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11 자애 바라밀 (5) (법문: 위뿔라냐니 식카와띠님)
붓다왕사 192강 - 자애 바라밀 (5)
<붓다왕사>에서 9번째 자애 바라밀(mettā-pāramī)하고 있습니다. 10가지 바라밀 중에 자애도 바라밀에 들어갑니다. 그중에서 부처님이 설하신 자애관, 우리가 아는 자애관은 보통 ‘아항 아웨로 호미(ahaṃ avero homi)’ 이렇게 시작하죠. ‘나에게 적의가 없기를’ 그거 말고 붓다께서 직접 설하신 자애관, 그 내용을 보고 있습니다.
자애를 닦는 사람이 갖춰야 할 조건들
첫 번째, ‘좋은 일에 능숙해져야 된다’. ‘까라니야맛따 꾸살레나(Karaṇīyamattha-kusalena)’. 까라니야(Karaṇīya)는 해야 된다, 앗타(attha)는 ‘이익이 있는 일’, ‘이로운 일’에. 꾸살레나(kusalena)는 ‘능숙한’ 이런 뜻입니다. 이로운 일에 능숙한 자, 이익 있는 일에 능숙하게 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무슨 일이든지 이익이 있는 일에는 능통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이익’이라는 게 우리가 생각하는 물질적 이익도 있지만 선업을 짓는 일 나한테 좋은 결과가 오는 일들이 있죠. 보시, 지계, 수행 같으면 좋은 결과가 오죠. 그 업을 지은 이에게 좋은 결과가 옵니다. 보시, 봉사, 계를 지키는 것. 이런 것들이 다 나한테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거죠. 좋은 마음을 쓰는 것, 친절한 태도, ‘자애’를 보통 친절이라고 번역합니다. 미얀마에서는 자애를 kindness라고 번역하는데 친절한 이것도 나한테 좋은 결과가 오는 업지음이지요. 수행도 나한테 좋은 결과를 가져 오는 것이고 이렇게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을 ‘이익’이라고 합니다. 생계활동을 할 때도 직업이 교사나 의사나 봉사자나 일 자체로 주는 일은 이로운 일이죠. “하는 데 있어서 능숙한 것, 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입니다. 농부면 농사 짓는 일에 능숙한 사람, 이게 자애관에 들어갑니다.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거죠.
자애를 닦는 사람의 첫 번째 조건이 이로운 일 즉, 선한 일에 능숙해야 한다입니다.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까라니야’는 되어야만 한다, 이런 뜻입니다. ‘되면 좋다’가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되라’ 이런 뜻입니다. ‘까라니야’ 이로운 일에 아주 능숙한 자(삭꼬sakko)가 되어라, 이런 뜻입니다.
두 번째 바른 습관, ‘우주(ujū)’입니다. ‘우주’는 아주 바른 사람인데 말과 행동이 바른 겁니다. 말과 행동이 앞과 뒤가 다르지 않은 거죠. 여기서는 이렇게 말하고 뒤에 가서는 다르게 말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앞에서 말하는 것과 뒤에서 말하는 것이 같은 사람인 거죠. 일단 계를 지키고 말로도 앞에서 하는 말과 그 사람이 없을 때 하는 말이 같은 사람. 곧은 사람입니다.
세 번째 ‘수후주(suhujū)’입니다. ‘수후주’는 언제도 삐치지 않는 겁니다. 마음을 꼬부장하게 쓰지 않는 것. 그러니깐 ‘우주’는 말과 행동이, 남이 보기에 ‘아 저 사람이 앞과 뒤가 같구나, 한결같구나’ 이런 사람입니다. 정직한 사람. 계를 지키면 정직하기가 쉽죠. 계를 지키면 정직하기가 쉽습니다. 계를 안 지키면 정직하기가 어렵습니다. ‘수후주’는 남들이 보기에도 정직하지만 자기 자신에게도 정직한 겁니다.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겁니다. 남만 속이지 않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도 속이지 않는 거죠. 내 마음이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 내가 거짓말을 했으면 거짓말했다고 아는 것. 나를 합리화시키지 않는 겁니다. 합리화시키지 않고 내 스스로도 앞에서와 뒤에서와 같도록 노력하는 것. 남 앞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나 스스로도 항상 떳떳한 것. 이런 게 ‘수후주’입니다. 아라한 같은 경우는 번뇌를 다 소멸하셔서 감출 게 없는 존재이죠. 항상 떳떳합니다. 번뇌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말과 행동은 감출 게 없이 살더라도 마음은 감춰야 되는 마음들이 있지 않습니까? 번뇌가 있으니깐 내 마음 다 드러내고 살 수 없습니다. 다 드러내고 살면 큰 일납니다. 근데 아라한은 마음도 감출 게 없는 거죠.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평소에 살 때도 내 마음도 항상 떳떳해야 한다는 거죠. ‘수후주’입니다. 안 좋은 마음을 만들지 않아야 됩니다. 생겨났으면 키우지 않으면 됩니다. 불선한 마음이 생길 수 있지만 커지도록 버려두면 안 됩니다. 안 좋은 마음이 있으면 빨리 없애야 합니다.
