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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빠싸나 빠라구

5. 열반을 보는 모습

작성자그림자|작성시간22.03.05|조회수119 목록 댓글 4

5. 열반을 보는 모습
 
앞에서 말한 대로 사대가
생기고 사라지는 것을 볼 때,
한번 좌선하는 도중에도 여러 가지를 보게 된다.
그렇게 오랫동안 거듭해서 수행하면
그 정도로 많이 볼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하기를 더욱 오랫동안 하면
그 정도로 보는 것보다 더 많이 볼 수 있게 된다.
앉아서 수행할 때도 보고, 서서 수행할 때도 보고,
누워서 수행할 때도 보게 된다.
그러나 수행하기 시작할 때는 먼저 앉아서 수행하라.
피곤하면 누워서 수행해도 좋다.
마음을 가슴에 두어라.
 
자기가 정해 놓은 수행기간 동안
① 말을 많이 하는 것
② 책을 읽는 것
③ 다른 일을 말하고, 생각하고. 계획하는 것을 삼가라.
④ 수행에 관한 말이라도 스승님에게 인터뷰하는 것 외에는 말하지 말라.
⑤ 삼매(집중력)를 흐트러뜨리는 것을 하지 말라.
⑥ 마음 놓고 웃는 것도 삼가라.
 
열반을 본다는 것
 
바라밀(선업 공덕)이 아주 많은 사람은
오랫동안 수행하지 않고 단 한 번 앉은 자리에서 열반을 볼 수도 있다.
다음에 다시 수행을 해도
그때마다 볼 수 있으며,
다음 날이나, 그 다음 날에도 볼 수 있다.
혹은 많은 날이 지난 다음에 볼 수도 있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사대 요소들을 조금만 보았더라도
열반을 볼 수 있다.
아주 많이 보아도 열반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얼마만큼 지나야만 볼 수 있다고
정확하게 말할 수 없다.
 
열반을 보는 모습
 
열반을 보는 원인이 충분하게 갖추어진 수행자는
사대가 생기고 사라지는 것을 볼 때
그 물질 요소(루빠 다뚜)가 생기고 사라지는 것에만
마음을 딱 붙여서 주시해야 한다.
그때, 생기고 사라지는 것들이
매우 부드럽고 미세하거나
거칠고 억세거나
아주 빠르게 생기기도 한다.
 
이러한 생멸이 점점 더 짧아지면
수행자의 마음은
몸과 마음의 생멸을 좋아하지 않고,
힘들어하고, 괴로워하고, 아주 피곤하게 여기게 된다.
 
이렇게 계속 관찰해가면
언젠가는 몸과 마음이
생기고 사라짐을 만나지 못하고 알지 못하여
몸과 마음의 생멸이 없음,
몸과 마음의 생멸의 끝에 이르게 된다.
몸과 마음 두 가지가 모두 사라진 것이다.
 
윤회(삼사라)하는 세상에서 벗어났다고도 하고
생사하는 세상에서 벗어났다고도 한다.
대상으로 하는 법들이 사라졌다고도 하고
열반을 보았다고도 한다.
도(道) 마음(막가 찟따), 과(果) 마음(팔라 찟따)이 생겼다고도 한다.
 
이것이 쉽게 수행하고 빠른 지혜(sukhapaṭipadā kheppābhiññā)로 열반을 체험하는 경우이다.
 
이렇게 도 마음, 과 마음이 생겼다는 것은
관찰 대상인 생멸과 그것을 아는 마음들이
갑자기 일시에 소멸하고 멈춘 것을 말한다.
생멸을 보던 마음 요소마저
소멸, 사라짐, 멸해 버렸기 때문에
그 순간 마음 순간 4~5번이 재빨리
아무 것도 모른 채 앎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다시 앎이 생긴 다음에도
원래 생기고 사라지던 법들을
하나도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된다.
 
다시 만나더라도 전에 만나던 것보다
수백 배, 수만 배 느린 것처럼 된다.
그 정도만 만나게 된다.
거칠고도 거칠던 몸과 마음의 생멸을
관찰하고, 관찰하고 또 관찰하면
도 마음, 과 마음이 생긴 이에게
아주 분명하게 알아진다.
 
왜냐하면 미망에 잡혀서 헤매고 있던 이들이
좋은 스승을 만나서
심하게 견디어야 했던 힘든 느낌들이 금방 사라지게 됐을 때
모든 것이 일시에 사라지는 것처럼 완전하게 알아지기 때문이다.
 
