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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과 자애

230504 집중수행 법문

작성자그림자|작성시간23.08.16|조회수29 목록 댓글 3

20230504 집중수행 법문(1) (위뿔라냐니 식카와띠님)

 

집중수행 법문(1) 2023-5-4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몸의 움직임에 명칭하셔야 됩니다. 몸의 움직임에 명칭하는데 이 한 번에 한 동작만 해야 된다고 그랬죠. 방금 같은 경우에 놓친 겁니다. 한 번에 하나만 움직여야 합니다. 한 번에 하나만 움직이고 그 하나의 동작에 집중해야 합니다. 펴면 폄, , , 굽히면 굽힘, 굽힘, 보이면 보임, 보임, 닿으면 닿음, 닿음.

 

이 움직임에 집중해야 합니다. 팔을 움직이고 굽히고 펴고, 눈을 뜨고 감고하는 동작이면 명칭도 해야 하고 집중도 해야 하고. 그거 하면서 생각하고 있는지 아닌지 계속 살펴야 합니다. 이 몸의 명칭을 내가 다 했다 하더라도, 뭘 못하고 있냐면 지금 생각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지금 못 보고 있어요.

 

내가 몸에 명칭 다 하더라도, 내가 펼 때 폄, , 폄이라고 했는데, 이 펴는 느낌이 정확하지 않으면 인터뷰할 때 보고할 내용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 느낌을 정확히 모르면 내 마음이 거기에 제대로 가지 않은 겁니다. 왜 제대로 안 갔냐면 생각이 많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왜 많은가 하면, 일단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고, 왜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냐 하면, 몸에도 정확히 명칭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몸에 명칭을 정확히 해야 합니다. 모든 동작에 다, 모든 동작에 싹 다 명칭해야 합니다. 팔 굽히고 펴고 앉고 서고 문고리를 잡으면 잡고, 안경 벗고 안경 쓰고 이런 동작들 다 명칭해야 됩니다. 이 수행처는 아주 좁습니다. 이보다 더 좁을 수는 없습니다. 아주 좁기 때문에 이 안에서 하는 동작들을 내가 다 명칭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안에서 다 명칭할 수 있습니다. 이보다 더 넓은 데서도 했는데 안 될 리가 없습니다.

 

근데 이보다 더 좁을 수는 없죠. 공양간 가는 것도 이 정도면 아주 가까운 편이죠. 대부분 수행처가 여기보다 훨씬 멉니다. 이 안에서 하는 동작들 다 명칭 해야 합니다. 동작에 다 명칭해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모르고 놓치고 있습니다. 동작에 명칭 못하면 생각은 저 멀리 갔습니다. 내 능력 밖의 일이 돼 버린 거죠.

 

위빳사나의 대상이 신수심(身受心) 세 가지 중에서 심()은 생각인데 생각을 사띠해야 됩니다. 내가 몸을 명칭(사띠)한다고 했는데도, 몸에 대해서 보고할 게 없지 않습니까? 부풂 꺼짐에 대해서 보고할 게 없고, 통증에 대해서 보고할 게 없고, 듦 나감 내림에 대해서 보고할 게 없는 이유가 생각을 사띠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생각을 사띠하려면 우선 몸에 정확히 명칭해야 합니다. 몸을 움직일 때 대충하지 않고 아주 정확히 움직여야 합니다. 아주 정확히 명칭도 해야 하고, 집중도 해야 하고, 그리고 그거 하면서 또 생각하고 있는지 아닌지도 계속 사띠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습니다. 동작 하나에도 아주 많은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읽은 책이나 들은 법문을 기억해서 보고하는 것은 위빳사나가 아니거든요. 그런 거 보고하지 마십시오. 위빳사나도 물론 마음이 고요해야 합니다. 고요해야 대상이 잘 보이는데, 위빳사나의 대상이 몸 느낌 생각입니다. 그 중에서 몸이 가장 거칠고 가장 분명합니다. 이 몸은 마음보다 17배가 느리다고 아비담마에 나와 있습니다. 생각보다 엄청나게 느린 거죠. 이 느린 나의 몸에 명칭 잘하지 못하고, 몸의 느낌을 정확히 보고할 게 없으면, 내가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안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겁니다.

 

몸을 사띠해서 물질()에 대한 지혜가 생기려면, 생각을 사띠해야 몸이 바르게 보입니다.

