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음식 조건āhārapaccaya
음식 조건은, 조건 짓는 법(조건법)이 조건 따라 생긴 법(조건생성된법)들을 만들어내고, 그것들을 존재 속에서 지탱되도록 하고, 그것들의 성장과 발전을 지탱하는 조건이다. 이것은 오래된 집을 지탱하여 붕괴하지 않도록 막아주는 기둥과 같다.
빳타나에 이렇게 나와 있다.
(1) Kabaḷīkāro āhāro imassa kāyassa āhārapaccayena paccayo.
물질적 음식은 이 몸에게 음식 조건으로 조건이 된다.
(2) Arūpino āhārā sampayuttakānaṃ dhammānaṃ taṃ samuṭṭānānañ ca rūpānaṃ āhārapaccayena paccayo.
정신적 음식*1)은 결합한 법들*2) 및 그 정신적 음식때문에 생긴 물질들*3)에게 음식 조건으로 조건이 된다.
*1) 접촉, 의도, 식(識)이라는 정신적 음식 3가지.
*2) 마음과 마음부수들.
*3) 마음과 마음부수들.
해설:
음식 조건에서의 음식에는 네 가지가 있는데 한 가지는 물질적 음식이고 세 가지는 정신적 음식이다.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
물질적 음식
접촉(phassa)
의도(manosañcetanā)
의식(viññāṇa)
물질적 음식은 몸 물질들을 지탱한다. 먹은 음식 속에 있는 영양소(ojā)가 몸에 퍼지면 새로운 물질들이 생성될 수 있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음식은 몸 물질들을 생기게 하는 네 가지 요소 중의 하나이고, 나머지 세 가지는 업, 마음과 온도이다. 영양소는 물질의 모든 무리(kalāpa)들 속에 존재하며, 이것은 몸 안이나 몸 밖에 있는 모든 물질들에 존재하는, 여덟 가지 ‘분리할 수 없는 물질’들 중의 하나이다.
영양소는 지수화풍 사대와 형색, 맛, 냄새와 함께 생긴다. 몸 물질들의 무리(kalāpa)들 속에 존재하는 영양소는, 외부 영양소인 음식에 있는 영양소의 지원 없이는 새로운 물질을 만들 수 없다. 모체의 자궁 속에 있는 새로운 생명체를 위해서, 음식 속에 있는 영양소가 생명체의 몸속으로 퍼지도록 모체가 음식을 먹어야 한다. 그러면 영양소가 새로운 물질들을 만들 수 있고 이런 과정이 평생 계속된다. 몸 밖에 있는 영양소의 지원을 받아서 몸의 새로운 물질들을 만든 영양소는, 업이나 마음이나 온도에 의해 생긴 물질들의 무리들도 지탱하고 지탱한다.
음식을 섭취하면 몸에 있는 영양소가, 여덟 가지 ‘분리할 수 없는 물질(avinibbhoga)’들로 구성된 새로운 물질의 무리(kalāpa)들을 만들 수 있다. 그 아위닙보가에 있는 영양소가 이번에는 다른 분리할 수 없는 물질의 무리(kalāpa)를 만들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음식에서 만들어지는 분리할 수 없는 물질이 연달아 생겨서, 섭취된 음식이 얼마 동안은 몸을 지탱할 수 있다.
영양소는 음식에 있지만, 영양소만 먹을 수는 없다. 배고프지 않기 위해서 땅 요소(지대)도 충분히 먹어야 한다. 음식을 덩어리로*4) 만든 다음에 삼켜야 한다. 음식은 영양소를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4) 빠알리어 ‘까발리까로 아하로(kabaḷīkāro āhāro)’는 ‘한 번에 삼킬 수 있는 음식(morsel food)’을 의미한다.
우리는 음식 없이 살 수 없지만 음식에 집착하는 것은 위험하다. 음식을 구하려고 사람들은 불선한 과보를 생기게 하는 불선업을 행할 수도 있다. 욕심 많은 사람은 아귀(peta)로 태어날 수도 있다. 음식에 집착하는 한 재탄생이 있을 것이고, 이것은 괴로움(dukkha)이다. 음식에 대한 집착을 줄이기 위하여, 음식을 구하는 것의 허물이나, 음식과 그 소화물의 깨끗하지 못함을 회상할 수 있다.
『청정도론』에 비구가 음식을 먹는 것은, 취하기 위해서도 아니며,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서도 아니며, 장식을 위해서도 아니며, 즐기기 위해서도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나와 있다. 몸을 지탱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해악을 멈추게 하고, 청정범행을 잘 지키기 위해서 음식을 먹어야 한다. 환자가 약을 먹듯이, 배고픔을 없애고, 배부르게 먹지 않도록 음식을 탁발해서 먹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건강하고 비난받지 않고 편안하게 살 것이다.
