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밍군사야도

40 라다 대장로(1)

작성자Gandhaputta|작성시간22.11.13|조회수33 목록 댓글 2

40 라다 대장로(1)

 

1. 과거생에서의 서원

 

(라다 존자의 과거 서원은 테라가타 주석서에서 인용하기로 한다. 왜냐하면 앙굿따라 주석서보다 더 유익하기 때문이다.)

 

미래의 라다는 빠두뭇따라 부처님 시대에 항사와띠 시의 고귀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성년이 된 다음에 부처님의 정사를 방문했고, 부처님에게 절을 한 후, 적당한 장소에 앉았다. 그곳에 앉아 있는 동안, 그는 부처님이 어떤 비구를 청중들에게 [스승으로 하여금 법을 설할] 영감을 일으키게 하는 자들 가운데 제일이라고 칭찬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미래의 부처님들로부터 자신도 그와 같은 영광을 누리고 싶다는 위대한 서원을 갖게 되었다. 그는 부처님에게 특별한 공양을 올린 다음에 그런 영광을 누리고 싶다고 말씀 드렸다. 부처님은 그의 서원이 성취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부처님 시대의 종족(Clansman)으로서의 삶

 

빠두뭇따라 부처님 시대에 훌륭한 제자가 될 것을 서원한 미래의 라다는 더 많은 선행을 한 다음, 위빳시 부처님 시대에 고귀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 성년이 된 그는 탁발 중인 위빳시 부처님을 만났다. 부처님을 굳게 믿은 그는 아주 맛있는 망고를 바쳤다.

 

2. 마지막 생에서 고행자 생활

 

미래의 라다는 그 선행으로 천상계에서 천신으로 다시 태어났다. 천신으로 태어난 이후, 그는 천상계와 인간계에서만 다시 태어났고, 그곳에서도 그는 계속 선행을 했다. 고따마 부처님 시대에 그는 라자가하 시의 라다라는 이름의 바라문으로 재탄생했다. 그는 결혼했고 나이가 많아졌을 때, 아내의 통상적인 보살핌을 즐기지 않았다. 그는 비구가 되려고 정사에 갔지만, 모든 비구들은 개인적으로 자신들을 섬길 수 없는 나이든 제자를 갖는 것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출가 요청을 거절했다.

 

나이가 들어 이미 노쇠한 바라문 라다는 출가를 거듭 거부당한 것에 대한 좌절감 때문에 더욱 늙어 보였다. 온몸에 핏줄이 그물처럼 엉켜있어 시든 잎사귀처럼 창백하고, 완전히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 있는 그의 모습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어느 날, 그는 부처님께 가서 정중하게 인사를 한 다음 후 적당한 곳에 앉았다. 부처님은 늙은 바라문이 도의 지혜를 얻을 수 있을 정도로 바라밀이 성숙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대화를 시작하기 위해 부처님이 물었다. “바라문이여, 아내와 아이들은 그대를 잘 보살피고 있는가?” 늙은 바라문은 대답했다. “고따마여, 나는 내 아내와 아이들에게서 보살핌을 받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실은 그들은 내가 너무 늙어서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나를 완전히 낯선 사람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바라문이여, 그렇다면 비구가 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사리뿟따 존자의 감사해 하는 마음

 

고따마여, 누가 나를 비구로 받아들이겠습니까? 제가 늙어서 제 스승이 되겠다는 비구가 없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늙은 바라문이 왜 그렇게 초췌하고 수척해 보이는지 물었다. 비구들은 계사가 없어서 몹시 절망하고 쓸쓸해 보인다고 대답했다. “비구들이여, 이 바라문이 지은 공덕을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가?”

 

이에 사리뿟따 존자는 세존이시여, 저는 이 바라문이 제게 베풀었던 선행을 기억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무엇이었는가?” 부처님이 물었다. “세존이시여, 제가 라자가하에서 탁발할 때, 그는 제게 밥 한 숟가락을 주는 선행을 했습니다.” “아주 좋다, 사리뿟따여, 아주 좋다. 덕이 있는 사람은 은혜를 잊지 않고,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느낀다. 그렇다면 사리뿟따여, 바라문을 사미로 만들어서 출가시키도록 하여라.”

