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신동엽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 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 항아리.
아침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 없이 맑은 영원(永遠)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畏敬)을
알리라
아침저녁
네 머리 위 쇠 항아릴 찢고
티 없이 맑은 구원(久遠)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연민(憐憫)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조아리며.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그의 행복을 기도드리는
신동엽
그의 행복을 기도드리는 유일한 사람이 되자.
그의 파랑새처럼 여린 목숨이
애쓰지 않고 살아가도록
길을 도와주는 머슴이 되자.
그는 살아가고 싶어서
심장이 팔뜨닥거리고 눈이 눈물처럼
빛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나의 그림자도 아니며
없어질 실재도 아닌 것이다.
그는 자기의 태양을 우러러 따라가는
해바라기와 같이
독립된 하나의 어여쁘고 싶은
목숨인 것이다.
어여쁘고 싶은 그의 목숨에
끄나풀이 되어선 못쓴다.
당길 힘이 없으면 끊어 버리자.
그리하여 싶으도록 걸어가는
그의 검은 눈동자의 행복을
기도드리는 유일한 사람이 되자.
그는 다만 나와 인연이 있었던
어여쁘고 깨끗이 살아가고 싶어 하는
몸알일 따름.
그리하여 만에 혹 머언 훗날
나의 영역이 커져
그의 사는 세상까지 미치면 그 땐
순리로 합칠 날 있을지도
모를 일일께며.
------------------------------------------
담배연기처럼
신동엽
들길에 떠가는 담배 연기처럼
내 그리움은 흩어져 갔네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멀리 놓고
나는 바라보기만
했었네.
들길에 떠가는
담배 연기처럼
내 그리움은 흩어져 갔네.
위해주고 싶은 가족들은
많이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멀리 놓고 생각만 하다
말았네.
아, 못다한
이 안창에의 속상한
드레박질이여.
사랑해 주고 싶은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하늘은 너무 빨리
나를 손짓했네.
언제이던가
이 들길 지나갈 길손이여
그대의 소맷 속
향기로운 바람 드나들거든
아퍼 못 다한
어느 사내의 숨결이라고
가벼운 눈인사나,
보내다오.
------------------------------------------
산에 언덕에
신동엽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산(山)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들에 숲속에 살아갈지어이.
쓸쓸한 마음으로 들길 더듬는 행인(行人)아.
눈길 비었거든 바람 담을지네.
바람 비었거든 인정(人情)담을지네.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울고 간 그의 영혼
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
선주민(先住民)
조남익
곰 가재 뒤지듯
광막한 동북아시아
해안 따라 강변 따라 스며들었지
동만주에서 동해안으로 들어오고
요동반도서 서해안으로 스며들고
산뚱반도에서 황해를 건너 들어오고
원시림 속에 숨겨진 거대한 국토는
야수들의 들끓는 포효(咆哮) 속에서도
아직 눈뜨지 못한 이른 새벽
그들 고(古)아시아족의
원추형(圓錐形) 움집에서는
신석기문화(新石器文化)의 연기가 피어오르고
빗살무늬의 즐문토기(櫛文土器)가 오롯했었지
해뜨는 동쪽으로, 동쪽으로
천신(天神) 따라 곰처럼 산 그들
죽어서도 동쪽에 머리 두고 묻혔지
이윽고 청동검(靑銅劍) 번쩍이며
구릉과 야산 타고 내려오는 예맥족(濊貊族)
이들에게 밀리고 쫓기며
더러는 흡수 동화되고
곰을 숭배하여
곰의 자손이라고 믿은 그들은
머언 시베리아 동북부로 이동되었지
그래, 그들이 우리의 선주민(先住民)이었지
------------------------------------------
죄(罪)
조남익
하필이면 길가에
태어난 죄
질경이의
하얀뿌리가 밉다.
하늘에 닿지 못하는
어여차, 미치고 싶은 사랑
코리아에 태어난
나의 죄······
태평양 끝
높이높이 오른
우리들의 죄
질경이야,
짓밟힌 질경이야
어여차, 미치고 싶은
밟히며 자란 사랑이야.
