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설봉문학 / 설봉문인협회 2026년 4월 20일 좋은시 선정 / 명자꽃 / 안도현

작성자사랑|작성시간26.04.20|조회수73 목록 댓글 0





명자꽃

안 도 현


그해 봄 우리집 마당가에 핀 명자꽃은
별스럽게도 붉었습니다.

옆집에 살던 명자 누나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하였습니다.

나는 누나의 아랫입술이 다른 여자애들보다
도톰한 것을 생각하고는
혼자 뒷방 담요 위에서 명자나무처럼 이파리처럼
파랗게 뒤척이며 명자꽃을 생각하고
또 문득 누나에게도 낯설었을 초경(初經)이며
누나의 속옷이 받아낸 붉디붉은 꽃잎까지
속속들이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꽃잎에 입술을 대보았고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내 짝사랑의 어리석은 입술이 칼날처럼
서럽고 차가운 줄을 처음 알게 된
그해는 4월도 반이나 넘긴 중순에 눈이 내렸습니다.

하늘 속의 눈송이가 내려와서 혀를 날름거리며
달아나는 일이 애당초 남의 일 같지 않았습니다.

명자 누나의 아버지는 일찍 늙은 명자나무처럼
등짝이 어둡고 먹먹했는데
어쩌다 그 뒷모습만 봐도 벌 받을 것 같아
나는 스스로 먼저 병을 얻었습니다.

나의 낙(樂)은 자리에 누워 이마로
찬 수건을 받는 일이었습니다.
어린 나를 관통해서 아프게 한 명자꽃,
그 꽃을 산당화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될 무렵
홀연 우리 옆집 명자 누나는
혼자 서울로 떠났습니다.

떨어진 꽃잎이 쌓인 명자나무 밑동은 추했고,
봄은 느긋한 봄이었기에 지루하였습니다.

나는 왜 식물도감을 뒤적여야 하는가,
명자나무는 왜 다닥다닥 홍등(紅燈)을 달았다가
일없이 발등에 떨어뜨리는가,

내 불평은 꽃잎 지는 소리만큼이나
소소한 것이었지마는
명자 누나의 소식은 첫 월급으로
자기 엄마한테 빨간 내복 한 벌
사서 보냈다는 풍문이 전부였습니다.

해마다 내가 개근상을 받듯 명자꽃이
피어도 누나는 돌아오지 않았고,
내 눈에는 전에 없던 핏줄이 창궐하였습니다.

명자 누나네 집의 내 키만한 창문 틈으로
붉은 울음소리가 새어나오던 저녁이 있었습니다.

그 울음소리는 자진(自盡)할 듯 뜨겁게
쏟아지다가 잦아들고 그러다가는
또 바람벽 치는 소리를 섞으며 밤늦도록이어졌습니다.

그 이튿날, 누나가
집에 다녀갔다고, 애비 없는 갓난애를
업고 왔었다고 수런거리는 소리가
명자나무 가시에 뾰족하게 걸린 것을 나는 보아야 했습니다.

잎이 나기 전에 꽃 몽우리를 먼저 뱉는 꽃,
그날은 눈이 퉁퉁 붓고
머리가 헝클어진 명자꽃이
그해 첫 꽃을 피우던 날이었습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