 않은 시기에 바히야는 강도로 재탄생했었다. 그는 활과 화살로 벽지불을 죽이고 가사와 발우를 빼앗았다. 부처님께서는, 그 악행 때문에 (부처님께서 그를 “오너라. 비구여”라고 부른다고 할지라도) 바히야는 가사와 발우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아셨다(우다나의 주석서). 그러나 그 악행의 과보로는 적절한 옷을 못 입고 나무 섬유로 된 옷을 입어야 했던 것이 바히야의 운명이었다는 사실이 더 적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