 

세존이시여, 어떤 방식으로 그를 출가시키면 되겠습니까?” 부처님은 사리뿟따 존자의 질문에 대해 적절한 법문을 한 다음에 이렇게 선언하였다. “비구들이여, 지금부터 삼귀의를 하게 한 다음에 그를 비구로 출가시키는 방식은 중단하기로 한다. 지금부터는, 사미가 되고자 하는 자는 회중에게 세 번 공식적으로 비구가 되겠다고 제안을 한 후, 반대하는 사람이 없으면 정식으로 사미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것은 낫띠 짜뚯타(ñatti catuttha. 발제와 세 번에 걸친 토의. 백사(白四))라고 불리는 새로운 출가 방식의 첫 사례였다.

 

(원주: 주목해야할 것: 부처님은 B.C. 589[대시대(Great era) 103], 음력 4(웨사카) 보름날 정등각자가 되었다. 그는 사슴 공원(녹야원)에서 첫 번째 안거를 지냈다. 그 안거가 끝날 때, 그는 모두 아라한인 비구 제자 60명을 사방으로 보내어 교리를 전파시키도록 했다. 그는 이 60명의 아라한들이 인정하는 신참 비구를 삼보에 귀의시킴으로써 처음에는 사미로, 다음에는 정식 비구로 받아들였다. 부처님 스스로도 같은 방식을 채택했다. 나중에, 새로 출가하려는 신참 희망자들이 부처님이 계신 정사로 불편하게 먼 거리를 이동하지 않아도 해야 됨을 배려한 것이다. 이 방식에 의한 출가는 부처님에 의해 그들이 합류한 정사에 허용되었다.

 

1((풋사) 대보름날, 부처님은 라자가하에 갔다. 2주 후, 두 명의 상수 제자들은 그들의 제자들과 함께 비구가 되었다. 그들이 비구가 된 지 7일째 되는 날, 마하 목갈라나 존자는 아라한이 되었다. 2(마가) 보름날, 사리뿟따 존자는 아라한이 되었다. 라다 바라문의 출가는 2월 보름날과 3(팍구나) 보름날 사이에 이루어졌다.

 

사리뿟따 존자는 부처님이 미가다야 숲의 사슴공원에 머무실 때 사미나 완전한 비구로서의 출가는 삼보에 귀의하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런 경우에 출가 방식에 대해 물어봤을까?

 

답은 다음과 같다. 사리뿟따 존자는 부처님의 지속적인 동반자로서, 부처님의 의중을 알고 있었고, 도반들의 일반적인 능력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그는 자신과 아주 친한 친구 중에서 가장 유능했다. 그는 부처님이 삼보에 귀의하는 단순한 방식보다 더 엄격한 방식의 출가 허용을 고려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부처님이 라자가하에 거주한 이래 아라한의 수도 2만 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사리뿟따 스님의 부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놀라운 예리함이 부처님의 아들인 라훌를 출가시킬 때 드러났다. B.C. 589년 말, 부처님은 그의 고향인 까삘라왓투로 두 달 동안 여행을 했다. 7일째 되는 날, 그의 아들 라훌라(7)는 유산을 요구했다. 부처님은 사리뿟따 스님에게 라훌라를 사미로 만들라고 말해서 그에게 (가장 가치 있는) 유산을 주었다. 그 때, 사리뿟따 존자는 삼보에 귀의함으로써 사미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잘 알면서 부처님께 물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방식으로 라훌라 왕자를 사미로 받아들여야 합니까?”

 

사슴공원에서 채택된 초기 관행은 삼보에 귀의함으로써 사미만이 아니라 정식 비구로 출가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라다로 시작되는 후기인 경우에는, 출가하는 것은 승가 회중이 세 차례에 계사(戒師)가 출가 허가를 세 번 공식 제안하고 승가가 입학을 (침묵함으로써) 동의하면 이루어졌다. 그러나 사미로 받아들일 경우에는, 미리 삼보에 귀의하게 하거나, 미리 회중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부처님의 뜻을 사리뿟따 존자는 헤아렸다. 그렇지 않으면, 승가가 사미로 출가시키는 것도 회중이 승인해야만 유효할 것이라는 인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리뿟따 존자는 라훌라를 삼보에 귀의하게 하여 사미롤 출가시키는 것에 대한 부처님의 명확한 동의를 얻기 위해, 부처님에게 그 질문을 던진 것이다.) 위나야 마하왁가(Vinaya Mahāvagga) 해설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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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Gandhaputta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11.13 이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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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도 게재되어 있습니다.
  • 작성자금강 | 작성시간 22.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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