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14 자애 바라밀 (6) (위뿔라냐니 식카와띠님)
붓다왕사 193강 - 자애 바라밀 (6)
<붓다왕사>에서 바라밀 중 9번째 ‘자애 바라밀(mettā-pāramī)’ 하고 있습니다. 자애관입니다. 빠알리(pāli)로 하는 자애관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우리가 주로 하는 것은 ‘아항 아웨로 호미(ahaṃ avero homi)’, ‘나에게 적의가 없기를’ 이렇게 시작하는 거죠. 후대에 나온 자애관 아닌 붓다께서 설하신 그 자애관을 지금 하고 있습니다.
자애경을 설하신 배경
자애 숫따(mettā-sutta. <숫따니빠따> 1:8)입니다. 비구들이 안거 3개월 정진하러 갔는데 계속 숲에 사는 정령들이, 목신들이 수행을 못 하게 괴롭힙니다. 수행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비구들이 계율이 높아서 이 숲의 정령들이 비구들 위에서 지낼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우기 때 자기들의 주거지인 나무 위에서 지내지 못하고 내려와서 지내야 했습니다. 젖은 땅에서 지내야 돼서 너무 불편했던 거죠. 그래서 비구들을 쫓아내고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비구들은 우기 3개월을 이동하지 않고 수행을 해야 하는 게 계율입니다. 땅도 젖어있고 모기장도 없고 뱀도 있고 전갈도 있고 호랑이도 있고 이런 데서 수행했습니다. 이제 이 정령들이 자꾸 귀신처럼 무섭게 괴롭히는 거죠. 잘린 팔을 보여주고 목이 잘려 있는 것을 보여주고 두려워 떨게 했습니다. 놀라면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니깐 집중을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만드는 거죠. 이 숲속에 사는 목신이며 정령들이 그래서 방해하니 수행을 할 수 없어서 다시 부처님께 갔더니, 부처님이 이걸 가지고 가면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면서 자애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자애관을 펼치면서 갔더니 숲속에 사는 정령들이 다 조복해서 수행을 잘할 수 있게 도와줬답니다. 주변에 자애를 펼치면 내가 원하는 일이 잘되게 해주는 거죠.
자애수행의 결과
제가 미얀마에 있을 때 자애관을 주로 하는 수행자를 본 적이 있는데 10대 후반의 여대생이었습니다. 미얀마는 16살에 대학교에 들어가기 때문에 대학 졸업하면 20살입니다. 10대 후반인 이 학생이었는데 매우 똑똑했습니다. 어려서부터 마하시계열에서 여는 여름방학 교리 학교(이하 섬머스쿨)에 들어갔습니다. 썸머스쿨이라는 것은 학생들이 방학 때 와서 단기출가하고 교리를 배우는 거죠. 불교 교리를 매우 스파르타식으로 배웁니다. 정말 군대보다 더 빡세게. 진짜로 군대보다 더 빡세게 배웁니다. 매주 시험 치고. 새벽 3시에 일어나서 10시까지 공부하고 8살짜리부터 해서 16살 고3까지. 어린 학생들이 빡세게 합니다. 출가하니 가사는 또 얼마나 많습니까. 가사는 두껍고 여러 겹을 입어야 합니다. 가장 더운 시기에 새벽부터 3시부터 밤 10시까지 하는 거죠. 근데 이 학생이 어려서부터 4년간 그 과정을 다 1등 했습니다. 자기 집이 가난해서 가사 살 돈과 경비를 자기 스스로 1년 동안 모아서 들어왔는데, 그렇게 해서 썸머스쿨 다 마쳤습니다. 평소에는 주로 자애관을 많이 하는 학생이었는데 위빳사나 수행을 아주 잘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 학생이 학교를 통학할 때 자기는 자애관을 이렇게 써먹는다면서 저한테 가르쳐 줬습니다. 버스를 타고 자리가 없으면 서서 가지요. 서서 가는데 버스를 타거나 기차를 타고 올 때 그 옆에서 서서 자애관을 하면 사람들이 일어난답니다. 자기한테 자리를 양보하는 거죠. 이 학생이 정말 자애관을 잘했던 게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나이가 어렸는데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두려운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자애관을 해서 그렇다고 했습니다.