① 어떤 이는 도(道) 마음 한 번, 과(果) 마음 2~3번 정도 생기는 것이 특징이다.
② 어떤 이는 도(道) 마음 다음에 과(果) 마음 2~3번 생긴 뒤에 과(果) 속행 마음들이 계속해서 많이 생긴다. 5분, 10분, 30분 또는 1시간 등 계속하여 생긴다.
 
이처럼 도 마음, 과 마음으로
열반을 한 번 본 고귀한 수행자를 거룩한 성인-성자(아리야)라고 한다.
 
경전에
“도과를 얻는 이들은 자기가 얻은 과(果)에 들 수 있다”
라고 한 그대로 사실인지 아닌지를 조사해 볼 수도 있다.
 
“30분, 1시간, 또는 원하는 시간 동안 열반을 보겠다.”
라고 생각하거나
“누군가를 부르면 알게 될 것이다.”
라고 생각하면 마음으로 서원을 세운 것이다.
말을 해서 서원을 세울 수도 있다.
단 선정의 힘이 충분할 경우에만 가능하다.
 
앉았을 때는 빠르게 열반에 들어갈 수 있도록
오로지 배에만 마음을 두어라.
수행하는 순간에는
반드시 생기고 사라지는 성품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만나고 또 만나서, 마음이 고요해지면
생멸(生滅)을 싫어하고 혐오하는 마음도 만나게 될 것이다.
생기고 사라지는 성품도 사라지고,
그것을 아는 성품도 고요히 소멸해서
마치 잠든 사람처럼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모든 고통이 사라져서 고요해질 것이다.
 
그러나 푹 잠이 든 사람에게는
바왕가(존재요인) 마음들이 생기기 때문에
깨어 있다고 할 수 있어서
몸과 사지를 움직이고 자세를 바꾸기도 한다.
*바왕가 마음이란 활동을 쉬는 상태의 마음으로 잠잘 때, 입태(入胎)할 때, 임종(臨終)할 때의 마음이다. 평소에는 마음과 마음 사이에 있어서 앞뒤의 마음을 연결해준다. 그러나 이 바왕가 마음이 생기지 않으면 다음 마음이 생길 수가 없어서 죽게 된다.
 
과(果) 선정에 든 이
과의 마음, 과의 속행 마음으로 열반을 보기 때문에
출세간 (속행) 마음에 떨어진 채
서원 세운 시간이 채워지기 전에는
서원 세운 마음 외에
어느 누구도 [과 선정에 든 이를] 깨어나게 할 수 없다.
 
위험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은 서원을 세웠기 때문임을 알 것이다.
서원을 세우지 않았으면 어떻게 하더라도 알지 못하게 된다.
어떠한 방법으로도 알게 하지 못한다.
예전에 이처럼 깊은 선정 마음(아빠나 속행)에 들어가 있는 비구가 있는 곳에, 크나큰 폭우가 내리고 천둥 번개가 울리고, 그 옆으로 수많은 수레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면 지나갔지만, 그 비구는 알지 못했다고 경전에 분명하게 전해진다.
 
왜? 무엇 때문에 모르는가 하면
과(果)의 마음에 들어있을 때는
어떤 마음도 생기기 않을 뿐만 아니라
몸의 작용도 멈춘 것이다.
과(果)에 들어 있을 때는
과의 마음, 과의 속행 마음만 생긴다.
 
과(果)의 마음은 출세간인 열반만을 대상으로 한다.
세간(世間)의 대상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세간(世間)의 대상이란
형색 · 소리 · 냄새 · 맛 · 감촉들과 함께
그 5가지와 관계된 대상들이 마음에 생겨나는 것들을 말한다.
 
이 대상 6가지와 관계된 느낌이나 체험들도 대상으로 하지 않고 만나지 않으며 알지 않는다.
 
그래서 『빠따꼬빠데사(Paṭakopadasa)』 주석서에
“6가지 문(門)에 몸(자기)을 보지 않는다.
그 문과 대상 2가지 모두에도,
중간이 되는 마음 차례(vīthi cittuppāda)에서도
몸(자기)을 보지 않는다.
이러한 성품이 되는 몸(자기)을 보지 않는 것이
고통의 끝인 열반이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원하심이다.”
라고 전해 온다.
 
