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생멸의 지혜: 위빳사나 수행의 10가지 번뇌
수행자가 사띠 수행을 하면서, 과거를 회상하거나 미래를 생각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현재의 몸과 마음에 마음을 붙여 놓고 있을 수 있다면, 위빳사나 지혜의 결과로 (마음에 떠오르는 이미지인) 찬란한 빛이 그에게 나타날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램프의 빛처럼 나타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번갯불이나, 달빛이나 햇빛 같기도 하다. 어떤 사람에게는 단지 한 순간일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다 오래 계속될 수도 있다.
그에게는 위빳사나 지혜와 함께 하는 강한 사띠도 일어난다. 그 결과 뒤따라 일어나는 모든 몸과 마음의 현상들이, 마치 그것들 스스로 마음으로 오는 것처럼, 사띠에 참여하는 마음에 자신들의 모습을 드러내며, 사띠도 마치 스스로 그 현상들에 빛을 비추고 있는 듯하다. 그러므로 그때 수행자는 “사띠하지 못할 몸과 마음의 현상은 없다”라고 믿는다.
여기서 “알아차림(noticing)”이라고 하는 위빳사나로부터 얻어지는 지혜도 마찬가지로, 날카롭고, 강하고, 명료하다. 결과적으로 그는, 마치 잘 갈은 칼로 죽순을 잘게 썰듯, 사띠의 대상인 모든 몸과 마음들을 명확하고도 분리된 형태로 알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 수행자는 “알아차리지 못할 몸과 마음의 현상은 없다”라고 믿는다. 무상 고 무아나 실재(빠라맛타)의 다른 관점을 조사할 때, 그는 모든 것을 즉시 아주 분명하게 이해하며, 그것이 직접적인 경험으로부터 얻어진 지혜라고 믿는다.
나아가서, 위빳사나 지혜와 함께 하는 강한 믿음이 그에게 생긴다. 그 영향으로 수행자의 마음은 사띠하거나 생각하고 있을 때, 아무런 장애 없이 평온하다. 그리고 붓다와 법과 승가의 덕행을 회상할 때, 그의 마음은 아주 쉽게 그 덕행들에 몰입한다. 그의 내부에서, 붓다의 가르침을 칭송하고 싶어 하며, 수행자들의 덕행을 기꺼이 확신하게 되고, 사랑하는 친구와 친척들에게 수행하라고 충고하려는 욕구가 생기고, 자신의 수행 스승이나 영적 스승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것에 대해 고마워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이런 것들과 그 밖에 다른 유사한 정신 현상들이 일어날 것이다.
미세한 기쁨을 비롯한 다섯 단계의 기쁨도 생긴다.* 마음이 청정해지면, 소름 끼친다든지 팔다리에 전율이 생기는 등의 형태로 기쁨이 나타나기 시작하지만, 이제는 몸 전체를 대단히 감미롭고 미묘한 전율로 채우면서, 행복하고 상쾌한 최고의 느낌을 느끼게 한다. 그 영향으로, 그는 마치 자신의 몸이 공중에 붕 떠 있는 것처럼 느끼거나, 혹은 공기로 만든 방석에 앉아 있는 것처럼, 혹은 몸이 위 아래로 떠다니는 것처럼 느낀다.
*주: 다섯 가지 기쁨(희열, 삐띠, rapture, pīti)은 청정도론 제4장 94절(『청정도론 1』, 대림 스님 옮김, 375쪽)에 “⑴ 작은 기쁨 ⑵ 순간적인 기쁨 ⑶ 되풀이해서 일어나는 기쁨 ⑷ 용약(踊躍)하는 기쁨 ⑸ 충만한 기쁨”라고 설명되어 있다.
마음과 마음부수의 동요를 가라앉히는 특성과 함께 마음의 편안함이 생기고, 그와 함께 마음의 가벼움 등이 생긴다. 걷거나 서거나 앉거나 누워있을 때, 이러한 정신적 특성의 영향으로, 마음과 마음부수의 동요가 없고, 무거움, 딱딱함, 부적합함, 아픔이나 구부러짐도 없다. 그와 반대로 그의 마음과 마음부수들은 비작용의 상태에서 최상의 구원에 도달했기에 편안하다. 그들은 항상 재빨리 기능하므로 가볍다. 그들은 어떤 대상이라도 원하기만 하면 주목할 수 있으므로 유연하다. 그들은 하나의 대상을 원하는 시간만큼 주목할 수 있으므로 적합하다. 그들은 능숙함에 의해 아주 명료하다. 왜냐하면 위빳사나 지혜가 대상을 쉽게 꿰뚫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한 좋은 행위들 쪽으로만 향하고, 기울이고, 구부리기 때문에 올곧다.