원래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분들은 수행하기 전보다 정신이 더 안 좋아지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멘탈이 정상이 아니게 되는 거지요. 수행하다가 이런 경우들이 있는데 그런 경우에 이들은 몽유병처럼 자다가 일어나서 옆사람을 빤히 쳐다보고 있거나 한밤중에도 잠을 자지 않고 서 있습니다. 잠 들지 못하는 거죠. 그런 경우에도 이 학생이 전혀 동요하지 않고 같이 마주보고 웃었습니다. 정신이 이상한 수행자가 자기 침대 머리맡에 반듯이 서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자애관을 해서 자기가 그렇게 됐다고. 두려움이 없게 되고 주변 존재들에게도 편안함을 주는 거죠.
자애를 닦는 사람이 갖춰야 할 조건들
자애관을 하는 사람들의 소양, 자애관을 하기 전에 갖춰야 될 것이 있다. 그 열 번째가 생계, 의식주가 가벼워야 된답니다. 의식주에 있어서 복잡하지 않고 가벼워야 된다는 거죠. 화려하고 필요없는 것들 없이 간소하게 단순하게 쉽게 해결해야 한다는 거죠. 먹고 입고 자고 이런 것들이 간소할 것. 그게 자애관을 하기 전에 갖춰야 될 덕목입니다. 소양인 거죠. ‘살라후까웃띠(sallahukavutti)’라고 합니다. 가볍게 다니는 것. 의식주가 가벼운 겁니다.
열한 번째, 감관이 조용해야 합니다. ‘산띤드리요(santindriyo)’라고 합니다. 산따(santa)는 고요함이고 인드리야(indriya)는 감관입니다. 인드리야가 여러 가지 뜻이 있는데 여기서는 감관인 거죠. 눈을 잘 다스리고 귀를 잘 다스리고. 이 귀를 잘 다스린다는 것은 귀로 들어오는 소리로 인해서 성냄이 일어나지 않게 한다. 번뇌가 일어나지 않게 한다. 그런 겁니다. 혀를 잘 다스린다는 것은 맛으로 인해서 탐착이 일어나지 않게, 맛에 대한 탐착과 싫어함이 일어나지 않게 한다는 겁니다. 5문으로 번뇌가 들어오지 않게 잘 다스리는 겁니다. ‘산띠인드리요’. 자애관을 하기 위해서 이게 있어야 된다는 거지요. 자애관하기 전에 이런 마음 다스림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다음 열두 번째, 허물이 없는 일, 문제가 없는 일, 좋은 일인 거죠. 선업에 성숙한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안 좋은 일, 불선업에 성숙한 지혜가 있는 게 아니라 좋은 일, 허물이 되지 않는 일에 성숙한 지혜. 지혜가 그런 방면에 있어서 성숙해야 한다는 거죠. 그런 좋은 쪽으로 성숙된 지혜가 있어야 된다. 이를 ‘니빠꼬(nipako)’라고 합니다. 잘 익은 지혜, 좋은 쪽으로 잘 익은 지혜, 그게 있어야 합니다. 자애관을 하기 위해서, 자애관 하기 전에 갖추어야 되는 소양입니다.
그다음에 열세 번째, ‘압빠갑보(appagabbho)’. 몸과 말과 마음, 이 세 가지가 거칠지 않아야 됩니다. ‘나 짜 쿳다 마짜레 낀찌(Na ca khudda mācare kiñci)’, ‘사소한 것도 거칠게 해서는 안 된다’, ‘몸도 말도 마음 쓰는 것도 거칠지 않아야 된다’입니다. 거칠지 않게 행동해야 됩니다.
그리고 열네 번째, 꿀레스와나누깃도(kulesvananugiddho = kulesu ananugiddho). 재가 신도들에게 집착함이 없어야 합니다. 집착하지 않아야 된다. 사람에게 집착하지 않아야 됩니다. 비구들이 숲에 가서 수행을 잘할 수 있게 부처님이 가르쳐준 자애관이니까,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재가신도들에게 집착함이 없어야 된다’ 이렇게 가르쳐주신 거죠. 거칠지 않고 그리고 집착함이 없어야 된다.