 

위빠사나의 대상은 두 가지 뿐입니다. 물질과 정신, 이 두 가지가 위빳사나의 대상인데 신수심을 두 개로 나누면 물질과 정신이거든요. 5개로 나누면 오온이죠. (물질)을 잘 알기 위해서 생각을 계속 사띠해서 생각을 쳐내야 됩니다. 그래야 몸이 물질로 보입니다. 그전에는 몸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일단 움직이는 몸에 다 명칭해야 됩니다. 움직이는 몸에 그것도 아주 정확히 명칭해야 합니다. 집중해서 동작 하나에 매우 집중해야 합니다. 집중하는데 몸의 움직임과 몸의 느낌에도 집중을 해야 하고, 그리고 생각하고 있는지 아닌지도 계속 살펴야 합니다. 생각은 몸보다 훨씬 사띠하기 힘듭니다. 행선과 앉고 서고 굽히고 펴고 이런 동작들을 싹 다 명칭하고 매우 느리게 해야, 그 사이로 들어오는 생각들이 보일랑 말랑 합니다. 느리게 하지 않고 빨리 하면 생각이 안 보입니다. 생각이 안 보여서, 생각을 걷어내지 않고는 몸을 사띠해도 내 몸이 깨끗한 화질로 보이지 않습니다.

 

이 과정은 매우 집중해서 해야 합니다. 아주 집중해서 그 집중이 나한테 집중하는 것인데, ‘라는 게 오온이지 않습니까? 오온 (=,,심 세 가지)인데 이것을 아비담마에서는 빠라맛타 담마(물질 마음 마음부수 열반),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열반을 목표로 가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보는 게 물질과 마음이지만, 마음은 보지 못하니까, 여러분들이 본다고 하는 것, 제가 계속 보라고 하는 것은 마음부수입니다. 마음부수란 쉽게 말하면 느낌과 생각입니다. 기억하죠? 생각하고 있는데, 이걸 산냐라고 하는데, 이걸 계속 사띠(명칭)해야 됩니다. 느낌에 명칭해야 되고, 생각에도 명칭해야 되고, 이 두가지를 하기 위해서 몸에 명칭해야 합니다.

 

이 몸에 정확히 명칭해야 합니다. 대충하는 게 아니라, 나의 느낌과 생각에 명칭하고 관찰함에 몹시 냉정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왜 대충 대충 다니는지 제가 알았습니다. 좌선을 한 시간 하는 동안 절대 움직이면 안 됩니다. 척추가 굽었을 때 펴는 거 외에, 눈을 뜨거나 꿈지럭거린다거나 졸린다고 세수하고 비빈다거나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좌선 한 시간 앉는 동안 절대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죽을 듯이 아파도 참고 한시간 앉아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행선을 제대로 안 해서 벌을 좌선시간에 받아야 합니다. 행선을 제대로 안 하고 일상생활 할 때 제대로 안 하면, 좌선 중에 아프고 자꾸 움직이게 됩니다. 아파도 한 시간을 계속 참고 또 참아야 됩니다. 그래야 내가 다음 행선할 때 열심히 할 수 있습니다. 행선뿐만 아니라 좌선이 끝나고 푸는 동작부터 잘 해야죠. 좌선 끝나고 눈 뜨려면 눈 뜨려함, 뜨려함, 눈 뜸이렇게 명칭하고 팔 하나씩 풀고 다리 풀고 이거 다 명칭해야 합니다.

 

좌선이 끝나고 나서 몸을 푸는 게 아니거든요. 행선이 좌선시 굳은 몸 풀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행선을 하는 이유는 내가 좌선할 때, 사띠를 첨예하게 하기 위해서, 좌선할 때 한 시간을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서, 좌선할 때 멍하게 헤매지 않고 예리하기 위해서 행선을 하는 겁니다. 그러려면 행선할 때 놓치지 않고 최대한 안 놓치려고 칼을 갈아야 합니다. 좌선이 끝나고 행선하러 서는 동작부터 사띠가 계속 이어져야 합니다.

 

사띠가 계속 이어지게 하려고 지금 집에서 나와서 여기 수행처에 있는 거죠. 아니면 계속 그냥 집에서 해도 되죠. 집에서 돈도 벌고, 집안일도 하고, 이것저것 선업, 불선업을 섞어 지으면서 8정도를 닦아도 된다고 가르치는 데도 있지요? 그렇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집안일을 접어두고 여기 들어와 있는 거 아닙니까? 모든 사띠가 다 이어지게 해보려고.