------------------------------------------
수제비
이재무
한숨과 눈물로 간 맞춘
수제비 어찌나 칼칼, 얼얼한 지
한 숟갈 퍼올릴 때마다
이마에 콧잔등에 송송돋던 땀
한 양푼 비우고 난 뒤
옷 섶 열어 설렁설렁 바람 들이면
몸도 마음도 산그늘처럼
서늘히 개운해 지던 것을
살비듬 같은 진눈깨비 흩뿌려
까닭없이 울컥, 옛날이 간절해지면
처마 낮은 집 찾아 들어가 마주하는
뽀얀 김 속 낮달처럼 우련한 얼굴
구시렁구시렁 들려오는
그날의 지청구에 장단맞춰
야들야들 쫄깃하고 부드러운 살
훌쩍훌쩍 삼키며 목메는 얼큰한 사랑
------------------------------------------
공터 3
이재무
어둠이 졸졸졸 고이는 공터
구석에 널브러진 페타이어
속도의 중력에 실려 살아왔던 한 생애의
최후를 나는 보고 있는 것이다
그가 달려왔을 그 많은 길과 일별했던
풍경들을 그는 기억하고 있을까
누구에게나 한때 생의 절정은 있는 법이다
속도란 마약과도 같은 것
망가지고 부서져 저렇듯 버려져서야
실감되는 무형의 폭력인 것이다
가속의 쾌감에 전률했던 날들은 짧고
길고 지루한 남루의 시간 견디는
그대 생의 종착
생은 언제나 돌이킬 수 없을 때에야
깨달음을 준다
------------------------------------------
나는 여름이 좋다
이재무
1
나는 여름이 좋다
옷 벗어 마음껏 살 드러내는,
거리에 소음이 번지는 것이 좋고
제멋대로 자라대는 사물들,
깊어진 강물이 우렁우렁 소리 내어 흐르는 것과
한밤중 계곡의 무명에 신이 엎지른 별빛들 쏟아져 내려
화폭처럼 수놓은 문장 보기 좋아라
천둥 번개 치는 날 하늘과 땅이 만나 한통속이 되고
몸도 마음도 솔직해져 얼마간의 관음이 허용되는
여름엔 절제를 모르는 아이와 같이
나를 마구 들키고 싶고 내 안쪽 고이 숨겨 온 비밀
몰래 누설하고 싶어라
나는 여름이 좋다
2
나는 시끄러운 여름이 좋다
여름은 소음의 어머니
우후죽순 태어나는 소음의 천국
소음은 사물들의 모국어
백가쟁명 하는 소음의 각축장
하늘의 플러그가 땅에 꽂히면
지상은 다산의 불꽃이 번쩍인다
여름은 동사의 계절
뻗고, 자라고, 흐르고, 번지고, 솟는다
------------------------------------------
나비의 여행
정한모
아가는 밤마다 길을 떠난다
하늘하늘 밤의 어둠을 흔들면서
수면의 강을 건너
빛뿌리는 기억의 들판을
출렁이는 내일의 바다를 날으다가
깜깜한 잘벽
헤어날 수 없는 미로에 부딪히곤
까무라쳐 돌아온다
한 장 검은 표지를 열고 들어서면
아비규환하는 화약냄새 소용돌이
전쟁은 언제나 거기서 그냥 타고
연자색 안개의 베일 속
파란 공포의 강물은 발길을 끊어버리고
사랑은 날아가는 파랑새
해후는 언제나 엇갈리는 초조
그리움은 꿈에서도 잡히지 않는다
꿈에서 지금 막 돌아와
꿈의 이슬에 촉촉히 젖은 나래를
내 팔 안에서 기진맥진 접는
아가야
오늘은 어느 사나운 골짜기에서
공포의 독수리를 만나
소스라쳐 돌아왔느냐
------------------------------------------
어머니·6
정한모
어머니는
눈물로
진주를 만드신다.
그 동그란 광택(光澤)의 씨를
아들들의 가슴에
심어 주신다.
씨앗은
아들들의 가슴속에서
벅찬 자랑
젖어드는 그리움
때로는 저린 아픔으로 자라나
드디어 눈이 부신
진주가 된다.
