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기본 자료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이해와 목회상담

작성자mirine|작성시간07.07.27|조회수969 목록 댓글 0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이해와 목회상담




<제목차례>


I. 서론 1




1. 문제제기와 연구목적 1




2. 연구 방법 11




II. 일반상담의 인간관 패러다임 14




1. 패러다임의 개념과 인간관 14




2. 인간관에 따른 상담의 분류 17




3. 인간관에 따른 상담학의 관점변화 23




4. 일반 상담의 인간관 패러다임에 대한 평가 30




III.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이해 39




1.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용례(用例) 39

1) “형상”에 대한 성경의 일반적 용례(用例) 40

2) 하나님과 관련된 “형상”의 용례(用例) 41




2. 하나님의 형상 이해에 대한 역사적 고찰 47

1) 실재론적 견해들(The Substantive Views) 47

2) 관계적 견해들(Relational Views) 52

3) 기능적 견해들(Functional Views) 57




3. 최근의 신학적 고찰 60




IV.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이해가 목회상담에 주는 시사점 70




1. 통합적 패러다임이 주는 유익 70




2. 목회상담의 조류들과 “하나님의 형상” 74




3. 본 논문의 한계와 과제 80




참고문헌 82




<그림차례>




<그림1>네 가지 요소에 의한 접근별 상대적 위치 23

<그림2> 인간에 대한 일반 상담과 "하나님의 형상"의 패러다임비교 70




I. 서론




1. 문제제기와 연구목적




박형렬(1994)에 따르면 전통적으로 목회 기능은 치유(healing), 지탱(sustaining), 인도(guiding) 그리고 화해(reconciling)인데 이 네 가지는 각 시대의 문화적, 지적, 심리적, 종교적 상황에 따라 그때마다 여러 가지 형태로 표현되었고, 어느 한 가지가 중요한 위치에 서게 되면 다른 기능들은 상대적으로 덜 강조되곤 하였다. 그 동안 한국교회는 일반적으로 전도와 교육, 그리고 기도운동에 상대적으로 큰 강조점을 두어 왔었지만 21세기에는 선교사역과 더불어 목회 상담에 기초한 치유목회가 크게 부각될 것으로 내다본다. 한국사회가 지난 1997년 IMF시대를 맞이하면서 이러한 경향성은 더욱 증대되고 있다. 경제적 위기는 가장(家長)들의 실직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개인의 정체성과 가정의 위기를 초래하였다. 가정과 직장에서 인간관계가 흔들리고 불안감이 심각할 정도로 높아졌으며 정서적, 관계적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에 대해 정혜신(1999)은 1998년도 ‘한국 가정법률상담소’의 통계를 인용하면서 특히 남성들의 지위가 크게 흔들리고 있음을 지적했다. 즉, ‘당신은 아버지로서 자녀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92%의 아버지가 ‘예’라고 대답한 반면, ‘당신은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거나 의논의 상대가 된다고 생각하는가’ 라는 질문에 긍정적으로 대답한 자녀들은 4.6%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비극적일 정도로 서로의 역할 만족도에 대한 인식의 격차가 벌어지게 된 상황을 정혜신은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김 상무가 없는 동안(직장일 때문에 가족을 돌볼 시간을 내지 않음을 가리킴: 필자 주) 가족들은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그가 없어도 살 수 있는 가족으로 변화했다. 아버지가 없어도 잘 돌아가고 있는 가정에, 퇴직으로 인해 갑자기 그 울타리 속으로 들어온 남자는, 오히려 가정의 균형을 깨게 된다. 그래서 가정에서도 퇴출되는 것이다.”(정혜신, 1999: 61)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는 존재인지라 아버지와 남편의 역할이 지극히 빈약한 환경 속에서, 지난 반세기를 살아오다 보니 가족들이 그러한 잘못된 환경에 그만 적응하게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역할 만족도에 대한 커다란 인식의 차이는 대부분의 가장(家長)들이 문제의 심각성을 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난 반세기 동안 남성들은 직업전선에서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위해 황소처럼 일해왔지만 그 대가로 가족과의 친밀한 관계를 맺는데 무력하고 가정에서 가장으로서의 리더십을 발휘하는 데는 무능해 진 것이다. 이런 가족 간의 잠재된 갈등들이 IMF를 맞이하면서 심각한 관계의 위기로 불거져 나오고 있다는 것이 정혜신의 진단이다.

IMF 시대로 대변되는 한국 사회의 위기는 단순한 경제적 위기 가 아니라 총체적 위기이다. 잘못된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은 언젠가 무너지게 마련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잘못되었거나 시대에 적절하지 못한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것이며, 나 자신의 가치관을 돌아보고 가족과 직업, 그리고 신앙에 대하여 올바른 가치관을 재정립하는 것이다. 이런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목회상담은 더 이상 목회의 제 영역 중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적인 목회영역으로 부상되고 있다. 따라서 박윤수(1996)는 “목회심리치료와 치유 상담의 실제”라는 책의 서문에서 ‘목회자는 상담을 할 것인가 하지 않을 것인가를 선택할 권리가 없고 다만 제대로 훈련을 받고 효과적인 상담을 할 것인가, 훈련을 받지 않고 엉터리상담을 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을 뿐임을 지적한다. 목회자는 목회현장에서 자의든지 타의든지 다양한 상담상황에 자주 직면(直面)하고 있으며 그러한 상황이 날이 갈수록 증대될 것이 확실하다.

이러한 시대적 기대에 부응하여 목회자가 목회현장에서 상담자의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몇몇 상담의 기술을 배워 사용하는 것이 보편화되고 있으나 보다 중요한 것은 상담에 관한 올바른 안내도를 가지는 것이다. 상담에 있어서 안내도는 상담이론이다. 맥민(Mcminn, 1983/ 정동섭 역, 1996: 23-36)에 따르면 안내도로서 상담이론은 다음 네 가지 역할을 한다.

첫째, 전문성을 확립한다. 하나의 이론적 입장을 취하게 되면 기법의 숙련을 꾀할 수 있다. 절충적 상담가(相談家)들은 상담이론들을 폭넓게 이해하고 적용한다고 주장하지만 한 가지 상담을 충분히 익히는 것도 결코 쉽지 않다. 따라서 절충적 상담이론은 깊이가 결여될 수 있지만 하나의 이론에 정통하는 것은 깊이 있는 상담 연구의 기초가 된다. 둘째, 목표설정에 도움을 준다. 상담의 이론은 상담자와 내담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이론적 모형은 내담자로 하여금 목표설정에 참여하게 할 뿐 아니라, 언제 목표에 이를 지 예견할 수 있도록 하여 자발적인 협조를 유발할 수 있다. 셋째, 상담의 과정을 돕는다. 상담은 시작에서 마치기까지 일정한 과정이 있으며 이론적 모형은 상담의 목표뿐 아니라 그 과정도 정의할 수 있다. 잘 갖추어진 안내도가 있으면 장기 목표를 나누어 단기 목표를 설정할 수 있다. 넷째, 내담자가 미래를 예측하게 한다. 즉 이론적 모형은 내담자가 상담 과정 중에, 다음에 무엇이 진행될 것인지를 이해하며 일상 스트레스 인자 가운데 어떤 것이 자신의 발전을 방해하는지를 예측할 수 있는 지침이 된다. 이처럼 과정이 명료할 때 치료자와 내담자간의 상호 협조가 용이해 진다.

목회상담 사역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이론적 정립이 든든하지 못한 채 일반상담의 기법을 무분별하게 도입한다면 비 성경적인 인간관에 오염될 위험성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손경환(1998)이 “성경적 상담”이라는 책에서 강력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반대로 일반상담을 지나치게 타부시하면 강력하고 풍부한 상담 기술들을 사장시킬 위험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몇 몇 선행 연구들이 일반상담의 이론과 목회상담 이론의 통합을 시도하고 있지만 양자의 이론들을 단순히 비교 분석하는 수준이거나 애매하게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여 성경적으로 튼튼한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목회상담의 정체성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의문점들이 제기된다.

첫째, 목회와 일반상담 양자간에 전제가 서로 다른데 상담기법을 아무 검증 없이 사용해도 괜찮은가? 방법(기법)에는 이미 그 상담학의 인본주의적인 철학이 담겨있지 않은가?

둘째, 목회는 목회 나름대로 고유한 방법론이 있는데 그것들을 무시하고 지나치게 인본주의적인 상담학에 의존하는 것이 타당한가? 즉 목회가 성령을 의지하기 보다 인간적인 기술에 너무 지나치게 의존하여 타락을 초래할 위험성이 있지 않은가?

셋째, 목회상담은 인간을 돕고자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인데 일반 상담에서 개발해 온 풍부하고 강력한 도구들을 무시하고 성경이나 신학적 방법으로만 충분한가?

목회상담은 목회와 상담이라는 전혀 다른 패러다임에서 성장해온 두 개의 사역 영역이 접목된 신생 학문으로서 이러한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피할 수 없다. 콜린스(Collins/ 문희경 역, 1996)에 의하면 심리학은 종교와 갈등상태에 빠져 있다. 일반상담과 목회상담, 혹은 심리학과 신학을 접목시키려고 시도한 선행연구들이나 목회상담학 저서들이 있다. 양자의 관계에 대한 초기의 연구들은 대부분 일반상담의 이론을 큰 흐름별로 연구하고 그것들을 어떻게 기독교적 시각에서 해석하고 수용해야 하는가 하는 것들이다1). 이 연구들의 장점은 상담의 다양한 조류들을 이론의 특성별로 분류하고 그들이 전제로 하는 가정(仮定)과 주장하는 바 내용을 비교적 상세히 기술하고 목회상황에 접목의 타당성을 가늠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행연구들은 일반 상담의 각 이론을 연구하고 비교 검토하는 데에는 충실하지만 그것들을 하나의 통전적 패러다임으로 묶어서 목회상담에 적용하지 못한다는 데 한계점이 있다. 다시 말하여 분해는 성공적으로 했지만 그것들을 재구성하여 목회상담을 위한 하나의 지도로 구성하는 데는 빈약하다. 특정 상담의 이론들은 나름대로의 이론적 배경과 인간관의 바탕 위에 세워진 독립된 건물과 같아서 서로 다른 별개의 이론들을 단순히 비교하는 것으로는 종합되지는 않는다. 각 이론들의 관점을 수용하면서 목회적 맥락에서 활용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보다 더 크고 포괄적인 동시에 성경적인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일반 상담을 목회에 적용하려는 두 번째 시도들은 기독교의 인간론을 조직신학으로 검토하여 상담학적인 인간론을 구성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에는 대표적으로 크랩(Crabb, 1987/ 윤종석 역, 1993)을 들 수 있다. 그는 신학과 심리학의 갈등 문제를 말하면서 양자가 인간의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통합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목회상담은 성경에 기초한 인간관을 바탕으로 세워져야 한다는 점을 말한다. 그는 목회상담을 위한 성경적 인간관을 탐구하기 위하여 조직신학적 주제를 수용하여 논의한다. 그러나 그의 논의들은 성경적 인간관의 핵심적 개념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채택하여 성경적 인간관의 핵심을 잘 지적하였으나 인간에 대한 다른 여러 조직신학적 주제들을 병렬 적으로 배열함으로써 초점을 흐리고 있다. 즉 성경적 인간관의 특성으로 ‘인격적 요소’, ‘이성적 요소’, ‘의지적 요소’, ‘감정적 요소’ 등등을 지적하며 변화의 시발점은 회개라고 보는데 이들 요소들과 “하나님의 형상”이 어떻게 상호 연관이 되는지를 상술하지 않음으로써 상담학적인 인간관과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개념이 여전히 분리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상담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구체적 증상을 제거하기 위한 상세도(詳細図)도 필요하지만 상담 전체를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표를 보여주는 거시적 지도도 필요하다. 인간에 대한 조직신학적 주제들에는 ‘하나님의 형상’, ‘죄론’, ‘영∙혼∙육의 관계’, ‘남성과 여성’ 등등 수없이 많은 주제들이 있다. 이러한 주제들을 조직신학적 관점으로 논의하는 것은 상담을 수행하기 위한 안내도로서는 적절하지 못하다.

일반 상담과 목회를 접목시키려는 세 번째 조류는 목회상담의 근거로서 성경에서 제시하는 바 통전적(統全的) 인간관으로부터 전개해 가는 것이다.2) 즉 연역적 접근법이다. 이 접근은 성경적 인간관을 전인(全人)이라는 상담학적 용어로 번역해서 사용하고자 한다. “전인적 인간”이란 육체와 영혼의 통합적인 존재로서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상호간의 관계, 인간의 삶의 장을 마련해 주는 자연과의 관계, 그리고 우리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인 사회조직과의 관계를 어떻게 유기적으로 조합하며, 창조적으로 성장을 이루어 내는 제 영역을 포함시키는 말이다(장명수, 1993: 31). 인간을 하나님과 사람, 자연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바르고 친밀하고 풍성한 총체적 관계성의 맥락에서 보고 목회상담을 전개해 나가는 대표적인 사람은 클라인벨의 성장상담이다(Clinbell, 1979/ 이종헌 역, 1988). 즉 그는 “전인건강”이라는 저서에서 인간을 철저하게 관계적 관점에서 보고 정신∙정서적인 차원, 몸의 건강 차원, 친밀관계 차원, 일과 직업차원, 쉼과 여가의 차원, 세상과 자연과의 차원, 그리고 영성적 완성차원이라는 칠 차원적 전인건강 패러다임을 제시하였다(Clinbell, 1992/ 이종헌, 오성춘 역, 1995). 그의 이러한 관계적 패러다임은 영성신학에서 보는 인간관 패러다임(김광률, 1992)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3) 이와 같은 연역적 접근은 목회상담이 지향해야 할 시각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한가지 한계점은 “전인”이라든지 “통전적 인간”이라는 용어가 성경적인 용어가 아니라 타학문에서 빌어다 쓰는 것이므로 목회현장에서 기독교인들에게 쉽사리 이해되는 말이 아니라는 데 있다. 더구나 클라인벨은 자신의 목회상담의 체계를 세우는데 있어서 통전적(統全的) 인간에 대한 이미지들만을 열거할 뿐 어떤 과정을 거쳐 그가 말하는 통전적 인간관에 도달했는지 상세한 논의가 부족하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총론은 있으되 각론이 빈약하다는 것이다.

