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두려움의 지혜
소멸의 지혜가 성숙되면, 단지 모든 대상과 주체의 현상(대상과 주체의 현상들: 조건 지어진 것들을 말함)들의 소멸을 봄에 의해, 두려움('바야(bhaya)'라는 단어에는 두려움(fear)이라는 대상의 관점과 두려워함(fearfulness), 위험(danger)이라는 주관적 관점이 있다. 두 가지가 다 이 문맥에서 이 용어의 의미임)에 대한 지혜와 그 밖의 다른 지혜들이, 그들 각각에 포함되어 있는 두려움 등과 함께 점차적으로 일어난다.
두 가지 것들 즉 사띠의 대상과 그것을 사띠하고 있는 지혜와 함께하는 마음이 매순간 어떻게 소멸되는지를 본 다음, 수행자는 추론에 의해서, 과거에도 모든 조건 지어진 현상들이 같은 식으로 해체되었으며, 그와 마찬가지로 미래에도 해체될 것이며, 현재에도 또한 해체된다고 이해한다. 그리고 사띠의 순간에 명백히 나타나는 어떤 현상들이라도, 이 현상들은 그에게 두려워함의 관점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사띠하는 바로 그 행위를 하는 동안, 수행자는 “이 현상들은 참으로 두렵다.”라고도 이해하게 된다.
현상들을 두려워하는 이러한 이해를 “두려움의 지혜”라고 한다. 그 때, 그의 마음 자체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어서 어찌할 도리가 없는 듯하다.
7. 허물의 지혜
수행자가 두려움의 지혜를 통하여 현상들에 대한 두려움을 깨달은 다음에, 지속적으로 사띠를 계속하면,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다음에 그의 내부에 “허물의 지혜”가 생긴다. 그 지혜가 생기면, 생기는 장소와 상관없이 모든 현상들은, - 사띠의 대상 가운데 생기든지, 사띠하고 있는 마음부수이든지, 혹은 마음에 떠오른 어떤 종류의 생명체나 존재이든지 간에 - 활기차지 않은 무미건조한 것으로 나타나며, 단지 불만족스러울 뿐이다. 그래서 그는 그 때, 오로지 고통, 오로지 불만족스러움, 오로지 허물만 본다. 그래서 이 상태를 “허물의 지혜”라고 한다.
8. 혐오의 지혜
그렇게 조건 지어진 현상들에서 허물을 보면서, 수행자의 마음은 그러한 허물이 있는 것들에서 즐거움이란 찾을 수 없고 그런 것들을 전적으로 싫어하게 된다. 때때로 그의 마음은 불만족스러워하고 아무런 의욕이 없다. 그렇지만 그는 위빳사나 수행을 포기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수행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러므로 그는 이런 마음의 상태가 수행을 불만족스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 지어진 현상들을 싫어하는 관점, 간단히 말해서 “혐오의 지혜”이다. 비록 그가 존재와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한 것들에 자신의 생각을 기울이거나, 혹은 가장 즐겁고 원하는 대상에 기울여도, 그것들에 만족하지 못한다. 반대로, 그의 마음은 단지 열반 쪽으로 기울이고 열반을 얻기만을 기대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띠하는 순간들 사이에 “매순간마다 해체되는 모든 조건 지어진 현상들의 멈춤만이 행복이다.”라는 생각이 그의 내부에서 생길 것이다.
9. 벗어나려는 지혜
지금 획득한 “혐오의 지혜”로 알게 된 모든 조건 지어진 것들에 대해서 싫어함을 느낄 때, 수행자의 내부에서 이 조건 지어진 것들을 버리려는 욕구 즉 그것들로부터 벗어나려는 욕구가 일어난다. 그런 욕구와 관련된 지혜를 “벗어나려는 지혜”라고 한다. 그때, 통상적으로 그의 몸 안에서 여러 가지 고통스러운 느낌이 일어나고, 또한 한 가지 특정 자세를 오랫동안 유지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비록 이런 상태들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조건 지어진 것들에 대해 불편해 하는 본성은 전보다 더 분명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사띠하고 있는 순간들 사이로, “아, 내가 그것들로부터 빨리 자유롭기를! 아, 내가 이런 조건 지어진 것들이 멈춘 상태에 도달하기를! 아, 내가 이런 조건 지어진 것들을 완전히 포기할 수 있기를!”라는 소망을 느낀다. 이 중요한 시기에, 사띠하고 있는 그의 마음은, 사띠하는 매순간마다, 사띠의 대상으로부터 움츠러드는 듯하며,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소망한다.
