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수행과 자애

[백문백답]순수 위빳사나 수행법

작성자그림자|작성시간23.10.02|조회수15 목록 댓글 1

순수 위빳사나 수행법

 

순수 위빳사나 행자의 위빳사나 수행법을 설명하겠습니다. 물질과 정신, 무상과 괴로움과 무아에 대해 아는 수행자가 사마타 수행을 먼저 하지 않고 위빳사나 수행만 하겠다면, 고요한 곳에 가서 가부좌 혹은 오래 앉을 수 있는 다른 자세로 앉아서, 몸에서 분명하게 생기는 다섯 취착무더기[五取蘊]인 물질과 정신을 그것이 생기는 대로 끊임없이 관찰해야 합니다.

 

오취온이라고 하는 것은 보고 알 때마다, 듣고 알 때마다, 냄새 맡고 알 때마다, 맛보고 알 때마다, 닿아서 알 때마다, 생각해서 알 때마다, 분명하게 경험하고 있는 법들일 뿐입니다. 볼 때는 보이는 형상이나 보는 것이 생기는 장소인 눈을 분명하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물질 무더기일 뿐입니다. 좋아하고 애착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 자아나 영혼이나 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을 볼 때마다 관찰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법들은 즉시 사라져 버리고 영원하지 않다라고 알지 못합니다. ‘매순간 끊임없이 생겨서 매순간 끊임없이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괴로움일 뿐이다라고도 알지 못합니다. ‘자아도 아니다. 영혼도 아니다. 자기성품대로 생멸하고 있는 무아일 뿐이다라고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형상과 눈을 좋아하고 애착해서 집착합니다. 자아라고, 영혼이라고, 나라고 잘못 생각해서도 집착합니다. 이렇게 좋아하거나 잘못 생각하여 집착하기 때문에 그 형상과 눈을 색취온(色取蘊)이라고 합니다.

 

또한 그 형상 대상을 보고 아는 것[眼識], 느끼는 것(), 인식하는 것(), 볼 수 있도록 형성하는 것(), 이렇게 대상을 아는 정신들도 바로 그렇게 볼 때 분명합니다. 그 법들도 정신 무더기들일 뿐입니다. 좋아하고 애착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 자아도 영혼도 나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 법들이 생길 때마다 관찰하지 못하는 이는 영원하지 않다고, 괴로움일 뿐이라고, 무아라고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좋아하고 애착하여 집착합니다. '바로 내가 보고 안다. 바로 내가 느낀다. 바로 내가 인식한다. 바로 내가 잘 집중하여 본다.'라고 자아, 영혼, 나라고 잘못 생각해서 집착합니다. 이렇게 좋아하거나 잘못 생각하여 집착하기 때문에 그 정신법들도 각각 식취온(識取蘊), 수취온(受取蘊), 상취온(想取蘊). 행취온(行取蘊)이라고 합니다. 이상은 눈으로 형상을 볼 때 오취온, 즉 물질과 정신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모습이었습니다.

 

귀로 소리를 듣고 알 때, 코로 냄새를 맡고 알 때, 혀로 맛을 보고 알 때, 몸으로 감촉을 닿고 알 때, 마음으로 성품법을 생각하고 알 때 오취온, 즉 물질과 정신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모습도 같은 방법으로 알면 됩니다. 다른 점은 성품법은 물질과 정신 모두와 관련된다는 정도입니다.

 

이렇게 여섯 경우, 여섯 장소 모두에서 물질과 정신이 분명하게 생긴다 하더라도 초보 수행자들은 물질과 정신이 드러나는 대로 따라가며 그 모든 물질과 정신을 관찰할 수 없습니다. 위빳사나에서는 자신에게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법들을 먼저 관찰해야 합니다. 마치 공부할 때 쉬운 것부터 배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물질과 정신 두 가지 중에 더 분명한 물질부터 관찰해야 합니다. 그 물질 중에서도 보고 알고, 듣고 알고, 냄새 맡고 알고, 맛보고 알아지는 파생 물질보다 닿아서 알게 되는 근본 물질[四大]이 더 분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몸에 닿는 감촉 물질부터 관찰해야 합니다.