 

좌선이 끝나고 나서 몸 푸는 운동을 하고 싶으면, 하고 싶은 그 생각부터 사띠해야 합니다. 뻐근함이라든가 지루함이라든가 통증이라든가 몸 풀고 싶다든가 이것부터 명칭해야 합니다. 몸의 동작에 일단 다 명칭해야 합니다. 좌선과 행선이 다 이어져야 하고, 행선이 끝나고 나서 좌선할 때도 그대로 이어져야 합니다. 행선에서 모은 사띠와 위리야가 좌선에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고 그대로 다 가서 이어져야 합니다. 행선에서 사띠하던 게 좌선과 차이 없이 이어져야 합니다. 수행처 안에서 팔 흔들고 걸으면서 화장실까지 가면 안 되지 않습니까? 모두 다 명칭해야 됩니다.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명칭하고, 그리고 행선에서 명칭해서, 지혜가 올라가면, 위빳사나 지혜라고 하죠. 생멸지의 시작 단계 정도만 지혜가 올라가도 명칭이 바뀝니다. 지혜의 수준이 바뀌면 명칭에서 쓰는 어휘도 바뀝니다. 그런 거 없이 자꾸 사라졌다. 일어나고 사라졌다. 소멸했다.”고 말하면 그것은 어디서 들은 얘기, 읽은 얘기를 저에게 하는 겁니다. 일상에서의 명칭과 그리고 행선에서의 명칭, 그리고 좌선에서는 나중에 단독이고,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보고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몸을 움직일 때 하는 동작들의 이 명칭이 바뀐단 말이죠. 명칭에서 쓰는 어휘가 바뀝니다. 이게 돼야지, 명칭에서 정리가 돼야지, 좌선에서 사띠와 사마디가 생겨서, 대상을 위빳사나의 대상으로 정확히 볼 수 있습니다. 내가 행선과 일상 즉 몸의 움직임에 대한 사띠가 제대로 되고 있지 않으면 좌선에서의 위빳사나 지혜가 절대 생기지 않습니다.

 

생멸지 정도 생기려면 행선과 일상생활의 명칭의 수준이 바뀝니다. 근데 내가 행선과 일상생활의 명칭이 별 차이가 없다. 제가 말하는 것은 아는 거, ‘발들 때의 느낌발이 닿을 때 느낌이거 떠나서 명칭 쓰는 그 어휘도 바뀐단 말이죠. “이거는 이렇게 명칭했다. 이렇게 명칭이 붙더라.” 이렇게 얘기하면 그 지혜 정도까지 간 수행자들은 지금 마음속에서 명칭이 저절로 정리가 됩니다. 왜냐하면 마치 원심 분리기를 돌려서 두 액체가 분리가 되는 것처럼. 그렇게 되지 않고는 좌선할 때 위빳사나 지혜 안 생깁니다.

 

위빳사나 지혜라는 것은 생멸지부터 위빳사나 지혜입니다. 그전에 물질과 정신을 구분해서 보고, 원인과 결과를 보는 정도는 다른 수행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위빳사나하기 전에 다른 수행 이것저것 8년 했는데 그 정도면 좀 볼 수 있습니다. 4대로 보이고, 물질과 정신을 구분해서 보는 게 일단 몸이 사대로 보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몸이 물질로 보이기 시작하면 통증이 견딜 만해집니다. 이거는 위빳사나 지혜로 치지 않습니다. 8정도 안에서 생멸지 정도 되면 위빳사나 지혜라고 할 만합니다.

 

그런 상태의 수행자는 그냥 보기에도 진짜 아름답구나!’라는 느낌이 듭니다. 수행자의 눈이 여기저기 보지 않습니다. 항상 내려깔고 있습니다. 인드리야(기능)가 잘 다스려졌습니다. 감관을 잘 다스린다는 건 수행자가 여기저기 보지 않아 항상 눈을 아래로 보고 있고, 그리고 자기한테 몰입되어 있습니다. 자신에게만 몰입되어 있습니다. 남에게 가지 않고.

 

근데 여기서 남에게 맘이 가면 더 긴급한 선업을 짓지 못하니, 모든 동작에 명칭해야 됩니다. 그리고 위빳사나의 대상이 신수심 세 가지입니다. 계속 얘기하는데 신()을 보면 신만 보는 수행이 아니거든요. 생각을 봐야 되는 것, 생각()을 봐야 됩니다. 위빳사나는 생각을 대상으로 보는 수행입니다. 다른 사마타 수행은 생각을 대상으로 두지 않습니다. 사마타는 다른 대상, 관념을 대상으로 봐서 거기에 마음을 집중해서 번뇌를 가라앉히는 겁니다. 번뇌를 제거하는 게 아니라 번뇌를 잠시 숨깁니다. 보이지 않는 자리로. 하지만 번뇌라는 게 원래 도와 과를 얻기 전까지는 계속 잠재되어 있는 거죠. 환경이 바뀌면 또 번뇌가 일어나는 거죠.