태양이 된다.
검은 손이여
암흑이 광명을 몰아내듯이
눈부신 태양을
빛을 잃은 진주로
진주로 다시 쓰린 눈물로
눈물을 아예 맹물로 만들려는
검은 손이여 사라져라.
어머니는
오늘도
어둠 속에서
조용히
눈물로
진주를 만드신다.
------------------------------------------
바람 속에서
정한모
1.
내 가슴 위에
바람은
발기발기 찢어진
기폭
어두운 산정에서
하늘 높은 곳에서
비장하게 휘날리다가
절규하다가
지금은
그 남루의 자락으로
땅을 쓸며
경사진 나의 밤을
거슬러 오른다
소리는
창밖을 지나가는데
그 허허한 자락은
때묻은 이불이 되어
내 가슴
위에
싸늘히
얹힌다
------------------------------------------
자화상
한명화
뛰어내리는 햇살 위에
시 한 송이 그리며 성장한 내가
적토마의 꿈을 안고 사업이라는 목걸이를
허리에 차고 달린다
높은 산 중턱에 올라서니
허허로운 가슴과 고독만이 부서져 있고
머리는 낮아지고 낮아져 바다에 도착
먼발치 노을을이고 또다시
길 떠날 준비를 한다
삶의 전쟁터 야망의 덫에 걸려
사슴 같은 아이들 눈빛 다 놓치고
30년이 굴러간 사업의 밭에 서있는 나는
훈장처럼 상처들이 남아 있다
새겨진 자리 외로움 켜켜이 쌓이고
잿빛 가슴에선 시가 싹이 튼다
사업과 예술을 완성할 부지에
봄 햇살 가득 담아 집을 만들고
자연과 시를 하나로 엮어
예술제 공연을 할 수 있는 종합레저타운 조감도를 그린다
아! 지칠줄 모르는 나는 야생마
마지막 꿈의 정상에 깃발을 꽂기 위해
오늘도 사업과 문학을 위해 달린다.
------------------------------------------
진달래꽃
한명화
꽃잎 여리다고 말하지 마라
이 꽃잎 한 장이면
추억할 기억이 얼마인가
볼모산 장유계곡 산자락
너랑 보던 봄의 핑크빛 점령
그 눈부심이 얼마인가
꽃잎 한 장으로
잊히지 않을 사랑
꽃 피어 쏟아져 내릴
깊은 그 사랑은 또 얼마인가
생각해보면 너를 만나
불꽃처럼 타던 나였으나
이렇게 꽃 활짝 핀 날이면
상실감과 그리움에 잠 못 들고
나무 위에 노 저어 내리는 달빛만
내 마음 휘어지도록 끌어안는다
------------------------------------------
회상
한명화
사무실 귀퉁이 웅크리고 있는
너의 흔적들이 묻어있는
소품들을 뒤로하고
길을 나섰다
벚꽃은 무리 지어
꽃비 흩날리고
길바닥에 떨어진 꽃잎 몇 잎이
나를 올려다본다
누워 있는 잎사귀들이
서녘 하늘에 걸려있던
핑크빛 노을을 닮았다
명치끝이 아려오는
옅은 너의 향기는
야속한 바람이 흔들어대도
가슴속으로 파고든다
날이 저물어 어둠이 내리자
불빛 속에 더욱 선명해지는 네 모습
가까이 가면 멀어지고
멀어지는가 싶으면
다가와 미소 짓는다.