또한 몸 전체로 퍼지는 아주 숭고한 느낌도 일어난다. 그 영향으로 그는 몹시 기뻐하게 되어 이렇게 믿는다. “나는 이제 항상 기쁘다” 혹은 “나는 이제 진정으로 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행복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놀라운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싶어 한다. 편안함 등의 도움에 의해 얻어진 기쁨과 행복감을 법구경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한적한 집에 들어가
마음을 고요히 하고
법을 철저히 관찰하는 비구는
인간을 초월하는 기쁨을 경험한다.
오취온이 생기고 사라지는 것을
철저히 알면
기쁨과 희열이 생긴다.
이것을 아는 이는 열반을 볼 것이다.
법구경 게송 373-374
그의 내부에서 너무 느슨하지도 않고 너무 팽팽하지도 않지만 원기왕성하고 균일하게 작용하는 에너지가 생긴다. 전에는 그 에너지가 때로는 느슨해서, 그가 해태와 혼침에 압도되었기에, 대상이 분명하게 나타날 때, 날카롭고도 지속적으로 알 수 없었으며, 그의 이해 또한 분명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때에는 그 에너지가 너무 강렬해서 동요를 억누를 수 없었으며, 날카롭게 알 수 없는 등의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에너지는 너무 느슨하지도 너무 팽팽하지도 않고, 원기왕성하고 균일하다. 그래서 이들 해태나 혼침이나 동요라는 단점들을 극복하고, 나타나는 대상들을 날카롭고도 지속적으로 알 수 있으며, 그의 이해 또한 대단히 명확하다.
수행자의 내부에서 위빳사나 지혜를 동반하는 강력한 평온(equanimity)도 생기는데, 이는 모든 형성(行)들에 대해서 덤덤하다. 그 영향으로 이 형성들의 무상 고 무아라는 본성을 조사했지만 그는 덤덤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그 시점에 일어나는 몸과 마음의 현상들을 날카롭고도 지속적으로 알 수 있다. 그러면 그의 아는 행위는 노력하지 않아도 스스로 진행된다. 또한 대상으로 전향할 때, 그의 마음이 재빨리 전향의 대상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그의 마음 안에 강한 평온이 생긴다.
나아가서 “찬란한 빛”과 여기에서 설명한 다른 특성으로 아름답게 꾸며진 위빳사나 지혜를 즐기려는 조용한 본성에 대한 미묘한 집착이 생긴다. 그러나 수행자는 그것을 번뇌라고 통찰하지 못하고, 단지 수행의 지복 자체라고 믿는다. 그래서 수행자는 그것을 이렇게 칭송한다. “이제야 나는 수행에 있어서의 완전한 기쁨을 발견했다!”
쉽고도 재빠르게 작용할 수 있는, “찬란한 빛”에 따라오는 그러한 기쁨과 행복감을 느끼고 완전한 사띠 행위 그 자체를 즐기면서, 이제 수행자는 이렇게 믿는다. “이제 나는 출세간의 도(道)와 과(果)를 얻은 것이 틀림없다! 이제 수행으로 해야 할 일을 끝마쳤다.” 이것은 길이 아닌 것을 길로 잘못 아는 것이다. 그것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통상적으로 생기는 위빳사나 수행에 따르는 10가지 번뇌이다. 그러나 비록 수행자가 “찬란한 빛”과 다른 번뇌들을 도와 과를 알려주는 징표라고 간주하지 않을지라도, 그는 그것들로부터 기쁨을 느낀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위빳사나 번뇌이다. 그러므로 비록 재빠르게 작용하는 사띠가 있는 지혜라도, 그러한 번뇌로 더럽혀져 있다면, “초기 단계의 (즉 ‘약한’) 생멸의 지혜”라고 한다. 왜냐하면 번뇌 때문에 몸과 마음의 현상들이 발생하고 소멸하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통찰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