연구자는 이러한 선행연구의 한계점을 고려하면서 지금까지 논의된 일반 상담심리학적인 인간관 패러다임을 모두 포괄할 수 있는 통전적 인간관 패러다임을 성경의 용어에서 찾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의 전체적인 지도를 가지고 일반 상담에서 개발된 방법들을 주체적으로 목회 상황에 맞게 사용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인간관은 모든 상담이 기본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것으로, 무엇이 문제인지를 진단하는 리트머스 용지와 같은 역할을 한다. 즉 인간관은 상담이론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비단 상담학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실천적인 학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후크마는 ‘인간에 관한 문제는 오늘날 우리 시대가 당면한 가장 중대한 문제들 중 하나이다’라고 한다(Hoekema, 1994/ 류호준 역, 1995: 9). 다시 말하여 인간에 관해 깊이 생각할 수록 우리는 인간론이 인간의 행동 양식에 관해 매우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간이 무엇인가’에 관하여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이미 ‘인간은 어떠한 행동을 취해야만 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행동과 운명은 그들의 유물론적 인간관 속에 이미 내포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인간관이 중요하기 때문에 철학자, 사회학자, 심리학자, 정신 의학자, 윤리학자, 사회 활동가, 소설가와 극작가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주제에 나름대로 답하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Hoekema, 1994/ 류호준 역, 1995).

개인적인 상담 이론을 구성할 때 상담자들이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할 것은 그들 자신의 인간관이다. 안창일(1987: 8)도 인간관의 중요성에 동의하면서 ‘상담자들은 기본적으로 바람직한 삶을 만드는데 필요한 가치관, 태도 그리고 신념에 대해 깊은 탐구를 해야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따라서 이 논문의 목적은, 목회상담의 정체성 정립의 한 시도로서 성경적인 인간관을 “하나님 형상”이라는 관점에서 연구하여 적용하려는 데 있다. 어떤 목적지를 향해 가는데 작은 샛길과 번지수까지 상세하게 기록된 지도(地図)가 반드시 유용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지점만을 표기한 거시적(巨視的) 지도가 더 유용할 때가 있다. 이 논문에서는 성경이 말하는 인간관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 기술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인간에 관한 전체적 윤곽을 그려내어 목회상담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거시적(巨視的) 좌표(座標)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2. 연구 방법




인간에 대한 관점은 보는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하고 복잡한 것이다. 인간을 정신이나 몸 또는 사회적 관점과 같은 단 한가지 관점에서만 보더라도 그 내용이 무궁무진하여 한 편의 논문에 모두 기술 할 수 없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특정 상담에서 말하는 인간이해를 상술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인간을 어떤 측면에서 보는지, 그 관점을 고찰하고 종합하는데 일차적인 관심이 있다.

이 연구는 문헌연구로서 본 주제와 관련된 논문과 단행본들을 도서관 인터넷 검색사이트를 통하여 조사한 후 가장 관련성 높은 도서들을 점검독서 할 것이다. 그 중에서 인간관을 직접 취급하고 있는 기본 문헌을 상세히 검토하여 상담학의 인간관 패러다임을 분석한 다음 마찬가지 방법으로 신학에서의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해석사(解釈史)를 고찰하면서 그 패러다임을 분석하여 양자를 비교, 종합 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 방법적 개념으로 Khun(1996)이 제창한 "패러다임"(paradigm)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것이다.

제 1장에서는 논문의 공동체적, 사회적 그리고 학문적 요구를 분석하면서 효과적 목회상담을 위해 성경적이고 통전적인 인간관 정립이 왜 필요한지 문제를 제기하고 논문의 연구 방법을 기술하고자 한다. 제 2장에서는 패러다임의 개념을 좀더 상술하면서 본격적으로 상담에서 가정하는 인간관 패러다임을 분석하고자 한다. 제 3장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신학적 고찰들을 성경의 용례에서부터 현대의 신학적 논의에 이르기까지 ‘패러다임의 변천’을 중심으로 고찰한 다음 2장에서 분석된 일반상담의 인간관 패러다임과 비교하겠다. 끝으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해가 일반 상담의 인간관 패러다임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살피고,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이해가 목회상담에 시사하는 바를 상술할 것이다.




II. 일반상담의 인간관 패러다임




1. 패러다임의 개념과 인간관




“패러다임(paradigm)”이란 말은 본래 다양한 관념을 서로 연관시켜 질서 지우는 체계(体系)나 구조(構造)를 일컫는 말이다. 범례를 뜻하는 그리스어 “파라데이그마(paradeigma)”에서 유래하였고 현대 사상에서는 1962년 토마스 쿤(Thomas Kuhn)이 “과학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 라는 책에서 사용한 개념으로서 본래 과학분야에서 과학의 역사와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서 도입한 뒤 여러 분야의 학문에 널리 쓰이게 되었다. Kuhn(1996)에 따르면 어떤 과학영역의 전문적 과학자 공동체를 지배하고, 그 구성원 사이에 공유되는 사람을 보는 방법, 문제를 삼는 방법, 문제를 푸는 방법의 총체가 “패러다임”이다. 그는 어느 시대나 그 사회의 과학자 공동체는 하나의 패러다임에 기초하여 인식론적, 사회제도적 자연탐구를 함으로 인식론적 측면과 사회학적 측면을 지닌 개념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하나의 패러다임의 지배 아래 이루어지는 과학적 활동이 통상과학이라고 하였다. 패러다임에 위기가 찾아오면 이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생겨나며, 다시 통상과학(Normal Science)이 시작되기까지의 활동을 이상과학(Anormal Science)이라고 하였다. 이같이 과학의 역사는 일관된 축적∙진보∙발달의 역사라기보다 몇몇 패러다임이 교대하는 역사라고 하여, 이러한 패러다임 교대현상을 “과학혁명”이라고 하였다. Kuhn의 패러다임 개념은 과학자 공동체 규모에 따라 구체적인 하나의 이론이 될 수 있는 한편 그 시대의 시대정신도 될 수 있으므로, 그 정의의 애매함이 비판되자 패러다임을 학문모형으로 바꾸어 개념을 정리하려 하였다. 그러나 70년대에 들어와 때마침 이문화적(異文化的) 방법론이 발달하자 민족문화의 비교뿐 아니라 이제까지 연속적 발달∙발전으로 여겨져 온 개인과 사회의 역사에 대한 비연속적인 이문화의 병렬로 보는 발상을 지지한 패러다임이 생물학을 비롯하여 역사학∙경제학∙인류학뿐 아니라 문학사∙미술사∙정치사 등 여러 영역에 사용되었다. Kuhn(1996)의 패러다임 이론에 따르면 과학자들은 객관적인 사실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시대적 영향을 받은 일종의 공동체적 틀(패러다임: 사물을 인식하는 공동체적으로 공유된 인식의 틀)을 가지고 본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과학계라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교육되어지는 과정 속에서 그 패러다임에 젖어들게 되는데, Evans에 따르면(Evans, 1993/ 이창국 역, 1993)이러한 현상은 심리학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중요한 것은 한 시대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이 변화된다는 것이다. 대전제로부터 시작된 논리적 추구를 통해서 계속된 분류작업과 연관작업이 지속되다가 어떤 사물이 대전제와 일치되지 않은 경우가 발견되면 이 대전제보다도 더 큰 전제가 필요하게된다. 그래서 새로 발견된 대전제보다 한 단계 위에 있는 대전제를 만들게 되는데 이것을 패러다임의 변화라고 말한다. 또는 처음에 만들어진 대전제와는 전혀 다른 대전제가 발견되었을 때 이 두 가지의 대전제를 묶을 수 있는 새로운 전제를 만들었을 경우 이를 패러다임의 변화라고 한다.

이 논문에서 패러다임이라는 말은 ‘사물을 인식하고 설명하는 준거 틀로서 사람들 간에 공유되고 상당기간 지속되어 온 것’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하고자 한다. 패러다임과 비슷한 말로 “관점(view point)”이라는 말이 있으나 그것이 패러다임과 다른 점은 공동체성과 지속기간에 있다. 즉 관점은 개인적인 것으로 반드시 공동체적일 필요가 없으며 상당기간 지속적일 필요도 없다는 점에서 패러다임과 다르다. 인간을 보는데 있어서 관점이라는 말을 적용한다면 보는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많을 수 있다. 모든 상담자는 명확히 인식하든 지 못하든지 나름대로의 인간관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이 모든 인간관들을 나열하여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므로 상당기간 공동체에 의해서 공유되고 지속되어 온 인간에 대한 관점들, 즉 패러다임을 다루는 것에 논의를 한정하고자 한다.

다음 절 에서는 일반상담에서의 인간이해를 패러다임의 변천이라는 관점에서 고찰하고자 한다.

2. 인간관에 따른 상담의 분류




상담(相談)이란 말은 개인과 목적에 따라 크게 다르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동의할 수 있는 정의를 내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①상담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來談者)이 ②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相談者)과의 ③대면관계에서, ④생활 과제의 해결과 사고∙행동 및 감정 측면의 인간적 성장을 위해 ⑤노력하는 학습과정이다”(이장호, 2000: 3) 라는 상담의 일반적 정의에서 상담이 성립되기 위한 최소한의 다섯 가지 요소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첫 번째 요소는 상담의 주체(主體)이다. 상담은 반드시 인간이 주체가 되는 활동이다. 이는 다시 내담자와 상담자로 구별된다. 상담의 주체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상담의 유형이 나올 수 있다. 즉 일대 일로 면담하는 개인상담으로부터 그룹으로 진행되는 그룹상담, 매스컴의 발달로 방송을 통한 한 사람의 상담자가 대중을 상대하는 것, 전화를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으로 얼굴을 마주보지 않는 상담 그리고 요즈음 등장한 인터넷의 힘을 빌어 게시판을 통해 익명성이 보장되면서도 공개적으로 진행하는 상담까지 다양하게 분류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형태의 상담이든지 상담은 인간이 주체라는 점에서 변함이 없다.

두 번째 요소는 전문성의 요소이다. 상담은 다른 사람을 돕는 기술로서 고도의 전문적 지식과 숙련이 요구된다. 전문성은 상담의 이론적 배경을 깊이 아는 것을 비롯해서 상담의 방법과 도구에 대한 이해, 기술의 숙련 그리고 건전한 인간관을 모두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상담의 세 번째 요소는 상담관계이다. 상담은 인격적인 주체들간의 인격적인 관계를 전제로 한다. 상담자와 내담자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든지 모든 상담이 주체들간의 관계를 떠나서는 성립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상담은 상담자와 내담자의 인격적인 관계를 특별히 강조하기도 한다. 네 번째 요소는 해결해야 할 과제의 요소이다. 특히 무엇이 문제인가를 진단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 상담이론이 전제로 하는 인간관이이다. 정신분석 상담은 내담자가 겪는 문제의 원인이 과거의 억눌린 감정에 있다고 일단 가정할 것이다. 반면, 합리 정서적 요법에서는 잘못된 신념에 있다고 가정할 것이다. 이처럼 모든 상담은 그것이 영적인 문제이든지 정서적, 정신적, 사회적 문제이든지 간에 해결하고자 하는 과제가 있다. 다섯 번째 요소는 상담이 일정한 과정이라는 점이다. 과정이라는 점은 시작과 전개와 끝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정 상담은 위와 같은 상담의 다섯 가지 요소 중 어떤 한 두 가지 요소를 부각하여 명명됨을 알 수 있다.

첫째, 상담의 이론적 특징을 따라 명명되는 경우이다. 1984년도에 출판된 “상담의 이론적 접근”(이형득 외, 1998)은 11가지의 카테고리로 일반상담의 조류들을 분류하였다. 즉 1) Freud의 정신분석적 접근, 2) Adler의 개인 심리학적 접근, 3) 실존주의적 접근, 4) Rogers의 인간 중심적 접근, 5) Kelly의 개인 개념구성체적 접근, 6) Perls의 형태주의적 접근, 7) Bern의 의사거래 분석적 접근, 8) Ellis의 합리적 성서적 접근, 9) Eilliamson의 이성적 지시적 접근, 10) 행동주의적 접근 그리고 11) Glasser의 현실치료적 접근 등이다. 1986년에 출간된 대학카운슬러 연구 협의회의 “상담의 이론과 실제”(중앙적성 출판부, 1986)에서도 상담을 그 이론적 특성에 따라 1) 이성적 지시적 상담, 2) 합리적 정서적 상담, 3) 교류분석과 상담, 4) 행동주의 상담, 5) 게슈탈트 상담, 6) 정신분석적 상담, 7) 인간중심의 상담, 8)역설적 상담, 9)상담의 동양적 접근 등 아홉 가지 카테고리로 분류하는데 역설적 상담과 동양적 접근을 추가된 것 외에는 전자와 거의 윤곽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후 출판된 상담심리학 서적 대부분이 이와 같은 분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분류의 특징은 상담학의 명칭 그 자체에 이론적 특징과 강조점이 내포되어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 상담의 대상을 강조하여 명명되는 경우이다. 예컨대 아동상담, 청소년 상담, 노인 상담, 가정 상담, 알코올 중독자 상담 등이 그것이다. 윌슨(Wilson, 1992/ 김창대 역, 1997)은 “상담과 공동체”라는 책에서 1)지역사회 상담, 2)대중상담, 3)상호조력과 자기상담, 4)평신도 상담, 5)환경상담과 같이 상담을 보다 포괄적인 대상에 따라 분류하고 있다. 대상에 따른 상담의 분류는 인간 집단의 다양성만큼이나 수없이 많은 갈래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 상담의 접근 상담의 매체(媒体)를 강조하여 명명하는 것이다. 예컨대 놀이를 중심 기술로 아동들을 돕고자하는 놀이치료를 비롯하여 책을 상담적인 관점에서 사용하여 정신적, 정서적, 사회적 부적응 문제를 돕고자 하는 독서치료(Bibliotherapy), 음악치료(Music therapy), 사이코 드라마(Psycho Drama), 향 요법, 원예치료, 자연요법 등이 그것이다.

네 번째, 상담을 통해 해결해야 할 과제에 초점을 맞추어 명명된다. ‘기독교 상담시리즈’ 책임 편집자인 콜린스는 30개의 기독교 상담 카테고리를 설정하면서 과제중심의 상담을 다수 편성하였다. 예를 들면 성 상담, 이혼 상담, 약물중독 상담, 자존감, 거식증과 대식증, 죄의식, 불임∙임신∙입양 상담, 갈등해소와 상담, 분노와 적대감 등이다. 이러한 상담의 종류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문제만큼이나 다양할 것이다. 상담의 요소 중 다섯 번째 요소인 과정중심으로 상담을 분류할 수 있는데 대개 단기 상담, 중기 상담, 장기 상담, 혹은 단 일회 면접으로 끝나는 상담으로 분류된다. 이들 요소들은 서로 얽혀서 또다시 많은 종류의 상담으로 분류될 수 있다.