그 의미가
사실대로 자세하게 그 뜻을 설명한다면
“6문으로 자신을 보지 못한다.”라는 곳에 6문으로 알아야 하는 모두를
아비담마의 방법대로 ‘본다.’라는 단어 하나로만 표현한다.
모양 · 소리 · 냄새 · 맛 · 감촉 · 아는 것,
이 6가지 대상도 몸이라는 단어 하나로만 표현한다.
그렇기 때문에 6가지 문에 몸을 보지 못한다는 말이
눈으로 모양을 보지 않고,
코로 냄새를 맡지 않고,
혀로 맛을 알지 않고,
몸으로 감촉을 모른다.
마음으로 세간의 모든 대상 어느 한 가지도
알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빠알리 경전 두 번째 부분에 6가지 대상에 몸을 보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이러한 의미를 표현한 것이다.
그밖에 몸과 대상 사이에 있는 마음 차례 역시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고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아무것도 알지도 보지도 않기 때문에,
자세한 것보다 더욱 자세하게 거듭해서 분명하게 말해 놓았다.
 
“이처럼 세상에 있는 모든 것마다
6가지 대상들을 어느 문으로도, 어느 마음으로도
알지 않고 지내는 것을 열반라고 한다.”
라고 이 빠알리 경전 끝에 다시 설해 놓으셨다.
 
“우다나 경”에도 이렇게 설하셨다.
(게시자 주: 각묵 스님 옮김, 『우다나』, 초기불전연구원, 2021, (Ud1:10) 참조)
 
“사랑하는 아들 바히야여!
볼 수 있는 형색, 들을 수 있는 소리,
맡을 수 있는 냄새, 맛볼 수 있는 맛,
접촉하는 감촉, 생각해서 아는 성품이라는 대상들에
여러 가지 번뇌로 원하는 대로 보고 머물 때 ‘그대’는 없다.
눈 귀 코 혀 몸 마음이라는 안의 아야따나(六根. 六內處)에도 없다.
형색 소리 냄새 맛 접촉 법(마음의 대상)이라는 밖의 아야따나(六境. 六外處)에도 없다.
육근과 육경 즉 아야따나(處) 두 종류를 제외한
6가지 의식작용(六識)에도 없다.
이 육문, 6가지 대상(육경), 마음,
마음을 도와주는 기능(마음부수)들에도 그대는 없다.
 
문(門), 대상, 마음, 마음부수들
이런 것들이 다시 생기지 않는 것만이
고통의 소용돌이의 끝인 열반이다.”
 
지혜가 부족한 이들이 이해하도록 짧고도 분명하게 말하자면
만나는 모든 담마의 성품들이
행복이라고 생각하든지
고통이라고 생각하든지
모두 고통의 진리(고성제)에 포함되기 때문에
고통이라고 기억해야 한다.
만나는 것, 만나야 하는 모든 법에서 벗어나는 것이
완전한 행복(적멸의 행복. santi sukkha)이라고 기억해야 한다.
 
벗어남, 소멸함은
만남에서 벗어나서
만남이 생기지 않음을 ‘벗어났다’고 한다.
그런 벗어남을 열반이라고 한다.
경전에서는 뭇띠(mutti)라고 설하셨다.
벗어남이라는 뜻이다.
 
「담마의 이런 성품들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도(道) 마음, 과(果) 마음으로 열반을 볼 때
매우 밝고 깨끗한 광명이 생김을 본다고도 하고,
매우 고요한 행복을 체험해서 알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광명(빛)은 열반이 아니다.
오바사(obhāsa)라고 한다.
행복을 체험하고 지내는 것은 희열(삐띠),
고요함(빳사디)이 된다.
이 광명은 위빠싸나를 더럽히는 번뇌
10가지 안에 분명히 들어있다.
 
도(道) 마음, 과(果) 마음으로
열반을 대상으로 해서 머무는 순간,
그 스스로는 아무 것도 알지 않고 머문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더라도
그로 하여금 알게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과에 들었을 때는
접촉(팟사야따나) 6가지가 생기지 않는다고
『빠따꼬빠데사(Paṭakopadasa)』 주석서에 자세하게
거듭해서 다시 설해 놓으셨다.
 
그 말씀에
“고의 진리[苦聖諦], 도의 진리[道聖諦], 소멸의 진리[滅聖諦]란 무엇인가?
어떤 비구의 앎이 6가지 접촉(팟사야따나)에서
보호해 주는 것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 비구는 끊임없이 고요하게 머무는 마음이 있어서 안다.
어떻게 아는가?
자기의 그 몸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드러난 몸만이 이것이 열반이라고 안다.”
 