10. 재성찰의 지혜
조건 지어진 것들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라면서, 수행자는 바로 이 조건 지어진 것들을 사띠하는 수행을, 그것들을 버리고 그것들로부터 벗어나려는 단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보다 열심히 노력하기를 계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때 일어나는 지혜를 “재성찰의 지혜”라고 한다. “재성찰”은 “되돌아 사띠” 혹은 “되돌아 숙고함”과 같은 뜻이다. 그러면 조건 지어진 것들의 본성 즉 특성 - 그것들이 무상하고, 고통스러우며, 자아가 없음 - 은 그에게 명명백백할 것이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중에 고통의 관점이 특히 뚜렷할 것이다.
이 단계에서도, 통상적으로 그의 몸 안에서 심하고, 날카롭고, 점점 강해지는 여러 가지 종류의 통증이 일어난다. 그런고로 그의 몸과 마음의 시스템 전체가 그에게는 참을 수 없는 병의 덩어리 혹은 괴로움의 집합체 같을 것이다. 그리고 통상적으로 들뜬 상태에 있기 때문에, 수행자로 하여금 하나의 특정한 자세를 일정한 시간 동안 유지할 수 없게 만든다. 그래서 한 가지 자세를 오랫동안 유지하지 못하고, 금방 다른 자세로 바꾸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태는 단지 조건 지어진 것들에 대해 참지 못하는 본성이 나타난 것일 뿐이다. 비록 그가 몸의 자세를 바꾸고 싶어 하지만, 그 소망에 쉽게 굴복해서는 안 되고, 보다 더 오랜 시간 동안 같은 자세를 움직이지 않으면서 사띠하는 수행을 계속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그는 들뜸을 극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제 그의 위빳사나 지혜는 아주 강하고 명료하기 때문에, 고통스런 느낌들을 흔들림 없이 알게 되자마자 즉시 멈추기도 할 것이다. 비록 고통스런 느낌이 완전히 멈추지는 않더라도, 부분 부분씩, 때때로, 그는 그것이 해체되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단 한 순간의 느낌의 멈춤과, 사라짐과, 소멸됨이, 그 각각에 해당되는 사띠의 행위로 분리되어 명백하게 될 것다. 다른 말로 하면, “무상 고 무아를 이해하는 지혜”일 때 그랬던 것과 같지 않을 것인데, 그때는 같은 종류의 느낌들의 일정한 흐름 즉 연속은 하나의 단위로 뚜렷했었다. 그러나 만약, 수행을 그만두지 않고, 그 고통스런 느낌을 흔들림 없이 계속해서 안다면, 그것은 머지않아 완전히 멈출 것이다. 그런 방법으로 멈췄다면, 영원히 멈추어서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비록 그런 방법으로 위빳사나 지혜가 강력하고 완전히 명료해졌을지라도, 수행자는 아직 그다지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내 위빳사나 지혜는 명확하지 않다”라고까지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들에 사띠를 기울임에 의해 그것들을 사라지게 해야 하고, 몸과 마음의 조건 지어진 것들이 일어날 때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인 사띠를 계속해야 한다.
만약 그가 그렇게 참고 견딜 때, 1분이 가고, 1시간이 가고, 하루 이틀 날짜가 지나감에 따라, 그의 사띠는 점점 더 분명해질 것이다. 그러면 그는 고통스러운 느낌과, 한 가지 특정 자세를 유지할 수 없게 하는 들뜸, 그리고 자신의 위빳사나 지혜가 아직 충분히 명확하지 않다는 관념을 극복할 것이다. 그러면 그의 사띠가 재빨리 작용하여, 사띠하는 매 순간마다 그는 무상과 고통과 자아가 없다는 삼법인 중의 어떤 하나를 아주 분명하게 이해할 것이다.
끊어지지 않고 연속하여 재빨리 작용하는 사띠의 행위를 통하여, 무상 고 무아의 삼법인 중의 어떤 것이든지 이렇게 이해하는 것을 강력한 “재성찰의 지혜”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