끝으로, 인간관에 기초하여 상담학을 분류할 수 있다. 상기의 상담학에 대한 다섯 가지 분류 준거들은 상담의 자체적인 패러다임의 구성 요소에 근거한 것으로써 인간관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으나 직접적으로 특정 상담이 전제하는 인간관에 따른 것은 아니다. 시중에 나와있는 대부분의 상담심리학 개론서들은 이론적 특성에 따른 분류법을 사용하고 있다. 물론 이론에 따른 분류 속에는 인간관에 따른 분류를 포함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저자들이 자신의 분류체계에 대한 설명없이 여러 준거들을 혼용하여 사용하고 있다. 반면 다른 개론서들과는 달리 이장호는 상담학을 분류하는데 있어서 인간관을 준거틀(frame work)로 사용하고 있다. 그는 다양한 상담학의 조류들을 주의 깊게 분석한 다음 1)정신분석적 심리치료와 2)인간중심의 치료 3)행동수정 및 4)인지적 접근 등 네 가지 카테고리로 상담학을 분류하였다(이장호, 2000: 93). 즉 이들 네 가지 접근들은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 중에 어떤 요소를 보다 더 강조하느냐에 따라서 접근방법들이 달라진다. 이장호는 인간의 삶의 구성요소를 이성적(理性的)인 면과 이와 대칭이 되는 감성적(感性的)인 면, 그리고 행동적(行動的)인 측면과 이와 대칭이 되는 통찰적(洞察的)인 측면 네 가지로 구분하여 하나의 좌표를 만든다.(그림1 참조) 모든 상담이론들은 인간의 이 네 가지 요소들 중 무엇을 더 강조하느냐에 따라 네 개의 영역 어디엔 가에 위치해 있다. 예를 들면 행동치료는 이름 자체에서도 드러나듯이 인간의 행동을 강조하면서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상담이므로 제 3면에 위치한다. 인간의 어떤 요소를 보다 더 강조하느냐에 따라 같은 영역 안에서도 서로 위치가 다를 수 있다. 즉 현실치료는 행동수정과 같은 영역에 위치하면서도 행동수정보다는 이성적인 면을 강조하므로 이성적인 축에 치우쳐 위치한다.

통찰과 이성을 강조하는 대표적인 상담은 “합리-정서” 모델이며, 로저스의 인간 중심적 상담은 통찰과 감정적인 면을 강조하는 대표적인 이론으로 분류한다.(2면) 인간의 감정과 행동을 보다 강조하는 형태주의 상담은 4면에 위치한다.

물론 어떤 이론이 인간의 특정 요소를 강조한다고 해서 다른 요소들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내담자의 무의식이나 느낌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생각과 행동에도 얽혀있다. 또한 행동에 주로 문제가 있는 것 같아도 사고방식과 감정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따라서 한 내담자의 상담에서 행동∙사고∙감정 및 통찰 등의 측면으로 다양하게 접근할 수 있다. 이장호의 분류는 특정 상담들이 접근하는 방향성을 보여준다.(그림1참조)

위와 같은 이장호의 인간관 중심적인 상담학 분류모델은 일반상담의 인간관 패러다임을 분석하는데 하나의 좋은 기준이 된다. 상담학적 인간관의 다양성은 동시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 발전과정을 거쳐왔다. 다음 절 에서는 그 흐름들을 역사적으로 고찰해 보고자




통찰적인 면







1면







2면












교류분석




실존주의적








합리적∙

정서적



인간중심적








정신분석적








이성적∙

지시적
개인개념

구성체적
개인심리학적









이성적인 면










감정적인 면














인지치료






형태주의






현실치료














행동수정










3면









4면








행동적인 면






한다.




<그림1>네 가지 요소에 의한 접근별 상대적 위치(이형득, 1998; 이장호, 2000)













3. 인간관에 따른 상담학의 관점변화




Kuhn이 밝힌 대로 과학의 혁명은 패러다임(paradigm)의 변화와 맞물려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상담의 역사는 인간관의 변화와 맞물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상담심리학이 전문적인 학문 분야로서 그 정체성을 확립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인 1950년대 초반부터이다(이장호, 2000: 8). 따라서 1950년대 초반을 기점으로 20세기 전반기에서 1950년까지를 상담심리학의 태동기로 보고 1950년대는 전문적 상담심리학의 정체성 확립기로 본다. 1960년대의 특징은 양적 팽창이 두드러지며 1970년대는 예방적 교육적 상담이 강조되었다. 이처럼 짧은 시간에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룬 상담심리학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설개업을 선택하는 상담심리학자가 급증하는 경향성을 보인다. 그리고 1980년대 이후의 상담심리학의 두드러진 특징은 이론의 수렴(収斂)화 혹은 절충적 상담방법에 대한 심리학자들의 선호가 눈에 띄게 증가한 것이다(이장호, 2000).

인간의 행동을 처음 과학적인 방법으로 연구한 학자들은 1879년 독일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심리학 실험실을 개설한 Wundt와 1912년 미국의 행동주의 심리학자 Watson이다(이훈구 외, 1986: 17). 행동주의적 관점에 의하면, 인간의 어떤 현상이라도 그것에 과학적으로 접근할 수 없으면 의미가 없는 것이다. 행동주의에서는 체계적 관찰 및 엄격하게 통제된 실험을 통해 관찰과 측정이 가능한 행동을 연구하는 것이 과학으로서의 심리학의 본업이며 인간을 제대로 이해하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의 문제를 접근하는데 있어서 행동주의는 이전과 다른 패러다임을 사용하였다. 행동주의자들은 인간 행동이 자연현상과 마찬가지로 일정한 법칙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행동은 여러 가지 변인들에 의해 결정되므로, 이 변인들과 행동을 지배하는 법칙을 밝혀 낼 수 있다면 인공위성의 궤도를 예언하고 수정할 수 있듯이 인간의 행동도 예언하고 수정할 수 있다고 본다(이형득, 1998: 327). 초기 행동주의 인간관을 요약하면 첫째, 인간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상태로 이 세상에 태어난다. 둘째, 인간은 환경의 자극에 대해 반응하는 유기체이다. 셋째, 인간의 행동은 유전과 환경의 상호작용에 의해 형성된다. 넷째, 인간의 행동은 학습된 부정적 혹은 긍정적 습관으로 구성된다. 다섯째, 인간의 행동은 생활환경이 제공하는 강화의 형태와 그 빈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이형득 외, 1998). 행동주의 인간관은 후기에 들어서 인간의 자유의지와 의지적 선택을 강조하는 경향이 늘어났다. 즉 인간의 행동은 부분적으로나마 환경을 창조할 수 있고 환경도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행동주의는 인간을 환경과 능동적으로 상호 작용하는 존재로 보며 특정 환경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 자극(Stimulation)과 반응(Response)이라는 도식으로 인간의 행동을 관찰하여 일반화하고자 했다.

인간에 관한 또 다른 중요한 패러다임이 1938년 프로이드(Freud)에 의해 주창되었다. 프로이드 이전의 정신적 질병에 대한 접근은 무당, 성직자, 외과의사들에게 맡겨져 오다가 프로이드 이후의 정신분석에서 비로소 체계적인 심리학적 방법이 사용되었다(이장호, 2000: 10). 즉 주술, 기도 및 두개골 수술 등에 의존하거나 불치병으로 처리하여 정신질환자들을 비인간적인 수용소에 방치해 두던 풍토에서, ‘무의식적 갈등의 분석’을 통해 마음의 병이 고쳐질 수 있다는 새로운 패러다임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프로이드는 신경증의 원인과 치료에서 심리적 요인의 중요성을 강조한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

정신분석학은 인간에 대해 결정론과 무의식이라는 두 가지 개념을 기본으로 가정하고 있다. 인간의 행동은 어렸을 때의 경험에 따라 크게 좌우되며, 빙산의 대부분이 물 속에 잠겨 보이지 않듯이 마음의 대부분은 의식할 수 없는 무의식 속에 잠겨 있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 형성된 무의식적 갈등을 자유연상이나 꿈 해석 등의 방법을 통해 의식화시킴으로써, 내담자로 하여금 자신에 대한 통찰을 얻도록 하는 과정이 바로 정신분석적 치료이다(이장호, 2000: 40). 프로이드는 인간의 행동이란 기본적인 생물학적 충동과 본능을 만족시키려고 하는 욕망에 의하여 동기화 되는 것으로 보았다.

프로이드 심리학이 왕성하게 전파되고 있을 때 정신분석의 비인간성을 지적하면서 칼 로저스는 1942년 인본주의 심리학을 주창하였다. 정신 분석이 비인간화된 의학적 모형의 방법이고, 내담자는 자율능력이 있는 전인적 존재이기 때문에 분석 및 해석이 아닌 비 지시적인 방법으로 대해야 한다고 로저스는 주장했다. 로저스의 인본주의는 ‘인간은 자발적으로 인생의 의미를 추구하는 자유인’이라는 당시의 실존주의 철학과 함께 상담 분야에 획기적인 영향을 주었다(이장호, 2000). 로저스의 인간중심의 상담학에서 보는 인간관은 확실히 인간을 보는 또 다른 패러다임으로서 이 때부터 정신분석 및 정신의학에서 주로 사용하던 ‘환자, 정신질환’ 등과 같은 개념보다는 ‘내담자’, ‘자기실현’ 등과 같은 비 의학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개념들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로저스에 의하면 개체 인간은 자신 속에 자기를 이해할 수 있고, 또한 자아개념과 기본적 태도를 변경시킬 수 있는 방대한 자원들을 갖고 있다. 이러한 자원들은 상담자와 내담자 사이의 촉진적인 심리적 분위기만 제공되면 개발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로저스는 상담의 방법이나 기법보다는 상담주체로서 내담자와 상담자의 “상담관계” 자체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패러다임과 차별화 된다. 이처럼 내담자를 환자라는 패러다임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본인 스스로가 문제를 해결해 갈 수 있는 주체적인 인간으로 볼 것인가 혹은 인간을 분석대상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상담자와 내담자가 맺는 관계의 질에 초점을 맞출 것인가 하는 점은 내담자가 지닌 문제를 진단하고 처방하며 상담관계를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다.

1970년대 중반까지 상담과 심리치료 분야에서의 대표적인 접근은 정신분석적 치료, 인간중심의 치료 및 행동수정이었다. 그러다가 1970년대 들어오면서 인간의 이성적(理性的) 측면을 강조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강세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합리-정서 치료(Rational-Emotional Therapy: RET)는 1950년대부터 알버트 엘리스(Albert Ellis)에 의해 연구되다가 1962년 책으로 출간되었다(대학 카운슬러 협의회, 1987; 이장호, 2000). 이 이론의 선구적 사상은 고대의 스토아(Stoa) 학파의 에피쿠루소(Epictetus)의 사상인 ‘인간은 사물자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물에 대해 갖는 관념에 의해서 괴로움을 받는다’ 라는 말에 기초를 두고 있다. 합리-정서적 접근은 인간이 합리적이고 올바른 사고를 할 수도 있고, 비합리적이고 왜곡된 사고를 할 수도 있다고 가정한다. 즉, 인간은 자기를 보호하고, 행복을 누리고, 사고하고, 말하고, 사랑하며, 다른 사람과 친분을 맺고, 스스로 성장시키고, 자아를 실현하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음과 동시에 스스로를 파괴하고, 일을 뒤로 미루고, 실수를 계속 반복하고, 허황한 미신에 빠져들고, 참을성이 없고, 완벽 하려 하며, 자기를 비난하고, 자신의 상장가능성을 회피하려는 경향성도 가졌다고 본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의 인지, 정서 그리고 행동의 과정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자신이 늘 사용하던 형태와는 다른 형태의 반응을 선택할 수 있으며, 자신의 정서적 혼란을 그대로 방치해 두지 않을 수 있으며, 자신의 여생을 편안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스스로를 훈련시킬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심리적 장애의 근원을 인지과정에서 밝히려고 하는 인지적 접근은 인간의 사고가 정서 및 행동을 중개하거나 선도한다는 전제를 설정하고 있다. 즉 인간의 행동과 정서적 반응 이면에는 상황에 따른 자동적 사고가 있고 이 자동적 사고를 지배하는 중간믿음들이 있으며 중간믿음들은 그 사람의 핵심믿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가정한다. 따라서 치료는 비합리적인 핵심적 믿음을 합리적이고 건강한 것으로 대체하면 부적절한 행동과 감정을 치유할 수 있다고 본다. 요컨대 인지적 심리치료의 정의는 인간의 사고과정을 수정∙변화시킴으로써 정서적∙행동적 장애를 없애는 접근방법이다. 현대에 들어서 인지 치료적 접근은 강세를 보이고 있으며 대단히 다양한 분야에 적용하면서 수많은 계보를 가지고 있다.4)

위와 같은 상담학적 인간의 패러다임은 한번 등장하여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약점들이 수정 보완되면서 나름대로 꾸준한 발전을 거듭한다. 따라서 인간관에 대한 다른 패러다임이 등장했다고 해서 이전의 패러다임이 쓸모 없거나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호 보완적으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떤 한 패러다임을 독단적으로 고집하는 태도이다. 예를 들면 프로이드가 정신분석적 관점으로 인간을 보기 시작했을 때 그 이전에는 설명할 수도 치료할 수도 없었던 정신적 질환들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패러다임으로 인간이 봉착한 삶의 의미의 문제라든가 영적인 문제까지, 모든 문제를 효과적으로 진단하고 처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종교의 영역까지 심리적인 현상으로만 이해하려고 했던 그의 심리적 환원주의는 명백히 패러다임 자체의 한계임을 지적할 수 있다(박노권, 1999). 인간 존재는 실로 다양하여 어느 한가지 패러다임으로 모든 문제를 진단하고 처방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의 관점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필연적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이 요청되는 것이다.




4. 일반 상담의 인간관 패러다임에 대한 평가




앞 절에서 이장호가 제시한 인간관 중심의 상담분류에 근거하여 상담학에서 인간을 보는 관점이 변화되어온 역사를 고찰해 보았다. 이는 인간 존재가 이성과 정서, 행동 그리고 통찰의 측면을 동시에 지닌 통합적인 존재임을 시사한다. 1980년대 이후의 상담심리의 특징은 어떤 한 이론에 집착하지 않고 절충적이고 통합적인 방법을 선호하는 것이다(이장호, 2000). 본래 제 학문의 분야들은 미분화된 상태였다가 20세기에 이르러 극도로 세분화되었다. 학문이 세분화되면 전문성을 확보할 수 있는 장점은 있지만 전체를 조망하지 못하는 치명적 단점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고 20세기 후반에는 학문들이 다시 통합되는 추세에 있다. 세분화가 극심했던 의학 분야가 의학의 분파주의, 의사들의 지나친 필요 이상의 권위주의 그리고 인간을 통합적 인격체로 보지 못하고 비인격화시키는 문제 등을 자성(自省)하고 ‘전체성의 의학’(Wholistic Medicine)을 강조하는 쪽으로 돌아서고 있는 것이 좋은 예이다. 통합의 분위기는 비단 학문 내에서 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학문과 학문사이에서도 학제간(interdisciplinary) 연구가 활발해 지고 있다. 예컨대 몸과 마음을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보고 치료하는 ‘심신상관의학’의 출현 등이 그것이다. 상담학에서 절충적인 접근이 우위를 점하게 된 것은 학문에 대한 이러한 패러다임 전환과 통합적인 인간관의 필요성과 맞물려 있다. 상담학에서 통합적 인간관을 대표하는 말은 “전인(全人)”, 혹은 “통전적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통전적 인간관을 인간에 대한 상담학의 기본적 패러다임으로 채택할 때 이장호의 인간관 패러다임은 평면적인 것으로서 입체적이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차원을 보충할 필요가 있다. 즉 관계적 요소와 시간적 요소 그리고 몸의 요소이다.