 

그렇게 특별히 분명한 감촉 물질을 관찰하려면 앉아 있는 몸 전체를 사띠로 잘 집중하여 '앉음, 앉음'하며 끊임없이 관찰해야 합니다. 그렇게 관찰하는 중에 엉덩이든 발이든 어느 부위에 분명한 닿음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때 그러한 닿음을 포함시켜 '앉음, 닿음’, ‘앉음, 닿음'하면서 앉아있는 몸을 한 번, 닿음을 한 번, 이렇게 번갈아 가며 끊임없이 관찰해야 합니다.

 

앉음, 닿음이라는 방법으로 관찰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되면 들숨과 날숨이 닿는 곳에 집중하여 '닿음, 닿음'이라고 관찰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숨을 쉴 때마다 배가 부풀고 꺼지면서 생기는 배의 팽팽함, 움직임, 감촉 물질들을 관찰해도 됩니다.

 

관찰하는 모습은 다음과 같습니다. 마음과 사띠를 배에 두고 집중해 보십시오. 부풀어 오고 꺼져 가는 것, 팽팽하게 움직이면서 배에 닿는 것 등이 끊임없이 생기고 있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마음으로 집중하는 것만으로 분명하지 않으면 배에 손을 얹어 보십시오. 숨을 참거나, 빠르게 숨을 쉬거나, 거칠게 숨을 쉬는 등으로 일부러 호흡을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원래 호흡하던 대로 자연스럽게 숨을 쉬어야합니다. 부풀어 올 때 부풂’, 또는 '부푼다'라고 관찰하십시오. 조금씩 부풀어 오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끊임없이 알아야 합니다. 꺼질 때도 조금씩 꺼져 가는 것을 '꺼짐', 또는 '꺼진다'라고 계속해서 끊임없이 알아야 합니다. 부풀 때마다 꺼질 때마다 '부풂, 꺼짐’, ‘부풂, 꺼짐’, ‘부풂, 꺼짐'이라고 지속적으로 관찰하십시오.

 

이때 특별히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부풂, 꺼짐' 등의 명칭은 입으로 소리 내서는 안 됩니다. 마음으로만 명칭을 붙여 관찰해야 합니다. 그 명칭도 근본이 아닙니다. 몸에서 실제로 생기고 있는 팽팽함, 움직임, 닿음 등을 아는 것이 근본입니다. 하지만 명칭을 붙이지 않고 그냥 마음으로만 관찰하고 있으면 대상과 마음이 잘 밀착되지 않고, 각각 구분하여 알기 힘들고, 정진의 요소가 점점 줄어드는 등의 여러 단점이 생깁니다. 따라서 마음으로 명칭을 붙여 관찰하도록 특별히 당부 드립니다.

 

이렇게 '부풂, 꺼짐', '부풂, 꺼짐'이라고 관찰하는 중에 마음이 다른 대상으로 달아나기도 할 것입니다. 그 마음을 생기는 대로 관찰해야 합니다. 관찰하는 모습은 다음과 같습니다.

 

마음이 다른 곳으로 달아났다고 생각되면 그 마음을 달아남이라고 관찰하십시오. 계획했다고 생각되면 '계획함'이라고 관찰하십시오. 숙고했다고 생각되면 '숙고함'이라고 관찰하십시오. 원하면 '원함'이라고 좋아하면 '좋아함'이라고, 화나면 '화남'이라고, 실망하면 '실망함'이라고, 지겨우면 지겨움'이라고, 즐거우면 '즐거움'이라고,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그 마음이 사라질 때까지 거듭 관찰해야 합니다. 그 마음이 사라져 버리면 부풂, 꺼짐', '부풂, 꺼짐'이라고 원래 관찰하던 대로 다시 계속 관찰해야 합니다.

 

몸에 저림이나 뜨거움, 아픔, 쓰림 등 참기 힘든 고통스러운 느낌이 생겨나면 그러한 고통스러운 느낌에만 집중하여 '저림, 저림', '뜨거움, 뜨거움', '아픔, 아픔' 등으로 관찰해야 합니다. 그러한 고통스러운 느낌이 사라졌을 때 다시 부풂과 꺼짐을 이전에 관찰하던 그대로 지속적으로 관찰해야 합니다.

