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831 사뭇찌. 위숫디(청정) 6가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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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사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사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사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 모든 번뇌 소멸하신 분, 스스로 완전히 깨달으신 부처님께 예경 올립니다.)
문단번호 41번 할 차례입니다.
41. ①Sabbe ②lokuttare ③⑩honti, ①모든 보디빡키야 담마들이 ② 초세간 마음에 ③생겨난다. ⑥na [honti] ⑤vā ④saṅkappapītiyo. ⑥안 일어난다. ⑤어떤 초세간 마음에서는 ④상깝빠와 삐띠들은 ⑧Lokiyepi ⑨yathāyogaṃ, ⑧세간 선업, 끼리야 마음에서도 ⑨적절하게 연관되어 ⑦chabbisuddhi pavattiyaṃ. ⑦실라위숫디(戒淸淨) 등의 6가지 위숫디(淸淨)들이 생겨날 때 [⑩생겨난다.] |
뜻을 보겠습니다.
① 모든 보디빡키야 담마들(37보리분. 37조도품)이 ② 초세간 마음에 ③ 생겨난다.
④ 상깝빠와 삐띠들은 ⑤ 어떤 초세간 마음에서는 ⑥ 안 일어난다.
⑦ 실라위숫디(戒淸淨) 등의 6가지 위숫디(visuddhi. 淸淨)들이 생겨날 때
⑧ 세간 선업, 끼리야 마음에서도 ⑨ 적절하게 연관되어 ⑩ 생겨난다.
보디빡키야 담마들이 초세간 마음에서 생겨납니다. 초세간 보디빡키야 담마는 14개죠.
37보리분 14개: 정진, 사띠, 지혜, 집중, 믿음, 상깝빠(위딱까. 겨냥), 빳삿디(편안함), 삐띠(희열), 따뜨라맛잣땃따(균형잡음), 찬다(서원. 열의), 위라띠 3가지(정어, 정업, 정명) |
그리고 상깝빠와 삐띠는 안 일어나기도 합니다. 상깝빠(위딱까)는 팔정도에 있는 삼마상깝빠인데 이것을 ‘바른 사유’라고 번역하면 안 되고 ‘바른 겨냥’이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이 상깝빠와 삐띠는 도와 과를 얻을 때는 어떤 초세간 마음에서는 없을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초세간 마음이 아니라 제 생각에는 항상 없다고 생각합니다. 위딱까 위짜라 삐띠는 낮은 선정인 초선 2선 3선까지 생기죠. 초선에서 세간 선정인 색계 선정에서 생기는 선정의 요소들보다, 가장 높은 도와 과를 얻을 때 생기는 사마디가 훨씬 더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어떤 경우가 아니라 항상 안 일어난다고 봅니다.
실라위숫디(戒淸淨) 등의 6가지 위숫디(淸淨)들이 생겨날 때 세간 선업, 끼리야 마음에서도 적절하게 연관되어 생겨난다.
7청정(visuddhi)과 지혜 ⑴ 계청정(戒淸淨) sīla ⑵ 마음청정[心淸淨]citta ⑶ 견해청정[見淸淨] diṭṭhi 몸과 마음 구별의 지혜(nāma-rūpa-pariccheda-ñāṇa) ⑷ 의심극복청정 [度疑淸淨]kaṅkhāvitaraṇa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 (paccaya-pariggaha-ñāṇa) ⑸ 도비도지견청정(道非道智見淸淨)magga-amagga-ñāṇadassana 1. 명상의 지혜(sammasana-ñāṇa) 2. 생멸지(udayabbaya-ñāṇa)-약한 단계 위빳사나를 더럽히는 10가지 원인 : 광명, 지혜, 희열, 경안, 행복, 결심, 분발, 확립, 평온, 욕구 ⑹ 실천지견청정[行道智見淸淨]paṭipadā-ñāṇadassana 2. 생멸지(udayabbaya-ñāṇa)-성숙된 단계 3. 소멸의 지혜 (bhaṅga-ñāṇa) 4. 두려움(공포)의 지혜 (bhaya-ñāṇa) 5. 허물(위험)의 지혜 (ādīnava-ñāṇa) 6. 염오의 지혜 (nibbidā-ñāṇa) 7. 벗어나려는(해탈하기를 원하는) 지혜 (muñcitukamyatā-ñāṇa) 8. 재성찰의(깊이 숙고하는) 지혜 (paṭisaṅkhā-ñāṇa) 9. 형성 평온의 지혜(saṅkhārupekkhā-ñāṇa) 10. 수순(隨順)의 지혜 (anuloma-ñāṇa) ⑹ 실천지견청정과 ⑺ 지견청정 사이 : 11. 종성(種姓)의 지혜 (gotrabhū-ñāṇa) ⑺ 지견청정(智見淸淨)ñāṇadassana 12. 도(道)의 지혜 (magga-ñāṇa) 13. 과(果)의 지혜 (phala-ñāṇa) |
위숫디는 청정하다는 뜻입니다. 『청정도론(위숫디막가)』이 이렇게 말합니다. “6가지 청정이 세간 선업과 아라한의 마음에서 일어난다.” 여섯 가지 청정은 실라 위숫디(戒淸淨), 찟따 위숫디(心淸淨), 딧티 위숫디(見淸淨), 깡카위따라나 위숫디(kaṅkhāvitaraṇa visuddhi. 의심극복청정. 度疑淸淨), 막가 아막가 냐나닷사나 위숫디(magga-amagga-ñāṇadassana. 道非道智見淸淨), 빠띠빠다 냐나닷사나 위숫디(paṭipadā-ñāṇadassana. 行道智見淸淨)입니다.