네 번째, 지혜 있는 이가 가르치기 쉬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수와쪼(suvaco)’라고 합니다. 수와쪼는 안 좋은 일을 멈추라고 하면 ‘네’ 이러고 더 이상 하지 않는 겁니다. 이것의 반대는 ‘둡바짜(dubbaca)’라고 하는데 가르치지 어려운 사람입니다. 고집 센 사람. 좋은 것에 고집이 세면 되는데 8정도에 대한 고집, 4성제를 믿는 고집. 바른 견해가 고집스러운 것을, 고집스럽게 지키는 것을 ‘둡바짜’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게 아니라 잘못된 것을, 바르지 못한 것을, 사견을 꺾지 않는 것. 안 하는 것이 좋은데 하겠다고 계속 고집을 부리는 것. 이런 것을 둡바짜라고 합니다. 그것의 반대가 ‘수와쪼’입니다. ‘가르치지 쉬운 사람’, ‘타이르기 쉬운 사람’, 잘못됐다고 애기하면 그 즉시 고치고 ‘보시가 선업이다’ 이렇게 애기하면 그 즉시 보시를 하고 계를 지키는 게 이롭다면 바로 계를 지키고 8계를 지키는 게 이롭다 들으면 그 즉시 8계로 즉시 바꾸고. 이런 게 수와쪼인 거죠. 이것은 좋은 일이다, 이렇게 들으면 바로 실천하고 이런 게 수와쪼입니다. 타이르기 쉬운 사람인 거죠. 잘못을 했지만 잘못된 것이니깐 ‘고치세요’ 이러면 금방 고치는, 누구나 잘못을 할 수 있죠. 할 수 있습니다. 잘못된 것을 계속 고집 피우면 곤란하죠. 누구나 다 잘못을 하지만 내가 잘못됐다는 것을 금방 인정하고 바꾸면 됩니다. 누구나 다 완벽하지 않으니깐 바꾸면 되는데, 끝까지 바꾸지 않는, 죽을 때까지 바꾸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둡바짜인 거죠. 그 반대가 수와쪼입니다. 타이르기 쉬운 사람, 바른 길로 인도하기 쉬운 사람, 이게 자애관을 하는 사람의 소양입니다. 평소에 마음가짐이 이러해야 그 사람이 자애관을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서 자애의 마음이 우러 나온다는 거죠.
그러니깐 선한 자신의 일에 일인자인 사람, 자기 일을 아주 잘하는 사람. 그리고 앞과 뒤가 같은 사람, 양심에도 꺼리낄 게 없는 사람. 그리고 타이르기 쉬운 사람. 이런 사람들이 자애관을 할 수 있습니다. 자애관을 하는 사람들이 갖추고 있는 소양입니다.
그다음에 또 다섯 번째, 좋은 일에 부드럽고 유연한 사람, ‘무두(mudu)’입니다. 좋은 분야에서 유연하고 부드럽고 말랑한 사람. 안 좋은 일에도 그러면 안 되죠. 안 좋은 일에 귀가 팔랑거리면 안됩니다. 근데 좋은 일에 좋은 면에서 부드럽고 유연하고 그런 사람.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자애관을 하려면 ‘부드러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말도 부드럽게 하고 행동도 부드럽게 하고 좋은 일에서 부드러운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거죠. 선업적인 면에서.