그다음이 열다섯 번째, ‘나 짜 쿳다 마짜레 낀찌, 예나 윈뉴빠레 우빠와데이융(na ca khuddamācare kiñci, yena viññū pare upavadeyyuṃ)’. ‘지혜 있는 이들이 비난할 만한 어떤 작은 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입니다. 비난받을 만한 어떤 것도 하지 않아야 되는데, 그게 지혜 있는 이들의 비난을 받을 만한 어떤 것, 어리석은 이들의 비난을 받을 만한 일이 아니라 지혜 있는 이들의 비난을 받을 만한 어떤 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겁니다. 비난을 두려워해야 하는데 지혜로운 이들의 비난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거죠. 어리석은 이들의 비난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어리석은 이들의 비난은 받으면 영광이고 지혜로운 이들의 비난은 받으면 개선해야 합니다. 비난 받지 않도록 그런 일들이 없도록 해야 한다. 작은 비난도 받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 15개가 자애관 하기 전에 내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 자질입니다. 이게 있어야지 자애의 마음이 일어난다는 거죠. 이 15개가 소양만 갖추어도 훌륭한 사람인데 제가 보기엔 자애가 있어야지 이런 15가지를 갖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15개 덕목을 갖추고 난 뒤에 자애관을 합니다.
자애관을 하는 방법
이 자애관 하는 방법을 간단하게 말하면, 삽바 상가히따 자애(sabba-saṅgahita-mettā), 모든 중생을 다 하나로 보고 자애관 하는 겁니다. 한 덩어리로 만들어서 자애관 하는 거죠. 모든 중생을 다 하나로 만들어서 자애관합니다. 삽바 상가히따 자애라고 합니다. 중생을 전부 다 한 덩어리로 보고 자애관하는 것.
그다음, 뒤까 바와나 자애(dvika-bhāvanā-mettā)라고 합니다. 중생들을 두 부류로 나누어서 자애관 하는 겁니다. 두 부류. 보이는 존재(딧타diṭṭha), 보이지 않는 존재(아딧타adiṭṭha), 이렇게 나눌 수 있겠죠. 그리고 아리야(ariya), 아나리야(anariya). 성인과 성인이 아닌 존재. 이렇게도 나눌 수도 있고.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겠지요.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자애관 할 때 죽은 사람에게 자애관 하지 않습니다. 돌아가신 분들에게는 자애관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돌아가셨어도 어딘가에 태어나 계실 테니깐 해도 되지 않느냐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비구들이 법문을 하고 나면 이렇게 회향 하지 않습니까. 전생부터 나를 낳아주신 모든 어머니를 위해서 이 법문을 한 선업을 회향합니다. 이렇게도 하죠. 돌아가신 분인데 전생에 나를 낳아주신 이 생이 아니라 세세생생 나를 낳아주신 전생의 모든 어머니를 위해서 이 법문한 공덕을 회향합니다. 이렇게 회향 하죠. 자애관을 하면 자애를 받습니다. 돌아가신 분은 자애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살아있는 존재에게 하면 받는 거죠. 돌아가신 분에게 하면 자애관이 안 된다고 합니다. 자애관이 안 되기 때문에 살아있는 존재에게만 자애관을 하면 그 존재에게 가서 닿습니다.
그다음, 띠까 바와나 자애(tika-bhāvanā-mettā). 3부류로 나눕니다. 중생을 3부류로 ‘길고 짧고 중간이고’ 이렇게 할 수 있겠지요. 아니면 범천계, 사악처, 욕계 선처. 이렇게 나눌 수도 있고. 3부류로 나누어서 자애관을 해도 됩니다.
하나로 묶어서 자애관 하는 방법
첫 번째 삽바 상가히따 자애. 하나로 한 덩어리로 자애관 하는 것. 한 덩어리로 자애관을 할 때는 ‘수키노 와 케미노 혼뚜, 삽베 삿따 바완뚜 수키땃따(sukhino vā khemino hontu, sabbe sattā bhavantu sukhitattā.)’, ‘행복하기를, 그리고 모든 뜨거움이 없기를. 모든 중생들이 행복하기를’ 이렇게 자애관 합니다. ‘모든’을 넣는 거죠. 모든 중생의 몸이 행복하기를, ‘삽베 삿따 수키노 혼뚜(sabbe sattā sukhino hontu)’ 이러면 ‘모든 중생들에게 몸의 행복(까이까 수카kāyika sukha)이 가득하기를.’ 이런 뜻입니다. ‘삽베 삿따 케미노 혼뚜(sabbe sattā khemino hontu)’, ‘모든 중생들이 위험과 적의 없이 평화롭기를’. ‘삽베 삿따 바완뚜 수키땃따(sabbe sattā bhavantu sukhitattā)’. 모든 중생들이 쩨따시카 수카(cetasika-sukha), 마음의 행복으로 가득하기를. 이렇게 3가지 하는데 모든 중생이니깐 중생을 한 덩어리로 보는 거죠.
