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아누룻다 존자의 깨달음
동생 아누룻다는 출가하기 전, '없다'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복이 특별히 많은 사람이었다. 지금 비구가 되었어도 그는 복이 많은 이다. 부처님의 사촌 동생일 뿐만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는 능력이 매우 뛰어났기 때문에 눈부실 만큼 유명해졌다. 출가하고 난 다음 오래지 않아 천신과 같이 볼 수 있는 특수한 지혜(천안통)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는 천안통을 얻은 다음에도 뛰어난 능력으로 계속 노력했다. 능력이 뛰어난 것보다 수행에 더욱 노력을 기울여 게으르지 않았다. 공양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에는 항상 선정에 머물러 있었다. 보통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대상도 거듭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세간 선정에서 가장 높은 신통을 얻으면, 진리를 보기 쉬우리라고 생각했다. 보통사람들이 한 달 걸려서 볼 수 있는 진리를 그런 지혜가 높은 이는 하루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그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다.
가르침의 가장 근본 목적인 열반이라는 법을 깨닫는 순간이 있을 것이라고, 그는 모든 시간을 들여 신통 수행에 열심이었다. 노력을 기울인 만큼 신통 능력으로 볼 수 있는 힘은 더욱 커지고 깊어졌으며, 깨끗하고 분명해졌다.
그러나 이런 능력이 열반에 이르게 해주지는 않았다. 열반이라는 진리를 깨달을 수 없었으며,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했다.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비구가 되었던 밧디야 존자는 신통에 의지하지 않았지만 오래지 않아서 법을 얻었다. 두 손에 확실하게 법을 잡고서 기쁨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노래를 부를 아무 것도 없었다. 자기 선정 신통에 의지해서는 법의 깨달음에 이르지 못함을 알고는 마하사리뿟따 존자께 여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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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뿟따 존자님! 제자는 특별히 깨끗한 사람들의 눈으로 보는 것을 지나서 천신들의 눈과 같은 천안통의 지혜로 일천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물러나지 않는 노력으로 열심히 수행합니다. 몸 역시 번뇌가 없이 조용합니다. 마음 또한 한 가지만 있어 흔들림 없이 잘 머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자의 마음은 사견과 집착의 걸림이 없어도 번뇌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아누룻다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사리뿟따 존자께서 말씀하셨다.
"아누룻다여! '나는 특별하게 깨끗해서 사람들의 눈으로 보는 것을 지나서 천신들 눈과 같은 천안통으로 일천의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라는 생각이 있는 한 너에게 자만이*1 남아 있다."
"아누룻다여! '나는 물러남이 없는 심한 노력으로 열심히 수행하여 잊어버리지 않고 알고 선명하게 기억한다. 몸도 번뇌가 없이 조용하고 편안하며 마음은 한 군데에 잘 머문다.'라는 생각이 있는 한 너에게는 마음의 산란함이*1 있다."
"아누룻다여! '그렇지만 나의 마음은 갈망의 사견으로 집착하지 않아도 번뇌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라는 생각이 있는 한 너에게 의심이*1 있다."
“아누룻다여! 너에게 당부한다. 이 세 가지를 버려라. 이 세 가지를 가슴에 두지 말고 열반에 마음을 보내라.”
이 가르침을 들은 다음 아누룻다는 이 세 가지를 마음에 두지 않아 털어 버리고, 깨끗한 믿음을 새롭게 하여 바른 노력에다 바르게 아는 힘을 더해, 열반에 이르게 하는 특별하게 집중하는 길(위빠싸나)을 따라 똑바르게 서서 곧장 앞으로 나가는 수행으로 비구가 해야 할 일을 모두 마쳤다.
*1: 게시자 주 : 『The Great Chronicle of Buddhas (Anuruddha Mahāthera)』 (The State Buddha Sasana Council's Version, by The Most Venerable Mingun Sayadaw, Translated by U Tin Lwin, U Ko Lay & U Tin Oo(Myaung), Volume Six, Part One, First Edition, November, 1997, p. 101)에
교만심은 ‘māna’, 산란함은 ‘uddhacca’, 의심은 ‘kukkucca’로 빠알리어가 나와 있어서 교만심을 자만으로, 산란함을 들뜸으로, 의심을 후회로 치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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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누룻다에게 생긴 것을 다시 살펴보면, 가깝지만 멀고 먼 것이라는 말과 같다. 그가 알려는 열반이라는 법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근처에 있을 뿐이다. 이는 아는 본다면, 알게 하고 보게 하려고 만반의 준비를 해서 옆에서 대기하고 있다.
‘나’라는 자만과 섞이지 않고 조용히 머물러 있다. 갈망과 사견으로 집착되지 않아서 모든 번뇌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있는 성품인 것이다. 이렇게 벗어난 성품이기 때문에 조절할 수 없는 성품(무아) 안에 포함된다.
나라는 것과 섞임이 없이 그 성품, 그대로 모습으로 벗어남인 것이다. 내가 아닌 무아(다스릴 수 없는 것), 그 성품을 내 것이라고 집착하며 '일만 세계를 볼 수 있는 내가 무엇 때문에 법을 보지 못하는가' 하고 스스로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해서, 열반이라는 법에 어긋나서 자만과 후회를 번갈아 일어나게 했다.
열반은 조용히 머무는 모습이다. 그렇게 조용하기 때문에 생기고 사라지는 것과 섞이지 않는다. 그 성품, 그 모습 그대로 조용할 뿐이다. 어느 한 가지로 인해서 고치고 만들거나 해서 생기는 조용함이 아니다. 원인과 이유도 필요 없고, 생김도 사라짐도 없이 그 스스로 조용히 머문다. 그러한 것을 뜻으로만 짐작해서 '나' 혹은 '나의 것'이라는 집착으로 '내가 물러남 없는 노력으로 조용하도록 노력해서 차지하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후회의 물살 속으로 빠져간 것이다.
우리 교단에서는 열반을 '닛사라나(Nissāraṇa)'라고도 부른다. 닛사라나라는 단어를 만나면 열반을 얻을 수 있다. 갈애와 사견으로 집착하지 않아서 모든 번뇌의 소용돌이의 대상에서 벗어나는 성품으로 그 이름을 얻은 것이다.
'너'도 넣지 말고 '나'도 섞지 말고, 그 성질 있는 그대로 벗어난 법을 얻기 위해서지만, 너와 나를 섞어서 생각하기 때문에 '나의 마음이 갈망과 사견에 집착되지 않아도 번뇌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라는 후회가 생겼다.
후회와 들뜸 그리고 자만이 막고 있기 때문에 그는 가장 가까이 있는 열반이라는 법을 얻지 못했다. 사리뿟따 존자의 가르침대로 이 세 가지를 버렸을 때, 가장 가까이 있는 열반이라는 법을 순간에 만나게 되었다.
이러한 출세간의 지혜를 얻지 못했으면 이미 얻었던 세간의 선정에 의한 특수한 지혜와 신통도 튼튼하지 못했으리라. 출세간의 지혜, 도의 지혜를 얻어야만 튼튼하고 오래가며, 원할 때마다 들어가서 얻을 수 있다.
출세간의 지혜로 튼튼해진 천안통을 갖춘 그에게 부처님께서는 그 분야에서 첫째가는 사람이란 특별한 칭호를 주셨다.
Anguttarā aṭṭakatha Anuruddha vatth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