첫째, 인간의 관계적 관점이다. 사람은 본질상 관계적 존재로서 환경과 사람과 공동체 그리고 자신과의 관계, 더 나아가 초월자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즉 관계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상담학적 인간관이 필요하다. 인간의 관계 자체에 보다 초점을 맞추는 상담적 접근은 집단상담과 가족치료을 들 수 있다. 집단상담은 개인 상담에서도 부분적으로 사용되어 왔던 상담의 한 방법이었으나 집단은 ‘개인들의 단순한 총합’ 이상의 실체라는 점을 발견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집단상담이란 “작은 수의 비교적 정상인들이 한 두 사람의 전문가의 지도아래 집단 혹은 상호관계성을 토대로 하여 신뢰할만하고 수용적인 분위기 속에서 개인의 태도와 행동의 변화 혹은 한층 높은 수준의 개인의 성장발달 및 인간관계 발달의 능력을 촉진시키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역동적 대인관계의 과정”(이형득, 1997) 이라는 정의에서 시사하듯이 집단 상담은 하나의 상담적 접근 방법이면서 동시에 상담의 주체이기도 하다. 집단 상담은 인간과 인간이 맺고 있는 관계의 힘을, 즉 그룹의 역동성(group dynamics)을 상담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으로서 그 밑바탕에 인간을 관계적인 존재로 보는 인간관이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족치료는 인간을 관계적 패러다임으로 보는 또 다른 상담적 접근으로서 내담자를 ‘가족관계 속’에서 파악하고자 한다. 가족 관계는 그들이 알건 모르건 간에, 체계(system) 자체이다(Wynn/ 문희경 역, 1998). 가족치료는 개인보다는 관계 자체에 주목하면서 치료 자체를 돕기 위해 가족의 관계성을 사용한다. 따라서 가족치료는 치료받고자 하는 문제가 가족 체계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발견하고, 면담을 통해 가족 구성원들 서로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를 깨닫게 하는 목표를 포함한다(Wynn/ 문희경 역, 1998). 내담자가 지닌 문제는 단순히 그 자신의 내면적 문제의 차원을 넘어서 가족내의 역학(dynamics)과 관련되어 있다. 모든 상담들이 인간의 관계적 요소를 중요하게 취급하며 대인관계의 개선은 직접, 간접적으로 중요한 과제중 하나이다. 그러나 집단 상담이나 가족치료적 접근은 인간관 패러다임 자체가 관계적이며 관계 자체를 상담의 주된 접근통로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다른 패러다임들과 차별 화된다. 손봉호(1996)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을 관찰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누구인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자신을 객관화시켜 관찰하는 나는 누구인지, 관찰 당하는 내가 진짜 나인지 아니면 관찰하고 있는 내가 진정한 자신인지 알 수 없고, 관찰하고 있는 나를 알기 위해서는 또 다른 제 삼의 관찰자를 상정하게 되어 무환순환의 오류에 빠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인간이 누구인가를 아는 길은 관계 안에서, 특히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비로소 가능하다고 한다. 이처럼 관계적 요소는 통전적 인간관을 정립하는데 반드시 고려해야 할 중요한 패러다임이다.

두 번째 통전적인 인간관 패러다임의 요소로서 고려해야 할 점은 “시간적 요소”이다. 인간은 시간적 존재이다. 특정 상담학은 과거와 현재, 미래 중 특정 시간에 초점을 맞출 수 있다. 정신분석학은 과거에 초점을 맞춘다. 지금 여기에 초점을 맞추는 상담도 있다. 실존주의적 상담처럼 미래와 희망을 보다 강조할 수도 있다. 내담자의 과거 현재, 미래 중 어디에 보다 강조 점을 두느냐 하는 것은 문제를 보는 시각뿐만 아니라 상담의 방향을 설정하는데 매우 중요한 준거점이다. 현재성을 강조하는 대표적인 상담이론으로 Glasser의 ‘현실치료적’ 접근을 들 수 있다. 현실치료적 접근은 내담자의 문제를 과거의 경험에서 찾으려는 상담학파의 위험성을 지적한다. 즉 그렇게 함으로써 내담자가 현재 자신의 책임과 현실을 직면하는 대신 자신의 무책임과 회피적인 행동을 과거의 경험으로 합리화할 수 있는 구실을 마련해 준다는 것이다. 현실치료적 접근을 하는 상담자들은 내담자가 현실, 즉 그들의 현재 행동을 직면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이형득, 1998). 이 밖에도 ‘현재’에 초점을 맞추는 상담은 많은데 형태주의적 접근과 행동주의, 그리고 이성을 강조하는 접근들이 여기에 속한다.

세 번째 이장호의 패러다임에서는 몸의 관점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Peursen(Peursen, 1978/ 손봉호, 강영안 역, 1985)은 인간을 몸의 관점에서 새롭게 보는 패러다임을 지지하면서 몸은 생리학자가 해부 대에서 분석∙연구할 수 있는 대상에 머물지 않고, 본질적으로 다른 무엇이라는 사실에 몇몇 사상가들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매우 고무적이고 옳은 일이라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몸은 사람됨의 상황을 표현하는 상징이다. 몸은 곧 인간이 육체적인 존재임을 말한다. 이 사실에 주목한 철학자들은 몸을 인간 존재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해한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이 육체적인 존재라는 것은 그가 미완성의 존재이며, 세계를 향해서 열려있고, 이 몸을 매개로 타인과 주변 세계와의 상호 관계의 장을 열며, 이를 통해서 비로소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 설 수 있음을 보여준다(손봉호, 강영안 역, 1985). 몸과 영혼의 관계에 있어서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입장이 있어왔다. 데카르트는 몸과 영혼이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보았고 플라톤은 몸에 대한 영혼의 우위성을 역설하였다. 반면 포에르 바하는 플라톤의 관점을 완전히 뒤집어서 인간을 물질적인 측면에서 해석한다. Peursen은 다음과 같은 포에르 바하의 글을 인용한다.




포에르 바하에 의하면 영혼은 그 자체로 떼어서 보면 하나의 추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영혼은 몸에 붙어 있을 때, 비로소 ‘어떤 무엇’이 될 수 있고, 몸의 표현으로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 자체로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뼈나 근육과 더불어 영혼은 인간의 개인성을 표현한다. ..... 그러므로 철학적 심리학에서 스스로 존재하는 이성적인 존재로 일컫는 영혼보다도 우리의 호흡 작용이 더 본질적이다(Peursen, 1978/ 손봉호, 강영안 역, 1985:63).




이는 과거 서양의 사상적 전통들이 몸을 사물 중의 하나로 보고 정신보다 열등한 것으로 취급했던 패러다임을 뒤집어 보는 것이다. 몸은 세계를 보는 하나의 창문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 우리가 세계 안에서 방향을 잡을 때, 출발점이 되는 이른바 몸의 도식에 관해서 언급한다. 일반적인 의미의 방향설정은 우리의 삶과 동행하는 몸의 도식으로 인하여 비로소 가능하다. 인간과 뗄래야 뗄 수 없는 몸이 우리가 한 공간 안에서 방향을 설정할 때, 출발점 구실을 할 뿐만 아니라, 인간 존재의 기본 구조에 속한다는 것이다.

‘몸’이라는 창을 통하여 인간을 다시 보고자 하는 새로운 인간관 패러다임은 곧 상담학에도 영향을 미친다. 특히 현상학자 중 한 사람인 훗설은 지금까지의 철학이 인식의 주체로서 의식을, 인식의 기초로서 선험적 주관으로 가정해온 패러다임을 뒤엎고 인생의 주체로 “생활세계(Living World)”를 인식의 주체로 상호주관(間主観)을 주장하였다. 이는 우리가 무엇을 인식할 때에 그 일차적인 자료는 필연코 몸을 통해서 지각되는 자료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의식이란 신체를 중심으로 한 생활세계의 체험이다. 이처럼 몸을 인간관의 패러다임으로 채택한 현상학자들 중 유럽의 실존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은 상담학적 접근이 펄스(Perls)의 형태주의적 접근이다(이형득1998. p.197). 형태주의적 접근에 따르면 인간은 신체, 정서, 감각, 그리고 지각 등 각 부분의 기능이 서로의 관련 가운데서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의 전체로서 존재한다. 모든 유기체는 하나의 전체로서 완성된 형태(gestalt)를 이루려고 하는 경향성이 있다. 이러한 경향성은 기능에 대한 항구적이고 보편적인 하나의 법칙인데 이와 같은 형태의 생성을 막는 것은 유기체에 유해한 것이며 그 미완성의 상태는 전체성 혹은 완전성을 이루는 완성의 상를 갈구하게 된다고 본다. 한 인간이 모든 국면들의 어떤 형태를 형성하여 종결할 수 없을 때, 인간의 성격은 전체성이 파괴되고, 전체를 구성하여 있는 각 부분들은 의미를 잃게 된다고 보았다. 심리적 건강을 유지하기 위하여 유기체 내의 균형이 유지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이형득, 1998: 199).

몸은 발달심리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사람은 자신의 몸에 따라 사물을 보는 관점과 자아에 대한 인식, 타자 인식이 현저하게 다르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상의 점들을 요약하면, 일반상담에서 인간을 보는 관점은 전인적(全人的)이고 통전적(統全的)인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이를 다시 분석하면 이형득 및 이장호가 제시하는 패러다임에다 ‘관계’와 ‘시간’, 그리고 ‘몸’의 관점을 추가하여 보다 입체적이고 포괄적인 인간관 패러다임을 구성할 수 있다. 통전적 인간이해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의 행위나 문제 속에는 인간존재를 구성하는 이 모든 다양한 요소들이 긴밀하게 상호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연구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 이해가 상담에서 지금까지 발견한 인간에 대한 모든 패러다임들을 포괄할 수 있다고 가정하며 다음 장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이해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III.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이해




인간에 관하여 기독교는 매우 풍부한 신학적 유산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인의 신앙과 윤리의 표준인 성경은 논문 형식을 빌어 이야기하지 않지만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을 내포하고 있다. 성경은 인간의 다양한 측면들을 드러내고 있으며 수 천년간의 기독교 역사를 통해 논의된 인간이해는 또한 매우 다양하고 방대하여 일일이 다 논의하기조차 힘이 들 것이다. 성경적 인간관을 고찰하기 위해 전체를 일일이 논의하는 것은 한 편의 논문에서 다룰 수 있는 범위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축적이고 종합적인 성경적 인간관은 목회상담의 이론적 정립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후크마 (Hoekema, 1994/ 류호준 역, 1995)는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인간이해야 말로 기독교 인간론의 심장부’라고 강조한다. 즉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로 성경적 인간관을 집약(集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이해되어 왔다. 먼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하여 성경적 용례를 살펴보고 이어서 이에 대한 신학적 해석의 역사와 최근의 신학적 논의들을 차례대로 고찰하고자 한다.







1.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용례(用例)




1) “형상”에 대한 성경의 일반적 용례(用例)



“형상(形狀-像)”이라는 말은 개역 한글판 성경을 기준으로 70회 정도 사용되었다.5) 이 말은 수종(數種)의 히브리어가 번역된 단어이지만 주로 히브리어 “첼렘(!l,x)”과 헬라어로는 “에이콘(εικων)”을 번역한 말이다. 영어에서 “Image”나 “Figure”와 병행하는 말로서, 구약에서는 나무, 동물, 곤충, 달 , 별, 우상 등 사물의 외형을 가리키는 말로 대부분 사용되었다. “형상”이라는 말이 사물의 외양이 아닌 본질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 경우는 신약에서 ‘율법은 장차 오는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히1:3)라는 말씀에서 한 번 사용된다. “형상”의 용례에 있어서 중요한 점은 그것이 인격적인 존재와 관련되어 사용될 때이다. 이는 다시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첫째는 사람의 인격과 관련해서 사용하는 것이다. 즉 타락한 아담은 ‘일백 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다’(창5:3). 두 번째는 “형상”을 하나님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관련하여 사용하는 것이다. “형상”으로 번역되어 있는 히브리어 가운데 하나님의 존재와 관련되어 사용되는 말은 “첼렘(!l,x)”이다. 이 말이 70인 역 구약성경(LXX)에는 “에이콘(εικων)”이라는 말로 번역되어 있다. 특히 사도 바울은 “에이콘(εικων)”을 하나님의 형상 및 그리스도의 형상과 관련지어 자주 언급하고 있다.6) 이 점은 다음절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2) 하나님과 관련된 “형상”의 용례(用例)




성경에서 하나님은 분명히 형상을 지니신 인격적 존재로 자신을 계시하신다(민 12:8, 신 4:12, 시 106:20, 고전 11:7 등등). 그러나 하나님 자신을 사람이 어떤 형상으로든지 형상화시키는 것은 다른 우상의 형상을 만드는 것과 더불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출 20:4, 신 5:8, 사 40:18).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도 없고 만들 수도 없다. 박준서(1989)는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말씀은 대단히 놀라운 말씀임을 지적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단지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형상을 본떠 직접 창조하신 인간을 통해서만 드러난다. 즉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존재이다(창 1:26-27, 5:1, 9:6, 약 3:9).

신약성경에서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장 온전히 드러내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신다(골 1:15, 히 1:3, 고후 4:4). 그러므로 예수께서,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겠다고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달라고 요청하는 제자 빌립에게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라고 대답하신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우리가 본받도록 미리 예정하셨다(롬 1:23)7).

이처럼 “하나님의 형상” 개념은 신∙구약을 관통하는 중요한 개념이며 특히 성경적인 인간관을 고찰하는데 핵심적인 개념임을 알 수 있다.