미얀마에 아주 유명하신, 위빳사나 수행지도로 유명하시고 빨리어도 아주 능통하신 사야도가 계십니다. ‘빨리 빠라구(pāli-paragu)’라고 합니다. 빨리로 저 강을 건넌 존재, 이런 뜻입니다. 빨리어에도 능통하시고 그런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자애관 할 때 이렇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모기와 개와 군인들은 제외하고.’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이렇게 자애관해야 한다는 겁니다.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한 번이라도 이런 마음을 내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그러니깐 드물게 내는 마음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이렇게 하셔야 됩니다.
두 부류로 나누어 자애관 하는 방법
‘뒤까 바와나 자애’. 두 부류로 나누어서 자애관 할 때는 먼저 ‘따사 타와라 뒤까(tasa-thāvara-dvika)’. ‘따사(tasā)’와 ‘타와라(thāvarā)’로 나눕니다. ‘따사’는 두려움이 있는 존재입니다. ‘따사’는 ‘떨림’입니다. 두려우면 떨리죠. 우리가 두려우면 떨죠. 그리고 ‘타와라’는 흔들림이 없는, 영원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영원한 것이란 흔들림이 없는 거니깐. ‘떨림이 있는 존재’와 ‘떨림이 없는 존재’ 둘 다 행복하기를.
또는 ‘딧타(diṭṭhā)’와 ‘아딧타(adiṭṭhā)’로 나눕니다. 합치면 딧타 더하기 아딧타인데 합치면 딧타딧타(diṭṭhadiṭṭha) 이렇게 발음됩니다. 중간에 ‘아(a)’가 하나 없어져서. 그래서 딧타딧타 뒤까(diṭṭhādiṭṭha-dvika). 하면 ‘보이는 존재’, ‘보이지 않는 존재’ 두 부류로 나뉘는 거죠. 보이지 않는 존재도 있죠. 우리가 얼마나 본다고 우리 시력으로 볼 수 있는 게 얼마나 보인다고 보이지 않는 존재들도 많이 있습니다. 일단 물속에 땅아래 있는 존재들은 안 보이지 않습니까. 물속에 땅 아래 정말 많은 중생들이 사는데 안 보이죠. 있어도 안 보이는데 정말 인간의 시력으로 안 보이는 존재들은 더 많겠지요. 보이는 존재, 안 보이는 존재 두 부류로 나누어서 자애관 합니다.
'두라 산띠까 뒤까(dūra-santika-dvika)'. ‘두라(dūrā)’는 멀리 있는 존재. 산띠까(santikā)는 가까이 있는 존재. 멀리 있고 가까이 있는 존재. 두 부류의 중생들, 가까이 있는 존재에게도 멀리 있는 존재에게도 자애관 합니다.
‘부따 삼바웨시 뒤까(bhūta-sambhavesī-dvika)’. ‘부따(bhūtā)’는 빨리어에서 ‘존재’라고도 하고 ‘중생’이라고도 하고 ‘분명한 존재’라고도 하고 여러 가지 뜻을 가지는데 여기에서는 아라한을 말합니다. ‘부따’와 ‘삼바웨시’ 하면 ‘부따’는 아주 분명하고 특별한 덩치가 큰, 이런 뜻입니다. 근데 삼바웨시(sambhavesī)는 그렇지 않은 거죠. 두 부류로 나눴습니다. 아라한과 아라한이 아닌 존재. 이렇게 두 개로 나눈 겁니다. 부따는 ‘아주 분명한, 아주 특별히 큰’이라는 뜻인데 그냥 물리적으로 보기에 큰 존재도 부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덩치가 큰. 여기에서는 아라한인 거죠. 아라한, 아주 선명한 존재. 삼바웨시는 아라한 이외의 나머지 존재입니다. 범부와 유학(有學. 배울 것이 남은 성자들)이죠.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이렇게도 나뉘네요 아라한이 아니면 나머지는 다 삼바웨시입니다. ‘아리야’와 ‘아나리야’. 즉 성인과 범부로 나누기도 하고 아라한과 아라한 이외의 존재들로 나누기도 합니다. 아라한만 특별하고 나머지 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미생인 거죠. 나누는 기준은 어떻게든지 나눌 수 있습니다. 아라한과 아라한이 아닌 존재로 보면 성인도 들어가고 범부도 들어가고.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두 가지로 ‘땃사 와 타와라 와 아나와세사 삽베삿따 수키땃따(tasā vā thāvarā vā anavasesā)’ 이러면 이거는 ‘땃사’는 ‘두려움이 있는 존재, 떨림이 있는 존재’입니다. 두려우면 오금이 저리지 않습니까? 두려움이 있는 존재 그리고 타와라, ‘두려움이 없는 존재’. ‘아나와세사’ - ‘그 외의 또 존재들이’, ‘삽베 삿따’ - ‘모든 존재들이’, ‘수키땃따’ - ‘행복하기를’. 집착이 있으면 두려움이 있습니다. 집착과 두렵고 놀람. 이런 것들이 제거되지 않은 범부, 그리고 섹카(sekkha), 유학(有學)인 성인들입니다.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성인인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까지 집착이 있고 떨림이 있고 두려움이 있고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없어지지 않은 거죠. 아라한들만 ‘타와라’가 됩니다. ‘떨림이 없는 존재’, ‘영원한 존재’인 거죠. ‘확고한 존재’ 아라한입니다. 이 모든 존재들이 다 행복하기를.