그 경전대로
접촉(팟사야따나) 6가지들이 생기지 않는 것을 알아야 한다.
생기지 않기 때문에 몸이라는 의지처와
의지하는 대상 법(ārammanika)들도
생기지도 않고 드러나지도 않고 볼 수도 없다.
이렇게 아무 것도 드러나지 않고
보이지도 않는 것을 열반이라고 한다.
 
그렇다. 열반은 생기지 않는 법이다.
생기는 법이 아니다.
생기는 법 모두를 고통이라고 부른다.
생기지 않는 법만이 열반이라고 부른다.
알면서 지낸다는 것은
아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에 고통(둑카)이라고 부른다.
 
「빠띠삼비다막가(無礙解道)」에도
“생기는 것은 고통이다. 생기지 않는 것은 행복이다.”
 
「상윳따」에도
“모든 생기고 사라지는 것은 무상하다. 생기고 사라짐이 모두 소멸하면 참으로 행복하여라.”(aniccavata sankhāra uppadavaya dhammino uppajjhitva nirujjyhanti tesaṁ upasamo sukkho)
 
이 게송 역시
모든 생기고 사라지는 형성법들이 영원하지 않고
끊임없이 생기고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생기지 않는 법만이 가장 높은 행복, 열반이라고 한다.
 
그 다음
“삽베 상카라 아닛짜”도 “모든 생기는 것은 반드시 사라진다.”라는 뜻이다.
 
「빠띠삼비다막가」에도
“생김을 형성이라고 한다. 생기지 않음을 열반이라고 한다.”
라고 설하셨다.
 
여기에서
생기는 법이란
의식작용 6가지 중에
어느 한 가지 혹은 모두 생기는 것을 말한다.
생기지 않는 다는 것은
의식 작용 6가지가 생기지 않는 것만을 말한다.
의식작용이 생기면
무더기(오온) 즉
몸(루빠)과 마음(나마)이 생기는 것이다.
(오온, 12처, 18계는 생기는 법이며, 사라지는 법이다.)
 
그것들이 생기고 사라지는 것을 윤회라고 한다.
윤회란 세간법이다.
출세간법에는 윤회란 없다.
윤회가 없으므로 아무 것도 생기지 않는다.
아무 것도 생기지 않으므로
열반을 대상으로 할 때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한다.
 
그러므로 도(道) 마음, 과(果) 마음이 생길 때
아무 것도 모르고 만나지도 않는다고
그냥 믿어야 한다.
지혜가 없는 사람은
‘아는 마음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무엇을 잊어버렸는가 하면
윤회하는 세간을 모두 잊어버린 것이다.
 
이때 접촉 6가지가 생기지 않으니
마음 접촉(manosamphassa)도 생기지 않는다.
마음 접촉이 생기지 않으니 마음 의식도 생기지 않는다.
 
이렇게 몸과 마음이
생기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면
모든 생기고 사라짐(형성)
어느 것도 알지 못하는 열반을 체험하게 된다.
‘도(道) 마음, 과(果) 마음’ 생기더라도
도(道) 마음은 한 도(道)에 한 번만 생길 수 있다.
 
예를 들면
범부의 생에서 도(道) 마음에 한 번 떨어졌던 이를
수다원이라고 한다.
수다원이 된 다음, 사다함 도(道) 마음이 생기기 전까지
열반을 거들 체험하는 마음을
과(果) 마음이라고 한다.
 
그 과 마음, 과 마음 속행에
가끔은 원하는 만큼 오래 떨어지기도 한다.
가끔은 서원을 세우지 않고도
과 마음에 오래 떨어질 수도 있다.
빠르게 과 마음에 들려면 들 수도 있다.
가끔은 생멸을 관찰하는 도중
눈 한 번 깜빡하는 찰나 열반을 보기도 하고.
다시 생멸을 관찰하는 것도 자주 생길 수 있다.
무상의 특성에 더욱 치중해서
관찰하는 높은 수행자(animitta vihara)들에게
이퍼럼 생멸을 보고
열반을 보는 것이 자주 자주, 순간순간 생기기도 한다.
 
이는 무엇과 같은가 하면
법문을 들으면서 졸고 있는 이가
법문을 듣고 그 사이 깜빡 졸기도 하기 때문에
법문을 한 마디 듣고 깜빡 졸았다고
다시 듣고 다시 조는 것과 같다.
이러한 것들은 이미 수다원이 된 이들이
오랫동안 계속 수행할 때 생기는 현상이다.
 