 

사마타는 하는 동안은 편안합니다. 하지만 다른 환경에 떨어지면 나의 숨은 번뇌가 다시 다 일어나는 거죠. 위빳사나는 번뇌를 가라앉히는 수행이 아니고 번뇌를 아주 작은 것까지 찾아내서 사띠하는 겁니다. 번뇌가 있는지 없는지 낱낱이 흰머리를 찾듯이 살피는 겁니다. 찾아낸 흰 머리를 뽑는 것처럼 생각을 사띠합니다. 사마타는 흰 머리카락을 염색하거나, 검은 머리로 덮습니다. 위빳사나는 그게 아니라 아주 작은 것까지 계속 찾아내는 겁니다.

 

근데 생각이 몸보다 17배가 더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지지 않습니까? 그러면 몸을 사띠하고 있는 동안 내 생각은 훨씬 더 많이 일어나고 있는 중입니다. 그게 안 보일 뿐이죠. 이걸 잘 보려면 몸에다 정확히 명칭해야 하고, 그리고 명칭하면서도 생각하고 있는지 아닌지 계속 살펴야 합니다. 계속 아주 면밀하게 아주 날카롭게 살핍니다. 나에게 들어가서 내 몸과 몸의 느낌에 집중해서 들어가서 잠기면 안 됩니다.

 

몸의 움직임이 있고 몸의 느낌이 있고 생각도 있습니다. 세 가지가 동시에 존재합니다. 몸의 움직임에 명칭하고, 몸의 느낌이 분명하면 느낌에 명칭해야 합니다. 마음의 느낌이 분명하면 마음의 느낌에 좋아함, 싫어함, 화냄, 슬픔, 우울이라고 명칭해야합니다. 그리고 또 생각이 있습니다. ‘생각이라고 명칭해야 합니다.

 

대상이 무수히 많습니다. 되게 많은데, 몸은 아주 느리게 움직이고 있는데 마음은 미친듯이 분주하고, 점점 더 빠르고 그래야 됩니다. 위빳사나는 마음을 고요하게 만드는 수행이아닙니다.

 

위빠사나는 고요해지려는 물을 휘저어 버리는, 계속 반대로 거슬러 오르는 느낌이 있어야 합니다. 역류하는 느낌, 물을 차고 거슬러 오르는 느낌, 이런 느낌이 있어요. 근데 여러분 왜 그걸 모르는가? 몸을 명칭을 다 하지 못하고, 그리고 몸의 느낌에 집중하려고 애쓰고, 몸에 명칭을 놓치고 시간을 보내니 생각은 보이지도 않습니다. 몸에 집중하는 수행이 아니거든요. 위빳사나는 몸에 집중하는 사마타가 아니라 몸을 사띠해야 합니다. 사띠하는데 집중이 들어갑니다. 핵심은 사띠이고 집중은 그냥 부차적인 겁니다. 그래서 사띠빳타나 즉 사띠가 주인이 되는 수행입니다. 집중이 주가되는 수행이 아닙니다. 사띠는 집중도 들어가고 집중을 방해하는 것도 동시에 들어갑니다. 수행자들이 명칭을 하면 자꾸 집중이 안 되고 산만해지고 헷갈린다고 하는데 그 게 맞습니다. 바르게 하고 있는겁니다.

 

명칭이 그런 일을 합니다. 집중 안 되게도 하고. 근데 또 집중도 합니다. 집중도 하고 집중을 방해도 하고 다 합니다. 되게 재미있습니다. ‘세상에 이런 싱기한 게 다 있나?’ 이럴 정도로 엄청 재밌어요. 제가 하면서 이거보다 더 재미있는 게 세상에 없겠구나.’ 확신했습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재밌는 건 절대 있을 수 없습니다. 재미난 길을 따라가면, 목적지도 최고에 도착합니다.

 

몸에 명칭해야 되고 그리고 몸에 집중하는데 몸에만 몰입하면 안 되고 계속 생각하고 있는지 아닌지 계속 살피셔야 합니다. 사마타는 어떤 느낌이냐면 머리카락을 빗을 때 위에서 아래로 빗죠. 마음이 편해지게. 다른 수행을 하면 마음이 이런 식으로 편해집니다. 평안해집니다. 편안해져서 나옵니다. 위빳사나는 그런 수행이 아닙니다. 마음 편하고 싶은 사마타 하십시오. 여기 있지 말고. 위빳사나는 그런 게 아니라 진짜 이 머리카락을 머릿결과 반대로 빗는 겁니다. 이렇게 거꾸로. 아프겠죠? 무지 아프고 불편합니다. 결을 반대로 거스르는 거니까요. 위빠사나의 느낌을 말하는 겁니다. 수학 문제를 풀면 이게 틀렸다고 이렇게 보여줄 수도 있고, 그림이면 여기가 다르다 보여줄 수도 있는데. 눈 감고 가는 수행은 마음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니 보여 줄 수가 없네요. 요기가 할 수 있는 건, 스스로가 계속 생각하고 있는가 아닌가를 살펴야 합니다.