여섯 번째, ‘아나띠마니(anatimānī)’입니다. 교만하지 않는 사람. 교만이 적어야 됩니다. 교만이 없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아라한이 아니기 때문에 교만합니다. 근데 교만도 좋은 일에 교만해야 됩니다. 안 좋은 일에 교만하면 안 되고. 좋은 일에 교만하다는 것은 ‘저 사람도 저런 선업을 짓는데 저 사람도 수행을 하는데 나라고 수행을 못할까’ 이런 것. ‘저 사람도 계를 지키는데 저렇게 어렵게 계를 지키는데 나라고 계를 못 지킬까’ ‘저 사람도 8계를 지키는데 나라고 지킬 수가 없나’. 학생이면 ‘쟤도 100점을 받는데 나라고 100점을 못 받는가’ 이런 교만, 좋은 쪽의 교만인 거죠. ‘쟤도 일찍 일어나는데 나도 일찍 일어날 수 있지’ 이런 것도 교만에 속합니다. 수메다 존자 보디삳따가 아라한이 될 수 있었는데도 아라한이 되지 않고 ‘나 혼자 윤회에서 벗어나서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많은 존재들과 함께 벗어나고 싶다’ 이 마음으로 아라한이 되기를 포기하고 붓다가 되겠다고 결심하죠. 이때 교만인 거죠. 이건 좋은 교만입니다. 좋은 쪽의 교만인 거죠. 엄청난 교만인데 좋은 쪽의 교만인 거죠. 이런 것들은 필요한 교만입니다. 우리가 아라한이 되기 전까지 ‘나도 아라한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아라한이 되는데 나라고 못 되겠는가’ 이런 교만, 이건 필요한 교만인 거죠. 이런 교만은 있어야 합니다. ‘쟤도 하는데 나라고 못하겠는가’ 이런 것. 그런 것 말고 좋지 않은 쪽으로 교만한 것. 쓸데없는 데 교만한 것. 교만해서 남을 업신여기는 잘못된 교만 이런 교만은 없어야 한다는거죠. ‘아나띠마니’ 교만해서 없신 여기는 교만은 없어야 합니다. 자애관을 하는 사람은 교만하지 않아야 한다.
그다음 일곱 번째, 자기에게 있는 재물, 나한테 분명하게 있는 것. 나한테 분명하지 않는 재물도 있죠. 이게 내 것인가 아닌가, 이런 재물도 있죠. 그렇지 않고 분명히 내 손 안에 있는 이 재물. 이것에 만족해야 합니다. 내게 주어진 결과에 만족해야 합니다. ‘산뚯사꼬(santussako)’,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는 것. 내가 하는 노력에 만족하는 게 아니라 그 결과에 불만을 가지지 않는 거죠. 나한테 주어지는 결과에 만족한다는 겁니다. 나의 노력에 만족하고 나의 능력에 만족해서 능력의 향상 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 노력은 열심히 하고 주어지는 결과 불만을 가지지 않습니다. 노력을 많이 하는데 주어지는 결과가 적을 수도 있고 많을 수도 있죠. 적든 많든 만족하는 거죠. 결과가 적다고 게을리하는 게 아니라 일은 ‘까라니야맛따 꾸살레나’로 해야 됩니다. 최대치로, 아주 잘하는 사람, 좋은 일에 능숙한 자가 되게 노력 해야 하는데 오는 결과는 불만 없어야 한다는 거죠. 쉽게 만족하지 못하게 되면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분노하거나 슬퍼할 수 있습니다. 분노하고 화내고 싸우고 전쟁하고 이렇게 되죠. 그렇지 않고 오는 결과에 가진 것에 만족하는 겁니다. 일은 제일 잘하는 사람이 되고 결과는 쉽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다음 여덟 번째, ‘수바로(subharo)’. 타인이 모시기에 먹여 살리기에 쉬운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다른 존재가 이 사람을 돌보기에, 먹여살리기에, 모시기에 까다롭지 않아야 합니다. 쉽게 먹여 살리기 쉬운 존재, 까다로워서는 안 됩니다. 쉬워야 합니다. 까탈스럽지 않고 그냥 쉬워야 됩니다. 먹여 살리기 쉬운 존재. 봉양하기 쉬운 존재가 되어야 됩니다. 자애관을 하는 사람들이 갖추는 소양입니다. 그런 사람이 자애관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자애관을 하기 전에 먼저 이런 소양들을 갖추어야 한다는 거죠.