3) 인간의 타락이 하나님의 형상에 미치는 영향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의 타락과 더불어 파괴되었는지 아니면 보존되어 있는지 여부는 오랜 신학적 논쟁의 주제이다. 인간의 타락이후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로마 카톨릭 교회는 “형상”과 “모양”을 구분하여 형상은 이성 능력과 자유의지로서 타락에 의해 비록 손상되었으나 어느 정도 남아 있고, 모양인 불멸성과 완전성만 상실되었다고 보았다. 그런데 “모양”은 성례전을 통해서 회복된다는 것이다.

루터는 하나님의 형상의 문제에 있어서 중세교회와는 전혀 다른 견해를 주장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구분해 온 그때까지의 전통을 거부했으며, 따라서 인간 창조에 있어서 인간의 이성이나 자유의지와 같은 어떤 자연적인 것을 구분할 수 없다고 하였다. 즉 본래적인 “의(義)”는 하나님의 형상과 같은 것으로 구분할 수 없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과 함께 본래적 의(義)는 상실되었다고 하였다. 김균진에 따르면(김균진, 1989: 59) 이는 중세 신학이 인간의 본성으로 간주하였던 자유의지(自由意志)를 완전히 부인하는 것이다. 타락이후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지워졌다는 루터의 견해를 이어 받아 칼빈은 하나님의 형상이 죄로 인해 철저히 이지러지고 쓸모없이 파괴되었음을 강조한다. 타락이 인간의 본성에 미치는 영향이 철저하고 총체적이다. 즉 아담의 죄로 인하여 사람 안에 있던 하나님의 형상은 ‘가령 완전히 없어지고 파괴되지 않았다고 인정한다 해도 그것은 너무나 부패해 있기 때문에 남아있는 것은 소름이 끼칠 정도의 기형물 밖에는 없다’고 말한다(임영철, 1992: 17). 칼빈은 그의 창세기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하나님의 형상의 불투명한 잔여물들이 우리 속에 남아 있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너무나도 손상되고 기형적이 되었기 때문에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구석구석마다 온통 일그러지고 변질되었고 더욱이 이러한 악마저 첨부되었기 때문에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어느 부분도 죄의 전염으로부터 손상을 입지 않은 부분은 아무데도 없다(Hoekma), 1990, 류호준 역, 1995에서 재인용).




인간의 타락이 하나님의 형상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칼빈의 주석적 견해는 성경적 인간론이 일차적 관심은 아니다. 따라서 (Hoekema, 1994/ 류호준 역, 1995)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칼빈의 주장이 일관성을 상실한 경우가 가끔 있다고 지적한다. 즉 형상이 죄로 인해 파괴되고, 멸절 되고, 없어졌다고 말한 경우가 있는 반면, 또 다른 곳에서 그는 형상이 전적으로 파괴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 속에 아직도 하나님의 형상은 발견되어 진다고 가르치기도 하였다.

루터와 칼빈을 위시한 종교개혁자들의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관점은 죄의 심각성을 드러내는 데는 공헌했으나 지금까지의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패러다임 자체를 거부해 버림으로써 여러 가지 문제점을 내포하게 되었다. 즉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상실되었거나 전혀 쓸 수 없이 되었다고 할 때, 타락 이전의 인간과 이후의 인간의 연속성이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창조에 있어서 인간이 가진 특성, 다시 말하여 다른 동물에 비하여 인간만이 가진 특성인 주체성, 책임성, 인격성과 하나님께 응답할 수 있는 존재로 지음 받은 것 자체를 설명할 수 없게된다(김균진, 1989: 60). 때문에 종교개혁자들의 생각은 그 이후 개혁신학에 의해 다시금 수정 보완되어 왔다.

타락 후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사라졌는가 아니면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가 하는 문제는 현대 신학자인들 간에도 여전히 논쟁거리가 되는 것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었다’ 라는 말씀이 성경에 직접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김균진, 1989). 이점은 인간의 타락 기사를 다루고 있는 창세기 3장의 전후 문맥을 살펴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타락 후 하나님으로부터 선포되는 책벌의 내용 중(창 3:14-19) 어디에도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었다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다. 오히려 노아의 홍수 이후 노아와 맺는 계약의 말씀가운데서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린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창 9:6)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임을 타락 후에도 여전히 상기시킨다. 예수께서도 인간의 죄와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었다고 말씀하신 기록이 없다. 오히려 형제에 대하여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라가”라 하여 그 인격을 무시하는 자마다 지옥 불에 들어갈 것을 마태복음 5장 22절에서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직접적으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언급을 하시지 않았지만 그러한 사실을 충분히 암시하고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사람을 무시했다는 것만으로 지옥 불에 들어가는 것은 너무 엄청난 처벌이기 때문이다. 야고보서에도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임을 확인한다.8) 인간이 존엄성을 지니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성경의 증언에 근거한다. 그런데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철저하게 파괴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의 근원을 거부하는 것과 같다(이용호, 1996: 32). 물론 칼빈 역시 하나님의 형상이 죄와 타락으로 인해 완전히 말살되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며 인간의 타락과 죄의 심각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반어법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고찰에서 인간의 타락이 하나님의 형상에 어떤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지만 여전히 성경적인 논의가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있어왔는데 “하나님의 형상”이 매우 다양하게 이해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그 시대의 보편적인 패러다임의 영향을 받으면서 더욱 이해의 폭이 넓어져 왔다고 볼 수 있다. 다음 절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해의 역사를 개관해 보고자 한다.




2. 하나님의 형상 이해에 대한 역사적 고찰




에릭슨(Erickson/ 나용화, 박성민 역, 1993)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견해를 “실재론적 견해들(The Substantive Views)”과 “관계적 견해들(Relational Views)” 그리고 “기능적 견해들(Functional Views)”로 대별하였다. 한편 후크마(Hoekema, 1994/ 류호준 역, 1995) 역시 이와 비슷하게 분류하는데 그에 따르면 지금까지 하나님의 형상은 구조(構造)와 기능(技能) 그리고 관계(関係)적으로 이해되었다. 여기서 에릭슨의 ‘실재론적’이라는 말은 후크마의 ‘구조적’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이므로 양자가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 실재론적 견해들(The Substantive Views)

김균진(1989: 57)에 따르면, 초대교회의 거의 모든 기독교 사상가들이 하나님의 형상에 대하여 실재론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클레멘스(Clemens)9)와 오리게네스(Origenes)10)는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 영혼에서 발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터툴리안(Tertullian)11)과 락탄티우스(Lactantius)12)같은 라틴 교부들은 인간의 육체까지 하나님의 형상과 결부시켰다. 터툴리안에 의하면 죄된 인간도 하나님의 형상이다. 인간은 그의 영혼이나 이성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으며, 영혼이나 이성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타락과 함께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다. 즉 하나님의 형상은 다시 “형상(imago)”과 “모양(similitudo)”으로 구별되는데 타락한 후에 하나님의 “모양”은 상실하였으나 하나님의 “형상”은 상실하지 않았으므로 인간은 의지의 자유와 이성을 지니고 있어 동물과는 구분되는 인간 됨을 지닌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실재론적 견해에 따르면 인간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내적인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초대교회 교부중 한 사람인 이레니우스13)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이란 곧 인간의 합리적이고 자유스런 성품 다시 말해서 타락 시에도 상실되지 않은 성품’을 의미한다((Hoekema, 1994/ 류호준 역, 1995). 즉 이레니우스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습을 구별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타락 이후에도 보존된 측면과 아울러 상실된 측면이 있다고 보았다. “형상”은 아담이 이성과 의지의 자유를 갖춘 존재임을 의미했고, 인간의 이성적인 생각과 덕스러운 행동을 가능케 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이것이 사람 속에 심어져서 본성에서 없어지지 않으며, 우주적이며, 결코 상실되지 않았고 상실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형상은 타락과 관계 없이 존재하는 인간의 본질적 특성이라고 본다. 반면 “모양”이란 말은 아담이 성령(聖霊)의 역사로 말미암아 초자연적인 은사를 누리었음을 의미했다. 아담이 피조물인지라 신적인 완전성과 썩지 않음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멀리 옮겨졌다. “모양”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누리는 초자연적인 은혜로서 이 모습은 죄로 말미암아 파괴되었으며, 가변성이 있는 것이어서 타락함으로 상실되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성령을 받아들임으로서 회복되어 진다고 보았다(이용호, 1996: 11). 비슷한 맥락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형상을 주로 인간의 지성 혹은 이성에서 찾고 있다. 말하자면, 오직 지능이 있는 똑똑한 피조물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합리적인 피조물 안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은 오직 정신(mind)속에서만 발견되어 질 수 있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 안에서보다도 천사에게서 좀더 완전하게 발견되어 지는데 그 이유는 천사들의 성품이 사람들의 성품보다 좀더 완전하게 지성적이기 때문이다(Hoekema, 1994/ 류호준 역, 1995: 66). 인간의 이성을 매우 강조했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상관없이 인간의 타락 후에도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이성이 여전히 남아 있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초대교회 교부들의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실재론적 이해는 카톨릭 교회의 대표적인 견해로 자리 잡았으며 중세의 아퀴나스를 거쳐 현재까지도 부단히 논의되고 있다. 실재론적 견해는 김균진(1989)에 의하면 희랍사상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다. 희랍사상에서 인간의 육체는 눈으로 볼 수 있는 현상의 세계에 속한 허무한 것임에 반하여 인간의 영혼은 “신(神)과 같은 형태의 것”이며 “신적(神的)인 것과 교통”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신들 다음에 가장 신적인 것”이다. 한편 영지주의에 의하면 인간의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요 사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반면 인간의 영혼 속에는 “신적인 불티”가 숨어 있다. 그 속에는 “신적인 실체”가 들어 있다. 스토아 철학에 의하면 신은 곧 이성(logos)이다. 따라서 인간의 이성은 단순히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신적인 것이다(김균진, 1989).

현상과 그 배후의 실체를 나누어 보는 이원론적 관점은 당시의 지배적 패러다임으로서 현상과 실체를 미분화된 상태로 뭉뚱그려 인식하던 패러다임을 극복하고 사물에 대하여 보다 정밀하게 생각하고 체계화하는 것을 돕는 새로운 패러다임이었다. 초대교회의 신학자들은 그러한 패러다임으로 하나님의 형상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나름대로 규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실재론적 입장들은 그 이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들고 나온 신학자들에 의해 강하게 부정되기도 했으나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새롭게 된 성품들에 대해 분명히 지지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글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의 성품의 특징을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엡 4:23-24)으로 파악한다. 내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모습으로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덕목을 제시한다(갈 5:22-23). 그런데 인간의 내적 성품의 요소로서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인격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는데 신학자들은 이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실재론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이해하려고 했던 오랜 기독교 신학적 유산은 목회상담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좋은 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2) 관계적 견해들(Relational Views)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또 다른 지평의 이해가 관계적인 견해들이다. 관계적인 견해에는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적 지평이 있다. 여기서는 두 번째까지를 다루고 세 번째는 기능적 견해로 다음절에서 논의하고자 한다.

김균진에 따르면(1989)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의 지평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사상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14)에게서 뚜렷이 나타난다. 그에 따르면 타락 이전의 인간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러나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형상은 파괴되었으며 본래적 의(義)는 상실되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깨어졌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모양은 상실되었으나 형상은 상실되지 않았다. 타락한 인간도 타락 이전의 인간과 같이 이성과 오성(悟性)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은 그의 이성과 오성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이다.

이와 같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에는 실재론과 관계적 관점이 혼재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후크마(Hoekema, 1994/ 류호준 역, 1995: 95)는 인간이 하나님과 맺는 관계 자체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이해하려는 관점은 현대 신학자 에밀 부룬너(Emil Brunner)에게서 뚜렷하게 드러난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부룬녀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관계성의 모든 영역,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책임성, 하나님과의 교제의 가능성 속에서 발견되어진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실재론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생각했던 인간의 이성은 인간 속에 있는 최고의 것이 아니라 단지 수단에 불과하며 이 수단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진정한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진정한 기능이란 하나님과의 사랑의 교제를 갖는 것을 의미한다. 부룬너는 이처럼 하나님의 형상을 그분과 사람이 맺는 관계성에서 찾으면서도 한 편으로 실재론적 관점을 수용하여 형상을 형식적(formal) 의미와 실질적(material) 의미로 나눈다. 여기서 부룬너가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의 “형식적 측면” 이란 인간의 책임성,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반응 할 수 있는 능력, 하나님께 대해 대답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인간존재의 궁핍성을 의미한다(Hoekema, 1994/ 류호준 역, 1995: 97). 말하자면 형식적 측면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상실될 수 없으며 죄에 의해 무효화되지 않는 것이다. 한편 부룬너가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의 실질적 측면이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피조물 된 인간의 올바른 응답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된다. 형상의 회복은 화목교리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다(Hoekema, 1994/ 류호준 역, 1995: 99).

이처럼 부룬너는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내면에 있는 어떤 본질적 특성으로 보고자 했던 실재론적인 패러다임을 수용하면서도 하나님과 관계 안에서 찾고자 그것을 조명하는 새로운 지평을 확고히 했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관계적 접근은 최근의 신학자 칼 바르트(1886-1968)의 신학에서 나타난다. 그는 인간존재와 그 구조, 그 성향, 그 능력들 등에 관한 그 어떠한 인간론적 묘사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찾으려는 시도, 즉 실재론적 관점을 거절하고 그 대신 창세기 1장 27절 말씀을 주석하면서 사람과 사람이 맺고 있는 관계성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찾고자 한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더라’(창1:27)




위 본문이 너무나도 명백하게 가르치는 내용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형상과 모습은 인간존재가 대면(confrontation) 속에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인간과 인간 즉 남자와 여자 사이의 연결은 대면의 관계를 말한다(Hoekema, 1994/ 류호준 역, 1995: 에서 재인용).




우리가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남자와 여자 사이에 대면의 가능성이 있도록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시며 우리와 “나-너” 관계 속으로 들어가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인간이 동료인간을 향하여 이와 동일한 관계를 수립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태어났다는 것이 곧 그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존재론적 유사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론적 유사성이 있을 뿐이라고 바르트는 말한다. 하나님은 인간이 자기와 언약적 교제를 그리고 동료 인간과도 교제를 나누도록 창조하셨다. 이것을 바르트 자신의 말로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진정한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삶을 살도록 규정지어졌다는 사실은, 인간의 피조적 존재는 만남의 존재라는 사실-“나”와 “너”, “남자”와 “여자” 사이의- 속에 분명한 상응점을 갖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대면 속에 인간됨이 있으며, 이러한 인간 됨 속에 인간의 창조주를 닮은 모습이 있다 (Hoekema, 1994/ 류호준 역, 1995 에서 재인용).