 

그래서 산만합니다. 산만하고 정신없고 바쁘고 바빠서 어떤 동작을 함에 있어서, 내가 이런 동작을 하면 이걸 어떻게 사띠해야 될지 이것부터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근데 내가 벌써 동작을 해버렸어요. 그러면 놓친 거죠. 놓친 게 많아지면 회복이 더디죠. 어떻게 해야 되지? 계속 이어져야 합니다. 다 동작에 대한 얘기지. 그리고 그걸 하면서도 또 생각도 들고 여러 가지를 하는 겁니다. 내가 동작만 사띠하면 여러분이 동작만 사띠하면, 굽히면 굽힘, 굽힘, 동작만 사띠하면 위빳사나 아닙니다.

 

요기들이 좌선 한 시간의 보고 내용이 별로 없으면 때 한 시간을 멍하게 보낸겁니다. 자꾸 헷갈리는데 문제는 하루에 좌선하는 7시간 동안 멍하게 있는 겁니다. 반은 행선이고 반은 좌선인데, 하루의 절반을 멍하게 있는 거죠.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겠죠. 사마타로 들어가겠지. 아니면 자고 있거나, 자는 건 다행이지. 혼침이면 그래도 다행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혼침이 아니라 상상해서 만들어서 보고 계속 이상한 보고를 하면 제가 정말 곤란해지죠. 차라리 자는 게 낫습니다, 보고 내용이 없는 게 낫습니다. 자꾸 상상해서 만들어서 봅니다. 대상을 만들어서, 들은 대로, 읽은 대로 계속 만드는데, 이게 자는 거보다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제대로 보는 수행자들은 이리저리 여기저기이런 단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정확하게 보고합니다. 자기가 본 것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하나 둘 셋, 정확하게, 부풂 꺼짐에 대해서 통증에 대해서 가려움에 대해서 정확하게 보고합니다. 두리뭉실한 단어들을 쓰지 않습니다.

 

내 몸이 요만한데 여기저기 두루뭉실 할 게 뭐가 있습니까? 정확하게 보고합니다. 부풂 꺼짐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보고합니다. 통증은 되게 좋은 대상입니다. 그 대상을 관찰해서 그게 어떻게 됐는지 보고해야 합니다.

 

그리고 행선이 끝나고 끝에 가서 , 하셔야 합니다. 서는 동작, 그리고 행주좌와(行住坐臥), 가는 동작, 서 있는 동작, 앉는 동작(좌선), 누워 있을 때 잠들기 전에 누워서 사띠하는 것, 이거 다 사띠하셔야 됩니다. 서 있을 때 , 충분히 서 있고 나서, 그다음에 돌려함, 돌려함, , 이렇게 동작이 멈춰 있다가 새로운 동작을 할 때는 의도를 사띠할 수 있습니다. 쉽습니다.

 

예를 들어서 좌선이 끝나고 나서 감은 눈을 뜨려고 할 때 뜨려 함, 뜨려 함, ,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근데 움직이고 있는 동안은 의도를 사띠하기 힘듭니다. 그거까지는 바라지 않고 멈췄다가 새로운 동작을 시작할 때, ‘, , , 돌려고 함, 돌려고 함, , 충분히 사띠해야 됩니다.

 

동작을 몇 단계로 한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고, 내가 움직이는 발의 느낌이 분명해야 됩니다. 이때 다섯 단계면 다섯 단계의 느낌이 분명해야 됩니다. 세 단계면 세 단계의 느낌 보면 몇 단계로 하는지는 자기가 점점 알아갑니다. 한 단계 하다가 4단계가 되기도 하고 7단계가 되기도 하고 그때 단계가 늘어날 때 저절로 명칭이 다르게 붙습니다. 이게 이렇구나. 이게 다르기 때문에 내가 명칭을 다르게 붙입니다.

 

팔이 움직이는 것도 다 명칭이 다르게 붙습니다. 그리고 명칭을 이번 시간에 붙였는데 다음 시간에는 못 붙이고 이렇게 되지 않습니다. 이번 시간에 하나 붙였으면 다음 시간에는 두 개 붙이고 그다음 시간에는 3개 붙이고 이렇게 붙습니다. 오전에는 했다가 오후에 놓치고 이렇게 되지 않습니다. 놓치면 위빳사나 지혜가 뒤로 갑니다.

 

명칭의 단계가 발에서 늘어나면 팔에서도 늘어납니다. 몸에서도 늘어납니다. 발의 단계가 늘면 팔의 단계도 늘어나는데, 팔 움직이면서 명칭도 바뀝니다. 이런 몸의 명칭은 매우 분명합니다. 그래야 위빳사나 지혜가 올라갑니다.