 

그렇게 관찰하다가 저림이나 뜨거움 등이 매우 심해져서 더 이상 참지 못할 정도가 되었을 때에는 손이나 다리, 몸의 자세를 바꾸어도 됩니다. 그렇게 바꿀 때도 움직이고 바꾸는 몸의 여러 동작들에 잘 집중해서 굽힘, 굽힘’, ‘, ’, ‘움직임, 움직임', ‘이동함, 이동함’, ‘올림, 올림', '내림, 내림' 등으로 각각의 동작을 차례대로 따라가며 끊임없이 관찰해 나가야 합니다. 바꾸는 동작이 끝났을 때에는 부풂과 꺼짐으로 다시 돌아와서 이전에 관찰하던 그대로 계속 관찰해야 합니다.

 

어떤 한 곳을 보게 되면 , 이라고 관찰해야 합니다. 일부러 보지 않고 우연히 어떤 대상이 보였다면 '보임, 보임'이라고 관찰해야 합니다. 어떤 소리를 듣게 되면 '들음, 들음'이라고 관찰해야 합니다. 저절로 어떤 소리가 들렸다면 '들림, 들림'이라고 관찰해야 합니다. 우연히 숙고했다면 '숙고함, 숙고함'이라고 관찰해야 합니다. 그리고서 이전에 관찰하던 그대로 부풂과 꺼짐을 계속 관찰해야 합니다.

 

앉은 자리에서 일어날 때, 서 있을 때, 누워 있을 때 등에도 각각의 몸의 동작을 자세하게 관찰하면서 자세를 바꾸어야 합니다. 경행할 때는 한 발 한 발마다 각각의 움직임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확실하게 알도록 잘 집중해서 ', ', 혹은 '뻗음, 뻗음', 혹은 ', , 놓음' 등으로 자세하게 관찰하면서 나아가야 합니다.

 

요약해서 말하면 굽히거나 펴는 등의 몸이나 팔의 모든 움직임이나 자세를 바꾸는 동작들을 생길 때마다 알도록 관찰해야 합니다. 몸과 마음에 생기는 모든 느낌도 생길 때마다 알도록 관찰해야 합니다. 모든 생각, 숙고들도 생길 때마다 알도록 관찰해야 합니다. 이러한 특별한 현상들 없이 고요하게 앉아 있거나 누워 있을 때에는 몸에 분명한 어느 한 닿음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분명하고 관찰하기도 쉬운 부풂과 꺼짐을 기본으로 관찰하도록 앞에서 설명하였습니다. 원한다면 처음에 설명했던 앉음과 닿음, 또는 들숨과 날숨의 닿음을 기본으로 두고 관찰할 수도 있습니다.

 

계속해서 드러나는 대상들을 수월하게 관찰할 수 있게 되었을 때에는 어느 한 대상을 기본으로 두고 관찰할 필요가 더 이상 없게 됩니다. 보고 알 때마다, 듣고 알 때마다, 냄새 맡고 알 때마다, 맛을 보아 알 때마다, 닿아서 알 때마다, 생각하고 알 때마다 드러나는 그 모든 대상들을 그대로 관찰할 수 있게 됩니다.

 

수행자가 이러한 방법대로 끊임없이 관찰하다가 삼매와 지혜의 힘이 좋아지면 1초 동안에도 많은 마음들이 생멸하는 것을 직접 경험하여 알게 됩니다. 물론 처음 수행을 시작하는 수행자는 아직 그렇게 빨리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은 글을 갓 익혀 책을 읽는 이와 글에 능숙한 이가 책을 읽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처음 시작한 수행자도 1초에 적어도 한 번은 관찰할 수 있도록, 한 번보다 적게 관찰하지 않도록 항상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참조: 비구 일창 담마간다 편역, 위빳사나 백문백답, 이솔, 2014, 38~44. 일부용어 변경.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금강 | 작성시간 23.10.02
    댓글 이모티콘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