아라한에게 자애관을 하는 이유
어떤 분은 ‘아라한에게 자애관을 할 필요가 있는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라한은 그 자체로 완전한데. 아라한에게까지 자애관을 할 필요가 있는가?. 아라한에게 자애관을 하면 잘될 것 같은데. 자애관은 내가 자애관을 하면 그 상대가 받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내 마음의 자애를 키우는 거지 않습니까? 내 마음이 자애로 가득차기를 바래서 하는 게 자애관인 거죠. 내 마음에 자애가 있으면 두려움이 없고 떨림이 없어서 집중을 잘할 수 있어서. 위빳사나 수행을 잘할 수 있기 때문에 자애관을 하는 거죠. 아라한이면 자애관 하기 쉬울 것 같은데. 아라한이란 존재를 정말 보게 되면 자애의 마음이 더 잘 생기겠지요. 아라한을 보면 고요한 마음, 그런 마음이 더 잘 생기니깐 자애관 하기 쉬운 거지요. 아라한이 받는지 못 받는지 이건 중요하지 않고 내 마음에 자애가 잘 생기는 존재에게 자애관을 하면 좋습니다.
그러자 질문한 그분이 ‘아라한도 통증이 있습니까?’ 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아라한은 집착이 없어서 통증이 없을 것 같은데 아라한도 통증이 있습니다. 아라한도 둑카 웨다나(dukkha-vedanā. 몸의 괴로운 느낌)가 있습니다. 어디서 읽었는지 기억이 안나는데 탁발시간 이른 아침에 어떤 노스님께서 뜨거운 죽을 받자마자 바로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서 드셨습니다. 그 노스님은 뜨거운 죽을 식기 전에 마셔야지 위가 진정이 될 것 같아서 받자마자 길에 앉아서 뜨거운 죽을 마신 거죠. 지나가던 젊은 비구가 길에 앉아서 죽을 마시고 있는 연세 많으신 노스님을 보고 “그렇게 품위 없이 길에서 죽을 마시다니 보기 흉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라한인 노스님이 그 말을 듣고 젊은 비구에게 “어디까지 얻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수행을 어디까지 했느냐는 거죠. “수다원입니다, 스님.” 대답을 듣고, “앞으로 그대는 더 이상 발전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딱 잘라 말했죠. 성자비방업을 지으면 수다원이라도 그다음 단계의 도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 말을 들은 젊은 수다원이 그제서야 그분이 아라한이라는 사실을 알고 바로 엎드려서 사죄합니다. 수다원에서 막힌다는 건 끔찍하지요. 바로 엎드려서 사죄하니 아라한도 사죄를 받고 용서해줍니다. 용서를 받고 수행에 진전이 있게 되었답니다. 이렇게 아라한도 위장병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급하게 쭈그려 앉아서 죽을 마셔야 합니다. 몸의 통증을 느끼니까요.
오늘 여기까지 하고 마치겠습니다. 회향하겠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공덕이 우리를 번뇌의 소멸로 이끌기를.
이러한 우리의 공덕을 모든 존재들에게 회향합니다.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사-두 사-두 사-두
필사자: 익명
편집자: 담마삐야
* 2022-11-14 인터넷
(https://us05web.zoom.us/j/4694074327?pwd=b2pNRUk4VzExbWFMSitFa1Jkc0wyUT09)으로 하신 법문을 필사하였습니다. 필사 후 위뿔라냐니 식카와띠님께 보여드리고 요약, 수정, 추가한 부분이 있습니다.
https://cafe.naver.com/dhammadipakorea/531
일부용어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