 

그래서 세 가지를 얘기하죠. 좌선 행선 일상 세 가지, 일상에서 먹는 것 그리고 화장실 볼일 보는 것, 그리고 앉고 서고 이거 다 일상이죠. 행선이 끝나고 나서 앉을 때, 좌선이 끝나고 나서 설 때, 굽힐 때, 설 때, 돌 때, 이런 동작들, 발을 발만 움직이고 있는 것은 행선이고, 그 외에 모든 동작들이 일상입니다. 팔 다리와 몸통을 움직이는 거죠. 이 동작들이 발의 단계가 늘어나는 행선의 단계가 분명하게 늘면, 팔다리와 몸통의 명칭들도 바뀝니다. 같이 올라가야죠. 행선 일상, 이 두 개가 좌선을 끌고 가는 겁니다. 행선과 일상은 몸을 움직이는 분명한 대상입니다. 말이 마차를 끌고 가는 것과 비유하면, 마차는 좌선이고 행선과 일상은 말인 거죠. 몸 동작을 할 때 분명하게 명칭이 딱딱 붙어야, 눈 감고 있을 때 좌선이 분명합니다. 몸의 움직임, 남이 보기에도 분명한 이게, 내가 보기에도 내가 지금 놓치고 있구나, 놓치지 않고 있구나.’ 이건 분명한 것도 놓치고도 모르는데, 좌선할 때 눈 감고 하는 게 어떻게 내가 스스로 분명히 알겠습니까? 내가 남에게 보이는 팔이나 몸의 동작이 사띠가 분명하지 않은데, 좌선에서는 더 헤매죠. 이 동작에 분명하게 명칭이 딱딱 붙으려면 뭘 해야 되냐면 생각을 빨리 생각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요기의 문제는 생각이 안 보입니다. 생각하고 있는데 왜 지금 안 보이는 걸까요? 왜 이게 안 보이는 거야? 왜 이게 안 보일까요? 생각을 해봤는데 평생 너무 열심히 살아서 수행처에서도 그 방법대로 열심히 사는 겁니다. 위빳사나는 일상의 반대 방향으로 열심히 사는 겁니다. 같은 방향으로 열심히 사시면 안 됩니다.

 

일상을 열심히 살지 말라는 뜻은 아니고, 열심히 사셔야 합니다. 열심히 살아야 수행처에서도 열심히 합니다. 위리야 빠라미는 위빳사나의 위리야도 위리야이지만, 세간에서 열심히 사는 것도 위리야 빠라미이니까, 우리가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때도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열심히 사는 사람이 수행처에서도 시간을 아껴서 열심히 합니다. 세상 일 할 때 열심히 안 산 사람은 수행처에서도 열심히 안 합니다. 계속 몸을 사리고 시간을 흘립니다. 세간에서 대충 살던 사람은 위빳사나 할 때 쉬지 말고 하라면 자기 연민에 눈물을 펑펑 쏟더라고요. 여러분들은 그런 분은 아닌 게 분명합니다.

 

세간의 일은 업을 만드는 일이라서 앞으로 앞으로 세게 달리는 일이고, 위빳사나는 달리는 마음을 세우는 일을 해야 하는데, 급히 안 세워 지는 거죠. 우리가 계속 생각을 빨리빨리 계속 굴리니까, 생각을 계속 하류로 세게 보내다 보니 이걸 멈추게 하기가 힘든 거죠. 좀 댁에서 생활하는 동안도 가끔씩 하루에 한 시간 두 시간은 좀 세워야 됩니다. 사마타를 하시든가 위빳사나 해서 좀 세워줘야 됩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세우든가, 중간에 틈을 내서 세우든가, 행선이든 좌선을 좀 해야 됩니다. 그래야 수행처에 들어와서도 생각하고 있는 게 빨리 보일 텐데요.

 

위빳사나는 마음을 가라앉히는 수행만은 아니죠. 마음을 가라앉히기도 하는데 마음이 가라앉아야 생각이 잘 보입니다. 근데 설명을 하기가 되게 애매한데,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게 아니라 가라앉는 마음을 계속 휘저어서 일으키는 겁니다. 일단 고요해지고 고요해진 것을 또다시 일으키고, 이 두 가지 동시에 할 수 있는 건 나의 생각이 잘 보일 때 가능합니다. 일단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에 명칭해야 하고, 느낌에도 계속 집중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생각하고 있는지 아닌지도 계속 살펴야 합니다. 생각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하나에 집중하는 게 아닙니다. 할 수 있으면 동작을 사띠하기 전에 의도를 보면 좋지만, 그것까지는 좀 힘들 것 같고, 일단 동작을 잘 인지하셔야 됩니다. 정확히.