아홉 번째, ‘압빠낏쪼(appakicco)’. 필요없는 과외의 일들이 적어야 됩니다. 필요하지 않는 과외의 일들이 적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주 업이 있죠. 직업이 있고. 직업이 수행 출가자면 비구의 본업은 수행입니다.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 윤회에서 벗어나는 게 본직이죠. 본업입니다. 그럴려고 계를 받죠. 계를 받을 때 ‘왓따 둑카또 모짜낫타야(vaṭṭa dukkhato mocanatthāya)’ 이렇게 받습니다. ‘윤회의 고통으로부터(vaṭṭa dukkhato) 벗어나기 위해(mocanatthāya)’ 저를 불쌍히 여겨서 비구계를 주십시오. 이렇게 간청하고 받습니다. 윤회에서 벗어나는 일을 하는 것이 본업이죠 그 외의 다른 일을 하면 부차적인 일이 되는 거죠. 부업이 적어야 한다는 겁니다. 수행자면 위빳사나 수행하는 일 외의 다른 것. 화단에 물 주고 밭을 가꾸고 옷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수행처에 가서. 제가 아는 분이 하룻밤에 옷을 하나씩 만들었다 했습니다. 손바느질로. 이게 과외의 일인 거죠. 수행자에게 이런 일들이 적어야 합니다. 장을 보러 간다거나(빤디따라마에서 절대 허용되지 않는데 어떤 수행센터에서는 장을 보러 가기도 한다고 하더군요) 이런 과외의 일들이 적어야 합니다. 학생이면 학생의 일 외에 다른 부수적인 일들이 적어야 한다는 거죠. 필요없는 과외의 일입니다. 필요한 과외의 일이면, 여러분 지금 법문을 듣는 게 주업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지만 필요한 일인 거죠. 이런 필요한 일 말고 필요치 않는 과외의 일이 적어야 한다는 거죠. 5계만 지켜도 과외의 일이 되게 적어집니다. 8계를 지키면 더 적어지고. 그렇게 됩니다.
그다음에 열 번째, 의식주가 가벼워야 합니다. 쉽고 가볍게 의식주가 유지되어야 합니다. 먹고 사는 일이 가뿐하고 간편해야 됩니다. 우리 생명유지활동, 먹고 입고 자고 하는 ‘의식주’가 무거워서는 안 됩니다. 가벼워야 됩니다. 먹고 살고 몸을 유지하는 게 되게 가벼워야 합니다. 보통은 남성들은 일이 적죠. 외출하는 데 준비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여성들은 오래 걸리죠. 그러면 안 된다는 겁니다. 여행갈 때 짐이 많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전 짐이 많습니다. 많습니다. 잠자는 데 필요한 것만 해도 아주 많더라구요. 그렇게 많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가벼워야 된다는 거죠. 그래야 됩니다.