실라 위숫디는 계청정입니다. 계가 깨끗한 겁니다. 계가 청정해야 됩니다. 찟따 위숫디는 마음의 청정입니다. 계는 말과 행동을 다스리죠. 말과 행동이 거칠지 않고 예의 바르고, 섬세한 것이 실라 위숫디입니다. 재가자는 5계를 지키면 됩니다. 오계 지키기도 어렵죠. 출가자는 더 많은 계를 청정하게 지켜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마음이 깨끗해집니다. 계로 보호하는 거죠. 계는 울타리라고도 합니다. 울타리를 쳐서 밭을 보호하면 울타리 안에 심은 농작물들을 잘 가꿀 수 있듯이. 계가 없으면, 말과 몸의 행동에 절제가 없으면, 시작한 선업들이 결실을 이루는데 장애가 있습니다. 마음이 당연히 거칠어집니다. 마음이 청정하지 않게 됩니다.
계를 잘 지키면 그다음에 마음의 청정[心淸淨]이 생겨서 마음이 깨끗해집니다. 그다음에 딧티 위숫디, 견해의 청정이 생깁니다. 견해가 달라집니다. 계청정이 먼저 있고 그다음에 마음이 깨끗해지고, 계를 지키지 않으면 양심이 없습니다.
계를 지키지 않으면 양심이 없기 때문에 마음의 깨끗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양심에 찔리는 게 없기 때문에 심청정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견해도 바를 수 없습니다. 계를 지키지 않으면 더 높은 성장은 없습니다.
그 다음은 원인과 결과를 믿는 견해의 청정[見淸淨]이 생겨납니다. 이렇게 순서대로 생깁니다. 그리고 위빳사나 지혜가 생기겠죠. 견해가 깨끗해지면 위빳사나 지혜가 생깁니다. 견해가 깨끗해지면 수행해야겠다, 두려운 윤회에서 시급히 벗어나야겠다는 상웨가(경각심)가 생깁니다. 견해가 깨끗해져서 인과를 숙고하고 무상을 알기 전에는 이런 상웨가가 들지 않습니다.
그다음에 깡카위따라나 위숫디(度疑淸淨)는 의심을 넘어서는 지혜입니다. 더 이상 의심하지 않게 된다는 거죠. 깡카는 의심이고 위따라나는 넘어선다는 겁니다. 의심을 넘어서서 깨끗해지는 겁니다. 더 이상 의심하지 않게 되는 거죠. 위빳사나 수행하면서 ‘이 방법이 맞나?’ 의심하다가 이 지혜가 되면 더 이상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게 확실하구나, 이것뿐이구나.” 이렇게 알게 되는 단계가 깡카위따라나 위숫디입니다. 어디쯤에서 그렇게 될까요?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라고도 하는데 그건 아닌 것 같고 제 생각에는 수다원의 도를 얻어야 될 것 같습니다. 도를 얻어야 되겠죠. 그래야 더 이상 의심하지 않게 되겠죠. 그전까지는 바람이 저쪽에서 불면 저쪽으로 넘어가고, 이쪽에서 불면 이쪽으로 넘어가는 등으로 흔들릴 겁니다. 소멸 지혜가 끝나면 아마 좀 흔들리지 않을 겁니다.