 

그래서 두 팔을 동시에 움직이면 안 됩니다. 한 번에 한 팔만 움직여야 합니다. 그래야 한 팔에 분명하게 집중이 하는데, 두 팔 같이 움직이면 어디에 집중하겠습니까? 관절도 한 번에 하나만 구부립니다. 팔은 항상 고정돼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좌선하기 위해서 선 자세에서 앉을 때, 아주 천천히 내려가면서 앉아야 합니다. 천천히 아주,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 동작에 다리의 뻐근함이 있다든가, 허리에 통증이라든가, 이런 거 다 명칭하고 집중하고 사띠해야 합니다. 그거 하면서도 생각하고 있는지 아닌지 계속 사띠해야 합니다.

 

질문: 생략

대답: 생략

 

생각을 찾아서 다니는 게 아니고 생각은 언제나 있습니다. 내가 모르는 겁니다. 여러 생각이 있고요. 내 눈에 그게 안 보이는 겁니다. 백내장이 있으면 잘 못 보듯이 이 위빳사나의 대상이 번뇌와 어리석음에 가려져서 잘 안 보입니다. 그중에서 제일 잘 안 보이는 게 생각이라는 대상입니다. 생각을 찾을 필요도 없고 그냥 있습니다. 있는데 내 눈엔 안 보이는 겁니다.

 

생각의 내용을 알 필요 없습니다.

 

내가 움직이고 있으면 동작에 명칭해야 합니다. 내 생각이 너무 강하면 생각에 명칭해야 합니다. 내가 동작을 하는데 생각이 너무 강해서 동작에 명칭할 수 없을 때는, 멈추어 서서 생각을 생각,생각이라고 사띠해야 합니다. 동작을 멈추고 서 있으면서 생각을 생각이라고 사띠해야 합니다.

 

일상생활에서 내가 몸을 움직이고 있으면 몸에 더 집중해야 합니다. 몸의 느낌에 더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다가 생각이 너무 강하면 사띠하던 동작을 멈추고 강한 생각을 생각,생각이라고 사띠해야 합니다. 두 동작이 겹쳐 움직이면 몸의 사띠가 안 되고, 생각은 당연히 사띠할 수 않습니다. 이렇게 일상과 행선을 하면. 몸의 움직임이 없는 좌선 시간에는 혼침에 빠지거나 멍하니 시간만 보내다 끝납니다. 그렇게 안 되려면 행선하고 일상동작할 때 계속 몸에 명칭하고 몸의 느낌을 알려고 집중하고 그리고 생각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계속 살피고, 생각을 생각,생각이라고 사띠해야 합니다. 좌선할 때 생각이 계속 연이어 올라오고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되면 혼침이 올라옵니다. 그러면 내가 못 이깁니다.

 

그건 뭐냐 하면 말에서 떨어진 겁니다. 계속 몸에 딱 붙어 있으라고 했는데 내 마음이 내 몸에 붙지 않는 상태인 겁니다. 생각을 사띠하고 빨리 몸으로 돌아와야 하는데 생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흘러가 버립니다. 안 돌아와지는데 그러면 혼침에 빠집니다. 사띠의 힘이 아직 약해서 사띠해도 사띠되지 않습니다. 사띠에 무게(사마디)가 있으면, 금방 다시 몸으로 돌아오지만 사띠의 힘이 없으면 몸으로 돌아와지지 않습니다. 달리던 말에서 떨어져 다시 달리는 말 위로 올라오지 못하는 겁니다. 사띠와 사마디가 좋으면 생각을 사띠하고 금방금방 몸의 느낌으로 돌아옵니다. 힘이 약하면 생각에 휘말려 헤어날 길이 없습니다. 수행을 잘못하는 게 아니라 노력이 부족해서 사띠와 집중의 힘이 약하다는 겁니다.

 

1. 집중력과 사띠는 행선과 일상생활에서 계속 길러야 합니다.

2. 행선, 일상에서 몸의 움직임에 명칭을 정확하게 하고,

3. 몸의 느낌을 알도록 집중도 해야 하고,

4. 그거 하면서도 생각하고 있는지 아닌지 계속 살펴야 하고,

5. 생각한다는 걸 알면 생각,생각,생각이라고 명칭해야 합니다.

 

5가지를 다 하려면 천천히 움직여야 합니다.

 

1. 몸의 동작을 천천히 해야 하고,

2. 천천히 해야 하는 이유가 내가 몸의 동작만 사띠하는 게 아니라,

3. 동작에 명칭 하면서 느낌도 봐야 되고 생각도 사띠해야 하기 때문에 모든 움직임을 계속 천천히 해야 합니다. 천천히. 그래야 좌선하다가 생각을 사띠하고 다시 빨리 몸으로 돌아와집니다.