『청정도론』의 ‘음식을 혐오하는 수행’에서는*5) 음식을 구하는 것이 불편함을 설명하고 있다. 비구는 탁발할 때 더러운 곳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 항상 음식을 얻는 것도 아니고, 싫어하는 음식을 받기도 한다. 또한, 얻은 음식을 씹어서 삼킬 때 혐오스럽고, 소화된 다음에 몸 밖으로 나올 때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5) 염처경: M10
‘염처경’의 주석서인 ‘빠빤짜수다니’의*6) 몸 관찰 중의 ‘음식을 먹거나 마실 때의 분명한 앎’에, 음식을 먹거나 소화하는 과정 가운데 있는 것은 오로지 각각 자기의 기능을 하는 요소들뿐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먹는 사람이나 자아는 없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6) Ven. Soma에 의해서 『The Way of Mindfulness』 (B.P.S. Kandy, Sri Lanka)로 번역되었다.
“위로 가고, 옆으로 가는 것은 풍대이다. 지탱하고, 회전시키고, 분쇄하고, 유동성을 제거하게 하고, 분출시키는 것도 풍대이다.
지대도 지탱하고, 회전시키고, 분쇄하고, 유동성을 제거한다.
수대는 축축하게 하고 습기를 유지한다.
화대는 들어온 음식을 익게 하고 소화되도록 한다.
허공 요소는 음식이 들어가는 길이 된다.”
『상윳따 니까야』에*7) 아들과 함께 사막을 횡단하는 부모 이야기가 나온다. 식량이 떨어져서 굶어 죽게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아들을 죽여서 그 고기를 먹었지만,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며, 취하기 위해서도 아니며, 매력을 위해서도 아니며, 살찌기 위해서 먹은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죽지 않고 사막을 빠져나오기 위해서 먹었다. 그 다음에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7) 각묵 스님 옮김, 『상윳따 니까야 2』(아들의 고기 경 S12:63), 초기불전연구원, 2009, 298-305쪽.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나는 물질적 음식을 그렇게 여겨야 한다고 말한다. 그 음식을 올바로 이해하게 되었을 때 다섯 가지 감각욕망에 대한 탐욕도 올바로 이해하게 된다. 다섯 가지 감각욕망에 대한 탐욕을 올바로 이해하게 됐을 때, 거룩한 제자를 다시 이 세상으로 오게 하는 족쇄들이 소멸한다.”
이 경전의 주석서는, 비구들이 지혜롭게 숙고한 다음에만 필수품을 사용하도록 훈계하시기 위해서, 부처님께서 이 법문을 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물질적 음식은 몸 물질에게 음식 조건으로 조건이 된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세 가지 정신적 음식은 접촉, 의도와 의식이다. 물질적 음식이 몸을 지탱하고 유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신적 음식도 함께 생기는 법들을 지탱하고 유지한다.
정신적 음식일 때 조건이 되는 법은 조건 따라 생긴 법들과 함께 생긴다. 정신적 음식들은 자신들과 함께 생긴 법들 및 마음과 마음부수들에 의해서 생긴 물질들에게, “음식 조건”으로 조건이 된다. 입태 순간에 정신적 음식들은, 결합한 법들과 업에서 생긴 물질에게 “음식 조건”으로 조건이 된다.
정신적 음식인 접촉(phassa)은, 마음과 함께 생기는 마음부수들이 대상을 경험할 수 있도록 대상과 접촉하는 마음부수이다.*8) 접촉 없이는 마음과 마음부수들이 어떤 대상도 경험할 수 없으므로, 접촉은 그것들을 지원하며, 그것들을 위한 정신적 음식이다. 접촉은 모든 마음과 함께 일어나며, 마음 및 함께 생기는 마음부수들에게 “음식 조건”으로 조건이 된다.
*8) 접촉(phassa)은 정신이지 물질적 접촉이 아니다.
접촉은 마음과 마음부수들에 의해서 생긴 물질에 대해서도 음식 조건으로 조건이 된다. 육체적으로 고통스러운 느낌이 있으면 우리는 접촉이 있음을 안다. 그렇지 않다면 괴로운 대상을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 이 경험은 지속하지 않는다. 이식이 생기면 우리는 다른 접촉이 있음을 안다. 접촉이 소리를 접촉하였기에 이식이 그것을 경험할 수 있다.