이처럼 도와 과, 열반에 대해서 바르고 정확하며, 깨끗하고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는 경전들이 많이 있다.
너무나 방대하고 깊은 뜻을 함축하고 있어서 다 보여 줄 수가 없다.
원하는 사람은 열반에 관한 책들을 찾아보기 바란다.
(게시자 주: 정명 편역, 『열반 닙바나 니르바나』, 푸른 향기, 2014)
 
이처럼 접촉 6가지들이
생기지 않는 것을 분명히 알기 위해서,
어떤 사람들은 조사해 보기도 한다.
과(果) 선정에 든 이의 눈을 손으로 만져보기도 하고
귀에 대고 폭죽을 터뜨리거나 큰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볼을 찔러보기도 하지만,
아무 것도 모르고, 조금의 동요도 없이 그대로이다.
*주의할 것은 완전히 과에 들기 전에 이런 행위를 하면 평상시보다 더 큰 소리로 들려서 다칠 위험이 있다.
 
그리고 과에 든 이의 사지(四肢)는 뻣뻣해서
마치 죽은 사람인 것 같다.
공중에 들어 놓아두어도 그대로 있다.
일부러 내려놓지 않으면,
과의 선정에서 깨어나기 전까지는 그대로 반듯이 떠 있다.
 
「상가하(sangaha)」에도
“아빠나의 마음은 자세를 든든하게 한다.
(appanā javanaṁ shabbi iriyāpatthaṁ sannāmeti).”
라고 설하였기 때문에
수행에 능숙하게 됐을 때
원할 때마다 원하는 시간만큼 들어갈 수 있다.
 
이렇게 능숙하게 되었을 때
6가지 대상 중 어는 대상이든지
3가지 특성(무상 고 무아)을 분명하게 볼 수 있으면
과(果) 선정에 들어갈 수 있다.
열심히 수행하지 않아서 능숙하지 않은 이들은 금방 들어갈 수 없다.
어떤 수행자는 쉽게 들어갈 수 없어서
과(果) 선정에 들지 못하고 벌떡 일어서고 만다.
 
“수다원이 되자마자 계속 수행하지 않으면서 오래 동안 살아가면
선정이 사라져서 위빠싸나조차 선명하게 볼 수 없다.”고 설하셨다.
위빠싸나를 부명하게 보지 못하면 과(果) 선정에는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다.
오랫동안 과 선정에 들지 않고 살았으면
배에 마음을 붙이고 지극한 마음으로 관찰하라.
보이는 생멸에 과거에 있었던 혐오심이 재빨리 되살아 날 것이다.
혐오심이 없으면 위빠싸나 수행이 안 되고
무상, 고 무아를 보지 않으면 과(果) 선정에 들 수 없다.
 
「우빠리빤나사 주석서」는
“비구들에는 ① 끊임없이 사마타 위빠싸나로 지내는 습관이 있는 이(사따따 위하리 뿍갈라)와 ② 끊임없이 사마타 위빠싸나로 지내는 습관이 없는 이(노사따따 위하리 뿍갈라), 두 종류가 있다. 그 중 ①은 어느 한 가지를 하더라도 과(果) 선정에 들어갈 능력이 있다. ②는 어느 작은 한 가지를 하더라도 과(果) 선정에 들어갈 능력이 없다.”라고 했다.
 
그것은 비구들에는 사마타 위빠싸나로 끊임없이 수행하면서 지내는 습관이 있는 이, 끊임없이 사마타 위빠싸나로 끊임없이 지내는 습관이 없는 이, 두 종류가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첫 번째처럼 선정이 있는 이는 언제든지 원하는 때마다 과(果) 선정에 들 수 있음을 보여주셨고, 두 번째 사람은 원하는 때에 선정에 들 수가 없다. 적은 일이거나 작은 일에도 마음이 따라다녀서 과(果) 선정에 들 수가 없다. 하물며 일이 많거나 큰 일이 생기면 더 말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아라한인 경우를 말한 것이다.
 
아라한도 두 종류가 있는데 하물며 아래 단계의 성자들에게도 당연히 있는 일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과(果)에 들고자 하는 성자라면 당연히 계속해서 사마타 위빠싸나 수행을 해야 한다. 과(果) 선정에 들 수 있어야만
적당하게 자기 일을 위해서 마음을 놓을 수 있다.
성자란 현재 눈으로 결정하기 쉬운 일이 아니어서
거듭해서 깊이 생각하고 신중해야 한다.
 