근데 내가 소멸의 지혜를 정확히 봤는지 안 봤는지 알 수가 없지 않습니까? 책 보고 만들어 내서 하고 있는 건지, 제대로 본 건지 알 수가 없죠. 사람들은 책 보고 많이 합니다. 책 보고 만들어 내서 하면서 자기 제대로 하고 있다고 착각하죠. 그런 의심을 넘어서는 지혜의 단계, 깡카위따라나 위숫디입니다.
그다음의 청정이 막가 아막가 냐나닷사나 위숫디(道非道智見淸淨)입니다.
막가, 막가 길인 것과. 아막가, 길이 아닌 것을 아는(보는) 지혜로 청정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길이고 이것은 길이 아니다.” 이렇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 방법은 잘못됐다. 이 방법은 확실하다.” 이렇게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말합니다.
“여기는 틀렸고 여긴 맞다.” 확실히 구분해서 보는 지혜, 아는 지혜, 본다는 것은 안다는 거죠. 그러니까 이제 깨끗해지죠. 이것과 저것이 혼란스럽지 않으니까, “이게 쭉정이고 이게 알맹이다.” 헷갈리지 않으니까 확실한 거죠. 확실하니까 위숫디(청정)입니다. 길인 것과 길 아닌 것을 분명하게 구분하는 지혜, 바른 길과 바르지 않은 길을 아는 지혜. 바르지 않아서 바르지 않다고 말하는데 무슨 말이 그렇게 많은지. 그 지혜를 막가 아막가 냐나닷사나 위숫디라고 합니다.
이건 뭐냐면 위빳사나 수행의 앞부분에 있는 위빳사나 지혜인 생멸지가 생기기 시작하면, 빛이나 온갖 삐띠나 이런 것들이 생깁니다. 빛이 보이고 특이한 현상들이 만족스러운 현상들이 10가지가 일어납니다. 이것을 위빳사나를 더럽히는 원인이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위빳사나를 더럽히는 10가지 원인 : 광명, 지혜, 희열, 경안, 행복, 결심, 분발, 확립, 평온, 욕구 |
빛도 보이고, 삐띠(희열)도 생기기 시작하고, 보이기도 합니다. 이때 수행자들이 자기가 “법을 얻었다. 내가 도와 과를 얻었다.” 이렇게 생각해서 더 이상 수행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래서 위빳사나 지혜가 앞으로 나가지 않고 여기서 멈추게 되고 착각하게 된다는 거죠. 이게 위빳사나를 오염시키는 원인이 된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 10가지를 아막가(길이 아닌 것)라고 합니다. 위빳사나 시작했는데 생멸지에서 보이는 현상들로 인해서 위빳사나 지혜를 완전히 얻지 못하고 잘못된 길로 들어갔다고 얘기합니다.
근데 생각을 해보십시오. 생멸지는 위빳사나 15단계 중에 3번째 단계입니다. 15학년까지 있으면 3학년인 거죠. 3학년인데 뭐 그렇게 착각할 수가 있겠습니까? 근데 착각하는 사람이 있답니다. “길이 아닌 길, 아막가, 그런데 바로 가면 막가. 끝까지 도와 과를 얻을 때까지 가는 것이다.” 이게 분명히 구분됐을 거예요. 저는 착각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생멸지는 너무나 괴로운데 어떻게 자기가 도와 과를 얻었다고 착각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가끔씩 테라와다 교과서에 나오는 것들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8정도(위빳사나)에 대한 의심이 아니라 설명에 대한 의심입니다.
여섯 번째 위숫디는 빠띠빠다 냐나닷사나 위숫디(行道智見淸淨)입니다. 빠띠빠다는 “길, 수행”이라는 뜻입니다. 가는 길 ‘빠띠빠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중도, 팔정도죠. 위빳사나 수행을 막가, 중간으로 가는 것, “오욕락을 극도로 취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이것도 아니고 “고행을 통해서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것도 아닌 중간, “하루에 한 끼 먹고 행선과 좌선을 병행하면서 수행해서 될 수 있다.” 이 견해, 이 길을 빠띠빠다라고 합니다. 막가, 빠띠빠다, 길입니다. 길 즉 수행법인 거죠. 걸어 다니는 길이 아니라 수행 방법을 길이라고 하죠. 이 길에 대한 지혜, 이 길이 보이는 거죠. 그래서 길에 대한 지혜가 청정해집니다. “오직 하나뿐인, 이 길이구나.” 이렇게 확신하게 되는 지혜. 성인의 도과를 얻게 하는 수행법, 지혜, 견해 이것이 마지막 빠띠빠다 냐나닷사나 위숫디입니다. 이 길이 확실하구나. 이렇게 알게 되는 다음의 위빳사나 지혜 9가지가 빠띠빠다 냐나닷사나 위숫디입니다.