------------------------------------------
서울숲 하늘길 동행
한명화
이 풍진세상을 같이 안아올리고 싶었던
너를 떠나보내고
넘어질 때마다 그리웠던 너를
가슴에서 다시 만난 날
보이지 않는 손길이
내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따스하다
지독히도 추었던 몇 번의 겨울을 참고 견디니
오늘은 나를 꿈속으로 이끌어준다
나무들의 숨결이 커지는 저녁
이바람은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려는지...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나무들이
다가오다 멈춰 서버린다
이 세상에 같이 머물지 않아도
기억만으로도 동행할 수 있음을 알려준 너
믿음의 의미를 알려준 너
꿈으로 가는 길을 확인 시켜준 너
마지막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떠난
어제만 살던 너에게
오늘도 살고 있는 나는
그리움 한 줌씩 꺼내 던지며 예전에 없던 숲길에서
새로운 첫 하늘길을 열어 간다
어둠 속에서 아팠던 시간을
뒤로하고 걷는 나에게
나무들의 꾸부정한 허리 사이로
너는 환하게 웃음 짓는다
예전의 공치던 파이팅 소리도 들으며
저 숲 너머로 옛꿈을 데리고
한참을 거닐다 되돌아온다
가로등 불빛에 비추어진 빗방울이
유리알처럼 맑게 빛이 난다.
------------------------------------------
늘 푸른 강물이듯이
홍문표
늘 푸른 강물이듯이
아슬히 사라져 가는
하얀 손수건의 떨림
강물은 가을비에 얼굴을 적시고
궁상스런 피리의 선율이
수면을 맴돌며 서글픈 악보를 뜯고 있습니다
헤어짐은 이미 만남의 흉계가 되어
복면한 슬픔을 잉태하고
초라한 저녁 하늘만
신음하는 강물을 바라봅니다.
밤바다 변심하는 내심처럼
이별은 늘 푸른 강물의
서산너머로 등을 돌리고
우리는 못 다한 산문을
가슴에 썼다가 지워버립니다.
빛살처럼 흩어지는 엇갈림의
아슴아슴한 틈새로
당신이 던져준 우람한 의미만
내 영혼의 갈피 속에 끼워진
종이학이 되어
밤이면 푸드득 날개 짓을 하며
허공을 배회합니다
------------------------------------------
마음의 집에 작은 들창을 내어
이기동
빈 공간에 그대가 깃들어
잔잔히 감치는 숨결이 일렁이고
그리움이 초승달로 떠서 보름, 그믐으로 사위어 가다
초저녁 별로 떠서
공간 가득히 마음의 집을 지어 놓았다.
플라타너스 우거진 길에 나서면
플룻 소리인가
오보에 소리인가
은은한 숨결이 소리내어
그대 목소리가 들린다.
마음의 집에
오롯이 피어나는 것은 무엇인가
늙은 플라타너스 등걸에 피는 신록과도 같이.
깊이 푸르러 출렁이는 물결은 무엇인가
지층 속 맑은 물이 샘솟는 것과도 같이.
마음의 창에 비친 별이
새벽녘까지 오래도록 남아있는 잔상은 무엇인가
고요하여라 샛별
그대의 눈
사랑은 마음의 집에 작은 들창을 내어
밤이 깊을수록 빛나는 별처럼
그대 눈빛이 사라지지 않는 것.
설령 먼동이 불타서 스러지고
샛별마저 빛을 잃는다 해도
그대 눈빛이
마음의 집에 작은 들창을 내어
순전한 사랑으로 아침 햇살이 비쳐들게 하리라.
------------------------------------------
그대의 플루트
이기동
아침 이슬을 꿰다가 떨어뜨려
햇살에 구르는 소리를 들어 보았나요.
눈부셔 시린 눈을 씻고
피리새가 지저귀는 노래는 들어 보았나요.
오로지 나는 그대가 불어야만
부드럽고 청신한 음색을 찾을 수 있는
그대의 플루트.
정결한 그대 입술이 닿아
사랑의 숨결이 하얀 날개처럼
내 영혼에 깃들어
하늘의 잔잔한 선율인가
마음이 비어 청려하게 날아올라요.
그대의 가냘프고 섬세한 손가락이
열고 닫는 마음의 눈,
교향시가 출렁이다가 신록이 피는 숲에 젖어들면
그대 사랑의 숨결 따라
영롱한 이슬 꽃잎이 함빡 피어나요.
포르르 포르르 장밋빛 뺨을 가진 새가 날아다녀요.
침엽수에 사뿐히 앉아 피리 가락을 짓는 새가….
나에게서 심연의 깊은 물을 길어 올려
찰랑 청려한 음색을 찾아
플루트 부는 그대.