한 번에 하나씩 나타나는 실재들에 대한 사띠를 통해서, 우리는 항상 다른 접촉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다른 대상들을 경험하는 것은 지속하지 않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정신적 음식인 의도(manosañcetanā)는*9), 모든 89가지 마음과 함께 생기는 마음부수인 의도이며, 그러므로 선심, 불선심, 과보심이나 작용 마음 네 가지 마음들 모두와 함께 생길 수 있다. 의도는 함께 생기는 마음과 마음부수들과 협동해서 과업들을 수행하며, 그것들을 유지하고 지탱한다. 그러므로 의도는 음식 조건으로 그것들에게 조건이 된다. 의도는 마음에서 생긴 물질에 대해서도 음식 조건으로 조건이 된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의도는 함께 생기는 법들에 "함께 생긴 업 조건"으로도 조건이 된다.
*9) 마노(mano)는 마음이고 쩨따나(cetanā)는 의도이다. 음식 조건이라는 문맥에서의 “마노산쩨따나(manosañcetanā, mental volition, 意思食)”라는 단어는 마음부수인 의도를 의미한다.
의식(viññāṇa)이라는 정신적 음식은 모든 마음을 말한다. 마음은 대상을 인지하는 데 있어서 ‘지도자’이다. 마음이 없으면 마음부수들은 생길 수 없고 대상을 경험할 수 없다. 그러므로 마음은 함께 생기는 마음부수들을 지탱하고 유지하며, 음식 조건으로 그것들의 조건이 된다. 마음이 물질을 생기게 하면, 마음은 그 물질에 대해서도 음식 조건으로 조건이 된다.
그리하여 모든 순간마다 접촉과 의도와 의식이라는 세 가지 정신적 음식들은, 그것들과 함께 생기는 법들, 그리고 그것들에 의해서 생긴 물질을, 음식 조건으로 지지하고 유지한다.
정신적 음식들은 빳타나(24조건)의 방법에 의해서 고찰될 수 있고, 계속 윤회하게 하는 원인 즉 생긴 현상들의 조건성의 연결고리인 연기의*10) 방법에 의해서 고찰될 수도 있다. 연기의 방법에 의하면, 접촉과 의도와 의식은 윤회하는 삶이 계속되게 조건 짓는 음식으로 간주한다.
*10) 열두 가지 요소들은 연기(paṭiccasamuppāda)의 고리들을 연결하며, 각 요소는 다음 요소에게 조건이 된다. 그것들은 무명(無明), 행(行, saṅkhāra, 재탄생하게 하는 의도, 업의 형성), 의식(識, 재생연결식과 과보심), 명색(名色), 육입(六入), 접촉(觸), 느낌(受), 갈망(愛), 집착(取), 존재[有], 생(生), 노사(老死)이다. 『청정도론』 (XVII, 101-344) 참조.
연기에서 접촉은 연결고리이므로, 접촉은 다음 연결고리인 느낌의 조건이다. 접촉은 대상을 만나고 느낌은 그 대상의 ‘맛’을 경험한다. 접촉은 함께 생긴 느낌에게 조건이 된다. 접촉 때문에 느낌이 있고, 느낌 때문에 갈망(갈애)이 있다. 갈망 때문에 집착이 있고, 이것이 존재[有]를 생기게 하며, 그러면 재탄생하게 된다. 우리는 삶을 원하고, 감각대상들에 대한 탐욕을 가지고 있으며, 절대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삶을 계속 이어지게 하는 조건들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육문을 통해서 대상들을 경험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 모든 경험은 적절한 조건들이 함께 생기기 때문에 생길 수 있다.
우리는 접촉의 허물을 알아야 한다. 위에 인용한 『상윳따 니까야』는, “아들의 고기”의 비유에 의해서 물질적 음식의 허물을 설명한 다음에, 세 가지 정신적 음식의 허물과 위험도 설명하고 있다. 접촉의 위험을 설명하기 위하여, 부처님께서는 가죽이 벗겨진 채 벽에 기대어 있는 소를 비유로 사용하셨다. 그 벽에 사는 생물이 소를 먹어버린다. 소가 나무에 기대거나 다른 곳에 서 있더라도 마찬가지로 소는 먹힐 것이다. 그 내용은 이렇게 이어진다.
“그러므로 나는 접촉이라는 음식을 그와 같이 여겨야 한다고 말한다. 그 음식을 올바로 이해하게 되었을 때 세 가지 느낌들도 올바로 이해하게 된다. 세 가지 느낌들을 올바로 이해하게 됐을 때, 나는 거룩한 제자가 더는 해야 할 일이 없다고 말한다.”