2. 생멸지(udayabbaya-ñāṇa) 3. 소멸의 지혜 (bhaṅga-ñāṇa) 4. 두려움의 지혜 (bhaya-ñāṇa) 5. 위험의 지혜 (ādīnava-ñāṇa) 6. 염오의 지혜 (nibbidā-ñāṇa) 7. 벗어나려는 지혜 (muñcitukamyatā-ñāṇa) 8. 깊이 숙고하는 지혜 (paṭisaṅkhā-ñāṇa) 9. 형성평온의 지혜(saṅkhārupekkhā-ñāṇa) 10. 수순(隨順)의 지혜 (anuloma-ñāṇa) |
앞의 두 가지, 몸과 마음을 구분해서 보고 원인과 결과를 구분해서 보는 것은 위빳사나 지혜라고 하지 않고, “뒤의 9가지를 제대로 된 위빳사나 지혜이다.” 이렇게 얘기하는 거죠. 생멸지는 생겨나서 금방 소멸한다는 것을 아는 지혜입니다. “생겨난 것은 소멸한다.” 이렇게 아는 지혜.
방가 냐나는 소멸 지혜입니다. 계속 소멸하는 거죠. 처음에는 생겨나서 소멸하는 게 보이다가, 나중에 점점 빨라지면 소멸하는 것만 봅니다. 아주 빠르면, 사띠가 아주 빠르면, 사마디도 좋고 사띠도 빠르면, 소멸하는 것만 봅니다.
소멸지가 끝나면 두려움이 생깁니다. 소멸의 지혜가 끝났다는 것은 일단 한번 소멸이 됐다는 것은 마치 해일이 지나간 것처럼 깨끗해집니다. 깨끗해지면 청소가 되는 거죠. 쓸어버립니다.
그러면 깨끗해진 상태에서 두려움을 느낍니다. 두려움, 바야 냐나입니다. 두려워한다는 게 무서워한다는 게 아니고, (바야가 두렵다는 뜻이기는 하지만 그런 뜻이 아니고) 이제 대상이 이제 바뀐 겁니다. 한 번 다 깨끗이 청소가 돼서 전에는 번뇌에 가려져 왜곡되던 대상이 분명히 보이기 시작합니다. 핵폭탄이 히로시마에 터지고 나서 히로시마 도시가 허허벌판이 된 것처럼 텅 비었다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아딘나와 냐나, 두려워하고 지겨워하고 지루해하고 질리고 이렇게 됩니다. 이게 지혜입니다. 좋은 게 없죠. 고성제(둑카 삿짜)가 점점 분명해지는 지혜. 정말 지겨워하고 질립니다. 행복해야 하는데 행복해 하지 않고. 위빳사나 수행을 가르치면서 수행하면 행복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곳이 있죠. 수행하는데 왜 행복해지지 않냐고, 수행자는 행복해야 한다고 가르치죠. 여기에 위빳사나 지혜가 생기면 지겨워하고 지루해 질린다고 나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다음에 문찌뚜까미야따 냐나는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지겨워하고 지루하고 질리니까 벗어나고 싶겠죠. 그다음에 또 지혜가 있습니다. 끝에는 도와 과를 얻는 거죠.
오늘 여기까지 하고 마치겠습니다.
이다노- 뿐냥 아-사왁카야-와항 호-뚜
이마노- 뿐냐바-강 삽바삿따-낭 바-제-마
삽베- 삿따- 수키따- 혼-뚜
(Idha no puññaṃ āsavakkhayāvahaṁ hotu.
이러한 우리의 공덕이 우리를 번뇌의 소멸로 이끌기를.
Ima no puññabhāgaṃ sabbasattānaṃ bhājema.
이러한 우리의 공덕을 모든 존재들에게 회향합니다.
Sabbe sattā sukhitā hontu.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사-두 사-두 사-두
(Sādhu sādhu sādhu.
훌륭합니다, 훌륭합니다, 훌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