바르트는 교회교의학에서 창세기 1장 1절 말씀의 문학적 형식을 빌어 “태초에 관계가 계시니라”라고 한다. 그 관계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창 1:26) 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바로 삼위 일체 하나님 자신들을 가리키며 이어서 창세기 1장 27절에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것은 바로 삼위 일체 하나님이 맺고 있는 관계로서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것이라고 한다.

관계로서의 하나님 형상이해는 직접적으로 표현되어 있지는 않으나 요한복음에서도 선명하게 볼 수 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다락방 강화를 마치고 제사장적 기도를 하실 때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17:21) 라고 하신다. 즉 제자들이 상호간에 맺는 관계의 원형이 다름 아닌 예수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와 맺고 있는 “관계”이다. 그러한 관계는 단지 제자들끼리만 맺는 인간관계가 아니라,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서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 7:23) 라는 말씀에서 볼 때에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종적인 관계가 함께 어우러져 있다. 한편 사도 바울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 회복의 차원에서만 이해하지 않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회복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글에서 그는 이방인 그리스도인과 이스라엘 유대인이 어떻게 하나되었는지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3:15-16)




3) 기능적 견해들(Functional Views)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기능적 이해는 피조물과 인간의 관계를 창으로 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소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문화명령으로 이해되어 온 창세기 1장 28절의 말씀과 시편 8편 5-6절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 견해는 상당히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데 소시니아스트(Socinianist)15) 들에 의해 제시되었으며 그들의 라코비안 교리 문답서(Racivian Catechism)에 포함되었어 있다(Erickson/ 나용화, 박성민 역, 1993: 103). 그들에 따르면 하나님은 모든 창조물의 주(主)이시기 때문에 인간은 그 나머지 창조 세계를 다스림을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은 실제로 주로서의 하나님의 한 형상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에릭슨(Erickson/ 나용화, 박성민 역, 1993: 105)에 따르면 시편 8장 6절16)의 주석적 의미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의 모습은 무엇보다도 다른 만물과 비교되는, 그의 신과 같은 존귀한 영광 속에서 만물들을 지배하는 주권과 능력에 있다’ 라고 하였다. 성경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낱말은 도덕이나 혹은 어떤 이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이란 오직 세계와 그 속에 있는 만물에 대한 인간의 통치 행위를 언급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박준서(1989)역시 하나님의 형상을 통치의 개념으로 파악한다. 창세기의 배경적인 문화중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고대 기록을 보면, 애굽의 왕은 “신의 형상”이라고 불려 졌다, 특히 주전 17세기 힉소스(Hyksos)시대 이후로부터 주전 300년대 희랍 시대까지 애굽에서 “바로(Pharaoh)”는 애굽의 신인 “르(Re)신의 형상”으로, 혹은 “아몬(Amon)신의 형상”으로, “아툼(Atum)신의 형상”으로 불려진다. 애굽의 기록에서 “신의 형상”이란 신이나 인간의 외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과 왕 사이의 특별한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신의 형상”이 외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그를 남신(男神)인 “오노프리스(Onophris)신과 여신인 이시스(Isis)신의 형상”이라고 동시에 부르고 있다는 점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이는 바로가 남자와 여자의 외양을 동시에 갖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주의 깊게 관찰 한 후 박준서(1989)는 “신의 형상”에 대한 고대 근동의 이러한 어법의 맥락에서 하나님의 형상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능론적으로 결론짓는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피조물에 대한 인간의 통치와 관리를 뜻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다른 피조물을 다스릴 책임과 임무를 위임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연에 대한 통치는 자연의 질서를 유지하고 보존하는 통치가 되어야 하며, 자연의 질서를 파괴하고 자연을 수탈하는 통치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박준서, 1989: 120).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지금까지의 논의들을 베이커(Baker/ 김성웅 역, 1994)는 다음과 같이 좀더 세분하여 다섯 가지의 패러다임으로 정리하였다. 첫째 ‘내적인 특질인 하나님의 형상’, 둘째 ‘하나님-인간이 맺는 관계인 형상’, 셋째 ‘지배권인 형상’, 넷째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게 하는 형상’, 그리고 ‘아들 됨(sonship)인 형상’이다. 그런데 이 모든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보여 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점은, 특히 종교 개혁자들이 강조했는데, 거의 모든 학자들이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3. 최근의 신학적 고찰




최근의 신학적인 논의들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하여 더욱 풍성한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먼저 사람의 몸도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관점이다. 리(Lee, 1983/ 이승구 역, 1996)에 따르면 사람이 그의 몸이고 또 생령(生霊)이라면 하나님의 형상이란 전인(全人), 즉 그의 몸과 영혼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인간의 어떤 특정 요소가 아니라 인간 그 자체로 송두리째 하나님의 형상이다. 다시 말하여 전인(全人)이 하나님의 형상이며 하나님의 형상이 전인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마치 짐꾼이 짐을 진 것과 같은 단순한 하나님의 형상의 담지자(担持者)가 아니 그가 어떤 요소로 구성되어 있든지 그 전체의 모든 요소가 전부 하나님의 형상이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사후에 덧붙여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고서는 한 순간도 있지 않다. 또한 형상이란 하나님의 한 부분이나 하나님의 속성 중 어떤 것의 단순한 반영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은 모든 점에서 하나님을 닮은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가지신 모든 것을 인간도 역시 모두 가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창조적이고 독립적인 방식으로 가지신 것이고 사람은 단지 종속적이고 피조물 된 입장에서 가지고 있을 뿐이다. ((Lee, 1983/ 이승구 역, 1996)는 위와 같이 하나님의 형상의 전인성(全人性)을 강조하면서 결론짓기를 성경 어느 곳에서도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는데 그의 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계시를 알지 못하거나 거부하는 철학은 언제나 경험론이나 합리론, 유물론이나 유심론의 극단 속에 빠지고 만다. 성 염 등(1998: 43)에 따르면 ‘지금처럼 인간의 다면성(多面性)이 연구되는 시점에서도 자아를 영과 육 가운데 한 요소로 환원시키는 유혹이 있지만 우리는 적어도 자신의 정신과 육체에 대해서는 변증법적인 일치를 도모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성경은 육체와 영혼 이 둘을 조화시키는 것이다. 사람은 영혼을 가진다. 그러나 그 영혼은 심적으로 조직된 것이다. 이런 본성에 의해 영혼은 필히 몸 안에 있게 되는 것이다. 육체적이고도 영적인 것이 인간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시간적으로 뿐만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육체가 먼저 만들어지고 그 후에야 생기가 불어넣어 진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관점은 현상학과 같은 철학에서 인간을 몸의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하는 패러다임 전환17)과 맞물려 있다고 보인다. 전통적 기독교의 패러다임들이 몸을 무시하거나 무시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형상을 이해하는 패러다임으로 사용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할 때에 몸의 패러다임은 중요한 관점의 변화이다. 몸의 패러다임은 인간을 통합체로 보는 패러다임을 전제로 하는 것인 바 게슈탈트(Gestalt) 상담의 전제이기도하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또 하나의 현대적 관점은 “공동체 패러다임”이다. 후크마(Hoekema, 1994/ 류호준 역, 1995: 174)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성서적, 역사적 해석을 주의 깊게 고찰한 다음 ‘하나님의 형상이 총체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전체로서의 인류” 안에서이다’ 라고 결론을 내린다. 즉 하나님의 형상은 개체로서의 인간이 아닌 심지어 함께 어울려진 남자와 여자로서의 인간이 아닌, 전체로서의 인류가 비로소 온전히 발전된 하나님의 형상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은 너무나 부요(富饒)한 것이기에 한 인간으로서는 그가 제 아무리 엄청난 재능을 부여받았다 하더라도 온전하게 그것을 드러내 보일 수 없다. 그 형상은 그 깊이와 부요(富饒)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흔적들이 시간과 공간상으로 하나님이 행하신 수많은 일들 속에 흩어져 있듯이 하나님의 형상 또한 우리들의 이전과 이후에 걸쳐 존재하는 총체적인 전 인류 가운데서만 보여질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형상은 불변부동의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현실들 가운데서 그 자체를 드러내며 전개시켜 나간다는 것이다((Hoekema, 1994/ 류호준 역, 1995)

이어서 후크마는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공동체적 패러다임을 지지하는 학자로 리차드 마워(Richard Mouw)의 견해를 소개한다. 마워에 따르면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위한 신학적 토의 과정 중에서 이루어진 괄목할 만한 제안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형상의 “집단적” 차원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즉 어느 한 개인이나 한 그룹이 하나님의 형상과 이에 포함되는 모든 것을 온전히 지니거나 그것들을 완전하게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집단적으로 다시 말하여 공동체적으로 소유되어 지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의 공동체성은 사도 바울의 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에베소서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고린도전서 12장에서는 성도들 상호간의 올바르고 긴밀한 유기체적 관계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 공동체는 완성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이 거하실만한 처소가 될 만하게 지어져 가고 있다(엡 2:20-22). 하나님의 형상을 공동체적 패러다임에서 이해하는 것은 개인적인 관점과 확실히 그 차원이 다른 것이다. 즉 개인들의 집합은 항상 단순한 산술적 합계 그 이상이라는 점이 집단역학에서 분명히 밝혀진 바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목회상담은 반드시 공동체적 지평을 고려해야 한다고 로드 윌슨은 말한다(Wilson, 1992/ 김창대 역, 1997). 즉 우리는 전적으로 개인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공동체 중심적인 상담 접근법이 필요하다. 이렇게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에 관하여 성경이 강조하고 있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윌슨은 ꡔ상담과 공동체ꡕ라는 그의 책 서문에서 ‘기독교적 관점에서나 또는 세속적인 관점에서의 많은 문헌들이 공동체와 개인간의 갈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문헌들을 상담영역에 접목시킬 필요가 있다. 목사들이나 일반 상담자들은 모두 공동체(共同体)의 중요성과 그것이 치료과정에 가지고 있는 힘을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한다(Wilson,1992/ 김창대 역, 1997: 12). 성경은 상담의 공동체적 지평의 풍부한 자원보고(資源宝庫)이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공동체적 이해와 집단 상담이나 가족치료와 같은 일반상담은 공동체적 패러다임을 공유하고 있다.

세 번째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최근의 신학적인 논의는 종말론적 관점이다. 후크마(Hoekema, 1994/ 류호준 역, 1995)에 의하면 우리가 사람에 관해 생각할 때 우리는 반드시 현재적 상태에서의 인간뿐만 아니라 미래적 상태의 인간을 바라다 보아야한다. 과거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창세기 3장 이전에서만 찾으려고 하였다. 즉 ‘타락하기 이전의 본래적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가’라는 점에 관심의 초점이 있었다. 그러나 창세기 1장과 2장의 짧은 본문에서 하나님의 형상의 본래 모습을 도출해 낸다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고 논란의 여지가 많다. 하나님의 형상을 과거적으로 이해하려 했던 것은 시간에 대한 패러다임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시간의 흐름을 과거-현재-미래의 방향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종말론적 관점에서 시간은 오히려 종말적 미래로부터 현재로 다가와서 과거로 흘러간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볼 때 하나님의 형상은 창세기 1-2장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이루신 종말의 지평에서 탐구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종말론적 패러다임을 적용하게 될 때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해를 창세기 3장 이전에서만 찾으려고 했던 한계를 극복하여 신∙구약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형상을 이해하는 텍스트가 될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의 종말론적 실체로서 부활의 몸과 연결시킨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의 미래는 영화롭게 된 부활의 몸, 다시 말해서 온전하게된 하나님의 형상의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바로 그 성경이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회개치 않으며 불신앙으로 하나님에 대해 계속적인 반항 속에 살아가는 자들의 미래는 영원한 형벌로서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을 입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형상을 종말론적으로 이해하는 패러다임은 목회 상담의 인간관 이해에 있어서 내담자의 과거나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 관심을 가지도록 도전한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나면서부터 소경 된 사람에게 저가 소경 된 것이 자신의 죄 때문인지 부모의 죄 때문인지를 제자들이 묻는다. 자신의 죄란 현재의 인과응보(因果応報)적 관점에서 소경을 보는 것이고 부모의 죄 때문이란 과거의 인과응보(因果応報)적 관점에서 그를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둘 다를 거부하시고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요9:3)라고 말씀하신다. 즉 그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장차 기여할 미래의 관점에서 그의 “소경 됨”을 해석하신다. 그러므로 후크마도 힘주어 강조하듯이 기독론적 인간관의 최상을 보려면 최초에 창조되었을 때의 인간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오히려 미래에 새롭게 되어 질 그 인간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구원을 통해 창세기 3장 이전의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우리 인간을 돌려놓으려는 것이 아니라 타락 이전의 아담보다 더 높은 곳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아담은 여전히 그의 죄없음과 복된 상태를 잃을 가능성 속에 있었던 존재였다. 그러나 영화롭게 된 성도들은 더 이상 그렇게 될 수가 없는 존재들이다. 아담은 죄를 짓지 않을 수도 따라서 죽지 않을 수도 있는 존재였으나 영화롭게 된 성도들은 죄를 지을 수도 없고 따라서 죽을 수도 없는 존재들이다. 즉 도저히 상실될 수 없는 이러한 완성이야말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이 향하고 있는 필연이다((Hoekema, 1994/ 류호준 역, 1995). 만약 하나님의 형상이 종말론적인 것이 아니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애초부터 아담을 예수 그리도의 부활한 몸과 같은 몸으로 만드셨을 것이다. 인간에 대한 종말론적 패러다임을 목회 상담에 적용할 때 정신분석과 같은 과거 중심적인 패러다임과 현재성을 강조하는 상담들의 패러다임의 한계를 극복하고 보완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여 종말론적 하나님의 형상의 패러다임을 취할 때 목회상담은 원래의 건강을 회복하는 치료적인 차원과 건강한 사람들 더욱 성숙하도록 돕는 성장의 차원을 모두 포괄할 수 있게된다

끝으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결론적 고찰은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지닌 어떤 속성이나 보유하고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사람”이 바로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후크마의 글을 좀 더 상세히 인용하고자 한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벌카워의 견해를 앞서 살펴보면서, 나는 헤르만 바빙크를 인용한 일이 있었다. 바빙크는 말하기를, 성경에 의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거나 보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그 전체성(entirety)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고 했다. 이 말이 뜻하고 있는 바는,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에게 어쩌다 덧붙여진 부수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하나님의 형상은 계속 우리가 한 인간으로 존재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그런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간으로서 존재하는데 반드시 필수적인 것이라는 주장이다(Hoekema, 1994/ 류호준 역, 1995: 119).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전체성으로 보는 패러다임은 대부분의 현대 목회상담학적 인간관의 특징인 “통전적인 인간관”, 혹은 “전인적 인간관”과 그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통전적 인간이해란 인간의 모든 차원들-몸, 마음, 영혼-이 하나로 결부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여 통전적 인간(whole being)은 기본적으로 영, 육, 혼이 깨어있는 사람으로 자신에 대한 객관적 자아의 능력을 가지고 자기 인식을 하며, 자신의 삶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실현해 나가는 사람이다(구미리암, 2000: 201). 이처럼 성경이 계시하는 인간은 통전적인 존재가 분명하지만 이러한 인간관이 목회상담에 적용되기 위해서는 다시 스펙트럼으로 분석하여 구성요소들을 밝히고 그 요소들간의 상호 역학관계를 규명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적인 인간관으로서 통전적 인간관을 제시하는 선행 연구들은 실제 내담자가 지닌 문제들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처방하는데 어려움이 있어 보인다. 전체를 보았다고 해서 문제가 있는 부분을 정확하고 세밀하게 본다는 의미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모든 요소-영, 혼, 육, 관계 및 지위 모두를 포함하는-를 있는 그대로 포함하는 하나님의 형상이해를 수용하면서 각 요소를 깊이 있게 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형상의 제 요소들을 분석하는 작업이 불가피하다.