비구들 같은 경우는 부처님 당시에 비구에게 ‘가사 3벌만 가져라’ 그랬습니다. 부처님이 가사 3벌만 지니게 한 이유가 (계율은 나중에 하나씩 생겨나는데, 처음에는 계율 자체가 없었습니다.) 그 시대에는 가사가 드물었지요. 미얀마에는 지금도 가사가 흔치 않습니다. 많은 분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귀합니다. 그래서 가사가 생기면 타지역으로 이동할 때 여벌의 가사를 들고 이고 지고 가는 거죠. 다 걸어다니셨으니깐 말이나 마차 우차를 탈 수 없었습니다. 수레를 탈 수도 없었고 맨발로 다 걸어야 했습니다. 걸어서 가니깐 입은 가사 외에 다른 가사를 이고 지고 이러고 다니신거죠. 그런데 그러고 다니니깐 보기에 안 좋지 않습니까? 부처님이 ‘입은 가사만 허용된다.’ 이렇게 한 거죠. 그 당시 비구들은 신발도 없이 걸어다니셨으니깐 이삿짐이 간편해야 되겠지요. 안거를 한 번 여기서 나고 저쪽으로 가는데 많은 이삿짐을 들고 걸어서 가실 수 없으니깐 간소해야 했습니다. 간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안 간편하면 너무 힘겨운 거죠. 현재도 대체로 제가 본 미얀마 비구들은 매우 간편하게 이사합니다. 이사하는 데 별로 짐이 없었습니다. 간편하게 다니십니다. 이렇게 가벼워야 된다는 겁니다. 얼마나 가벼워야 되냐면 참새는 날개만 있으면 날아가지요. 새는 날개만 있으면 어디든지 갈 수 있습니다. 비구도 8가지 물품, 이것만 있으면 갈 수 있다. 8가지 물품은 뭐냐면 ‘1~3) 가사 3벌, 4) 발우, 5) 물 거르개(물을 걸러서 마셔야 됐습니다. 우리나라는 정말 금수강산입니다. 흐르는 물을 마실 수 있습니다. 근데 인도나 네팔 미얀마 이런데서는 개천에 흐르는 물을 마실 수가 없습니다. 벌레며 온갖 구정물인 거죠. 진짜 구정물입니다. 그 벌레들을 천으로 걸러서 마셔야 하죠. 벌레도 들어있고 흙도 들어있고 그러니깐 천에 걸러서 마셔야 됐습니다. 그 걸러서 마시는 거르개입니다.) 그리고 6) 면도칼, 7) 허리띠, 8) 바늘입니다. 이렇게 해서 8개, 이게 다입니다. 이것만 있으면 갈 수 있습니다. 발우만 매면 가실 수 있는 거죠. 가사 3벌은 아랫가사, 윗가사, 그리고 대가사입니다. 신발도 없어도 됩니다. 신발 없이 다녔습니다. 이 정도면 새처럼 날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 정도면 생계가 유지되는 것을 ’살라후까웃띠(sallahukavutti)‘라고 합니다. 가볍게 날아다닐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된다.
’살라후까웃띠‘는 가볍게 날아다닌다, 이런 뜻입니다. 그렇게 가벼운 존재가 되어야 된다. 다시 말하면 발우만 들고 어딜 가도 생계가 해결된다는 것이지 않습니까? 가사를 두르고 발우만 들고 나가면 어디든지 다닐 수 있다는 것은 어디든지 가도 나한테 밥을 줄 수 있는 복을 지어놔야 됩니다. 어느 집 앞에서도 나의 끼니가 해결될 수 있는 복을 지어야지 발우만 들고 다닐 수 있는 거죠. 탁발이 안 되면 발우만 들고 다닐 수 없습니다. 그렇죠. 돈이 있어야 되죠. 탁발이 안 되면 돈이 있어야 합니다. 미얀마에 아주 아주 유명한 강원에 한 사야도가 계셨습니다. 지금은 아주 부유한 강원의 주지이십니다. 그 절이 아주 부유한 절인데 이분이 학승이실 때 탁발이 안 됐습니다. 탁발이 안 돼서 항상 자기 도반의 밥을 얻어 드셨답니다. 자기 발우에는 밥이 들어오지 않는 거죠. 그래서 도반의 밥을 항상 나누어서 드셨답니다. 나누어서 드시고 어디 멀리 가게 되면 도반이 없으니깐 돈을 가지고 다니셔야 했던 거죠. 발우에 밥이 들어오지 않으니까 계를 어기게 됩니다. 큰 계를 어긴 건 아닌데 어쨌든 계를 어긴 게 되니깐 항상 찝찝하신 거죠. 그러셨답니다. 어쨌든 살라후까웃띠가 되려면 보시 공덕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지 가벼운 생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고 마치겠습니다. 회향하겠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공덕이 우리를 번뇌의 소멸로 이끌기를.
이러한 우리의 공덕을 모든 존재들에게 회향합니다.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사-두 사-두 사-두
필사자: 익명
편집자: 담마삐야
* 2022-11-11 인터넷
(https://us05web.zoom.us/j/4694074327?pwd=b2pNRUk4VzExbWFMSitFa1Jkc0wyUT09)으로 하신 법문을 필사하였습니다. 필사 후 위뿔라냐니 식카와띠님께 보여드리고 요약, 수정, 추가한 부분이 있습니다.
https://cafe.naver.com/dhammadipakorea/529
일부용어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