 

우리 마음은 내 몸에 붙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계속 밖의 대상을 보고 살지 않습니까? 하는 일이 다 밖에 것을 보고 하는 일을 했습니다. 태어나서 하는 일이 다 밖에 거 보고 일을 해서 계속 마음은 밖에 나가 있습니다. 나한테 붙어 있지 않고 밖에 나가 있는데 이걸 계속 불러들이는 기초가 지금 명칭하는 겁니다. 몸에 명칭하고 느낌에 명칭하고 생각에 명칭하는 거, 이걸 계속하는 거. 명칭 안 하고 그냥 보면 내가 지금 뭘 놓치고 있는지 뭘 사띠하고 있는지 전혀 구분되지 않습니다.

 

명칭 못한 순간이 있기 마련입니다. 처음부터 다 명칭할 수 없습니다. 노력하면 할수록 점점 더 많이 할 수 있게 됩니다. 일상에서도 행선에서도. 그러면 좌선에서도 됩니다. 일상과 행선에서 몸을 움직일 때 다 촘촘히 명칭해서 살피고 생각에도 명칭하고, 그러면 좌선할 때도 몸, 느낌, 생각을 동시에 보며 강한 것에 순발력있게 사띠 됩니다. 모든 동작에 명칭해야 합니다. 사띠하면서 순간순간 집중해야 합니다.

 

질문이 있습니까?

 

중략

 

제일 빠른 대상인 마음을 잡아내려면,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 겁니다. 그래야 생각을 잡을 수 있습니다.

 

생각을 사띠하면 할수록 몸이 다르게 보입니다.

 

내가 보는 부풂 꺼짐이 계속 다르게 보입니다. 통증도 다르게 보이고 부풂 꺼짐도 다르게 보이고, 간지럼도 다르게 보이고, 뻐근함도 다르게 보입니다. 이렇게 보이는 이유는 사띠로 번뇌를 걷어내기 때문입니다. 걷어내는 번뇌라는 것은 뭐냐면

 

모든 생각이 번뇌입니다. 좋은 생각은 하나도 없고 싹 다 번뇌입니다. 이걸 걷어내면 걷어낼수록, 이렇게 눈이 맑아지면, 이 물질 내 몸이라는 게 다르게 보이는 것, 깨끗하게 닦으면 다르게 보는 거죠. 안경 닦으면 더 잘 보이는 것처럼, 나의 부풂 꺼짐이 다르게 보입니다. 다르게 보이고 통증도 다르게 보이고 예전 같지 않게 숨 쉬는 것도 다르게 보이고 다 다르게 보입니다. 그래서 재밌습니다. 한 시간 좌선할 때마다 다르게 보입니다. 계속 다른 장면이 보이는 거죠.

 

열심히 하십시오.

생각하고 있는지 아닌지 계속 사띠하십시오.

생각하고 있으면 생각이라고 사띠하고

숙고의 지혜는 위빳사나 지혜가 아닙니다. 위빳사나 지혜는 물질과 정신의 특성을 꿰뚫어 아는 거죠.

 

위빳사나 지혜는 부풂 꺼짐으로 증명합니다.

부품 꺼짐이 이렇더라, 통증이 이렇더라, 가려움이 이렇더라.” 라고.

물질에 대한 보고가 위빳사나 지혜입니다.

다르게 보려면, 몸을 움직이는 명칭들이 달라져야 합니다.

위빳사나 지혜가 올라가면 갈수록 명칭도 함께 업그레이드됩니다.

 

이런 명칭이 붙더라.”라고.

 

회향하겠습니다.

라 하십시오.

 

이마아야 담마아누 담마빠띠빳띠야아 붓당 뿌우제미.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저의 이 수행으로 부처님께 예경 올립니다.

이마아야 담마아누 담마빠띠빳띠야아 담망 뿌우제미.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저의 이 수행으로 담마에 예경 올립니다.

이마아야 담마아누 담마빠띠빳띠야아 상강 뿌우제미.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저의 이 수행으로 승가에 예경 올립니다.

 

이당 노 뿐냥 아아사왁카야아와항 호뚜.

우리의 이 선업이 모든 번뇌의 소멸인 아라한도의 지혜로 이끌어주기를!

 

이당 노 뿐냥 닙바아낫사 빳짜요 호뚜.

우리의 이 선업이 열반에 이르는 밑거름이 되기를!

 

https://cafe.naver.com/dhammadipakorea/533

일부용어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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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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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금강 | 작성시간 23.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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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혜 수 | 작성시간 23.08.17 고맙습니다 .... _()_
  • 작성자위말라 | 작성시간 23.08.18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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