IV.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이해가 목회상담에 주는 시사점




1. 통합적 패러다임이 주는 유익




지금까지 상담학의 패러다임의 변천과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해를 그 패러다임의 변천을 중심으로 고찰해 왔다. 각 관점이 강조하는 점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논의해 온 바를 요약해 보면 다음 도표와 같다.




관 점
일반 상담
하나님의 형상

인간의 내면적 관점
통찰의 측면
실재론적 이해

이성적인 면
실재론적 이해

감정적인 면
실재론적 이해

관계적 관점
없음
영성적 형상이해

인간관계의 역동적 측면
나-너 관계적 형상이해

환경과의 관계의 측면

(잘 기능하는 인간)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인간이해

공동체적 관점
집단역학적인 면

(집단상담, 가족치료)
교회/인류 공동체로서의 형상이해

시간적 관점
과거∙현재∙미래 중 한가지
미래 지향적

(종말론적)

몸의 관점
몸과 마음의 통합체
영∙혼∙육의 통합체

통전적 관점
전인/통전적 인간관
하나님의 형상

모델
매우 추상적
구체적: 예수 그리스도

<그림2> 인간에 대한 일반 상담과 "하나님의 형상"의 패러다임비교

신학은 수 천년년 동안 긴 역사를 두고 그 패러다임이 비교적 천천히 변화되어 온 반면 상담학에서는 패러다임의 변화속도가 넉넉히 잡아도 1세기 어간에 매우 빠르게 전개되어 왔다. 인간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상담학보다는 신학이 훨씬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특히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해석의 역사 속에 인간을 이해하는 다양한 패러다임이 녹아 있음을 보았다. 즉 상담학과 신학 두 학문은 인간에 대하여 연구하는 방법, 근거(references), 사용하는 개념 그리고 그 내용이 상이할 지라도 인간을 보는 패러다임은 함께 맞물려 있다. 인간의 문제를 개인이 지닌 심리적이고 내적인데서 원인을 찾고자 하는 모든 개인 심리학의 패러다임은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만이 지닌 이성이나 도덕성과 같은 어떤 특별한 내적 요소에서 찾으려했던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실재론적 관점”의 패러다임과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 성경은 인간의 내면세계의 올바른 질서에 대하여 대단히 풍성한 자원을 제공한다. 성경은 상담의 인간관 패러다임인 이성과 감성, 그리고 통찰에 관한 풍성한 자원들과 무엇이 건강한 것인지를 충분히 알려준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내면세계의 건강과 관련된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에 있어서 기능론적인 관점은 상담학에서의 “잘 기능하는 사람”과 같은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행동치료는 잘 기능하는 사람이 되도록 부적절한 행동을 교정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그 궁극적인 목표가 “올바로 기능하는 사람으로서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비전을 가질 때 더욱 포괄적이고 강력한 요법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또한 일반 상담의 치료목표는 궁극적으로 내담자로 하여금 일상 생활 속에서 잘 기능토록 돕는 차원을 포함하고 있다.

관계적 패러다임은 모든 상담의 기초로서 깔려 있는 것이다. 상담 상황에서 내담자-상담자 관계를 강조하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종류의 상담에서 관계는 핵심적인 요인이다. 상담자가 내담자와 맺는 수용적이고 친밀하여 상호 신뢰하는 관계 자체만으로도 치료의 효과가 있음을 칼 로저스는 그의 비 지시적 상담 모델에서 보여준다. 하나님과 사람, 그리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서 “하나님의 형상”이해는 “관계”를 핵심적인 요소로 설정하는 상담에 매우 풍부한 통찰들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현대의 신학적 논의들에서 보이는 인간관 패러다임과 상담의 인간관 패러다임들은 양자 중 어느 것이 먼저인지 우열을 가리기 힘들 만큼 비슷한 시기에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이분법적으로 구별하던 전통적 사고방식을 거부하고 몸의 관점에서 인간을 재해석하려는 철학적 패러다임은 상담학과 신학에서 동시에 드러난다. 현대에 있어서 양자는 모두 인간의 몸과 정신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지 않고 통전적인 통일체로 인식한다. 한편 하나님의 형상의 공동체성은 상담 중에서 그룹상담이나 가족치료와 그 패러다임을 공유한다. 성경은 공동체에 관한한 그 어떤 상담학 책보다 강력하고 풍부한 자원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가정과 교회라는 공동체를 친히 세우셨고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 역시 손수 세우셨다.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는 모두 공동체적 맥락에서 말씀되어 진 것이다.

인간을 보는 시간적 패러다임 역시 인간이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모든 상담은 나름대로 시간 관을 가지고 있다. 즉 인간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강조하는 시간이 있다. 정신분석 치료는 현재나 미래보다 과거에 보다 관심을 가진다. 예컨대 프로이드는 과거 결정론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현재, 여기에 보다 초점을 맞추는 상담요법들이 있는가 하면 미래의 희망을 강조하는 상담이 있다. 과거나 현재, 그리고 미래적 관점 모두에 대해 성경은 충분한 근거(references)들을 제공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최근의 신학적 논의에서 보았듯이 하나님의 형상은 종말론적 관점에서 보는 것이 보다 성경적이며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풍부한 자원들을 가지게 된다.

끝으로 최근에는 상담학과 신학 모두에서 통합적이고 통전적(integrated) 그리고 전체적(wholistic) 인간관 패러다임이 지배적임을 보았다. 이는 지금까지 개별적으로 발견되어 온 패러다임들이 다시 하나로 통합된 것이다. 그러나 몇 개의 패러다임들이 하나로 통합되어 완벽한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발전되었다 하더라도 그 이전의 패러다임들이 폐기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상담도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무수히 다양한 요소들을 동시에 다룰 수 없거니와 또 그렇게 접근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반드시 효과적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잘 통합된 패러다임이 기여하는 것은 상담자 자신의 좌표를 올바로 설정하고 다른 접근들과 상호 협력적으로 상담사역을 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이다. 즉 하나의 공통된 밑그림을 가지고 함께 작업하는 것이 가능케 된다. 그리고 프로이드가 성적인 에너지의 흐름으로 인간의 모든 문제와 심지어 종교적인 경험까지 심리적인 것으로 환원하고자 했던 패러다임 우상을 극복할 수 있게 해 준다.




2. 목회상담의 조류들과 “하나님의 형상”




그동안 목회상담은 일반 상담의 기술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상담학적 개념들을 그대로 수용하여 적용해 왔다. 몇 가지 모델들을 을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정신분석적 모델: 이 모델에서는 목회 상담 대신에 “목회심리치료(Pastoral psychotherapy)”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목회심리치료란 정신치료의 목회적 적용방법으로 개인의 내면 세계에 숨겨진 과거의 상처, 억압된 감정과 갈등, 성장과정의 기억들을 탐색하고 치료하여 그의 인격에 전인적, 근원적 변화를 일으키는 심층적, 장기적인 도움의 과정이다(박윤수, 1996: 9). 다시 말하여 목회심리치료는 개인으로 하여금 영성을 중심으로 전인성(全人性)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그 진행을 가로막고 있는 내적, 혹은 외적 장벽들을 적절한 심리치료 기법으로 제거함으로써, 보다 효과적으로 치료목표에 도달하도록 도와주는 치료의 과정이다(박윤수, 1996). 흔히 쓰이는 ‘심층목회상담’, ‘치유상담’, ‘목회심리치료’와 같은 의미로 이해된다.

(2) 인간관계 중심의 모델-Family ministry: 관계적 인간관 패러다임에 기초한 상담과 목회를 접목시킨 모델이다. 대표적인 것은 가족치료가 있다(Wynn/ 문희경 역, 1998). 가족치료를 목회에 접목시키는 모델에서는 교회 자체를 가족체계라는 관점에서 접근한다(Wynn/ 문희경 역, 1998). 확대가족으로서의 교회는 외로운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고, 약한 사람들의 힘을 돋구어 줄 수 있고, 절망한 사람들을 도와 줄 수 있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다. 그것은 가족들이 최고의 상태일 때 그들의 구성원들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다. 가족치료는 가족을 하나의 전체 단위로 취급하여 가족 구성원들이 상호 작용하는 체계를 고려하는 치료법이다(Wynn/ 문희역 역, 1998: 37). 치료는 하나의 상관체계(a relational system)로서 가족에 초점을 맞춘다. 이러한 가족치료가 적용된 목회사역이 가정사역(Family ministry)이라고 볼 수 있다. 가정사역자로서 목회자는 교회 안의 세 가지 가족을 역학적 관점에서 다룰 수 있어야 한다. 즉 목회자 자신의 가족과 성도들의 가족 그리고 확대가족으로서 교회공동체이다. 프리드만의 가족치료에 대한 다음과 같은 개관에서도 관계적 인간관 패러다임이 잘 드러난다.




이 가족체계 이론에서는 목회자가 내담자(문제가 있는 사람)를 상담할 때, 그 내담자만을 상담의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던 사람들(예를 들면 부모, 배우자, 자녀, 친구, 직장 동료 등)을 함께 상담한다. 목회자는 이들의 관계를 관찰하면서 그들의 수평적인 관계에만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의사소통 방법, 권위의 패턴, 의사소통의 채널 등을 입체적, 다면적으로 관찰하여 참여와 코치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Friedman, 1985/ 신민규, 정재연 역, 1997: 8).




(3) 이성적 접근모델: 이성적 인간관 패러다임에 기초해 있다. 기독교인의 잘못된 신념을 성경적 신념으로 대체하는 것이 치료의 핵심이라고 보는 제이 아담스(Jay Adams)의 성경적 상담이 일차적으로 여기에 속한다(손경환, 1998). 그러나 손경환은 목회상담에서 성경 외에 어떠한 일반 상담도 수용하기를 거부하였다. 일반 상담의 비 성경적인 요소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데는 일리가 있으나 성경은 방대한 내용, 즉 하나님과 인간과 그리고 자연에 관한 방대한 내용을 지니고 있으므로 이들을 어떤 시각에서 바라 볼 것인가 하는 점을 고려할 때 그의 주장은 너무 극단적으로 치우친 느낌이 있다.

최근 들어 인지 요법을 성경의 진리와 접목시켜 목회상담에 활용하는 흐름이 있다. 맥민(Mcminn, 1983/ 정동섭 역, 1996)은 이 분야를 깊이 탐구였다. 인지요법의 핵심은 부적절한 핵심 신념을 적절하고 진실된 신념으로 바꾸어 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계시된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는 인지요법의 보고(宝庫)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4) 다차원적 관계중심의 모델: 클라인벨의 성장상담이 대표적인 예로서 그는 전인성을 하나님, 대인, 자연, 자신, 일(직업), 사회 등 6개의 차원과 균형 잡히고 조화로운 관계로 본다. 다차원적 관계중심 모델은 관계 중심의 영성 훈련모델과 패러다임을 공유하면서 매우 광범위하고 다양한 형태의 상담 프로그램을 개발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실제 클라인벨의 성장상담 모델은 영성훈련과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5) 목회상담 모델(Pastoral counseling): 목회상담 모델은 일반상담학의 패러다임을 그대로 사용하여 상담을 정의하되 기독교적 독특성을 살리고자 하는 것이다. 이 모델은 오성춘(1993)의 다음과 같은 목회 상담의 정의에 잘 드러난다.

‘목회상담이란, 하나님께 부름을 받고 교회의 위임을 받은 교역자(또는 상담자)가 고난과 위기 가운데서 적색 신호를 보내는 사람들(내담자들)과 만나, 교회를 대신하여 교회의 지원과 자원을 활용하여(교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신앙의 맥락), 일반상담이 계발한 원리들과 실제들을 활용하여(일반상담의 원리와 방법), 주 예수님이 약속하신 풍성한 삶을 발견하고, 전인적인 인간회복(하나님의 형상 회복)을 할 수 있게 돕는 목회의 한 분야이다.’(오성춘, 1993: 23)




오성춘의 목회상담 모델은 이장호가 제시한 일반 상담학의 틀을 그대로 사용하되 목회상담만의 독특한 영역, 즉 교회 공동체라는 목회적 맥락과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라는 신앙의 차원(혹은 영성의 차원) 그리고 상담의 궁극적 목표인 “하나님의 형상회복”을 덧붙인 것으로 볼 수 있다.

(6) 통합적 모델: 구미리암(2000)의 교회공동체를 중심으로 하는 치유목회가 그것이다. 치유목회는 목회 상담과는 구별되는 개념이다. 목회상담이 목회적인 맥락에서 수행하는 상담사역이라면 치유목회는 치유를 주 기능으로 수행하는 목회사역을 가리킨다.




이처럼 목회상담은 일반상담을 나름대로 접목하여 다양한 모델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 모든 목회상담학적 조류들이 지닌 각자 독특한 장점을 충분히 살리면서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궁극적으로 완성된 인간을 지향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통합된 이미지가 필요한데,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이해는 일반 상담학의 인간관 패러다임을 거의 내포하는 포괄적이고 통전적 패러다임으로서 목회상담의 강력하고 성서적인 통합된 인간관 패러다임의 역할을 충분히 해 낼 수 있다고 보인다. 특히 “하나님의 형상”은 신성을 지니셨지만 한편으로 한 인격으로 이 땅을 사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인격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는 점에서 더욱 확실한 밑그림을 가진 셈이다.