------------------------------------------
행복
조남명
이걸 붙잡으려 거리를 헤멘다
무모한 일로 요행을 바라고
묻혀있는 보석 찾듯 어둠 속을 방황한다
몸 벌린 채 마음을 넘어
먼 곳 까지 더듬어 보지만
끝내 돌아온다
모두가 갈망하는 행복
오늘, 여기에 널려 있어 밟고 다닌다
마음 하나면 가질 수 있는 것
소소한 삶 속, 작은 데서 그걸 캐낸다
나중에 누리자고
미래에 행복을 빌려주지 마라
지금 못잡은 그것이
바로 내게 온다는 보장은 없는 것
생生은 생각보다 짧다
사랑할 수 있을대 다하라
남의 것 넘볼 것도
내 것을 내보일 일도 아니다
가슴안에 만족을 심으면
세상이 아름답게 보인다
마음 한편에 혼자 채워
바다처럼 데리고 있어야 하는 게
행복이 아니던가
------------------------------------------
안개꽃
조남명
뒤에서 받치고
어울려만 준다
나타내려고도
난체할 줄도 모르고
너무 작아 속상하다
그러나
속은 멀쩡하게 들어찼다
늘 다른 꽃의
배경만 되어
안개 속에 가려있는
얼굴 없는 서러운 이름
깊이 들여다보면
갖출 것 다 갖춘 작지만 큰 꽃
제대로 보는 이 없어도
오밀조밀 생겨
은은한 그리움 같은 너
화려한 꽃보다 더 아름답다
------------------------------------------
송림의 해
장주경
종일 하늘을 가로질러 꾸물꾸물
서해바다에 이른 태양이
수평선 너머에 잠시 짐을 푼다
붉은 물빛에 물든
발그레한 얼굴들이 잔파도를
밟으며 시끄럽게 웃는다
영원과 순간의 대화가
왁자지껄 이어지다가
거품을 일구어 모래밭에 눕는다
땅에 뿌려진 태양의 열기에
잘 여물은 생명의 어미가
태양의 새끼를 낳고
새끼는 어미를 따라 흉내를 낸다
날마다 태양은 동녘에서 태어나고
흉내를 전달한 늙은 생명의 어미는
다시는 잠에서 깨지 않는다
태양은 자신의 생명을 낳지 않고
땅에 뜨거운 빛을 뿌려
수많은 모습으로 자신을 잉태시킨다
그렇게 태어난 생명의 꽃들은
태양의 씨를 땅에 뱉어 놓고
그 어미 따라 스스로 땅이 된다
태양은 시지프스의 신발을 신고
이 땅의 꽃이 보고 싶어
날마다 동쪽으로 간다
------------------------------------------
내곁에 있기에 4
이흥우
당신은 알고 있지요
동짓달 비스듬이 기운 햇살
구름속에 가려
어둠이 쉽게 찾아옴을
모닥불 불티처럼
그토록 화려한 짧은 사랑도
추운 겨울 밤하늘에
별이 되어 빛나는 뜻을
당신은 모를 것입니다.
꺼저가는 촛불속에서도
한가닥 희망 같은 것이
한발짝 다가와 머무는 뜻을
깊은 산속 진달래 꽃
진한 피를 토하며
남몰래 가을에 숨어 핀 뜻을
난 알고 있습니다
시궁창 연못 고통 견디며
옥같이 빛나는 사리의 향기를
내 가슴속 깊이보다
더 얼어 붙은 저수지에
나뭇잎 배
달과 함께 노저어 가는 뜻을
전하고 싶습니다
호출기 울림 소리에
코스모스 씨앗 꿈에서 깨어나
천리길 푸른 신호등의 메아리를
도시를 삼켜버린
안개덮인 봄날이면
틀림없이
아지랑이 넘실대는 소리를
보여 드릴까합니다.
눈을 감으면
더 멀리 가까이서
당신을 바라볼 수 있는 그리움을
대장간 쇠붙이처럼
뻘겋게 달궈진 가슴을
성숙된 아픔의 달구질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