이것이 「들어감 상윳따 Okkanti saṁyutta」(S25:1)에 이렇게 나와 있다.
(https://cafe.daum.net/satisamadhi/8fL2/557 를 참조하여 수정했음)
 
“비구들이여, 눈은 무상하고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간다.
귀는 무상하고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간다.
코는 무상하고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간다.
혀는 무상하고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간다.
몸은 무상하고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간다.
마노[意]는 무상하고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간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법들에 대해서 이와 같이 믿고
이와 같이 확신을 가지는 자를 일러 믿음을 따르는 자(Saddhānusāri sotapanā)라고 한다.
그는 성스러운 도(ariyā magga)에 들어가고,
참사람의 경지에 들어가고, 범부의 경지를 넘어섰다.
그가 지옥이나 축생계나 아귀의 영역에 태어나게 되는
업을 짓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소따빠띠 과를 실현하지 못한 채로 임종한다는 것도 있을 수 없다.
 
비구들이여, 통찰지로 관찰하면서 사색하여
이러한 법들을 인정하는 자를 담마누사리(Dhmmānusāri) 소따빠나라 한다.
그는 성스러운 도에 들어가고,
참사람의 경지에 들어가고, 범부의 경지를 넘어섰다.
그가 지옥이나 축생계나 아귀의 영역에 태어나게 되는
업을 짓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소따빠띠 과를 실현하지 못한 채로 임종한다는 것도 있을 수 없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법들을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는 자를 소따빤나라 하나니,
그는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 법을 가졌고
[해탈이] 확실하며 완전한 깨달음으로 나아간다.”
 
이제 뜻이 더욱 선명하다.
힘이 나고 용기를 더하기에 충분하다.
무상 고 무아를 봄으로
이익을 얻는 모습을 설해 보인 것이다.
지혜로운 이들은 입으로 외워라.
 
레디 사야도께서도 「아누디빠니(디빠니 띠까의 해설서)」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생기고 사라지는 형성법들은
언제나 순간적으로 생기는 법(카니까 담마)이라고
철저히 믿는 것, 절대적인 청정한 믿음을 삿다(saddā)라고 한다.”
 
이와 같은 삿다에 의해 소따빠띠를 증득한다.
생기고 사라지는 상카라(형성)가 되는 몸과 마음의 순간에,
생기고 사라지는 법을 깊이 믿는 이를 소따빠나라고 말씀하셨다.
 
계속하여 말씀하시기를
“어떤 사람은 이러한 규모로 관찰함을 감당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을 담마누사리 소따빠나라 한다,
그 사람이 이렇게 안다. 이렇게 본다. 그 사람을 소따빠나라 한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상카라 담마들은 영원하지 않다고 믿는 것만으로 수다원도에 이를 수 있는가?”
이에 대해 우리들이 말할 것은 없다. 부처님만 설하실 수 있다. 부처님께서 어떻게 설하셨는가?
 
「칸다 왁가 상윳따」에 이렇게 나와 있다.
“비구들이여, 눈은 영원하지 않다. 변하는 성품이 있다.
다른 상태로 바뀌는 것이다.
이와 같이 믿고 이렇게 생각한다.
이렇게 결정한다.
이 사람은 범부의 생을 벗어나서
성자들의 세계로 들어선
‘삿다누사리 소따빠나’라고 할 수 있다.
 
그 ‘삿다누사리 소따빠나’인 사람은
사악처인 지옥, 아귀, 아수라, 축생계롤 가게 하는
악행을 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눈은 무상하고 변하는 것이며,
다른 상태로 바뀌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알고 보는 이를
소따빠나라고 한다.”
 
이러한 규모로 관찰하는 것을 감당할 수 있다면
그런 사람을 ‘담마누사리 소따빠나’라고 한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본다면
그를 소따빠나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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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금강 | 작성시간 22.03.06 고맙습니다
  • 작성자장뇌산삼 | 작성시간 22.03.06 창조 된 나는 내가 아니다.
    "자아"라고 하는 사고의 틀 넘어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다!
    감사합니다.
    사두사두사두_()_
  • 작성자혜문 | 작성시간 22.03.07 사두 사두 사두 ~~^^*
  • 작성자장영균 | 작성시간 23.08.26 사두 사두 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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