원시 사회에서는 인간을 분석적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통일체로 인식하였다. 어찌 보면 통전적 인간관은 원시적인 것과 같은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통전적인 것이 다시 필요에 따라 부분적으로 세분화되어 인간이 지닌 문제를 진단하고 처방하는데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분석력과 종합력을 동시에 갖춘 강력한 패러다임인 셈이다. 지금까지 신학자들은 자신의 관점을 강조하기 위해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할 때마다 기존의 패러다임을 거부하거나 전혀 쓸모 없는 것으로 말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본 논문의 연구 방법론에서 제시했듯이 몇 개의 패러다임을 통합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했다고 해서 이전의 패러다임이 전혀 의미 없거나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그 나름대로 역할과 의미가 있으며 인간을 들여다보는 하나의 준거틀이 될 수 있다. 단지 인간의 모든 면을 심지어 종교적인 측면까지 심리적으로만 해석하려는 독단주의는 경계해야 할 것이다.




3. 본 논문의 한계와 과제




연구자는 목회상담의 인간관을 패러다임이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고찰하여 하나의 통일된 지도를 그려보고자 하였다. 그러다 보니 각 이론들이 지닌 독특성을 지나치게 요약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각 이론들은 나름대로 독특한 이론적, 철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고 또 각자 나름대로의 인간관을 전제로 하여 사람에 대한 많은 통찰들을 지니고 있다. 각 이론들이 지닌 비 기독교적 요소를 가려내어 목회 상담에 주체적이고 창조적으로 적용하는 각론들은 계속해서 부단히 연구되어야 하리라 본다.

이 연구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성경적이고 신학적 개념이 인간에 대한 얼마나 풍부하고 다양한 패러다임들을 함축할 수 있는지 증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각 패러다임들이 함축하는 보다 성경적이고 상담학적 깊은 내용들을 상술하는 데는 이르지 못하고 다음의 과제로 남겨둘 수밖에 없다. 영∙혼∙육의 관계라든가 하나님의 형상의 완벽한 모델로서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완성될 수 있는지 등에 관한 중요한 논제들이 성경과 신학적 유산에 뿌리를 두고 더욱 풍성하게 논의될 것을 기대한다. 특히 핑크에 따르면(Pink/ 서문 강 역, 1989) 인간의 타락은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인 주제이며 성경적인 인간관에서 반드시 다루어져야 할 부분이다. 타락이 하나님의 형상에 미친 영향과 그것을 목회상담학적인 관점에서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은 더욱 깊이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국문 단행본>




구미리암(2000). 치유공동체 신학. 서울: 쿰란출판사.

기독지혜사 편(1994). 교회사 대사전 I, II, III. 서울: 기독지혜사.

김 진(1999). 그리스도인은 인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서울: 뜨인돌.

김광률(1992). 기독교 영성훈련의 이론과 실제. 서울: 한국장로교 출판사.

김광식(1993). 조직신학 I.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김균진(1989). 기독교조직신학 II. 서울: 연세대학교출판부.

대학카운슬러연구협의회(1987). 상담의 이론과 실제. 서울: 중앙적성출판부.

박노권(1999). 종교심리학. 서울: 세종문화사.

박윤수(1996). 목회심리치료와 치유상담의 실제. 서울: 라빠.

박형렬(1994). 통전적 치유목회학. 서울: 도서출판치유.

반피득(1989). 목회상담개론.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배영기(1992). 인간에 관한 종합적 이해. 서울: 도서출판세화.

성 염, 김석수, 문명숙(1998). 인간이라는 심연-철학적 인간학. 서울: 철학과 현실사.

손경환(1998) 심리치료의 허구성과 성경적 상담. 서울: 은혜출판사.

손봉호(1996). 나는 누구인가. 서울: 샘터.

심상태(1989). 인간-신학적 인간학 입문. 서울: 서광사.

오성춘(1993). 목회상담학.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이거룡, 조민환, 정화열, 조광제, 이정우, 홍성욱, 조영란, 박여성, 강성원(1999). 몸 또는 욕망의 사다리. 서울: 한길사.

이장호(2000). 상담심리학. 제3판. 서울: 박영사.

이종성(1986). 신학적 인간학.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이형득 외(1998). 상담의 이론적 접근. 서울: 형설출판사.

이형득(1997). 집단상담의 실제. 서울: 중앙적성출판부.

이훈구, 최정훈, 한종철, 윤 진, 정찬섭(1986). 심리학-인간 행동의 이해. 서울: 법문사.

정혜신(1999). 불안한 시대로부터의 탈출. 서울: 명진출판사.

정화열(1999). 몸의 정치. 서울: 민음사.

하문호(1994). 기초교의신학 III-인간론. 서울: 한국로고스연구원.







<번역서 및 영서 단행본>




Baker, W. In the Image of God a Biblical View of Humanity. 김성웅 역(1994). 인간-하나님의 형상. 서울: 생명의 말씀사.

Burns, J. P.(1981). Theological Anthropology. Paperback. 송인설, 손은실 역(1999). 교부들의 신학적 인간학. 서울: 도서출판 솔로몬.

Carrel, A. Man the Unknown. 류지호 역(1998). 인간, 그 미지의 존재. 서울: 문학사상사.

Clinebell, H.(1979). Growth Counseling: Hope-Centered Methods of Actualizing Human Wholeness. 이종헌 역(1988). 성장상담학.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Collins, G. R. Innovative Approaches to Counseling. The Resources for Counseling Series, v.27. Texas: Word Books Publish. 정동섭 역(1995). 창의적 상담 접근법. 기독교 상담시리즈 1. 서울: 두란노출판사, 1996.

Corey, G. The Rebuilding of Psychology. Fullerton: California State University. 오성춘 역(1990). 상담학 개론. 서울: 장로회신학대학 출판부.

Crabb, L. J. Jr.(1987). Understanding People: Deep Longings for Relationship. Ministry Resources Library,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 윤종석 역(1993). 인간이해와 상담. 서울: 도서출판두란노.

Erickson, M. J. The Doctrine of Humanity & Sin. 나용화, 박성민 역(1993). 인죄론.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Evans, C. S.(1993). Wisdom and Humanness in Psychology: Prospects For a Christian Approach. Christian Literature Crusade. 이창국 역1993). 기독교 심리학 입문.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Friedman, E. H.(1985). Generation to Generation-Family Process in Church and Synagogue. The Guilford Press. 신민규, 정재연 역(1997). 가족체계이론과 목회상담: 세대와 세대.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Hoekema, A. A.(1994). Created in God's Image. Paperback. 류호준 역(1995). 개혁주의 인간론.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Jones, M. L.(1991). Healing and Medicine. 정득실 역(1991). 의학과 치유. 서울: 생명의말씀사.

Kuhn T. S(1996).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Lee, F. N.(1983). The Origin and Destiny of Man. 이승구 역(1996). 성경에서 본 인간. 서울: 도서출판 엠마오.

Mcminn, M. R.(1983) Cognitive Therapy Techniques in Christian Counseling. The Resources for Counseling Series, v.27. Texas: Word Books Publish. 정동섭 역(1996). 기독교상담과 인지요법. 기독교 상담시리즈 27. 서울: 두란노출판사, 1996.

Peursen, C. A. van(1978). Lichaam-Ziel-Geest: Inleiding tot een Wijsgerige Antropolgie. Bijleveld Utrecht. 손봉호, 강영안 역(1985). 몸 영혼 정신: 철학적 인간학 입문. 서울: 서광사.

Pink, A. W. Cleanings form the Scriptures: Man's Total Depravity. 서문 강 역(1989). 인간의 전적타락. 서울: 청교도신앙사.

Ranald M., Jerram B(1987). Being Human: The Nature of Spiritual Experience. IL: Inter Varsity Press. 홍치모 역(1999). 인간-하나님의 형상. 서울: 한국기독학생회 출판부.

Smith, L. W(1997). Of Mind and Body. Henry Holt and Company, Inc.. 박은숙 역(1999). 몸과 마음의 관계. 서울: 김영사.

Wilson, R(1992). Counseling and Community. Texas: Word Books Published. 김창대(1997). 상담과 공동체. 현대기독교상담씨리즈 12. 서울: 두란노 출판사.

Wynn, J. C. Family Therapy in Pastoral Ministry. 문희경 역(1998). 가족치료와 목회사역. 서울: 도서출판 솔로몬.

________(1981). Psychology & Theology: Prospects for Integration. Abingdon/ Nashville. 이종일 역(1992). 신학과 심리학의 통합전망. 서울: 도서출판 솔로몬.

________(1992). Well Being- A Personal Plan for Exploring and Enriching the Seven Dimensions of Life: Mind, Body, Spirit, Love, Work, Play, the Earth . 이종헌, 오성춘 역(1995). 전인건강. 서울: 성장상담연구소.

________(1993). The Biblical Basis of Christian Counseling For People Helpers. NavPress. 안보헌 역(1998). 기독교상담의 성경적 기초. 서울: 생명이 말씀사.

________. The Rebuilding of Psychology: An Integration Psychology and Christianity. Illinois: Tyndale House Publishers. 문희경 역(1996). 효과적인 상담을 위한 크리스찬 심리학. 서울: 요단출판사.

近藤 裕(곤도 히로시). 丙子と医者の 人間学. 환자와 의사의 인간학. 강신익 역(1995). 서울: 도서출판 장락.







<학위논문>




문정순(1993). P전승의 P하나님의 형상. 미간행 석사학위논문. 연세대학교 대학원.

박애란(1985). 목회상담에 있어서의 심리학적 인간 이해와 치유의 한계성. 미간행 석사학위 논문.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안효관(1989). 바울의 인간이해에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 가능성. 미간행 석사학위 논문.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윤성은(1997). Calvin의 신 인식 교리에 대한 고찰: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중심으로. 미간행 석사학위논문.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윤형욱(1995). 하나님의 형상의 관점에서 본 인간성 회복의 문제 연구. 미간행 석사학위논문. 고려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이용호(1996). 하나님의 형상의 관점에서 본 인간성 회복의 문제연구. 미간행 석사학위 논문. 침례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이홍천(1994). Karl Barth와 Emil Brunner의 ‘하나님의 형상’비교. 미간행 석사학위 논문. 침례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임영철(1992). 칼빈의하나님의 형상 이해의 한계와 극복. 미간행 석사학위 논문. 침례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장명수(1993). 상담이론과 기독교영성에 근거한 전인적 인간 형성에 관한 연구. 미간행 석사학위 논문.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

전종열(1996). 심리학적 인간이해와 성서신학적 인간이해에 기초한 목회 상담에 관한 연구. 미간행 석사학위 논문. 순천향대학교 지역사회개발대학원.

최윤식(1990). 목회상담을 위한 인간이해. 한국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일반논문>




권호덕(1993). 하나님의 형상과 현대인의 딜렘마. 신학지남, 238(12), 171-194.

김윤옥(1995). 아시아 영성들의 다양한 경험과 신학적 성찰. 기독교사상, 443(11), 192-196.

박준서(1989).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 관한 성서적 이해. 기독교사상, 369(9), 104-120.

전성용(1982). 하나님의 형상; 인간론, 평신도와 함께 하는 신학연구. 기독교교육, 284(2), 120-126.

최종진(1996). 인간창조에서 하나님의 형상이해: 인성 교육의 목표로서. 서울 신학대 신학과 선교, 21(5), 165-196.

최홍석(1987).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소고. 신학지남, 213(9), 114-130.

Understanding of Human beings as the Image of God and Pastoral Counseling




Lee, Young-Shik

Graduate School Of Interdisciplinary Theological Studies

Han-Nam University

(Supervised by Professor Kim, Kwang-Yool)







Abstract

The purpose of the study is to clarify the integrated and biblical paradigm of understanding human beings. Every counseling has its own understanding of human beings as the foundation of the counseling theory. So it is very essential for pastoral counselors to know what the Bible said about men or women.

The study was carried out by the method of paradigm analysis. "Paradigm" is the concept Thomas Khun adopted in his book entitled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According to him scientists do not see things objectively but through the "paradigm" which is a way of understanding things, as shared together.

The study consists of four chapters. In the first chapter, I dealt with the purpose and the method of this study. In the second chapter, I dealt with the concept of paradigm as the way of understanding human beings. And the paradigms of the representative counsellings were analyzed. In the third chapter, the paradigms of "the Image of God"(imago-dei) were examined historically from the biblical age to the present time. Finally, in the fourth chapter, the study shows the integrated and biblical paradigm for the effective pastoral counseling, which encloses all of the others.

As the result of the study, I found that "the Image of God" contains all the paradigms that are shown partly in general counselings. They are as follows: 1)Individual view point, 2)Relational view point, 3)Community view point, 4)Time view point, 5)Body view point, 6)Integrated view point. Finally I have Jesus Christ as the best model of "the Image of God"



<한국어 초록>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이해와 목회상담


모든 상담은 이론에 기초해 있고 그 이론의 핵심은 인간관이다. 따라서 목회상담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성경적이고 통전적인 인간관을 정립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본 논문은 성경에 근거하면서도 목회상담의 밑 그림이 될 수 있는 하나의 통전적 인간관 패러다임을 연구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성경의 인간관 연구를 위한 핵심적인 방법론으로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paradigm) 개념을 도입하였다. 쿤(Khun)에 따르면 과학자들은 사물을 관찰하고 실험하는데 있어서 있는 그대를 개관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과학자들 사이에 공유된 패러다임을 가지고 본다. 과학자들뿐만 아니라 상담가들이나 신학자들 역시 그들이 학문하는 방법과 말하는 내용은 다르지만 한 시대의 패러다임을 공유하고 있을 것이라는 것이 본 논문의 기본적 가정이다.

제 1장에서는 논문의 공동체적 사회적 그리고 학문적 요구를 분석하면서 문제를 제기하고 논문의 연구 방법을 기술한다. 제 2장에서는 패러다임의 개념을 좀더 상술하면서 일반 상담에 있어서 인간관의 패러다임 어떻게 변천하였으며 이에 따라 어떻게 다양한 상담이론들이 등장했는지 고찰하였다. 제 3장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신학적 고찰들을 성경의 용례에서부터 현대의 신학적 논의까지 패러다임의 변천을 중심으로 고찰한 다음 2장의 일반상담에서의 인간관 패러다임과 비교하였다.

끝으로 제 4장에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해가 일반 상담의 모든 인간관 패러다임을 포괄할 수 있는 성경적 개념임을 보이면서 그것이 목회상담에 주는 시사점들을 기술하였다.

다른 일반 상담의 모든 인간관 패러다임들을 포괄하는 “하나님의 형상” 개념은 다음과 같은 인간에 대한 관점들을 내포하고 있다. 즉 1) 인간을 보는 개인적인 관점, 2) 관계적인 관점, 3) 공동체적 관점, 4) 시간적 관점, 5) 몸의 관점, 6) 통전적 관점 등이다.

성경은 이 모든 패러다임들이 조화롭게 통일된 실제 모델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