느낌은 접촉에 뿌리박고, 접촉과 함께 생긴다. 우리는 모두 감각 대상들에 그리고 그것들 때문에 생기는 즐거운 느낌에 집착하지만, 괴로움(dukkha)으로 인도하는 접촉의 위험을 기억해야 한다. 주석서는 접촉이라는 음식에 뿌리박고 있는 번뇌에 의해 먹히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아는 비구는, 접촉으로부터 초연하게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의도라는 정신적 음식도 연기에서의 연결고리이다. 이 관점에서 선업, 불선업, 무색계 선업은 의도(saṅkhāra, 업의 형성)이며, 이 업들은 재탄생을 생기게 한다. 위에 인용된 경전에서 힘센 두 사람에 의해서 이글거리는 숯불 구덩이로 끌려온 사람의 비유가 나온다. 숯불더미 위에 떨어지면 치명상을 입고 죽게 될 것이기에 그는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칠 것이다.
주석서는 축적된 선업과 불선업은 힘센 두 사람과 같고, 축적된 업이 그를 재탄생으로 끌고 간다고 설명하고 있다. 주석서에 의하면 윤회하는 삶은 이글거리는 숯불 구덩이와 같다. 재탄생하게 하는 의도의 위험을 그와 같다고 알아야 한다. 그 내용은 이렇게 이어진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나는 의도라는 음식을 그와 같이 여겨야 한다고 말한다. 그 음식을 올바로 이해하게 되었을 때 세 가지 갈망들을*11) 올바로 이해하게 된다. 이것들을 올바로 이해하게 됐을 때, 나는 거룩한 제자가 더 해야 할 일이 없다고 말한다.”
*11)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망, 존재에 대한 갈망, 비존재(非存在)에 대한 갈망. 주석서에 의하면 갈망은 의도의 뿌리이다.
세 번째 정신적 음식인 의식(마음)을 연기 관점에서 고찰하면, 그것은 입태할 때 및 삶의 과정에서 생기는 과보심이다. 연기의 연결고리로 보면 행(行, saṅkhāra, 업 형성)에 의해 조건 지어진다. 업은 재생연결식인 과보심을 생기게 하고, 삶의 과정에서 생기는 과보심도 생기게 한다.
위에 인용된 경전에서 왕에게 처벌받는 강도의 비유가 나온다. 왕은 그에게 아침에 창 100개 찌르고, 정오에 100개, 저녁때 100개 찌르라고 명령했다. 주석서에 의하면, 왕은 업을 뜻하고, 강도는 범부를, 300개의 창은 재생연결식을 뜻한다. 창에 찔린 고통은 재탄생한 다음에 삶의 과정에서 과보로 생기는 괴로움이다. 의식이라는 음식을 그 강도가 받는 고통처럼 비통한 것으로 여겨야 한다. 그 내용은 이렇게 이어진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나는 의식이라는 음식을 그와 같이 여겨야 한다고 말한다. 비구들이여, 그 음식을 올바로 이해하게 되었을 때 정신과 물질도*12) 올바로 이해하게 된다. 정신과 물질을 올바로 이해하게 됐을 때, 나는 거룩한 제자가 더 해야 할 일이 없다고 말한다.”
*12) 연기에서 의식[識]은 정신과 물질[名色]에게 조건이 되는 고리이다.
연기의 관점에서 세 가지 정신적 음식들을 고찰하면, 그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계속 윤회의 순환 속에 있는 위험을 회상하게 한다. 매순간 마음은 대상을 경험하지만, 거기에 집착하는 한, 우리는 음식의 허물들을 볼 수 없다.
예를 들어, 안식의 위험을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안식은 단지 형색을 경험하기만 할 뿐이고 그 대상이 즐거운지 괴로운지 모른다. 그 순간에는 좋아함도 싫어함도 없다. 그러나 안식 다음에 자와나 마음들이 있고, 우리가 선한 것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고 있을 때, 자와나 마음들은 불선심들이다. 우리가 음식을 보자마자 탐욕에 뿌리박은 마음들이 일어나기 쉽다. 탐욕이 즐거운 느낌과 함께 생기지 않고 덤덤한 느낌과 함께 생길 수도 있는데, 그럴 때 탐욕이 있다는 것을 모를 수도 있다.
몸이나 말로 불선한 행위들을 할 때 불선심이 생기고, 그런 행위들을 하지 않을 때에도 불선심이 일어날 수 있다. 하루에 불선한 생각을 하고 있는 수많은 순간이 지나가지만, 우리는 보통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감각기관들을 통해서 경험되는 대상들 때문에 번뇌들이 생기고, 그것들은 생에서 생으로 축적된다. 번뇌들의 위험을 이해하면 우리는, 나타나는 실재들을 알아차려야 한다고 자신을 스스로 일깨울 수 있다. 불선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그것은 결코 뿌리 뽑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